打捺文 土器

백제토기 출현은 기원전후

吾心竹--오심죽-- 2010. 9. 3. 12:29

“백제토기 출현은 기원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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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백제 유적 발굴과 관련해서 전문가들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있다.

백제유적임이 틀림없는 데도 보고서 등에는 심심치않게 ‘백제토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백제유적인 데도 백제토기가 없다는 것이다. 왜일까. 이유는 고고학계 통설 때문이다.

◇백제인데 백제토기가 없다=1980년대 몽촌토성 발굴을 계기로 그곳에서 발굴된 토기를 바탕으로 백제토기의 형성과 발전 기틀이 확립됐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 연구자들은 ‘국가단계의 백제유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백제토기’로 정의했으며 시대는 3세기 후엽이었다. 이것이 통설로 자리잡았다. 그 이전의 토기들은 이른바 ‘원삼국 토기’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국가단계의 백제유역’이란 3세기 중·후반을 말하는 것으로 연대로는 고이왕(AD 234~286년) 대이다. 고이왕대가 비로소 ‘국가체로서의 백제성립기’라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절묘하게도 이병도 박사의 기존 국사학설과 부합되었으므로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됐으며 몽촌토성은 자연 한성백제(BC 18~AD 475년)의 왕성으로 지목됐다.

박순발 교수 등은 ‘백제토기’의 형성 시점을 이른바 흑색마연토기(표면을 깎거나 다듬은 뒤 까만색으로 칠한 토기)의 출현으로 보았다. 흑색마연토기의 어깨부분의 음각문양이 중국의 삼국말~서진(西晋)대에 걸친 고월자(古越磁) 문양과 흡사하다고 보고 3세기 후엽 말께(AD 280년 이후)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백제토기 탄생은 기원전후=그러나 최근들어 이같은 정설은 1997년부터 시작된 풍납토성 발굴로 인해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최근 열린 동양고고학연구소 주최 ‘서울 풍납동 백제왕성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백제토기의 ‘성립시기’는 타날문 토기(打捺文·격자문이나 새끼줄 문양 등을 넣은 토기)가 출현하는 기원전후이며 ‘발전시기’는 이른바 연질무문토기(회색마연연질토기)가 나타나는 AD 2세기 무렵”이라며 기존학설을 수정했다. 이른바 ‘백제토기’는 ‘흑색마연토기’가 아니라 ‘타날문 토기와 회색마연연질토기’라는 것이다.

신희권씨는 박순발 교수 등이 ‘국가단계의 토기, 즉 백제토기’로 주장한 ‘흑색마연토기’는 기존의 AD 2세기쯤에 출현한 회색마연연질토기의 표면에 까만색을 칠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칠한 흑색마연토기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같은 ‘도성’에서 특수목적, 즉 제사같은 의례적인 목적으로 제작한 토기일 뿐이지, 이것이 ‘백제토기’의 출발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씨는 또한 기원 전후부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수백년간 사용된 타날문 토기는 지역마다 다르다는 연구(이성주씨)에 주목한다. 한강유역의 타날문 토기도 같은 토기제작집단에 의해 제작됐으며 그 제작집단은 당시의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백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날문 토기와 연질무문토기가 바로 한성백제의 토기=이런 ‘토기연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은 그동안 무시됐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복원하는 데도 중요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

기존의 토기편년은 AD 3세기 후엽 이전의 토기를 ‘백제토기’로 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국가체로서의 백제’도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씨는 “기존학설도 97년 풍납토성 발굴성과가 반영되기 전에 발표된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선의 연구였다”면서 “그러나 풍납토성 발굴로 그동안 정설처럼 굳어진 학설을 대폭 수정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다른 젊은 학자들인 최성애·신종국씨도 “기존학설, 즉 원삼국토기와 백제토기의 분류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면서 백제토기의 성립기를 AD 2세기 전반 혹은 2세기 말엽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