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대의 역사 기록 울진 봉평비
삼국의 역사 기록하면 우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 두권은 모두 삼국시대가 끝난지 훨씬 후에 편찬된 기록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온전하게 밝히는데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의미에서 아주 드문예이긴 하지만 중원 고구려비나 진흥왕 순수비같이, 당대에 사건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주는 역사기록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리고 울진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봉평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비석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풍부한 내용을 자랑한다.
사라질뻔했던 문화유산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398자이며 높이는 2m 4cm에 이르는 신라 봉평비는, 비교적 최근인 1988년 울진군 봉평2리에서 논에서 객토작업을 하던 중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농업에 지장을 주는 큰 걸림돌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최초 발견자는 이 비석을 쿨삭기를 동원하여 다리 밑에 옯겨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비석을 깨어지지 않았고, 이 마을 이장은 잘 다듬어진 비석을 정원석으로 쓰기위해 다시 옮기기로 하였다. 하지만 비석에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여 군 문화재 담당자에 연락을 치하여 우선 보존 처리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이 하나씩 판독됨에 따라 신라 법흥왕 11년 서기 524년, 이 지역에 있었던 놀라운 역사기록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520년 울진 노인촌에서 있었던 일
이 비석은 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甲辰年 正月十五日 喙部 牟?智寐錦王)으로 시작하고 있어, 어느왕 때 세워진 비석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비문의 첫머리는 모즉지 매금왕과 사부지 갈문왕(徙夫智 葛文王)을 비롯한 7명의 간지(干支) 4명의 나마(奈麻)등 주요대신(혹은 주요귀족) 12인이 모두 같은 곳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나온다.
여기서 모즉은 중국 사서인 양서(梁書)에 모진(募秦)이라 나오며, 삼국사기에는 모태(募泰)라고 나오는 법흥왕의 이름임이 확실하다. 지(智)는 우리말의 ~님처럼 신라시대 이름뒤에 붙는 존칭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또 중원 고구려비에서도 신라의 왕을 매금왕이라 부르고 있어, 이 당시까지만 해도 매금왕이란 호칭이 통용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법흥왕과 12명의 대신 같은 곳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보아, 이들의 권력이 왕권과 비슷한 수준으로 서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법흥왕때까지만 해도 왕이 절대권력을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같은 곳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임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지중에는 거칠부의 아버지인 물력지 일길간지(勿力智 一吉干支 )도 확인된다.
그리고 법흥왕이 이들을 소집한 이유는, 신라의 노인(奴人 - 속민으로 해석됨)이었던 울진의 기벌모라와 남미지에서 노인법을 따르지 않아 이소계성(?所界城 ) 실화요성촌(失火?<ㅡ인터넷 한자로 입력이 안되네요;;城村)에 있던 군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태가 일단락되자, 국왕을 깍아내렸던 태노촌이 모든 대가를 부담하게 하고, 나머지 노인촌은 노인법을 따르게 하였다. 아마도 속민집단중 가장 크고 중심되는 집단을 태노촌이라 부르고, 그들에게 사태의 책임을 물을 듯 싶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1차적으로 신라의 부역제도나 조세제도에 반발하여 태노촌이 주도한 저항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내용에서 국왕이 6부의 대표와 함께 소를 잡아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어, 과연 속민집단의 조세조항운동으로만 볼 수 있겠냐는 문제가 남는다.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사후처리의 규모가 너무 크다. 더구나 국왕을 헐뜯고 깍아내렸다는 내용을 볼 때, 신라의 체제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의 성격도 띄고 있었을 것이다. 제를 지낸 후에 법응왕은 기벌모라 사건의 관련책임자들에게 장 100대와 장 50대를 부과하게 된다.
밝혀진 역사와 남겨진 과제
신라 봉평비의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많은 논란이 되었던 신라의 역사가 상당부분 밝혀졌다. 우선 법흥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내용에 관련하여, 장60, 장100등을 실제로 적용한 사례가 나타났다.
그리고 왕경의 6부(六部)의 성립 시기를 대체적으로 6세기 이후로 보아왔으나, 이 비석의 발견으로 최소한 6세기초에 완성되었으며, 아울러 5세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의 중앙행정체제가 그만큼 이른시기에 정립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고대 국가 성립과 발전 연구에 상당한 진전을 가져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 국왕의 지위와 왕권의 실태가 어느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서 당시의 역사를 밝혀주고 있지만, 또한 새로운 과제도 낳았다. 가령 노인법이란 어떤 성격의 법인가? 과연 예속민에 관련된 법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이 밖에도 수많은 과제가 있지만, 그 과제가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깊이를 더 해 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