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국역 삼국사절요- 9,10,11권

吾心竹--오심죽-- 2010. 2. 2. 20:12

 
 
국역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9권 한국사 일반

2008/05/1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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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9권

 

 

 

병오년(丙午年; 646)

신라 선덕왕 15년, 고구려 보장왕 5년, 백제 의자왕 6년

당(唐)나라 정관 20년

 


봄 2월 당 태종(唐太宗)이 서울[京師]에 돌아와서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天下)의 대군(大軍)을 가지고도 하찮은 오랑캐에게 곤욕(困辱)을 당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하니, 이정이 말하기를, "이는 도종(道宗)이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당 태종이 돌아보면서 묻자, 도종이 주필산(駐?山)에 있을 때에 빈 틈을 타서 평양(平壤)을 습격하자는 계책을 올렸던 것을 갖추어 진달하니 당 태종이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그 당시에 총망(총忙)하여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다."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고 두 미녀(美女)를 바치니 당 태종이 돌려보내면서 사신에게 이르기를,

"여색(女色)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그 친척과 멀리 떠나 있음을 민망히 여겨 내가 취(取)하지 않는다."하였다.

○고구려 동명왕모(東明王母)의 소상(塑像)에서 3일 동안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애당초 당 태종이 장차 돌아갈 때에 개소문(蓋蘇文)에게 궁복(弓服)을 보내왔는데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은데다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였으며, 비록 사신을 보내어 글월을 올리기는 하였으나 그 말이 대개 거짓되고 황탄(荒誕)하였다. 당나라 사신에게도 거만하게 대하였고 항상 변방의 틈을 엿보았다. 당 태종이 비록 여러 차례 신칙하여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으나 침략을 그치지 않으니 당 태종이 명을 내려 조공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다시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정미년(丁未年; 647)

신라 선덕왕 16년, 진덕왕(眞德王) 원년, 고구려 보장왕 6년, 백제 의자왕 7년

당(唐)나라 정관 21년

 


봄 정월 신라에서 대신(大臣)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이 선덕여주(善德女主)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폐(廢)하고자 하니 왕이 궁성(宮成) 안에서 이를 방어(防禦)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둔취(屯聚)하였고 왕사(王師 - 임금의군사)는 월성(月城)에 웅거(雄據)하여 10일 동안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하루는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이 사졸(士卒)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은즉 별이 떨어지는 아래에 반드시 유혈(流血)이 있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여주(女主)의 패망할 조짐이다."

하니, 사졸들이 환호(歡呼)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니 김유신(金庾信)이 왕을 뵙고 말하기를,

"길흉(吉凶)은 무상(無常)하여 오직 사람의 부르는 바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적작(赤雀 - 봉황(鳳凰)의 딴 이름)으로써 멸망하였고, 노(魯)나라는 기린(麒麟)을 얻음으로써 쇠잔하였으며,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꿩이 솥 귀[鼎耳]에 올라 우는 변고(變故)가 있음에도 중흥(中興)하였고, 정공(鄭公)은 용(龍)이 <성문(城門) 밖 유연(洧淵)에서> 싸웠음에도 창성(昌盛)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德)이 요망함을 이기는 이치를 안다면 성신(星辰)의 변괴(變怪)는 족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鳶)에 실려서 바람에 날려 하늘에 올라가는 것처럼 꾸미고 다음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소문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하늘에 도로 올라갔다."고 하여 적군(賊軍)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였다. 또 백마(白馬)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祭祀)지내고 주문(呪文)을 지어 외우기를,

"천도(天道)는 양(陽)이 강(剛)하고 음(陰)이 유(柔)하며 인도(人道)는 임금이 높고 신하는 낮은 것이니 혹시라도 이것이 바뀐다면 곧 대란(大亂)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비담 등은 신하로써 임금을 폐하기를 꾀하여 아래에서 위를 범(犯)했으니, 이는 이른바 난신 적자(亂臣賊子)인 것입니다. 이는 인신(人神)이 함께 미워하는 바이며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에서는 이에 뜻이 없고 도리어 왕성(王城)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가 나타났으니 이는 신이 의혹하여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니 착한 자를 친애(親愛)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여 신명(神明)의 수치(羞恥)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이에 여러 장졸(將卒)들을 동독(董督)하여 분격(奮擊)하니 비담 등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신라에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었으며 가운데는 비어있어 사람이 가운데에서 올라갔으니 높이가 몇 길[丈]이었다.

○신라왕 덕만(德曼)이 훙(薨)하니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였고 낭산(狼山)에 장사(葬事)지냈다. 왕이 평일(平日)에 죽을 때를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 날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왕이 세가지 일에 대하여 기미(幾微)를 알았다고 일컬었는데 대개 목단화(牧丹花)의 그림을 보고 향기(香氣)가 없음을 안 것과 개구리가 떼를 지어 우는 소리를 듣고 적병(敵兵)이 잠입(潛入)함을 안 것, 그리고 이처럼 죽을 기일(期日)을 미리 말한 것 등이다. 이에 진평왕(眞平王)의 동모제(同母弟)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이 즉위(卽位)하였으니 신장(身長)이 7척(尺)이요,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에 닿았다.

○신라에서 비담(毗曇)이 복주(伏誅)되었으니 연루(連累)된 자가 30인이었다.

○2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대아찬(大阿飡)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軍主)로 삼았다.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신라의 전왕(前王)을 추증(追贈)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삼았고, 인하여 신왕(新王)을 책봉(冊封)하여 주국 낙랑군왕(柱國樂浪郡王)을 삼았다.

○당 태종(唐太宗)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니 조정(朝廷)에서 의논하기를,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城)을 만들어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앞서 대가(大駕)가 친정(親征)하였을 때에 그 나라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정복한 성(城)에서는 곡식을 수확(收穫)하였으나 또 한재(旱災)가 잇달았으므로 백성들 가운데 태반은 곡식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자주 소부대(小部隊)를 보내어 번갈아 그 영토를 침략하여 저들로 하여금 명을 듣고 달려가기에 시달려 농기(農器)를 놓아 두고 보루(堡壘)에 들어가게 한다면, 수년(數年) 안에 천리(千里)가 쓸쓸해져 인심(人心)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강(鴨綠江)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取)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당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 진달(牛進達)로써 청구도 행군 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이해안(李海岸)으로써 부총관(副摠管)을 삼아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항해하여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태자 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으로써 요동도 행군 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朗) 등으로 부총관(副摠管)을 삼아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營州都督府)의 군사와 함께 신성(新城)의 길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두 부대(部隊)는 모두 수전(水戰)에 익숙하고 잘 싸우는 자를 뽑아 배속(配屬)시켰다.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등 몇 개의 성(城)을 거쳐 지나니 고구려 군사가 성에 의지하여 항전(抗戰)하였는데 이세적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그 성의 외곽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가을 7월 우진달(牛進達)과 이해안(李海岸)이 고구려 경내(境內)에 들어가 무릇 백여 차례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켰고, 전진(前進)하여 적리성(積利城) 아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와 싸우므로 이해안이 이를 쳐서 깨뜨렸는데 고구려 군사로서 전사(戰死)한 자가 3천인이었다. 당 태종이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하여 강남(江南) 12주(州)의 공인(工人)을 징발하여 큰 병선(兵船) 수백 척(隻)을 만들게 하였으니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앞서 왕을 책봉한> 것에 대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신라에서 연호(年號)를 고쳐 태화(太和)라고 하였다.

○8월 신라에서 혜성(彗星)이 남쪽에 나타났고 또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 백제의 장군(將軍) 의직(義直)이 신라의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洞岑) 세 성(城)을 에워싸니 신라왕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백제의 군사가 매우 강성(强盛)하였으므로 김유신이 고전(苦戰)하여 힘이 다하였다. 신라의 군중(軍中)에 비령자(丕寧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힘써 싸우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차가운 겨울이 된 연후에야 송백(松栢)의 굳센 절개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일이 긴급한데 그대가 아니면 누가 분려(奮勵)하고 기이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동(激動)시키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말하기를,

"이제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독 나에게 부탁하였은즉 마음을 알아준다고 할 만하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나와서 그의 종 합절(合節)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의당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知己)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한다. 나의 아들 거진(擧眞)은 어려서부터 장대한 뜻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나와 함께 전사(戰死)하려 할 것이나 부자(父子)가 함께 죽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전사하거든 네가 거진과 더불어 나의 시체(屍體)를 수습하도록 하라."

하고, 창을 비껴들고 적진(敵陣)에 돌진(突進)하여 몇 사람을 쳐서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에 거진이 적진에 달려가 함께 전사하고자 하니, 합절이 말고삐를 잡고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부친(父親)의 유명(遺命)이 있었는데 이제 유명을 저버린다면 어찌 효도(孝道)가 되겠습니까"?하니, 거진이 말하기를,

"부친의 죽음을 보고도 구차하게 살아있다면 또한 어찌 효도가 되겠는가"?

하고, 합절의 어깨를 칼로 치고 적진에 달려가 또한 전사하였다. 이에 합절이 말하기를,

"상전(上典)이 전사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는, 또한 적군과 교전(交戰)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삼군(三軍)이 감격하여 일제히 나아가 향하는 곳마다 격파하였으니 3천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고 의직은 겨우 몸만 빼내어 달아났다. 이에 김유신이 이들 세 사람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매우 통곡(痛哭)하였고 왕도 애통히 여겨 예(禮)로써 장사지냈으며 유족(遺族)들에게 후한 은상(恩賞)을 내려주었다.

○11월 신라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였다.

○12월 고구려왕이 그의 차남(次男) 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를 당 나라에 보내어 사죄(謝罪)하였다.

 

 

 

무신년(戊申年; 648)

신라 진덕왕 2년, 고구려 보장왕 7년, 백제 의자왕 8년

당(唐)나라 정관 22년

 


봄 정월 신라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우무위 대장군(右武衛大將軍) 설만철(薛萬徹)로써 청구도 행군 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배행방(裴行方)으로써 부총관(副摠管)을 삼아 군사 3만여 명 및 누선(樓船) 전함(戰艦)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3월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신라의 서쪽 변방에 침입(侵入)하여 요거(腰車) 등 10여 성(城)을 함락시켰으며 여름 4월에는 진군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니 신라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량주 도독(押梁州都督)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挾擊)하니 백제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김유신이 이를 추격하여 거의 섬멸(殲滅)하니 신라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려주었다.

○당(唐)나라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쳐들어왔는데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騎兵) 5천명과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를 깨뜨렸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밤을 타서 고신감의 선박(船舶)을 습격하였는데 저들의 복병(伏兵)을 만나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은 고구려가 피폐(疲弊)했다고 하여 명년에 30만 대군(大軍)을 동원(動員)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혹자(或者)가 이르기를,

"대군(大軍)이 동정(東征)하려고 하면 모름지기 1년을 지탱할 양식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거마(車馬)로써 운반할 수가 없으니 주함(舟艦)을 갖추어서, 수로(水路)로 수송해야 합니다. 수(隋)나라 말엽에 검남(劒南)1)에서는 유독 도적이 없었고 근래 요동(遼東)의 전역(戰役)에도 참여하지 아니하여 그 백성이 풍요(풍饒)할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추함을 만들도록 하소서."하니, 당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가을 7월 당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左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劒南道)에 보내어 나무를 베어 주함[舟船]을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 길이가 1백척(尺)에 너비는 그 반이었다. 그리고 따로 사신을 보내어 수로(水路)로 가서 무협(巫峽)에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를 거쳐 내주(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고구려 서울에서 여인(女人)이 아들을 낳았는데 몸체는 하나요 머리는 둘이었다.

○9월 고구려에서 노루 떼가 강(江)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났고, 이리 떼도 서쪽으로 향하여 달아나서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唐太宗)이 우무위 대장군(右武衛大將軍)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압록강(鴨綠江)에 들어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거리에 머물러 진(陣)을 치게 하니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설만철이 우위 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보내어 보졸(步卒) 및 여러 군사를 이끌고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니 배행방 등이 군사를 전진시켜 성(城)을 포위하였다. 박작성은 산(山)에 의지하여 요새(要塞)를 설치하고 압록강이 둘러 있어 견고하였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안지(安地) 등 여러 성(城)의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구원하니 양진(兩陣)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설만철도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항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당 태종이 또 내주 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명하여 군량과 군기(軍器)를 수송(輸送)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저장(貯藏)하게 하였으니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侵攻)하기 위한 것이었다.

○겨울 신라에서 한질허(邯帙許)를 시켜 당(唐)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당 태종(唐太宗)이 어사(御史)를 시켜 묻기를,

"신라에서 대조(大朝 - 당(唐)나라)를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年號)를 사용하는가"?

하니, 한질허가 대답하기를,

"중국(中國)에서 일찍이 정삭(正朔)을 반포(頒布)하지 않았으므로 선조(先祖)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사사로이 연호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약 대조에서 명령이 있었다면 소국(小國)에서 어찌 감히 연호를 사사로이 쓰겠습니까"?하니, 당 태종이 옳게 여겼다.

○신라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백제를 침공(侵攻)하였다. 애당초 김유신이 양주(梁州)에 머물면서 몇달 동안 술을 마시고 풍악(風樂)이나 울리면서 군려(軍旅)에는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니 고을 사람들이 비방하기를,

"군사들이 오랫동안 편안하여 한 번 싸울 여력이 있는데 장군(將軍)이 세월만 끌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이를 듣고서 백성들의 쓸 만함을 알고 왕에게 고(告)하여 백제를 쳐서 대량주(大梁州)의 패전(敗戰)을 앙갚음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적은 군사로써 대군(大軍)을 건드렸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사의 승패(勝敗)는 크고 작은 데에 있지 않고 인심(人心)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의> 주(紂)에게는 억조(億兆)의 신민(臣民)이 있었으나 마음이 떠나고 덕(德)이 떠났으니 주(周)나라에 치신(治臣) 10인이 있어서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함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군중(軍衆)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생(死生)을 같이 할 수 있으니 백제는 족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김유신이 드디어 대량성(大梁城) 밖에 진군(進軍)하니 백제의 군사가 맞아 싸웠는데 김유신이 거짓 패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백제가 경솔히 여겨 대군을 이끌고 추격(追擊)해오자 복병(伏兵)을 일으켜 앞뒤에서 협격(挾擊)하여 크게 깨뜨리고 비장(裨將) 8인을 사로잡았으며 참수(斬首)한 것이 1천급(級)이었다. 김유신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백제의 장군에게 고하기를,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 및 그의 아내 김씨(金氏)의 유해(遺骸)가 그대의 나라 옥중(獄中)에 묻혀 있다. 이제 그대의 비장(裨將) 8인이 우리에게 사로잡혀서 엎드려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는데 내가 그 고향을 그리워하는 뜻을 불쌍히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죽은 자의 유해를 보내고 살아있는 포로와 바꾸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백제의 좌평(佐平) 중상(仲常)이 왕에게 말하기를,

"죽은 자의 유해는 머물러 둔들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신라에서 약속을 어긴다면 허물이 저들에게 있습니다."

하고, 품석 부처(夫妻)의 유해를 관에 넣어 돌려 보내니 김유신이 비장 관에 넣어 8인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승세(勝勢)를 타서 백제의 경내(境內)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城)을 쳐서 함락시켰고 2만여 급(級)을 참수하였으며 9천명을 사로잡았다. 또 진례(進禮) 등 9성(城)을 도륙(屠戮)하여 9천여 급을 참수하였고 6백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논공(論功)할 때 김유신에게 직질(職秩)을 더하여 이찬(伊飡)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을 삼았다.

○신라왕이 이찬(伊飡) 김춘추(金春秋) 및 그 아들 김문왕(金文汪)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당 태종(唐太宗)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시켜 교외(郊外)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고 궁성(宮城)에 당도해서는 당 태종이 김춘추의 풍채가 영명(英明)한 것을 보고 후대(厚待)하였다. 김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參觀)하기를 청하니 당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고, 인하여 어제(御製) 온탕비문(溫湯碑文)?진사비문(晉祠碑文)과 새로 찬술(撰述)한 《진서(晉書》를 내려주었다. 또 한가한 겨를에 김춘추를 불러들여 만나보고 금?백(金帛)을 후히 주면서 묻기를,

"경(卿)이 소회(所懷)가 있는가"?

하니, 김춘추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편벽되이 바다 모퉁이에 있어 천조(天朝)를 섬겨온 지 이미 오랜 세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억세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자행하였고 지난해에는 대거 침입(侵入)하여 수십 성(城)을 함락시켜 입조(入朝)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陛下)의 천위(天威)를 빌려 이 흉적(凶賊)을 제거(除去)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천조(天朝)에 조공하기를 다시 바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당 태종이 매우 옳게 여기고 또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 김유신이란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김유신이 비록 약간의 재주와 지략(智略)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폐하(陛下)의 위엄을 의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당 태종이 말하기를,

"신라는 진실로 군자(君子)의 나라이다."

하고,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김춘추가 또 장복(章服벼슬아치의공복(公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制度)를 쫓기를 청하자 이에 궁중(宮中)에서 진귀한 장복을 내어 김춘추와 그 수종자에게 하사(下賜)하였으며, 조칙(詔勅)을 내려 김춘추를 특진관(特進官)에 제수(除授)하였고 김문왕(金文汪)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삼았다. 김춘추가 장차 돌아올 때에는 조칙을 내려 3품 이상 관원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게 하여 대우가 극진하였다. 김춘추가 아뢰기를,

"신에게 아들 일곱이 있는데 아들 하나를 머물러두어 숙위(宿衛)에 충당하기를 원하옵니다."

하고, 김문왕을 머물러두고 돌아왔다. 김춘추가 해상(海上)에 이르러 고구려의 순라병(巡羅兵)을 만났는데 그의 수종자(隨從者) 온군해(溫君解)가 고관(高冠)과 대의(大衣)를 착용(着用)하고 선박(船舶) 위에 앉았더니 순라병이 김춘추로 여기고 죽였으며 김춘추는 조그만 배를 타고 화를 모면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온군해를 가상히 여겨 대아찬(大阿飡)을 증직(贈職)하였고 그 자손에게 후히 상(賞)을 내려주었다. 김춘추가 김유신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운명에 달려있기에 살아 돌아와 다시 공(公)과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나라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다시 백제와 싸워 20성(城)을 함락시켰고 3만여 명을 참획(斬獲)하였으며 또 품석(品釋) 부처(夫妻)의 유해(遺骸)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천행(天幸)이다."하였다.

 

 

 

기유년(己酉年; 649)

신라 진덕왕 3년, 고구려 보장왕 8년, 백제 의자왕 9년

당(唐)나라 정관 23년

 


봄 정월 신라에서 비로소 중국의 제도에 의하여 관복(冠服)을 만들었다.

○여름 4월 당 태종이 승하(昇遐)하였고 유조(遺詔)로써 요동(遼東)의 전역(戰役)을 파(罷)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애당초 당 태종이 요동(遼東)을 원정(遠征)하였을 때에 간쟁(諫諍)하는 자가 하나만이 아니었다. 또 안시성(安市城)에서 철군(撤軍)한 후에 성공(成功)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깊이 뉘우쳐 탄식하기를, "만약 위징(魏徵)이 생존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런 원정은 하지 않도록 하였을 것이다."고 하였다. 재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글을 올려 간하기를, "노자(老子)의 말에 족(足)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는데, 폐하(陛下)의 위명(威名)과 공덕(功德)이 이미 족(足)하니 국토(國土)를 널리 개척(開拓)하는 것은 멈추셔야 합니다. 또 폐하께서 매양 중죄수(重罪囚) 하나를 재결할 때라도 반드시 세 번 복심(覆審)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소찬(素饌)을 드시고 음악을 그치게 하는 것은 인명(人命)을 소중하게 여기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무죄(無罪)한 사졸(士卒)들을 몰아다가 창?칼 아래에 내맡겨 싸움터에서 죽게 하였으니 이는 유독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에서 신하로서의 예절을 어겼다면 죽여도 가(可)하고, 백성을 침요(侵擾)하였다면 멸(滅)해도 가하며, 후일 중국(中國)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도 가할 것입니다만, 이제 이 세 가지 조항(條項)이 없는데도 공연히 온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는 전대(前代 - 수(隋)나라)의 수치(羞恥)를 씻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려고 하니, 어찌 얻는 것은 적고 잃는 바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고구려에서 개과자신(改過自新)하기를 허락하시어 거대(巨大)한 전함(戰艦)을 불사르고 응모(應募)한 군중(軍衆)을 혁파(革罷)하신다면 자연히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나라 모두에 경사(慶事)가 잇달고 원근(遠近)이 모두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양국공(梁國公 - 방현령을 양국공에 봉했음)이 죽음을 앞에 두고 한 말이 이와같이 간곡하였는데도 당 태종이 따르지 않고 동방(東方)을 빈 터로 만들어 스스로 시원하게 하려 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치고 말았다.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장황(張皇)함을 좋아하고 공명(公明)을 기뻐하여 원정(遠征)에 군사를 수고롭게 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유공권(柳公權)의 소설(小說)에 이르기를, "주필산(駐?山)의 전역(戰役)에서 고구려 군사가 말갈(靺鞨)의 군사와 연합하여 진세(陣勢)가 40리(里)에 뻗치니 당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육군(六軍 - 천자(天子)의 군대를 말함.)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制壓)을 당하여 거의 떨치지 못하였고, 정탐(偵探)한 자의 보고에 영국공(英國公 - 이세적(李世勣)의 봉호(封號))의 휘하(麾下) 흑기부대(黑旗部隊)가 포위되었다고 하자 당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마침내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는데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 및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자기 나라 체면(體面)을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가을 8월 백제에서 좌장군(左將軍) 은상(殷相)을 보내어 정병(精兵) 7천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신라왕이 대장군(大將軍) 김유신 및 장군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방어하게 하였는데 군사를 다섯길로 나누어 공격하여 10일 동안 격전(激戰)을 겪었으나 승부(勝負)가 나지 않았고 시체(屍體)가 벌판에 가득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군(進軍)하여 말을 쉬게 하고 사졸들에게 음식을 먹게 하였는데 마침 물새[水鳥]가 동쪽으로 날아가며 김유신의 군막(軍幕) 위를 지나니 장졸(將卒)들이 모두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는 족히 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오늘 반드시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偵探)할 것이니 너희들은 거짓 모르는 체하라."

하고, 또 사람을 시켜 군중(軍中)에 다니면서 영(令)을 내리기를,

"군루(軍壘)를 굳게 지키고 요동하지 말라. 내일 원군(援軍)이 오기를 기다려 결전(決戰)하겠다."

하였다. 정탐한 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 운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의 생각에 적(敵)의 원군(援軍)이 증가(增加)되리라고 여겨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틈에 김유신 등이 분격(奮擊)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어 장군 정중(正仲)을 사로잡았고 은상 및 장사(將士) 10인과 군졸 8천 9백 80인을 참수(斬首)하였으며 말 1만필(匹)을 노획하였고 그 밖에 병기(兵器)는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백제의 좌평(佐平) 정복(正福)이 그 무리들과 함께 항복하니 김유신이 모두 놓아주었다. 개선하니 신라왕이 이를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한 상(賞)을 내려주었다.

○겨울 11월 백제에서 천둥하였으며 얼음이 얼지 않았다.

 

 

 

경술년(庚戌年; 650)

신라 진덕왕 4년, 고구려 보장왕 9년, 백제 의자왕 10년

당(唐)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

 


여름 4월 신라에서 교령(敎令)을 내려 진골(眞骨)로서 작위(爵位)를 가진 자는 아홀(牙笏)을 사용하게 하였다.

○6월 신라왕이 김춘추(金春秋)의 아들 김법민(金法敏)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를 쳐서 깨뜨린 사유를 고하였고, 또 왕이 직접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비단에 무늬를 짜서 만들어 바쳤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대당(大唐)이 큰 왕업을 열었으니,大唐開洪業

높고 높은 임금의 계책이 창성하도다.巍巍皇猷昌

전쟁을 그쳤으니 군사들은 안정을 얻었고,止戈戎威定

문치를 이루어 1백 성왕을 계승했노라.修文繼百王

하늘을 대신하여 단 비를 내렸고,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려 빛을 머금었다.理物體含章

깊은 인덕은 일월과 화합하였고,深仁諧日月

운수를 돌려 태평세대를 이루었네.撫運邁時康

번기는 어이 그리 선명하게 나부끼며,幡旗何赫赫

징과 북은 어이 그리 굉굉하게 울리는가.鉦鼓何赫赫)

천명(天命)을 어기는 외방의 오랑캐는,外夷違兪者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로다.剪覆披天殃

순박한 풍속은 어둔 데나 밝은 데나 엉겨 이루었고,淳風凝幽顯

상서로운 징조를 원근에서 다투어 올렸도다.遐通競呈祥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의 기운은 옥촉과 같이 온화하였고,四時和玉燭

일월과 오성(五星)의 칠요는 만방에 고루 비추었네.七曜巡萬方

산악의 기운으로 훌륭한 인재 태어났고,維嶽降帝輔

성군은 충량한 신하에게 정사를 맡겼도다.維帝任忠良

삼황과 오제가 한 덕을 이루었으니五三成一德

우리 당나라의 아름다움을 밝게 빛냈노라."詔我唐家皇

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김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을 제수(除授)하여 돌려보냈다.

○가을 7월 고구려에서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으며 민간(民間)에 기근(饑饉)이 들었다.

○신라에서 비로소 당(唐)나라의 영휘(永徽)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에서 각기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세(後世)에 연호(年號)를 일컬은 것은, 모두 크게 하나로 모으고 백성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려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때를 타서 함께 일어나 양립(兩立)하여 천하(天下)를 다투거나, 또는 간웅(姦雄)이 틈을 타서 얼마나 천자(天子)의 보위(寶位)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는 한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행(使行)과 조공(朝貢)이 길에 연달았는데도 법흥왕(法興王)이 스스로 연호를 지어 사용하였으니 이는 그릇된 것이다. 그 후에도 잘못되고 그릇됨을 되풀이하여 여러 해를 지났으며 당 태종의 책망을 듣고도 오히려 옛 습속(習俗)을 인습(因襲)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당 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이는 비록 부득이(不得已)한 데에서 나왔으나 허물을 능히 고친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이 그 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들고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고구려를 떠나 백제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신해년(辛亥年; 651)

신라 진덕왕 5년, 고구려 보장왕 10년, 백제 의자왕 11년

당(唐)나라 영휘 2년

 


봄 정월 초하룻날 신라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신정 하례(新正賀禮)를 받았으니 하정(賀正)의 예(禮)가 이에서 비롯되었다.

○2월 신라에서 품주(稟主)를 고쳐 집사부(執事部)로 하고 인하여 파진찬(波珍飡) 죽지(竹旨)를 집사부 중시(執事部中侍)로 삼아 기밀사무(機密事務)를 관장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김인문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을 익혀 여러 서적(書籍)을 널리 읽었으며 노?장(老莊)과 부도(浮屠 - 불교(佛敎))의 설(說)을 겸하여 섭렵하였다. 예서(隷書)를 잘 썼고 사어(射御)에 능숙하였으며, 음률(音律)에 밝고 식견(識見)과 도량(度量)이 원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가, "바다를 건너와 입조(入朝)한 그 충성이 가상하다."고 이르면서 특별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을 제수하였으니 김인문의 나이 23세였다.

○신라에서 조부(調府)를 두었는데, 영(令) 2인은 위계(位階)가 금하(衿荷)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가 맡았고, <조부에 속한> 대사(大舍) 2인과 창부(倉部)의 영(令) 2인은 위계가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대각간(大角干)까지가 맡았으며, <창부에 속한> 경(卿) 2인, 대사(大舍) 2인, 사(史) 8인과 예부(禮部)의 경(卿) 2인, 대사(大舍) 2인, 사(史) 8인과 영객부(領客部)의 영(令) 2인은 위계가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각간(角干)까지가 이를 맡았다. 좌이방부(左理方府)의 영(令) 2인은 위계가 급찬(級飡)으로부터 잡찬(?飡)까지가 맡았고, <좌이방부에 속한> 경(卿) 2인, 좌(佐) 2인과 상사서(賞賜署)의 대사(大舍) 2인, 국학(國學)의 대사(大舍) 2인, 음성서(音聲署)의 대사(大舍) 2인, 공장부(工匠部)의 주서(主書) 2인은 위계가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맡았으며, <공장부에 속한> 사(史) 4인과 채전(彩典)의 주서(主書) 2인은 위계가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맡았고, <채전에 속한> 대사(大舍) 2인은 위계가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맡았으며, 사(史) 4인이 있었고, 시위부(侍衛府)에 삼도(三徒)가 있었다.

○백제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에 당 고종(唐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왕에게 효유(曉諭)하기를,

"해동(海東)의 세 나라는 창업(創業)한 지 이미 오래었으며 경계(境界)가 서로 잇대어 있어 지세(地勢)가 들쭉날쭉하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드디어 혐의(嫌疑)스런 틈이 생겨 전쟁이 연달았으므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그리하여 삼한(三韓)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이 칼과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칼로써 서로 원한(怨恨)을 갚아 싸움이 조석(朝夕)으로 잇달았으니 짐(朕)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처지에 있어 이를 매우 민망히 여기는 바이다. 지난 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入朝)하였기에 내가 그들에게 서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和睦)한 관계를 돈독히 하라고 명하였더니 신라의 사신 법민(法敏)이 아뢰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同盟)을 맺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번갈아 침략해 오니 우리의 큰 성(城)과 중진(重鎭)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倂合)되어 강토(疆土)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威力)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詔書)를 내려 침략한 성(城)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되 다만 옛 영토(領土)만 찾으면 곧바로 화친을 청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짐은 그 말이 이치에 타당하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齊桓公)은 제후(諸候)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멸망한 위(衛)나라를 존속(存續)시켰거니와 하물며 나는 만승(萬乘)의 천자(天子)로서 어찌 위급한 번방(藩邦)을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이 겸병(兼倂)한 신라의 성(城)을 모두 그 본국(本國)에 돌려주면 신라에서도 또한 잡아간 백제의 포로를 왕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런 연후에 환난(患難)과 분규(紛糾)를 풀고 창?칼을 거두어 들이면 백성은 편안히 쉬고 싶은 소원을 이룰 것이고 삼국(三國)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이를 저 변방에서 피를 흘리고 강역[疆場]에 시체(屍體)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전폐(全廢)하여 남녀(男女)가 살 길이 없는 것과 비교하여 어찌 동일(同一)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일 지시(指示)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법민의 소청에 의하여 그들이 왕과 결전(決戰)하도록 맡겨둘 것이며,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면 곧 거란(契丹) 등 여러 나라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숙히 들어가 공략(攻掠)하도록 할 것이다. 왕은 깊이 짐의 말을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록(福祿)을 구하고 양책(良策)을 도모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652)

신라 진덕왕 6년, 고구려 보장왕 11년, 백제 의자왕 12년

당(唐)나라 영휘 3년

 


봄 정월 신라에서 파진찬(波珍飡) 천효(天曉)를 좌이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신라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구려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백제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3월 신라의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신라의 왕궁(王宮) 남문(南門)이 저절로 무너졌다.

 

 

 

계축년(癸丑年; 653)

신라 진덕왕 7년, 고구려 보장왕 12년, 백제 의자왕 13년

당(唐)나라 영휘 4년

 


봄 백제에서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백제에서 왜국(倭國)과 더불어 통호(通好)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갑인년(甲寅年; 654)

신라 진덕왕 8년, 태종왕(太宗王) 원년, 고구려 보장왕 13년, 백제 의자왕 14년

당(唐)나라 영휘 5년

 


봄 3월 신라왕 승만(勝曼)이 훙(薨)하니 여러 신하들이 이찬(伊飡) 알천(閼川)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노부(老夫)는 내세울 만한 덕망이 없고,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김춘추 같은 이가 없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推戴)하니 김춘추가 세 번 사양한 연후에 즉위(卽位)하였다. 김춘추는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었다.

○신라에서 전왕(前王)의 시호(諡號)를 진덕(眞德)이라 하였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唐高宗)이 신라왕의 훙서 소식을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거애(擧哀)하였으며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시켜 부절(符節)을 가지고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전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증직(贈職)하였으며 채단(綵緞) 3백필(疋)을 내려주었다.

○여름 4월 신라왕이 그 부친(父親)을 추존(追尊)하여 문흥 대왕(文興大王)을 삼고, 모친(母親)을 추존하여 문정 태후(文貞太后)를 삼았으며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고구려에서 신인(神人)이 마령산(馬嶺山) 위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군신(君臣)의 사치(奢侈)가 한도(限度)가 없으니 곧 멸망하리라."하였다.

○5월 신라에서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종전의 율령(律令)을 참작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 격(格)은 법식(法式)) 60여 조(條)를 정(定)하였다.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신라 왕을 책명(冊命)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을 삼았다. 보내온 조서(詔書) 가운데 해석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는데 우두(牛頭)란 자가 능히 이를 해석하였으므로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그 성명(姓名)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본래 임나 가량(任那加良) 사람 우두입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卿)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라고 일컬을 만하다."

하고, 사례하는 표문(表文)을 짓게 하였는데 문치(文致)가 공교하고 뜻이 곡진(曲盡)하였으므로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임생(任生)이라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강수는 생업(生業)에 힘쓰지 않아 가세(家勢)가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에서 거두는 조세(租稅) 1백 석(石)을 내려주게 하였으니, 강수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었다. 처음에 그 어미가 꿈에 뿔 돋친 사람을 보고 인하여 태기(胎氣)가 있었는데 낳고 보니 머리 뒷부분에 뼈가 높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아비가 상(相)을 보는 자에게 아이를 보이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들은즉 복희(伏羲)는 범의 형상이요, 여왜(女))는 뱀의 몸이며, 신농(神農)은 소의 머리[牛頭]요, 고요(皐陶)는 말의 입[馬口]이라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성현(聖賢)은 그 상모(相貌)가 특이(特異)하였다. 이제 이 아이를 본즉 머리에 뿔 같은 뼈가 돋았고 또 사마귀가 있는바, 상법(相法)에 얼굴에 사마귀가 있으면 나쁘고 머리에 사마귀가 있으면 좋다고 하였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영특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하니, 그 아비가 돌아와 아내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凡常)하지 않으니 잘 기르라."

하였다. 강수가 장성함에 미쳐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글의 뜻에도 환히 통했으므로 그 아비가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묻기를,

"네가 불교(佛敎)를 배우겠느냐? 아니면 유교(儒敎)를 배우겠느냐"?

하자, 대답하기를,

"불교는 세상 밖에 속한 종교(宗敎)이니 유교를 배우고자 원합니다."

하니, 그 아비가 말하기를,

"네 좋아하는 대로 하라."

하였다. 이에 드디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읽어 그 조예(造詣)가 더욱 고상(高尙)하였다. 강수가 일찍이 대장장이 집안[冶家]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 부모(父母)가 장차 좋은 가문(家門)의 처녀와 예(禮)로써 재혼(再婚)시키려 하니 장수가 듣지 않았다. 그 아비가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너는 현재 명망이 높은데 한미(寒微)한 자로써 배필을 삼으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하니, 강수가 말하기를,

"일찍이 옛사람의 말을 들은즉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당(堂)에서 내쫓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하였다.

○신라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글월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장수(將帥) 안고(安固)를 보내어 말갈(靺鞨)의 군사와 연합(聯合)하여 거란[契丹]을 공격하였는데 송막 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방어하여 신성(新城)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신라에서 계금당(?衿幢)을 두었는데, 금장(衿章)은 붉은 빛깔이었다.

 

 

 

을묘년(乙卯年; 655)

신라 태종왕 2년, 고구려 보장왕 14년, 백제 의자왕 15년

당(唐)나라 영휘 6년

 


봄 정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금강(金剛)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파진찬(波珍飡) 문충(文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고구려에서 백제?말갈(靺鞨) 군사와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邊境)을 쳐서 33성(城)을 탈취하니 신라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2월 백제에서 태자궁(太子宮)을 중수(重修)하였는데 사치와 장려(壯麗)함이 극단에 이르렀고 왕궁(王宮)의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3월 당(唐)나라에서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무위 중랑장(左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신라왕이 원자(元子) 법민(法敏)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고, 서자(庶子 - 중자(衆子)를 말함) 문왕(文汪)을 이찬(伊飡)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知鏡)과 개원(愷元)을 아울러 이찬으로 삼았다.

○여름 5월 <당(唐)나라의> 정명진(程名振) 등이 요수(遼水)를 건너니 고구려인들이 당나라 군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城門)을 열고 귀단수(貴湍水)를 건너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분격(奮擊)을 가하여 대승(大勝)을 거두고 1천여 명을 살획(殺獲)하였으며 그 성(城)의 외곽과 촌락(村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백제에서 마천성(馬川城)을 중수(重修)하였다.

○9월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때에 백제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奢侈)하고 음란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원망하고 신명(神明)이 노여워하여 재변과 괴이한 일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이에 김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가 무도(無道)하여 죄악이 걸?주(桀紂)보다도 더하니 이는 진실로 하늘에 순응(順應)하여 그 나라를 정벌하고 백성들은 무마(撫摩)할 때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급찬(級飡) 조미갑(租未<<확인요 한자: 土+甲>>)이 부산 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사로잡혀 가서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집 노복(奴僕)이 되어 모든 일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으므로 임자가 임의로 드나들게 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조미갑이 도망해 돌아오니 김유신이 쓸 만한 사람임을 알고 말하기를,

"내가 들은즉 임자(任子)가 백제의 일을 주관한다 하니 그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중간 역할(役割)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그대가 가서 나의 말을 전하라."

하니, 조미갑이 말하기를,

"공(公)이 저를 불초(不肖)하다 하지 않으시고 일을 시켜주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미갑이 드디어 백제에 가서 임자에게 고하기를,

"제가 백제 사람이 되었는 바 백제의 풍속을 아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잠깐 밖에 나가 보았으나 견마(犬馬)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금할 수 없어 다시 왔습니다."

하니, 임자가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조미갑이 조용히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곧바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김유신이 나로 하여금 임자(任子)에게 고하게 하기를,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흥망(興亡)을 미리 알 수 없으니 만약 백제가 멸망한다면 그대가 나에게 의지하고 신라가 멸망한다면 내가 그대에게 의지함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자가 묵묵히 말이 없었으니 조미갑이 두려워하여 물러나왔다. 그 후 몇 달 만에 임자가 조미갑에게 말하기를.

"네가 전에 말한 것은 이미 소상히 알았으니 신라에 돌아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라."

하였다. 이에 조미갑이 드디어 신라에 돌아와 김유신에게 고하고 백제의 일을 소상히 말하니 김유신이 이에 백제를 병탄(倂呑)할 계책을 더욱 서두르게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신라를 침략하는 것을 신라왕이 분통하게 여겨 이를 치고자 드디어 군사를 내어 김흠운(金歆運)으로써 낭당 대감(郞幢大監)을 삼았다. 김흠운이 명을 받들고 곧바로 출정(出征) 길을 떠나 백제의 양산(陽山) 아래에 주둔(駐屯)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백제의 군사가 밤을 타서 엄습(掩襲)하여 새벽에 군루(軍壘) 사이로 쳐들어오니 신라의 군사가 놀래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에 백제의 군사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갑자기 쳐들어와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데 김흠운이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군(敵軍)이 다가오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말하기를,

"이제 적군이 어두운 밤에 쳐들어와 지척(咫尺)을 분변할 수 없으니 공(公)이 비록 죽더라도 알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족(貴族)이며 대왕(大王)의 사랑하는 사위이니, 만약 적군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 되고 우리 나라의 수치(羞恥)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김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大丈夫)가 이미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맹세하였으니 남들이 알고 모르는 것은 관심이 없다. 어찌 명성(名聲)을 구하겠는가"?

하고는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으니 수송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김흠운이 칼을 휘두르며 적진(敵陣)에 돌입(突入)하여 몇 사람을 죽이고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태감(太監) 예파(穢破)와 소감(小監) 적득(狄得)이 또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김흠운의 전사한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김흠운은 권문 세가(權門勢家)의 귀족(貴族)인데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살아서 나라에 보탬될 것이 없는데 죽은들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

하고 적진(敵陣)에 내달아 전사하였다. 신라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김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一吉飡)을,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내마(大奈麻)를 증직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였다. 김흠운은 내물왕(奈勿王)의 8세손(八世孫)이요, 그 아비는 잡찬(?飡) 달복(達福)이었다. 김흠운이 젊었을 때에 화랑(花郞) 문노(文努)의 문(門)에 교유(交遊)하였는데, 그 때에 여러 도중(徒衆)들이, 전사(戰死)하여 명성(名聲)을 남긴 자의 일을 언급(言及)하니 김흠운이 개연(慨然)히 눈물을 흘리면서 격동되어 그들을 따라할 뜻이 있었으니, 동문(同門)의 승려(僧侶)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만약 이 사람이 적진(敵陣)에 다다른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계로(季路 -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묻기를, "부자(夫子 - 공자(孔子))께서 삼군(三軍 - 제후(諸侯)의 군사)을 지휘(指揮)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맨주먹으로 범을 치고 배[舟]도 없이 마구 강을 건너 죽어도 뉘우치지 않는 자와는 같이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신중(愼重)히 계책을 세워 이루는 자와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비록 자로(子路)의 간국(幹局)에 의하여 답변하신 것이지만 진실로 용병(用兵)의 요령이 되는 것이다. 군사의 많고 적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형세와 허실(虛實)도 살피지 아니하여 적군(敵軍)의 손에 경솔히 죽는 것이 일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내 몸이 죽음으로써 적군을 이길 수 있다면 죽어도 옳은 것이고, 내 몸이 살아서 나라에 욕이 된다면 죽어야 옳거니와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나의 몸을 경솔히 희생하여 적군의 마음을 쾌활하게 한단 말인가? 김흠운은 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경솔히 적군의 손에 죽었으니, 어찌 그 뜻은 장렬(壯烈)하지만 모략(謀略)에는 부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승패(勝敗)는 병가(兵家)의 보통 있는 일인데 죽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바에는 어찌 살아서 후일 보답(報答)할 것을 도모함만 같겠는가?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삶을 구하는 자에게 비교하면 월등(越等)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 전역(戰役)에서 취도(驟徒)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전사(戰死)하였다. 취도는 사량(沙梁) 사람 내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로서 형제 3인이 있었으니, 맏이는 부과(夫果)요, 둘째는 취도(驟徒)이며 막내는 핍실(逼實)이었다. 취도가 일찍이 출가(出家 - 승려(僧侶)가 되 는 것)하여 이름을 도옥(道玉)이라 하였고 실제사(實際寺)에서 거(居)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승려(僧侶)가 된 자는 첫째 술업(術業)을 정련(精鍊)하여 본성(本性)을 회복하고, 다음은 도용(道用)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베푼다고 하는데 나는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한 가지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으니 종군(從軍)하여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인하여 법의(法衣)를 법고 군복(軍服)을 입었으며 이름을 취도(驟徒)라고 고쳤으니 대체로 달리는 무리가 된다는 뜻이었다. 이에 드디어 병부(兵部)에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투속(投屬)하기를 청하고 종군하여 교전(交戰)함에 미쳐 적진(敵陣)에 뛰어들어 힘껏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겨울 10월 신라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고, 굴불군(屈弗郡)에서는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체는 둘이며 발은 여덟이 달렸다.

○신라왕이 왕녀(王女) 지조(智照)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신라에서 월성(月城)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병진년(丙辰年; 656)

신라 태종왕 3년, 고구려 보장왕 15년, 백제 의자왕 16년

당(唐)나라 현경(顯慶) 원년

 


봄 3월 백제왕이 궁녀(宮女)와 더불어 황음(荒淫)하고 탐락(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니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諫)하였는데 왕이 노여워하여 옥중(獄中)에 가두었으며 이로 인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식음(食飮)을 끊고 죽음에 임하여 글월을 올려 이르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을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세(時勢)의 변천(變遷)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곧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용병(用兵)하는 데에는 반드시 지세(地勢)를 살펴 선택(選擇)할 것이니 강의 상류(上流)에 처(處)하여 적군에 대응하여야 보전(保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적군이 쳐들어온다면 육로(陸路)로는 침현(?峴) - 일명 탄현(炭峴)이라고 한다)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기벌포(伎伐浦) - 일명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險峻)한 곳에 의거(依據)하여 적군을 방어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살펴보지 않았으니 성충이 드디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간(諫)하는 말을 듣고 허물을 고친 자로서 흥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간하는 말을 거절하고 자기의 말만 옳다고 내세우는 자로서 멸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의자왕(義慈王)은 성충의 간하는 말에 대하여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獄中)에 가두어 죽게 하고서야 그 마음에 시원하게 여겼으니 마침내 그 몸이 부로(?虜)가 되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실로 불행(不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수륙(水陸)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이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을 넘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을 지난 후에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뉘우쳤으니 또한 어찌 미칠 수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 서울에 쇠비가 내렸다.[雨鐵]쇠비가 내렸다.2)

○신라 김인문(金仁問)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왔다.

○가을 7월 신라왕이 그 아들 김문왕(金文汪)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겨울 12월 고구려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태자(皇太子)의 책봉(冊封)을 하례(賀禮)하였다.

 

 

 

정사년(丁巳年; 657)

신라 태종왕 4년, 고구려 보장왕 16년, 백제 의자왕 17년

당(唐)나라 현경 2년

 


봄 정월 백제왕이 그의 서자(庶子중자(衆子)) 41인을 모두 좌평(佐平)으로 삼고 각기 식읍(食邑)을 내려주었다.

○여름 4월 백제에서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 신라 일선군(一善郡)에 큰 물[大水]이 들어 익사자가 3백여 인(人)이었다.

○신라의 동쪽 토함산(吐含山)에서 땅이 타기 시작하여 3년만에 사라졌다.

○신라의 북암(北巖)이 무너지고 부서져서 쌀[米]이 되었는데 먹어본즉 창고의 묵은 쌀과 비슷하였다.

○신라에서 대일임전(大日任典)을 두었다.

 

 

 

무오년(戊午年; 658)

신라 태종왕 5년, 고구려 보장왕 17년, 백제 의자왕 18년

당(唐)나라 현경 3년

 


봄 정월 신라에서 중시(中侍) 문충(文忠)을 이찬(伊飡)으로 삼았고 문왕(文汪)을 중시로 삼았다.

○3월 신라왕이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여 백성들이 안정(安靜)하지 못하므로 경(京)을 파(罷)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진수(鎭守)하게 하였으며, 또 실직(悉直)으로써 북진(北鎭)을 삼았다.

○여름 6월 당(唐)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程名振)과 우영군 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신라에서 병부령(兵部令)을 고쳐 대사(大舍)를 삼았다.

 

 

 

기미년(己未年; 659)

신라 태종왕 6년, 고구려 보장왕 18년, 백제 의자왕 19년

당(唐)나라 현경 4년

 


봄 2월 백제에서 여우가 떼를 지어 왕궁(王宮)에 들어왔다.

○여름 4월 백제의 태자궁(太子宮)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交尾)하였다.

○백제에서 장수(將帥)를 보내어 신라의 독산(獨山)?동잠(桐岑) 두 성을 침공(侵攻)하였다.

○신라에서 장차 백제를 치기 위하여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5월 백제의 사비하(泗)河금강(錦江))에서 죽은 물고기가 떠올랐는데 길이가 세 길[丈]이었으며 이를 먹은 자는 모두 죽었다.

○백제의 생초진(生草津)에서 여자의 시체(屍體)가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척(尺)이었다.

○9월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에서 백조(白鳥)를 바쳤다.

○신라의 공주기군(公州基郡) 강중(江中)에서 큰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는데 길이가 1백 자[尺]였으며 이를 먹은 자는 모두 죽었다.

○고구려에서 호랑이 아홉 마리가 성(城)에 들어왔는데 이를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백제의 궁중(宮中)에 있는 느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곡(哭)하는 소리와 같았으며, 또 밤에는 귀신이 궁성(宮城) 남쪽 길에서 곡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백제를 치고자 하여 당(唐)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였는데 회보(回報)가 없으매 왕이 홀로 앉아 근심스러운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런데 홀연히 작고(作故)한 신하 장춘(長春) 및 파랑(罷郞)과 비슷한 자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신등은 비록 백골(白骨)이 되었으나 오히려 나라에 보답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당나라 황제(皇帝)가 이미 대장군(大將軍) 소정방(蘇定方)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명년(明年) 5월에 백제를 정벌토록 하였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이처럼 근심하시며 기다리시기에 감히 먼저 고(告)합니다."

하고, 인하여 간 곳이 없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장춘과 파랑 양가(兩家)의 자손에게 후한 상(賞)을 내려주었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창설하여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어주게 하였는데 장춘과 파방은 일찍이 백제와 싸울 때에 전사(戰死)한 사람이었다.

○11월 당(唐)나라 우영군 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 등이 고구려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 이겼다.

 

 

 

경신년(庚申年; 660)

신라 태종왕 7년, 고구려 보장왕 19년, 백제 의자왕 20년

당(唐)나라 현경 5년

 


봄 정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금강(金剛)이 졸(卒)하니 이찬(伊飡)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2월 백제 서울의 우물 물이 피처럼 붉었고, 서해(西海)의 물 가에는 물고기떼가 죽어 떠올랐는데 사람들이 이루 다 먹을 수가 없었으며, 사비하(泗)河)의 물이 피와 같이 붉었다.

○3월 당 고종(唐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門)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유백영(劉伯英)?방효공(龐孝公),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등과 수륙군(水陸軍)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신라왕으로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응원(應援)하게 하였다. 애당초 신라에서 당나라에 가서 숙위(宿衛)로 있는 김인문 편에 원군(援軍)을 요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당 고종이 백제를 토벌할 생각을 굳히고 인문을 불러 백제의 도로(道路)의 험준하고 평탄함을 물으니 김인문이 소상히 대답하였으므로 당 고종이 기뻐하여 김인문에게 부대총관을 제수하여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여름 4월 백제에서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으며, 도시(都市) 사람들이 공연히 놀라 달아나되 마치 잡으러 오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같이 하여 엎드러져 죽은 자가 거의 1백명이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신라왕이 직접 김유신(金庾信)?진주(眞珠)?천존(天存) 등을 이끌고 출정(出征) 길에 올랐다. 이때에 백제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많이 생겼다. 하루는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면서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塔)과 백석사(白石寺)의 강당(講堂)에 벼락이 쳤으며, 또 검은 구름이 일어나 용이 공중(空中)에서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또 들사슴[野鹿] 같은 개[犬]가 서쪽에서 와서 사비하(泗?河)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王宮)을 향하여 짖어댔으며, 서울에서 개들이 떼를 이루어 길에 모여 혹은 곡(哭)을 하고 혹은 짖어대기도 하였다. 또 귀신(鬼神)이 궁중(宮中)에 들어와 "백제가 망(亡)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땅을 파게 하였더니 3 자[尺] 깊이에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월륜(月輪)과 같고[百濟同月輪], 신라는 신월(新月)과 같다.[新羅如月新]"는 글귀가 있었다. 왕이 무당(巫堂)에게 물으니 그가 해석(解釋)하기를,

"월륜(月輪)과 같다는 것은 가득[滿]한 것이니 가득하면 기울어지는 것이요, 신월(新月)과 같다는 것은 차지[盈]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차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여워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혹자가 말하기를,

"월륜(月輪)과 같다는 것은 성만(盛滿)한 것이요, 신월(新月)과 같다는 것은 미약(微弱)함을 뜻한 것이니, 생각컨대 백제는 번성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것인가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6월 신라왕이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南川停)에 주둔(駐屯)하였는데 소정방(蘇定方)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병선(兵船)이 천리에 뻗쳐 덕물도(德物島)에 와서 군사를 멈추었다. 소 정방이 먼저 수종자(隨從者) 문천(文泉)을 보내어 대군(大軍)이 당도했음을 보고(報告)하니 신라왕이 태자(太子) 김법민(金法敏),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장군(將軍) 진주(眞珠)?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선 1백 척(隻)을 거느리고 소정방과 회합(會合)토록 하였다. 소정방이 김법민에게 이르기를,

"나는 해로(海路)를 따라 이르고 태자(太子)는 육로(陸路)를 따라 이르러 7월 아무 날로 기약(期約)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서 곧장 의자왕의 도성(都城)을 무찌르면 뜻을 이룰 것입니다."

하니, 김법민이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대군(大軍)이 오기를 바란 지 오래이니 만약 대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부리나케 식사(食事)를 하고 달려올 것입니다."

하였다. 소정방이 기뻐하여 김법민을 돌려보냈는데 김법민이 와서 소정방의 군세(軍勢)가 매우 강성(强盛)함을 말하니 왕이 기쁨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또 김법민?김유신?품일(品日)?흠춘(欽春) 등을 보내어 정병(精兵) 5만명을 거느리고 응원(應援)하게 하였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전진(前進)하여 주둔하였다. 백제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를 모아 방어할 대책을 물었다. 좌평(佐平) 의직(義直)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피곤할 것이니 갑자기 공격을 가하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의 군병들은 당나라의 후원(後援)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약 당 나라 군사가 실리(失利)한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머뭇거려 감히 날쌔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함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였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와서 뜻이 빨리 싸우려는 데에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신라 군사는 여러 차례 우리에게 패전(敗戰)하였으니 이제 우리의 병세(兵勢)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나라 군사의 길목을 막아 그 피곤함을 기다리고 먼저 한 부대(部隊)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군사를 공격하여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적당한 기회를 엿보아 당나라 군사를 공격한다면 우리 군사가 온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하니, 왕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좌평(佐平) 홍수(興首)가 일찍이 죄를 얻어 외방(外方)에 유배(流配)되어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일이 급하니 어찌하여야 옳겠는가"?

하니, 홍수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수가 이미 많고 사율(師律 - 군율(軍律))이 엄명(嚴明)한데다가 더구나 신라와 더불어 앞뒤에서 우리를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약 평원 광야(平原廣野)에서 대진(對陣)한다면 승패(勝敗)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 나라의 요충(要衝)으로서 한 군사가 단창(單槍)으로 지키면 1만 사람도 어쩌지 못하는 곳입니다. 마땅히 용사(勇士)를 가려 거기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서 대왕은 성문(城門)을 닫고 굳게 지켰다가 적군의 군량이 다하고 사졸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려서 이를 분격(奮擊)한다면 반드시 적군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홍수는 오랫동안 유배중(流配中)에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에 들어와 물을 거슬러 올라오게 하면 배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이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炭峴)에 올라 지름길로 쫓아 행진(行進)하게 하면 말을 나란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한다면, 비유컨대, 채롱 속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아서 모조리 잡을 수가 있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가을 7월 김유신(金庾信)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에 진군(進軍)하였는데 백제왕이 당나라 군사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결사대(決死隊) 5천명을 거느리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적은 군사로써 두 나라의 군사와 대항(對抗)하게 되었으니 그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아마도 처자(妻子)가 누(累)가 될 것이니 살아서 욕을 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가속(家屬)을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황산(黃山)에 이르러 먼저 험준(險峻)한 곳에 의거(依據)하여 진영(陣營)을 설치(設置)하였는데 갑자기 신라의 군사를 만나 계백이 군중(軍衆)에게 서약(誓約)하기를,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5천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깨뜨렸으니 오늘날 제군(諸君)들은 각기 분려(奮勵)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전(奮戰)하여 한 사람이 1천명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유신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차례 싸웠으나 이득(利得)이 없었고 사졸들은 힘이 다하였다. 이에 장군 흠춘(欽春)이 그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이르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의(忠義)를 다하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을 다하여야 하는데 위태한 데 임하여서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忠孝)를 모두 온전히 하는 길이다."

하니, 반굴이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적진(敵陣)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에게 관창(官昌)이란 아들이 있어 기사(騎射)에 능숙하였는데 이때에 부장(副將)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품일이 그 아들 관창을 불러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나이 겨우 16세이나 지기(志氣)는 자못 용맹스러우니 오늘은 공명(功名)을 세우고 부귀(富貴)를 취(取)할 때이다."

하였다. 이에 관창이 필마(匹馬) 단창(單槍)으로 적진에 내달아 몇 사람을 죽인 후에 적군(敵軍)에게 사로잡혀 백제의 장군 계백 앞에 끌려왔다. 계백은 그 나이 젊고 용맹스러움을 아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 기이(奇異)한 무사가 많으니 가벼이 대적(對敵)할 수가 없다. 소년(少年)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사(壯士)이겠는가"?

하고 놓아보냈다. 관창이 그 아비에게 말하기를,

"이제 적진(敵陣) 속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기치(旗幟)를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다시 적진에 달려가 힘껏 싸우니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 수급(首級)을 품일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품일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을 때와 같구나.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삼군(三軍)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진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크게 패(敗)하고 계백이 전사(戰死)하였으며,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 등 20여 인을 사로잡았다. 이에 신라왕이 관창과 반굴에게 급찬(級飡)을 증직(贈職)하였고 예(禮)로써 장사(葬事)지냈으며 그 집에 각기 견포(絹布) 각 30 필(疋)과 곡식 1백 석(石)을 부의(賻儀)하였다.

○소정방(蘇定方)과 김인문(金仁問) 등이 바다를 건너 기벌포(伎伐浦)에 당도하였는데 진흙과 수렁이 잇달아 행군(行軍)할 수가 없었으므로 버들자리[柳席]를 펴고서야 온 군사가 건너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웅진(熊津) 어귀에 군사를 집결시켜 방어하였는데 소정방은 좌편 물 가에서 나와 높은 곳에 올라 진(陣)을 치고 교전(交戰)하니 백제의 군사가 또 크게 패(敗)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이 당나라 군사의 진영(陣營)에 당도하니 소정방은 기일(期日)에 뒤진 것을 이유로 김유신의 휘하(麾下)에 있는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장차 목 베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소리내어 말하기를,

"대장군이 황산(黃山) 싸움의 처절함을 보지도 않고 기일에 뒤진 것으로 죄를 삼으려 하니 내가 죄도 없이 욕(辱)을 받을 수는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한 연후에 백제를 격파(擊破)하겠다."

하고, 부월(斧鉞)을 짚고 군문(軍門)에 섰는데 노(怒)한 머리칼은 위로 뻗치고 허리에 찬 보검(寶劒)은 저절로 뛰었다. 이에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의 발을 슬그머니 밟으면서 말하기를,

"신라의 군중(軍中)에서 장차 변괴가 일어나겠소."

하니, 소정방이 이에 김문영을 놓아주었다. 또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로 까마귀가 배회하기에 점을 치게 하였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손상(損傷)을 입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행군(行軍)을 그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한낱 까마귀의 변괴로 인하여 어찌 천시(天時)를 어길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순응(順應)하여 지극히 불인(不仁)한 자를 토벌하는데 어찌 흉조(凶兆)가 있겠소"?

하고, 인하여 칼을 뽑아 까마귀를 가리키니 까마귀가 땅에 떨어졌다. 당나라 군사가 조수(潮水)를 타고 함선(艦船)이 잇달아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전진하였고, 소정방은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都城)으로 진격하니 백제에서도 모든 병력(兵力)을 동원(動員)하여 방어하였으나 또 패하여 1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승기를 타고 성(城)에 육박하니 백제왕이 모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성충의 말을 채용하지 않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하였다. 백제의 왕자(王子) 융(隆)이 당나라 장수에게 글월을 보내어 군병이 물러가기를 요청하였는데 얼마 후 신라와 당나라의 군대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사면(四面)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융(隆)이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호궤하는 물건을 전달하였으나 소정방이 이를 물리쳤고, 왕의 서자(庶子)가 직접 좌평(佐平) 6인과 더불어 소정방 앞에 나아가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소정방이 또 물리쳤다. 백제왕이 태자(太子) 효(孝)와 더불어 좌우(左右)의 시종(侍從)을 이끌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 들어가 보존하니 왕궁(王宮)의 여러 희첩(姬妾)들은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 백제왕의 차자(次子)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여러 군중(群衆)을 거느리고 굳게 지키니 태자 효의 아들 문사(文思)가 융(隆)에게 이르기를,

"왕이 태자와 더불어 비록 도성(都城)에서 나갔으나 아직 몸이 생존(生存)해 있는데 숙부(叔父) 태(泰)가 멋대로 왕이 되었으니 당나라 군사가 비록 포위망을 풀고 가더라도 우리들이 어찌 목숨을 보존(保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좌우를 이끌고 줄을 타고 성(城) 밖으로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따랐으며 태(泰)가 금지할 수 없었다. 융(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니 김법민이 융에게 나무라기를,

"너희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이고 옥중(獄中)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 아프게 하였는데 오늘날 네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하니, 융이 부끄럽게 여겼다.

○소정방(蘇定方)이 군병으로 하여금 도성(都城)의 성가퀴[堞]에 올라가 당나라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니 태(泰)가 궁지에 몰려 성문(城門)을 열고 나와 목숨의 보존을 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의자왕(義慈王)이 태자 효를 이끌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달려와 소정방 앞에 항복하였고 여러 성(城)도 모두 항복하여 백제가 드디어 멸망하였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 성제(成帝) 때의 연호(年號)) 3년 계묘년(癸卯年; 서기 전 18)에 졸본 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그 후 3백 89년을 거쳐 13세(世)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하여 한성(漢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그 후 1백 5년을 거쳐 22세(世) 문주왕(文周王) 때 웅천(熊川 -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겼고, 그 후 63년을 거쳐 26세(世) 성왕(聖王) 때 남부여(南扶餘)로 도읍을 옮겼으며, 그 후 1백 22년을 거쳐 31세(世) 의자왕(義慈王)에 이르러 멸망하였으니, 모두 6백 78년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의 고사(古事)에 의하면, "하늘에서 금궤(金櫃)가 내려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는데 내가 사기(史記)를 편수(編修)함에 있어 옛날부터 전래(傳來)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산삭(刪削)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은즉, 신라 사람은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後裔)가 되므로 성(城)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고구려 사람은 또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가 되므로 성을 고씨(高氏)라고 한다 하였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그 계통(系統)이 부여(扶餘)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진?한(秦漢)의 난리(亂離) 때에 중국인(中國人)으로서 해동(海東)으로 도망쳐 온 자가 많았다."고 하였으니 삼국(三國)의 선조(先祖)가 어찌 모두 옛 성인(聖人)의 후예가 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장구(長久)한 역년(曆年)을 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의 말년에는 도리(道理)에 어긋난 일을 행한 것이 많았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를 침략하여 형세가 유리하거나 적당한 기회가 오면 신라의 중성(重城)과 거진(巨鎭)을 탈취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이를 친(親)하고 이웃 나라와 친선(親善)하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에 어긋나는 바이다. 이에 당 고종(唐高宗)이 두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는데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였으나 속으로는 거역하여 대국(大國)에 죄를 범했으니 그 멸망함이 또한 마땅하다."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계백(階伯)이 명(命)을 받들고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장차 출정(出征)할 즈음에 먼저 그의 처자(妻子)를 죽였으니 그 무도(無道)함이 심하다. 비록 국난(國難)에 반드시 순절(殉節)할 마음은 있었으나 힘써 싸워서 적군(敵軍)을 깨뜨릴 계책이 없었으니 이는 먼저 그 사기(士氣)를 잃고 패배를 자취(自取)한 일이 된다. 장수를 선택함에 있어 적재(適才)를 얻는다면 적은 군사로써 대군(大軍)을 격파(擊破)하고 잔약한 것으로도 강성(强盛)한 것을 제어(制馭)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다. 오(吳)나라 장수 주유(周瑜)는 5만 명의 군사로써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80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진(晉)나라 장수 사현(射玄)은 8만 명의 군사로써 전진(前秦) 부견(符堅)의 1백만 대군을 깨뜨렸는데, 백제의 군사가 어찌 5만 명에 밑돌며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이 어찌 80만 명에 지나겠는가? 그러나 주유에게 정성으로 위임(委任)한 자는 손권(孫權)이요, 사현을 천거하여 의심하지 않은 자는 사안(謝安)이니, 이는 오나라의 임금과 진나라의 상신(相臣)이 모두 현명(賢明)하여 장수에 합당한 인재를 임명한 것이었다. 이제 백제는 위에는 임금이 혼미하고 아래에는 신하가 요망하여 어진 이가 쫓겨나고 불초한 자가 직위(職位)에 있었으니 장수를 임명하는 데에 어찌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계백의 광패(狂悖)하고 잔인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이는 싸우기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었다. 다만 관창(官昌)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으며, 패전(敗戰)함에 미쳐 항복하지 않고 순절(殉節)하였으니 옛날 명장(名將)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하겠다. 또 상고하건대, 품일(品日)은 그 아들 관창에게 명하여 홀로 적진(敵陣)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부질없이 죽을 뿐임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나 감히 사양하지 않은 것은, 신라의 법에, 전사(戰死)한 사람은 모두 후히 장사(葬事)지내고 작위(爵位)와 상(賞)을 내렸으며 그 은혜가 온 가족(家族)에까지 미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온나라 사람들이 이를 소중히 여기고 본을 받아 전사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으니 옛날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관창이 한 번 적진에 들어가 다행히 살아 돌아온 뒤에는 머물러 두었다가 여러 군사와 함께 나아가게 했다면 비록 적군과 힘껏 싸워 몸을 죽여 명성(名聲)을 이루고자 하였더라도 또한 반드시 전사(戰死)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약관(弱冠)도 되지 않은 아이로 하여금 단기(單騎)로 다시 적진에 들어가 그 아들이 반드시 죽도록 하였으니 이는 너무 잔인(殘忍)하여 후세(後世)의 훈계로 삼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신라왕이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이르렀다. 소정방(蘇定方)이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황제에게서 명을 받아 편의(便宜)에 따라 종사(從事)하기로 하였소. 이제 얻은 백제의 땅을 공(公) 등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공로(功勞)에 보답(報答)하려는데 어떠하겠소"?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대장군이 천자(天子)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부도(不道)한 백제를 정벌함으로써 소국(小國)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니 과군(寡君)이 온 나라 신민(臣民)과 더불어 기뻐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홀로 식읍을 받아 사리(私利)를 도모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8월 신라왕이 큰 주연(酒宴)을 베풀고 장사(壯士)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蘇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義慈王)과 그 아들 융(隆)은 당하(堂下)에 앉혔으며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라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9월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왕 의자(義慈) 및 태자(太子) 효(孝)와 왕자(王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大臣) 장사(將士) 88인(人)과 백성 1만 2천 8백 7인을 압령(押領)하여 바다를 건너 돌아갔으며, 신라왕이 또한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전승(戰勝)을 보고하였다. 김인문(金仁問)은 사찬(沙飡) 유돈(儒敦)과 대내마(大奈麻) 중지(中知) 등과 더불어 소정방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그대로 숙위(宿衛)를 맡게 되었다.

○백제에는 본래 5부(部) 37군(郡) 2백성(城) 76만호(戶)가 있었다.지지(地志)에 의하면, 백제의 주?군?현(州郡縣)은 모두 1백 47이다. 웅천주(熊川州) - 웅진(熊津)이라고도 하였다.  열야산현(熱也山縣), 벌음지현(伐音支縣), 서원(西原) - 낭비성(娘臂城) 혹은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 , 대목악군(大木岳郡), 감매현(甘買縣) - 임천(林川)이라고도 하였다., 구지현(仇知縣), 가림군(加林郡), 마산현(馬山縣), 대산현(大山縣), 설림현(舌林縣), 사포현(寺浦縣), 비중현(比衆縣), 마시산군(馬尸山郡), 우견현(牛見縣), 금물현(今勿縣), 혜군(?郡), 벌수지현(伐首只縣), 여촌현(餘村縣), 사평현(沙平縣), 소부리군(所夫里郡) - 사비(泗?)라고도 하였다., 진악산현(珍惡山縣), 열기현(悅己縣) - 두릉윤성(豆陵尹城), 혹은 두윤성(豆尹城), 혹은 윤성(尹城)이라고도 하였다., 임존성(任存城),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오산현(烏山縣),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진현현(眞峴縣) - 정현(貞峴)이라고도 하였다., 진동현(珍洞縣), 우술군(雨述郡), 노사지현(奴斯只縣), 소비포현(所比浦縣), 결기군(結己郡), 신촌현(新村縣), 사시량현(沙尸良縣), 일모산군(一牟山郡), 두잉지현(豆仍只縣), 미곡현(未谷縣), 기군(基郡), 성대혜현(省大兮縣), 지륙현(知六縣), 탕정군(湯井郡), 아술현(牙述縣), 굴지현(屈旨縣) - 굴직(屈直)이라고도 하였다., 완산(完山) - 비사벌(比斯伐) 혹은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하였다., 두이현(豆伊縣) - 왕무(往武)라고도 하였다., 구지산현(仇智山縣), 고산현(高山縣), 남원(南原) - 고룡군(古龍郡)이라고도 하였다. , 대시산군(大尸山郡), 정촌현(井村縣), 빈굴현(賓屈縣), 야서이현(也西伊縣),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개화현(皆火縣), 흔량매현(欣良買縣), 상칠현(上漆縣), 진내군(進乃郡) - 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하였다.), 두시이현(豆尸伊縣) - 부시이(富尸伊)라고 하였다., 물거현(勿居縣), 적천현(赤川縣), 덕근군(德近郡), 가지내현(加知奈縣) - 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하였다., 지량초현(只良肖縣), 공벌지현(共伐只縣), 시산군(屎山郡) - 절문(折文)이라고도 하였다., 감물아현(甘勿阿縣), 마량현(馬良縣), 부부리현(夫夫里縣), 벽골군(碧骨郡), 두내산현(豆乃山縣), 수동산현(首冬山縣), 내리아현(乃利阿縣), 무근현(武斤縣), 도실군(道實郡), 역평현(礫坪縣), 돌평현(?坪縣), 금마저군(金馬渚郡), 소력지현(所力只縣), 알야산현(閼也山縣), 우소저현(于召渚縣), 백해군(伯海郡) - 백이(伯伊)라고도 하였다. 난진아현(難珍阿縣), 우평현(雨坪縣), 임실군(任實郡), 마돌현(馬突縣) - 마진(馬珍)이라고 도 하 였 다., 거사물현(居斯勿縣), 무진주(武珍州) - 노지(奴只)라 고도 하였다.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복룡현(伏龍縣), 굴지현(屈支縣), 분차군(分嵯郡) - 부사(夫沙)라고도 하였다., 조조례현(助助禮縣), 동로현(冬老縣), 두힐현(豆?縣), 비사현(比史縣), 복홀군(伏忽郡), 마사량현(馬斯良縣), 계천현(季川縣), 오차현(烏次縣),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추자혜군(秋子兮郡), 과지현(菓支縣) - 과혜(菓兮)라고도 하였다., 율지현(栗支縣), 월내군(月奈郡),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 아로곡현(阿老谷縣), 고미현(古彌縣), 고시이현(古尸伊縣),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 소비혜현(所非兮縣), 무시이군(武尸伊郡), 상로현(上老縣),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송미지현(松彌知縣), 삽평군(?平郡) - 무평(武平)이라고도 하였다., 원촌현(猿村縣), 마로현(馬老縣), 돌산현(突山縣), 욕내군(欲乃郡), 돈지현(遁支縣), 구차례현(仇次禮縣), 두부지현(豆夫只縣), 이릉부리군(?陵夫里郡) - 죽수부리(竹樹夫里), 혹은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하였다., 파부리군(波夫里郡), 잉리아현(仍利阿縣) - 해빈(海濱)이라고도 하였다., 발라군(發羅郡), 두힐현(豆?縣), 실어산현(實於山縣), 수천현(水川縣) -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하였다., 도무군(道武郡), 고서이현(古西伊縣), 동음현(冬音縣), 색금현(塞琴縣) - 착빈(捉濱)이라고도 하였다., 황술현(黃述縣), 물아혜군(勿阿兮郡), 굴내현(屈乃縣), 다지현(多只縣), 도제현(道際縣) - 음해(陰海)라고도 하였다., 인진도군(因珍島郡), 도산현(徒山縣) - 혹은 원산(猿山)이라고도 하였다., 매구리현(買仇里縣), 아차산군(阿次山郡), 갈초현(葛草縣) - 아로(阿老), 혹은 곡야(谷野)라고도 하였다., 고록지현(古祿只縣) - 개요(開要)라고도 하였다., 거지산현(居知山縣) - 안릉(安陵)이라고도하였다., 날이군(奈已郡)이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당(唐)나라에서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설치하고 각기 주현(州縣)을 통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거장(渠長)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泗)城)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백제의 잔병(殘兵)들이 사비(泗))에 들어가 살아서 항복한 자들을 탈취하려고 꾀하매 유수(留守) 유인원이 신라 군사와 더불어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에 적군이 물러가 사비의 남령(南嶺)에 올라 목책(木柵)을 세우고 둔취(屯聚)하여 틈을 엿보아 초략(抄掠)하니 백제의 유민(遺民)들로서 반기(叛旗)를 들고 이에 호응하는 자가 20여 성(城)에 이르렀다. 이에 당 고종(唐高宗)이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어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고 백제의 여중(餘衆)을 무마(撫摩)하게 하였는데 삼년 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詔書)를 선유(宣喩)하다가 병이 들어 갑자기 죽으니 당 고종이 유인궤(劉仁軌)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태자(太子) 및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이례성(?禮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관원을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또 사비 남령에 있는 백제 군사의 목책(木冊)을 공격하여 참수한 것이 1천 5백급(級)이었다.

○11월 고구려에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여 군주(軍主) 필부(匹夫)를 죽였다. 필부는 사량(沙梁) 사람 아찬(阿飡) 존대(尊臺)의 아들이었다. 당초에, 고구려?백제?말갈(靺鞨)이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기를 꾀하므로, 신라왕이 충용(忠勇)스럽고 방어하는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재목을 구하여 필부로서 칠중성의 현령(縣令)을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와 당(唐)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멸망시켰으므로 고구려에서 이를 경계하여 칠중성을 에워싸매 필부가 20일 동안 지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는데 사졸들이 모두 죽기를 결심하고 힘써 싸우니 고구려 장수가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여겨 철병(撤兵)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내마(大奈麻) 비삽(比?)이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고구려 장수에게 고하기를,

"성(城)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으니 이제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킬 것이다."

하니, 고구려 군사가 다시 싸우게 되었다. 이에 필부가 비삽을 참수(斬首)하고 군중(軍中)을 돌면서 말하기를,

"충신(忠臣) 의사(義士)는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성(城)의 존망(存亡)이 이 한 싸움에 달려있으니 노력하고 면려(勉勵)하라."

하였는바 허약하고 병든 자들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적군에게 내달았으나 굶주리고 피곤하여 다시 떨치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바람을 타서 불을 지르고 더욱 급히 공격하니 필부가 몇몇 장졸(將卒)들과 더불어 힘껏 맞서 싸웠는데 화살이 몸에 고슴도치처럼 박혀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죽었다. 신라왕이 이를 듣고 애절하게 통곡하였으며 급찬(級飡)을 증직(贈職)하였다.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계탄(?灘)을 건너 백제의 왕흥사(王興寺)와 잠성(岑城)의 잔적(殘賊)을 공격하여 7일 만에 소탕하고 참수(斬首)한 것이 7백급(級)이었다.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戰功)을 논(論)하매 계금(?衿)의 졸(卒) 선복(宣服)으로써 급찬(級飡)을 삼았고, 군사(軍師) 두질(豆迭)로서 고간(高干)을 삼았으며, 전사(戰死)한 자는 차등(差等)을 두어 증직(贈職)하였다. 처음으로 대각간(大角干)을 설치하여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을 제수(除授)하였으니 17위(位)에서 가장 위에 있었다. 백제에서 항복해 온 사람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으니 좌평(佐平) 충상(忠常) 및 상영(常永)과 달솔(達率)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一吉飡)을 제수하였고, 은솔(恩率) 무수(武守)와 인수(仁守)에게는 대내마(大奈麻)를 제수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왕 의자(義慈) 등으로 하여금 당 고종(唐高宗)을 알현(謁見)하게 하니 당 고종이 나무라고 용서하였다. 당 고종이 소정방을 위로하고 또 말하기를,

"어찌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김에 인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

하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인자(仁慈)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겨 아랫사람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父兄)과 같이하니 나라는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당초에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사비(泗?)의 언덕에 진영(陣營)을 치고 신라를 침략하려고 꾀하였다. 신라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다미(多美)란 자가 계책을 올리기를,

"우리 군사로 하여금 거짓 백제 사람의 복색(服色)을 착용(着用)케하고 반란(叛亂)을 일으키는 것처럼 한다면 당나라 군사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니 인하여 싸운다면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조리(條理)가 있으니 청컨대 따르소서."

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국(敵國)을 멸하였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는가"?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개가 비록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그 다리를 밟으면 도리어 물어 뜯는 것입니다. 어찌 환난(患難)을 만나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하는 데에 이르겠습니다."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에서 방비(防備)가 있음을 알고 이내 돌아갔다.

○의자왕(義慈王)이 당(唐)나라에서 병들어 죽으니 당 고종(唐高宗)이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追贈)하였고, 옛 신하들의 부상(赴喪)을 허락하였으며, 조서(詔書)를 내려 손호(孫皓)3)와 진숙보(陳叔寶)4)의 묘(墓) 옆에 장사지내고 아울러 비(碑)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의 아들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당(唐)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 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았으며,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포주 자사(蒲州刺史)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유년(辛酉年; 661)

신라 태종왕 8년, 문무왕(文武王) 원년, 고구려 보장왕 20년

당(唐)나라 용삭(龍朔) 원년

 


봄 정월// 당(唐)나라에서 하남(河南)?하북(河北)?회남(淮南)의 67주(州)의 군사 4만 4천여 인(人)을 모집하여 평양도(平壤道)와 누방도(漏方道)의 행영(行營)에 다다르게 하였고, 또 홍로경(鴻?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제부(諸部)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에 다다르게 하였다.

○2월 백제의 잔병(殘兵)이 사비성(泗)城)을 공격하니 신라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잡찬(?飡) 문왕(文王)과 대아찬(大阿飡) 양도(良圖)와 아찬(阿飡) 충상(忠常) 등을 부장(副將)으로, 잡찬(?飡)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아찬 진왕(眞王)을 부장(副將)으로,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욱천(旭川) 등을 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郞幢將軍)으로 삼아 사비성에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3월 백제의 지경에 이르러 품일(品日)이 휘하(麾下)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두량윤성(豆良尹城)의 남쪽에 이르러 진영(陣營)에 적합한 곳을 살피게 하였는데 백제 사람들이 신라의 군진(軍陣)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가 놀라 패주하였다. 이에 신라의 대군(大軍)이 속속 당도하여 두량윤성을 공격하였는데 30일이 지나도록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여름 4월 신라의 군사가 되돌아오다 빈골양(賓骨壤)에서 갑자기 백제의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주하였고 병기와 치중(輜重 - 군수품)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상주낭당(上州郞幢)의 군사가 각산(角山)에서 백제의 군사를 만나 진격(進擊)하여 이기고 드디어 그 둔보(屯堡)에 들어가 2천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다. 신라왕이 대군(大軍)의 패한 소식을 듣고 장군(將軍) 금순(金純)?진흠(眞欽)?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병의 후퇴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신라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에 대하여 차등을 두어 벌(罰)을 논하였다.

○당(唐)나라에서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浿江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았으며,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 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소사업(蕭嗣業) 및 여러 호병(胡兵)과 아울러 모두 35군(軍)을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병진(병進)하게 하였으며, 당나라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잇대고자 하였다. 이에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소국(小國)인데 어찌 온 중국(中國)을 기울일 일이야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군사를 보내어 지켜야 할 것인데 적게 보내면 위엄이 떨치지 않을 것이고 많이 보내면 인심(人心)이 불안(不安)해 할 것이니 이는 천하(天下)를 운수(運輸)와 방어에 피곤케 할 것입니다. 신(臣)의 생각에는 정벌(征伐)함이 정벌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킴이 멸망시키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며, 마침 무후(武后)도 간(諫)하였으니 원정(遠征)을 중지하였다.

○5월 고구려왕이 장군(將軍) 뇌음신(惱音信)을 보내어 말갈(靺鞨)의 장군 생해(生偕)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나아가 신라의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北韓山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는 서쪽에 진영(陣營)을 치고 말갈의 군사는 동쪽에 둔취(屯聚)하여 포거(抛車 - 투석용 수레)를 늘어놓고 돌을 날리니 맞는 곳마다 성첩(城堞)이 문득 무너졌다. 성주(城主) 대사(大舍) 동타천(冬?川)이 사람을 시켜 성 밖에 철질려(鐵藜藜 - 지상에 세워 적의 침입을 막는 것. 마름쇠)를 펼쳐놓으니 인마(人馬)가 다니지 못하였다.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城)의 무너진 곳마다 누로(樓櫓 - 지붕이 없는 누대(樓臺))를 만들어 굵은 줄로 망(網)을 얽고 우마피(牛馬皮)와 면의(綿衣)를 걸어매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設置)하여 굳게 지켰다. 이때에 성(城) 안에는 단지 남녀(男女) 2천 8백 명이 있었을 뿐인데 성주(城主) 동타천이 잘 격려하여 잔약한 형세로써 강적(强敵)을 대항한 지 20여 일에 양식이 떨어지고 힘도 다하였다. 이에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고(告)하니 홀연히 큰 별이 고구려 진영(陣營)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벼락이 치는 변괴가 있었다. 뇌음신 등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망을 풀고 물러나니 신라왕이 동타천을 발탁하여 대내마(大奈麻)로 삼았다. 당초에 김유신이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을 에워쌌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으니 하늘의 음조(陰助)를 빌려야 한다."

하고, 단(壇)을 쌓아 기도를 올렸는데 마침 이러한 천변(天變)이 있었으니 모두 지성(至誠)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일찍이 고구려의 첩자(諜者)를 보고 맞아들여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니, 첩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므로 김유신이 말하기를,

"다만 사실(事實)대로 고(告)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첩자가 또 말하지 않았다. 이에 김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위로 하늘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 인심(人心)을 잃지 않아 백성들이 안락한 생업(生業)을 누리고 있으니 너는 의당 돌아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라."

하고, 드디어 위로하여 보냈다. 고구려 사람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으나 김유신이 상신(相臣)이 되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하였다.

○신라에서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으로써 도독(都督)을 삼았다.

○6월 신라에서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붉었고,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나왔는데 너비 5보(步)였다.

○신라왕 춘추(春秋)가 훙(薨)하였으니 수(壽)는 59세(歲)였으며, 태자(太子)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전왕의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라 하였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라 하였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종이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여 시대(時代)가 화평하고 풍년이 들어 서울에서 베[布] 1필(疋) 값이 벼[租] 30석(石) 혹은 50석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일컬었다. 비(妃)는 문명 왕후(文明王后) 김씨(金氏)로 김유신의 누이동생이었다. 당초에 누이 보희(寶姬)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 경주(慶州)서악(西岳)) 정상(頂上)에 올라가 앉아서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온 나라 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나서 그 아우 문명(文明)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명이 희롱삼아 말하기를,

"원컨대 언니의 꿈을 사고 싶습니다."

하고, 인하여 그 값으로 비단치마 한 벌을 주었다. 얼마 뒤에 김춘추가 김유신과 더불어 공을 찼는데 김유신이 짐짓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이에 김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가까이에 있으니 청컨대 함께 가서 옷고름을 다시지요."

하고, 인하여 같이 가서 주연(酒宴)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에게 와서 옷고름을 꿰매주라고 하니 보희가 말하기를,

"어찌 사소한 일로써 경솔히 귀공자(貴公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하고 사절하였다. 이에 아우 문명이 나와서 옷고름을 꿰매주었는데 문명의 자태(姿態)가 아름답고 요염(妖艶)하였으니 김춘추가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였고 드디어 아들을 낳았으니, 첫째는 법민(法敏)이요, 둘째는 인문(仁問)이며, 세째는 문왕(文汪)이요, 네째는 노차(老且)이며, 다섯째는 지경(智鏡)이요, 여섯째는 개원(愷元)이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김춘추가 공을 차는 일로 인연하여 문희(文姬)와 동침(同寢)하여 태기(胎氣)가 있게 되니 김유신이 거짓 책망하여 불에 태워 죽이고자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둥하였는데, 마침 김유신이 섭[薪]을 쌓아 불을 질러 연기가 일어나므로 왕이 그 연고를 물으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김유신이, 그 누이동생이 남편이 없이 임신(妊娠)하였으므로 장차 불에 태워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김춘추가 왕의 옆에 시종(侍從)하고 있다가 안색(顔色)이 돌변(突變)하니 왕이 말하기를, "반드시 너의 소위(所爲)이니 빨리 가서 구원해 주라." 하므로 김춘추가 달려가 그치게 하고 드디어 배필을 삼았다고 하였다.

○당 고종(唐高宗)이 신라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신라에서 도독(都督)을 고쳐 총관(摠管)을 삼았다.

○6월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35도(道)의 수륙군(水陸軍)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또 인문(仁問)과 유돈(儒敦) 등을 신라에 돌려보내어 왕에게 유시하여 군사를 동원(動員)하여 고구려 정벌에 응원하게 하였는데 당 고종이 인문에게 말하기를,

"짐(朕)이 이미 백제를 멸망시켜 너희 나라의 화근(禍根)을 제거하였다. 그런데 이제 고구려는 강대(强大)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더불어 간악(奸惡)함을 자행하여 사대(事大)의 예절을 어겼고 이웃 나라와 친선(親善)의 의리를 저버렸으므로 짐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고자 한다. 너는 신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告)하고 군사를 동원시켜 정벌에 참여하여 거의 멸망하는 적(賊)을 섬멸하도록 하라."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인문(仁問)?진주(眞珠)?흠돌(欽突)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았으며, 천존(天存)?죽지(竹旨)?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삼고, 품일(品日)?충상(忠常)?의복(義服)을 상주총관(上州摠管)으로 삼았으며, 진흠(眞欽)?중신(衆臣)?자간(自簡)을 하주총관(下州摠管)으로 삼고, 군관(軍官)?수세(藪世)?고순(高純)을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으로 삼았으며, 술실(述實)?달관(達官)?문영(文穎)을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으로 삼고, 문훈(文訓)?진순(眞純)을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으로 삼았으며, 진복(眞福)을 서당총관(誓幢摠管)으로 삼고, 의광(義光)을 낭당총관(郞幢摠管)으로 삼았으며, 위지(慰知)를 계금대감(?衿大監)으로 삼았다.

○8월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탈취(奪取)하였으며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에워쌌다.

○신라왕이 여러 장수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응원하기 위하여 시이곡(始飴谷)에 이르렀는데 사람이 와서 고(告)하기를,

"백제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甕山城)에 웅거(雄據)하고 있습니다."

하므로, 신라왕이 우선 사람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신라왕이 이에 남천주(南川州)에 진주(進駐)하였고, 진수(鎭守) 유인원(劉仁願)이 또한 사비(泗?)에서 남천주에 와서 서로 회합(會合)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이 군사를 전진(前進)시켜 옹산성을 에워싸고 적장(賊將)에게 말하기를,

"백제가 공손(恭遜)하지 아니하여 대국(大國)의 정토(征討)를 자초(自招)했으니 천명(天命)에 순종하는 자는 상(賞)을 주고 천명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외로운 성(城)을 지켜 무엇을 하려 하는가? 장차 반드시 패망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일찍이 항복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되면 몸을 보전(保全)할 뿐만 아니라 부귀(富貴)도 기약할 수가 있다."

하니, 적장이 말하기를,

"성(城)은 비록 작으나 군량(軍糧)이 풍족하고 사졸들이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김유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짐승도 곤궁하면 오히려 싸운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하고는,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9월 신라왕이 웅현정(熊峴停)에 진주(進駐)하여 여러 총관(摠管)을 모아놓고 친히 임어(臨御)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서사(誓師)5)하니 사졸들이 모두 분발(奮發)하여 격려(激勵)하였다. 이에 드디어 김유신과 군사를 합하여 포위망을 압축하고 먼저 대책(大柵)을 불살라버리고 수천명을 참(斬)하였으며 성을 함락시키고 적장을 잡아서 죽였다.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각간(角干)?이찬(伊飡)으로서 총관(摠管)이 된 자에게는 검(劒)을 내리고, 잡찬(?飡)?파진찬(波珍飡)?대아찬(大阿飡)으로서 총관이 된 자에게는 창[戟]을 내렸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품계(品階) 1급(級)을 올려주었고, 드디어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신라 상주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이 일모산군 태수(一牟山郡太守) 대당(大幢)과 사호산군 태수(沙戶山郡太守) 철천(哲川)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여 급(級)을 참(斬)하니 백제의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조복에게는 급찬(級飡)을 내리고 인하여 고타야군 태수(古?耶郡太守)를 제수(除授)하였으며, 파가에게는 급찬을 내리고 또 전택(田宅)과 의물(衣物)을 주었다.

○신라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시켜 소정방(蘇定方)에게 글월을 보냈는데, 문천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소정방의 말에 의하면, "내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적(賊)을 토벌하기 위하여 만리 바닷길을 건너 육지(陸地)에 배를 대고 머뭇거린 지 이미 달포가 넘었는데 왕의 원병(援兵)이 이르지 않고 군량 또한 잇댈 수가 없어 내가 심히 위태한 지경에 있으니 왕께서는 이를 도모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적(敵)의 경내(境內)에 깊이 들어가 멀리 군량을 운반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왕이 깊이 근심하였다. 이에 김유신(金庾信)이 말하기를,

"신(臣)이 임금의 은총(恩寵)을 받아 국가의 중임(重任)을 맡았으니 죽더라도 어려움을 사피(辭避)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날은 이 노신(老臣)이 충절을 다하는 날이니 마땅히 적국(敵國)에 다달아 소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副應)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제 이미 경(卿)을 얻었으니 근심이 없다. 국경(國境) 밖에 나간 후에는 상벌을 경의 편의(便宜)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라."하였다.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어 정병(精兵) 수만명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지키게 하니 당(唐)나라의 여러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이르자 마침 얼음이 얼어붙었으므로 계필하력이 군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북을 울리며 고함을 치고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계필하력이 수십리를 추격하여 3만 명을 죽이니 남은 무리들이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男生)은 겨우 몸만 빠져 도망했는데 마침 당 고종(唐高宗)의 철수하라는 영(令)이 있어 돌아갔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와서 조제(弔祭)한다는 말을 듣고 고구려 군사와의 싸움에 다다르지 않고 돌아왔으며, 김유신 등도 군사를 쉬게 하며 왕의 명(命)을 기다렸는데, 함자도 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이르러 칙지(勅旨)를 전하였으므로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당나라 진영(陣營)에 군량을 수송하였다.

 

 

 

임술년(壬戌年; 662)

신라 문무왕 2년, 고구려 보장왕 21년,

당(唐)나라 용삭 2년

 


봄 정월 당(唐)나라 사신이 신라에 이르러 전왕(前王 - 태종 무열왕)을 칙제(勅祭)하고 인하여 왕을 책봉(冊封)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을 삼았으며, 잡채(雜綵) 5백 단(端)을 증여(贈與)하였다.

○신라에서 이찬(伊飡) 문훈(文訓)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신라왕이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진복(眞服)?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을 보내어 유진(留鎭) 유인원(劉仁願)과 더불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수레 2천여 량(輛)에 쌀 4천석(石)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平壤)에 다다르게 하였는데 풍수촌(風樹村)에 이르니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준하여 수레로는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모두 우?마(牛馬)에 실려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강을 건너기를 두려워하여 감히 앞에 서는 자가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어찌 여기에 왔겠는가"?

하고, 먼저 앞장서 강을 건너니 여러 군사들이 뒤를 잇대었다.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서는 고구려 군사의 초략(抄掠)을 염려하여 몰래 험준한 곳으로 행하여 산양(蒜壤)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곤핍(困乏)하였다. 김유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우리 신라와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원수가 되었다.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험난(險難)한 데에 다다른 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멸망시켜서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니 제군(諸君)들은 마땅히 면려(勉勵)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장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북을 울리면서 전진(前進)하여 곧장 평양을 향하였고, 귀당(貴幢)의 제감(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이를 요격(邀擊)하여 깨뜨렸으니 얻은바 갑옷과 병기(兵器)가 매우 많았다.

○당(唐)나라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영남(嶺南)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사수(蛇水)에 진영(陣營)을 졌는데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이를 맞아 싸워 방효태가 대패(大敗)하였다. 혹자가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劉伯英)이나 조계숙(曹繼叔)의 진영에 가기를 권하니, 방효태가 말하기를,

"내가 양대(兩代 - 당 태종과당 고종)를 섬겨 지나치게 은총을 입었으니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반드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유백영 등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겠는가? 또 내가 데리고 온 향리(鄕里)의 자제(子弟) 5천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나 한 몸만 살아 남기를 구하겠는가? "

하였다. 연개소문이 육박하여 공격하니 죽은 자가 수만명에 달하였고 방효태는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집중(集中)되어 그 아들 13인과 더불어 모두 전사(戰死)하였다.

○2월 김유신(金庾信) 등이 장색(獐塞)에 이르렀는데, 길이 험하고 평양(平壤)과의 거리는 수리(數里)가 되었다. 마침 풍설(風雪)이 사납고 몹시 추워 인마(人馬)가 피곤하였고 간혹 동사자(凍死者)가 생겼다. 이에 김유신이 어깨를 벗어붙이고 채찍을 들어 앞장에 서니 여러 무리들이 모두 죽을 힘을 내어 땀을 흘리면서 드디어 험준한 곳을 빠져나왔는데 고구려 군사가 틈을 엿보아 공격하려 하므로 전진(前進)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당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김유신이 군량을 가져온 일을 먼저 알리고자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에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나와 더불어 교유(交遊)하여 네가 절개 있음을 알고 있다. 이제 소장군(蘇將軍)에게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데 네가 갈 수 있겠는가"?

하니, 열기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불초하오나 외람되이 군직(軍職)을 맡았으며 더구나 장군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행인(行人)의 한 사람으로 가기를 원하옵니다."

하고, 드디어 군사 구근(仇近) 등 15인과 더불어 길을 떠나니 고구려 군사들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무릇 이틀 만에 당나라 진영(陣營)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보고하니 소정방이 기뻐하여 글월로써 사례(謝禮)하였다. 열기 등이 또 이틀 만에 돌아왔으니 김유신이 기뻐하여 그들에게 급찬(級飡)을 제수(除授)하였다. 김유신 등이 양오(楊?)에 이르러 한 노인(老人)을 만나 적국(敵國)의 형편을 물어 상세히 알고 포백(布帛)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김유신이 양오에 진영(陣營)을 치고 김인문(金仁問)?양도(良圖) 및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시켜 당 나라 진영에 가서 군량을 인계(引繼)하게 해 주었고, 소정방에게 은(銀) 5천 7백푼(分), 세포(細布) 30필(疋), 두발(頭髮) 30냥(兩), 우황(牛黃) 19냥(兩)을 증여(贈與)하였는데, 소정방은 양식도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한데다가 또 큰 눈이 내림으로 인하여 문득 군사를 철수(撤收)하였다. 양도(良圖)는 그 휘하(麾下)의 군사 8백명을 이끌고 바닷길로 떠서 돌아왔으며, 김유신도 당나라 군사의 철수 소식을 듣고 또한 돌아왔다. 고구려에서 중로(中路)에 군사를 매복시켜 요격(邀擊)하고자 하였으므로 김유신이 소[牛]의 허리에 북[鼓]을 매달고 소의 꼬리에 북채를 매달아 꼬리를 휘두름에 따라 북소리가 울리게 하였고, 또 시초(柴草)를 쌓고 불을 질러 연화(烟火)가 끊기지 않게 하여 둔숙(屯宿)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밤중에 몰래 행군(行軍)하여 표하()河)에 이르러 급히 강을 건너 군사를 쉬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고구려 군사들이 비로소 도망한 것을 알고 추격(追擊)하니 김유신이 맞아 싸워 수많은 쇠뇌[弩]를 쏘아대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났다. 이에 김유신이 제당(諸幢)의 장졸(將卒)을 이끌고 격려하며 길을 나누어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으며 1만여 급(級)을 베었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 5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수만개의 군기(軍器)를 노획하였다. 신라왕이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였고 돌아옴에 미쳐 공(功)을 논하여 김유신?김인문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렸다. 김유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은 천하(天下)의 용사(勇士)이므로 신이 형편에 따라 급찬(級飡)을 제수(除授)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로(功勞)에 부응(副應)되지 않으니 원컨대 사찬(沙飡)을 가(加)하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찬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니, 김유신이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작록(爵祿)은 공기(公器)로서 공로를 갚는 것이니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신라의 영묘사(靈廟寺)가 불타버렸다.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내조(來朝)하였다. 탐라(耽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어 태초(太初)에는 인물(人物)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비로소 탄강(誕降)했으니, 첫째는 양을나(良乙那)요, 다음은 고을나(高乙那)이며, 셋째는 부을나(夫乙那)였다. 하루는 세 사람이 바닷가에 나아가 사냥을 하다가 세 여인(女人)과 여러 망아지[駒]?송아지[犢] 및 오곡(五穀)의 종자를 얻었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세 여인을 맞아들여 물이 맑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한 곳을 가려 거주(居住)하였으니, 양을나가 거주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가 거주하는 곳을 제이도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거주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고 하였다. 비로소 오곡(五穀)을 파종(播種)하였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富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에 백제에 신속(臣屬)하였으므로 좌평(佐平)으로서 관호(官號)를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라에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신라의 속국(屬國)이 되었다.《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삼형제(三兄弟)가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에 내조하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났으므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내조(來調)할 징조(徵兆)입니다." 하였다. 신라왕이 고후 등을 보고 가상히 여겨 장자(長子)는 성주(星主)라 일컬었으니 별의 징조가 나타난 때문이요, 차자(次子)는 왕자(王子)라 일컬었으니 대개 왕이 차자 고청을 사랑하여 사타구니 아래로 빠져나오게 하고 자기 아들처럼 여겼으므로 이름한 것이며, 막내는 도내(都內)라 하였고, 국호(國號)는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바다를 건너올 때에 처음 탐진(耽津)에 정박한 때문이었다. 각기 보개(寶盖) 및 의대(衣帶)를 주어 돌려보냈다. 혹자의 말에는 고씨(高氏)로써 성주(星主)를 삼고, 양씨(良氏)로써 왕자(王子)를 삼았으며, 부씨(夫氏)로써 도상(徒上)을 삼았는데 후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3월 신라왕이 백제를 이미 평정하였으므로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잔치[大)]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김인문(金仁問)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8월 백제의 잔적(殘賊)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 둔취(屯聚)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므로 신라왕이 흠순(欽純) 등 19명의 장수를 보내어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의 대당총관(大幢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 등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신라의 사찬(沙飡) 여동(如冬)에게 벼락이 쳤다. 여동이 일찍이 어미를 구타(歐打)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벼락을 맞아 죽었으며 그 몸 위에 수주당(須)堂)이라는 세 글자가 씌여있었다.

○신라 남천주(南川州)에서 흰 까치[白鵲]를 바쳤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 10권

 

 

 

계해년(癸亥年; 663)

신라 문무왕 3년, 고구려 보장왕 22년

당(唐)나라 용삭 3년

 


봄 정월 신라에서 남산(南山)의 신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신라에서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2월 신라의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취하고 7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거물(居勿)?사평(沙平) 두 성(城)을 공격하여 항복 받았고, 또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0급을 참수하였다.

○여름 4월 당(唐)나라에서 신라를 계림주 대도독부(계林州大都督府)로 삼았고, 신라왕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았다.

○5월 신라의 영묘사(靈廟寺) 문(門)에 벼락이 쳤다.

○당초에 백제 무왕(武王)의 종자(從子조카) 복신(福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승려 도침(道琛)과 더불어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반란(叛亂)을 일으키고, 고 왕자(故王子) 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옹립(擁立)했으니 풍은 일찍이 왜국(倭國)에 볼모로 가 있던 자이다.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이에 호응하였으니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劉仁願)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熊津城)을 에워쌌다. 이때에 낭장(郞將) 유인궤(劉仁軌)가 죄를 범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었는데 당 고종(唐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유인궤로서 검교 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를 삼아 전도독(前都督)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이끌고 또 가까이에 있는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에게 부귀(富貴)를 안겨주시리라."

하고, 당력(唐曆)과 묘휘(廟諱 - 역대(歷代)황제의 이름)를 청하여 출정(出征)의 길을 떠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海外)에 반포(頒布)하겠다."

하였다. 유인궤가 군사들을 엄정(嚴整)하게 통제하여 싸우면서 전진(前進)하니 복신 등이 웅진(熊津)의 어귀에 두 목책(木柵)을 세워 항전(抗戰)하였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와 연합하여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물러나 목책에 들어갔는데,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만여 인(人)이나 되었다. 복신 등이 포위망(包圍網)을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에 들어가 보존하였으며, 신라의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되돌아갔다.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자칭(自稱)하였고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자칭하여 도중(徒衆)을 불러 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유인궤에게 고하기를,

"듣건대 당나라에서 신라와 더불어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의 유민(遺民)을 모두 섬멸하고 국토(國土)는 신라에 붙인다."고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바에는 어찌 힘써 싸워 보존(保存)하기를 도모함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집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킬 뿐이다."

하니, 유인궤가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내어 화복(禍福)의 내용을 진술하여 타일렀다. 도침 등이 유인궤의 사신을 외관(外館)에 머물러두고 업신여기며 말하기를,

"사신은 관직(官職)이 낮고 나는 한 나라의 대장(大將)이니 상대하기에 합당치 않다."

하고는, 답서(答書)도 하지 않고 사신을 되돌려보냈다. 유인궤는 군병이 적었으므로 유인원과 합군(合軍)하여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당 고종에게 글월을 올려 신라의 군사와 연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장수(將帥) 김흠(金欽)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유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고사(古泗)에 이르러 복신이 맞아 싸워 크게 깨뜨리니 김흠이 갈령(葛嶺)으로부터 신라에 도망쳐 돌아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러 거느렸는데 풍(풍)이 능히 이를 제어(制馭)하지 못하고 제사(祭祀)만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은 유인원이 구원병도 없이 외로운 성(城)을 지키고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거짓 위로하기를,

"대사(大使)는 언제쯤 서쪽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겠소?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餞送)하겠소."

하였다. 그 후에 유인원?유인궤 등이 웅진(熊津)의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 목책(木柵)을 함락시켜 참획(斬獲)한 바가 매우 많았으며 그대로 군사를 나누어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江)을 끼고 있는데다가 높고 험하여 요충(要衝)이 되므로 군사를 보태어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城)에 가까이 붙은뒤 성가퀴를 더위잡고 새벽에 성에 쳐들어가 8백 명을 죽이니 신라의 양도(?道 - 군량 수송로)가 드디어 통하게 되었다. 유인원이 군사를 증원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니 당 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치주(淄州)?청주(靑州)?내주(萊州)?해주(海州)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군사 40만명을 이끌고 뱃길로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러 웅진부성(熊津府城)에 나아가 유인원의 군사를 증원하게 하였으며, 신라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장수(將帥)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會合)하였다. 이때에 복신이 권력을 잡아 함부로하더니 풍(풍)과 더불어 점차 서로 시기(猜忌)하게 되었다. 복신이 거짓으로 병을 일컫고 굴실(窟室)에 누워서 풍이 문병(問病)하러 오는 것을 기다려 죽이려 하니 풍이 이 기미를 알고 친신(親信)한 자를 이끌고 복신을 엄습해 죽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으려 하였는데 손인사가 중도에서 이를 요격(邀擊)하여 깨뜨리고 드디어 유인원의 군사와 합치니 군사들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향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혹자는 가림성(加林城)이 수륙(水陸)의 요충(要衝)이니 먼저 이를 공격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유인궤는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실(實)을 피(避)하고 허(虛)를 치라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이를 치자면 군사가 많이 상(傷)할 것이고 지키면 오래 지탱할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巢窟)이니 만약 이를 쳐서 이기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함락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손인사?유인원과 신라왕은 육군(陸軍)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 및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과 양선(糧船)을 이끌고 웅진(熊津)으로부터 백강(白江)에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향하였다. 신라의 군사가 백강의 어귀에서 왜병(倭兵)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병선(兵船) 4백척(隻)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바닷물도 붉어졌다. 두릉성(豆陵城)?윤성(尹城)?주류성 등이 모두 함락되니 풍(풍)이 몸만 탈출(脫出)하여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왕자(王子) 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왜인(倭人)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왜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경(國境)이 나누어졌으며 서로 화친을 맺어 사행(使行)이 왕래하였고 일찍이 배신(背信)한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어찌 간악한 백제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칠 것을 도모하였는가? 이제 너희 군졸이 나의 손아귀에 들어있으나 차마 죽일 수 없으니 돌아가 너희 임금에게 이 사실을 말하라."

하고, 드디어 놓아보냈다. 그리고 군사를 나눠 보내어 백제의 여러 성(城)을 쳐서 모두 항복을 받았으나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는데 지세(地勢)가 험준하고 성첩(城堞)이 견고하며 또 군량이 많아 공격한지 30일이 지났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사졸들이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왕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제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죄수를 대사(大赦)하였고, 여러 장수들에게 차등을 두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였다. 또 겨울 의복을 머물러 진수(鎭戍)하는 당(唐)나라 군사들에게 보내주었으며, 신라 서울에 돌아와서 김 유신에게 전지(田地) 5백 결(結)을 내려주었다.

○당초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니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그 부(部)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이 의자왕(義慈王)을 잡아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혹치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左右) 10여 인과 더불어 도망쳐 달아나 유망(流亡)한 자들을 불러 모으고 임존산(任存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일도 되기 전에 귀부(歸附)한 자가 3만명에 이르렀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니 흑치상지가 맞아 싸워 이를 깨뜨리고 드디어 2백여 성(城)을 수복(收復)하였는데 소정방이 이기지 못했으며 흑치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相如)와 더불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福信)에게 호응(呼應)하였다. 이에 이르러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초유(招諭)하니 흑치상지가 유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하였으며 유인궤가 진심으로 대우하고 그로 하여금 임존성(任存城)을 취(取)하여 스스로 공효(功效)를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곧 무기(武器)와 군량을 주었다. 이에 손인사가 말하기를,

"야심(野心)을 믿기 어려운데 만일 무기와 군량을 준다면 이는 도적에게 물자(物資)를 주는 격이다."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두 사람을 살펴보건대 충성과 지모(智謀)가 있어 기회를 타서 공명(功名)을 세울 수 있으니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계책을 써서 임존성 취(取)하였으니 지수신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그 여당(餘黨)도 모두 평정되었다.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이니 신장(身長)이 7척(尺) 남짓하고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 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洋州刺史)가 되었고 여러 차례 정벌(征伐)에 참여하여 공로를 쌓아 월등한 작상(爵賞)을 받았다. 오랜 후에 연연도 대총관(燕然道大摠管)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더불어 돌궐(突厥)을 쳐서 깨뜨렸는데, 좌감문위 중랑장(左監門衛中郞將) 보벽(寶壁)이 끝까지 추격(追擊)하여 공훈을 취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 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흑치상지와 함께 토벌하게 하였는데 보벽이 홀로 나아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全軍)이 함몰(陷沒)되었으므로 보벽은 옥에 갇혀 복주(伏誅)되었고, 흑치상지는 연좌(連坐)되어 공훈을 삭제(削除)당하였다. 이때에 마침 주흥(周興) 등은 흑치상지가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모반(謀叛)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으므로 체포되어 조옥(詔獄)1)에 갇혔다가 조서(詔書)를 내려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흑치상지는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대하였는데, 한 번은 그가 타는 말에 병사(兵士)가 매질을 했으므로 혹자가 죄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사마(私馬)에게 매질을 가한 때문에 관병(官兵)에게 벌을 줄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며, 앞뒤로 상(賞)으로 하사받은 물품은 그 휘하(麾下)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남은 재물이 없었다. 그가 죽음에 미쳐 사람들이 모두 그 억울함을 애통하게 여겼다.

○손인사(孫仁師)가 이미 돌아오니 당 고종(唐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유인궤를 웅진(熊津)에 머물게하고 군사를 통솔하여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백제는 병화(兵火)의 여파로 가옥(家屋)이 황폐화되고 시체(屍體)가 널려있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영(令)을 내려 해골(骸骨)을 묻었고, 호구(戶口)를 적(籍)에 올렸으며, 촌락(村落)을 다스리고, 관장(官長)을 두었으며, 도로를 통하게 하였고, 교량(橋梁)을 가설(架設)하였으며, 제언(堤堰)을 보수(補修)하였고, 저수지를 복구(復舊)하였으며, 농상(農桑)을 과(課)하였고, 빈궁(貧窮)한 자를 진휼(賑恤)하였으며, 고아(孤兒)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頒布)하였으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안도(安堵)하였다. 이에 당 고종이 부여융(扶餘隆)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고국(故國)에 돌아가게 하고 신라와 더불어 옛 원한을 풀게 하였다.

○신라에서 선부 경(船府卿) 2인을 두었다.

 

 

 

갑자년(甲子年; 664)

신라 문무왕 4년, 고구려 보장왕 23년

당(唐)나라 인덕(麟德) 원년

 


봄 정월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나이 늙어 물러가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궤장(?杖)을 내려주었다.

○신라왕이 아찬(阿飡) 군관(軍官)을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으로 삼았다.

○신라왕이 하교(下敎)하여 부녀자(婦女子)도 중국(中國)의 의상(衣裳)을 착용(着用)하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남녀(男女)의 의복이 모두 중국과 같았다.

○2월 신라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옮겨 여러 왕의 능?원(陵園)에 수호(守護)하는 민호(民戶)를 각기 20호(戶)씩 두도록 하였다.

○신라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이찬(伊飡) 천존(天存)이 당(唐)나라의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및 백제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熊津)에서 동맹(同盟)하였다.

○3월 백제의 여중(餘衆)이 또 사비성(泗)城)에 둔취(屯聚)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므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관할 군병을 동원하여 이를 쳐서 깨뜨렸다.

○신라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신라에서 성천(星川)?구일(丘日) 등 38인(人)을 웅진부성(熊津府城)에 보내어 당악(唐樂)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 신라왕이 장군(將軍) 김인문(金仁問)?품일(品日)?군관(軍官)?문영(文潁) 등으로 하여금 일선(一善)?한산(漢山) 두 고을 군사를 이끌고 웅진부성의 군사와 더불어 고구려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게 하여 승리(勝利)를 거두었다.

○8월 신라에서 지진이 있어 백성의 가옥(家屋)이 무너졌는데 남방이 더욱 심하였다.

○신라에서 사람들이 재물과 전지(田地)를 함부로 불사(佛寺)에 희사(喜捨)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을축년(乙丑年; 665)

신라 문무왕 5년, 고구려 보장왕 24년

당(唐)나라 인덕 2년

 


봄 2월 신라의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그만두고 물러나는 것)하니, 이찬(伊飡) 진복(眞福)으로 중시를 삼았다. 이찬 문왕(文汪)이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葬事)지냈다. 당 고종(唐高宗)이 양동벽(梁冬碧)?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어 와서 조문(吊問)하였고, 겸하여 자의(紫衣) 1습(襲), 요대(腰帶) 1조(條), 채능라(彩綾羅) 1백 필(疋), 생초[?] 2백 필을 증여(贈與)하였으며, 겸하여 김유신(金庾信)을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으로 책봉(冊封)하였고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내렸다. 이에 신라왕이 당나라 사신에게 금백(金帛)을 더욱 후(厚)히 증여(贈與)하였다.

○가을 8월 경자(庚子)에 신라왕이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과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熊津)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동맹(同盟)하였는데 그 서사(誓詞)에 이르기를,

"지난날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역(順逆)의 이치에 어두워서 이웃나라와 친선(親善)하지 않았고 인척 간에 화목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결탁(結托)하고 왜국과 교통(交通)하여 함께 포악한 짓을 자행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약탈하고 성지(城池)를 도륙(屠戮)하여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天子)는 한 물건도 제 자리를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무고(無辜)한 백성이 전쟁에 시달림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자(使者)를 보내어 화친을 도모하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지세(地勢)의 험준함과 거리(距離)의 먼 것을 믿고 천리(天理)를 업신여기고 거만하게 굴었다. 이에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토벌을 행했으니 깃발이 지향(指向)하는 곳에 한 번 싸워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그 궁전(宮殿)을 허물고 연못을 파서 후예(後裔)를 경계하며,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사(後嗣)에게 교훈을 보임이 마땅하다. 그러나 유순한 자를 따르게 하고 배반한 자를 치는 것은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전장(典章)이며, 멸망한 자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선현(先賢)의 상규(常規)이니, 일은 반드시 예[古]를 본받아야 하니 이는 사책(史冊)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으로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받들고 그 고토(故土)를 보전(保全)하도록 하였으니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고 각기 오랜 원한을 풀어 화친을 맺으며 각기 조명(詔命)을 받들어 길이 번방(藩邦)이 되도록 하라. 인하여 사신(使臣) 우위위장군 노성현공(右威衛將軍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임(臨)하여 권유(勸諭)하고 성지(聖旨)를 자세히 선포(宣布)하게 한다. 그대들은 서로 혼인(婚姻)을 맺고 거듭 맹서를 다짐하며 희생을 잡아 삽혈(?血)2)하고 시종(始終)을 돈독히 하라. 재난(災難)을 나누고 환난을 돌보아주어 은의(恩誼)를 형제와 같이 할지며 정성으로 윤음(綸音)을 받들어 감히 실추(失墜)하지 말고 이미 맹서한 후에는 영세(永世)토록 변함이 없도록 하라. 만약 맹서를 배반하고 마음을 여러 모로 변경시켜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神明)이 굽어보고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할 것이고 사직(社稷)을 지키지 못할 것이며 제사(祭祀)가 끊기고 뒤 끝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券)3)을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하여 두니 자손들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어기지 말도록 하라. 신명(神明)이 듣고 흠향(歆饗)하여 복(福)을 주시리로다."

하였으니, 이는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글이었다. 삽혈이 끝난 다음 희생과 폐백을 제단(祭壇) 북쪽에 파묻고 그 서적(書籍)을 신라의 종묘(宗廟)에 간직하였다. 이에 유인궤가 신라의 사신 및 백제?탐라(耽羅)?왜국(倭國) 네 나라의 사신을 데리고 바다에 떠서 당나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 모여 제사(祭祀)를 지냈는데 부여융은 무리가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또한 당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후에 의봉 연간(儀鳳年間 - 676년~678년)에 당나라에서 부여융으로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을 삼아 고국(故國)에 돌아가 남아있는 무리를 안집(安集)하게 하였으며, 이어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 통할(統轄)하게 하였다. 이때에 부여융은 신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고국(故國)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서 머물러 있다가 죽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백제의 시조(始祖)는 그 계통(系統)이 부여(扶餘)에서 나왔는데 그 곳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자손이 대대(代代)로 계승(繼承)하여 거의 7백 년을 전(傳)했으니 그 자손에게 끼친 계책이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러 사치와 탐욕이 극단에 달하였고 함부로 공역(功役)을 일으켰으며 제멋대로 법도(法度)를 무너뜨리고 충량(忠良)한 선비를 억울하게 죽였다. 또 이웃 나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여 경내(境內)의 백성들이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또 중국(中國)을 예(禮)로써 섬기지 못하여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데 이르러 그 몸은 부로(?虜)가 되었고 종묘(宗廟)는 구허(丘墟 - 빈터)가 되었으니 또한 후세(後世)의 경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신라왕이 그 아들 정명(政明)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겨울 신라에서 일선(一善)?거열(居列) 두 고을 백성으로 하여금 군자(軍資)를 서하주(西河州)에 수송하게 하였다. 초포(?布)의 길이와 폭을 다시 정하였다. 옛날에는 초포 10심(尋 - 심(尋)은 8 척 (尺))으로서 1필(疋)을 삼았는데, 다시 길이 7보(步 - 보(步)는 6 척(尺)) 너비 2척으로서 1필을 삼았다.

○신라에서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良州)를 설치(設置)하였다.

 

 

 

병인년(丙寅; 666)

신라 문무왕 6년, 고구려 보장왕 25년

당(唐)나라 건봉(乾封) 원년

 


봄 정월 신라의 서울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3월 신라의 여인(女人)이 한 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여름 4월 신라 영묘사(靈廟寺)가 불타버렸다.

○신라에서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신라에서 내마(奈麻) 한림(漢林)과 삼광(三光)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숙위(宿衛)토록 하였으니, 한림은 천존(天存)의 아들이요, 삼광은 유신(庾信)의 아들이었다. 신라왕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다시 당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이들을 보냈는데 당 고종(唐高宗)이 삼광으로서 좌무위 익부 중부장(左武衛翊府中部將)을 삼았다.

○고구려왕이 태자(太子) 복남(福男)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태산(泰山)의 제사에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태산의 제사에 시위하게 하였는데 당 고종이 김인문에게 우효위 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제수(除授)하고 식읍(食邑) 4백호(戶)를 내려주었다.

○당초에 고구려 개소문(蓋蘇文)의 아들 남생(男生)이 나이 9세(歲)에 음관(蔭官)으로서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보직(補職)되었으니 당나라의 알자(謁者)와 같았는데, 그 후 중리대형(中裏大兄)에 올라 나라의 정사(政事)를 도맡아서 모든 사령(辭令)을 주관하였다.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진급(進級)되었고 개소문이 죽자 남생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삼군 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임하였다가 대막리지(大莫離支)로 승진(陞進)하였다. 여러 부(部)를 안무(按撫)하러 나가면서 그 아우 남건(男建)?남산(男産)으로 하여금 잠시 뒷일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혹자가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기를 핍박할까 두려워하여 장차 제거(除去)하려 한다. 어찌 앞서서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

하니, 남건?남산이 믿지 않았다. 그러데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서 장차 권한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이에 남생이 몰래 그 친근한 자를 보내어 두 아우를 엿보게 하였는데, 남건과 남산이 그를 잡아두고 거짓 왕명(王命)을 빙자하여 남생을 부르니 남생이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에 남건이 그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동원하여 남생을 공격하였다.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國內城)에 웅거(雄據)하고 거란[契丹]?말갈(靺鞨)과 교결(交結)하였으며,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내부(內附)하기를 구하니 당 고종(唐高宗)이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고 승여마(乘輿馬)?서금(瑞錦)?보도(寶刀)를 주어서 돌려보냈다.

○6월 당 고종(唐高宗)이 좌효위 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남생을 응원하게 하였다.

○가을 8월 고구려 왕이 남건을 막리지(莫離支)로 삼아 안팎의 병마사(兵馬事)를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9월 당 고종(唐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남생에게 특진요동도독 겸 평양도 행군대총관 지절안무대사 현도군공(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行軍大摠管持節安撫大使玄?郡公)을 제수하였는데, 남생은 가물(哥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 성(城)을 당나라에 바치고 항복하니, 당 고종이 서대사인(西臺舍人) 이건역(李虔繹)에게 명하여 군진(軍陣)에 나아가 위로하게 하고 포(袍)?대(帶) 금구(金?) 등 일곱 가지 물품을 내려주었다.

○겨울 12월 당 고종(唐高宗)이 이적(李勣)을 요동도행 군대총관 겸 안무대사(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사열 소상 백(司列少常伯) 안륙(安陸)과 학처준(학處俊)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계필하력(契苾何力)을 아울러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았다. 그리고 수륙(水陸) 제군(諸軍)의 총관(摠管)과 아울러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도 모두 이적의 지휘(指揮)를 받게 하고 하북(河北) 여러 주(州)의 조?부(租賦)는 모두 요동(遼東)으로 보내어 군용(軍用)에 공급(供給)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중신(重臣) 연정토(淵淨土)가 종관(從官) 24인을 거느리고 12성(城), 7백 63호(戶), 3천 5백 43구(口)로써 신라에 투항(投降)하니 신라에서 의복?양식?전지(田地)?가옥을 주어 중외(中外)에 나누어 거주(居住)시키고 12성(城)에는 모두 사졸(士卒)을 보내어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667)

신라 문무왕 7년, 고구려 보장왕 26년

당(唐)나라 건봉 2년

 


가을 7월 신라에서 3일 동안 중외(中外)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 고종(唐高宗)이 신라에 칙명(勅命)을 내려 지경(智鏡)?개원(愷元)?일원(日原)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요동(遼東)의 전역(戰役)에 다다르게 하니 신라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波珍飡)으로 개원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일원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다. 당 고종이 유인원(劉仁願)?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고, 또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서 전진하여 평양(平壤)에서 회합(會合)하게 하였다.

○8월 신라왕이 직접 김유신 등 30인의 장군을 이끌고 출정(出征)의 길을 떠나,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이르러 이적(李勣)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적은 고구려 신성(新城)을 함락시킨 뒤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애당초 이적이 요하(遼河)를 건널 때에 제장(諸將)에게 이르기를,

"신성(新城)은 고구려 서쪽 변방의 요충(要衝)이니 이를 먼저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남은 성(城)을 취(取)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 드디어 공격하였는데 성 안에 있던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城主)를 잡아 결박(結縛)한 다음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으며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연달아 진격하니 16성(城)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龐同善)?고간(高侃)이 아직 선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사를 보내어 그 진영(陣營)을 엄습하니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薛仁貴)가 이를 쳐서 깨뜨렸다. 고간이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싸워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이긴 틈을 타서 추격(追擊)하였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좌우에서 협격(挾擊)하여 5만여 인을 죽였으며 남소(南蘇)?목저(木저)?창암(蒼巖) 세 성(城)을 함락시키고 남생(男生)의 군사와 회합(會合)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서 평양으로 향하니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으로 하여금 군량과 무기(武器)를 뱃길로 실어보내어 군수(軍需)에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선박(船舶)이 파손(破損)되어 정(定)한 기일(期日)에 어긋났다. 이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窘乏)하매 글을 지어 이적에게 보내고자 하였으나 혹시 누설되어 남이 그 허실(虛實)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4)를 지어 이적에게 보내니 이적이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軍事)가 한참 긴급한데 어찌 시(詩)를 일삼는단 말인가? 반드시 목을 베리라."

하였는데, 행군 관기 통사 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해석하니 이적이 다시 군량과 무기를 보내주었다. 원만경이 고구려에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이르기를,

"압록강(鴨綠江)의 험고(險固)함을 지킬 줄도 알지 못한다."

하니, 남건이 회보(回報)하기를,

"삼가 명을 듣겠노라."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진(鴨綠津)을 지키니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에 유배(流配)시켰다. 학처준(학處俊)은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있었는데 미처 열(列)도 이루기 전에 고구려 군사 3만 명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는데 학처준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건량(乾糧)을 먹다가 정병(精兵)을 뽑아 이를 격퇴(擊退)하였다.

○겨울 10월 이적(李勣)이 평양성(平壤城)의 북쪽 2백 리(里) 거리에 이르러 대내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보내어 거란(契丹)의 기병(騎兵) 80여 인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글월을 전하여 신라의 군사를 속히 보내도록 독촉하니 신라왕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신라왕이 장새(獐塞)에 이르러 이적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또한 되돌아왔으며, 인하여 강심에게 급찬(級飡)을 제수하고 벼 5백 석(石)을 내려주었다.

○12월 신라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졸(卒)하였다.

○당 고종(唐高宗)이 유진 장군(留鎭將軍)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신라왕으로 하여금 고구려 정벌에 협조하도록 하고 인하여 신라왕에게 대장군(大將軍)의 정절(旌節)을 내려주었다.

○신라에서 우이방부(右理方府)에 영(令) 2인(人), 경(卿) 2인, 좌(佐) 2인, 대사(大舍) 2인, 사(史) 10인을 두었다.

 

 

 

무진년(戊辰年; 668)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보장왕 27년

당(唐)나라 총장(總章) 원년

 


봄 정월 이적(李勣)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매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으로 삼고, 학처준(?處俊)?김인문(金仁問)을 부장(副將)으로 삼았으며, 김인문으로 하여금 신라에서도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2월 이적(李勣) 등이 고구려 부여성(扶餘城)을 함락시켰다. 이에 앞서 설인귀(薛仁貴)가 금산(金山)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擊破)하고는 이긴 김에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으니 그만두도록 만류하였다. 이에 설인귀가 말하기를,

"군사는 반드시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조종(操縱)하느냐에 달려있다."

하고, 드디어 선봉(先鋒)이 되어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기니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었으며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城)이 모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왔으므로 당 고종이 군중(軍中)의 상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반드시 승리합니다. 옛날 선제(先帝 - 당 태종(唐太宗))께서 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뜻을 얻지 못한 것은 고구려에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언에 이르기를, "군(軍)은 중매(仲媒)가 없으면 중도에서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이제 남생이 형제들과 분쟁이 일어나 우리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국의 형세를 모두 알게 된 데다가 장수는 충성스럽고 사졸들은 힘을 다하는 까닭에 신(臣)이 반드시 이긴다고 한 것입니다. 또 고구려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백년이 못되어 마땅히 80대장(大將)이 있어 이를 멸(滅)한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 때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 80입니다. 고구려에는 연달아 기근(饑饉)이 들어 사람들이 늘 도적질하고 자식을 팔며 지진(地震)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 안에 들어오며 두더쥐가 성문 밑에 구멍을 뚫어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遠征)으로 끝이 나고 다시 거병(擧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어 부여성을 구원하였는데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마주 싸워 패하였으니 죽은 자가 3만여 인이나 되었으며, 이적은 계속해서 전진하여 대행성(大行城)을 공격하였다.

○아마(阿麻)가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에서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미녀(美女) 원기(元器) 및 정토(淨土)를 바치니 당 고종(唐高宗)이 받지 않았고 인하여 다시는 미녀를 바치지 말라고 신칙하였다.

○3월 신라에서 파진찬(波珍飡) 지경(智鏡)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신라에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設置)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으로 총관(摠管)을 삼았다.

○여름 4월 신라에서 혜성(彗星)이 천선(天船 - 별 이름)을 지켰다. 고구려에서 혜성이 필성(畢星)과 묘성(昴星) 자리 사이에 나타났는데, 당(唐)나라 허경종(許敬宗)이 말하기를,

"혜성이 동북방이 나타났으니, 이는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다."

하였다.

○6월 요동도안무부대사 요동행군부대총관 겸 웅진도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 좌중호 상주국 낙성현 개국남(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 유인궤(劉仁軌)가 칙명(勅命)을 받들고 숙위(宿衛) 사찬(沙飡) 김삼광(金三光)과 더불어 당항진(黨項津)에 당도하니 신라왕이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으로 하여금 예절을 갖추어 영접(迎接)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약속(約束)을 선포한 다음, 신라왕이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을 대총관(大摠管)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흠순(欽純)?천존(天存)?문충(文忠)과 잡찬(?飡) 진복(眞福)과 파진찬(波珍飡) 지경(智鏡)과 대아찬(大阿飡) 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을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삼았으며, 이찬(伊飡) 진순(陳純)?죽지(竹旨)를 경정총관(京停摠管)으로 삼았고, 이찬(伊飡) 일품(日品)과 대아찬(大阿飡) 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삼았으며,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총관(卑列道摠管)으로 삼았고, 잡찬(?飡) 군관(軍官)과 대아찬(大阿飡) 도유(都儒)와 아찬(阿飡) 용장(龍長)을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삼았으며, 잡찬 숭신(崇信)과 대아찬 문영(文潁)과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으로 삼았고, 파진찬 선광(宣光)과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총관(誓幢摠管)으로 삼았고, 아찬 일원(日原)?흥원(興元)을 계금당총관(?衿幢摠管)으로 삼았다.

○웅진부성(熊津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미힐(未?)을 신라에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大谷)?한성(漢城) 등 두 군(郡) 12성(城)이 귀복(歸服)한 것을 고(告)하니 신라왕이 일길찬(一吉飡) 진공(眞功)을 보내어 하례(賀禮)하였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천존(天存)?도유(都儒) 등이 일선주(一善州) 등 일곱 고을 및 한성주(漢城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당나라 진영(陣營)에 다다르게 하였으며 신라왕은 뒤를 잇대어 출발하고 제도 총관(諸道摠管)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애당초 김유신이 신병(身病)으로 출정(出征)하지 못하니 왕이 흠순(欽純)과 김인문을 장수로 삼았다. 흠순이 왕에게 고(告)하기를,

"만약 김유신이 함께 출정하지 않는다면 후회(後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卿) 등 세 사람은 모두 나라의 기둥인데 만약 함께 출정했다가 혹시라도 차질(蹉跌)이 생긴다면 나랏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만약 김유신을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은연히 나라의 장성(長城)이 될 것이니 내가 걱정이 없다."

하였다. 흠순은 유신의 아우이며 인문은 유신의 조카였는데 출정함에 임하여 유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불초(不肖)한 재질(材質)로서 이제 대왕을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전장(戰場)에 나가오니 한마디 가르침을 듣고자 원합니다."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干城)이며 임금의 조아(爪牙 - 손톱과 어금니, 곧 중요한 사람)로서 시석(矢石)의 사이에서 승부(勝負)를 결단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으며, 중(中)으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연후에라야 공(功)을 이룰 수 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충성과 신의로써 보존(保存)되었거니와 백제는 오만하게 굴다가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곧음으로써 고구려의 사곡(邪曲)함을 공격하는데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더구나 현명(賢明)한 천자(天子)의 위엄을 힘입어 지극히 불인(不仁)한 자를 정벌함이겠는가"?

하였다.

○이적(李勣)이 이미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니 제도(諸道)의 군사가 모두 이적과 회합(會合)하여 압록책(鴨綠柵)에 이르렀는데 고구려 군사가 막아 싸우니 이적이 이를 깨뜨리고 2백여 리(里)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항복하는 자가 잇달았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平壤城) 아래에 이르렀으며 이적의 군사가 뒤를 이었는데 인문 등이 이적과 만나서 영류산(영留山) 아래에 진군(進軍)하였다.

○가을 7월 신라왕이 한성주(漢城州)에 주둔(駐屯)하였으니 군사가 모두 20만명이었다. 여러 총관(摠管)을 보내어 당(唐)나라 군사와 회합(會合)하게 하였고, 문영(文潁)은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9월 신라 군사가 당(唐)나라 군사와 합(合)하여 평양성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에 고구려왕이 먼저 남산(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98인(人)을 거느리고 백기(白旗)를 가지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을 청하니 이적이 예절로써 접대하였다. 그런데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으며 자주 군사를 내보내어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남건은 군사(軍事)를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이 소장(小將) 오사(烏沙)?요묘(饒苗)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람을 이적에게 보내어 내응(內應)할 것을 청하였다. 그 후 5일 만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으며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城)에 올라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성에 불을 지르니 남건이 자살하려 하다가 미수(未遂)에 그쳤다. 이에 고구려왕 보장(寶藏)과 남건을 사로잡았는데 고구려왕이 이적에게 무릎을 꿇고 재배(再拜)하니 이적이 답례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드디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주몽(朱蒙)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세워 역년(歷年)이 40년이요, 유류왕(孺留王)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겨 역년이 4백 25년이며, 장수왕(長壽王) 15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겨 역년이 1백 56년이요,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겨 역년이 83년인데, 보장왕(寶藏王) 27년에 멸망하였으니, 모두 7백 5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현도(玄?)와 낙랑(樂浪)은 원래 조선(朝鮮)의 땅으로서 기자(箕子)를 봉(封)한 곳이니 기자가 그 백성에게 예의(禮義)와 전잠(田蠶)과 방직(紡織)을 가르쳤고, 8조(條)의 금령(禁令)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여 밤에도 사립문을 닫지 않았고 부인(婦人)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으며 음식(飮食)은 변두(?豆 - 제사(祭祀)와 연향(宴享)에 쓰는 그릇)로써 하였으니, 이는 인현(仁賢)의 교화(敎化)가 미친 때문이었다. 또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북방?남방?서방 세 방면의 오랑캐와 달랐으므로 공자(孔子)는 중국(中國)에서 도(道)를 행하지 못함을 슬퍼하여 떼[?]를 타고 동해(東海)에 가서 거주(居住)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연유(緣由)가 있는 것이다.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2효(爻)는 명예(名譽)가 많고, 4효는 두려움이 많은데 <이는 4효가 임금 격(格) 5효에> 가까운 때문이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秦漢) 이후 중국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이웃은 모두 천자(天子)의 유사(有司)이거니와 난세(亂世)에는 영웅(英雄)들이 우뚝 일어나서 천자의 명위(名位)를 참람하게 도둑질하는 자들이었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있다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도 겸손한 뜻이 없고 그 영토(領土)를 침범하여 원수가 되었으며 그 군현(郡縣)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에 전쟁이 잇달고 앙화를 맺어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동쪽에 있는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김에 미쳐서는 수?당(隋唐)의 통일(統一)을 맞이하였는데도 오히려 조명(詔命)을 어겨 순종하지 않았고 왕명(王命)을 받은 사신을 토실(土室)에 가두는 등 그 완악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 차례 죄를 묻는 군사를 초래(招來)하게 되었다. 비록 때로는 기이한 계책으로 대군(大軍)을 함몰시키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쳤다. 그러나 시말(始末)을 살펴보건대, 상하가 화합하고 백성들이 친목했을 때에는 비록 대국(大國)일지라도 능히 취(取)하지 못하였는데, 나라가 의롭지 못하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들의 원성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허물어져 스스로 떨치지 못하였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와 지세(地勢)의 이로움도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하였고, 좌구명(左丘明)은 말하기를, "나라가 복(福)으로써 흥하고 화(禍)로써 멸망하는데, 나라가 흥함에 있어서는 백성 보기를 상(傷)한듯이 하니 이것이 복이요, 나라가 멸망함에 있어서는 백성 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니 이것이 화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들은 참으로 의미가 심장하다. 그런즉 무릇 나라의 임금된 자가 사나운 관리의 구박(驅迫)과 호족(豪族)의 취렴(聚斂)에 백성을 내맡겨두어 인심(人心)을 잃는다면 비록 다스려서 어지럽지 않고 보존(保存)하여 멸망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억지로 술을 마시면서 취(醉)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원래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땅인데 뒤에 기자(箕子)를 봉(封)한 바가 되었다. 기자가 백성을 예의(禮義)로 가르쳤고 8조(條)의 금령(禁令)을 베풀었으므로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았고 부인(婦人)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으며 음식은 변두(?豆)로써 하였다. 공자(孔子)가 이곳에서 살고자 하였으니 어찌 인현(仁賢)의 교화(敎化)를 숭상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졸본 부여(卒本扶餘)로부터 와서 왕위(王位)에 올라 도읍을 세운 지 거의 8백 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말엽에 이르러서는 사치하기에 한도가 없고 풍속이 퇴폐(頹廢)하여 떨치지 않았으며 권신(權臣)이 정사(政事)를 맡아 감히 시역(弑逆)을 자행하고 그 임금을 제멋대로 폐치(廢置)하였다. 더구나 교린(交隣)을 도리에 맞게 하지 않고 서로 침범하였으며, 또 하늘을 두려워하여 대국(大國)을 섬기지 아니하였고, 중국(中國)을 업신여기다가 수?당(隋唐)의 군사가 재차 쳐들어와서 군신(君臣)이 사로잡히고 종사(宗社)는 끊어졌으니 어찌 스스로 화를 초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더라도 개소문(蓋蘇文)이 국사(國事)를 주관할 때에는 비록 지극히 포악하였으나 정사(政事)가 한 사람에게서 나와 인심(人心)이 분열되지 않았으므로 당 태종(唐太宗)의 신무불측(神武不測)으로서도 오히려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소문이 죽자 두 아들이 권세를 다투어 골육(骨肉)이 서로 일을 꾀한 탓에 중심(衆心)이 분열되어 공수(攻守)할 대책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적이 81세(歲)의 노장(老將)으로서 이를 섬멸할 수가 있었으니 또한 소국(小國)을 보존(保存)하는 경계로 삼을 만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당초에 당 고종(唐高宗)이 남생(男生)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고 요동대도독 현도군공(遼東大都督玄?郡公)에 승천(陞遷)시켰으며 경사(京師 - 장안(長安))에 제택(第宅)을 내려주었다. 인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군영(軍營)에 돌아오게 하고 이적(李勣)과 더불어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그 아들을 보내어 요수(遼水)에 나아가 위로하고 상(賞)을 내려주었다. 이에 이적이 고구려왕 보장(寶藏)과 그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大臣) 등 20여 만명을 데리고 경사(京師)에 돌아갔으며 신라의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조주(助州)?인태(仁泰)?의복(義福)?수세(藪世)?천광(天光)?흥원(興元) 등도 이에 따랐다. 신라왕이 당나라 군사가 평양을 함락시킨 소식을 듣고 가서 그들과 만나고자 하였으나 힐차양(?次壤)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가 이미 철군한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한성(漢城)에 이르러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제 뭇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백제 명농왕(明<<확인요 한자: 示+農>> - 王<성왕(聖王))이 고리산(古利山)에 와서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것을 꾀하자 유신(庾信)의 조부 무력(武力)이 이를 요격(邀擊)하여 이긴 틈을 타서 그 왕과 대신(大臣) 네 사람을 사로잡았으며, 유신의 아비 서현(舒玄)은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 군사와 싸워 그 예기(銳氣)를 좌절시켜 국경(國境)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변방 백성은 농상(農桑)의 생업(生業)에 안도(安堵)하였고 군신(君臣)은 밤낮으로 관방(關防)에 얽매이는 걱정이 없었다. 이제 유신은 부?조(父祖)의 업적(業績)을 이어받아 사직(社稷)의 신하가 되었고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상신(相臣)이 되었으니 공적(功績)이 위대(偉大)하다. 이제 특수한 전례(典禮)로써 상(賞)을 내리고자 한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진실로 성유(聖諭)가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을 두고 이를 제수하였으니 위계가 대각간(大角干)의 위에 있었다. 식읍(食邑) 5백 호(戶)를 주었으며 수레와 궤장[?杖]을 하사(下賜)하였고 궁전(宮殿)에 오를 때에도 추창(趨? -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감)하지 않게 하였다. 인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제수하고 식읍(食邑) 5백 호를 내렸으며, 그 나머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논상(論賞)하였다.

○신라왕이 욕돌역(褥突驛)에 이르니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忠州))의 사신(仕臣) 대아찬(大阿飡) 용장(龍長)이 왕과 여러 시종(侍從)에게 연회(宴會)를 베풀어 접대하였다.

○겨울 10월 이적(李勣)이 장차 경사(京師)에 들어갈제 당 고종(唐高宗)이 명을 내려 먼저 고구려왕 보장(寶藏) 등으로서 소릉(昭陵 - 당 태종의 능(陵))에 바치게 하고 군용(軍容)을 갖추어 개가(凱歌)를 부르며 경사(京師)에 들어와 태묘(太廟)에 바치게 하였다.

○11월 신라왕이 부로(?虜) 7천명을 조묘(祖廟)에 바치고 전사자(戰死者)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내려주었다.

○당 고종(唐高宗)이 함원전(含元殿)에서 부로(?虜)를 받았는데 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은 정사(政事)가 그 몸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용서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을 삼았고, 남산(男産)은 사재소경(司宰少卿)을 삼았으며, 승려 신성(信誠)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삼았고, 남생(男生)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삼았다. 남생은 순후(純厚)하고 예모(禮貌)가 있었으며 주대(奏對)하는데 민첩하였는데 뒤에 변국공(卞國公)으로서 졸(卒)하였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流配)하였다. 고구려의 5부(部), 1백 76성(城), 69만여 호(戶)를 나누어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백 현(縣)을 삼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였으며, 고구려 장수로서 공로가 있는 자를 가려서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한인(漢人)과 뒤섞여 채용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고구려 주?군?현(州郡縣)은 모두 1백 64이니, 한산주(漢山州), 국원성(國原城) - 미을성(未乙省), 혹은 탁장성 (託長城)이라고도 하였다., 남천현(南川縣) - 남매(南買)라고도 하였다., 구성(駒城) -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 잉근내군(仍斤內郡), 술천군(述川郡) - 성지매(省知買)라고도 하였다., 골내근현(骨乃斤縣), 양근현(楊根縣)  - 거사참(去斯斬)이라고도 하였다., 금물내군(今勿內郡) -  만노(萬弩)라고도 하였다., 도서현(道西縣) - 도분(都盆)라고도 하였다., 잉홀(仍忽), 개차산군(皆次山郡), 노음죽현(奴音竹縣), 내혜홀(奈兮忽), 사복홀(沙伏忽), 사산현(蛇山縣), 매홀(買忽)  - 수성(水城)이라고도 하였다., 당성군(唐城郡), 상홀(上忽) - 차홀(車忽)이라고도 하였다., 부산현(釜山縣) -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하였다., 율목군(栗木郡) - 동사힐(冬斯?)이라고도 하였다., 잉벌노현(仍伐奴縣),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매소홀현(買召忽縣)  -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하였다., 장항구현(獐項口縣) - 고사야의차(古斯也衣次)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고사야홀차 (古斯也忽次)라고 하였다, 주부토군(主夫吐郡), 수이홀(首?忽), 검포현(黔浦縣), 동자홀현(童子忽縣)  -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하였다., 평회압현(平淮押縣) - 별회 (別淮)라고도 하고 사파회(史波淮)라고도 하였다., 북한산군(北漢山郡)  - 평양(平壤)이라고도 하였다. 골의내현(骨衣內縣), 왕봉현(王逢縣) -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며, 한씨(漢氏)의 미녀(美女)가 안장왕 (安臧王)을 맞이한 곳이므로 왕영(王迎)이라고 이름하였다., 매성현(買省縣)  - 마홀(馬忽)이라고도 하였다., 칠중현(七重縣) - 난은별(難隱別)이 라고도 하였다., 파해호사현(波害乎史縣) - 액봉(額蓬)이라고도 하였다., 천정구현(泉井口縣)  - 어을매관(於乙買串) 이라고도 하였다., 술이홀현(述?忽縣)  - 수니홀(首泥忽)이라고도 하였다., 달을성현(達乙省縣) - 한씨(漢氏)의 미녀(美女)가 높은 산 마루턱에서 봉화(烽火)를 들어 안장왕(安臧王)을 영접(迎接)한 곳이므로 뒤에 고봉(高烽)이라고 하였다., 비성군(臂城郡)  - 마홀(馬忽)이라고도 하였다., 내매(內買)( - 《삼국사기》에는 내을매(內乙買)라고 하였음. 내이미(內?米)라고도 하였다., 철원군(鐵圓郡) -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하였다., 양골현(梁骨縣), 승량현(僧梁縣)  - 비물(非勿)이라고도 하였다., 공목달(功木達) -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하였다. 부여군(夫如郡), 어사내현(於斯內縣) - 부양(斧壤)이라 고도 하였다., 오사함달(烏斯含達), 아진압현(阿珍押縣) - 궁악(窮嶽)이라고도 하였다., 소읍두현(所邑豆縣), 이진매현(伊珍買縣), 우잠군(牛岑郡)  - 우령(牛嶺), 혹은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하였다., 장항현(獐項縣) - 고야홀차(古也忽次)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 하였다.), 장천성군(長淺城郡)  - 야야(耶耶), 혹은 야아 (夜牙)라고도 하였다., 마전천현(麻田淺縣)  - 파니사홀(波泥沙忽) 이라고도 하였다., 부소갑(扶蘇岬),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  - 삭두(朔頭), 혹은 의두 (衣頭)라고도 하였다., 굴어갑(屈於岬)  - 홍서(紅西)라고도 하였다., 동비홀(冬比忽), 덕물현(德勿縣), 진림성현(津臨城縣)  - 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하였다., 혈구군(穴口郡) -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하였다., 동음내현(冬音奈縣)  - 휴음(休陰)이라고도 하였다., 고목근현(高木根縣)  - 달을참(達乙斬)이라고도 하였다., 수지현(首知縣) - 신지(新知)라고도 하였다., 대곡군(大谷郡) -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다., 수곡성현(水谷城縣) - 매단홀(買旦忽)이라고도 하였다., 십곡현(十谷縣)  - 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하였다., 동음홀(冬音忽) - 시염성(?鹽城)이라고도 하였다., 도랍현(刀臘縣) -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하였다., 오곡군(五谷郡)  - 혜차운홀(兮次云忽)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는 궁차운홀 (弓次云忽)이라고 하였음.), 내미홀(內米忽) - 지성(池城), 혹은 장성 (長城)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는 장지(長池)라고 하였음. - ), 한성군(漢城郡)  - 한홀(漢忽), 혹은 식성(息城) 혹은 내홀(乃忽)이라고도 하였다., 휴류성("城)  - 조파의(租波衣), 혹은 휴암군(?岩郡)이라고도 하였다., 장새현(獐塞縣) - 고소어(古所於) 라고도 하였다., 동홀(冬忽) - 우동어홀(于冬於忽) 이라고도 하였다., 금달(今達)  - 신달(薪達), 혹은 식달(息達)이라고도 하였다., 구을현(仇乙峴) - 굴천(屈<<확인요 한자: 干+?>>)이라고도 하였다.지금의 풍주(?州), 궐구(闕口) 지금의 유주(儒州), 율구(栗口) - 율천(栗川)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은율현(殷栗縣), 장연(長淵),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마경이(麻耕伊) 지금의 청송현(靑松縣), 양악(楊岳) 지금의 안악군(安嶽郡), 판마관(板麻串) 지금이 가화현(嘉禾縣), 웅한이(熊閑伊) 지금의 수녕현(水寧縣), 옹천(甕<<확인요 한자: 干+?>>) 지금의 옹진현(甕津縣), 부진이(付珍伊) 지금의 영강현(永康縣),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진(白翎鎭)( - 《삼국사기》에는 백령진(白嶺鎭)이라고 하였음.), 승산(升山) 지금의 신주(信州), 가화압(加火押),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 구사현(仇史峴)이라고도 하였다., 우수주(牛首州) - "수(首)"를 ‘두(頭)"라고도 쓰며 수차약(首次若), 혹은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하였다., 벌력천현(伐力川縣), 횡천현(橫川縣) - 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하였다., 지현현(砥峴縣), 평원군(平原郡), 북원(北原), 내토군(奈吐郡) - 대제(大提)라고도 하였다., 사열이현(沙熱伊縣), 적산현(赤山縣), 근평군(斤平郡) - 병평(?平)이라고도 하였다., 심천현(深川縣) - 복사매(伏斯買) 라고도 하였다., 양구군(楊口郡) -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하였다., 저족현(猪足縣) - 오사형(烏斯逈)이라고도 하였다., 옥기현(玉?縣) - 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하였다., 삼현현(三峴縣) -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생천군(?川郡) - 야시매(也尸買) 라고도 하였다., 대양관군(大楊管郡) -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하였다., 매곡현(買谷縣), 고사마현(古斯馬縣), 급벌산군(及伐山郡), 이벌지현(伊伐支縣)  - 자벌지(自伐支) 라고도 하였다., 수성천현(藪猩川縣)  - 수천(藪川)이라고도 하였다., 문현현(文峴縣) - 근시파혜(斤尸波兮)라고도 하였다., 모성군(母城郡) -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하였다., 동사홀(冬斯忽), 수입현(水入縣) - 매이현(買伊縣)이라고도 하였다., 객연군(客連郡) -  ‘객(客)"은 "각(各)"이라고도 쓰며,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하였다., 적목현(赤木縣) -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하였다., 관술현(管述縣), 저란현현(猪?峴縣) - 오생파의(烏生波衣), 혹은 저수(猪守)라고도 하였다., 천성군(淺城郡) - 비열홀(比烈忽)이라고도 하였다., 경곡현("谷縣) - 수을탄(首乙呑)이라고도 하였다., 청달현(菁達縣)석달(昔達)이라고도 하였다., 살한현(薩寒縣), 가지달현(加支達縣), 어지탄(於支呑) - 익곡(翼谷)이라고도 하였다., 매시달(買尸達), 천정군(泉井郡) -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하였다. - , 부사달현(夫斯達縣), 동허현(東墟縣) - 가지근(加知斤)이라고도 하였다., 내생군(奈生郡), 을아차현(乙阿且縣), 우오현(于烏縣) - 욱오(郁烏)라고도 하였다., 주연현(酒淵縣), 하슬라주(何瑟羅州) - 하서량(河西良), 혹은 하서(河西)라고도 하였다., 내매현(乃買縣), 동토현(東吐縣), 지산현(支山縣), 혈산현(穴山縣), 수성군(?城郡) - 가아홀(加阿忽) 이라고도 하였다., 승산현(僧山縣) - 소물달(所勿達)이라고도 하였다., 익현현(翼峴縣) - 이문현(伊文縣)이라고도 하였다., 달홀(達忽), 저수혈현(猪?穴縣) - 오사압(烏斯押)이라고도 하였다., 평진현현(平珍峴縣) - 평진파의(平珍波衣)라고도 하였다., 도림현(道臨縣) - 조을포(助乙浦) 라고도 하였다., 휴양군(休壤郡) - 금뇌(金惱)라고도 하였다., 습비곡(習比谷)  - 곡(谷)을 탄(呑)이라고도 쓴다., 토상현(吐上縣), 기연현(岐淵縣), 곡포현(鵠浦縣) - 고의포(古衣浦) 라고도 하였다., 죽현현(竹峴縣) - 내생어(奈生於)라고도 하였다., 만약현(滿若縣) - 만혜(滿兮)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는 면혜 (沔兮)라고 하였음), 파리현(波利縣), 우진야군(于珍也郡), 파차현(波且縣) - 파풍(波?)이라고도 하였다., 야시홀군(也尸忽郡), 조람군(助攬郡) - 재람(才攬)이라고도 하였다., 청기현(靑己縣), 굴화현(屈火縣), 이화혜현(伊火兮縣), 우시군(于尸郡), 아혜현(阿兮縣), 실직군(悉直郡) - 사직(史直)이라고도 하였다.이다.

○당 고종(唐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선위(宣慰)하였고, 겸하여 금백(金帛)을 내려주었으며, 김유신에게도 또한 글월을 내려 포장(褒?)하였다. 또 김인문에게 작질(爵秩)을 더하고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기사년(己巳年; 669)

신라 문무왕 9년

당(唐)나라 총장 2년

 


봄 정월 승려 신혜(信惠)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았다.

○당 고종(唐高宗)이 승려 법안(法安)을 신라에 보내어 자석(磁石)을 구(求)하였다.

○2월 신라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하교(下敎)하기를,

"지난날에 우리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있던 탓에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침입하여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으니 전사(戰士)들의 해골(骸骨)이 벌판에 쌓여 있었다. 선왕(先王 - 무열왕 (武烈王))께서 백성의 잔해(殘害)를 민망히 여겨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가서 원병(援兵)을 청하였으니, 본래 두 나라를 평정(平定)하여 여러 세대(世代)의 수치(羞치)를 씻고 백성의 잔명(殘命)을 보전(保全)하려 함이었거니와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하였었다.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이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여 사방이 안정(安靜)되었다. 전진(戰陣)에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이미 상(賞)을 내렸고 전사(戰死)한 자에게도 아울러 은혜를 베풀었다. 다만 생각컨대, 옥(獄)에 갇혀 고생하는 자들은 경신(更新)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으니 침식(寢食)이 편치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를 특사(特赦)하되 금월(今月) 21일 새벽 이전에 오역(五逆)5)의 사죄(死罪)를 범한 자는 제외(除外)하고, 그 밖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물론하고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 자로서 변상(辨償)할 재물이 없는 자는 징수(徵收)하지 말고, 가난한 백성으로서 남의 곡식을 차용(借用)한 자는 풍년을 기다려 변상하되 다만 원곡(元穀)만을 갚을 것이며, 빈곤함이 더욱 심한 자는 원곡과 이자를 모두 면제(免除)하도록 한다."

하였다.

○고구려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그 무리 4천여 호(戶)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적(李勣) 등이 아뢰기를,

"조칙(詔勅)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城)에 도독부(都督府) 및 주군(州郡)을 설치할 만한 곳을 천남생(泉男生)과 함께 헤아려 준의(准擬)하여 주문(奏聞)하옵니다."

하니, 전 번 조칙(詔勅)에 의하여 아뢴 대로 하되, 주군을 예속(隷屬)시키는 일은 요동도안무사 겸 우상(遼東道安撫使兼右相) 유인궤(劉仁軌)에게 위임하여 편의(便宜)대로 분할(分割)하게 하고 인하여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총할(摠轄)하게 하였다.지지(地志)에 의하면, 압록강(鴨?水]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城)이 11이니,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6), 절성(節城)7), 풍부성(?夫城)8), 신성주(新城州)9), 도성(桃城)10), 대두산성(大豆山城)11), 요동성주(遼東城州)<d>본래 오열홀(烏列忽),</d> 옥성주(屋城州), 백석성(白石城), 다벌악주(多伐嶽州), 안시성(安市城)<d>옛날 안촌홀(安寸忽)</d>  - (안십홀(安十忽)의 잘못임.) 환도성(丸都城)이 라고도 하였다.이다. ○압록강 이북의 이미 항복한 성이 11이니, 양암성("城), 목저성(木?城), 수구성(藪口城), 남소성(南蘇城), 감물주성(甘勿主城)<d>본래 감물이홀(甘勿伊忽)</d>, 능전곡성(凌田谷城), 심악성(心岳城)<d>본래 거시압(居尸押)</d>, 국내주(國內州) - 불내(不耐), 혹은 위나암성(尉那?城)이라고도 하였다., 설부루성(屑夫婁城)<d>본래 초리파리(肖利巴利)</d>, 후악성(朽岳城)<d>본래 골시압(骨尸押)</d>, 자목성(?木城)이다. ○압록강 이북의 도망한 성은 7이니, 연성(鉛城)<d>본래 내물홀(乃勿忽)</d>, 면악성(面岳城), 아악성(牙岳城)<d>본래 개시압홀(皆尸押忽)</d>, 취악성(鷲岳城)<d>본래 감미홀(甘彌忽)</d>, 적리성(積利城)12), 목은성(木銀城)<d>본래 소시홀(召尸忽)</d>, 이산성(犁山城)<d>본래 가시달홀(加尸達忽)</d>이다. ○압록강 이북에서 공격하여 얻은 성이 3이니, 혈성(穴城)<d>본래 갑홀(甲忽)</d>, 은성(銀城)<d>본래 절홀(折忽)</d>, 사성(似城)<d>본래 사홀(史忽)</d>이다. ○도독부(都督府)의 13현(縣)은 우이현(?夷縣), 신구현(神丘縣), 윤성현(尹城縣)<d>본래 열기(悅己)</d>, 인덕현(麟德縣)13), 산곤현(散昆縣)<d>본래 신촌(新村)</d>, 안원현(安遠縣)14), 빈문현(賓汶縣)<d>본래 비물(比勿)</d>, 귀화현(歸化縣)<d>본래 마사량(麻斯良)</d>, 매라현(邁羅縣), 감개현(甘蓋縣)<d>본래 고막부리(古莫夫里)</d>, 내서현(奈西縣)<d>본래 내서혜(奈西兮)</d>, 득안현(得安縣)<d>본래 덕근지(德近支)</d>, 용산현(龍山縣)<d>본래 고마산(古麻山)</d>이다. ○동명주(東明州)는 4현(縣)이니, 웅진현(熊津縣)<d>본래 웅진촌(熊津村)</d>, 노신현(鹵辛縣)<d>본래 아로곡(阿老谷)</d>, 구지현(久遲縣)<d>본래 구지(仇知)</d>, 부림현(富林縣)<d>본래 벌음촌(伐音村)</d>이다. ○지심주(支?州)는 9현(縣)이니, 이문현(已汶縣)<d>본래 금물(今勿)</d>, 지심현(支?縣)<d>본래 지참촌(只?村)</d>, 마진현(馬津縣)<d>본래 고산(孤山)</d>, 자래현(子來縣)<d>본래 부수지(夫首知)/d>, 해례현(解禮縣)<d>본래 개리이(皆利伊)</d>, 고로현(古魯縣)<d>본래 고마지(古麻只)</d>, 평이현(平夷縣)<d>본래 지류(知留)</d>, 산호현(珊瑚縣)<d>본래 사호살(沙好薩)</d>, 융화현(隆化縣)<d>본래 거사물(居斯勿)</d>이다. ○노산주(魯山州)는 6현(縣)이니, 노산현(魯山縣)</d>본래 감물아(甘勿阿)</d>, 당산현(唐山縣)15), 순지현(淳遲縣)<d>본래 두시(豆尸)</d>, 지모현(支牟縣)<d>본래 지마마지(只馬馬知)</d>, 오잠현(烏蠶縣)<d>본래 마지사(馬知沙)</d>, 아착현(阿錯縣)<d>본래 원촌(源村)</d>이다. ○고사주(古四州)는 본래 고사부리(古沙夫里)로서 5현(縣)이니, 평왜현(平倭縣)16), 대산현(帶山縣)<d>본래 대시산(大尸山)</d>, 벽성현(?城縣)<d>본래 벽골(벽骨)</d>, 좌찬현(佐贊縣)<d>본래 상두(上杜)</d>, 순모현(淳牟縣)<d>본래 두내지(豆奈只)</d>이다. ○사반주(沙泮州)는 호시이성(號尸伊城)으로서 4현(縣)이니, 모지현(牟支縣)<d>본래 호시이촌(號尸伊村)</d>, 무할현(無割縣)17), 좌로현(佐魯縣)<d>본래 상로(上老)</d>, 다지현(多支縣)<d>본래 부지(夫只)</d>이다. ○대방주(帶方州)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으로서 6현(縣)이니, 지류현(至留縣)<d>본래 지류(知留)</d>, 군나현(軍那縣)<d>본래 굴내(屈奈)</d>, 도산현(徒山縣)<d>본래 추산(抽山)</d>, 반나현(半那縣)<d>본래 반내부리(半奈夫里)</d>, 죽군현(竹軍縣)18), 포현현(布賢縣)19)이다. ○분차주(分嵯州)는 파지성(波知城)으로서 4현(縣)이니, 귀단현(貴旦縣)20), 수원현(首原縣)21), 고서현(皐西縣)22), 군지현(軍支縣)이다. 신라(新羅)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柵城府)에 이르기까지 모두 39역(驛)이다.

여름 4월 당(唐)나라에서 고구려의 백성 3만 8천 3백호(戶)를 강회(江淮)의 남쪽 및 산남(山南)?경서(京西) 등 여러 고을의 공한지(空閒地)에 이주(移住)시키고 잔약(殘弱)한 자들로 하여금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5월 신라에서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해 주었다.

○신라왕이 급찬(級飡) 지진산(祗珍山) 등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자석(磁石)을 바쳤다.

○신라왕이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함부로 취(取)한 때문에 당 고종(唐高宗)이 노여워하여 나무라니, 왕이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당나라에 보내어 사죄(謝罪)하였다.

○겨울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노사(弩師 - 쇠뇌의 명 수(名手))를 요구하니 신라왕이 노사 구진산(仇珍山)을 보내어 사신과 함께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당 고종이 명하여 목노(木弩)를 만들게 하였는데 시험삼아 쏘아보니 30보(步)에 지나지 않았다. 당 고종이 구진산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 보에 미친다고 들었는데 지금 겨우 30보 밖에 미치지 않으니 무슨 연고인가"?

하니, 구진산이 대답하기를,

"재료가 좋지 않은 때문이니 만약 본국(本國)에서 목재(木材)를 가져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구하므로 신라왕이 대내마(大奈麻) 복한(福漢)을 보내어 목재를 바쳤다. 당 고종이 구진산에게 명하여 개조(改造)하게 하였는데 쏘아본즉 60보에 이르고 말았다. 당 고종이 힐문(詰問)하니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그 목재가 바다를 거쳐 오면서 습기를 머금은 때문인가 합니다."

하였다. 당 고종은 구진산이 짐짓 기술을 다하지 않는 줄로 의심하고 중죄(重罪)로써 위협하였으나 마침내 그 징게 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경오년(庚午年; 670)

신라 문무왕 10년

당(唐)나라 함형(咸亨) 원년

 


봄 정월 당 고종(唐高宗)이 흠순(欽純)에게 환국(還國)하기를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가두었으니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3월 말갈(靺鞨)이 신라의 북쪽 변방 개돈양(皆敦壤)을 침범하니 왕이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를 보내어 옛 고구려 장수 연무(延武)와 더불어 정병(精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그들과 싸워 대승(大勝)을 거두었고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는데 당나라 군사가 잇대어 이르렀으므로 신라의 군사는 백성(白城)에 퇴보(退保)하였다.

○여름 6월 옛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劒牟岑)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잔민(殘民)을 수합(收合)하고 패강(浿江)에 이르러 당나라 관인(官人) 및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오다가 서해(西海)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 종실(故宗室) 안승(安勝) - 혹은 안순(安舜)이라고도 쓴다.을 만나 한성(漢城)에 맞이하여 임금을 삼았다. 그리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告)하기를,

"우리 선왕(先王) 보장(寶藏)이 군도(君道)를 잃고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신(臣)등이 고구려의 귀족(貴族) 안승(安勝)을 얻고 받들어 임금을 삼았는데 영세(永世)토록 번병(藩屛)이 되어 충성을 다하기를 원하옵니다. 신등은 듣건대 멸망한 자를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계승(繼承)시키는 것은 천하(天下)의 공의(公義)라고 하오니 오직 대국(大國)에 이를 바랄뿐입니다."

하니, 신라왕이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거주(居住)하게 하였다. 당 고종(唐高宗)이 대장군(大將軍) 고간(高侃)을 보내어 동주도 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내어 토벌하게 하니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쳐 왔다.

○한지부(漢祗部)의 여인(女人)이 한 번에 3남 1녀(三男一女)를 낳았는데, 벼 1백 석(石)을 내려주었다.

○애당초 당(唐)나라에서 백제를 평정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주관하게 하였는데 신라왕이 백제의 땅을 많이 취(取)하였다. 가을 7월에 신라왕이 대아찬(大阿飡)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했으나 듣지 않고 사마(司馬) 미군(彌軍)을 보내어 우리 허실(虛實)을 탐지하게 했으므로 왕이 그 모략(謀略)를 알고 미군(彌軍)을 억류하며 보내지 않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백제를 토벌하였다. 품일(品日)?문충(文忠) 등은 63성(城)을 취(取)하였고, 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은 7성을 취하였으며, 문영(文潁) 등은 12성을 취하였으니 군사가 돌아옴에 미쳐 차등을 두어 논상(論賞)하였다.

○8월 신라왕이 사찬(沙飡) 김수미산(金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봉(封)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았으니 그 책명문(冊命文)에 이르기를,

"공(公)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 - 주몽(朱蒙)을 말함)이 덕(德)을 북방(北方)에 쌓고 공(功)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풍(威風)이 청구(靑丘 - 동방(東方)을 말함)에 떨치고 인교(仁敎)는 현도(玄?)에 덮였다. 그 후 자손이 서로 계승(繼承)하여 본종(本宗)과 지파(支派)가 번성하여 개척한 땅이 천리(千里)나 되고 역년(歷年)이 장차 8백 년에 이르렀다. 그런데 남건(男建)?남산(男産) 형제 때에 이르러 앙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골육(骨肉)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 국가(國家)가 멸망하고 종사(宗社)가 허물어졌으니 백성들이 흩어져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공(公)은 산야(山野)에서 위난(危難)을 피하다가 외로운 몸을 이웃 신라에 의탁했으니 유리(流離)하는 괴로움은 진 문공(晉文公)23)의 자취와 같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위후(衛侯)24)의 사실(事實)과 비슷하다. 무릇 백성은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돌보아주는 명수(命數)가 있는 것이다. 선왕(先王)의 정사(正嗣)로는 오직 공(公)이 있을 뿐이니, 제사(祭祀)를 주관할 자도 공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에 삼가 김수미산 등을 보내어 공을 책봉(冊封)하여 고구려왕을 삼노라. 공은 마땅히 유민(遺民)을 안집(安集)시켜 위무하고 옛 통서(統緖)를 이어 길이 인국(隣國)이 되고 형제와 같이 돈목(敦睦)할지어다. 공경하라."

하고, 겸하여 갱미(粳米) 2천 석(石), 갑구마(甲具馬 - 무장(武裝)한 말) 1필(疋), 능단(綾緞) 5필(疋), 견주(絹紬)?세포(細布) 각 10필(疋), 면(綿) 15칭(稱 - 1칭(稱)은 15근(斤))을 내려주었다.

○12월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중시(中侍) 지경(智鏡)이 사직(辭職)하였다.

○왜국(倭國)이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으로 고치고 스스로 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에서 촌도전(村徒典)을 설치(設置)하고 간(干) 1인, 궁옹(宮翁) 1인, 대척(大尺) 1인, 사(史) 2인을 두었으며, 또 고역전(尻驛典)을 설치하고 간옹(看翁) 1인, 궁옹(宮翁) 1인을 두었다.

 

 

 

신미년(辛未年; 671)

신라 문무왕 11년

당(唐)나라 함형 2년

 


봄 정월 이찬(伊飡) 예원(禮元)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신라왕이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전곡(田穀)을 짓밟았으므로 드디어 백제 사람과 더불어 웅진(熊津) 남쪽에서 싸워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전사(戰死)하였다.

○말갈(靺鞨)의 군사가 쳐들어와서 설구성(舌口城)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신라 군사가 이를 추격하여 참(斬)한 것이 3백여 급(級)이었다.

○신라왕이 당(唐)나라 군사가 와서 백제를 구원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을 보내어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여름 4월 흥륜사(興輪寺) 남문(南門)에 벼락이 쳤다.

○6월 신라왕이 장군(將軍) 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에 가서 전곡(田穀)을 짓밟게 하니 드디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참(斬)한 것이 5천 3백 급(級)이었고, 백제의 장군 2인과 당나라 과의(果毅) 6인을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당(唐)나라 총관(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승려 임윤(琳潤)을 시켜 신라왕에게 글월을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청풍(淸風)은 만리(萬里)에서 불어오고 큰 바다는 3천 리(里)를 연하였는데 천명(天命)은 정(定)해진 기약이 있어 이 지역에 오게 되었습니다. 들은즉 왕은 간사한 마음에 끌려 변성(邊城)에 무력(武力)을 기울인다고 하니, 이는 중유(仲由)의 편언(片言)25)을 저버린 것이며, 후생(侯生)의 한 번 승낙[一諾]26)을 잃은 것입니다. 형(兄 - 신라왕을 말함)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 - 김인문(金仁問)을 말함)는 충신(忠臣)이 되어 멀리 꽃과 꽃받침의 그늘이 나뉘었고,27)  부질없이 상사(相思)의 달이 비치니, 피차(彼此)의 정경을 말한다면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선왕(先王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는 온 국민(國民)과 꾀하고 1백성(城)에 전전(展轉)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千里)의 지방 곳곳에서 교전하였으므로 잠부(蠶婦)는 누에 칠 시기(時期)를 잃었고 농부(農夫)는 밭 갈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선왕(先王)의 나이 60에 가까워서는 쇠병(衰病)이 날로 침노하는데도 항해(航海)의 위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멀리 험한 바다를 건너 중화(中華)의 지역에서 마음을 털어넣고 천자(天子)의 궐문(闕門)에 이마를 조아리면서 형세가 외롭고 약함을 자세히 진술하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침요(侵擾)함을 소상히 논하여 지극한 정리(情理)가 발로(發露)되었으니 듣기에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기개(氣槪)가 천하(天下)를 뒤덮었고 정신(精神)은 우주(宇宙)에 군림하여 반고(盤古)의 구변(九變)28)과 같았고, 거령(巨靈)의 일장(一掌)29)과 같았으니 기울어지는 자를 붙들고 잔약한 자를 구제(救濟)하는 데에 날로 겨를이 없었습니다. 선군(先君 - 태종 무열왕)을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고 소청(所請)을 들어주었으며 경거(輕車) 준마(駿馬)와 미의(美衣) 양약(良藥)을 내려 하룻동안에도 자주 특별한 처우(處遇)를 베풀었습니다. 선군도 또한 그 은의(恩義)를 받들고 군사(軍事)를 대양(對揚)하였으니 서로 계합(契合)함이 어수(魚水)와 같았고 사귀는 정의는 금석(金石)과 같이 굳었습니다. 봉궐(鳳闕)의 궁문(宮門)은 1천 겹이요 장안(長安)의 호화 제택(豪華第宅)은 1만 호(戶)인데 주연(酒宴)으로 유련(留連)하고 궁전(宮殿)의 뜰에서 담소(談笑)하였습니다. 병마(兵馬)에 관한 의논에도 참여하여 기일(期日)을 나누어 성원(聲援)키로 하고 하루아침에 대거(大擧)하여 수륙(水陸) 양면으로 교전(交戰)하였습니다. 이때에 변새(邊塞)의 초목(草木)은 꽃이 떨어지고 유관(楡關)의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맺었는데 주필산(駐?山)의 전역(戰役)에서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곤궁한 자를 구휼(救恤)하였으니 그 의(義)가 심중(深重)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윽고 <문황제가 세상을 떠나> 산해(山海)가 스산하고 일월(日月)도 빛을 잃었는데 금상(今上 - 당 고종을 말함)께서 선조(先朝)의 업적을 계승(繼承)하였고 왕(王 - 문무왕)도 또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바위와 칡이 서로 의지하듯 하여 명성(名聲)을 함께 드날렸으며 병마(兵馬)를 정돈하여 모두 선군(先君)의 뜻을 따랐습니다. 수십년 이래로 중국이 피폐(疲弊)하여 내탕(內帑)의 재물을 때때로 내었고 양곡을 날라다 날로 지급(支給)하였는데, 창도(蒼島 - 신라를 말함)의 땅으로 인하여 온 중국의 군사를 일으켜 이익됨은 적고 쓸모 없음을 탐하는 것이니 어찌 그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선군(先君)과 맺은 신의(信義)를 잃을까 염려한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강포(强暴)한 적국(敵國)을 이미 깨끗이 쓸어버렸고 원수들이 나라를 잃었으니 사마(士馬)와 옥백(玉帛)을 왕도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변하지 말고 중외(中外)가 서로 도와 병기(兵器)를 녹여 없애며 마음을 비워서 상정(常情)으로 삼는다면 자연히 후손의 본받을 계책이 되고 자손이 편안한 복을 누릴 것이니 양사(良事)의 칭찬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떳떳한 방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천명(天命)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언(父言)을 배반하며 천시(天時)를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화친을 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한 모퉁이의 땅과 궁벽진 곳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과부(寡婦)가 군량을 운반하고 어린이들이 둔전(屯田)을 경작(耕作)하게 되어, 지키자니 지탱할 수 없고 나가 싸우자니 막을 수가 없으며 얻은 것으로 잃은 것을 보충하고자 하나 대소(大小)가 같지 않으니 이는 순역(順逆)이 차서(次序)를 잃은 것입니다. 또한 이는 마치 탄환(彈丸)을 가지고 황작(黃雀)을 잡으려 가다가 앞에 고정(枯井)의 위험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며, 버마재비[螳?]가 매미를 잡으려 하다가 황작이 뒤에서 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이 분수(分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왕(先王)이 생존해 있을 때에 일찍이 천자(天子)의 은총을 입었는데, 만일 참으로 음험(陰險)한 마음을 품고서 겉으로는 정성을 쏟는 예모(禮貌)를 가장(假裝)하고 자신의 사욕(私欲)에 따라 하늘에서 이룬 지극한 공(功)을 탐내며 참으로 먼저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는 반역(叛逆)을 도모했다면, 선군(先君)의 운회(運會)가 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 서약(誓約)할 때에 하수(河水)가 띠[帶]처럼 줄어들기까지 길이 변하지 않기를 기필(期必)하여 분의(分義)가 추상(秋霜)과 같았을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을 배반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요, 아비의 마음을 어기는 것은 효도가 아니니, 왕이 한 몸에 두 이름을 겸한다면 어떻게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父子)가 하루아침에 떨쳐 일어난 것은 모두 선제(先帝)의 애정(愛情)이 멀리 미치고 그 위력(威力)이 서로 지지(支持)하여 주군(州郡)을 연결(連結)하고 마침내 반근착절(盤根錯節 - 얼기설기 엮어진 모양)의 형세를 이룬 때문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번갈아 책명(冊命)을 입어 머리를 조아리며 칭신(稱臣)하였고 앉아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였으며 시례(詩禮)를 상세히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의(義)를 듣고도 따르지 않고 착한 일을 보고도 가벼이 여기며 종횡(從橫 - 합종(合從)과 연형(連衡), 즉 권모술수)의 설(設)을 들어 이목(耳目)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고귀(高貴)한 자리를 소홀히 여겨 귀신(鬼神)의 침책(侵責)을 초래(招來)하였으며 선군(先君)의 거룩한 업적을 받들고도 생각을 달리하여 안으로 의심하는 신하(臣下)를 내치고 밖으로는 강적(强敵)을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고구려의 안승(安勝)은 나이 아직 어리고, 쇠잔한 성읍(城邑)에 거주(居住)하는 백성이 절반이나 줄었으니 스스로 거취(去就)에 의심을 품었고 관방(關防)의 중임(重任)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 설인귀는 누선(樓船)에 풍범(風帆)을 달고 깃발을 연(連)하여 북쪽 해안(海岸)을 순행(巡行)함에 옛날 칼날에 창상(創傷)을 입은 군사를 불쌍히 여겨 차마 가해(加害)하지 못하였거늘 이를 외원(外援)으로 삼아 믿으니 이 얼마나 어그러진 일입니까? 황제께서는 은택이 한정 없고 인풍(仁風)이 멀리 미쳐서 사랑함은 햇볕과 같고 따스함은 봄날과 같았는데 멀리 이 소식을 듣고 근심스러워 하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와서 자세한 연유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사신(使臣)을 시켜 문후(問候)하지도 않고 주육(酒肉)을 보내어 군사를 호궤(?饋)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조그만 언덕에 갑병(甲兵)을 숨기고 강 어귀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켜 수풀 사이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거친 언덕에서 헐떡거리면서 마침내는 스스로 해치게 될 칼날을 은밀히 품고 서로 지지(支持)할 기색은 없었습니다. 대군(大軍)이 출발하기 전에 유병(遊兵 - 유격대)이 먼저 떠나 바다를 건너 강(江)에 오르자 물고기처럼 놀래고 새처럼 도망쳤으니 이런 상황에서 사람다운 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어둡고 미혹(迷惑)한 행동을 행여 그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대사(大事)를 도모하는 자는 소리(小利)를 탐하지 않고 높은 절의를 지키는 자는 영특한 지혜를 품고 있는 것이니, 필시 난봉(鸞鳳)이 길들이지 않았으므로 시랑(豺狼)이 엿보는 것입니다. 장군(將軍) 고간(高侃)이 거느린 한기(漢騎 - 한인(漢人) 기병(騎兵))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번병(蕃兵) 및 오?초(吳楚)의 수군(水軍)과 유?병(幽幷 -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강병(强兵)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열지어 내려오고 있는데 신라에서는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보루(堡壘)를 쌓고 땅을 개간(開墾)하여 둔전(屯田)을 삼으려 하니 이는 왕의 크나큰 오산(誤算)입니다. 왕이 만일 마음을 돌려 수고하는 자로 하여금 기뻐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일이 어그러졌더라도 곧 펼 수 있을 것이니, 그 연유를 갖추어 논하고 피차(彼此)의 정상(情狀)을 위에 소상히 진달하겠습니다. 나 설인귀는 일찍이 대가(大駕 - 황제의 수레)를 모시어 친히 위임(委任)을 받은터라 사실을 기록하여 위에 주문(奏聞)한다면 일이 반드시 순조롭게 해결될 것입니다. 어찌 괴롭게 조급증을 내면서 스스로 어지러운 데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옛날에는 충신(忠臣)이 되었으나 이제는 역신(逆臣)이 되었으니 처음에 길(吉)하다가 종말에 흉하게 된 것을 한탄하고 본래에는 같았는데 나중에 달라지게 한 것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은 높고 기후(氣候)는 차가우며 나뭇잎은 떨어지고 해[年]는 저물어 가니 산(山)에 올라 멀리 바라보매 슬픈 회포(懷抱)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품성이 청명(淸明)하고 풍채(風采)가 준수한즉 겸손한 뜻을 지키고 순종(順從)하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시절에 따라 제향(祭享)을 지내고 봉역(封域)에 변동이 없어 아름다운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왕의 양책(良策)이 될 것입니다. 삼엄한 전쟁(戰爭) 중에도 사신(使臣)은 왕래하는 법이므로 이제 왕에게 소속 승려 임윤(琳潤)을 시켜 글월을 보내어 속에 품은 몇가지 심회(心懷)를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신라왕의 회보(回報)에 이르기를,

"선왕(先王 - 무열왕)께서 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22년( - 648년 진덕 여왕 2년)에 당나라에 입조(入朝)하여 몸소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의 은혜로운 조칙(詔勅)을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이르기를, "짐(朕)이 지금 고려( -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라가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사이에 끼어있어 매양 침략을 받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음을 불쌍히 여긴 것이니 산천(山川)과 토지(土地)는 나의 탐내는 바가 아니며 옥백(玉帛)과 자녀(子女)는 내가 가지고 있는 바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에게 맡기어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 하고 계책을 내리고 군병(軍兵)을 출발시킬 날짜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신라의 백성들이 그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길렀으며 집집마다 출정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하고 태종 문황제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해서도 다시 전일의 은혜를 계속하여 자주 총애(寵愛)를 입어 지난날보다 더하였으니 형제와 자질(子侄)들이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영화와 총애의 지극함이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입니다. 이에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 전구(前驅)의 쓰임을 다하기를 바랬으며 간뇌도지(肝腦塗地)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 하였습니다. 현경(顯慶 -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5년( - 660년 무열왕 7년)에 이르러 성상(聖上 - 당고종)께서 선제(先帝 - 당태종)의 뜻을 완수(完遂)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겨 전일의 유서(遺緖)를 이룩하고자 하여 함선(艦船)을 띄우고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크게 수군(水軍)을 동원하매 선왕(先王 - 무열왕)께서는 나이 늙고 몸이 쇠잔하여 행군(行軍)하기 어려웠으나 전일의 은혜를 추감(追感)하여 억지로 변경(邊境)에 이르러 모(某 - 문무왕의 자칭)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대군(大軍)을 응접(應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서(東西)에서 호응하고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나아가 당나라의 수군(水軍)이 겨우 백마강(白馬江)의 어귀에 들어오매 신라의 육군(陸軍)이 이미 백제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으며 양군(兩軍)이 함께 도성(都城)에 입성(入城)하여 드디어 백제를 평정하였습니다. 백제를 평정한 후 선왕(先王 - 무열왕)께서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계획을 마련하여 당나라 군사 1만 명을 머물러두게 하였으며 신라에서도 또한 왕제(王弟) 인태(仁泰)를 시켜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웅진(熊津)을 함께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대군이 돌아간 후에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금강(錦江) 서쪽에서 기병(起兵)하여 남은 잔당(殘黨)을 모아 웅진부성(熊津府城)을 둘러싸고 핍박하매 먼저 외책(外柵)을 깨뜨려 군수품(軍需品)을 모두 탈취하고 다시 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몰될 지경이었습니다. 또 부성에 접근(接近)한 네 곳에 임시 토성(土城)을 쌓아 에워싸고 지켰으므로 이로 인하여 부성에 출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모(某)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군(賊軍)의 포위망(包圍網)을 풀어버리고 사면(四面)의 적성(賊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원한 다음 다시 양식을 운반하여 1만 당군(唐軍)으로 하여금 호구(虎口)의 위난(危難)을 모면하게 하였으며 유진(留鎭)하는 굶주린 군사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상식(相食)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였습니다. 다음해인 현경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徒黨)이 점점 불어나서 금강(錦江) 동쪽의 영토(領土)를 탈취하므로 웅진(熊津)에 머물러있는 당병(唐兵) 1천 명이 가서 적도(賊徒)를 치다가 도리어 적도에게 대패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패전한 이래로 웅진(熊津)에서 원병(援兵)을 청함이 조석(朝夕)으로 연달았는데 마침 신라에서는 역질(疫疾)이 크게 유행하여 병마(兵馬)를 징발하기 어려웠으나 간절한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보내어 주류성(周留城)을 에워싸매 적군은 우리 군사의 단약(單弱)함을 알고 즉시 나와서 공격하였으므로 우리 병마는 큰 손실을 입고 소득이 없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남방의 여러 성(城)이 일시(一時)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귀속(歸屬)하매 복신이 이긴 틈을 타서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쌌습니다. 이로 인하여 웅진으로의 길이 차단되어 염장(鹽醬)이 절핍되었으므로 곧 건장(建壯)한 군사를 모집하여 샛길로 소금을 보내어 군핍(窘乏)함을 구제(救濟)해 주었습니다. 이 해 6월에 이르러 선왕(先王 - 무열왕)이 세상을 떠나매 장례(葬禮)를 겨우 마치고 미처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때문에 칙지(勅旨)에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칙지를 받들고 와서 신라로 하여금 평양(平壤)에 군량을 공급(供給)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또 웅진(熊津)의 사인(使人)이 와서 웅진부성(熊津府城)의 외롭고 위태로운 정상을 자세히 진달하였습니다. 이에 총관 유덕민이 나와 더불어 상의하고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

양에 군량을 보내면 웅진의 통로(通路)가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통로가 끊어질 것 같으면 유진(留鎭)하는 당병(唐兵)이 곧 적(賊)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총관 유덕민이 드디어 나와 함께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였고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인하여 웅진에 성을 쌓아서 웅진의 도로를 개통(開通)시켰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는데, 먼저 웅진에 군량을 보내면 칙지에 어긋날 염려가 있고, 만약 평양에 군량을 보내면 웅진의 군량이 곧 절핍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노약자(老弱者)를 시켜 웅진에 군량을 운송(運送)하게 하고 평양에는 강건한 정병(精兵)으로 하여금 군량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에 중도에서 눈을 만나 인마(人馬)가 거의 죽고 백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2년( - 662년 문무왕 2년) 정월에 총관 유덕민이 신라 서하도총관(西河道摠管)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평양에 군량을 운송(運送)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음우(陰雨)가 달포나 내리고 풍설(風雪)이 매우 차가워 인마(人馬)가 많이 얼어죽었으므로 가지고 가던 군량을 평양에 미처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중에 당나라의 대군(大軍)은 본국에 돌아가고자 하였으며 신라의 병마(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또한 회군(回軍)하였는데 군사들이 기한(饑寒)에 시달리고 수족(手足)이 얼어터져 길 위에서 죽은 자를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행군하여 호로하(瓠瀘河)에 다다르매, 고구려의 병마(兵馬)가 뒤를 쫓아와 언덕 위에 진(陣)을 쳤으며 신라 군사들은 피곤한 지 오래었으나 적군(賊軍)이 멀리까지 뒤를 따라올까 염려하여 적군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넌 다음 교전(交戰)하기 위하여 선봉(先鋒)이 잠시 어울려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드디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군사가 집에 당도한 지 달포도 되기 전에 웅진부성에서는 자주 종곡(種穀)을 구하였는데 앞뒤로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斛)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웅진(熊津)에 수송(輸送)하고 북쪽으로는 평양에 공급(供給)하였으니, 조그만 신라가 두 곳으로 이바지하기에 인력(人力)은 극도로 피곤하고 우마(牛馬)는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농사는 때를 놓치고 곡식은 흉년이 들어 저축한 창곡(倉穀)은 조운(漕運)에 모두 탕진하였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은 초근 목피(草根木皮)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웅진의 당병(唐兵)들은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 유진(留鎭)하는 당나라 군사들은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의복이 해어져서 몸에 걸칠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에서는 백성에게 권과(勸課)하여 시복(時服 - 철에 따른 의복)을 보내주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이 멀리서 외로운 성(城)을 지키고 있어 사면(四面)이 모두 적(賊)이었으므로 늘 백제인의 침략을 입고 항상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1만 명의 당나라 군사가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입고 먹었으니 유인원과 군병들이 모두 피골(皮骨)은 비록 중국[漢地]에서 낳았으나 혈육(血肉)은 모두 신라에서 양육(養育)한 바였습니다. 황제의 은택이 비록 한정이 없으나 신라에서 충의를 다한 것도 또한 가긍(可矜)할 만한 바입니다. 용삭(龍朔) 3년( - 663년 문무왕 3년)에 이르러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웅진부성(熊津府城)을 구원하였는데 신라의 병마(兵馬)도 또한 함께 출정(出征)하여 주류성(周留城) 밑에 다다랐습니다. 이때에 왜국(倭國)의 수군(水軍)이 와서 백제를 도왔는데 왜선(倭船) 1천 척(隻)이 백강(白江)에 정박하고 백제의 날랜 기병(騎兵)은 언덕 위에서 왜선을 수호(守頀)하였습니다. 이에 신라의 날랜 기병이 당나라 군사의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언덕 위에 있는 적진(敵陣)을 깨뜨리니 주류성에 있는 자들은 낙담하여 마침내 항복하였습니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쳤는데 유독 임존성(任存城)만이 헛된 생각을 고집하고 항복하지 않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공격하였으나 굳게 지켜 항거(抗拒)하여 함락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신라군(新羅軍)은 장차 돌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두 대부(杜大夫 - 두상(杜爽)을 말함))가 이르기를, "칙명(勅命)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신라와 백제가> 함께 회맹(會盟)하라고 하였는데 유독 임존성만은 비록 항복을 받지 못했으나 함께 맹서(盟誓)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신라에서 이르기를, "칙명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신라와 백제가> 함께 회맹하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 있어 이미 평정했다고 할 수가 없으며, 또 백제 사람은 백가지로 간사하고 반복(反覆)이 무상(無常)하니 이제 비록 함께 회맹하더라도 회후에 뉘우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고 회맹을 정지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습니다. 인덕(麟德) 원년( - 664년 문무왕 4년)에 이르러 다시 엄중한 칙명을 내려 맹서하지 않음을 책망하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어 단(壇)을 쌓게 하고 함께 회맹하였으며 인하여 회맹한 곳으로서 두 나라의 경계를 삼았으니, 회맹한 일은 비록 소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감히 칙명을 어기지 못한 것입니다. 또 취리산(就利山)에 단(壇)을 쌓고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과 상대(相對)하여 삽혈(?血)로써 맹세하고 산하(山河)로써 서약하였으며 경계를 그어 봉역(封域)을 삼고 길이 국경(國境)을 정하여 백성들이 거주(居住)하고 각기 산업(産業)을 영위하게 하였습니다. 건봉(乾封) 2년( - 667년 문무왕 7년)에 이르러 대총관(大摠管) 영국공(英國公 -  이적(李勣))이 요동(遼東)을 친다는 말을 듣고 모(某)도 한산주(漢山州)에 가서 군사를 보내어 계수(界首 - 국경)에 집결시켰는데 신라의 병마(兵馬)만 홀로 고구려 땅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먼저 세작(細作 - 정탐꾼)을 세 차례 보내고 배를 연달아 보내어 대군(大軍 - 당군(唐軍))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하였는데 세작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平壤)에 당도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도로를 개통하고 대군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칠중성이 거의 함락될 즈음에 영국공의 사인(使人) 강심(江深)이 와서 말하기를, "대총관(大摠管)의 처분을 받들은즉, 신라의 병마(兵馬)는 칠중성을 치지 말고 곧 평양으로 와서 즉시 군량을 공급하십시요"라고 하기에 전령하여 다달아서 모이게 하였는바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러 당나라의 군사가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의 병마(兵馬)도 드디어 철수하였습니다. 건봉 3년( - 668년 문무왕 8년)에 이르러 대감(大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어 바닷길로 <요동(遼東)에> 가서 영국공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하였는데, 신라의 병마를 평양에 집결(集結)토록 하라는 처분을 받들었다. 5월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가 와서 신라의 병마를 발송(發送)시켜 함께 평양으로 향할 즈음 모(某)도 또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병마(丙馬)를 점검(點檢)하였습니다. 이때에 번병(藩兵)과 당군(唐軍) 등 여러 군사가 모두 사수(蛇水)에 집결하매 남건(男建)이 군사를 보내어 한판 싸움 치르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가 홀로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적군의 대진(大陣)을 깨뜨리니 평양 성중(平壤城中)은 예봉(銳鋒)이 꺾이고 군사들의 기세도 움츠러들었습니다. 그 뒤에 영국공이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騎兵) 5백 명을 이끌고 먼저 성문(城門)에 쳐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함락시켜 대공(大功)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신라의 군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정벌(征伐)에 나선 지 이미 9년이 경과하여 인력(人力)은 다하였으나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累代)에 걸친 오랜 소망을 이제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반드시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어야 될 것이고 사람들은 심력(心力)을 바친 상(賞)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공은 선포(宣布)하기를, "신라는 앞서 군사들이 회합(會合)하는 기일(期日)을 어겼으니 이것도 또한 따져서 조치하여야 한다."고 하니, 신라의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도리어 두려움을 더하였습니다. 또 군공(軍功)을 세운 신라 장수(將帥)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여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경사(京師 - 장안(長安))에 당도하자 곧 이르기를, "지금 신라에는 공훈(功勳)을 포장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니 그 장수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또 비열성(卑列城)은 원래 신라의 소유(所有)로서 고구려에서 점령한 지 30여년 만에 신라에서 도로 이 성을 얻어 백성을 옮기고 관원을 두어 수비(守備)하게 하였던 것인데 당나라에서 또 이 성을 빼앗아 도로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로부터 고구려를 평정하기까지 충성을 다하고 온갖 힘을 바쳐 당나라를 저버린 바가 없었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림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비록 이러한 억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배반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총장(總章) 2년( - 669년 문무왕 9년)에 이르러 백제가 회맹(會盟)한 곳에서 봉역(封域)을 옮기고 표계(標界)를 바꾸어 전지(田地)를 침탈하고 우리 노비(奴婢)를 차지하였으며 우리 백성을 유인(誘引)하여 내지(內地)에 숨겨두고 우리편에서 자주 찾아도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함선(艦船)을 수리(修理)하여 겉으로는 왜국(倭國)을 정벌한다고 핑계대고 있으나 실상은 신라를 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는 탓에 백성들이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불안(不安)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또 백제의 부녀자를 신라 한성 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출가(出嫁)시키고 그와 함께 흉계(凶計)를 도모하여 신라의 병기(兵器)를 훔쳐내어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려 하다가 다행히 사전(事前)에 발각되어 박도유를 즉시 참수(斬首)하였으므로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함형(咸亨) 원년( - 670년 문무왕 10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모반(謀叛)하여 당나라 관원을 모두 살해(殺害)하였으므로 신라에서 곧 발병(發兵)하고자 하여 우선 웅진부성(熊津府城)에 보고하기를, "고구려가 이미 배반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신라와 백제는 피차간에 모두 황제의 신하인즉 함께 흉적을 토벌함이 사리(事理)에 마땅할 것이며 발병(發兵)하는 일은 함께 상의할 필요가 있으니 청컨대 관원을 이곳에 보내어 서로 상의하기를 바란다."고 하니, 백제의 사마(司馬) 미군(彌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상의하고 말하기를, "발병한 후에 피차간에 의심을 가질 염려가 있으니 신라와 웅진 두 곳의 관리(官吏)로서 서로 볼모를 교환하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곧 신라의 김유돈(金儒敦)과 웅진부성(熊津府城)의 백제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 등을 부성(府城)에 보내어 볼모를 교환하는 일에 대하여 논의하게 하였는데 백제에서 비록 볼모를 교환하는 일을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웅진 성중(熊津城中)에서는 오히려 병마(兵馬)를 집결시켜 우리 군사가 성 밑에 당도하면 밤에 나와 공격을 가하곤 하였습니다. 7월에 입조사(入朝使) 김흠순(金欽純) 등이 이르러 장차 지계(地界)를 획정(劃定)하려고 하는데 지도(地圖)를 안험(按驗)하여 백제의 옛 땅을 모조리 돌려주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衣帶]처럼 좁아지지 않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처럼 줄어들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의 백성들이 모두 실망(失望)하여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누대(累代)를 내려오면서 큰 원수지간인데 이제 백제의 정상(情狀)을 본즉 따로 한 나라를 세울 모양이니 그렇게 되면 백년 후에는 신라의 자손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멸망할 것이다. 신라가 이미 당나라의 주군(州郡)이 되어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판국이니 원컨대 한 국가(國家)로 삼아 길이 후환(後患)이 없도록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러한 정상(情狀)을 갖추어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어 황제께 주문(奏聞)하였는데 중도(中途)에서 표류(漂流)하여 도로 오게 되었고 또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또한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그 후에는 바람이 차갑고 물결이 거세어 주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에서는 거짓 사실을 꾸며대어 신라가 당나라를 배반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앞서 귀국(貴國) 중신(重臣)의 환심(歡心)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입어 진퇴 유곡(進退維谷)의 형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간곡한 충성을 펴지 못하고 이러한 참소가 날로 성청(聖聽)을 번거롭게 하니 변함이 없는 충성을 일찍이 한 번도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와서 혜서(惠書)를 받들어 총관(摠管 - 설인귀(薛仁貴))이 풍파(風波)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海外)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사리(事理)에 있어서는 사신을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고 주육(酒肉)을 보냄이 마땅하나 멀리 이역(異域)에 있어서 예절을 갖추지 못하고 제때에 영접도 못하였으니 청컨대 괴상히 여기지 마소서. 총관이 보낸 글월을 읽어본즉 오로지 신라가 당나라를 배반한 것으로 나무랬는데 이는 본심(本心)이 아니니 삼가 놀라고 두려울 뿐입니다. 자신(自身)의 공로를 말하자니 기방하는 욕을 입을까 염려되고, 입을 다물고 책망(責望)을 받자니 또한 불행한 운수(運數)에 빠지게 되겠으므로 이제 원통한 사정을 대략 진달하여 배반할 마음이 없음을 갖추 기록하는 바입니다. 당나라에서는 일개(一介) 사신을 보내어 그 연유(緣由)를 묻지도 않고 곧장 수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소혈(巢穴)을 뒤엎고자 하여 누선(樓船)이 바다에 가득하고 배의 수미(首尾)가 강(江) 어귀에 연달아 저 웅진(熊津)을 구원하고 신라를 치려 하였습니다. 아!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平定)하기 전에는 늘 당나라의 지시(指示)에 따라 사역(使役)을 맡아왔는데, 적국(敵國)이 이제 멸망하자 도리어 모반(謀叛)하였다는 침핍(侵逼)을 받게 되었는바 잔폐(殘廢)한 백제는 도리어 옹치(雍齒)30)의 상(賞)을 받고 당나라를 위하여 희생(犧牲)한 신라는 정공(丁公)31)의 베임을 당했습니다. 태양(太陽)의 볕은 비록 비추이지 않더라도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本心)은 오히려 태양으로 향하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총관(摠管)께서는 영웅(英雄)의 기개(氣槪)를 타고 났으며 장상(將相)의 높은 재략(才略)을 품어 7덕(七德)32)을 겸비(兼備)하였고 9류(九流)33)를 섭렵하였으니 삼가 천벌(天罰)을 행함에 있어 어찌 함부로 죄 아닌 데에 벌을 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당나라 군사가 나오기 전에 먼저 연유(緣由)를 물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보내온 글월로 인하여 모반(謀叛)한 사실이 없음을 감히 진달하오니 청컨대 총관께서는 깊이 헤아려 이 정상(情狀)을 갖추어 황제(皇帝)께 신주(申奏)하소서."

하였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設置)하고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당(唐)나라 장수(將帥) 고간(高侃)이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의 남은 잔당(殘黨)을 깨뜨렸다.

○9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 등이 번병(蕃兵) 4만 명을 이끌고 평양(平壤)에 이르러 구거(溝渠)를 깊이 파고 성루(城壘)를 높이 쌓았으며, 대방(帶方)을 침략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급찬(級飡) 당간(當干) 등을 시켜 당나라의 조선(漕船 - 운송선) 70여 척을 습격(襲擊)하여 낭장(郞將) 겸이 대후(鉗耳大侯)와 사졸(士卒) 1백여 인을 사로잡았으며 그 밖에 익사(溺死)한 자는 이루 셀 수가 없었다. 이 전공(戰功)으로서 당간에게 사찬(沙飡)을 제수(除授)하였다.

○부성군(富城郡)을 승격(陞格)시켜 주(州)로 삼고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다시 군(郡)으로 삼았다.

○병부(兵部)에 사(史) 2인을 더 두었고 또 노당(弩幢) 1인을 두었으며, 창부(倉部)에 사(史) 3인, 승부(乘部)에 사(史) 3인, 사정부(司正府)에 사(史) 5인을 더 두었다. 비로소 중당(仲幢)을 두었는데 금장(衿章)은 백색(白色)이요, 백관당(百官幢)은 금장이 없었다. 사설당(四設幢)은 1은 노당(弩幢)이요, 2는 운제당(雲梯幢)이며, 3은 충당(衝幢)이요, 4는 석투당(石投幢)이며 금장이 없었다.

 

 

 

임신년(壬申年; 672)

신라 문무왕 12년

당(唐)나라 함형 3년

 


봄 정월 신라왕이 장수(將帥)를 보내어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겼다.

○2월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은 군사 1만 명을, 이근행(李謹行)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陣營)을 세우고 주둔(駐屯)하였는데,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인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백수성(白水城)과 5백 보(步)의 거리(距離)에 진영을 세우니 신라의 군사가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더불어 이를 요격(邀擊)하여 수천 급(級)을 베었다. 고간 등의 군사가 말갈(靺鞨)의 군사와 더불어 석문(石門)의 벌판에 진영을 세우므로 신라의 장군(將軍) 의복(義福)?춘장(春長) 등이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대방(帶方)의 벌판에 진영을 세웠다. 이때에 장창당(長槍幢)이 당나라 군사와 조우하여 마주 싸워 3천여 명을 사로잡아 대장(大將)에게 보냈다. 이에 여러 당(幢)이 이르기를,

"장창당의 영(營)이 홀로 군공(軍功)을 이루었으니 반드시 후한 상(賞)을 받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하고, 각기 군사를 이끌고 떠나버렸다. 당나라 군사와 말갈(靺鞨)의 군사는 우리 군사들이 진세(陣勢)를 갖추지 못한 틈을 타서 갑자기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대아찬(大阿飡) 효천(曉川)과 사찬(沙飡) 의문(義文)?산세(山世)와 아찬(阿飡) 능신(能申)?두선(豆善)과 일길찬(一吉飡)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전사(戰死)하였고 사로잡힌 자가 2천 인이나 되었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도 비장(裨將)으로서 또한 싸우다 죽으려 하였는데 그의 부하(部下) 담릉(淡凌)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대장부(大丈夫)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죽어서 성취(成就)함이 없을 바에는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원술이 말하기를,

"남아(男兒)가 구차히 살 수 없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부친(父親)을 뵙겠는가"?

하고, 문득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敵陣)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런데 담릉이 말고삐를 잡고 굳게 만류한 탓에 드디어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갔는데 당나라 군사가 추격(追擊)하여 왔다. 이에 거열주 대감(居烈州大監)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공(公) 등은 힘써 빨리 돌아가라. 나는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겠는가? 오늘은 나의 목숨이 다하는 날이다."

하고, 문득 창을 비껴들고 적진(敵陣)에 돌진(突進)하여 전사(戰死)하여 하였으며 그의 아들도 또한 전사하였다. 대장군(大將軍) 등이 작은 길을 따라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왕이 듣고 김유신에게 묻기를,

"군병이 이처럼 패전(敗戰)하였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의 계책은 추측할 수가 없으니 장졸(將卒)들로 하여금 각기 요해지(要害地)를 지키게 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원술은 왕명(王命)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훈(家訓)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술은 비장(裨將)이니 그에게만 홀로 중형(重刑)을 시행할 수 없다."

하고, 놓아주었다. 이에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아비를 뵈옵지 못하고 전야(田野)에서 은둔(隱遁)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步)였다.

○9월 혜성(彗星)이 일곱 차례 북쪽에 나타났다.

○신라왕은, 전번에 백제의 잔당(殘黨)들이 당나라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군사를 청하여 신라를 침범했으므로 사세가 급박하여 미처 신주(申奏)하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거전(拒戰)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당나라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드디어 급찬(級飡) 원천(原川)과 내마(奈麻) 변산(邊山)을 시켜 억류중인 병선 낭장(兵船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 내주 사마(萊州司馬) 왕예(王藝), 본열주 장사(本烈州長史) 왕익(王益)과 웅주 도독부(熊主都督府) 사마(司馬) 미군(彌軍),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 및 군사 1백 70인을 되돌려 보내고 글월을 올려 청죄(請罪)하기를,

"사죄(死罪)를 지은 신(臣) 모(某)는 삼가 말씀을 올립니다. 옛날 신의 위급한 사세가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는데 멀리 구원해 주심을 입어 멸망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분신쇄골(粉身碎骨)하더라도 홍은(鴻恩)을 보답하기에 부족하며, 머리를 부스러뜨려 티끌이 될지라도 어찌 인자(仁慈)하신 덕의(德義)를 우러러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원수인 백제가 신라의 변경(邊境)에 가까이 있으면서 천병(天兵 - 당병(唐兵))을 끌어들여 신라를 멸망시키고 치욕(恥辱)을 씻어버리려 하기에 신이 파멸(破滅)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보존(保存)하기를 구하였는데 억울하게도 흉역(凶逆)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드디어 용서하기 어려운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러한 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고 먼저 형육(刑戮)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명을 거스린 신하가 될 것이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여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주문(奏聞)하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조금만이라도 성청(聖聽)을 기울여 그 연유(緣由)를 밝게 살피시옵소서. 신은 전대(前代) 이래로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다가 근래 백제 때문에 재차 직공(職貢)을 결(缺)하게 되어 드디어 성조(聖朝)로 하여금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토벌을 행하게 되었으니 죽어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일월(日月)과 같아 용광(容光)의 비춤을 골고루 입고 덕(德)은 천지(天地)와 합치(合致)하여 동식물(動植物)이 모두 화육(化育)을 입었습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은 멀리 곤충(昆蟲)에까지 미치고 살생(殺生)을 미워하는 인(仁)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게도 널리 미쳤습니다. 만일 복종하는 자를 놓아주는 은유(恩宥)를 내리시고 목숨을 보존(保存)하는 혜택을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과 다름이 없겠습니다. 바랄 수는 없으나 감히 소회(所懷)를 진달하오며, 삼가 원천(原川) 등을 보내어 글월을 올려 사죄(謝罪)하옵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하고, 겸하여 은(銀) 3백 35냥(兩), 동(銅) 3백 30냥, 침(針) 4백 매(枚), 우황(牛黃) 1냥 2전, 황금(黃金) 1냥 2전, 40종포(四十綜布) 6필(疋), 30종포(三十綜布) 60필을 진공(進貢)하였다.

○겨울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부여 총관(扶餘摠管)을 두었다.

○집사성(執事省)에 사(史) 6인, 병부(兵部)에 사(史) 3인을 더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창부(倉部)에 사(史) 7인을 더 두었다. 비로소 병부(兵部)에 노사지(弩舍知) 1인을 두었다. 비로소 백금서당(白衿誓幢)을 두었는데, 백제 사람으로서 당(幢)을 삼았고 금장(衿章)은 백색(白色)과 청색(靑色)이었다. 또 비금서당(緋衿誓幢)을 두었는데 이것이 장창당(長槍幢)이 되었으며, 또 우수주계당(牛首州)幢)을 두었으니 금장은 모두 적색(赤色)이었다. 또 오주서(五州誓)를 두었는데, 1은 청주서(菁州誓), 2는 완산주서(完山州誓), 3은 한산주서(漢山州誓)이니, 금장(衿章)은 자색(紫色)과 녹색(綠色)이었고, 4는 우수주서(牛首州誓), 5는 하서주서(河西州誓)이니, 금장은 녹색(綠色)과 자색(紫色)이었다. 또 신삼천당(新三千幢)을 두었으니 1은 우수주삼천당(牛首州三千幢), 2는 내토군삼천당(奈吐郡三千幢)이었다.

 

 

 

계유년(癸酉年; 673)

신라 문무왕 13년

당(唐)나라 함형 4년

 


봄 정월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地震)이 있었다. 왕이 이로 인하여 근심하자 김유신이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재변(災變)은 그 액운(厄運)이 노신(老臣)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國家)의 재앙은 아니니 청컨대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과인(寡人)의 걱정이 더욱 심하다."

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기도(祈禱)를 올려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

○왕이 강수(强首)를 사찬(沙飡)으로 삼고 이에 말하기를,

"강수는 뛰어난 문장(文章)으로서 중국 및 고구려?백제 두 나라에 우리의 뜻을 잘 소통되게 하였다. 우리 선왕(先王 - 무열왕)께서 당나라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武功)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또한 문사(文辭)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로를 어찌 소홀히 여기겠는가?

하고, 사찬을 제수하였으며 인하여 해마다 녹봉에 벼 2백 석(石)을 더하였다.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增築)하였다.

○여름 윤5월 당(唐)나라 연산도 총관(燕山道摠管) 대장군(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瀘河)에서 고구려의 남은 잔당(殘黨)을 쳐서 깨뜨리고 수천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는 모두 신라로 도망쳐왔다.

○6월 호랑이가 궁전(宮殿) 뜰에 들어왔으므로 잡아죽였다.

○가을 7월 초하룻날에 김유신(金庾信)이 졸(卒)하였으니 나이 79세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였으며, 채백(彩帛) 1천 필(疋)과 벼 2천 석(石)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군악 고취(軍樂鼓吹)로써 따르게 하였고 금산(金山)의 언덕에 장사(葬事)를 지냈으며, 유사(有司)에 명하여 비석(碑石)을 세워 훈공(勳功)을 기록하게 하였고 수묘(守墓)하는 민호(民戶)를 두게 하였다. 당초 군사 수십명이 군기(軍器)와 군복(軍服)을 갖추고 김유신의 집에서 울부짖으며 나와서는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유신이 듣고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나를 수호(守護)하는 신병(神兵)들인데 나의 운명(運命)이 다한 것을 보고 떠나간 것일테니 내가 곧 죽겠다."

하더니 그 후 10여 일 만에 질병으로 위독하게 되었다. 왕이 친림(親臨)하여 존문(存問)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신(臣)이 심력(心力)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기를 원하였으나 천질(賤疾)이 이에 이르렀으니 오늘 이후에는 다시 용안(龍顔)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과인(寡人)에게 경(卿)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은데 만일 불행(不幸)한 일이 생긴다면 인민(人民)과 사직(社稷)은 어찌되겠는가"?

하니,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신(臣)은 어리석고 불초(不肖)한데 어찌 국가에 이익이 있었겠습니까? 다행히 명군(明君)이 위에 계셔서 채용(採用)함에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기심에 변동(變動)이 없었으므로 심력(心力)을 다하여 조그만 공(功)을 이루어 삼한(三韓)이 일가(一家)가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으니 비록 태평 성대(太平聖代)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소강 시절(少康時節)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신이 예로부터 왕통(王統)을 계승한 임금을 살펴보건대 처음에는 가취(可取)할 것이 없지 않으나 끝을 잘 맺는 자가 드물어서 여러 대(代)에 걸쳐 쌓은 공적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는 자가 많으니 심히 두렵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성공(成功)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이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군자(君子)를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 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이 화목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하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왕이 감읍(感泣)하였다. 김유신의 처(妻) 김씨(金氏)는 태종왕(太宗王)의 셋째 따님으로서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이었다. 김유신이 죽은 뒤 원술이 그 어미를 뵙기를 구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부인(婦人)에게는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으니 이제 아들을 따름이 마땅하다. 그러나 네가 이미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내가 어떻게 너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만나보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고 가슴을 치면서 떠나가지 않았으나 부인(夫人)이 끝내 만나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원술이 탄식하기를,

"담릉(淡凌)의 그르친 것으로 인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드디어 태백산(太伯山)에 들어갔다. 뒤에 당병(唐兵)이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자 원술이 이를 듣고 전일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적진(敵陣)으로 내달아 힘껏 싸워서 전공(戰功)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父母)에게 용납되지 않은 것을 부끄럽고 한탄스럽게 여겨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삼광(三光)은 그 아비의 뒤를 이어 집정(執政)하였는데, 열기(裂起)가 군수(郡守)자리를 구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열기가 말하기를,

"삼광이 아마도 그 아비가 죽었으므로 해서 나를 잊어버린게 아니겠는가"?

하니, 삼광이 듣고 부끄러워 사과한 뒤 삼년산군 태수(三年山郡太守)를 제수하였다. 구근(仇近)이 일찍이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는데, 혹자가 원정에게 말하기를,

"구근이 직무(職務)에 태만하다."

하니, 원정이 구근에게 곤장을 쳤다. 이에 구근이 말하기를,

"평양(平壤)의 전역(戰役)에서 내가 열기(裂起)와 더불어 추측할 수 없는 위험한 땅에 들어가 대각간(大角干)의 명(命)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므로 대각간께서도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다. 그런데 이제 뜬소문을 듣고 죄를 주니 또한 욕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원정이 듣고 종신토록 참회(慙悔)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나라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에게 대답하되, "간사한 자를 멀리하고 충직(忠直)한 자를 진용(進用)하며, 대신(大臣)과 말함에 있어서는 공경하고 믿음직하게 하여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어진 이와 교유(交游)함에 있어서는 친근하게 하고 예우(禮遇)를 다하여 불초한 자로 하여금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참으로 임금된 자의 요도(要道)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진 이에게 맡겨 의심하지 말며 간악한 자를 버리는데 머뭇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신라에서 김유신에게 대우한 것을 살펴보건대, 친근하게 하여 막힘이 없었고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아니하여 꾀에 따라 시행하고 말하는대로 들어주어서 쓰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가히 육오(六五) 동몽(童蒙)의 길(吉)34)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김유신이 그 뜻을 행하고 상국(上國)과 협모(協謀)하여 삼한(三韓)을 합쳐 한 국가(國家)를 이룩하였고 그 몸이 마치도록 공명(功名)을 누리게 되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더라도 중국(中國)의 서적(書籍)이 아니면 없어져서 들을 수가 없을 것인데 김유신에 이르러서는 시골 사람들도 모두 칭송하여 지금까지도 잊지 않으니 사대부(士大夫)들이 안다는 것은 가하거니와 초동 목수(焦童牧竪 - 꼴베는 아이와 목동)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남보다 반드시 특이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아찬(阿飡) 대토(大吐)가 모반(謀叛)하여 당나라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누설(漏泄)되어 복주(伏誅)되었다.

○8월 파진찬(波珍飡) 천광(天光)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쌓았다.

○9월 국원성(國原城)?북형산성(北兄山城)?소문성(召文城)?이산성(耳山城)?주양성(走壤城)?주잠성(主岑城)?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덟 성(城)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시켜 병선(兵船) 1백척(隻)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당나라 군병이 말갈(靺鞨)?거란[契丹]의 군사와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에 쳐들어오니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모두 이기고 참수(斬首)한 것이 2천여 급(級)이었으며,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 빠져죽은 당나라 군사를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겨울 당(唐)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받았다.

○거란과 말갈의 군사가 대양성(大陽城) 및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였다.

○외사정(外司正)을 설치(設置)하여 주(州)에 2인, 군(郡)에 1인으로 하였다.

○항복한 백제 사람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그 위차(位次)는 그 본국(本國백제)에 있을 때의 관직에 준하였다. 경관(京官)에 대내마(大奈麻)는 본래 달솔(達率)이요, 내마(奈麻)는 본래 은솔(恩率)이며, 대사(大舍)는 본래 덕솔(德率)이요, 사지(舍知)는 본래 한솔(?率)이며, 당(幢)은 본래 내솔(奈率)이요, 대오(大烏)는 본래 장덕(將德)이었다. 외관(外官)에 귀간(貴干)은 본래 달솔(達率)이요, 선간(選干)은 본래 은솔(恩率)이며, 상간(上干)은 본래 덕솔(德率)이요, 간(干)은 본래 한솔()率)이며, 일벌(一伐)은 본래 내솔(奈率)이요, 일척(一尺)은 본래 장덕(將德)이었다.

○상주정(上州停)을 고쳐 귀당(貴幢)을 삼았으며 금장(衿章)은 청색(靑色)과 적색(赤色)이었다. 비열홀정(比烈忽停)을 파(罷)하고 우수정(牛首停)을 두었으며 금장은 녹색(綠色)과 백색(白色)이었다.

 

 
 
 
 
 
 
 
 
국역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11권 한국사 일반

2008/05/1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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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11권

 


갑술년(甲戌年; 674)

신라 문무왕 14년

당(唐)나라 상원(上元) 원년

 


봄 정월 새로운 역(曆)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처음에 내마(奈麻) 덕복(德福)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있었는데 역술(曆術)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새로운 역법(曆法)으로 고쳐 사용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니 당 고종(唐高宗)이 크게 노여워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왕에게 내려준 관작(官爵)을 삭제하고 경사(京師 - 장안(長安))에 머물러 있던 왕의 아우 우효위 원외대장군 임해군공(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歸國)하게 하니 김인문이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책명(策命)하여 계림주 대도독 개부 의동삼사(계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를 삼았다. 좌서자 동중서문하 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계林道大摠管)으로,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 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2월 왕이 궁성(宮城) 안에 연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皇龍寺) 불전(佛殿)이 허물어졌다.

○8월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9월 왕이 승려(僧侶) 의안(義安)을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다.

○안승(安勝)을 봉(封)하여 보덕왕(報德王)으로 삼았다.

○왕이 영묘사(靈廟寺) 앞에서 열병(閱兵)하였는데 아찬(阿) 설수진(薛秀眞)이 육진 병법(六陣兵法)을 올렸다.

○외위(外位)를 두었으니 6도(六徒)의 진골(眞骨)로서 5경(五京) 9주(九州)에 나아가 거(居)하되 따로 관호(官號)를 일컫게 하였다. 그 위차(位次)는 내직(內職)에 준(準)하여 악간(嶽干)은 일길찬(一吉))에 준하고, 술간(述干)은 사찬(沙))에 준하며, 고간(高干)은 급찬(級))에 준하고, 귀간(貴干)은 대내마(大奈麻)에 준하며, 선간(選干)은 내마(奈麻)에 준하고, 상간(上干)은 대사(大舍)에 준하며, 간(干)은 사지(舍知)에 준하고, 일벌(一伐)은 길차(吉次)에 준하며, 피일(彼日)은 소오(小烏)에 준하고, 아척(阿尺)은 선저지(先沮知)에 준하였다.

 

 

 

을해년(乙亥年; 675)

신라 문무왕 15년

당(唐)나라 상원 2년

 


봄 정월 백사(百司) 및 주군(州郡)에 동인(銅印)을 나누어 주었다.

○2월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고 또 말갈(靺鞨)과 발해(渤海)로 하여금 우리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게 하여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당 고종(唐高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駐屯)하며 경략(經略)하게 하였는데, 이근행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왕이 이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고 겸하여 바치는 방물(方物)을 앞뒤로 잇달아 보내니 당 고종이 사면(赦免)하고 왕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켰다. 김인문(金仁問)이 길을 떠났다가 중도(中途)에 이 소식을 듣고 도로 입당(入唐)하니 당 고종이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그러나 왕은 백제의 땅을 많이 취(取)하였고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닥쳐서 주군(州郡)을 삼았던 터라 당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의 군사와 연합하여 침략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9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對備)하였다.

 

○말갈(靺鞨)이 아달성(阿達城)을 침략하니 성주(城主)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 소나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사람으로 그의 아비 침나(沈那)는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사산 지경은 백제와 더불어 지형(地形)이 들쑥날쑥하였으므로 서로 공격하여 빈 달이 없었는데 침나가 매양 출전(出戰)하매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인평(仁平 -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 때 연호) 연간(年間)에 백성군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의 변읍(邊邑)을 침략하자 백제에서 정병(精兵)을 보내어 갑자기 공격하므로 사졸들이 조금 물러났는데 침나가 홀로 검(劒)을 뽑아들고 수십여 인(人)을 참살(斬殺)하니 적군(敵軍)이 두려워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침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飛將)이라고 하면서 서로 이르기를,

"침나가 아직도 살아있으니 백성(白城)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였는데, 소나도 그 아비의 풍채(風采)가 있어 용맹스럽고 호방한 기상이 있었다. 처음에 백제가 이미 멸망하매 한주도독(漢州都督) 도유(都儒)가 왕에게 아뢰어 소나를 아달성에 보내어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아달성 태수(阿達城太守) 한선(漢宣)이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날 일제히 나와서 삼[麻]을 심게 하고 영(令)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는데, 말갈(靺鞨)의 첩자(諜者)가 이를 알고 돌아가 그 추장(酋長)에게 고(告)하였다. 그 날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성(城)에서 나와 들에서 삼을 심고 있었는데 말갈이 몰래 군사를 동원시켜 갑자기 성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노약(老弱)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에 소나가 칼을 뽑아들고 적군(賊軍)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치기를,

"너희들이 신라에 침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것을 아느냐?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니, 싸우고자 하는 자는 나오라."

하고, 드디어 적진(賊陣)에 돌입(突入)하여 분격(奮擊)하니 적들이 감히 싸우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하여 활만 쏘았다. 소나도 또한 마주 쏘아 거의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싸웠는데 그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집중(集中)되어 마침내 전사(戰死)하였다.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加林郡)의 여인(女人)이었는데 소나가 부임(赴任)한 아달성은 적국(敵國)에 가까웠으므로 아내는 그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는 바 소나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사람들이 와서 조문(吊問)하니 그 아내가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돌아간 남편이 생존시에 늘 말하되, "대장부가 진실로 국가(國家)를 위하여 전장(戰場)에서 죽음이 마땅하거늘 어찌 침석(寢席)에 누워 가족(家族)과 부녀자의 간호(看護)하는 손길에 죽겠는가"? 하였는데 이제 전사(戰死)했으니 그 뜻을 이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소나 부자(父子)는 대대로 충의(忠義)를 다했다고 이를만 하다."

하고, 소나에게 잡찬(?飡)을 추증(追贈)하였다.

 

 

○가을 9월 당(唐)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는, 숙위(宿衛) 겸 유학생(留學生) 풍훈(風訓)의 아비 김진주(金眞珠)가 본국(本國) 신라에서 복주(伏誅)된 것을 기회(機會)로 삼아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고 천성(泉城)에 쳐들어오니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마주 싸워 1천 4백 급(級)을 참수(斬首)하고 병선(兵船) 40척(隻)을 탈취하니 설인귀가 포위망(包圍網)을 풀고 물러갔으며 전마(戰馬) 1천 필(匹)을 얻었다. 또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駐屯)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이를 쳐서 깨뜨리고 전마(戰馬)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노획한 병기(兵器)도 이와 비등(比等)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안북하(安北河)의 연안(沿岸)에 관성(關城)을 설치(設置)하였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당(唐)나라 군사가 거란(契丹)?말갈(靺鞨)의 군사와 연합하여 칠중성(七重城)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우리편에서는 소수(小守 - 지방의관원) 유동(儒冬)이 전사(戰死)하였다. 말갈 군사가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니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백성들을 이끌고 항전(抗戰)하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전사(戰死)하였으며, 당나라 군사가 또 석현성(石峴城)을 에워싸므로 현령 선백(仙伯)?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이윽고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대소(大小) 18차례의 싸움에 모두 이겨 6천 47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전마(戰馬) 2백 필(匹)을 얻었다.

 

○조부(調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병부 대감(兵部大監)과 같았고, 예부(禮部)에 경(卿) 1인, 승부(乘府)에 경(卿) 1인, 영객부(領客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으니 위계는 조부경(調府卿)과 같았으며, 사정부(司正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으니 위계는 승부경(乘府卿)과 같았다. 또 창부(倉部)에 경(卿) 1인을 더 두었다.

 

 

 

병자년(丙子年; 676)

신라 문무왕 16년

당(唐)나라 의봉(儀鳳) 원년

 


봄 2월 왕이 고승(高僧) 의상(義相)에게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가을 7월 혜성(彗星)이 북하성(北河星)과 적수성(積水星)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8장(丈)이었다.

○당(唐)나라 군사가 도림성(道臨城)에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켰으며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수군[船兵]을 이끌고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와 더불어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워 패전(敗戰)하더니 다시 전진(前進)하여 대소(大小) 22차례를 싸워 모두 이기고 4천여 급(級)을 목베었다.

○재상(宰相) 진순(陳純)이 나이가 않으므로 치사(致仕)하기를 간구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고 궤장(?杖)을 내려주었다.

○비로소 구칠당(仇七幢)을 두었는데 금장(衿章)은 백색(白色)이었으며, 또 내생군(奈生郡)에 3천당(三千幢)을 두었다.

 

 

 

정축년(丁丑年; 677)

신라 문무왕 17년

당(唐)나라 의봉 2년

 


봄 2월 당 고종(唐高宗)이 옛 고구려왕 장(臧)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봉(封)하여 요동(遼東)에 돌려 보내어 남아있는 무리를 안집(安集)하게 하였고, 앞서 중국(中國)의 여러 고을에 억류(抑留)되어 있던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려보냈으며 인하여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 통솔하게 하였는데, 왕이 요동에 이르러 모반(謀叛)하여 말갈과 몰래 내통하였다.

○3월 왕이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는 것을 보았다.

○비로소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설치하여 감(監) 1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내마(奈麻)에서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주서(主書) 2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사지(舍知)에서 내마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史) 4인을 두었다. 또 영창궁 성전(永昌宮成典)을 설치하였고, 낭당(郞幢)을 고쳐 자금서당(紫衿誓幢)을 삼았으니 금장(衿章)은 자색(紫色)과 녹색(綠色)이었다.

○소부리주(所夫里州)에서 흰 매[白鷹]를 바쳤다.

 

 

 

무인년(戊寅年; 678)

신라 문무왕 18년

당(唐)나라 의봉 3년

 


봄 정월 선부령(船府令) 1원(員)을 두어 선박(船舶)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옛날에는 선박에 관한 일을 병부(兵部)의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이 주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따로 선부령을 두었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에 각기 경(卿) 1원(員)씩을 더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다른 관사(官司)의 경과 같았다.

○북원(北原)에 소경(小京)을 두고 대아찬(大阿飡) 오기(吳起)로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3월 대아찬(大阿飡) 춘장(春長)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여름 4월 아찬(阿飡) 천훈(天訓)을 무진주 도독(武珍州都督)을 삼았다.

○5월 북원(北原)에서 기이한 새[異鳥]를 바쳤는데 깃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는 털이 났다.

 

 

 

기묘년(己卯年; 679)

신라 문무왕 19년

당(唐)나라 조로(調露)원년

 


봄 정월 중시(中侍) 춘장(春長)이 신병(身病)으로 사직(辭職)하니 서불한(舒弗邯) 천존(天存)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2월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耽羅國)을 돌아보게 하였다.

○궁궐(宮闕)을 중수(重修)하였는데 지극히 장려(壯麗)하였다.

○여름 4월 형혹성(熒惑星 - 화성(火星)이 우림성(羽林星) 자리를 지켰다.

○6월 태백성(太白星)이 달에 들어갔고 유성(流星)이 삼수(參宿)의 대성(大星)을 범(犯)하였다.

○가을 8월 태백성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存)이 졸(卒)하였다.

○동궁(東宮 - 태자궁(太子宮))을 창건(創建)하였다.

○비로소 궁궐(宮闕) 내외(內外) 여러 문(門)의 액호(額號)를 정(定)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이룩되었다.

○남산성(南山城)을 증축(增築)하였다.

○당(唐)나라에서 김인문(金仁問)을 진동대장군 겸 우무위위대장군(鎭東大將軍兼右武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경진년(庚辰年; 680)

신라 문무왕 20년

당(唐)나라 영융(永隆) 원년

 


봄 2월 이찬(伊飡)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3월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에게 금?은기(金銀器)와 잡채(雜綵) 1백 단(段)을 내려주고 왕의 형(兄)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인륜(人倫)의 근본은 부부(夫婦)가 제일 앞서며 왕화(王化)의 기초는 후사(後嗣)를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왕(王 - 안승을가리킴)은 배필의 자리가 비어있어 내조(內助)에 대한 바람이 마음에 간절할 것이니 오래도록 내보(內輔)의 의절(儀節)을 비워둠으로써 길이 기가(起

家)의 업(業)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좋은 때와 길한 날을 가려 옛 규례에 따라 과인(寡人)의 형의 딸로서 그대의 배필을 삼으려 한다. 왕은 심의(心義)를 돈독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삼가 받들어 자손을 창성하게 하여 길이 반석(盤石)의 터전을 이룩하게 한다면 어찌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여름 5월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이 그 장수(將帥) 연무(延武)를 보내어 왕에게 글월을 올려 이르기를,

"신(臣) 안승은 아뢰옵니다. 대아찬(大阿飡)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교지(敎旨)를 선포하였고 아울러 교서(敎書)를 내려 외생녀(外甥女)로서 하읍(下邑)의 안 주인[內主]를 삼고 인하여 4월 15일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려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윽이 생각컨대, 요(堯)임금의 두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내고 주(周)나라의 왕녀(王女)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성덕(聖德)을 드날리기 위한 것이니 범상한 인물은 관여(關與)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부류여서 행실과 재능(才能)에 하나도 보잘것이 없는데 다행히 창성한 운(運)을 만나 성화(聖化)를 입고 매양 특이한 은혜를 받았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듭 천총(天寵)을 입어 인친(姻親)을 하가(下嫁)시켜 화려한 경의(慶儀)를 표(表)하였고 화목한 덕(德)을 이루어 길월(吉月) 영신(令辰)을 가려 저의 가문(家門)에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천재(千載)에 만나기 어려운 일인데 하루 아침에 얻었으니 이는 당초에 바라던 것이 아니요, 의외의 기쁨이라 하겠습니다. 이 어찌 한 두 부형(父兄)만이 그 은사(恩賜)를 받았을 뿐이겠습니까? 선조(先祖) 이하로부터 이 은총에 대하여 기뻐할 것입니다. 신이 들어오라는 교지(敎旨)를 받지 못하여 감히 곧바로 입조(入朝)하지는 못하오나 기뻐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하였다.

○가야군(加耶郡)에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

○상사서(賞賜署)에 사(史) 2인을 더 두었다.

 

 

 

신사년(辛巳年; 681)

신라 문무왕 21년?신문왕(神文王) 원년

당(唐)나라 개요(開耀) 원년

 


봄 정월 초하룻날 해에 광채가 없어 밤과 같이 어두웠다.

○사찬(沙飡) 무선(武仙)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3천 명을 이끌고 비열홀(比列忽)을 지키게 하였다.

○우사록관(右司祿館)을 설치하여 감(監) 1인, 주서(主書) 2인, 사(史) 4인을 두었다.

○여름 5월 지진(地震)이 있었고 유성(流星)이 삼수(參宿) 대성(大星)을 범(犯)하였다.

○6월 천구성(天狗星)이 곤방(坤方 - 서남방(西南方))에 떨어졌다.

○신라왕이 경성(京城)을 중수(重修)하고자 하여 승려(僧侶) 의상(義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정도(正道)를 행하면 비록 초야(草野)에 있더라도 복록(福祿)이 연장(延長)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훌륭한 성을 쌓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성역(城役)을 정지(停止)하였다.

○중원경(中原京)1)에 성(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천 5백 92보(步 - 1보(步)는6척(尺)임)였다.

○처음으로 남해(南海)의 섬 가운데에 상군(裳郡)을 두었다.

○가을 7월 초하룻날에 왕이 훙(薨)하였으니 유조(遺詔)에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어지러운 운회(運會)와 전쟁(戰爭) 시대를 만나 서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고 북쪽으로 고구려를 토벌하여 강토(疆土)를 확정(確定)하였으며, 배반하는 자를 치고 떠나는 자를 불러 원근(遠近)을 안정(安定)시켰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권념(眷念)하심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숙원(宿寃)을 갚았으며, 전쟁(戰爭)에서 생존한 자와 죽은 자에게 골고루 시상(施賞)하였고 중외(中外)의 훈공이 있는 자에게 널리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병기(兵器)를 녹여 농구(農具)를 만들어 백성들이 인수(仁壽)의 역(域)에 처(處)하게 하였으며,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요역(?役)을 덜어 집집마다 풍요하고 사람마다 유족(裕足)하였으니 민간(民間)이 안도(安堵)하고 경내(境內)에 근심이 없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감옥(監獄)은 비어있어 풀만 무성했으니 천지(天地)에 부끄러움이 없고 인민(人民)에 대하여도 저버림이 없다고 이를만 하다. 그러나 내가 풍상(風霜)을 무릅써 드디어 고질병이 되었고 정교(政敎)에 수고로워 또 난치병을 얻었는데 운회(運會)는 가고 이름만 남아있음은 고금(古今)이 한가지여서 홀연히 저승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무슨 한(恨)이 있겠는가? 태자(太子)는 일찍이 밝은 덕(德)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宰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송종(送終)2)의 의(義)를 어기지 말며 임금을 섬기는 예(禮)을 결(缺)함이 없도록 하라. 종묘(宗廟)의 주(主)는 잠시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니 태자는 관(棺) 앞에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라. 또 산곡(山谷)은 변천(變遷)하고 세대(世代)는 흘러가니 저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북산(北山) 무덤에도 오늘날 어찌 금부(金鳧)3)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주(魏主) 조조(曹操)의 서릉(西陵)의 조망(眺望)4)도 오직 동작대(銅雀臺)의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옛날 만기(萬機)를 총찰(摠察)하던 영주(英主)도 마침내는 한 줌 흙으로 변하여 초동(樵童) 목수(牧竪)가 무덤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구멍을 뚫어 소굴(巢窟)을 삼았다. 분묘(墳墓)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사책(史策)에 비평(批評)만 남길 뿐이며 헛되이 인력(人力)만 수고롭게 하고 유혼(幽魂)을 제도(濟度)하지도 못한다. 그윽이 생각컨대, 마음의 상통(傷痛)을 금(禁)할 수 없으니 이러한 것은 나의 즐거워하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후 10일 만에 고문(庫門)의 외정(外庭)에서 서국(西國 - 인도를 말함)의 의식(儀式)에 의하여 화장(火葬)할 것이며 복제(服制)의 경중(輕重)은 본래 상규(常規) 있을 것이나 상제(喪制)는 검약(儉約)을 따르는 데에 힘쓸 것이다. 변성(邊城)의 진수(鎭守) 및 주현(州縣)의 과세(課稅)에 대하여는 아주 긴요한 것이 아니면 적당히 헤아려 페지하고 율령(律令)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곧 개정(改正)하도록 하라. 원근(遠近)에 포고(布告)하여 이 뜻을 알게 할지니 주사자(主司者)는 이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7일 후에 태자(太子) 정명(政明)이 왕위(王位)에 올랐고 전왕(前王)의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였으며, 군신(群臣)이 유조(遺詔)에 의하여 동해(東海) 어귀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장사(葬事)란 시신(屍身)을 땅에 묻는 것이니,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 대하여, 죽으면 반드시 예절(禮節)로서 장사지내는 것은 그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때문이다. 의금(衣衿)으로써 염습(斂襲)하고 관곽(棺槨)을 두텁게 하여 무릇 몸에 붙는 것을 반드시 성신(誠信)으로 하여 흙으로 하여금 피부(皮膚)에 닿지 않게 하는 것은 빨리 썩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화장법(火葬法)은 불씨(佛氏 - 불교(佛敎))에서 나왔는데 그 설(說)에 의하면 금수(禽獸)의 고기를 불에 굽는 것도 오히려 죄가 된다고 하여 그 보응(報應)의 참혹함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화장하고자 하여 그 지친(至親) 대하기를 금수만도 못하게 여겼으니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常道)에 어그러짐이 너무 심하다. 후세(後世) 사람들이 그 말에 미혹되어 살피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는 지친의 시신을 뜨거운 불구덩이에 넣어 불사라버리니 그 불인(不仁)함이 이처럼 극단에 이르렀다. 이제 문무왕(文武王)은 화장(火葬)하라고 유명(遺命)하였는데 당시의 신자(臣子)들이 난명(亂命 - 거의 죽게되어 정신이 혼미할 때 한 유언)에 따라 그 그른 것을 알지 못하였고, 효성왕(孝成王)?선덕왕(宣德王)에 이르러서는 그 관(棺)을 불사르고 또 백골(白骨)을 동해(東海)에 흩었으니 간사한 말이,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 어찌 통탄(痛歎)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당 고종(唐高宗)이 사신을 보내와서 왕(王)을 책봉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8월 서불한(舒弗邯) 진복(眞福)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에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훈공이 있는 자에게 상(賞)을 내리는 것은 전성(前聖)의 좋은 규례요, 죄지은 자를 주륙(誅戮)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법령이다. 과인(寡人)이 조그만 몸과 얄팍한 덕(德)으로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아침 저녁 식사도 잊어버리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고굉지신(股肱之臣 - 임금이 가장 믿는 중요한 신하)과 더불어 국가를 편안하게 하려 하였는데 상중(喪中)에 서울에서 변란(變亂)이 일어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흉적(凶賊)의 괴수 흠돌?흥원?진공 등은 그 작위(爵位)가 재능으로서 높아진 것이 아니며 직임(職任)이 실상 은총(恩寵)으로서 오른 것인데 능히 시종(始終)을 삼가하여 부귀(富貴)를 보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불인(不仁) 불의(不義)한 행실로서 위복(威福)을 누리며 관료(官僚)를 업신여기고 상하(上下)를 능멸하여 한정 없는 욕심을 드러내고 그 포악한 마음을 자행하였다. 또 간악(奸惡)한 자를 불러 들이고 가까운 내시들과 결탁하여 앙화가 안팎을 통하였으며 같은 악인(惡人)끼리 서로 도와 기일(期日)을 정(定)하여 난역(亂逆)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는 천지(天地)의 도움을 힘입고 아래로는 종묘(宗廟)의 영조(靈助)를 받아 흠돌 등의 죄악(罪惡)이 가득히 쌓여 그 꾀한 바가 탄로되고 말았다. 이는 사람과 귀신이 모두 버린 바이며 천지(天地)에 용납되지 못하는 바이니, 의리를 범(犯)하고 풍속을 손상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군사를 징발하여 흉적(兇賊)을 제거하고자 하매, 혹은 산곡(山谷)으로 도망하고, 혹은 궐정(闕庭)에 돌아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殘黨)을 탐색(探索)하여 모두 주멸(誅滅)하고 3,4일 사이에 흉도(兇徒)를 소탕(掃蕩)하였는데 이는 마지 못한 일이었으나 이로 인하여 인민(人民)을 경동(驚動)시켰으니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조석으로 잊을 수 있겠느냐? 이제 요망한 무리가 깨끗이 평정되어 원근에 근심이 없으니 소직한 병마(兵馬)는 의당 속히 돌려보낼 것이다. 이를 사방에 포고(布告)하여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흠돌은 왕비(王妃) 김씨(金氏)의 아비였다.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이 사신을 보내어 역적(逆賊)을 주멸(誅滅)한 것을 하례(賀禮)하였다.

○역당(逆黨) 병부령(兵部令) 이찬(伊飡) 군관(軍官)이 복주(伏誅)되었다.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관직(官職)에 봉사(奉仕)하는 도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으로 으뜸을 삼는다. 군관은 반차(班次)에 따라 드디어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능히 임금을 보좌하여 그 결함을 바로잡아 조정(朝廷)에 깨끗한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고, 명을 받고서 제 몸을 잊어 사직(社稷)에 불같은 충성을 표하지도 못하였다. 적신(賊臣) 흠돌 등과 사귀어 역모(逆謀)의 사실을 알면서도 고(告)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고 또 공직(公職)을 받들 뜻도 끊어진 것인데 어떻게 거듭 재보(宰輔)의 자리에 두어 국가의 헌장(憲章)을 혼란시키겠는가?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이를 버려 후진(後進)을 경계함이 마땅하다. 군관 및 그 적자(嫡子) 1인은 자결(自決)하게 하고 이를 원근에 포고(布告)하여 널리 알도록 하라."

하였다.

○겨울 10월 시위감(侍衛監)을 파(罷)하고 장군(將軍) 6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급찬(級飡)에서 아찬(阿飡)까지가 이에 맡았으며, 대감(大監) 6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내마(奈麻)에서 아찬까지가 이를 맡았고, 대두(隊頭) 15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사지(舍知)에서 사찬(沙飡)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항(項) 36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사지에서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졸(卒) 1백 17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선저지(先沮知)에서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여러 군관(軍官)?장군(將軍)은 모두 36인인데, 장대당(掌大幢)이 4인, 귀당(貴幢)이 4인, 한산정(漢山停)이 3인, 완산정(完山停)이 3인, 하서정(河西停)이 2인, 우수정(牛首停)이 2인이니, 위계는 진골 상당(眞骨上堂)에서 상신(上臣)까지가 이를 맡았고, 녹금당(綠衿幢)이 2인, 자금당(紫衿幢)이 2인, 백금당(白衿幢)이 2인, 비금당(緋衿幢)이 2인, 황금당(黃金幢)이 2인, 흑금당(黑衿幢)이 2인, 벽금당(碧衿幢)이 2인, 적금당(赤衿幢)이 2인, 청금당(靑衿幢)이 2인이니, 위계는 진골 급찬(眞骨級飡)에서 각간(角干)까지가 이를 맡았다.

○선부(船府)에 사(史) 2인을 더 두었고, 본피궁(本彼宮)에 우(虞) 1인, 사모(私母) 1인, 상옹(上翁) 2인, 전옹(典翁) 1인, 사(史) 2인을 두었다.

○당(唐)나라에서 고구려의 항복한 왕 장(藏)을 소환(召還)하여 공주(州)로 보냈다.

 

 

 

임오년(壬午年; 682)

신라 신문왕 2년

당(唐)나라 영순(永淳) 원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고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여름 4월 위화부(位和府)에 영(令) 2인을 두어 선거(選擧)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고, 또 금하신(衿荷臣) 2인을 두었다.

○해관(海官) 박숙청(朴夙淸)이 왕에게 고(告)하기를,

"동해(東海) 가운데 작은 산(山)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이를 가져다 피리[笛]를 만들고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람들이 이 피리를 불면 풍파(風波)가 평온해졌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삼죽(三竹)이 있어 모두 당적(唐笛)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삼죽은 모두 일곱 곡조(曲調)이니, 1은 평조(平調), 2는 황종조(黃鍾調), 3은 이아조(二雅調), 4는 월조(越調), 5는 반섭조(般涉調), 6은 출조(出調), 7은 준조(俊調)이다. 대금(大금)은 3백 24곡(曲)이요, 중금(中금)은 2백 45곡이요, 소금(小금)은 2백 98곡이다.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6월 국학(國學 - 태학(太學))을 세워 예부(禮部)에 소속시키고 경(卿) 1인을 두었다. 또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대내마(大奈麻)에서 급찬(級飡)까지가 이를 맡았고, 채전(彩典)에 감(監) 1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내마(奈麻)에서 대내마까지가 이를 맡았다.

○옛 고구려왕 장(藏)이 공주(?州)에서 졸(卒)하니 당 고종(唐高宗)이 위위경(衛尉卿)을 추증(追贈)하였고 조서(詔書)를 내려 시신(屍身)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힐리(?利)의 무덤 왼편에 장사지내고 비석(碑石)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을 하남(河南) 농우(?右) 등 여러 주(州)로 옮겼고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옆 옛 성(城)에 머물러있게 하였는데, 왕왕히 신라 군사의 몰수(沒收)한 바가 되었고, 나머지 무리는 말갈(靺鞨) 및 돌궐(突厥)에 흩어져 들어가 고씨(高氏)가 드디어 멸절하였다. 발해(渤海) 사람 무예(武藝)의 말에 의하면, "옛날 고구려의 전성시(全盛時)에는 전사(戰士)가 30만 명이나 되어 당(唐)나라와 항거하여 대적(對敵)이 되었으니 땅의 형세가 우월하고 군사가 강성하다고 할만 하였다. 그런데 말엽에 이르러 군신(君臣)이 혼미하고 포학 무도(暴虐無道)하매 당나라에서 두 차례 원정(遠征)하였고 신라에서 원조하여 이를 토평(討平)하였다. 그 영토(領土)가 발해와 말갈에 많이 들어갔고, 신라에서도 또한 그 남쪽 땅을 점령(占領)하여 한주(漢州)?삭주(朔州)?명주(溟州)의 3주(州)를 두고 그 군현을 합하여 9주(州)5)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683)

신라 신문왕 3년,

당(唐)나라 홍도(弘道) 원년

 


봄 2월 순지(順知)를 중시(中侍)로 삼았다.

○당초 왕이 태자(太子)로 있을 때에 김흠돌(金欽突)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는데, 아들이 없었고 뒤에는 아비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폐위(廢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장차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으려고 먼저 이찬(伊飡) 문영(文潁)과 파진찬(波珍飡) 삼광(三光)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닦았고, 또 대아찬(大阿飡) 지상(智常)을 보내어 납채(納采)하였으니 폐백(幣帛)이 15수레[轝]요, 백미(白米)?술?찬품(饌品)이 1백 35수레이며, 벼[租]가 1백 50수레[車]였다.

○여름 4월 눈이 내렸는데 평지(平地)에 1자[尺]나 쌓였다.

○5월 이찬(伊飡)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보내어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여 비(妃)로 삼았고, 파진찬(波珍飡) 대상(大常)?손문(孫文)과 아찬(阿飡) 좌야(坐耶)?길숙(吉叔) 등에게 명하여 각기 그 아내와 사량(沙梁)?급량(及梁) 2부(部)의 부인(婦人) 각 30명을 데리고 비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좌우 시종(侍從)의 행렬이 매우 성대하였다.

○겨울 10월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蘇判)을 삼고 제택(第宅)을 주었으며, 인하여 김씨(金氏)의 성(姓)을 내려주었다.

○혜성(彗星)이 오거성(五車星) 자리에 나타났다.

○황금 서당(黃衿誓幢)을 두어 고구려 유민(遺民)으로서 당(幢)을 삼았으니 금장(衿章)은 황적색(黃赤色)이었고, 또 흑금 서당(黑衿誓幢)을 두어 말갈(靺鞨)의 백성으로서 당(幢)을 삼았으니 금장은 흑적색(黑赤色)이였다.

 

 

 

갑신년(甲申年; 684)

신라 신문왕 4년

당(唐)나라 중종(中宗) 사성(嗣聖) 원년

 


○겨울 10월 유성(遊星)이 밤새도록 가로 세로로 흘렸다[縱橫].

○11월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의 족자(族子)인 장군(將軍)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그 남은 무리가 지방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雄據)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왕이 장사(壯士)들을 보내어 이를 토평(討平)하고 그 백성들을 나라의 남쪽 고을로 옮겼으며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이 전역(戰役)에서 제감(第監) 핍실(逼實)과 보기감(步騎監) 김영윤(金令胤)이 전사(戰死)하였는데, 핍실은 부과(夫果)와 취도(驟徒)의 아우이니, 부과와 취도도 일찍이 왕사(王事)에 순절(殉節)한 사람이었다. 핍실이 장차 출정(出征)의 길을 떠날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두 형이 이미 왕사(王事)에 죽어 이름이 청사(靑史)에 올랐는데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나 어찌 홀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겠는가? 오늘이 그대와 더불어 사별(死別)하는 날이다."

하였는데, 적병(賊兵)과 교전(交戰)하기에 이르러 홀로 나아가 분격(奮擊)하여 수십인을 죽이고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찬탄(讚歎)하여 이르기를,

"취도는 왕사(王事)에 순절하는 의리를 알아 그 형제들의 마음을 격동(激動)시켰고 부과와 핍실은 용맹과 의리가 있어 분연(奮然)히 죽음을 돌보지 않았으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하고 모두 사찬(沙飡)을 추증(追贈)하였다. 김영윤은 급찬(級飡) 반굴(盤屈)의 아들이며 각간(角干) 흠춘(欽春)의 손자이니 세가(世家)에서 생장(生長)하여 명절(名節)6)로서 자부(自負)하였다. 장차 출정(出征)의 길을 떠날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전역(戰役)에서 마땅히 이름을 세워 종족(宗族)과 붕우(朋友)에게 보답하겠노라."

하였다. 가잠성(가岑城) 남쪽 7리(里)의 거리에 이르자 적장(賊將) 대문(大文)이 진(陣)을 치고 대기(待期)하였다. 이에 사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제 흉적의 무리들은 보금자리에 있는 제비와 솥 안에 든 물고기와 같아서 그 형세가 오래 지탱할 수 없으므로 만일의 요행을 바라고 일전(一戰)도 불사할 것이다. 궁지(窮地)에 빠진 도적을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모두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그런데 유독 영윤 만은 분연히 싸우고자 하거늘 그 수종자가 말하기를,

"이제 여러 장수들이 어찌 모두 삶을 도모하고 죽기를 아까와 하는 자이겠습니까? 장차 적군(賊軍)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리자는 것인데 그대만 유독 싸우고자 하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영윤이 말하기를,

"적진(敵陣)에 임하여 용맹이 없는 것은 《예경(禮經》에 경계하는 바이며, 전진(前進)만 있고 후퇴(後退)가 없는 것은 사졸(士卒)의 당연한 분의(分義)이다. 대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단함이 옳거늘 어찌 남들의 생각에 부화 뇌동(附和雷同)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적진에 다달아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듣고 탄식하기를,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다. 그 의열(義烈)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 부의(賦儀)를 더 보태어 보내주었다.>

○영흥사성전(永興寺成典)을 두었다.

 

 

 

을유년(乙酉年; 685)

신라 신문왕 5년

당(唐)나라 사성 2년

 


봄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두어 용원(龍元)으로서 총관(摠管)을 삼았고, 거열주(居列州)를 청주(菁州)로 삼고 대아찬(大阿)) 복세(福世)로서 총관을 삼았다.

○3월 서원 소경(西原小京)을 두고 아찬(阿飡) 원태(元泰)로서 사신(仕臣 - 소경의 장관(長官))을 삼았으며, 남원 소경(南原小京)을 두고 여러 주군(州郡)의 백성을 옮겨 거주(居住)하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를 창건하였다.

○여름 4월 망덕사(望德寺)를 창건하였다.

○북원경(北原京 - 원주(原州))에 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31보(步)였다.

○집사성(執事省)에 사지(舍知) 2인을 두었고, 조부(調府)에 사지 1인을 두었으며, 위화부(位和府)에 금하신(衿荷臣) 1인을 더 두었다.

○하주정(下州停)을 파(罷)하고 완산정(完山停)을 두었으니, 금장(衿章)은 백색(白色)과 자색(紫色)이였다.

 

 

 

병술년(丙戌年; 686)

신라 신문왕 6년

당(唐)나라 사성 3년

 


○봄 정월 이찬(伊飡) 대장(大莊)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예작부(例作府)에 경(卿) 2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사정부경(司正府卿)과 같았으며, 영(令) 1인을 두었으니 위계는 대아찬(大阿飡)에서 각간(角干)까지가 이를 맡았다.

○2월 백제의 옛 땅에 주군(州郡)을 두었으니 사비주(泗?州)를 군(郡)으로 삼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나주(羅州)를 폐하여 군(郡)을 삼고, 무진군(武珍郡)으로서 주(州)를 삼았으며, 또 석산(石山)?마산(馬山)?고산(孤山)?사평(沙平)의 4현(縣)을 두었다.

○사신(使臣)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에 관한 서적을 청하니, 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유사(有司)로 하여금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등사(謄寫)하고 아울러 《문관사림(文館詞林》 중에서 규계(規誡)에 관한 글을 채택(採擇)하여 50권(卷)을 만들어 보내주게 하였다.

○보덕성(報德城)의 백성으로서 벽금 서당(碧衿誓幢)을 삼았으니 금장(衿章)은 벽색(碧色)과 황색(黃色)이었으며, 또 나누어 적금 서당(赤衿誓幢)을 삼았으니 금장은 적색(赤色)과 흑색(黑色)이었다.

○항복한 고구려 사람들에게 차등을 두어 관작(官爵)을 제수(除授)하였는데 경관(京官)을 제수함에 있어서는 본국(本國 - 고구려)의 관품(官品)을 참작하여 제수하였으니, 일길찬(一吉飡)은 본래 주부(主簿)요, 사찬(沙飡)은 본래 대상(大相)이며, 급찬(級飡)은 본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이요, 내마(奈麻)는 본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이며, 대사(大舍)는 본래 소형(小兄)이요, 사지(舍知)는 본래 제형(諸兄)이며, 길차(吉次)는 본래 선인(先人)이요, 오지(烏知)는 본래 자위(自位)였다.

○무후(武后)가 고구려 고장(高臧)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고, 또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손자 경(敬)은 백제왕(百濟王)을 승습(承襲)하게 하였는데, 그 옛 땅은 이미 신라?발해(渤海)?말갈(靺鞨)에서 나누어 점령하였다.

 

 

 

정해년(丁亥年; 687)

신라 신문왕 7년

당(唐)나라 사성 4년

 


봄 2월 원자(元子) 이홍(理洪)이 탄생하였는데 이 날 일기가 음침하고 어두웠으며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쳤다.

○2월 일선주(一善州)를 파(罷)하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두었으며, 파진찬(波珍飡) 관장(官長)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4월 음성서(音聲署)의 장(長) 2인을 고쳐 경(卿)으로 삼았다.

○성변(星變)이 있자 대신(大臣)을 보내어 조묘(祖廟)에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사왕(嗣王) 정명(政明 - 신문왕의 이름)은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하고 삼가 태조 대왕(太祖大王)?진지 대왕(眞智大王)?문흥 대왕(文興大王 - 태종 무열왕의 아비 용춘(龍春)이니, 추봉(追封)하였음.)?태종 대왕(太宗大王)?문무 대왕(文武大王)의 영령(英靈)에게 아뢰옵나이다. 정명은 천박한 자질(資質)로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자나 깨나 근심하고 애쓰느라 편안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종(祖宗)의 애호(愛護)하심과 천지(天地)의 복 주심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었고 백성이 화목하며 이역(異域)의 사신(使臣)들은 보물(寶物)을 실어다 조공(朝貢)을 바치고 형정(刑政)은 밝아서 쟁송(爭訟)이 그쳐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군주(君主)의 다스림이 도리(道理)를 잃었고 의리가 천감(天鑑)에 어긋나서 괴이한 성상(星象)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었으니 전전 긍긍(戰戰兢兢)함이 마치 깊은 연못과 험한 골짜기에 빠지는 듯 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모관(某官)을 보내어 변변치 않은 제물(祭物)을 받들어 살아 계신 듯한 영령(英靈)께 정성껏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조그만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사 사시(四時)의 절후를 고르게 하시고 오사(五事)7)의 효혐(效驗)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곡식이 풍성(풍盛)하고 여역(려疫돌림병 )이 사라지며 의식(衣食)이 넉넉하여 예의(禮儀)가 갖추어지고 중외(中外)가 평안하여 도적이 근절되어 자손 만대(萬代)에 유족(裕足)한 규모를 드리워서 길이 많은 복록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하였다.

○5월 문무 관료(文武官僚)에게 차등을 두어 전지(田地)를 내려주었다.

○가을 사벌주(沙伐州)와 삽량주(?良州)에 성(城)을 쌓았다. 사벌성(沙伐城)은 둘레가 1천 1백 9보(步)이며, 삽량성(?良城)은 둘레가 1천 2백 60 보였다.

○적금당(赤衿幢)을 두었고, 또 백제의 잔민(殘民)으로서 청금서당(靑衿誓幢)을 삼았다. 금장(衿章)은 청색(靑色)과 백색(白色)이었다.

 

 

 

무자년(戊子年; 688)

신라 신문왕 8년

당(唐)나라 사성 5년

 


봄 정월 중시(中侍) 대장(大莊)이 졸(卒)하니 이찬(伊飡) 원사(元師)로서 중시를 삼았다.

○2월 선부(船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다. 위계(位階)는 조부경(調府卿)과 같았다.

 

 

 

기축년(己丑年; 689)

신라 신문왕 9년

당(唐)나라 사성 6년

 


봄 정월 왕이 하교(下敎)하여 내외관(內外官)의 녹읍(祿邑)을 파(罷)하고 해마다 벼[租]를 내려주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가을 윤 9월 왕이 장산성(獐山城)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淸州))의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達句伐지금의 대구(大邱))로 옮겨 도읍하려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왕이 신촌(新村)에 거둥하여 포연(?宴)8)을 베풀고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가무(?舞)에는 감(監) 6인(人), 가척(歌尺) 2인, 무척(舞尺) 1인이고, 하신열무(下辛熱舞)에는 감(監) 4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2인, 가척(歌尺) 3인이며, 사내무(思內舞)에는 감(監) 3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2인, 가척(歌尺) 2인이고, 한기무(韓岐舞)에는 감(監) 3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2인이며, 상신열무(上辛熱舞)에는 감(監) 3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2인, 가척(歌尺) 2인이고, 소경무(小京武)에는 감(監) 3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1인, 가척(歌尺) 3인이며, 미지무(美知舞)에는 감(監) 4인, 금척(琴尺) 1인, 무척(舞尺) 2인이다. 당시 사람들이 악공(樂工)을 척(尺)이라고 하였다.

○황금무당(黃衿武幢)을 두었다.

 

 

 

경인년(庚寅年; 690)

신라 신문왕 10년

당(唐)나라 사성 7년

 


봄 2월 중시(中侍) 원사(元師)가 신병(身病)으로 사직(辭職)하니 아찬(阿飡) 선원(仙元)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비로소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다.

○당(唐)나라에서 김인문(金仁問)을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개국공 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에 제수(除授)하였다.

○개지극당(皆知戟幢)을 두었는데 금장(衿章)은 흑색(黑色)?적색(赤色)?백색(白色)이다. 삼십구여갑당(三十九餘甲幢)은 금장이 없다. 또 삼변수당(三邊守幢)을 두었는데, 1은 한산변(漢山邊), 2는 우수변(牛首邊), 3은 하서변(河西邊)이라고 하였으며, 금장이 없다.

 

 

 

신묘년(辛卯年; 691)

신라 신문왕 11년

당(唐)나라 사성 8년

 


봄 3월 원자(元子) 이홍(理洪)을 봉(封)하여 태자(太子)로 삼았고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사화주(沙火州)에서 흰 참새[白雀]를 바쳤다.

○남원성(南原城)을 쌓았다.

○당(唐)나라에서 헌성(獻誠 - 고구려 남생(男生)의 아들)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서 우림위(羽林衛)를 겸하게 하였다. 무후(武后측천무후(則天武后))가 일찍이 금폐(金弊)를 내어 <문무관(文武官)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5인에게 상(賞)을 주기로 하였는바, 내사(內史) 장원보(張元輔)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讓步)하여 1등(等)이 되었는데, 헌성이 뒤에 우왕검위대장군(右王鈐衛大將軍) 설토마지(薛吐摩支)에게 양보하니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이윽고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陛下)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화인(華人 - 중국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당나라 관원들이 활 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듯 하오니 파(罷)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내준신(來俊臣)이 일찍이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으나 헌성이 응하지 않자 모반(謀叛)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목매어 죽였다. 그 후에 무후가 그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追贈)하였으며 예(禮)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송 신종(宋神宗)이 왕개보(王介甫 - 왕안석(王安石))와 더불어 정사를 논하여 이르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쳐서 어찌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왕개보가 대답하기를, "개소문(蓋蘇文)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그런즉 개소문도 또한 재사(才士)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도리로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잔학(殘虐)한 짓을 자행하여 대역 부도(大逆不道)에 이르렀다. 《춘추(春秋》에, "임금을 시해(弑害)한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이를만하다."라고 하였거니와, 개소문은 목숨을 보전하여 집에서 편안히 죽었으니 요행히 형(刑)을 면(免)했다고 하겠다. 남생(男生)과 헌성(獻誠)은 비록 당나라 황실(皇室)에서 명성(名聲)이 있었지만 본국(本國)으로 말한다면 반역 죄인(叛逆罪人)임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692)

신라 신문왕 12년?효소왕(孝昭王) 원년

당(唐)나라 사성 9년

 


봄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와서 이르기를,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는 신공(神功)과 성덕(聖德)이 천고(千古)에 뛰어나므로 묘호(廟號)를 태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 나라의 선왕(先王) 김춘추(金春秋)의 묘호가 이와 같은 것은 실로 참람(僭濫)한 일이니 빨리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사자(使者)에게 말을 전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각컨대 우리 선왕(先王) 김춘추께서는 매우 어진 덕망(德望)이 있었고, 또 양신(良臣) 김유신(金庾信)을 얻어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을 뜨시자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애통하고 추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추존한 묘호가 서로 촉범(觸犯)됨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제 교칙(敎勅)을 들으니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로써 위에 아뢰기를 원합니다."

하였는데, 뒤에 다시 교칙이 없었다.

○왕이 일찍이 한가이 있을 때에 설총(薛聰)을 불러들여 이르기를,

"오늘은 오랜 비가 처음 개이고 훈훈한 바람이 조금 서늘하니 고담(高談)과 우스갯소리로서 울적한 회포(懷抱)를 푸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대는 반드시 특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개진(開陳)하지 않는가"?

하니, 설총이 말하기를,

"옳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옛날 화왕(花王 - 모란(牧丹)의 별칭)이 처음 오매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을 쳐서 보호하였는데 봄 3월이 되자 탐스러운 빛을 발하여 온갖 꽃을 능멸하고 홀로 특출하였습니다. 이에 곱고 아리따운 꽃의 정령들이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려와서 화왕을 배알(拜謁)하였는데 홀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女人)이 있어 이름을 장미(薔薇)라고 하면서 불그스름한 얼굴, 백옥(白玉)같은 이에 곱게 치장(治粧)하고 간들거리며 걸어와서 얌전히 말하기를, "첩(妾)이 대왕의 선덕(善德)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 안에서 침석(枕席)을 모시고자 하는데 대왕께서 저를 용납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장부(丈夫)가 있어 이름을 백두옹(白頭翁)이라 하면서 베옷에 가죽띠를 띠고 머리에는 백발(白髮)이 휘날리는데 지팡이를 짚고 쩔뚝거리며 와서 말하기를, "저는 도성(都城) 밖 큰 길 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컨대, 좌우(左右)의 공급(供給)과 고량 진미(膏梁珍味)가 비록 유족(裕足)하고 의복도 넉넉히 갈무리 해 두었을 지라도 모름지기 양약(良藥)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絲]과 삼[麻]이 있더라도 왕골[菅]과 기령풀[?]도 버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혹 대왕께서도 이런 점에 유의하시는 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또한 일리(一理)가 있지만 아름다운 여인(女人)은 얻기가 어려우니 장차 어이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장부(丈夫)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이 된 자치고 노성(老成)한 자를 가까히 하여 흥왕하지 않은 자가 없고, 요염한 여인(女人)을 가까이 하여 멸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염한 여인은 사랑하기가 쉽고 노성(老成)한 자는 친근하기가 어려운바 그러므로 하희(夏姬)9)는 진(陳)나라를 망쳤고, 서시(西施)10)는 오(吳)나라를 멸절시켰으며, 맹가(孟軻 - 맹자(孟子))는 불운(不運)에 얽매어 평생을 마쳤고, 풍당(馮唐)11)은 낭관(郞官)에 침체(沈滯)되어 백발(白髮)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였는데 내가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화왕(花王)이 사례(謝禮)하고 이르기를, "나의 허물이다." 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니, 왕이 슬픈 낯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풍유(諷諭)함이 매우 간절하니 글로 써서 경계(警戒)를 삼게 해주기 바라노라."

하고, 드디어 설총을 발탁(拔擢)하여 높은 직질(職秩)에 두었다. 설총의 자(字)는 총지(聰智)이며, 조부(祖父)는 내마(奈麻) 담날(談捺)이요, 아버지는 원효(元曉)이다. 원효는 일찍이 승려(僧侶)가 되어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는데 이윽고 환속(還俗)하여 소성 거사(小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고, 요석 공주(瑤石公主)를 맞이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하였고 장성함에 미쳐 두루 학문에 통했다. 방언(方言)으로써 구경(九經 - 사서 오경(四書五經))의 경의(經義)를 해석하였고, 후진(後進)을 교도(敎導)하였으며, 또 글을 잘 지었다.

○가을 7월 왕이 훙(薨)하니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였고 낭산(狼山)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이 즉위하였다.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사신을 보내어 전왕(前王)을 조제(吊祭)하고 신왕(新王)을 책봉(冊封)하여 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계林州都督)을 삼았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고쳐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삼았으니, 이(理) 자가 왕의 휘(諱)와 같기에 피휘(避諱)한 것이다.

○8월 대아찬(大阿飡) 원선(元宣)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승려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올렸다.

○의학 박사(醫學博士) 2인(人)을 두어 학생(學生)을 교수(敎授)하였는데 《본초(本草》?《갑을경(甲乙經》?《소문(素問》?《침경(針經》?《맥경(맥經》?《명당경(明堂經》?《난경(難經》으로서 업(業)을 삼았다. 또 율령전(律令典)에 박사(博士) 6인을 두었고, 수궁전(藪宮典)에 대사(大舍) 2인, 사(史) 2인을 두었다.

○사찬(沙飡) 강수(强首)가 졸(卒)하니 왕이 예(禮)를 갖추어 장사(葬事)를 지내게 하고 부의(賻儀)를 넉넉히 보내주었다. 그 아내가 상사(喪事)에 이를 모두 써버리고 양식이 핍절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벼[租] 1백 석(石)을 내려주니 사양하여 이르기를,

"첩(妾)은 미천(微賤)한 몸입니다. 남편이 생존하였을 때에 국은(國恩)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 비록 미망인(未亡人)이 되었지만 어찌 감히 다시 후(厚)한 물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갔다.

 

 

 

갑오년(甲午年; 694)

신라 효소왕 3년

당(唐)나라 사성 11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고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문영(文穎)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여름 4월 김인문(金仁問)이 당(唐)나라에서 졸(卒)하니 무후(武后)가 진도(震悼)하여 등급(等級)을 더하여 수의(?衣)를 내려주었고 조산대부 행사례시 대의서령(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과 판관 조산낭직 사례시(判官朝散郞直司禮寺) 모(某) 등을 시켜 관곽(棺槨)을 호송(護送)시키니, 왕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追贈)하였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도성(都城) 서원(西原)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김인문은 일곱 번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한 것이 모두 22년이었다.

○겨울 송악(松岳)?우잠(牛岑) 두 성(城)을 쌓았다.

 

 

 

을미년(乙未年; 695)

신라 효소왕 4년

당(唐)나라 사성 12년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자월(子月 - 11월)로서 정월(正月)을 삼았다.

○개원(愷元)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중시(中侍) 원선(元宣)이 나이 늙어 벼슬에서 사퇴(辭退)하였다.

○서시(西市)?남시(南市)를 설치하고 각기 감(監) 2인, 대사(大舍) 2인을 두었다.

○조부(調府)에 사(史) 2인을 더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병부사(兵部史)와 같았다.

 

 

 

병신년(丙申年; 696)

신라 효소왕 5년

당(唐)나라 사성 13년

 


봄 정월 이찬(伊飡) 당원(幢元)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여름 4월 신라의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

 

 

 

정유년(丁酉年; 697)

신라 효소왕 6년

당(唐)나라 사성 14년

 


○가을 7월 완산주(完山州)에서 상서로운 벼[嘉禾]를 올렸으니 다른 밭 이랑에서 나서 하나로 합친 이삭이었다.

○9월 임해전(臨海殿)에서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왕이 망덕사(望德寺)에 거둥하여 낙성회(落成會)를 베풀었다.

 

 

 

무술년(戊戌年; 698)

신라 효소왕 7년

당(唐)나라 사성 15년

 


봄 정월 이찬(伊飡) 체원(體元)을 우두주총관(牛頭州摠管)으로 삼았다.

○2월 서울[京都]에 지진(地震)이 있었고, 폭풍(暴風)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중시(中侍) 당원(幢元)이 나이 늙어 사퇴(辭退)하니 대아찬(大阿飡) 순원(順元)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3월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이 이르니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6월 황룡사(皇龍寺) 탑(塔)에 벼락이 쳤다.

○가을 7월 서울에 큰 물[大水]이 들었다.

○당(唐)나라에서 보원(寶元 - 옛 고구려왕 고장(高臧)의 손자)을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陞進)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城國王)을 봉(封)하였으며, 옛 안동부(安東部)를 내려주어 통솔하게 하였는데 가지 않았다.

 

 

 

기해년(己亥年; 699)

신라 효소왕 8년

당(唐)나라 사성 16년

 


봄 2월 흰 기운[白氣]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가을 7월 동해(東海)의 물이 5일 동안 붉었다.

○9월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그 소리가 왕도(王都)까지 들렸다.

○병고(兵庫) 안에서 북[鼓]과 뿔피리[角]가 저절로 울었다.

○창부(倉部)에 조사지(租舍知) 2인을 두었고 사(史) 1인을 더 두었다.

○당(唐)나라에서 옛 고구려왕 고장(高臧)의 손자 덕무(德武)로서 안동도독(安東都督)을 삼았다.

 

 

 

경자년(庚子年; 700)

신라 효소왕 9년

당(唐)나라 사성 17년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다시 인월(寅月 - 1월)로서 정월을 삼았다.

○여름 5월 이찬(伊飡) 경영(慶永)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고, 중시(中侍) 순원(順元)이 이에 연좌(連坐)되어 파면(罷免)되었다.

○6월 세성(歲星 - 목성(木星))이 달에 들어갔다.

 

 

 

신축년(辛丑年; 701)

신라 효소왕 10년

당(唐)나라 사성 18년

 


봄 2월 혜성(彗星)이 달에 들어갔다.

○여름 5월 영암군 태수(靈巖郡太守) 제일(諸逸)이 죄가 있으므로 곤장(棍杖)을 쳐서 해도(海島)에 유배(流配)시켰다.

 

 

 

임인년(壬寅年; 702)

신라 호소왕 11년

당(唐)나라 사성 19년

 


가을 7월 왕이 훙(薨)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우 융기(隆基)를 왕으로 세웠다. 시호(諡號)를 효소(孝昭)라 하였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거애(擧哀)하였으며 2일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어 조위(吊慰)하였으며 신왕(新王)을 책봉(冊封)하여 신라왕(新羅王)을 삼고 인하여 장군(將軍)과 도독(都督)의 칭호를 그대로 승습(承襲)하게 하였다.

○9월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문무관(文武官)의 작위를 1급(級)씩을 승진시켰으며 여러 주군(州郡)의 1년 동안의 조세(租稅)를 면제하였다.

○아찬(阿飡) 원훈(元訓)으로서 중시(中侍)를 삼았다.

○겨울 10월 삽량주(?良州)에서 도토리 열매가 밤[栗]으로 변(變)하였다.

 

 

 

계묘년(癸卯年; 703)

신라 성덕왕 2년

당(唐) 나라 사성 20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였다.

○신라에서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가을 7월 영묘사(靈廟寺)가 불에 탔다.

○서울[京都]에 큰 물[大水]이 들어서 죽은 자가 많았다.

○중시(中侍) 원훈(元訓)이 나이 늙어 사퇴하니 아찬(阿飡) 원문(元文)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

○아찬(阿飡) 김사양(金思讓)을 당(唐)나라에 보냈다.

○위화부(位和府)에 상당(上堂) 1인을 더 두었다.

 

 

 

갑진년(甲辰年; 704)

신라 성덕왕 3년

당(唐)나라 사성 21년

 


봄 정월 웅천주(熊川州)에서 황금(黃金) 및 영지(靈芝)를 진상(進上)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김대문(金大問)을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으로 삼았다. 김대문은 본래 귀족(貴族)이었는데 일찍이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 등 약간권(若干卷)을 지었다.

 

 

 

을사년(乙巳年; 705)

신라 성덕왕 4년

당(唐)나라 신룡(神龍) 원년

 


봄 정월 중시(中侍) 원문(元文)이 졸(卒)하니 아찬(阿飡) 신정(信貞)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3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노인(老人)들에게 주식(酒食)을 내려주었다.

○9월 하교(下敎)하여 도살(屠殺)을 금지하였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나라의 동쪽 주군(州郡)에 기근(饑饉)이 들어 유망(流亡)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진휼(賑恤)하였다.

 

 

 

병오년(丙午年; 706)

신라 성덕왕 5년

당(唐)나라 신룡 2년

 


봄 정월 이찬(伊飡) 인품(仁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나라 안에 기근(饑饉)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해주었다.

○3월 뭇 별[衆星]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중시(中侍) 신정(信貞)이 신병(身病)으로 면직되니 대아찬(大阿飡) 문량(文良)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곡식이 흉작(凶作)이었다.

○겨울 10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12월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정미년(丁未年; 707)

신라 성덕왕 6년

당(唐)나라 경룡(景龍) 원년

 


봄 정월 굶주려 죽는 백성이 많았으므로 곡식을 주어 구제하되 사람마다 하루에 3승(升)씩을 지급(支給)하였다.

○2월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였고, 백성들에게 곡식의 종자(種子)를 차등을 두어 내려두었다.

○겨울 1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708)

신라 성덕왕 7년

당(唐)나라 경룡 2년

 


봄 정월 사벌주(沙伐州)에서 상서로운 영지(靈芝)를 진상(進上)하였다.

○2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4월 진성(鎭星 - 토성(土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기유년(己酉年; 709)

신라 성덕왕 8년

당(唐)나라 경룡 3년

 


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白鷹]를 바쳤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6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죄수를 놓아주었다.

 

 

 

경술년(庚戌年; 710)

신라 성덕왕 9년

당(唐)나라 경룡 4년, 경운(景雲) 원년

 


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지진(地震)이 있었다.

○죄수를 놓아주었다.

 

 

 

신해년(辛亥年; 711)

신라 성덕왕 10년

당(唐)나라 경운 2년

 


봄 3월 큰 눈이 내렸다.

○여름 5월 도살(屠殺)을 금지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을 순행(巡行)하였다.

○중시(中侍) 문량(文良)이 졸(卒)하였다.

○11월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群臣)에게 보였다.

○1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자년(壬子年; 712)

신라 성덕왕 11년

당(唐)나라 태극(太極) 원년, 연화(延和) 원년

 


봄 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3월 이찬(伊飡) 위문(魏文)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당(唐)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보내어 칙령(勅令)으로 왕의 이름 <융기(隆基)를> 고치게 하였으므로 흥광(興光)이라 개명(改名)하였으니, 당 현종(唐玄宗)의 이름( - 융기(隆基))을 피(避)한 것이다.

○여름 4월 왕이 온천[溫水]에 거둥하였다.

○가을 8월 김유신(金庾信)의 처(妻)를 봉(封)하여 부인(夫人 - 작명(爵名))을 삼았다. 이때에 부인이 삭발(削髮)하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평안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은혜인데, 부인이 경계(儆戒)하고 도와주어 음공(陰功)이 또한 많았으니, 과인(寡人)이 잠시도 마음에 잊을 수 없어 그 은공(恩功)을 보답하고자 하노라."

하고, 매년(每年) 남성(南城)의 조곡(租穀) 1천 석(石)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계축년(癸丑年; 713)

신라 성덕왕 12년

당(唐)나라 개원(開元) 원년

 


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여 예부(禮部)에 소속시키고 감(監) 1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내마(奈麻)에서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당 현종이 누문(樓門)에 나와서 사신을 인견(引見)하였다.

○겨울 10월 당 현종(唐玄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장군 특진행좌위위대장군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驃騎將軍特進行坐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계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을 삼았다.

○겨울 10월 중시(中侍) 위문(魏文)이 나이 늙어 사퇴(辭退)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개성(開城)을 쌓았다.

 

 

 

갑인년(甲寅年; 714)

신라 성덕왕 13년

당(唐)나라 개원 2년

 


봄 정월 이찬(伊飡) 효정(孝貞)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로 삼아 사명(詞命)12)에 관한 일을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왕자(王子) 수충(守忠)을 당(唐)나라에 들여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현종이 수충에게 제택(第宅)과 포백(布帛)을 내려주어 총애(寵愛)하였으며, 또 조당(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윤(閏) 2월 급찬(級飡) 박유(朴裕)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현종이 조산대부 원외봉어(朝散大夫員外奉御)를 제수(除授)하였다.

○여름 가뭄이 들었고 역질(疫疾)을 앓는 자가 많았다.

○가을 삽량주(?良州)에서 상수리[橡實]가 변하여 밤[栗]이 되였다.

○겨울 10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연회를 베풀어주고 재신(宰臣) 및 4품(品) 이상 청관(淸官)에 신칙하여 참여하게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715)

신라 성덕왕 14년

당(唐)나라 개원 3년

 


봄 2월 김풍후(金楓厚)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청주(菁州)에서 흰 참새[白雀]를 진상(進上)하였다.

○5월 죄수를 놓아주었다.

○6월 큰 가뭄이 들었으므로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 거사(龍鳴嶽居士) 이효(理曉)를 불러들여 임천사(林泉寺) 연못 가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였는데 열흘 동안이나 비가 내렸다.

○가을 9월 태백성(太白星)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다.

○겨울 10월 유성(流星)이 자미성(紫微星)를 범(犯)하였다.

○12월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으로부터 태미성(太微星)에 들어갔다.

○죄수를 놓아주었다.

○왕자(王子) 중경(重慶)을 봉(封)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다.

 

 

 

병진년(丙辰年; 716)

신라 성덕왕 15년

당(唐)나라 개원 4년

 


봄 정월 유성(流星)이 달을 범하니 달이 빛을 잃었다.

○3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성정 왕후(成貞王后 - 성덕왕의 전비(前妃))를 궁중(宮中)에서 내보내어 딴 저택(邸宅)에 거주하게 할제, 채단(彩緞) 5백 필(疋), 전지(田地) 2백 결(結), 조(租) 1만 석(石)을 내려주었다.

○폭풍(暴風)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렸으며 숭령전(崇寧殿)이 허물어졌다.

○하정사(賀正使) 김풍후(金楓厚)가 당나라에서 돌아올제 당 현종이 원외랑(員外郞)을 제수(除授)하였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으므로 왕이 또 이효(理曉)를 불러들여 기도(祈禱)를 하게 하니 곧 비가 내렸다.

○죄수를 놓아주었다.

 

 

 

정사년(丁巳年; 717)

신라 성덕왕 16년

당(唐)나라 개원 5년

 


봄 2월 의학박사(醫學博士)?산학박사(算學博士) 각 1원(員)을 두었다.

○3월 신궁(新宮)을 창건(創建)하였다.

○여름 4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6월 태자(太子) 중경(重慶)이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효상(孝상)이라 하였다.

○가을 9월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 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과 10철(哲) 72제자(弟子)13)의 화상(畵像)을 올리니 대학(大學)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였다.

 

 

 

무오년(戊午年; 718)

신라 성덕왕 17년

당(唐)나라 개원 6년

 


봄 정월 중시(中侍) 효정(孝貞)이 사퇴(辭退)하니 파진찬(波珍飡) 사공(思恭)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2월 왕이 나라의 서쪽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고 고령자(高齡者)와 환?과?고?독(鰥寡孤獨 - 늙은 홀아비?과부, 고아와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직접 위문(尉問)하였으며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었다.

○3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6월 황룡사(皇龍寺) 탑(塔)에 벼락이 쳤다.

○비로소 누각(漏刻 - 물시계)를 만들고 누각전(漏刻典)에 박사(博士) 6인과 사(史) 1인을 두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10월 유성(流星)이 묘수(昴宿)으로부터 규수(奎宿)에 들어가니 뭇 잔별들이 따랐으며, 천구성(天狗星)이 간방(艮方 - 동북방)에 떨어졌다.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의 관내(管內)에 여러 성(城)을 쌓았다.

○연사전(烟舍典)을 설치하고 간옹(看翁) 1인을 두었다. 또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고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에 감랑(監郞) 각 1인, 대내마(大奈麻) 각 1인, 대사(大舍) 각 2인, 사지(舍知) 각 1인을 두었으며, 양부(梁部)에 사(史) 6인, 사량부(沙粱部)에 사(史) 5인을 두었다. 본피부(本彼部)에 감랑(監郞) 1인, 감대사(監大舍) 1인, 사지(舍知) 1인, 감당(監幢) 5인, 사(史) 1인을 두었고, 모량부(牟粱部)에 감신(監臣) 1인, 대사(大舍) 1인, 사지(舍知) 1인, 감당(監幢) 5인, 사(史) 1인을 두었으며, 한지부(漢祗部)와 습비부(習比部)에 감신(監臣) 각 1인, 대사(大舍) 각 1인, 사지(舍知) 각 1인, 감당(監幢) 각 3인, 사(史) 각 1인을 두었다. 또 식척전(食尺典)을 설치하여 대사(大舍) 6인, 사(史) 6인을 두었고, 직도전(直徒典)을 설치하여 대사(大舍) 6인, 사지(舍知) 8인, 사(史) 26인을 두었으며, 고관가전(古官家典)을 설치하여 당(幢) 4인, 구척(鉤尺) 6인, 수주(水主) 6인, 화주(禾主) 15인을 두었다.

 

 

 

기미년(己未年; 719)

신라 성덕왕 18년

당(唐)나라 개원 7년

 


봄 정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였다.

○발해군왕(渤海郡王) 대조영(大祚榮)이 졸(卒)하였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니, 곧 고구려의 별종(別種)인데, 대조영의 아비 걸걸중상(乞乞仲象)이 그 도당(徒黨)과 더불어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확보(確保)하였다. 걸걸중상이 죽으니 대조영이 뒤를 계승(繼承)하였는데 용맹이 뛰어나고 기사(騎射)에 능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잔당(殘黨)들이 점차 그에게로 귀부하였다.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震旦)이라 호(號)하였는데 선천(先天 - 당 현종때 연호) 연간(年間)에 그로서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을 제수(除授)하고 그 통솔(統率)한 바로써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을 삼았으니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의 호(號)를 버리고 발해(渤海)라 일컬었다. 이에 이르러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시(私諡)하기를 고(高)라고 하였다. 왕자(王子) 무예(武藝)가 뒤를 이었는데 영토를 크게 개척(開拓)하니 동북방의 여러 이족(夷族)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이에 사사로이 연호(年號)를 고쳐 인안(仁安)이라 하였고 드디어 해동 성국(海東盛國)이 되었으니 그 역내(域內)에 5경(京)?15부(府)?62주(州)가 있었다.

 

 

 

경신년(庚申年; 720)

신라 성덕왕 19년

당(唐)나라 개원 8년

 


봄 정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상대등(上大等) 인품(仁品)이 졸(卒)하니 대아찬(大阿飡) 배부(裵賦)로서 상대등을 삼았다.

○3월 왕이 이찬(伊飡)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王妃)를 삼았다.

○여름 4월 큰비가 내려 13군데 산사태가 났으며, 우박이 내려 모[苗]를 해쳤다.

○완산주(完山州)에서 흰 까치[白鵲]를 바쳤다.

○6월 왕비(王妃)를 책봉하여 왕후(王后)로 삼았다.

○가을 7월 웅천주(熊川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황충(蝗蟲)이 곡식을 해쳤다.

○중시(中侍) 사공(思恭)이 사퇴(辭退)하니 파진찬(波珍飡) 문림(文林)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신유년(辛酉年; 721)

신라 성덕왕 20년

당(唐)나라 개원 9년

 


가을 7월 하슬라도(何瑟羅道)의 정부(丁夫)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변경(邊境)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천문박사(天文博士)를 두었는데 뒤에 사천박사(司天博士)로 고쳤다.

 

 

 

임술년(壬戌年; 722)

신라 성덕왕 21년

당(唐)나라 개원 10년

 


봄 정월 중시(中侍) 문림(文林)이 졸(卒)하니 이찬(伊飡) 선종(宣宗)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2월 서울[京都]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가을 8월 비로소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겨울 10월 대내마(大奈麻) 김인일(金仁壹)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고 겸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

○각간(角干) 원진(元眞)을 보내어 모벌군(毛伐郡)에 성(城)을 쌓아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둘레가 6천 7백 92보(步) 5척(尺)이었다.

 

 

 

계해년(癸亥年; 723)

신라 성덕왕 22년

당(唐)나라 개원 11년

 


봄 3월 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미녀(美女) 포정(抱貞)과 정원(貞?)을 바쳤는데 포정은 내마(奈麻) 천승(天承)의 딸이요, 정원은 대사(大舍) 충훈(忠訓)의 딸이니, 모두 성장(盛裝)을 갖추어 보냈다. 이에 당 현종(唐玄宗)이 말하기를,

"이 처녀들은 모두 왕의 고종 자매(姑從姉妹)로서 친척(親戚)과 이별하고 고향(故鄕)을 떠나왔으므로 내가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물품을 후하게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 4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果下馬) 1필(匹)과 우황(牛黃)?인삼(人蔘)?미체(美? - 여자의 머리에장식하는 다리)?조하주(朝霞紬 - 신라 특산의 비단)?어아주(魚牙紬 - 신라 특산의 비단)?누응령(鏤鷹鈴 - 무늬를 아로새긴 매 방울)?해표피(海豹皮)?금은(金銀) 등을 바치고 글월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臣)의 나라는 바다 구석에 있고 땅은 먼 곳에 위치하기에 원래 천객(泉客)의 보배14)도 없고, 본래 종인(?人)의 재화15)도 부족합니다. 이에 감히 토산의 물화를 가지고 천자의 관속을 욕되게 하고 노둔한 망아지로 천자의 마굿간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연시(燕豕)16)의 어리석음에 견줄지어정 어찌 초계(楚鷄)17)의 정성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려워서 땀이 납니다."

하였다.

○지진(地震)이 있었다.

 

 

 

갑자년(甲子年; 724)

신라 성덕왕 23년

당(唐)나라 개원 12년

 


봄 승경(承慶)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웅천주(熊川州)에서 상서로운 영지(靈芝)를 올렸다.

○2월 김무훈(金武勳)을 당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였다. 김무훈이 돌아올제 당 현종(唐玄宗)이 칙서(勅書)를 내려 이르기를,

"경(卿)이 매양 정삭(正朔)을 받들고 궐정(闕庭)에 조공하니 그 정성을 생각컨대 심히 가상하다. 또 보낸 바 여러 가지 물품을 받았는데 이는 모두 거친 바다와 험준한 고개를 넘어왔으며 물건이 정결하니 깊이 경의 마음을 나타냈다. 이제 경에게 금포(錦袍)?금대(金帶) 및 채색 비단[綵絹]?흰 비단[素絹]을 보내어 갸륵한 정성에 보답하니 물건이 도착하거던 영수(領受)하기 바란다."

하였다.

○겨울 1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소덕 왕비(炤德王妃)가 졸(卒)하였다.

 

 

 

을축년(乙丑年; 725)

신라 성덕왕 24년

당(唐)나라 개원 13년

 


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중시(中侍) 선종(宣宗)이 퇴직(退職)하니 이찬(伊))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병인년(丙寅年; 726)

신라 성덕왕 25년

당(唐)나라 개원 14년

 


여름 4월 김충신(金忠臣)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였다.

○5월 왕제(王弟) 근질(?質)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현종(唐玄宗)이 그에게 낭장(郞將)의 벼슬을 주어 돌려보냈다.

 

 

 

정묘년(丁卯年; 727)

신라 성덕왕 26년

당(唐)나라 개원 15년

 


봄 정월 죄수를 놓아주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였다.

○여름 4월 일길찬(一吉飡) 위원(魏元)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삼고, 급찬(級飡) 대양(大讓)을 사찬(沙飡)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영창궁(永昌宮)을 수리(修理)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裵賦)가 나이 늙어 퇴직(退職)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杖)을 내려주었다.

 

 

 

무진년(戊辰年; 728)

신라 성덕왕 27년

당(唐)나라 개원 16년

 


가을 7월 왕제(王弟) 사종(嗣宗)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고 겸하여 글월을 올려 자제(子弟)를 당나라에 보내어 국학(國學)에 입학(入學)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허락하고 사종에게 과의(果毅)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배부(裵賦)가 나이 늙어 퇴직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찬(伊飡) 사공(思恭)으로서 상대등을 삼았다.

 

 

 

기사년(己巳年; 729)

신라 성덕왕 28년

당(唐)나라 개원 17년

 


봄 정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경오년(庚午年; 730)

신라 성덕왕 29년

당(唐)나라 개원 18년

 


봄 2월 왕족(王族) 지만(志滿)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작은 말[小馬] 5필(匹), 개[狗] 1 마리, 황금 2천 냥(兩), 두발(頭髮 - 다리) 80냥, 해표피(海豹皮) 10장(張)을 바쳤다. 이에 당 현종(唐玄宗)이 지만에게 태복 경(太僕卿)을 제수(除授)하였고 비단(緋緞) 1백 필(疋), 자포(紫袍), 금대(錦帶)를 내렸으며 인하여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당 현종(唐玄宗)이 사신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었다.

 

 

 

신미년(辛未年; 731)

신라 성덕왕 30년

당(唐)나라 개원 19년

 


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賀禮)하니 당 현종이 그에게 태복 소경 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를 제수(除授)하였고 비단(緋緞) 60필(疋)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진상한 우황(牛黃) 및 금?은(金銀) 등의 물품은 표문(表文)을 살펴보고 갖추어 알았다. 경(卿)은 이명(二明 - 신라 시조 혁거세와그 왕비 알영을 말함)이 축복(祝福)을 내렸고 삼한(三韓)으로 좋은 이웃을 삼았으니 당시에 인의(仁義)의 고장이라는 칭호가 있었고 대대(代代)로 공훈과 현덕(賢德)의 업적을 나타냈다. 문장(文章)과 예악(禮樂)은 군자(君子)의 풍채를 드러냈고 정성과 충성은 근왕(勤王 - 왕사(王事)에 힘씀)의 절조(節操)를 다하였다. 진실로 번방(藩邦)의 진위(鎭衛)이며 충의(忠義)의 의표(儀表)이니 수방(殊方 - 이역(異域))의 사나운 풍속과 어찌 한가지 예(例)로 논하겠는가? 더구나 의(義)를 사모함이 매우 부지런하였고 직사(職事)를 닦음이 근실(謹實)하였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험하고 먼 길을 왕래함에 게으름이 없었으며, 폐백(幣帛)과 보화(寶貨)를 바치기를 해마다 한결같이 하였다. 우리 왕도(王度 - 국법(國法))를 지켜 나라의 사책(史策)에 올렸으니 그 간곡한 정성을 돌아보매 심히 가상하다. 짐(朕)이 매양 새벽에 일어나 서서 생각에 잠기고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어진이를 기다렸다. 그 사람을 보게 된다면 마음을 열어 빛나게 하리로다. 경(卿)을 만나기를 기다려 의지하는 바가 될까 하였는데 이제 사신이 와서 그대가 질병으로 인하여 명(命)에 따르지 못함을 알았으니 멀리서 격조(隔阻)함을 생각하매 근심이 더할 뿐이다. 절후(節候)가 점차 온화해지니 아마도 쉬 회복이 되리로다. 이제 경에게 능채(綾綵) 5백 필(疋)과 백(帛) 2천 5백 필을 내리니 영수(領需)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여름 4월 죄수를 놓아주고 노인(老人)들에게 주식(酒食)을 내려주었다.

○일본국이 병선(兵船) 3백 척(隻)으로 바다를 건너 나라의 동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군병을 출동시켜 크게 격파하였다.

○가을 9월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거노(車弩)의 사격(射擊)을 관람하게 하였다.

 

 

 

임신년(壬申年; 732)

신라 성덕왕 31년

당(唐)나라 개원 20년

 


겨울 12월 각간(角干) 사공(思恭)과 이찬(伊飡)?정종(貞宗)?윤충(允忠)?사인(思仁)으로서 각기 장군(將軍)을 삼았다.

○주작전(周作典)에 영(令) 5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대각간(大角干)까지가 이를 맡았다.

 

 

 

계유년(癸酉年; 733)

신라 성덕왕 32년

당(唐)나라 개원 21년

 


가을 7월 발해(渤海)와 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에 침범하니 당 현종(唐玄宗)이 태복 원외랑(太僕員外郞)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돌려보내고 인하여 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제수하였으며 군병을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게 하고 유시(諭示)하기를,

"말갈과 발해는 겉으로는 번방(蕃邦)이라고 일컫고 있으나 속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군병을 보내어 문죄(問罪)하고자 하니 경(卿)도 또한 군병을 동원시켜 응원(應援)의 형세를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당 현종이 또 말하기를,

"듣건대, 옛날 명장(名將) 김유신(金庾信)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이 현명(賢明)하다 하니 장수를 삼아 보내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김윤중에게 금백(金帛)을 내려주었다. 이에 왕이 김윤중 등 네 장수에게 명하여 군병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와 연합(聯合)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큰 눈이 한 길[丈] 남짓 내려 산 길이 막히고 험하여 사졸들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태반이 넘으니 아무런 공로도 없이 되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신라의 왕족(王族)으로서 앞서 당나라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禮儀)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는바 이때에 이르러 돌아오게 되었다. 김윤중은 김유신의 적손(嫡孫)이므로 왕이 특별히 발탁하여 대아찬(大阿飡)을 삼고 총애(寵愛)하여 예우(禮遇)하니 왕의 친속(親屬)들이 심히 질투하였다. 왕이 일찍이 월성(月城)에 올라 종관(從官)들과 더불어 주연(酒宴)을 베풀고 풍악을 울리며 즐거워할제 김윤중을 불러들여 주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에 좌우(左右)에서 말하기를,

"지금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 외척(外戚))에 어찌 사람이 없어서 유독 소원(疏遠)한 신하를 불러들이십니까? 신 등은 저으기 괴상하게 여깁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오늘날 과인(寡人)이 경(卿) 등과 더불어 태평 세월(泰平歲月)을 누리는 것은 김유신의 공덕(功德)이니, 만약 그 후손을 멀리한다면 착한 자를 잘 대우하고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의리를 어긋난다."

하고, 드디어 김윤중에게 자리를 주어 앉게 하였으며, 김유신의 공훈을 이야기하고 절영산(絶影山) 소산(所産)의 말 1필(匹)을 내려주었다.

○겨울 12월 왕질(王姪) 지렴(志廉)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작은 말[小馬] 2필(匹), 개[狗] 3 마리, 황금 5백 냥(兩), 은(銀) 2천 냥, 면포(綿布) 60필(疋), 우황(牛黃) 20냥, 인삼(人蔘) 2백 근(斤), 두발(頭髮다리) 1백 냥, 해표피(海豹皮) 16장(張)을 바쳤다. 이에 앞서 당 현종(唐玄宗)이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와 자라수포(紫羅繡袍)?금은전기물(金銀鈿器物)?서문금(瑞文錦)?오색라채(五色羅綵) 모두 3백여 단(段)을 보내왔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왕이 글월을 올려 사례하였으니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폐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기원(紀元)을 열었으니 성문(聖文)과 신무(神武)를 겸하였으며 천년의 창성한 운수(運數)에 응하였고 아름다운 상서를 이루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통(通)하는 곳에는 모두 지극한 덕화(德化)를 받들었으며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함께 깊은 인애(仁愛)를 입었습니다. 신(臣)은, 땅이 봉호(蓬壺)18)를 격(隔)하였으나 황은(皇恩)이 멀리까지 미쳤고, 고장은 중원(中原)과 떨어져있으나 어진 은택이 어두운 데까지 미쳤습니다. 엎드려 조서(詔書)를 배독(拜讀)하고 옥갑(玉匣)을 열어보니 구천(九天)의 우로(雨露)를 머금었고 오채(五彩) 원란(鴛鸞 - 원추새와 난새. 모두 봉황의 일종임)의 무늬를 띠고 있었습니다. 말 잘하고 영리한 앵무새는 푸르고 흰 한쌍의 암수였는데, 혹자는 장안(長安 - 당나라 서울)의 애완물(愛玩物)이라 일컬었고, 혹자는 성주(聖主)의 은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금(羅錦)의 채색 비단과 금은(金銀)으로 장식(粧飾)한 기물(器物)은 보는 자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자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원래 정성을 바친 공효(功效)는 선조(先祖)로부터 말미암았는데, 이 비상(非常)한 은총을 내린 것이 후손(後孫)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충성이 티끌과 같은데 황제의 중은(重恩)은 산악(山嶽)과 같았으니 처지를 따라 분수를 헤아리건대 무엇으로써 상답(上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당 현종이 명을 내려 지렴을 내전(內殿)에서 접대하고 비단 묶음을 내려주라고 하였다.

○주작전(周作典)에 경(卿) 6인을 두었으니 위계(位階)는 집사시랑(執事侍郞)과 같았다.

 

 

 

갑술년(甲戌年; 734)

신라 성덕왕 33년

당(唐)나라 개원 22년

 


봄 정월 왕이 백관(百官)에게 하교하여 북문(北門)에 들어와 진언(進言)하게 하였다.

○김충신(金忠信)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있었는데 좌영군위 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을 제수하니 김충신이 글월을 올려 이르기를,

"신(臣)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본즉 신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본국(本國)에 돌아가 군병을 동원하여 말갈(靺鞨)을 토벌하게 하였으며 일이 있으면 연달아 주달(奏達)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성지를 받들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기로 맹서하였는데 때마침 교대하려고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으매 곧 신을 숙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신의 본국 왕은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궐정(闕庭)에서 시위(侍衛)하였으므로 다시 종질(從姪) 지렴(志廉)을 보내어 신과 교대하게 하여 지금 이미 이르렀으니 신은 곧 환국(還國)함이 마땅하온대 매양 전에 받든 바 성지를 생각하며 아침 저녁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앞서 성지(聖旨)를 내려 본국왕 흥광(興光 - 성덕왕의이름)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벼슬을 더하고 정절(旌節 - 기치(旗幟)와 부절(符節))을 주어 흉포(凶暴)한 적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황위(皇威)가 임(臨)하는 곳은 비록 멀더라도 오히려 가까우며 임금께서 명령이 있으면 신하가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저 오랑캐들은 생각컨대 이미 앙화를 뉘우칠 것입니다. 그러나 흉악을 제거하려면 뿌리를 뽑아야 하며 법령을 펴고자하면 혁신(革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하는 의리는 세 번의 승리(勝利) 보다 귀중하고 적(敵)을 놓아주는 폐단은 수대(數代)에까지 끼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臣)의 환국(還國)을 기회로 삼아 부사(副使)의 직책을 신에게 빌려주시어 성지(聖旨)를 다시 먼 지방에 선포(宣布)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위엄을 떨칠 뿐이겠습니까? 또한 무부(武夫)들이 기운을 얻어 그 소굴(巢窟)을 뒤엎고 이 동쪽 변방을 편안하게 할 것이니 신의 미성(微誠)이 이루워지고 국가에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이에 신 등이 다시 배를 타고 창해(滄海)를 건너 구중궁궐(九重宮闕)에 승첩(勝捷)을 고(告)하고 털끝만한 공효(功效)나마 이룩하여 우로(雨露)의 홍은(鴻恩)에 보답함이 신의 소망이오니 오직 폐하께서는 도모하시옵소서."

하니, 당 현종이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여름 4월 대신(大臣)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니 당 현종이 한가로운 틈을 타서 내전(內殿)에서 접견(接見)하였고 위위 소경(衛尉少卿)을 제수하였으며 비란포(緋)袍)?평만은대(平漫銀帶) 및 견(絹) 60필(疋)을 내려주었다. 또 지렴(志廉)에게는 홍로 소경 원외치(鴻?少卿員外置)를 제수하였다.

 

 

 

을해년(乙亥年; 735)

신라 성덕왕 34년

당(唐)나라 개원 23년

 


봄 정월 형혹성(熒惑星 - 화성(火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2월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唐)나라에서 졸(卒)하니 광록 소경(光祿少卿)을 증직(贈職)하였고, 김의충이 돌아올제 조칙(詔勅)을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에 획급(劃給)하였다.

 

 

 

병자년(丙子年; 736)

신라 성덕왕 35년

당(唐)나라 개원 24년

 


여름 6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고 인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진사(陳謝)하였으니 이르기를,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획급(劃給)한다>는 은칙(恩勅)을 받들었습니다. 신(臣)은 바다 구석에 있어 성조(聖朝)의 왕화(王化)를 입었는데 비록 단성(丹誠)으로 마음을 삼았으나 공효(功效)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충(貞忠)으로 일삼았으나 노고(勞苦)는 상(賞) 줄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를 내리고 일월(日月)과 같이 밝은 조서(詔書)를 보내어 신에게 강역(疆域)을 획급하고 신의 국토(國土)를 넓히게 하여 드디어 경지(耕地)를 개간(開墾)할 기일(期日)이 있고 백성들은 농상(農桑)에 힘쓸 곳을 얻었습니다. 신이 조칙(詔勅)의 은지(恩旨)를 받들고 크나큰 총애를 입었으니 분골 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위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겨울 11월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大阿飡) 김상(金相)을 당(唐)나라에 보냈는데 도중에서 죽었으니 당 현종이 심히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였다.

○이찬(伊飡) 윤충(允忠)?사인(思仁)?영술(英述)을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 두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펴보게 하였다.

○재성(在城)19)의 고루(鼓樓)에 개가 올라 3일 동안 짖었다.

 

 

 

정축년(丁丑年; 737)

신라 성덕왕 36년

당(唐)나라 개원 25년

 


○봄 2월 사찬(沙飡) 김포질(金抱質)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고 또 방물(方物)을 바쳤다.

○왕이 훙(薨)하니 태자(太子) 승경(承慶)이 즉위(卽位)하였고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였으며 이거사(移居寺)20) 남쪽에 장사(葬事)지냈다.

○죄수(罪囚)를 대사(大赦)하였다.

○3월 사정부(司正府)의 승(丞)과 좌?우 의방부(左右議方府)의 승(丞)을 모두 좌(佐)로 고쳤으니 왕의 휘(諱)를 범(犯)한 때문이었다.

○이찬(伊飡) 정종(貞宗)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阿飡) 의충(義忠)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여름 5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가을 9월 유성(流星)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겨울 10월 사찬(沙飡) 김포질(金抱質)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왔다.

○12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무인년(戊寅年; 738)

신라 효성왕 2년

당(唐)나라 개원 26년

 


봄 2월 당 현종(唐玄宗)이 성덕왕(聖德王)의 훙서(薨逝)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그리고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을 보내어 조제(吊祭)하게 하였고, 전왕(前王)에게 태자 태보(太子太保)를 증직(贈職)하였다. 사왕(嗣王)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을 삼았다. 형숙이 장차 출발하려 할 때 당 현종이 시서(詩序)를 짓고 태자(太子) 이하 백관들이 모두 시(詩)를 지어 보냈다. 당 현종이 형숙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거니와 자못 서기(書記)를 알아 중국(中國)과 유사(類似)한 점이 있다. 경(卿)은 돈유(惇儒)임으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경의(經義)를 연술(演述)하여 중국(中國) 유교(儒敎)의 융성(隆盛)함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둠으로 인하여 솔부 병조 참군(率府兵曹參軍) 양계응(楊季膺)에게 명하여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신라의 고수(高手)들이 모두 그 밑에 들었었다. 이에 왕이 형숙 등에게 금보(金寶)와 약물(藥物)을 후하게 주었다.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내려 왕비(王妃) 박씨(朴氏)를 책봉하였다.

○3월 김원현(金元玄)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여름 4월 당(唐)나라 사신 형숙이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등의 서적을 왕에게 바쳤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형숙이 신라에 올 때에 당 현종이 돈유(惇儒)라고 일컬으면서 마땅히 경의(經義)를 연술(演述)하여 중국(中國) 유교(儒敎)의 융성함을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형숙이 왕에게 바친 것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었다. 당 현종이 형숙에게 신라에 가서 유교(儒敎)의 융성함을 과시(誇示)하라고 하면서 또 바둑의 명수(名手)로서 부사(副使)로 삼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진(晉)나라에서 노자(老子)의 허무(虛無)의 도(道)를 숭상하고 또 바둑을 일삼아 공무(公務)를 폐지하고서 고상(高尙)한 취미로 삼아 드디어 중원(中原)이 멸망하였는데 이제 당 현종이 다시 그 전철(前轍)을 답습(踏襲)하였으니 어찌 천보(天寶)의 난(亂)21)을 모면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소부리군(所夫里郡)22)의 강물이 붉게 변하였다.

 

 

 

기묘년(己卯年; 739)

신라 효성왕 3년

당(唐)나라 개원 27년

 


봄 정월 왕이 조고묘(祖考廟)에 배알(拜謁)하였다.

○중시(中侍) 의충(義忠)이 졸(卒)하니 이찬(伊) 신충(信忠)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신충과 더불어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멸하기를,

"훗날 내가 너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도 또한 정조(貞操)를 고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이 잣나무와 같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왕이 즉위(卽位)하여 공신(功臣)을 수록(收錄)하였는데 신충을 빠뜨리니 신충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잣나무가 홀연히 말라 죽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살펴보다가 노래를 얻어 보고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하였다."

하고, 신충을 불러들여 벼슬을 내려주니 잣나무가 다시 소생(蘇生)하였다.

○선천궁(善天宮)을 이룩하였다.

○당(唐)나라 사신 형숙(邢璹)이 돌아가니 왕이 황금(黃金) 30냥(兩), 베[布] 50필(疋), 인삼(人蔘) 1백 근(斤)을 내려주었다.

○2월 왕제(王弟) 헌영(憲英)으로서 파진찬(波珍飡)을 삼았다.

○3월 왕이 이찬(伊飡)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여름 5월 파진찬(波珍飡) 헌영(憲英)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헌연은 왕의 동모제(同母弟)인데 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태자로 세운 것이다.

○가을 9월 완산주(完山州)에서 흰 까치[白鵲]를 바쳤다.

○여우가 월성(月城) 궁중(宮中)에서 울었다.

 

 

 

경진년(庚辰年; 740)

신라 효성왕 4년

당(唐)나라 개원 28년

 


봄 3월 당(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비(王妃) 김씨(金氏)를 책봉하였다.

○여름 5월 진성(鎭星 - 토성(土星))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범(犯)하였다.

○가을 7월 붉은 옷 입은 여인(女人)이 예교(隷橋) 아래에서 나와 조정(朝廷)의 정사(政事)를 비방(誹謗)하면서 효신문(孝信門)을 지나가더니 홀연히 간 곳이 없었다.

○8월 파진찬(波珍飡) 영종(永宗)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에 앞서 영종의 딸이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왕이 심히 사랑하여 은총(恩寵)이 날로 더하니 왕비(王妃)가 이를 질투하여 그 족당(族黨)과 더불어 죽이려고 꾀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와 그 족당을 원망하여 드디어 모반하게 된 것이다.

 

 

 

신사년(辛巳年; 741)

신라 효성왕 5년

당(唐)나라 개원 29년

 


여름 4월 대신(大臣) 정종(貞宗)?사인(思仁)에게 명하여 노병(弩兵)을 사열하게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742)

신라 효성왕 6년?경덕왕(景德王) 원년

당(唐)나라 천보(天寶) 원년

 


봄 2월 동북방(東北方)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여름 5월 유성(流星)이 삼대성(參大星)을 범(犯)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태자(太子) 헌영(憲英)이 즉위(卽位)하였다. 시호(諡號)를 효성(孝成)이라 하였으며, 유명(遺命)에 의하여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관(棺)을 불사르고 유해(遺骸)를 동해(東海)에 흩뿌렸다.

○겨울 10월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