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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자비왕대의 왜인 토벌전 재위기간 : (458~479)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34


신라 자비왕대의 왜인 토벌전
 재위기간 : (458~479)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행위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서도 언급되어 있을 만큼 길고도 빈번한 것이었다. 하지만 BC 20년 박혁거세 재위 38년에 호공이란 인물이 마한왕을 배알한 자리에서 변한 , 낙랑, 왜인까지 신라를 두려워하지 않는자가 없다고 언급한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신라의 힘이 일본을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AD 14년 2대 남해왕 11년엔 무려 1백여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침략이 있어서, 왜인이 침략은 그저 바닷가 마을을 노략질하는 수준을 넘어 신라의 운명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왜인 혹은 왜국으로 표기되는 일본의 신라 침범은, 백제의 침입횟수보다 많을 정도로 빈번하였을 뿐 아니라, 그 피해역시 왕궁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극심하였다. 이런 왜인의 침략행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신라 20대 자비왕대인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비왕대에 왜인의 침략행위가 절정으로 치닫게 되기까지는, 실성왕(재위402∼417)7년 409년에 대마도 정벌이 계획단계에서 미사품의 반대로 인해 중지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시 미사품은 해상원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어 신라 영역이었던 대마도에 왜인들이 불법적으로 군사거점 기지화 하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다.
 물론 그의 논의가 전혀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해야만 되는 일이 있다.

 당시 왜인들은 수백년간 10년이 멀다하고 대규모 침략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대마도까지 불법점령하고 있었다.  이런 왜인들의 행동을 단지 해상원정은 어렵고 성공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오히려 왜인들이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우고, 신라를 침범하여 국토와 민간을 유린하는 행위가 더 큰 위험과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다.

  더구나 광개토대왕의 원정등 고구려의 힘으로 간신히 왜인의 침범을 막아왔던 신라는, 눌지왕 재위 43년에 현재 삼척지방에서 사냥하고 있던 고구려 장수를 살해함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국교단절의 수순을 밟고 말았다.
 따라서 자비왕은 순수하게 신라의 힘만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예상되는 왜인의 침략과 맞서야만 되었다.
 자비(慈悲)왕은 신라 20대 왕으로서  눌지왕(訥祗王;재위417-458년)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왜인이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단절을 파악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겨우 즉위 2개월만인  458 4월에  병선(兵船) 100여 척으로 구성된 왜인들의 1차 침략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왜인으로 표기된 것은 대마도에 근거를 둔 세력으로, 또 왜병으로 표기된 것은 일본 본토에 근거를 둔 세력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규모로 봐서, 단지 대마도에 근거를 둔 세력뿐 아니라, 일본 본토세력까지 합세한 대 공격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당시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한 시기여서, 백제의 영향력에 의해 일본이 공격하였다기 보다는, 일본 단독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봐야한다.
 결국 왜인들은 100여척의 선단을 구축할 수 있을 만큼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당시 일본의 공세가 얼마나 거세었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왜인이) 월성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날아 온) 화살이 비와 같았다.

신라는 고구려의 대한반도 정책에 반발하여 백제와 연합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경주 월성에 있는 궁성은 수차례의 일본 침략을 막아낸 천연요새였으며, 또 늘 그랫지만 왜인들은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은체 약탈에 초점을 두어 공격하였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이런 왜인들의 침략형태를 잘 알고 있었던 자비왕은 끝까지 월성을 사수하며 왜인들이 지쳐 스스로 물러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들이 기세가 꺽여 돌아가려하자, 자비왕은 급히 군사 동원하배후를 급습, 바다가 까지 추격하였다.  여기에 당황한 왜인들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그러나 누차 지적되지만 지난날 대마도 정벌을 포기한 것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낳았는가?  비록 전투에서 패배한 왜인들이었지만,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다시 세력을 쌓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더구나 일본 본토의 북쪽 해안 세력과 결탁하여 더욱 거세고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해 들어왔다.

 2차 침입인 재위 5년 462년 5월에는 왜인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였지만, 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도 못하였다.다음해  2월 있었던 3차 침입에도 왜병이 경상남도 양산(梁山)의 삽량성(葛良城)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하지만 자비왕은 벌지(伐智)·덕지(德智)등에게 명하여 이번에는 제대로 반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고, 바닷가에 두개의 성을 신축하여 왜인들의 침입에 대비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474년 역사의 판도는 다시한번 바뀌었다. 7월 고구려 거련왕[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이 전사해 버린 것이다.   475 명활성(明活城)으로 왕의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신라가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북변의 정세가 불안정하던  재위 19년476년 왜인들은 4차  침략을 감행하였다.  자비왕은 13년전 왜인들을 크게 격파한 경험이 있던 덕지(德智)를 장군으로 삼아 왜인들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덕지는  왜인 2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왜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였가. 
 그리하여 마침내 477년 5월 왜인들은 5차 침입 감행하였다. 기록에는 정확하게 기술되지 않았지만 정황으로 볼 때 이 떄의 피해가 가장 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왜인이 5道(도)로 침범해 왔으나  그저 공이 없이 돌아갔다고만 한 기록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공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그들에서 점령된 성곽이나 고을이 없다는 뜻 정도밖에는 안된다. 특히 승리나 토벌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신라는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였던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성곽을 중심으로 잘 방어한 덕분으로, 인명피해를 최소화 시킨 정도과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까? 공이 없이 돌아가는 그들에게, 역습을 가할 여력이 있었다면 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겠는가?

 이후로도 왜인들의 신라침략행위는 지속되지만, 자비왕을 정점으로 해서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것은 일본에도 고대왕국이 자리잡고, 또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가 지속되면서 백제의 영향력에 의해 왜인들의 침략의 상당히 감소한 영향이 있다. 또한 신라의 국방력역시 지증왕이후로 꾸준히 증대되었기 때문에, 왜인들의 침략행위는 충분히 억제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신라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신라는 왜인들은 어렵사리 물리치긴 하였지만, 역시 대마도 정벌을 포기하여 스스로 왜인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높게 평가할 수만은 없다. 다만 왜인들이 한반도 세력과 연합하여, 혹은 단독으로 한반도내로 진출하려던 시도를 단호하게 처단하여, 현재의 한반도를 온전히 보존하였다는 점은 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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