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가야의 철과 전쟁 - 국립김해박물관

吾心竹--오심죽-- 2010. 7. 31. 11:15



덩이쇠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나라에 철이 나는데, 韓·濊·倭 모두 와서 가져간다. 모든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화폐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二郡에 공급한다.)"이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변한과 가야에는 철이 화폐와 같은 기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덩이쇠이다.

판갑옷
고대의 전사(戰士)들이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무구(武具)로서, 처음에는 나무나 가죽에 옻칠을 하여 단단하게 만들었으나, 사람들이 철을 다룰 수 있게 됨으로써 철이 판갑옷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갑옷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엮어 만든 비늘갑옷과 넓은 철판을 서로 연결하여 만든 판갑옷이 있다. 판갑옷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판갑이 있는데, 여러 매의 철판을 가죽으로 엮어 만든 것과 못으로 고정하여 만든 것이 있다. 이외에 철판의 형태에 따라 사각판(方形板), 긴사각판(長方形板), 삼각판(三角板)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김해 퇴래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판갑옷은 긴 사각형의 철판을 못으로 고정한 것으로 가슴부위와 등에는 소용돌이무늬의 철판이 덧대어 있는데, 철판 사이에는 새의 깃털을 꽂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말머리가리개
적의 공격으로부터 전사의 몸을 보호하는 무구로 갑옷과 투구가 있다면, 전투에 동원된 말을 보호하는 무구로는 말머리가리개와 말갑옷[馬甲]이 있다. 말머리가리개는 말의 머리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가죽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으나, 뒤에는 철판으로 바뀌었다. 말갑옷은 말의 몸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하여 말머리가리개와 말갑옷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물은 가야고분에서 출토되었다. 말갑옷은 함안 동항리고분군에서 한 벌이 출토되었고, 말머리가리개는 김해 대성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등 가야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투구
전사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것으로 전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방어용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투겁창
창은 원래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하는 작살에서 유래된 것이다. 투겁창은 창의 일종으로 슴베를 만들어 나무자루에 꽂는 창과 달리 창끝에 투겁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자루를 끼워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봉황무늬둥근고리칼
둥근고리칼[環頭大刀]은 처음에는 실용성이 강조되어 단순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점차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용도가 바뀜에 따라 칼집이나 칼손잡이 부분을 금이나 은으로 장식하고, 봉황과 용 등 신성한 동물을 무늬의 소재로 삼아 새겨 넣었거나 조각하였다. 무늬의 구성은 봉황과 용이 함께 있는 경우, 봉황만 있는 경우, 용만 있는 경우 등 다양하다. 이러한 무늬구성의 차이는 둥근고리칼을 지닌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1 prologue
김수로왕과 열 하나의 알에서 나온 각각의 왕들이 건설한 왕국으로 알려진 가야는, 고고학적인 기준에서 금관가야ㆍ대가야ㆍ소가야ㆍ아라가야ㆍ성산가야ㆍ고령가야 등의 국명들로 알려져 왔다.
이렇듯 소국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던 가야가 고대사학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비중을 갖는 이유는, 다름 아닌 철의 생산과 생산 체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대 사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포함한 국력의 상징이 철 생산으로 결정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 가야의 다양한 철제무기들
단순히 전투에서 사용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물로써 이용되기도 했던 철제 무기류는, 그 기능에 따라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 두 갈래로 구분된다.
공격용 무기는 칼/검/창과 같은 근거리 무기와 활/화살과 같은 원거리 무기로 나뉠 수 있다.
대표적인 베는 무기인 검(劍)은 몸의 날이 한쪽에 세워진 것을 칼(刀), 양날인 것을 검(劍)이라고 부르며 혼용해서 부르기도 한다.
창은 원래 물고기를 잡기 위한 작살에서 유래하였으며, 도끼나 낫과 같이 유사시에 무기로 전환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적의 살상에 그대로 작용되는 활과 화살은 직접적인 살상용도 외에 불을 붙여 신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방어용 무기는 갑옷/투구와 같은 개인방어 용도의 무기류와 말머리가리개/말갑옷으로 대표되는 전시용 마구류로 나뉘어진다.
적의 공격무기인 화살, 창, 칼 등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제작된 갑옷은 당시의 높은 제련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전사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된 투구는 전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무기류라고 할 수 있다.
말의 투구인 말머리가리개는 직접적으로 말의 안면과 양볼, 귀를 보호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투시 적의 공격으로부터 말을 보호하기 위해 입히는 말갑옷의 출현은 약 5세기 전반 기마전술의 보급과 함께 이루어졌다. 보통 말갑옷은 목가리개와 몸통가리개로 나뉘어지는데, 몸통부분은 큰 장방형 소찰을 여러 개 이어서 만든 것이다.
이외에 사용자의 신분이나 권위를 드러내고, 지배체제의 확립 유지 확대 등을 위해 권력의 상징물로서 이용되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유물로는 이형철기, 종장판정결갑옷, 봉황무늬고리자루칼 등이 있어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다.

#3 무기체계의 변천과정과 의미
삼국시대 초기는 칼과 창이 주력무기였으나 곧 창으로 무기의 종류가 단일화 된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전술이 중요시되었던 무기체계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3세기 이후의 분묘에서 화살촉이 다량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전투에서 활이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4세기 이후에는 갑옷과 투구의 발달ㆍ마구류의 등장으로 전사들이 무장화 되는 등 복합적 무기체제로 발전하였다.
이는 보병과 기병의 복합전술ㆍ전략ㆍ전술에 의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체제로 급변하였음을 의미하며, 이전보다 더 큰 물리적 충격량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되는 전쟁으로 변모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전쟁에 있어서 무기의 발달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무기 외에 우수한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사회적 생산기반ㆍ군대동원력ㆍ수취체제ㆍ국가의 대내적인 통합력 등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고려된다.

#4 유적별 출토유물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추측할 수 있게 된 것은 6가야 중심으로 많은 패총들과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6가야 중 금관가야였으며,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목가리개, 고리자루칼, 삼지창 등과 같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고고학 상으로 대가야로 분류되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1906년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출토유물로는 판갑옷과 투구, 말머리가리개, 화살통과 화살촉 등이 있다.
역시 대가야에 속해 있던 반계제 고분군은, 고리자루칼과 금동투구 등이 발굴되었다.
5세기에서 6세기 아라가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함안 도항리 마리산의 철제무기류는 1917년 일제시대에 처음 조사되었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말갑옷 등이 있다.

#5 epilogue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철제 무기류는 4세기에서 5세기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우리 고대사상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영토확장을 둘러싼 가장 격렬한 쟁투를 벌였던 때라고 할 수 있겠다.
격정의 시대에 우리나라 철제무기류의 대부분이 가야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가야가 한국 고대국가 형성의 기반이 된 철의 수용과 확산의 최전방에서 그 발전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대에 최소 500년 최대 700년간 존속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죠나단 리빙스턴 2007.06.05 2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