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잃어버린 역사의 타임갭슐 광개토태왕 청동호우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5:39

잃어버린 역사의 타임갭슐 광개토태왕 청동호우

2009.03.16 16:36 | 위대한 우리유산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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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의 타임갭슐 광개토태왕 청동호우


 서기 395년 백제의 아신왕이 왜국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은 신하국인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백제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게 된다.  이원정에서 광개토 대왕은 백제의 56성을 점령한 후 아신왕으로부터 奴客(노객) 즉 신하국이 될 것을 맹약받고, 백제의 왕조를 유지시켜 주었다.
 그러나 아신왕은 이러한 맹약을 깨고 399년부터 신라를 재침공하게 된다. 특히 아신왕은 왜국은 물론 임나가라(=가야)까지 동원하여, 신라의 많은 성들을 점령하고 신라왕(내물왕)을 천민으로 격하시키기 까지 하였다.

   이에 광개토 대왕은 서기 400년 보기병 5만 대군을 보내 신라가 백제연합에게 점령당하였던 모든 성을 회복하였고, 백제연합의 본거지인 임나가라의 종발성을 격파하고 왜국을 침략을 토벌하여 이 땅을 수호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힘을 빌어 왕조를 유지하고 심지어 노객을 자처하였던 선대왕의 역사에 대해, 668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로서는 역사에 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릉비가 발견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광개토 대왕의 역사가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위대한 유물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광개토태왕릉비 내용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하였다.

 즉 태왕릉비는 414년에 장수왕이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기 때문에,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고구려가 그토록 신라에게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직접적인 군사원정조차 아무 제약없이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신라내에서도 그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런데 1946년 광복이후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 된 노서동 고분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 해 줄 수 있는 한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오직 한점의 유물


  경주시(慶州市) 노서동(路西洞)일대에는 신라왕릉급 무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기도 한 금령총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유물의 매장상태와 보존상태가 매우 높을 것으로 예측되는 곳이었다. 1946년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 박사역시 이 지역에 대해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고학의 기초는 물론 발굴작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유적을 쉽사리 손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박물관 마지막 관장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는, 광복이후에도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한동안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귀국하지 않았는지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고고학이나 발굴학이 전무하였던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귀중한 인재였음이 틀림없다.
 
또 아리미쓰씨도 제국주의의 관장이기 이전에 뛰어난 소양을 가진 학자였다. 그리고 역사학자라면 양국의 이해관계를 떠나, 일본땅에서는 전혀 경험할수 없었던 놀라운 발굴 성과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박사와 아리미쓰씨가 주목한 것은 지름 약 16m, 잔존 높이 약 4m의 비교적 소형무덤이었다.

 봉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돌무지나무곽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구조가 거의 훼손돼지 않은체 발굴되어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무덤 구조가 훼손돼지 않았다면, 그 안의 유물역시 온존하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돌무지 나무곽무덤은 신라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구조로, 그 매장유물역시 왕릉급을 입증할만한 화려하고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 발굴 당시의 실측 도면. 발굴 당시 도면을 전담한 임천(林泉) 선생이 제작한 도면

덧널의 내부 중앙 서쪽에는 나무널[木棺(목관)]이, 그 동쪽에는 이 무덤이 왕릉급임을 입증할만한 금동관 파편과 금은상감 환두대도를 비롯 수백여점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이 유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던 중, 밑바닥에 글자가 새겨진 청동그릇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글자가 새겨진 그릇은 발굴된 예가 극히 드물어 초기부터  관심을 끌었으며, 이 무덤이름을 호우총 (壺<木+于>塚)이라고 한 것 역시 청동그릇(=호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 청동호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뚜껑이 딸린 합. 

 1946년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호우총(壺塚)에서 출토
총 높이 19.4cm, 그릇의 깊이 10cm, 몸통의 지름 24cm  

 그릇과 뚜껑의 각 표면에는 3가닥의 돌림대(용기대隆起帶)가 있고, 뚜껑에는 다시 윗부분에 1가닥을 돌린 위에 화형(花形) 꽃잎의 유좌에 구슬 같은 손잡이 꼭지가 달려 있다.

  그릇 밑받침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라고 돋을새김한 4행 16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태왕이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이며, 이 글귀는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태왕릉용 호우'라는 뜻이다. 


 *그릇한문 세로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음



 일반적으로 뚜껑이 달린 식기형태의 그릇을 합(盒) 이라 부르지만, 이 청동기의 경우 호우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 청동호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글자에는 이 땅에는 없을 것으로만 알았던 태왕의 공식 명칭이 나타났다.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호우십>
  乙卯年  國岡上 廣開土地 好太王 壺
<木+于>十'

호우총와 광개토왕비의 글씨체 비교

<을묘년>은 광개토왕 사후 3년의 415년(장수왕 3)에 해당되므로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하여 장수왕 3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청동호우는 신라에서 자체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호우에 새겨진 글씨체가 광개토왕릉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 
  광개토태왕릉비가 건립된 이듬해에 제작된 점등을 볼 때 
고구려에서 제작된 청동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만들어진 곳이 어디냐가 아니라,  광개토 대왕을 비롯해 고구려의 왕들에 대해 단순히 왕이 아닌 태왕으로 불려 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太王은 중국의 황제나 일반적인 왕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하던 왕에대한 극존칭이다.

 이러한 극존칭을 인정하였다는 것 자체가, 5세기 전반에 걸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신라가 '태왕'이라는 극존칭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겠냐는 문제를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당시 신라 왕권교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역사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으며, 실성이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즉 내물왕에게는 대를 이을 왕자가 있었음에도 고구려에 볼모로 있었던 실성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또 실성왕과 눌지과 대립하였을 때도, 고구려는 직접 군사
를 동원하여 실성왕을 살해하고 눌지왕을 옹호하였다이처럼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상황속에서, 신라는 고구려왕에 대한 극존칭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우총은  금관파편과 최고급 환두대도가 발견된 만큼, 신라 왕이거나 최소한 왕족의 무덤이라는 사실도 지나쳐서는 안된다. 최상위계층의 무덤에 들어가는 부장품인만큼, 특별히 귀중하고 아름다운 최상품을 엄선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결코 우연하게 들어 갔을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상대국 부왕의 극존칭이 명백하게 새겨진 물품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인 교역품이나  귀중품을 사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광개토 대왕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심이 없거나, 태왕으로서의 영향력과 입지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왕족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쓰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광개토 대왕과 관련한 직접적인 유물이 우리나라 내에선 오직 이 한점 뿐이기 때문에, 그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단정적으로 결론내리기는 무리이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주장에 대해서



 그런데 아직도 광개토 대왕의 업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물론 역사해석에는 늘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태왕릉비에 나와있는 기록자체조차 불신하거나 깍아 내리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광개토 대왕비의 내용은  부왕의 업적을 기리고 선전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광개토 대왕비의 내용중에서도, 고구려의 전통적인 천손사상을 비롯해 신화적 구조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광개토태왕릉비에 나와있는 정복내용과는  관련이 없다.
 
 또  중국 남조왕조인 송(宋)이 451년 왜왕 제(濟)에 대해 '사지절ㆍ도독ㆍ왜ㆍ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ㆍ육국ㆍ제군사'(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加羅 辰韓 慕韓 六國 諸軍事)라고 책봉했던 것을 근거로 국강상 광개토경 호태왕이란 왕호역시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교대상 자체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선 남조 왕조가 왜왕에게 육국 제군사를 책봉하였다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단순히 책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상대국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자의적으로 책봉한 것과, 명백한 정복기사가 있는 비문과 어떻게 동일선상에서 비교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왜왕으로 표기되었지만 실제로는 백제왕에게 이러한 직위를 책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고구려의 힘이 그만큼 강하였으며, 백제역시 가야연맹과 일본을 아우를 정도의 힘을 지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조차 광개토태왕릉비의 비문내용을 반증할 수 있는 또하나의 근거인 셈이다.

  문무왕릉비와 비교해봐도, 광개토대왕이 이룬 업적에 비해 추존하는 내용이 지나칠정도로 간소화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점령하였던 모든 성이름을 하나 하나 열거함으로써, 최대한 대왕이 남긴 업적을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 광개토태왕릉비이다.

그리고 국강상 광개토경 호태왕이란 왕호를 새긴 호우가 신라 최상위 계층의 무덤속까지 전해질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조선대황제 누구누구란 명문이 새겨진 도자기가 중국황족이나 황실의 무덤에서 발견될 수 있겠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상대국 왕의 극존칭이 쓰여있는 물품이 왕릉급의 무덤에 발견된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으며 가볍게 취급해서도 안된다. 단순히 귀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청동호우는, 당시 고구려가 가졌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에 대한 고찰이, 역사사실에 상당히 부합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