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인각사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들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41


인각사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들


 
인각사는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하기도 했던 유서깊은 사찰로,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에 위치하고 있다. 2008년 12월 사찰내 묘탑지로 추측되던 곳을 발굴하던 중, 한 지점에서 불교 공양물에 받쳐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물 15~20여 점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발굴된 지점은 인각사의 오른쪽으로 통일신라시대 회랑과 담장, 탑 등의 터가 드러났다. 그리고 부도로 추정되는 탑터 2~3m 지점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확인결과  손잡이가 달린 향로인 금동 병향로 1점을 비롯해, 깨끗한 물을 담는 청동정병 2점, 7층 탑 모양 뚜껑을 갖춘 청동향합 1점, 2층으로 된 몸체와 뚜껑 조합식이며 사리를 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이단합 1점, 금고(金鼓) 혹은 북 일종인 청동반자 1점, 청동그릇 3점, 해무리굽 청자 7점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비록 유물의 양이 많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해무리굽 청자를 제외한 한점 한점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휘귀한 것일뿐 아니라 국보급 유물로 평가되기에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중 금동 병향로(柄香爐)와 청동 정병(淨甁), 청동 향합(香盒), 청동 이단합, 청동 반자(飯子)는 하나의 공양물 셋트로 보이며, 이런 완전한 형태의 발굴은 인각사가 유일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국내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개인소장가가 이번 인각사 발굴품과 같은 종류의 유물을 더러 소장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기존 소장품 대부분은 출처를 모르고, 더구나 그 대다수는 고려시대 이후 작품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각사 출토 불교공양구들은 우선 제작 연대가 아무리 늦어도 9세기, 이르면 8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에 속하고, 이에 더해 출토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금동병향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내에서는 단 2점밖에 없으며, 세계적으로도 극히 발굴사레가 드문 금동병향로이다. 경주 석굴암에 조성된 부조 중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병향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병향로는 향로를 구성하는 화로형받침과 노신, 손잡이를 장식한 사자로 이뤄졌는데, 손잡이 끝부분에 놓여있는 사자는 7cm 정도의 크기이다. 작은 크기에도 앞다리를 세우고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자세와 송곳니, 갈기나 꼬리가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청동향합


  사람마다 보는 시각차가 모두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7층탑 향합에 가장 눈길이 간다.
 도자기류및 토기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뚜껑에 7층탑 모양이 장식되어 있는 형태는 처음 접한다.


전체높이가 18cm, 입구지름이8.3cm, 바닥지름이 5.8cm로, 함께 출토된 금동병향로와 재질이나 주조기법이 동일하다고 한다.

 따라서 병향로와 같이 8세기 말 또는 구세기 전반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병향로와 향합은 한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 병녕사 169굴의 벽화나 신회신탑이 대표적인 사례라고한다.

 인각사의 병향로와 탑형향합 또한 한 세트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신회신탑에서 출토된 향합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라고 한다.

  
정병의 높이는 34~35cm이며 타원형의 몸체 어깨 부위에 작은 뚜껑으로 여닫을 수 있는 주구(注口)와 몸체 상단에 가늘고 긴 목인 첨대가 달려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암 가운데 범천상이 주두와 첨대가 있는 정병을 들고 있는 조각돼 있을 뿐, 실물로 발견된 것은 인각사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정병이 중국에서는 7세기 후반에 보이기 시작하지만 인각사 출토 청동정병과 같은 양식은 8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청동 주구 정병

정병① 전체길이 35.0㎝, 밑지름 7.5㎝,
몸통 최대 지름 10.5㎝.

정병② 전체길이 34.0㎝, 밑지름 8.0㎝,
몸통 최대 지름 10.5㎝.


정병은 주전자 일종이다. 불상을 목욕시키는 욕불(浴佛)과 같은 불교의 중요한 의식에 사용되는 깨끗하고 성(聖)스런 물을 따르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정병(淨甁)이라 부른다.

현재까지 알려진 주구와 첨대가 달린 정병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인각사 정병의 경우 고려시대 것에 비해 몸체와 목 부분의 모양이 다르다.

석굴암 조각 중 범천상이 든 정병이 바로 이번 출토품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한다.


청동 이중합

2층으로 된 몸체와 뚜껑으로 구성된다. 표면은 가는 선 무늬를 전면에 걸쳐 둘렀으며 뚜껑에도 2개 동심원을 넣었다. 이와 유사한 청동 이중합은 고려시대 유물이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기능은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합이나 향을 담던 향합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사리기 용도 추정 청동합으로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굴 수습한 북한산 삼천사지 출토품이 있으며,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왕흥사지 목탑 심초석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한 청동 사리함 등이 있다.

전체길이 14.0㎝, 입지름 8.8㎝, 밑지름 8.8㎝.



 그런데 묻힌 장소가 지표층에서 5㎝밖에 되지 않는데다, 묻는 방식이 그리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과연 부장품으로 볼 수 있겠냐는 의문이 남는다.

일부에서는 몽고 침입 당시 약탈이나 훼손을 막으려 급하게 묻은 것이거나, 새로운 건물이나 탑을 지을 때 땅의 신을 위로하고자 묻는 지진구(地鎭具)가 아니겠느냐는 가설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매장수법이 그리 정교하지 않고, 몽고침입과 조성시기가 너무  멀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에 국사(國師)급의 고승이 열반하자 묘탑을 짓고 생전의 공양구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