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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영토 수호전의 시작 백강 전투

吾心竹--오심죽-- 2010. 2. 8. 15:26

신라 영토수호전의 시작 백강 전투

2008.08.19 22:25 | 영토 수호戰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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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영토 수호전의 시작 백강 전투

  서기 660년 신라는 당나라의 군사원조에 힘입어, 백제를 일거에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양공작전으로 백제왕조를 멸망시킨 것이지, 백제와의 전쟁에서 앞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황산벌 전쟁을 제외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통일전쟁은 오히려 합병 이후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백제 무왕의 조카인 복신과 승려 출신인 도침은 주류성을 중심으로 군사를 모으는 한편, 일본에 건너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부흥운동의 총수령으로 맞아 들였다.
 이후 부여풍이 중심이 된 백제부흥운동은 매우 강성하여 신라군을 압도할 정도에 이르고 말았다.

 또 당나라는 신라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다. 양측이 서로싸워 상처를 입히면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킬 야망을 꿈꾸고 있던 당나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는 셈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백제부흥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 복신은 도침을 암살한 후 부여풍을 압박하여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해 버린 것이다. 이후 복신은 부여풍마저 암살하기 위해 병을 사칭하여 은밀하게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안 부여풍은 심복들과 함께 갑자기 들이쳐 복신을 암살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주요인사가 두명씩이나 내부권력다툼에 의해 사망한 상태여서, 부흥군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하고 사기가 주츰한 상태였다. 따라서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지만, 고구려는 당나라의 전쟁중이여서 적극적으로 군사원조를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제 부여풍이 기댈 곳은 일본밖에 없었다. 비록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는 부여풍이 인질 혹은 볼모로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에 파견된 백제왕자들의 위상은 일반적인 인질정책으로 해석해서된 안된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기회에 하겠지만, 간단히 살펴보면 일본 천황가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 할만큼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당부분을 백제의 힘에 의존 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 백제왕자들의 위상은 일본천황을 앞도하고 있었을 뿐더러 정치적 결정은 물론 심지어 천황계승문제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내에 있던 백제계 도래인의 출병 요구는 거세어 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아마도 부여풍과 복신간의 권력다툼은 이미 일본이 해외파견을 결정한 이후거나, 출항도중에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사이메이 천황은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여풍의 강력한 요구와 백제계 도래인의 압력으로 인해 일본은 더이상 파병을 미룰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이메이에 이어 천황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하여야만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본군선은 1천여척에 이른다고 할 만큼 대단한 기세였고, 실제로도 2만 7천여명의 병력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규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 역사 1천여 년간 최대의 해외파병이었다.

 만약 이 일본군이 주류성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군과 합류할 경우, 총 병력은 5~6만에 이를 것이다. 비록 백제 부흥운동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 전쟁에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 들인것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선택으로 흑백논리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죽느냐 살아 남느냐의 문제였다.

 또한 백제를 합병한 신라로서는, 이땅을 온전하게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만약 그대로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승리한다면, 신라타도를 위해 더욱더 일본세력의 한반도 진출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663년  문무대왕은 백제합병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현재 금강유역으로 추정되는 백강 어귀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본군과 백제군이 합류하기 이전에 백강 어구의 주요지점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오랜 뱃길에 지친 몸을 쉴틈도 없이 상륙하자마자 신라군과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왕 김법민(문무대왕의 이름)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왜인을 백강 어귀에서 만나 네 번 싸움에서 모두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물이 붉어졌다.'

 문무대왕은 백강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백제와 일본의 연합작전을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흔히 우리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신라의 승리조차 깍아내리려는 역사적 관점을 보곤 하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승리는 승리자체로 온당하게 평가되어야지, 우리가 우리역사를 깍아내리면 도데체 어느누가 우리역사를 존중해 주겠는가?
 
 백강전투는 우리나라역사서와 일본역사서에 모두 나와있는 분명한 신라의 승리이며, 이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 땅을 지켜내고 그 가치를 이어가야할 중대한 역사의 기로에 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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