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대항해 시대와 죽막동 유적
동해와 남해를 장악하며,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던 백제.....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무엇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중국 역사서등 백제 관련 역사서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지만, 이 역사서만으로는 백제가 펼쳤던 광활한 대항해 시대를 복원하기 힘들다.
하지만 변산반도내에 위치해 있는 부안 죽막동 유적은, 경의롭기까지 한 출토 유물의 다양성을 통해 4~5세기 동북아 무역에 있어서 백제가 가졌던 위치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왜 죽막동이어야 했는가?
부안 죽막동 유적은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고, 서해안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된 최초의 제사유적이다.
사진출저: byunsan.buancela.go.kr/.../ sub04/ruins06.php
부안 죽망동유적은 서해안상에 돌출된 변산반도의 서쪽 끝부분 해안가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한 지점에 해당된다. 그리고 큰 바다를 횡단할 수 있는 항해술이 개발되지 못했던 6-7세기 이전에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 부분을 추적하면서 항해하였기 때문에 해안에서 돌출되고 주변에 표지(標識)로 삼을 만한 큰 산을 가지고 있던 이곳은 항해상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을 것이다.
유적지 주변에는주변에 섬들이 많아서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하며, 또 연안반류(沿岸反流)로 인해 조류가 심한편이라고 한다. 따라서 큰 파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조난의 위험이 매우 컸던 곳이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첫번째 사진의 돌출된 부분 절벽, 위 사진 자측 건물(수성당)뒷편에 있다고 함.
또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었으며, 갈라진 절벽 틈 사이로 울리는 거대한 파도의 소리는 옛 사람들에게 강렬한 애니미즘적 영감을 주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바다의 신이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는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바다를 향해 제사지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으며, 마한시대부터 바다를 통한 무역이 점차 중요해지자, 이곳에서 행해오던 제사역시 국가적 행사로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그 근거지를 한강 하류에서 금강 유역으로 남하함에 따라, 백제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교역해상로도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에 발맞추어 기원전까지는 단순한 지역행사였던 이곳이 마한시대에는 국가행사지로, 그리고 5세기 이후에는 국제행사지로 변모하여 6세기까지 그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백제의 남하, 국제 행사지역으로 변모하다.
발굴되는 유물 양상을 보면 기원전, 4세기 무렵까지는 뛰어나긴 하지만 토기제품에 제한되어 발견된다. 이것은 토기안에 별다른 공헌물을 넣지 않는 백제의 문화풍습이 반영되고 있음을 뜻한다. 토착민에 의해 행해지던 제사행사가 국가적 행사로 발전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5세기에 접어들면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제사에 받치는 석제모조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큰 항아리 속에 넣어진 금속유물도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즉 백제만을 위한 제사행사에서 가야, 중국, 일본을 오가는 배들을 위한 동북아의 제사행사로, 그 대상과 기원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가야, 일본과의 교역
죽막동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중, 돌로만든 모형 칼과 갑옷등도 있다. 이러한 석제모조품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의 오끼노시마에서 출토된 석제모조품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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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물들은 대부분 항아리나 그릇받침대 속에 담겨져 발견되는데, 공헌품을 담기위해 만들어진 그릇, 혹은 공헌품이 담겨진체 발견된 그릇들을 통칭하여 공헌용기라 한다.
6세기 이후에는 새로이 굽달린 잔이나 병과 같은 각종 기종이 공헌용기에 추가하여 발굴되고 있다.
따라서 5~6세기경 죽막동 제사유적은 백제시대 대일, 대중과 문물교류를 하면서 가장 번성하였던 해양제사유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죽막동 유적에서 출토된 석제 모조 돌칼. 5세기 중ㆍ후반부터 6세기 전반의 왜(倭)와 관련된 세력이, 토기에 음식과 술 등을 담아 신에게 바치되, 별도의 공헌물로 석제모조품을 나무에 매달았던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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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서해 남부의 앞바다로 나가면, 규슈 서북쪽에 도착하는 항로가 된다. 규슈의 후쿠오까에는 외국으로 사신단이 출발하는 홍로관이 있고, 이 남해항로를 따라 북상할 경우 오기노시마를 경유하여 한반도 서남부지역으로 들어온다.
오끼노시마에서 출토된 해양제사유물 가운데 부안 죽막동에서 출토된 제사용품과 동일한 것이 많다. 이 제사유물은 남해항로를 통하여 백제시대부터 금강유역의 웅진공주, 사비부여의 왕도 세력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규슈 서쪽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에서는 금강 하구역인 익산 웅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및 금동신발과 동일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부터 금강유역의 백제세력과 일본 규슈지역의 해상교륙가 있었고,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금강유역이 백제시대부터 대일본의 해상교통의 전진기지였음을 말해준다.
큰 독항아리에 각종 금속유물을 봉납(捧納)하던 제사풍습은 대가야에서 발견된다. 이 유물들의 연대는 5~6세기경이어서 대가야가 멸망직전까지, 군산항을 기점으로 교역을 하였으며, 교역선의 무사항행을 기원하기 위해 이 유적지에서 제사의식을 치뤘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교역
중국남조로부터 들여온 유물로 추측되는 두귀달린병과 유약처리된 검은항아리의 경우, 5세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유약처리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유물은 중국과의 교역을 확인시켜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의 교역로를 역추적 해 보면 절강성 월주에서 출발한 배가 변산반도를 경유하여 백제도성으로 이어진다. |
또한 도자류는 귀한 종류였으므로 일반인은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 주체가 직접 중국과 문물을 교역하였거나,중앙의 지배세력이 제사주체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제사를 지낸 주체가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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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막동 제사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한 중 일의 유적지를 추적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용하였던 동북아의 해상로를 찾을 수 있다.
서해의 해상교역로 유추해보면, 태안반도 부안에서 출발한 배는 산동반도를 거쳐 현재의 중국 상해 인근(建康-건강)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산동반도를 기점으로 하여, 남방으로 내려가 중국 항주만의 영파 또는 항주로 들어가는, 서해 대항로가 완성된다.
또 죽막동에서 남해로 출발한 배는 구슈를 거쳐 일본 오사카 인근(奈良-나라)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드러난다.
| 백제 대항해 시대의 중심지에 있었던 죽막동.
| 항해신(航海神) 혹은 바다신(海神)을 제사의 대상으로 삼고 풍어(豊漁)와 뱃길의 안전, 조난구제 등의 기원을 토기중심의 노천제사 형식으로 지냈던 죽막동 제사…
고고학적으로도 죽막동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제사유적으로 당시의 제사의식을 규명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중국 항주에서부터 일본 나라까지 이어지는 대항해의 중심지가 태안반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백의 멸망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국제무역 중심지로서의 입지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역차원에서 풍어나 선박의 무사귀환을 비는 제사행사가 이루어 지긴 하였지만, 백제시대때 이루어졌던 범 국가적 행사는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사진출처: 변산반도해양문화
그러나 아무리 찬란한 문명도 흥망성사는 있기 마련이다. 또한 군산을 중심으로 한 태안반도 일대는 국제무역항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영화가 어려있는 이곳을 재조명 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닐것이다. 그것은 곧 동북아의 중심에 있었던 한반도의 역사를 부활시키는 일일 것이기에....
참조: 국가문화유산 포털 www.heritage.go.kr/culture_ 변산반도 해양문화 byunsan.buancel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