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황금왕국 신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44

황금왕국 신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2008.11.03 14:39 | 위대한 우리유산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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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왕국 신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오랫동안 땅속에 묻힌 것들이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쓸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학자들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아마추어 역사가라 할 수 있는 톰 슐만은 전설로 전해지는 트로이가 실제로 있다고 확신하고, 최초의 근대적 발굴작업을 시도한다.
 물론 현대에 와서 그의 고고학적 기법은 다소 아마추어적이고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원래 처음 시작은 다 그런것 아니겠는가? 인류의 무수한 위대한 발명품 조차 처음에는 장작불 하나와 돌 한조각에서 시작하였듯이....

 우리나라에 발굴 고고학 역시, 아직 역사학이라는 개념조차 도입되기 전인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1921년 9월이 오기까지 그곳은 경주 읍성 남문 밖 언덕에 위치한 비교적 외각지 였고, 작은 주막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주막 주인은 가게를 넓히기 위해 뒤뜰의 언덕을 약간 깍아내리던중 오래된 구슬과 몇조각의 그릇파편등을 발견했다. 무엇인지 알길이 없는 주인은 동네 아이들에게 구슬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또 흙무지 주변에 구슬이 흔하게 발견되자 아디들이 손으로 줍거나 파서 장난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구슬을 갖고 놀고 있는 아이를 본 일본경찰은, 아이들을 물어 공사현장을 둘러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구슬은 일반 구슬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찬란하였으며, 토기파편은 일반 것과는 달리 황금빛이 났다. 이전에도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골동품들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역시 경주지역 유물동향에 대개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상태였다.

 심상치 않은 유물임을 안 경찰은 즉시 경주경찰서장에게 보고 하였으며,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은 발굴이 진행되었다.


1921년 일제에 의해 금관총에서 발굴, 이후 금관총 금관으로 이름지어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4.4cm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내외관()으로 이루어진 기본 의장과 기법에서
신라 보관()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

  외관은 이마에 얹혀지는 관테[]의 둘레에 단순한 무늬를 넣은 대생지수목형(形- 큰 나무 모양) 입화() 3개와 녹각형(鹿形-사슴뿔 모양) 입화 2개를 세워 장식함


 금관은, 머리에 직접 쓰이는 안쪽 관과, 각종 장신구로 치장된 외부 관으로 나뉜다. 안쪽 내관은 머리에 직접 닿는 만큼 자작나무껍질과 섬유를 대어 부드럽게 만들었고, 형태는 고깔 모양의 모자에 새의 날개모양와 같은 두 갈래의 관익 ()을 꽂아 장식하였다.
 비록 내관은 외관에 둘러쌓여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당초문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기교면에서는 오히려 외관보다 더하다.
 이것은 왕이 평소에는 내관만 쓰고, 외관까지 덧붙여 쓰는 경우는 국가의 각종 행사때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따라서 외관은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육중하면서도  외관 전체에 동그란 금판 달개[]를 수없이 꿰어 달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반짝이도록 하였고, 외관 곳곳에 비취로 만든 곱은옥[]들을 달았다.

 이러한 금관 외관의 出(출)자형 외관장식과 곡옥장식은 러시아 서남부 지방의 노보체르카스크(Novocherkassk)에서 발견된 스키트사르마트계 유목민족의 금제보관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신라금관보다 이른시기의 자형으로  금관의 장식은 가야지방과 백제지방에도 보여진다. 특히 새의 깃털을 관모의 장식으로 의장한 예는 고구려쌍영총()의 고분벽화

인물상과 개마총() 벽화 인물상에 이미 나타나 있다. 따라서 출자형 금관양식은 북방에서 유입되어 백제와 가야를 거쳐, 신라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보 제 88호허리띠꾸미개(腰帶裝飾),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이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 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초두 용도 및 활용

주로 왕릉이나 대총(大塚)에서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 왕실을 비롯한 상류의 특수층 일부에서 쓰던 약탕기라 하겠다. 삼국시대 약탕기의 일종으로 청동제 초두는 세 개의 발과 긴 손잡이를 갖추고 있다. 특히 금관총 출토품과 경상남도 합천 지방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일본 동경국립박물 관에 소장되어 있는 용(龍)조각 무늬 초두는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리;손잡이;뚜껑의 유무에 따라 외형상 여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경상북도 경주시 금관총 출토, 사이호
고구려 5세기, 높이 39.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네 개의 손잡이가 달린 청동항아리로 원래 이러한 형태의 항아리는 고구려 토기의 독특한 형태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은 만주 집안지역의 고구려 무덤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청동항아리는 어떻게 신라왕족의 무덤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을까?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5세기는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이다.

 문화의 전수시기가 전성기보다 다소 늦게 전해진다는 점을 가만해 볼 때 5~6세기 고구려 문화의 영향력은 극성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역시 고구려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는 한편, 이것을 발전의 계기로 삼아 고대 황금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일제는 금관총의 발굴은 예외적으로 국제사회에 대대적으로 흥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함께 일본 언론 역시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이라며 추겨 세우기 까지 하였다. 물론  금관이나 금제허리띠, 그리고 각종 금제 귀걸이등 투탕카멘의 발굴유물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긴 하였지만, 연대도 1천년이나 차이나는 것이어서  두 유적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이렇게 금관총 흥보에 열을 올렸을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파워와, 그들이 점령한 지역이 프랑스나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 인도등지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 파워게임의 일환으로 경주일대 왕릉은 대대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이었는지 한반도가 영원히 그들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인식때문에, 1920년대 중반이후 유물밀반출 현상도 어느정도 개선되긴 하였다. 
 
 아무튼 금관총의 발굴은 이후 금령총을 비롯해  해방후인 천마총.황남대총 에 까지 이어지는 경주 고고 발굴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물론 우리손으로 발견하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신라의 문화역시 다른 어느 고대 문명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음을 증명한 역사적인 시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금관총에서는 금관과 허리띠 장식외에도 금제 귀걸이와 팔찌, 가락지, 구슬같은 각종 크고 작은 장신구를 비롯해 도검과 갑옷 등의 무기류를 비롯하여 금속제 용기, 폐제품 등 총 3만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 되었다.

 연대는 대략 6세기 초엽인 지증왕(500년-513년)을 전후한 때의 왕릉으로 추측되 며, 사적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관총의 원형은 지름이 50m, 높이 13m 정도이고, 신라 때만 있었던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속에 덧널[목곽木槨]을 마련하여 옻칠한 널[목관木棺]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구조와 불교의 영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 신라 이전인 지증왕(智證王) 전후의 6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