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捺文 土器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吾心竹--오심죽-- 2010. 9. 3. 12:04

"연천 횡산리 유적, 적석총 맞다"



국방문화재연구원 발굴성과 발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 233번지 임진강 서쪽 변에 소재하는 이른바 '횡산리 적석총(績石塚.돌무지무덤)'은 발굴 결과 적석총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발굴을 담당한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이 19일 말했다.

연구원은 군남 홍수조절지 건설 구간 안에 포함된 이 유적을 한국수자원공사 의뢰로 지난 7월6일 이후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 유적은 강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제방 위에 조성한 고분임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그 근거로 연구원은 돌무지를 쌓아 올린 원래 무덤 중에서도 바닥에 깔았던 이른바 즙석(葺石) 시설이 현재의 제방 위에서 그대로 확인된 데다, 지금은 정상부가 평탄 대지인 제방은 원래보다 1.5m 가량이 삭평(削平. 깎아 편평하게 만듦)된 상태임을 현지 주민들에게서 확인한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연구원에 의하면, 이 횡산리 적석총은 원래는 완전했으나 근현대기에 군대와 농민들에 의한 토석 채취나 농경 활동 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그 바닥을 깐 즙석 시설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각종 빗살무늬 토기편을 비롯해 타날문토기편과 쇠ㆍ창 등의 철기류, 옥제품과 석제품 등이 출토됐다.

이 중에서도 조사단은 타날문토기와 철기류 등이 적석총 축조 무렵에 매납된 유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나아가 조사단은 석재들이 발견되는 양상으로 미뤄 이 적석총은 남북길이 58m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적석총이 축조한 주체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자 집단, 고구려와 말갈, 백제변방 수장층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일단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자들의 무덤으로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른바 즙석 시설이 적석총의 바닥 시설인지 등은 여전히 한편에서는 의문으로 남을 전망이다.


<<횡산리 적석총 전경>>

<<동쪽 트렌치>>

 
 
“연천 횡산리 유적은 신석기시대 적석총”
국방문화재연구원 확인… 고구려서 남하한 백제건국자 무덤인 듯

경기 연천 군남 홍수조절지 안의 횡산리 적석총 발굴유적이 신석기 시대 적석총(績石塚·돌무지무덤)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은 19일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이 강변자연적으로 조성된 제방 위에 만들어진 고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경기 연천 횡산리 적석총 발굴유적 전경.

유적에서는 돌무지를 쌓아 올린 원래 무덤 중에서도 바닥에 깔았던 이른바 즙석(葺石)시설이 그대로 확인됐다. 지금은 제방의 정상부가 평평한 형태이지만 원래보다 1.5m가량이 깎여 나간 것임을 현지 주민들에게 확인했다고 연구원 측은 전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각종 빗살무늬 토기 조각을 비롯해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무늬를 두드려 만든 토기) 조각과 창 등의 철기류, 옥제품과 석제품 등이 출토됐다. 조사단은 특히 이중 타날문토기와 철기류 등이 적석총 축조 무렵에 매납된 유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 적석총에서 발굴된 타날문토기의 조각.
문화재청 제공

조사단은 석재들이 발견된 양상에 비춰볼 때 적석총은 남북 길이 58m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적석총을 축조한 주체는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자 집단, 고구려와 말갈, 백제변방 수장층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일단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백제건국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즙석 시설이 적석총의 바닥 시설인지 여부 등은 여전히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연천 횡산리 적석총, 무덤 맞나?



"무덤 흔적 아직은 드러나지 않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 233번지 임진강변에 소재하는 이른바 '횡산리 적석총(績石塚)'은 임진강과 한탄강변에 집중 분포하는 기원전후 무렵 돌무지무덤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더구나 이 '적석총'이 군남 홍수조절지 건설계획과 맞물려 수몰될 수도 있어 발굴조사가 결정되자 고고학계에서는 그 귀추를 주목했다.

하지만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이 한국수자원공사 의뢰로 지난 7월6일 이래 이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5일 현재 이곳이 무덤인지조차 확정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지 않아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국방문화재연구원은 이날 현재까지 조사 결과 "횡산리 적석총은 압록강 유역에서 조사된 무기단식 적석총 계통과 유사하며 고구려인들의 남하와 백제의 건국과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생각된다"고 말했지만, 이곳이 무덤임을 입증하는 적석총의 기저부(바닥)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적석총' 바닥을 포함한 중심부에 대한 발굴은 진행되지 않아 조사단에서는 앞으로 무덤과 관련되는 시설이 본격 출현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조사 직전 연구원이 실시한 측량에 의하면 횡산리 '적석총'은 남북 방향 기저부 폭 58m, 상면 폭 48m, 동서방향 기저부 폭 28m, 상면 폭 12m, 높이는 동쪽 5.8m, 서쪽 3.5m 정도로 드러나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보고된 적석총 중에서는 가장 대형으로 드러났다"고 연구원은 덧붙였다.

이 '적석총'은 표토 등을 걷어낸 결과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됐으며, 그 외에도 기원전후 무렵에 제작됐다고 생각되는 타날문 토기 조작이나 철제품이 수습됐다.

이들 출토 유물 중에서도 빗살무늬 토기편은 '적석총'이 축조되는 과정에 인근 흙에서 섞여온 것으로 발굴단은 추정했다.


비록 '적석총' 주체부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임진강 및 한탄강 유역 적석총에서는 표토층 제거 과정에서 유리구슬이나 옥제품이 출토된 것과는 달리 이 횡산리 '적석총'에서는 그런 양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사람 머리 크기만한 큰 강돌이나 그보다 작은 강돌, 그리고 깬돌과 현무암 등을 이용해 인공으로 쌓은 흔적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기존에 발굴이 이뤄진 인근 삼곶리 적석총이나 학곡리 적석총의 적석(積石.돌무지)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드러났다.

더불어 거대한 봉문처럼 보이는 '적석총' 자체가 강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구(沙丘.모래언덕)을 최대한 활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 전체를 인공으로 쌓아올렸는지도 아직 확실히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곳은 무덤이 아니라 제단과 같은 시설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발굴조사 전 횡산리 적석총>>


<<표토 제거한 횡산리 적석총>>

<<표토 제거한 횡산리 적석총>>

<<빗살무늬 토기 동체부편>>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초기 백제 적석총 닮긴했는데…
 연천 횡산리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 댓글 0

  • 0
  • 0
ㆍ횡산리 적석총, 한국전 이후 훼손 확인
구조파악 벽에… 축조시기도 편차 커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 즉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임진강 변의 평탄한 충적대지에 구릉이 하나 우뚝 솟아있다.

이것이 바로 남한지역에서 확인되는 적석총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횡산리 적석총(사진)이다. 기저부의 크기가 58m×28m이고, 정상부의 면적이 농구 코트(420㎡·28m×15m)보다 훨씬 큰 576㎡(48m×12m)에 이른다.

이 적석총은 1990년대 초 이우형 국방문화재연구원 조사팀장이 발견한 이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 엄청난 규모뿐 아니라 민통선 이북이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분이 확실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북한 황강댐에 대한 대응댐인 군남댐 조성을 앞두고 이 적석총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자 더욱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지난 7월 이후 적석총을 발굴한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은 처녀분인 줄 알았던 적석총의 정상이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 시설물 공사로 심하게 파괴됐음을 알고 다소 실망했다. 적석총 윗면에 몇 개의 석곽을 배치한 다곽식 무덤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고구려계 백제 적석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정상부 훼손으로 더 이상 무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빗살무늬 토기편과 타날문 토기편, 그리고 한대(漢代) 유물로 여겨지는 철제유물들이 수습됐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 이 적석총은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 이후 유리왕(기원전 19년~기원후 18년)의 핍박을 피해 내려와 임진강변에 정착한 초기 백제 세력의 무덤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최몽룡 서울대 교수, 하문식 세종대 교수, 이동희 순천대 박물관 학예실장 등은 “횡산리 적석총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장(혼강·渾江)유역과 압록강 지류인 동로강변에서 보이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즉, 모래언덕의 사면을 깎아 돌을 붙여 쌓은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권순진 조사팀장은 “원래의 구조가 그랬는지, 아니면 군 부대의 삭평 때문인지 돌이 쌓인 형태가 조밀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았다는 한 주민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 적석총의 정상부는 지금보다 허리높이 이상 더 남아 있었고, 적석총의 라인을 따라 기다란 모래언덕이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이는 이 적석총이 많이 깎였고, 또한 자연사구를 이용해 축조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적석총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편차가 크다. 최몽룡 교수는 “횡산리 적석총 역시 고구려 초기 적석총인 무기단식 적석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축조 시기는 기원전 2~1세기 무렵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무중 중부고고학 연구소장, 김성태 경기문화재단 학예실장 등은 “출토된 철제유물을 보면 기원후 2~3세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떻든 이 횡산리 적석총을 비롯한 8기의 임진강변 적석총들은 남하한 온조세력의 최초 정착지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파주 적성의 육계토성과 관련, 여전히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발굴단(국방문화재연구원)은 이 최대의 적석총 발굴을 두고 관련 전문가들을 총동원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상황. 이재 원장은 “앞으로 발굴을 더해 적석총의 구조를 완전하게 파악해보고 유물이 더 있는지 확인하는 등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연천 횡산리 적석총 발굴



(서울=연합뉴스)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 233번지 임진강변에 소재하는 이른바 '횡산리 적석총(績石塚)'이 임진강 군남 홍수조절지 건설계획과 맞물려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국방문화재연구원이 조사를 진행한 결과 아직까지 이곳이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잡히지 않으며 표토에서 타날문토기편이 수습됐다. 2009.10.5 << 문화부 기사참조, 국방문화재연구원 제공 >>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