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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12권-신라 경덕왕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9:46

국역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12권 한국사 일반

2008/05/1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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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 12권

 


계미년(癸未年; 743)

신라 경덕왕 2년

당(唐)나라 천보 2년

 


봄 3월 서울에서 소[牛]가 한 번에 송아지 다섯 마리를 낳았다.

○당(唐)나라에서 찬선 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신라에 보내어 <전왕(前王)을> 조제(吊祭)하고 인하여 신왕(新王)을 책봉(冊封)하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 그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고(故)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영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계林州諸軍事兼持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김헌영(金憲英)은 훌륭한 가문(家門)에 태어나 인덕(人德)을 간직하였고 상례(常禮)에 마음을 썼으니 대현(大賢 - 기자(箕子)를 말함)의 풍교(風敎)는 조리(條理)가 더욱 밝았으며 중화(中華)의 의식(儀式에 따라 의관(衣冠)의 제도(制度)를 승습(承襲)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고 먼 바다에 배를 띄워 입조(入朝)하였으니 대대(代代)로 순신(純臣)이 되었고 여러 번 충절(忠節)을 나타냈다. 저번에 그 형(兄)이 왕위(王位)를 이었는데 죽어 아들이 없으매 아우가 대신 뒤를 이엇으니 이것도 또한 상례(常例)이다. 이에 빈례(賓禮)를 써서 책명(冊命)을 내리는 바이니, 마땅히 구업(舊業)을 지켜 번장(藩長)의 이름을 계승(繼承)하도록 하라. 특례(特禮)를 더하여 한관(漢官)의 호(號)를 내리니 형(兄) 신라왕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의 관직을 승습(承襲)하라."

하고, 아울러 《어주효경(御註孝經》1부(部)를 증여(贈與)하였다.

○여름 4월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가을 8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겨울 12월 왕이 그 아우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니, 당 현종(唐玄宗)이 그에게 좌청도 솔부 원외장사(左淸道率府員外長史)를 제수하고 녹포(綠袍)와 은대(銀帶)를 주어 돌려보냈다.

 

 

 

갑신년(甲申年; 744)

신라 경덕왕 3년

당(唐)나라 천보 3년

 


봄 정월 이찬(伊飡) 유정(惟正)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윤(閏) 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祭祀)하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말을 바쳤다.

○겨울 요성(妖星)이 중천(中天)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말들이 그릇만 하였으며 열흘만에 사라졌다.

 

 

 

을유년(乙酉年; 745)

신라 경덕왕 4년

당(唐)나라 천보 4년

 


봄 정월 이찬(伊飡)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鷄卵)과 같았다.

○5월 가뭄이 들었다. 중시(中侍) 유정(惟正)을 면직(免職)하고 이찬(伊飡) 대정(大正)으로서 중시를 삼았다.

○가을 7월 동궁(東宮)을 수리(修理)하였다.

○사정부(司正府)?소년감전(少年監典)?예궁전(穢宮典)을 설치(設置)하였다.

 

 

 

병술년(丙戌年; 746)

신라 경덕왕 5년

당(唐)나라 천보 5년

 


봄 2월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여름 4월 죄수를 대사(大赦)하였고, 대포(大?)1)하였으며, 승려(僧侶) 1백 50인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내사정전(內司正典)을 설치하여 의결(議決) 1인, 정찰(貞察) 2인, 사(史) 4인을 두었다. 또 전대사전(典大舍典)을 설치하여 대사(大舍) 1인, 전옹(典翁) 1인, 사(史) 4인을 두었고, 또 상대사전(上大舍典)을 설치하여 상대사(上大舍) 1인, 상옹(上翁) 1인을 두었다.

 

 

 

정해년(丁亥年; 747)

신라 경덕왕 6년

당(唐)나라 천보 6년

 


봄 정월 집사성(執事省)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고쳤으니 위계(位階)는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이찬(伊飡)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또 집사성의 전대등(典大等)을 시랑(侍郞)으로 고쳤으니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아찬(阿飡)까지가 이를 맡았다. 국학(國學)에 제업 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은 왕도(王都)를 정(定)한 초두(初頭)에 비로소 학교(學校)를 세우고 가르침을 베품으로써 후손

들에게 아름다운 계책을 끼쳐주어 인재가 배출(輩出)하는 공효(功效)를 이룩하였으니 이에 교화가 크게 선포(宣布)되고 백성이 모두 복종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나라를 세운지 30대(代)가 지나서 신문왕(神文王) 원년(681)에 이르러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웠고, 성덕왕(聖德王) 15년(716년)에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선왕(文宣王공자(孔子)) 및 여러 제자(弟子)의 화상(畵像)을 구하여 왔으며, 성덕왕 26년(727)에 왕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이 <당나라에 들어가> 자제(子弟)의 입학(入學)을 청하였고, 경덕왕(景德王) 6년(747년)에 비로소 제업 박사(諸業博士)를 두었다. 강수(强首)와 설총(薛聰)의 무리는 문리(文理)에 통효(通曉)하여 방언(方言)으로써 구경(九經 -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강(講)하였고, 후학(後學)을 훈도(訓導)하여 당시 동방(東方)의 영걸(英傑)이 되었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최고운(崔孤雲)2)이란 자가 있어 영민(英敏)하고 학문을 좋아 하였으며 당(唐)나라에 유학(遊學)하였는데 당시의 제류(?流)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높이 칭송하였으니 천하(天下)의 명사(名士)라고 이를만 하였다. 삼국 시대에 있어 신라의 문헌(文獻)을 높이 평가(評價)하지만 당초 나라를 세울 때에 정령(政令)과 제도(制度)에 있어 문교(文敎)에 근본을 두지 않았고 그 후에 비록 중화(中華)의 풍교(風敎)를 사모하였으나 겨우 한두 가지 볼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니, 아! 또한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

하였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3월 진평왕(眞平王)의 능침(陵寢)에 벼락이 쳤다.

○가을 가뭄이 들었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민간(民間)에 기근(饑饉)이 들고 또 역질(疫疾)이 유행하니 10도(道)에 사자를 보내어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무자년(戊子年; 748)

신라 경덕왕 7년

당(唐)나라 천보 7년

 


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 태후(太后)3)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이거(移居)하였다.

○비로소 정찰(貞察) 1원(員)을 두어 백관(百官)의 기강(紀綱)을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阿飡) 정절(貞節) 등을 보내어 북쪽 변방을 시찰(視察)하게 하였고, 비로소 대곡성(大谷城) 등 14군현(郡縣)을 두었다.

 

 

 

기축년(己丑年; 749)

신라 경덕왕 8년

당(唐)나라 천보 8년

 


봄 2월 폭풍(暴風)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 박사(天文博士) 1원(員)과 누각 박사(漏刻博士) 6원을 두었다.

 


경인년(庚寅年; 750)

신라 경덕왕 9년

당(唐)나라 천보 9년

 


봄 정월 시중(侍中) 대정(大正)이 퇴직(退職)하니 이찬(伊飡) 조량(朝良)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2월 어룡성(御龍省)에 봉어(奉御) 2원(員)을 두었다.

 

 

 

임진년(壬辰年; 752)

신라 경덕왕 10년

당(唐)나라 천보 11년

 


봄 3월 급찬(級飡)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삼았다.

○가을 8월 동궁아관(東宮衙官)에 상대사(上大舍) 1인, 차대사(次大舍) 1인을 두었고, 어룡성(御龍省)에 대사(大舍) 2인, 치성(稚省) 6인을 두었으며, 세택(洗宅)에 대사(大舍) 4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고, 급장전(給帳典)에 전(典) 4인, 치(稚) 4인을 두었다. 승방전(僧房典)에 대사(大舍) 2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고, 포전(포典)에 대사(大舍) 2인, 사(史) 2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으며, 월지악전(月池嶽典)에 대사(大舍) 2인, 수주(水主) 1인을 두었고, 용왕전(龍王典)에 대사(大舍) 2인, 사(史) 2인을 두었다.

○겨울 10월 창부(倉部)에 사(史) 3인을 더 두었다.

 

 

 

계사년(癸巳年; 753)

신라 경덕왕 12년

당(唐)나라 천보 12년

 


가을 8월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는데, 오만 무례(傲慢無禮)하였므로 왕이 접견(接見)하지 않자 곧 돌아갔다.

○무진주(武珍州)에서 흰 꿩[白雉]을 바쳤다.

 

 

 

갑오년(甲午年; 754)

신라 경덕왕 13년

당(唐)나라 천보 13년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鷄卵)만 하였다.

○5월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우두주(牛頭州)에서 영지(靈芝)를 바쳤다.

○가을 7월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흥(永興)?원영(元迎) 두 사찰(寺刹)을 수리(修理)하게 하였다.

○8월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번졌다. 시중(侍中) 조량(朝良)이 사퇴(辭退)하였다.

○황룡사(皇龍寺)의 종(鐘)을 주조(鑄造)하였는데, 길이는 1장(丈) 3촌(寸)이요, 두께는 9촌이며, 무게는 49만 7천 5백 81근(斤)이었다.

 

 

 

을미년(乙未年; 755)

신라 경덕왕 14년

당(唐)나라 천보 14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이 굶주렸다.

○효자(孝子) 향덕(向德)의 문려(門閭 - 마을 입구에 있는 문)를 정표(旌表)4)하였다. 향덕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니, 그 아비 향선(向善)은 천품이 온량(溫良)하여 향리에서 그 조행(操行)을 추앙(推仰)하였고, 향덕도 또한 효순(孝順)으로서 당시에 칭송하는 바 되었다. 이때에 마침 흉년으로 인하여 민간에 기근(饑饉)이 들었고 역질마저 유행하였는데 부모가 굶주리고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看護)하였으며 봉양할 길이 없게 되자 허벅지의 살을 베어 끓여 먹였다. 또 어미에게 종기(?氣)가 나자 향덕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모두 완치(完治)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위에 알려지니 임금이 영(令)을 내려 벼[租] 3백 곡(斛), 택지(宅地) 1구(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었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碑)를 세워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불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송기(宋祈)의 《당서(唐書》에 의하면, "옳도다, 한유(韓愈)의 논평이여! 그가 이르기를, 「부모가 병이 들면 약재(藥材)를 다려서 올리는 것이 효도가 되는 것이거니와, 자신의 살을 베어 공양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이것이 의리에 손상이 되지 않는다면 성현(聖賢)께서 여러 사람에 앞서 이를 실천하였을 것이다. 만일 불행히 이로 인하여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의 몸을 손상시키고 후손을 끊어버린 죄악은 그에게 돌아갈 것이니 어찌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여 포장(褒?)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누추(陋醜)한 마을에서 학술(學術)과 예의(禮義)를 본받을 곳이 없는데도 그 몸을 잊어버리고 어버이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족히 칭송할만 하므로 이에 서술(敍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향덕과 같은 자도 또한 그 행적을 서책(書冊)에 기록할만 하다."

하였다.

○여름 4월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가을 7월 죄수를 놓아주였으며, 늙어 병든 자와 환?과?고?독(鰥寡孤獨 - 늙은 홀아비?홀어미, 고아 및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을 존문(存問)하고 차등을 두어 곡식을 내려주었다.

○이찬(伊飡) 김기(金耆)를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병신년(丙申年; 756)

신라 경덕왕 15년

당(唐)나라 천보 15년

 


봄 2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인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극론(極論)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에 있음을 듣고 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양자강(揚子江)을 거슬려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이에 당 현종이 십운시(十韻詩)를 몸소 짓고 수찰(手札)을 써서 왕에게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 예악(禮樂)과 명의(名義)를 실천(實踐)함을 가상히 여겨 시(詩) 한 수(首)를 보낸다."

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사방은 큰 위도로 나뉘어 있건만,                               四維分景緯

일만 형상은 중심을 생각하고 있다.                                萬象含中樞

조공하는 옥백은 천하에 두루 퍼져,                                玉帛遍天下

산 넘고 바다 건너 상도( - 천자가 있는 서울을 가리킴)로 모여든다. 梯航歸上都

생각건대, 신라는 먼 동쪽에 격조하였건만,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을 부지런히 섬겼도다.                       歲月勤黃圖

멀고 먼 땅 가 끝이요,                                            漫漫窮地際

아득한 바다 모퉁이에 연달았구나.                                 蒼蒼連海隅

명분과 예의의 나라라고 말하거니와,                               興言名義國

어찌 산천이 다르다 하리?                                        豈謂山河殊

사신이 가면 <중국의> 풍교를 전하였고,                           使去傳風敎

사행이 오면 전모를 배워갔다.                                     人來習典謨

의관은 예의를 받들 줄 알았고,                                    衣冠知奉禮

충신함으로 유교 숭상함을 알았노라.                               忠信識尊儒

진실로,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데,                             誠矣天其鑑

어질도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리.                          賢哉德不孤

깃발에 옹위되어 함께 백성을 다스렸는데,                          擁?同作牧

후한 예물은 한 묶음 싱싱한 꼴5)에 비기리로다.                     厚?比生?

푸르고 푸른 지조를 더욱 소중히 간직하여,                            益重靑靑志

거친 풍상에도 한결같이 변치 않으리."                               風霜恒不?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말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이 <난을 피해> 촉(蜀)으로 갔을 때에 신라에서 천리 길을 멀게 여기지 않고 행재소(行在所)에 조공하였으므로 당 현종이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詩)를 지어 내려주었다. 그 이른바 "푸르고 푸른 지조(志操)를 더욱 소중히 간직하여, 거친 풍상(風霜)에도 한결같이 변치 않으리로다.[益重靑靑志 風霜恒不?]" 라는 구절은 고시(古詩)에 이른바 "빠른 바람에 억센 풀을 알았고, 나라가 위태할 때에 곧은 신하를 알아본다.[疾風知勁草 板蕩識貞臣]"는 뜻이 어찌 아니겠는가? 선화(宣和 -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연간(1119~1125)에 고려(高麗)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십운시(十韻詩)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변경(?京)에 들어가 관반 학사(館伴學士) 이병(李?)에게 보이니, 이병이 이 사실을 위에 이뢰었다. 이에 송 휘종이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學士)에게 선시(宣示)한 다음 선포(宣布)하기를,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詩)는 참으로 당 명황(唐明皇 - 당 현종(唐玄宗))의 수필(手筆)이다."라고 하고는 찬탄(讚歎)해 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白狐]를 바치니 남쪽 변방의 으뜸가는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정유년(丁酉年; 757)

신라 경덕왕 16년

당(唐)나라 지덕 16년

 


봄 정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병으로 퇴직(退職)하니 이찬(伊飡) 신충(信忠)으로서 상대등을 삼았다.

○3월 내외(內外) 관리(官吏)들의 월봉(月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주었다.

○가을 7월 영창궁(永昌宮)을 수리(修理)하였다.

○8월 조부(調府)에 사(史) 2인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 9주(九州)를 두었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삼았고 1주(州) 10군(郡) 30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상주(尙州)는 영현(領縣)이 3이니 청효현(靑驍縣)은 본래 음리화현(音里火縣)이요, 다인현(多仁縣)은 본래 달기현(達己縣)인데 혹은 다기현(多己縣)이라 하였으며, 화창현(化昌縣)은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이다. 예천군(醴泉郡)은 본래 수주군(水酒郡)인데 영현(領縣)이 4이니 영안현(永安縣)은 본래 하지현(下枝縣)이며,  - 《고려사(高麗史》에는 우하지산(右下枝山)이라 하였고, 1본(本)에는 풍악(?岳)이라 하였다. 안인현(安仁縣)은 본래 난산현(蘭山縣)이요, 가유현(嘉猷縣)은 본래 근품현(近品縣)이고,  - 근(近)은 건(巾)이라고도 하며 《고려사》에는 품(品)을 암(岩)이라고 하였다. 은정현(殷正縣)은 본래 적아현(赤牙縣)이다. 고창군(古昌郡)은 본래 고타야군(古陀耶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직녕현(直寧縣)은 본래 일직현(一直縣)이요, 일계현(日谿縣)은 본래 열혜현(熱兮縣)이며,  - 혹은 이혜(泥兮)라고도 하였다. 고구현(高丘縣)은 본래 구화현(仇火縣)이다.  -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하였다. 문소군(聞韶郡)은 본래 소문국(召文國)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진보현(眞寶縣)은 본래 칠파화현(漆巴火縣)이요, 비옥현(比屋縣)은 본래 아화옥현(阿火屋縣)이며,  - 1본(本)에는 병옥(幷屋)이라 하였다. 안현현(安賢縣)은 본래 아시혜현(阿尸兮縣)이고,  - 1본(本)에는 아을혜현(阿乙兮縣)이라 하였다. 단밀현(單密縣)은  - 《고려사》에는 단밀(丹密)이라 하였다. 본래 무동미지(武冬彌知)이며, -  1본(本)에는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 하였다. 숭선군(嵩善郡)은 본래 일선군(一善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효령현(孝靈縣)은 본래 모혜현(芼兮縣)이요, 이동혜현(爾同兮縣)이 있으며, 군위현(軍威縣)은 본래 노동멱현(奴同覓縣)이다.  - 1본(本)에는 여두멱(如豆覓)이라 하였다. 개령군(開寧郡)은 옛날 감문 소국(甘文小國)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어모현(禦侮縣)은 본래 금물현(今勿縣)이요,  - 1본에는 음달(陰達)이라 하였다. 금산현(金山縣)이 있으며, 지례현(知禮縣)은 본래 지품천현(知品川縣)이요, 무풍현(茂?縣)은 본래 무산현(茂山縣)이다.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영현(領縣)이 2이니 양산현(陽山縣)은 본래 조비천현(助比川縣)이요, 황간현(黃澗縣)은 본래 소라현(召羅縣)이다. 관성군(管城郡)은 본래 고시산군(古尸山郡)인데 영현(領縣)이 2이니 이산현(利山縣)은 본래 소리산현(所利山縣)이요, 안정현(安貞縣)은 본래 아동혜현(阿冬兮縣)이다. 삼년군(三年郡)은 본래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영현(領縣)이 2이니 청천현(淸川縣)은 본래 살매현(薩買縣)이요, 기산현(耆山縣)은 본래 굴산현(屈山縣)이다. 《고려사》에는 돌산현(突山縣)이라 하였다. 고령군(古寧郡)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인데 신라에서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을 삼았으며,  - 1본에는 고릉현(古陵縣)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가선현(嘉善縣)은 본래 가해현(加害縣)이요, 관산현(冠山縣)은 본래 관현(冠縣)이며,  - 1본에는 관문현(冠文縣)이라 하였고, 《고려사》에는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 하였다. 호계현(虎溪縣)은 본래 호측현(虎側縣)이다.  - 《고려사》에는 배산성(拜山城)이라 하였다. 화령군(化寧郡)은 본래 답달비군(畓達匕郡)인데  - 1본에는 답달(畓達)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도량현(刀良縣)이다.

삽량주(?良州)를 양주(良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12군(郡) 34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양주(良州)는 영현(領縣)은 1이니 헌양현(獻陽縣)은 본래 거지화현(居知火縣)이다. 김해 소경(金海小京)은 옛날 금관국(金官國)이다.  - 1본에는 가락국(加洛國)이라 하였고 1본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하였다. 의안군(義安郡)은 본래 굴자군(屈自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칠제현(漆?縣)은 본래 칠토현(漆吐縣)이요, 합포현(合浦縣)은 본래 골포현(骨浦縣)이며, 웅신현(熊神縣)은 본래 웅지현(熊只縣)이다. 밀성군(密城郡)은 본래 추화군(推火郡)인데 영현(領縣)은 5이니 상약현(尙藥縣)은 본래 서화현(西火縣)이요, 밀진현(密津縣)은 본래 추포현(推浦縣)이며,  - 1본에는 죽산현(竹山縣)이라 하였다. 오구산현(烏丘山縣)은 본래 오야산현(烏也山縣)이며,  - 1본에는 구도(仇道)이라 하였고 1본에는 오례산(烏禮山)이라 하였다. 형산현(荊山縣)은 본래 경산현(驚山縣)이며, 소산현(蘇山縣)은 본래 솔이산현(率已山縣)이다. 화왕군(火王郡)은 본래 비자화군(比自火郡)인데  - 1본에는 비사벌(比斯伐)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현효현(玄驍縣)은 본래 추량화현(推良火縣)이다.  - 1본에는 삼량화(三良火)라 하였다. 수창군(壽昌郡)은  - 1본에는 수(壽)를 가(嘉)라고 하였다. 본래 위화군(火郡)이요,  - 《고려사》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4이니 대구현(大丘縣)은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이요, 팔리현(八里縣)은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이며,  - 1본에는 북치장리(北?長里)라 하였고 1본에는 인리(仁里)라 하였다. 하빈현(河濱縣)은 본래 다사지현(多斯只縣)이고,  - 1본에는 답지(畓只)이라고 하였다. 화원현(花園縣)은 본래 고화현(古火縣)이다. 장산군(獐山郡)은 영현(領縣)이 3이니 해안현(解顔縣)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이요,  - 1본에는 미리(美里)라 하였다. 여량현(餘粮縣)은 본래 마진량현(麻珍良縣)이며,  - 진(珍)은 미(彌)라고도 한다. 자인현(慈仁縣)은 본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다. 임고군(臨皐郡)은 본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영현(領縣)은 5이니 장진현(長鎭縣), 임천현(臨川縣)이요, 도동현(道同縣)은 본래 도동화현(刀冬火縣)이며, 신령현(新寧縣)은 본래 사정화현(史丁火縣)이고, 면백현(?白縣)은 본래 매열차현(買熱次縣)이다. 동래군(東萊郡)은 본래 칠산군(漆山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동평현(東平縣)은 본래 대증현(大甑縣)이요, 기장현(機張縣)은 본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다. 동안군(東安郡)은 본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우풍현(虞風縣)은 본래 우화현(于火縣)이다. 임관군(臨關郡)은 본래 모화(毛火)인데  - 1본에는 문화군(蚊化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浦縣)이요, 하곡현(河曲縣)이 있다.  - 1본에는 하서현(河西縣)이라 하였다. 의창군(義昌郡)은 본래 퇴화군(退火郡)인데 영현(領縣)은 6이니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비화현(比火縣)이요, 기립현(?立縣)은 본래 지답현(只畓縣)이며, 신광현(神光縣)은 본래 동잉음현(東仍音縣)이고,  - 《고려사》에는 신을(神乙)이라 하였다. 임정현(臨汀縣)은 본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며,  - 《고려사》에는 오량지현(烏良支縣)이라 하였다. 기계현(杞溪縣)은 본래 모혜현(芼兮縣)이고,  - 1본에는 화계현(化?縣)이라 하였다. 음집화현(音汁火縣)은 파사왕(婆娑王) 때에 음집벌국(音汁伐國)을 취(取)하여 현(縣)을 두었다. 대성군(大城郡)은 본래 구도성(仇刀城)의 경내(境內)에 있는 솔이산성(率伊山城)과 가산현(茄山縣)  - 1본에는 경산성(驚山城)이라 하였다. 및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성(城)이었으며, 약장현(約章縣)은 본래 악지현(惡支縣)이요, 동기정(東畿停)은 본래 모지정(毛只停)이다. 상성군(商城郡)은 본래 서형산군(西兄山郡)이요, 남기정(南畿停)은 본래 도품혜정(道品兮停)이며, 중기정(中畿停)은 본래 근내정(根乃停)이요, 서기정(西畿停)은 본래 두량미지정(豆良彌知停)이며, 북기정(北畿停)은 본래 우곡정(雨谷停)이요, 막야정(莫耶停)은 본래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이다.  - 1본에는 북아량(北阿良)이라고 하였다. -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삼았고 1주(州) 11군(郡) 27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강주(康州)는 지금의 진주(晉州)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가수현(嘉壽縣)은  - 《고려사》에 가수현(嘉樹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가주화현(加主火縣)이며, 굴촌현(屈村縣)이 있다. 남해군(南海郡)은 영현(領縣)이 2이니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요,  - 《고려사》에는 남해도(南海島)에 있다고 하였다.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이다.  - 1본에는 서평현(西平縣)이라 하였고, 《고려사》에는 남해도(南海島)에 있다고 하였다. 하동군(河東郡)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영현(領縣)이 3이니 성량현(省良縣)이요, 악양현(嶽陽縣)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며, 하읍현(河邑縣)은 본래 포촌현(浦村縣)이다. 고성군(固城郡)은 본래 고자군(古自郡)인데  - 《고려사》에는 소가야국(小加耶國)을 신라에서 취(取)하여 군(郡)을 두었다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문화량현(蚊火良縣)이요, 사수현(泗水縣)은 본래 사물현(史勿縣)이며, 상선현(尙善縣)은 본래 일선현(一善縣)이다. 함안군(咸安郡)은 영현(領縣)이 2이니 현무현(玄武縣)은 본래 소삼현(召參縣)이요, 의령현(宜寧縣)은 본래 장함현(獐含縣)이다. 거제군(巨濟郡)은 영현(領縣)이 3이니 아주현(鵝洲縣)은 본래 거로현(巨老縣)이요,  - 《고려사》에는 거제도(巨濟島)에 있다고 하였다 명진현(冥珍縣)은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며,  - 《고려사》에는 거제도에 있다고 하였다 남수현(南垂縣)은 본래 송변현(松邊縣)이다.  - 《고려사》에는 거제도에 있다고 하였다. 궐성군(闕城郡)은 본래 궐지군(闕支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단읍현(丹邑縣)은 본래 적촌현(赤村縣)이며, 산음현(山陰縣)은 본래 지품천현(知品川縣)이다. 천령군(天嶺郡)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이며 영현(領縣)이 2이니 운봉현(雲峰縣)은 본래 모산현(母山縣)이요,  - 혹은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한다.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마리현(馬利縣)이다. 거창군(居昌郡)은 본래 거열군(居烈郡)인데  - 혹은 거타(居?)라고도한다. 영현(領縣)은 2이니 여선현(餘善縣)은 본래 남내현(南內縣)이며, 함음현(咸陰縣)은 본래 가소현(加召縣)이다. 고령군(高靈郡)은 본래 대가야국(大加耶國)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야로현(冶爐縣)은 본래 적화현(赤火縣)이며, 신복현(新復縣)은 본래 가시혜현(加尸兮縣)이다. 강양군(江陽郡)은 본래 대량주군(大良州郡)인데  - 1본에는 대야주군(大耶州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삼기현(三岐縣)은 본래 삼지현(三支縣)이요,  - 1본에는 마장현(麻杖縣)이라 하였다. 팔계현(八谿縣)은 본래 초팔혜현(草八兮縣)이며, 의상현(宜桑縣)은 본래 신이현(辛爾縣)이다.  - 1본에는 주오촌(朱烏村)이라 하였고, 1본에는 천주현(泉州縣)이라 하였다. 성산군(星山郡)은 본래 일리군(一利君)인데 1본에는 이산군(里山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4이니 수동현(壽同縣)은 본래 사동화현(斯同火縣)이요, 계자현(谿子縣)은 본래 대목현(大木縣)이며,  - 《고려사》에는 칠촌(七村)이라 하였다. 신안현(新安縣)은 본래 본피현(本彼縣)이요, 도산현(都山縣)은 본래 적산현(狄山縣)이라 하였다.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27군(郡) 46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한주(漢州)는 본래 고구려 한산군(漢山郡)이며 영현(領縣)은 2이니, 황무현(黃武縣)은 본래 고구려 남천현(南川縣)이요,  - 《고려사》에는 남매(南買)라 하였다. 거서현(巨黍縣)은 본래 고구려 구성현(駒城縣)이다.  - 《고려사》에는 멸오(滅烏)이라 하였다.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다. 괴양군(槐壤郡)은 본래 고구려 잉근내근(仍斤內郡)이다. 소천군(?川郡)은  - 1본에는 기천군(沂川郡)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인데  - 《고려사》에는 성지매(省知買)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황효현(黃驍縣)은 본래 고구려 내근현(乃斤縣)이며, 빈양현(濱陽縣)은 본래 고구려 양근현(楊根縣)이다.  - 《고려사》에는 항양(恒陽)이라고 하였다. 흑양군(黑壤郡)은  - 1본에는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今勿奴郡)인데  - 《고려사》에는 만노(萬弩), 혹은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고구려 도서현(道西縣)이며, 음성현(陰城縣)은 본래 고구려 잉홀현(仍忽縣)이다. 개산군(介山郡)은 본래 고구려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음죽현(陰竹縣)은 본래 고구려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다. 백성군(白城郡)은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적성현(赤城縣)은 본래 고구려 사복홀(沙伏忽)이요, 사산현(蛇山縣)이 있다. 수성군(水城郡)은 본래 고구려 매홀군(買忽郡)이다. 당은군(唐恩郡)은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차성현(車城縣)은 본래 고구려 상홀현(上忽縣)이며,  - 1본에는 차홀현(車忽縣)이라고 하였다. 진위현(振威縣)은 본래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이다.  - 《고려사》에는 고연달부곡(古淵達部曲)이라 하였고, 1본에는 금산현(金山縣) 또는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 하였다. 율진군(栗津郡)은 본래 고구려 율목군(栗木郡)인데  - 《고려사》에는 동시혜군(冬斯兮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곡양현(穀壤縣)은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이며, 공암현(孔岩縣)은 본래 고구려 제차파의현(濟次巴衣縣)이요, 소성현(邵城縣)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買召忽縣)이다.  - 《고려사》에는 미추홀현(彌趨忽縣)이라고 하였다. 장구군(獐口郡)은 본래 고구려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다. 장제현(長堤縣)은 본래 고구려 주부토군(主夫吐郡)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수성현(戌城縣)은 본래 고구려 수이홀(首爾忽)이요, 김포현(金浦縣)은 본래 고구려 검포현(黔浦縣)이며, 동성현(童城縣)은 본래 고구려 동자홀(童子忽)이다.  - 1본에는 동산현(幢山縣)이라 하였고 《고려사》에는 구사파의현(仇斯波衣縣)이라고 하였다. 분진현(分津縣)은 본래 고구려 평유압현(平唯押縣)이다.  - 《고려사》에는 평회압현(平淮押縣) 또는 북사성(北史城) 혹은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 하였다. 한양군(漢陽郡)은 본래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인데 1본에는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황양현(荒壤縣)은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며, 우왕현(遇王縣)은  - 《고려사》에는 왕봉현(王逢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이다. 내소군(來蘇郡)은 본래 고구려 매성현(買城縣)인데  - 《고려사》에는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중성현(重城縣)은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이요, 파평현(波平縣)은  - 《고려사》에는 파평현(坡平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고구려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이다. 교하군(交河郡)은 본래 고구려 천정구현(泉井口縣)인데  - 《고려사》에는 굴화군(屈火郡) 혹은 어을매곶이[於乙買串]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봉성현(峰城縣)은 본래 고구려 술이홀현(述爾忽縣)이요, 고봉현(高烽縣)은  - 《고려사》에 병봉현(丙峰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이다. 견성군(堅城郡)은 본래 고구려 마홀군(馬忽郡)인데  - 《고려사》에는 명지군(命旨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 《고려사》에는 내이미현(內爾米縣)이라 하였다. 동음현(洞陰縣)은 본래 고구려 양골현(梁骨縣)이다. 철성군(鐵城郡)은 본래 고구려 철원군(鐵圓郡)인데  - 《고려사》에는 모을동비군(毛乙冬非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동량현(?梁縣)은 본래 고구려 승량현(僧梁縣)이며,  - 《고려사》에는 비물현(非勿縣)이라고 하였다. 공성현(功成縣)은 본래 고구려 공목달현(功木達縣)이다.  - 《고려사》에는 웅섬산현(熊閃山縣)이라고 하였다. 부평군(富平郡)은 본래 고구려 부여군(夫如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광평현(廣平縣)은 본래 고구려 부양현(斧壤縣)이다. - 《고려사》에는 어사내현(於斯內縣)이라고 하였다.토산군(兎山郡)은 본래 고구려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이며 영현(領縣)은 3이니 안협현(安峽縣)은 본래 고구려 아진압현(阿珍押縣)이요,  - 《고려사》에는 궁악현(窮岳縣)이라 하였다. 삭읍현(朔邑縣)은 본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이며, 이천현(伊川縣)은 본래 고구려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다. 우봉군(牛峰郡)은 본래 고구려 우잠군(牛岑郡)이다.  - 《고려사》에는 우령군(牛嶺郡) 또는 수지의군(首知衣郡)이라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임강현(臨江縣)은 본래 고구려 장항현(獐項縣)이요,  - 《고려사》에는 고사야홀차현(古斯也忽次縣)이라 하였다. 장단현(長湍縣)은 본래 고구려 장천성(長淺城)이며,  - 《고려사》에는 야야현(耶耶縣) 또는 야아현(夜牙縣)이라 하였다. 임단현(臨端縣)은 본래 고구려 마전천현(麻田淺縣)이다.  - 《고려사》에는 이사파홀현(泥沙波忽縣)이라고 하였다. 송악군(松岳郡)은 본래 고구려 부소갑(扶蘇岬)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여웅현(如熊縣)은 본래 고구려 약두치현(若豆恥縣)이며, 《고려사》에는 지섬현(之蟾縣) 또는 삭두현(朔頭縣)이라 하였다. 강음현(江陰縣)은 본래 고구려 굴압현(屈押縣)이다. [고려사]에는 강서현(江西縣)이라고 하였다. 개성군(開城郡)은 본래 고구려 동비홀(冬比忽)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덕수현(德水縣)은 본래 고구려 덕물현(德勿縣)이며,  - 《고려사]에는 인물현(仁勿縣)이라 하였다. 임진현(臨津縣)은 본래 고구려 진림성(津臨城)이다.  - 《고려사》에는 오아홀(烏阿忽)이라고 하였다. 해구군(海口郡)은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인데  - 《고려사》에는 갑비고차군(甲比古次郡)이라 하였다.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영현(領縣)은 3이니 호음현(호陰縣)은 본래 고구려 동음내현(冬音奈縣)이요,  - 《고려사》에는 아음현(芽音縣)이라 하였다. 혈구도(穴口島) 안에 있다. 교동현(喬桐縣)은 본래 고구려 고목근현(高木根縣)이며,  - 《고려사》에는 대운도(戴雲島) 또는 고림(高林) 혹은 달을참(達乙斬)이라고 하였다. 수진현(守鎭縣)은  - 《고려사》에 수진현(首鎭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고구려 수지현(首知縣)이다.  - 《고려사》에는 강화도(江華島) 안에 있다고 하였다. 영풍군(永풍郡)은 본래 고구려 대곡군(大谷郡)인데  - 《고려사》에는 다지홀군(多知忽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단계현(壇溪縣)은 본래 고구려 수곡성현(水谷城縣)이요,  - 《고려사》에는 매차홀현(買且忽縣)이라 하였다. 진단현(鎭湍縣)은 본래 고구려 십곡성현(十谷城縣)이다.  - 《고려사》에는 덕돈홀(德頓忽) 혹은 곡성현(谷城縣) 혹은 고곡군(古谷郡)이라고 하였다. 해고군(海皐郡)은 본래 고구려 동삼홀군(冬三忽郡)이요,  - 1본에는 동음홀군(冬音忽郡)이라 하였으며, 《고려사》에는 시염성(?鹽城)이라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구택현()澤縣)은 본래 고구려 도랍현(刀臘縣)이다.  - [고려사]에는 치악성(雉岳城)이라 하였다. 폭지군(瀑池郡)은 본래 고구려 내미홀군(內米忽郡)이다.  - 《고려사》에는 지성(池城) 또는 간지군(艮池郡)이라고 하였다.  중반군(重盤郡)은 본래 고구려 식성군(息城郡)이다.  - 《고려사》에는 한성군(漢城郡), 혹은 한홀(漢忽), 혹은 내홀(乃忽)이라 하였다. 서암군(栖?郡)은 본래 고구려 휴암군("郡)이다.  - 《고려사》에는 사파의(?坡衣) 또는 휴류성("城)이라 하였다. 오관군(五關郡)은 본래 고구려 오곡군(五谷郡)인데  - 《고려사》에는 우차탄홀군(于次呑忽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장색현(獐塞縣)이다.  - 《고려사》에는 고소어 (古所於)라고 하였다.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11군(郡) 27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삭주는 영현(領縣)이 3이니 녹효현(綠驍縣)은 본래 고구려 벌력천현(伐力川縣)이요, 황천현(潢川縣)은 본래 고구려 횡천현(橫川縣)이며,  - 《고려사》에는 어사매현(於斯買縣)이라 하였다. 지평현(砥平縣)은 본래 고구려 지현현(砥峴縣)이다. 북원경(北原京)은 <본래 고구려 평원군(平原郡)이다.> ( - 《삼국사기》에 의해 보입(補入)함) 내제군(奈?郡)은 본래 고구려 내토군(奈吐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청풍현(淸風縣)은 본래 고구려 사열이현(沙熱伊縣)이요,  - 《고려사》에는 적성현(赤城縣)이라고 하였다. <적산현(赤山縣)이 있다.> ( - 《삼국사기》에 의해 보입(補入)함) 내령군(奈靈縣)은 영현(領縣)이 2이니 선곡현(善谷縣)은 분래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요, 옥마현(玉馬縣)은 본래 고구려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다. 급산군(?山郡)은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인풍현(隣?縣)은 본래 고구려 이별지현(伊伐支縣)이다. 가평군(嘉平郡)은 《고려사》에는 가평군(加平郡), 또는 병평군(?平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준수현(浚水縣)은 본래 고구려 심천현(深川縣)이다.  - 《고려사》에는 복사매현(伏斯買縣)이라 하였다. 양록군(楊鹿郡)은 본래 고구려 양구군(楊口郡)인데  - 《고려사》에는 요은홀차군(要隱忽次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희제현(?蹄縣)은 본래 고구려 저족현(猪足縣)이요,  - 《고려사》에는 오사회현(烏斯回縣)이라 하였다. 치도현(馳道縣)은 본래 고구려 옥기현(玉岐縣)이며,  - 《고려사》에는 개차정현(皆次丁縣)이라 하였다. 삼령현(三嶺縣)은 본래 고구려 삼현현(三峴縣)이다.  - 《고려사》에는 밀파혜현(密波兮縣)이라 하였다. 낭천군(狼川郡)은 본래 고구려 성천군(?川郡)이다.  - 《고려사》에는 야시매군(也尸買郡)이라 하였다. 대양군(大楊郡)은 본래 고구려 대양관군(大楊管郡)인데  - 《고려사》에는 마근압군(馬斤押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수천현(藪川縣)은 본래 고구려 수성천현(藪?川縣)이요, 문등현(文登縣)은 본래 고구려 문현현(文峴縣)이다.  - 《고려사》에는 문현현(文見縣), 또는 근시파혜(斤尸波兮)라고 하였다. 익성군(益城郡)은 본래 고구려 모성군(母城郡)이다.  - 《고려사》에는 야차홀(也次忽)이라 하였다. 기성군(岐城郡)은 본래 고구려 동사홀군(冬斯忽郡)이며 영현(領縣)은 1이니 통구현(通溝縣)은  - 《고려사》에 통구현(通口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수입현(水入縣)이다.  - 《고려사》에는 매이현(買伊縣)이라 하였다. 연성군(連城郡)은 본래 고구려 각연성(各連城)이요,  - 1본에는 객연성(客連城)이라 하였는데《고려사》에는 가혜아군(加兮牙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단송현(丹松縣)은 본래 고구려 적목진(赤木鎭)이요,  - 《고려사》에는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 하였다. 질운현(?雲縣)은 본래 고구려 관술현(管述縣)이며, 희령현(?嶺縣)은 본래 고구려 저수현현(猪守峴縣)이다. 삭정군(朔庭郡)은 본래 고구려 비열홀군(比列忽郡)인데 영현(領縣)이 5이니 서곡현(瑞谷縣)은 본래 고구려 경곡현("谷縣)이요,  - 《고려사》에는 수을탄현(首乙呑縣)이라 하였다. 난산현(蘭山縣)은 본래 고구려 석달현(昔達縣)이며, 상음현(霜陰縣)은 본래 고구려 살한현(薩寒縣)이요, 청산현(菁山縣)은 본래 고구려 가지달현(加支達縣)이며, 익계현(翊溪縣)은 본래 고구려 익곡현(翊谷縣)이다. 정천군(井泉郡)은 본래 고구려 천정군(泉井郡)인데 이곳에 탄항 관문(炭項關門)을 쌓았으며 영현(領縣)은 3이니 산산현(蒜山縣)은 본래 고구려 매시달현(買尸達縣)이요, 송산현(松山縣)은 본래 고구려 부사달현(扶斯達縣)이며, 유거현(幽居縣)은 본래 고구려 동허현(東墟縣)이라 하였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삼았고 1주(州) 9군(郡) 25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명주는 본래 고구려 하서량(河西良)인데  - 1본에는 아슬라(阿瑟羅)라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4이니 정선현(旌善縣)은 본래 고구려 잉매현(仍買縣)이요, 속제현("縣)은  - 1본에 동제현(棟?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속토현(束吐縣)이며, 지산현(支山縣)이 있고, 동산현(洞山縣)은 본래 고구려 혈산현(穴山縣)이다. 곡성군(曲城郡)은 본래 고구려 굴화군(屈火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연무현(緣武縣)은 본래 고구려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다. 야성군(野城郡)은 본래 고구려 야시홀군(也尸忽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진안현(眞安縣)은 본래 고구려 조람현(助攬縣)이요, 적선현(積善縣)은 본래 고구려 청기현(靑己縣)이다. 유린군(有隣郡)은 본래 고구려 우시군(于尸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해아현(海阿縣)은 본래 고구려 아혜현(阿兮縣)이다. 울진군(蔚珍郡)은 본래 고구려 우진야현(于珍也縣)인데  - 《고려사》에는 고우이군(古)伊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해곡현(海曲縣)은  - 1본에는 해서현(海西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파차현(波且縣)이다. 내성군(奈城郡)은 본래 고구려 내생군(奈生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자춘현(子春縣)은 본래 고구려 을아단현(乙阿旦縣)이요, 백오현(白烏縣)은 본래 고구려 욱오현(郁烏縣)이며,  - 《고려사》에는 우오현(于烏縣)이라 하였다. 주천현(酒泉縣)은 본래 고구려 주연현(酒淵縣)이다. 삼척현(三陟郡)은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요, 영현(領縣)은 4이니 죽령현(竹嶺縣)은 본래 고구려 죽현현(竹峴縣)이며, 만경현(滿卿縣)은  - 1본에는 만향현(滿鄕縣)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만약현(滿若縣)이요, 우계현(羽谿縣)은 본래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이며, 해리현(海利縣)은 본래 고구려 파리현(波利縣)이다. 수성군(守城郡)은 본래 고구려 수성군(?城郡)인데  - 《고려사》에는 가라홀(加羅忽)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동산현(童山縣)은 본래 고구려 승산현(僧山縣)이요,  - 《고려사》에는 소물달현(所勿達縣)이라 하였다.  익령현(翼嶺縣)은 본래 고구려 익현현(翼峴縣)이다.  - 《고려사》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하였다. 고성군(高城郡)은 본래 고구려 달홀(達忽)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환가현("縣)은 본래 고구려 저수혈현(猪?穴縣)이요,  - 《고려사》에는 오사압현(烏斯押縣)이라 하였다. 편험현(偏?縣)은 본래 고구려 평진현현(平珍峴縣)이다.  - 《고려사》에는 천현현(遷峴縣)이라 하였다. 금양군(金壤郡)은 본래 고구려 휴양군(休壤郡)인데  - 《고려사》에는 금뇌군(金惱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5이니 습계현(習谿縣)은 본래 고구려 습비곡현(習比谷縣)이요,  - 《고려사》에는 습비탄현(習比呑縣)이라 하였다. 제상현(?上縣)은 본래 고구려 토상현(吐上縣)이요, 임도현(臨道縣)은 본래 고구려 도림현(道臨縣)이며,  - 《고려사》에는 조을포현(助乙浦縣)이라 하였다. 파천현(派川縣)은 본래 고구려 개연현(改淵縣)이며, 학포현(鶴浦縣)은 본래 고구려 곡포현(鵠浦縣)이라 하였다.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13군(軍) 29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삼국사》에 의하면, 웅주는 본래 백제의 옛 서울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이산현(尼山縣)은 본래 백제 열야산현(熱也山縣)이요, 청음현(淸音縣)은 본래 백제 벌음지현(伐音支縣)이며,  - 《고려사》에는 무부현(武夫縣)이라 하였다. 서원경(西原京)이 있다. 대록군(大麓郡)은 본래 백제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순치현(馴雉縣)은 본래 백제 감매현(甘買縣)이요, 금지현(金池縣)은 본래 백제 구지현(仇知縣)이다. 가림군(嘉林郡)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마산현(馬山縣)과 한산현(翰山縣)인데 한산현은 본래 백제 대산현(大山縣)이다. 서림군(西林郡)은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인데  - 《고려사》에는 남양군(南陽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남포현(藍浦縣)은 본래 백제 사포현(寺浦縣)이요, 비인현(庇仁縣)은 본래 백제 비중현(比衆縣)이다. 이산군(伊山郡)은 본래 백제 마시산군(馬尸山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목우현(目牛縣)은 본래 백제 우견현(牛見縣)이며, 금무현(今武縣)은 본래 백제 금물현(今勿縣)이다. 혜성군(?城郡)은 본래 백제 혜군(?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당진현(唐津縣)은 본래 백제 벌수지현(伐首只縣)이요,  - 《고려사》에는 부지군(夫只郡)이라 하였다. 여읍현(餘邑縣)은 본래 백제 여촌현(餘村縣)이요, 신평현(新平縣)은 본래 백제 사평현(沙平縣)이다. 부여군(扶餘郡)은 영현(領縣)이 2이니 석산현(石山縣)은 본래 백제 진악산현(珍惡山縣)이요, 열성현(悅城縣)은 본래 백제 열기현(悅己縣)이다.  - 《고려사》에는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 하였다. 임성군(任城軍)은 본래 백제 임존성(任存城)인데  - 《고려사》에는 금주(今州)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청정현(靑正縣)은 본래 백제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요, 고산현(孤山縣)은 본래 백제 오산현(烏山縣)이다. 황산군(黃山郡)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며 영현(領縣)은 2이니 진령현(鎭嶺縣)은 본래 백제 진현현(眞峴縣)이요,  - 1본에는 정현현(貞峴縣)이라 하였다.  진동현(珍同縣)이 있다.  - 《고려사》에는 진동현(珍洞縣)이라 하였다. 비풍군(比풍郡)은 본래 백재 우술군(雨述郡)인데  - 《고려사》에는 오천군(?淺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유성현(儒城縣)은 본래 노사지현(奴斯只縣)이요,  - 《고려사》에는 노질지현(奴叱只縣)이라 하였다. 적조현(赤鳥縣)은 본래 백제 소비포현(所比浦縣)이다. 결성군(潔城軍)은 본래 백제 결기군(結己郡)이며 영현(領縣)은 2이니 신읍현(新邑縣)은 본래 백제 신촌현(新村縣)이요,  - 《고려사》에는 사촌현(沙村縣)이라 하였다. 신량현(新良縣)은 본래 백제 사시량현(沙尸良縣)이다.  - 《고려사》에는 사라현(沙羅縣)이라 하였다. 연산군(燕山郡)은 본래 백제 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연기현(燕岐縣)은 본래 백제 두잉지현(豆仍只縣)이요, 매곡현(昧谷縣)은 본래 백제 미곡현(未谷縣)이다. 부성군(富城郡)은 본래 백제 기군(基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소태현(蘇泰縣)은 본래 백제 성대혜현(省大兮縣)이요, 지육현(地育縣)은 본래 백제 지륙현(知六縣)이다. 탕정군(湯井郡)은 영현(領縣)이 2이니 음봉현(陰峰縣)은  - 1본에는 음잠현(陰岑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아술현(牙述縣)이요, 기량현(祈梁縣)은 본래 백제 굴직현(屈直縣)이라 하였다.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10군(郡) 31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이며, 영현(領縣)은 3이니 두성현(杜城縣)은 본래 백제 두이현(豆伊縣)이요,  - 《고려사》에는 왕무현(往武縣)이라 하였다. 금구현(金溝縣)은 본래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요, 고산현(高山縣)인데  - 고산현은 《고려사》에는 난등량(難等良)이라 하였다.  남원소경(南原小京)은 본래 백제 고룡군(古龍郡)이다. 대산군(大山郡)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大尸山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정읍현(井邑縣)은 본래 백제 정촌(井村)이요, 빈성현(斌城縣)은 본래 백제 빈굴현(賓屈縣)이며,  - 《고려사》에는 부성현(賦城縣)이라 하였다. 야서현(野西縣)은 본래 백제 야서이현(也西伊縣)이다. 고부군(古阜郡)은 본래 백제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요, 희안현(喜安縣)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며, 상질현(尙質縣)은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이다. 진례군(進禮郡)은 본래 백제 진잉을군(進仍乙郡)인데  - 《고려사》에는 진내군(進乃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 두시이현(豆尸伊縣)이요,  - 《고려사》에는 부시이현(富尸伊縣)이라 하였다. 청거현(淸渠縣)은 본래 백제 물거현(勿居縣)이요, 단천현(丹川縣)은 본래 백제 적천현(赤川縣)이다. 덕은군(德殷郡)은 본래 백제 덕근군(德近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 가지내현(加知奈縣)이요,  - 《고려사》에는 가을내현(加乙乃縣) 또는 신포현(薪浦縣)이라 하였다.  여량현(礪良縣)은  - 《고려사》에는 여양현(礪陽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양초현(良肖縣)이며, 운제현(雲梯縣)은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이다.  - 《고려사》에는 지실지현(只失只縣)이라 하였다. 임피군(臨陂郡)은 본래 백제 시산군(屎山郡)인데  - 《고려사》에는 흔문(?文), 혹은 소도(所島), 혹은 실오출(失烏出),  혹은 피산군(陂山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함열현(咸悅縣)은 본래 백제 감물아현(甘勿阿縣)이요, 옥구현(沃溝縣)은 본래 백제 마서량현(馬西良縣)이며, 회미현(澮尾縣)은 본래 백제 부부리현(夫夫里縣)이다. 김제군(金堤郡)은 본래 백제 벽골현(碧骨縣)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만경현(萬頃縣)은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이요, 평고현(平皐縣)은 본래 백제 수동산현(首冬山縣)이며, 이성현(利城縣)은 본래 백제 내리아현(乃利阿縣)이요, 무읍현(武邑縣)은 본래 백제 무근촌현(武斤村縣)이다. 순화군(淳化郡)은  - 1본에는 정화군(渟化郡)이라고 하였다. 본래 백제 도실군(道實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적성현(?城縣)은  - 《고려사》에는 적성현(赤城縣), 또는 적현(?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역평현(礫坪縣)이요, 구고현(九皐縣)은 본래 백제 돌평현(?坪縣)이다.  - 《고려사》에는 누평현(淚坪縣)이라 하였다.  금마군(金馬郡)은 본래 백제 금마저군(金馬渚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옥야현(沃野縣)

은 본래 백제 소력지현(所力只縣)이요, 야산현(野山縣)은 본래 백제 알야산현(閼也山縣)이며, 우주현(紆州縣)은  - 《고려사》에 오주현(汚州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우소저현(于召渚縣)이다. 벽계군(碧谿郡)은 본래 백제 백이군(伯伊郡)인데  - 1본에는 백해군(伯海郡)이라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진안현(鎭安縣)은 본래 백제 난진아현(難珍阿縣)이요,  - 《고려사》에는 월량현(月良縣)이라 하였다. 고택현(高澤縣)은 본래 백제 우평현(雨坪縣)이다. 임실군(任實郡)은 영현(領縣)이 2이니 마령현(馬靈縣)은 본래 백제 마돌현(馬突縣)이요,  - 《고려사》에는 마진현(馬珍縣), 혹은 마등량현(馬等良縣)이라고 하였다. 청웅현(靑雄縣)은 본래 백제 거사물현(居斯勿縣)이라 하였다.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삼았고 1주(州) 14군(郡) 44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무주(武州)는 본래 백제 땅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현웅현(玄雄縣)은 본래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요, 용산현(龍山縣)은 본래 백제 복룡현(伏龍縣)이며,  - 《고려사》에는 배룡현(盃龍縣)이라 하였다. 기양현(祈陽縣)은  - 《고려사》에 명평현(鳴平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굴지현(屈支縣)이다. 분령군(分嶺郡)은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인데  - 《고려사》에는 분사군(分沙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4이니 충렬현(忠烈縣)은 본래 백제 조조례현(助助禮縣)이요, 조양현(兆陽縣)은 본래 백제 동로현(冬老縣)이며, 강원현(薑原縣)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縣)이요, 백주현(栢舟縣)은 본래 백제 비사현(比史縣)이다. 보성군(寶城郡)은 본래 백제 복홀군(伏忽郡)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대로현(代勞縣)은 보래 백제 마사량현(馬斯良縣)이요, 계수현(季水縣)은 본래 백제 계천현(季川縣)이며, 오아현(烏兒縣)은 본래 백제 오차현(烏次縣)이요, 마읍현(馬邑縣)은 본래 백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다. 추성군(秋城郡)은 본래 백제 추자혜군(秋子兮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옥과현(玉菓縣)은 본래 백제 과지현(菓支縣)이요,  - 《고려사》에는 과혜현(果兮縣)이라 하였다. 율원현(栗原縣)은 본래 백제 율지현(栗支縣)이다. 영암군(靈岩郡)은 본래 백제 월내군(月奈郡)이다. 반남군(潘南郡)은 본래 백제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야로현(野老縣)은 본래 백제 아로곡현(阿老谷縣)이요, 곤미현(昆湄縣)은 본래 백제 고미현(古彌縣)이다. 갑성군(岬城郡)은 본래 백제 고시이현(古尸伊縣)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진원현(珍原縣)은 본래 백제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요, 삼계현(森溪縣)은 본래 백제 소비혜현(所非兮縣)이다.  - 《고려사》에는 소을부현(所乙夫縣)이라 하였다. 무령군(武靈郡)은 본래 백제 무시이군(武尸伊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장사현(長沙縣)은 본래 백제 상로현(上老縣)이요, 고창현(高敞縣)은 본래 백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며,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 송미지현(松彌知縣)이다. 승평군(昇平郡)은  - 1본에는 승주군(昇州郡)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감평군(?平郡)인데  - 《고려사》에는 사평군(沙平郡) 혹은 무평군(武平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3이니 해읍현(海邑縣)은 본래 백제 원촌현(猿村縣)이요, 희양현(晞陽縣)은 본래 백제 마로현(馬老縣)이며, 여산현(廬山縣)은 본래 백제 돌산현(突山縣)이다. 곡성군(谷城郡)은 본래 백제 욕내군(欲乃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부유현(富有縣)은 본래 백제 둔지현(遁支縣)이요, 구례현(求禮縣)은 본래 백제 구차례현(仇次禮縣)이며, 동복현(同福縣)은 본래 백제 두부지현(豆夫只縣)이다. 능성군(陵城郡)은 본래 백제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인데  - 《고려사》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 혹은 인부리군(仁夫里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부리현(富里縣)은 본래 백제 파부리군(波夫里郡)이요, 여미현(汝湄縣)은  - 《고려사》에는 해빈현(海濱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잉리아현(仍利阿縣)이다.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 발라군(發羅郡)인데 영현(領縣)은 3이니 회진현(會津縣)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縣)이요, 철야현(鐵冶縣)은 본래 백제 실어산현(實於山縣)이며, 여황현(艅)縣)은 본래 백제 수천현(水川縣)이다.  - 《고려사》에는 수입이현(水入伊縣)이라 하였다. 양무군(陽武郡)은 본래 백제 도무군(道武郡)이며 영현(領縣)은 4이니 고안현(固安縣)은  - 1본에는 동안현(同安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백제 고서이현(古西伊縣)이요,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 동음현(冬音縣)이며, 침명현(浸溟縣)은  - 《고려사》에는 투빈현(投濱縣)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새금현(塞琴縣)이요, 황원현(黃原縣)은 본래 백제 황술현(黃述縣)이다. 무안군(務安郡)은 본래 백제 물아혜군(勿阿兮郡)인데 영현(領縣)은 4이니 함풍현(咸풍縣)은 본래 백제 굴내현(屈乃縣)이요, 다기현(多岐縣)은 본래 백제 다지현(多只縣)이며, 해제현(海際縣)은 본래 백제 도제현(道除縣)이요,  - 《고려사》에는 도해현(島海縣), 또는 대봉현(大峰縣)이라 하였다. 진도현(珍島縣)은 본래 백제 인진도군(因珍島郡)이다. 노산군(牢山郡)은 본래 백제 도산현(徒山縣)인데  - 《고려사》에는 원산현(猿山縣)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1이니 첨탐현(瞻)縣)은 본래 백제 매구리현(買仇里縣)이다. 압해군(壓海郡)은  - 《고려사》에는 압해군(押海郡)이라 하였다. 본래 백제 아차산현(阿次山縣)이다. 영현(領縣)은 3이니 갈도현(碣島縣)은 본래 백제 아로현(阿老縣)이요,  - 《고려사》에는 갈초현(葛草縣) 또는 가위현 (加位縣)이라 하였다.  염해현(鹽海縣)은 본래 백제 고록지현(古祿只縣)이요, 안파현(安波縣)은 본래 백제 거지산현(居知山縣)이다.  - 1본에는 굴지산현(屈知山縣)이라 하였다.  이라 하였다.

《삼국사(三國史》 지지(地志)에 의하면, "당초에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국경(國境)이 들쭉 날쭉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침범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신라에서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地域)을 평정(平定)하여 드디어 9주(九州)를 두었다. 신라 본국의 경계(境界)에 3주(州)를 두었으니 왕성(王城)의 동북쪽 당은포(當恩浦)로 향하는 길목에 상주(尙州)를 두었고, 왕성의 남쪽에 양주(良州)를 두었으며, 왕성의 서쪽에 강주(康州)를 두었다. 옛 백제의 경계에 3주(州)를 두었으니 백제의 고성(故城 - 부여(扶餘)) 북쪽 웅진구(熊津口)에 웅주(熊州)를 두었고, 다음은 서남쪽에 전주(全州)를 두었으며, 다음은 남쪽에 무주(武州)를 두었다. 옛 고구려 남쪽 경계에 3주(州)를 두었으니 서쪽으로부터 첫번째에 한주(漢州)를 두었고, 다음 동쪽에 삭주(朔州)를 두었으며, 또 그 다음 동쪽에 명주(溟州)를 두었다. 무릇 9주(州)에서 관할(管轄)하는 군현(郡縣)이 무려 4백 50이었으며, 방언(方言)에 이른바 향(鄕)?부곡(部曲)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니, 신라 지역(地域)의 넓이가 이에 극단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무술년(戊戌年; 758)

신라 경덕왕 17년

당(唐)나라 건원(乾元) 원년

 


봄 정월 시중(侍中) 김기(金耆)가 졸(卒)하니 이찬(伊飡) 염상(廉相)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2월 중외(中外)의 관원으로서 휴가를 청하여 60일에 이른 자는 해관(解官)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의술(醫術)에 익숙한 의관(醫官)을 선택하여 궐내(闕內)의 공봉(供奉)에 충당하게 하였고, 율령 박사(律令博士) 2원(員)을 두었다.

○가을 7월 왕자(王子) 건운(乾運)이 탄생하였다.

○큰 천둥과 번개가 일더니 불사(佛寺) 16곳에 벼락이 쳤다.

○8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기해년(己亥年; 759)

신라 경덕왕 18년

당(唐)나라 건원 2년

 


봄 정월 관호(官號)를 고쳐 병부(兵部)와 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대사(大舍)를 낭중(郞中)으로, 집사 사지(執事舍知)를 집사 원외당(執事員外郞)으로, 집사사(執事史)를 집사랑(執事郞)이라 하였다. 조부(調府)?예부(禮部)?승부(乘府)?선부(船府)?영객부(領客府)?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사정부(司正府)?위화부(位和府)?예작전(例作典)?대학감(大學監)?대도서(大道署)?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라 하였고, 상사서(賞賜署)?전사서(典祀署)?음성서(音聲署)?공장부(工匠府)?채전(彩典) 등의 대사(大舍)를 주서(主書)라 하였다. 2월에는 예부 사지(禮部舍知)를 사례(司禮)로, 조부 사지(調府舍知)를 사고(司庫)라 하였으며, 영객부 사지(領客府舍知)를 사의(司儀)로, 승부 사지(乘府舍知)를 사목(司牧)이라 하였으며, 선부 사지(船府舍知)를 사주(司舟)로, 예작부 사지(例作府舍知)를 사례(司例)라 하였으며, 병부 노사지(兵部弩舍知)를 사병(司兵)으로, 창부 조사지(倉部租舍知)를 사창(司倉)라 하였다.병부 대감(兵部大監)을 시랑(侍郞)으로, 창부 경(倉部卿)을 시랑으로, 창부 대사(倉部大舍)를 낭중(郞中)으로, 집사성 대사(執事省大舍)를 낭중으로 고쳤는데  - 1본에는 진덕왕(眞德王)5년에 고쳤다고 하였다. 위계(位階)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조부(調府)를 대부(大府)로, 승부(乘府)를 사어부(司馭府)로, 선부(船府)를 이제부(利濟府)로, 영객부(領客府)를 사빈부(司賓府)로, 사정부(司正府)를 숙정대(肅正臺)로, 위화부(位和府)를 사위부(司位府)로, 예작부(例作府)  - 1본에는 예작전(例作典)이라 하였다.을 수례부(修例府)로, 국학(國學)을 대학감(大學監)으로 고쳤다. 예부(禮部)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位階)는 조부(調府)의 대사(大舍)와 같다. 승부(乘府)의 대사(大舍) 2인을 주부(主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位階)는 병부(兵部)의 대사(大舍)와 같다. 선부 대사(船府大舍) 2인과 영객부 대사(領客府大舍) 2인과 위화부 대사(位和府大舍) 2인을 모두 주부(主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대사(大舍)와 같았으며, 사(史)는 8인이다. 예작부 대사(例作府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병부 대사(兵部大舍)와 같다. 영창궁 대사(永昌宮大舍) 2인을 주부(主簿)로 고쳤고, 좌이방부 좌(左理方府佐)와 사정부 좌(司正府佐)를 평사(評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좌(佐)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대사(大舍) 2인은 위계가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국학(國學)의 경(卿) 1인을 사업(司業)으로 고쳤다. 대도서(大道署)의 대정(大正)을 정(正)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정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급찬(級飡)으로부터 아찬(阿飡)까지가 이를 맡았고,  - 1본에는 대정(大正) 아래에 대사(大舍) 2인이 있다고 하였다. 대도서(大道署) 주부(主簿) 2인을 주사(主事)로 고쳤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史)는 8인이다. 영창궁성전(永昌宮成典)의 상당(上堂) 1인을 경(卿)으로 고쳤고, 상사서(賞賜署)를 창부(倉部)에 소속(所屬)시켜 사훈감(司勳監)으로 고쳤으며, 음성서(音聲署)를 예부(禮部)에 소속시켜 대악감(大樂監)으로 고쳤다. 공장부(工匠府)를 전장서(典匠署)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고, 채전(彩典)을 전채서(典彩署)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다. 음성서(音聲署)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史)는 4인이다. 상사서(賞賜署)의 대정(大正)을 정(正)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정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급찬(級飡)으로부터 아찬(阿飡)까지가 맡았으며, 좌(佐) 1인은 위계가 대내마(大奈麻)로부터 급찬(級飡)까지가 이를 맡았다.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은 또 사악(司樂)으로 고쳤다. 예부(禮部)의 사지(舍知) 1인을 사례(司禮)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 사지(調府舍知)와 같았다. 영객부(領客府) 사지(舍知) 1인을 사의(司儀)로, 승부(乘府)의 사지(舍知) 1인을 사목(司牧)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 사지(調府舍知)와 같았다. 선부(船府)의 사지(舍知) 1인을 사주(司舟)로, 예작부(例作府)의 사지(舍知) 2인을 사례(司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지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노사지(弩舍知)와 같았으며, 사(史)는 8인이다. 병부(兵部)의 제감(弟監)을 낭중(郞中)으로, 병부 노당(弩幢)을 소사병(小司兵)으로 고쳤고,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을 수성부(修城府)로 고쳤으며, 대사(大舍) 6인을 주부(主簿)로, 사지(舍知) 1인을 사공(司功)으로 고쳤다.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감사천왕사부(監四天王寺府)로 고쳤고, 금하신(衿荷臣) 1인을 감령(監令)으로, 상당(上堂) 1인을 경(卿)으로, 적위(赤位) 1인을 감(監)으로, 청위(靑位) 2인을 주부(主簿)로 고쳤다. 봉성사성전(奉聖寺成典)을 수영봉성사사원(修營奉聖寺使院)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고, 금하신(衿荷臣) 1인을 검교사(檢校使)로 고쳤으며, 상당(上堂) 1인을 부사(副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상당으로 일컬었고, 적위(赤位) 1인을 판관(判官)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로 일컬었으며, 청위(靑位) 1인을 녹사(錄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로 일컬었고, 사(史) 2인을 전(典)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로 일컬었다.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을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고, 금하신(衿荷臣) 1인을 검교사(檢校使)로, 상당(上堂) 1인을 부사(副使)로 고쳤다. 적위(赤位) 1인을 판관(判官)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로 일컬었고, 청위(靑位) 1인을 녹사(錄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로 일컬었으며, 사(史) 2인을 전(典)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로 일컬었다. 봉덕사성전(奉德寺成典)을 수영봉덕사사원(修營奉德寺使院)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고, 금하신(衿荷臣) 1인을 검교사(檢校使)로, 상당(上堂) 1인을 부사(副使)로, 적위(赤位) 1인을 판관(判官)으로, 청위(靑位) 2인을 녹사(錄事)로 고쳤다. 사(史)는 6인이었는데 뒤에 4인을 감(減)하고 전(典)으로 고쳤다. 영묘사성전(靈廟寺成典)을 수영영묘사사원(修營靈廟寺使院)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다. 상당(上堂) 1인을 판관(判官)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상당으로 일컬었고, 청위(靑位) 1인을 녹사(錄事)로 고쳤다가 뒤에 또 대사(大舍)로 고쳤으며, 사(史)는 3인이다. 영흥사성전(永興寺成典)을 감영흥사관(監永興寺館)으로 고쳤고, 대내마(大奈麻) 1인은 감(監)으로 고쳤으며, 사(史)는 3인이다. 전읍서(典邑署)는 전경부(典京府)로 고치고 대일임전(大日任典)은 전경부에 병합하였다. 대도사(大都司)는 6인을 대전의(大典儀)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소도사(小都司) 2인을 소전의(小典儀)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도사대사(都事大舍) 2인을 대전사(大典事)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도사 사인(都事舍人) 4인을 중전사(中典事)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도알사지(都謁舍知) 8인을 전알(典謁)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에 이르는 자가 이를 맡았고, 도인사지(都引舍知) 1인을 전인(典引)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위계는 노사지(弩舍知)와 같았으며, 당(幢) 6인을 소전사(少典事)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위계는 조부 사(調府史)와 같다. 도사계지(都事稽知)는 6인이며, 도인계지(都引稽知)는 5인이요,  - 혹은 도인당(都引幢), 혹은 소전인(小典引)이라고 하였다. 비벌수(比伐首)는 10인이다. 신궁(新宮)을 전설관(典設館)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감(監) 1인은 위계가 전사서 감(典祀署監)과 같았고, 주서(主書) 2인은 위계가 전사서 대사(典祀署大舍)와 같았으며, 사(史)는 3인이다. 동시전 대사(東市典大舍) 2인을 주사(主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서생(書生) 2인을 사직(司直)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사(調府史)와 같았으며, 사(史)는 4인이다. 서시전 대사(西市典大舍)를 주사(主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고, 서생(書生) 2인을 사직(司直)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으로 일컬었으며, 사(史)는 4인이다. 남시전 대사(南市典大舍)를 주사(主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로 일컬었고, 서생(書生) 2인을 사직(司直)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서생으로 일컬었으며, 사(史)는 4인이다. 사범사(司範署)는 예부(禮部)에 소속(所屬)시켰으며, 대사(大舍) 2인을  - 혹은 주서(主書)라고 하였다. 주사(主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사로 일컬었으며, 위계는 조부사지(調府舍知)와 같고, 사(史)는 4인이다. 경도역(京都驛)을 도정역(都亭驛)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복고(復古)하였고, 대사(大舍) 2인의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史)는 2인이다. 내성(內省)을 전중성(殿中省)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구하였고, 사신(私臣) 1인은 내성(內省)의 사신인데 전중령(殿中令)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신(私臣)으로 일컬었고, 경(卿)이 2인인데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아찬(阿飡)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감(監)이 2인인데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사찬(沙飡)까지가 이를 맡았고, 대사(大舍)는 1인이요, 사지(舍知)는 1인이다. 내사정전(內司正典)를 건평성(建平省)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고, 혹개감(黑鎧監)을 위무감(衛武監)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대사(大舍)는 1인이요, 사(史)는 4인이다. 인도전(引道典)을 예성전(禮成典)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상인도(上引道)는 2인이요, 황위인도(黃位引道)6)는 3인이며, 관인도(官引道)는 4인이다. 평진음전(平珍音典)을 소궁(掃宮)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옹(看翁)이 1인이요, 연옹(筵翁)이 1인이며, 전옹(典翁)이 2인이다. 상문사(詳文師)를 한림(翰林)으로 고쳤고 뒤에 학사(學士)를 두었다.

청연궁전(靑淵宮典)을 조추정(造秋亭)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대사(大舍)는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궁옹(宮翁)은 1인이다. 부천궁전(夫泉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3인이며, 궁옹(宮翁)은 1인이다. 차열음궁전(且熱音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가 4인이며, 궁옹(宮翁)이 1인이다. 좌산전(坐山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가 3인이며, 궁옹(宮翁)이 1인이다. 병촌궁전(屛村宮典)을 현룡정(玄龍亭)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대사(大舍)는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궁옹(宮翁)은 1인이다. 북토지궁전(北吐只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다. 홍현궁전(弘峴宮典)  - 이하 5궁(五宮)을 통틀어 고내궁(古奈宮)이라고 한다. 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갈천궁전(葛川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선평궁전(善坪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이동궁전(伊同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평립궁전(平立宮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회궁전(會宮典)은 북사설(北司設)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궁옹(宮翁)은 1인이요, 조사지(助舍知)는 4인이다. 상신모전(上新謀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하신모전(下新謀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좌신모전(左新謀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우신모전(右新謀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2인이다. 조전(租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며, 신원전(新園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가 1인이며, 빙고전(氷庫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다. 백천목숙전(白川"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며, 한지목숙전(漢"?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며, 문천목숙전(蚊川"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며, 본피목숙전(本彼"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다. 능색전(陵色典)은 대사(大舍)가 1인이요, 사(史)는 1인이다. 조하방(朝霞房)은 모(母)가 23인이요, 염궁(染宮)은 모(母)가 11인이며, 소전(疏典)은 모(母) 6인이다. 홍전(紅典)은 모(母)가 6인이요, 소방전(蘇房典)은 모(母)가 6인이며, 찬염전(?染典)은 모(母)가 6인이요, 표전(漂典)은 모(母)가 10인이다. 왜전(倭典) 이하 14<부서>의 관원(官員)의 수(數)는 빠졌다. 금전(錦典)을 직금방(織錦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復古)하였고, 철유전(鐵鍮典)을 축야방(築冶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다. 사전(寺典)이 있고, 칠전(漆典)은 식기방(飾器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다. 모전(毛典)을 취취방(聚?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고, 피전(皮典)을 화인방(靴人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으며, 추전(?典)?피타전(皮打典)을 운공방(?工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고, 마전(磨典)을 재인방(梓人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다. 탑전(?典)?화전(靴典)?타전(打典)?마리전(麻履典)이 있으며, 세택(洗宅)을 중사성(中事省)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대사(大舍)는 8인이요,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숭문대(崇文臺)는 낭(郞)이 2인이요, 사(史)는 4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악전(岳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4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감전(監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지(舍知)는 2인이며, 사(史)는 4인이요, 도관(都官)은 4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요, 악자(樂子)는 정수(定數)가 없다. 늠전(?典)을 천록사(天祿司)로 고쳤다가 복고하였는데 대사(大舍)는 2인이요, 사지(舍知)는 2인이며, 사(史)는 8인이요, 늠옹(?翁)은 4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춘전(春典)은 사지(舍知)가 2인이요, (史)는 8인이며, 제전(祭典)은 사지(舍知)가 2인이요, 사(史)는 6인이요, 약전(藥典)을 보명사(保命司)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사지(舍知)는 2인이요, 사(史)는 6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요, 공봉복사(供奉卜師)는 정수(定數)가 없다. 마전(麻典)을 직방국(織紡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干)은 1인이요, 사(史)는 8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4인이다. 포전(曝典)은 속현(屬縣)이 셋이다. 육전(肉典)은 상선국(尙膳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干)은 2인이다. 재전(滓典)은 간(干)이 1인이요, 사(史)는 4인이며, 아니전(阿尼典)은 모(母)가 60인이다. 기전(綺典)은 별금방(別錦房)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모(母)는 8인이요, 석전(席典)을 봉좌국(奉座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구하였는데 간(干)은 1인이요, 사(史)는 2인이다. 궤개전(机槪典)을 궤반국(机盤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干)은 1인이요

, 사(史)는 6인이며, 양전(楊典)을 사비국(司)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干)은 1인이요, 사(史)는 6인이다. 와기전(瓦器典)을 도등국(陶登局)으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간(干)은 1인이요, 사(史)는 6인이며, 감부대전(監夫大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대부전(大傅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행군전(行軍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4인이며, 종사지(從舍知)는 2인이다. 영창전(永昌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고창전(古昌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4인이다. 번감(番監)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는 2인이며, 원당전(願堂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종사지(從舍知)가 2인이다. 물장전(物藏典)은 대사(大舍)가 4인이요, 사(史)가 2인이며, 북상전(北廂典)은 대사(大舍)가 2인이요, 사(史)가 4인이다. 남하소궁(南下所宮)을 잡공사(雜工司)로 고쳤다가 뒤에 복고하였는데 옹(翁)이 1인이요, 조(助)는 4인이다. 남도원궁(南桃園宮)은 옹(翁)이 1인이요, 북원궁(北園宮)은 옹(翁)이 1인이며, 신청연궁(新靑淵宮)은 옹(翁)이 1인이요, 침방(針房)은 여자(女子)가 16인이다. 웅천주정(熊川州停)에 제군관(諸軍官) 3인을 더 두었다.

○3월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가 가을에 이르러 사라졌다.

 

 

 

경자년(庚子年; 760)

신라 경덕왕 19년

당(唐)나라 상원(上元) 원년

 


봄 정월 도성(都城)의 동쪽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는 귀신의 북[鬼鼓]이라고 하였다.

○2월 궁성(宮城) 가운데에 큰 연못을 팠고 궁성의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 시중(侍中) 염상(廉相)이 퇴직(退職)하니 이찬(伊飡) 김옹(金邕)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가을 7월 왕자(王子) 건운(乾運)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신축년(辛丑年; 761)

신라 경덕왕 20년

당(唐)나라 상원 2년

 


봄 정월 초하룻날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는데, 일이(日珥)7)가 있었다.

○여름 4월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임인년(壬寅年; 762)

신라 경덕왕 21년

당(唐)나라 보응(寶應) 원년

 


여름 5월 오곡(五谷)?휴암(?岩)?한성(漢城)?장색(獐塞)?지성(池城)?덕곡(德谷) 등 6성(城)을 쌓고 각기 태수(太守)를 두었다.

○가을 9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계묘년(癸卯年; 763)

신라 경덕왕 22년

당(唐)나라 대종(代宗) 광덕(廣德) 원년

 


여름 4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왓장이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꽃이 피었다.

○상대등(上大等) 신충(信忠)과 시중(侍中) 금옹(金邕)이 사면(辭免)하였다.

○대내마(大奈麻) 이순(李純)이 일찍이 왕에게 총애(寵愛)를 입었는데 하루 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산(山)에 들어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僧侶)가 되었다. 뒤에 왕이 풍악(風樂)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궁문(宮門)에 나아가 간(諫)하기를,

"신(臣)은 듣건대, 걸?주(桀紂)8) 주색(酒色)에 빠져 음탕(陰蕩)한 음악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정사(政事)가 문란하여져 국가(國家)가 패멸(敗滅)하였다고 합니다. 엎어진 수레가 앞에 있으면 뒷 수레는 경계함이 마땅하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나라의 명운(命運)을 장구(長久)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정지하였으며, 그를 정실(正室)로 불러들여 여러 날 동안 함께 논설(論說)하였다.

 

 

 

갑진년(甲辰年; 764)

신라 경덕왕 23년

당(唐)나라 광덕 2년

 


봄 정월 이찬(伊飡) 만종(萬宗)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고, 아찬(阿飡) 양상(良相)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3월 혜성이 동남방에 나타났다.

○겨울 12월 크고 작은 유성(流星)이 나타나서 셀 수도 없었다.

 

 

 

을사년(乙巳年; 765)

신라 경덕왕 24년

당(唐)나라 영태(永泰) 원년

 


여름 4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당 태종(唐代宗)이 사신에게 검교 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제수(除授)하였다.

○6월 유성(流星)이 심수(心宿)를 범(犯)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태자(太子) 건운(乾運)이 즉위(卽位)하였는데 나이 8세(歲)므로 모후(母后)가 섭정(攝政)하였다. 왕의 시호(諡號)를 경덕(景德)이라 하였고 모지사(毛祇寺)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왕이 대학(大學)에 행행(行幸)하여 박사(博士)로 하여금 《상서(尙書》와 《국학사(國學史》를 강의(講義)하게 하였다. 박사는 원래 2인이었는데, 또 2인을 더 두었다.

 

 

 

병오년(丙午年; 766)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

당(唐)나라 대력(大曆) 원년

 


봄 정월 해 둘이 나란히 나타났다.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였다.

○서울에서 소가 다리 다섯 달린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 하나는 위로 향(向)하였다.

○강주(康州)에서 땅이 가라앉아 연못을 이루었는데 장광(長廣)이 50여 자[尺]요, 물의 빛깔은 푸르고 검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정미년(丁未年; 767)

신라 혜공왕 3년

당(唐)나라 대력 2년

 


여름 6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가을 7월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를 당나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인하여 책명(冊命)을 더해주기를 청하니 당 대종(唐代宗)이 자신전(紫宸殿)에 임어(臨御)하여 연견(宴見)하였다.

○별 셋이 궁정(宮廷)에 떨어져 서로 부딪쳤는데 그 빛이 불과 같이 흐트러졌다.

○9월 김포현(金浦縣)의 벼 이삭이 모두 쌀로 변하였다.

○천구성(天狗星)이 동루(東樓)의 남쪽에 떨어졌는데 머리는 항아리와 같고 꼬리는 3자[尺] 쯤 되었으며 빛깔은 열화(烈火)와 같았는데 천지(天地)도 진동(振動)하였다.

○왕궁(王宮)의 뒷간에 연꽃이 생겼다.

 

 

 

무신년(戊申年; 763)

신라 혜공왕 4년

당(唐)나라 대력 3년

 


봄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당 대종(唐代宗)이 창부 낭중(倉部郞中) 귀숭경(歸崇敬)으로 하여금 겸어사 중승(兼御史中丞)을 삼아 부절(符節)을 가지고 신라에 보내어 왕을 책봉(冊封)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을 삼고, 겸하여 왕모(王母)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대비(大妃)로 삼았다.

○여름 5월 사형죄(死刑罪) 이하의 죄인을 놓아주었다.

○6월 서울에 우박이 내려 초목(草木)을 해쳤다.

○큰 별이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떨어졌다.

○지진(地震)이 일어나 천둥 소리와 같았다.

○샘물이 모두 말라버렸다.

○범이 궁중(宮中)에 들어왔다.

○가을 7월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이 그 아우 아찬(阿飡)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그 도중(徒衆)을 이끌고 왕궁(王宮)을 에워쌌는데 한 달 남짓하여 마침내 이를 토평(討平)하고 그 9족(九族)을 목베었다.

○9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겨울 10월 이찬(伊飡) 신유(神猷)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이찬 김은거(金隱居)를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기유년(己酉年; 769)

신라 혜공왕 5년

당(唐)나라 대력 4년

 


봄 3월 임해전(臨海殿)에서 군신(群臣)에게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여름 5월 황충(蝗蟲)이 번지고 가뭄이 들었다.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각기 알고 있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겨울 11월 치악현(雉岳縣)에서 수십 마리의 쥐가 평양(平壤)으로 향하였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경술년(庚戌年; 770)

신라 혜공왕 6년

당(唐)나라 대력 5년

 


봄 정월 왕이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청주(淸州))에 행행(行幸)하였는데 경유(經由)한 주현(州縣)의 옥수[繫囚]를 법을 굽혀 놓아주었다.

○3월 흙 비가 내렸다.

○4월 왕이 서원경에서 도성(都城)에 돌아왔다.

○5월 혜성(彗星)이 오거성(五車星)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에 이르러 사라졌다.

○가을 8월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겨울 11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2월 시중(侍中) 김은거(金隱居)가 사면(辭免)하니 이찬(伊飡) 정문(正門)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임자년(壬子年; 772)

신라 혜공왕 8년

당(唐)나라 대력 7년

 


봄 정월 이찬(伊飡) 김표석(金標石)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니, 당 대종(唐代宗)이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을 제수(除授)하여 돌려보냈다.

 

 

 

계축년(癸丑年; 773)

신라 혜공왕 9년

당(唐)나라 대력 8년

 


여름 4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고 금은(金銀)과 우황(牛黃)?어아주(魚牙紬)?조하주(朝霞紬) 등의 방물(方物)을 바쳤다.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은(謝恩)하니, 당 대종(唐代宗)이 영영전(迎英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갑인년(甲寅年; 774)

신라 혜공왕 10년

당(唐)나라 대력 9년

 


여름 4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가을 9월 이찬(伊飡) 양상(良相)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니, 당 대종이 영영전(迎英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을묘년(乙卯年; 775)

신라 혜공왕 11년

당(唐)나라 대력 10년

 


봄 정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3월 이찬(伊飡) 김순(金順)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여름 6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가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가을 8월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侍中) 정문(正門)과 더불어 모반하였다가 복주되었다.

 

 

 

병진년(丙辰年; 776)

신라 혜공왕 12년

당(唐)나라 대력 11년

 


봄 정월 왕이 하교(下敎)하여 백관(百官)의 칭호를 모두 예전대로 따랐다. 집사성(執事省)의 원외랑(員外郞)은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位階)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낭(郞)은 다시 사(史)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병부(兵部)의 시랑(侍郞)은 다시 대감(大監)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급찬(級飡)으로부터 아찬(阿飡)까지가 이를 맡았고, 낭중(郞中)은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사병(司兵)은 다시 노사지(弩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고, 소사병(小司兵)은 다시 노당(弩幢)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史)와 같았다. 대부(大府)는 다시 조부(調府)로 일컬었고,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고(司庫)는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수성부(修城府)는 다시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으로 일컬었고,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사공(司功)은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고, 사(史)는 8인인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사(史)와 같다. 감사천왕사부(監四天王寺府)는 다시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으로 일컬었고, 감령(監令)은 다시 금하신(衿荷臣)으로 일컬었으며, 경(卿)은 다시 상당(上堂)으로 일컬었고, 감(監)은 다시 적위(赤位)로 일컬었으며, 주부(主簿)는 다시 청위(靑位)로 일컬었다. 봉성사(奉聖寺)의 검교사(檢交使)와 감은사(感恩寺) 및 봉덕사(奉德寺)의 검교사(檢校使)는 모두 다시 금하신(衿荷臣)으로 일컬었고, 감은사 부사(感恩史副使)와 봉덕사 부사(奉德寺副使)는 모두 다시 상당(上堂)으로 일컬었다. 봉덕사 판관(奉德寺判官)은 다시 적위(赤位)로 일컬었고, 봉덕사 녹사(奉德寺錄事)는 다시 청위(靑位)로 일컬었으며, 전(典)은 다시 사(史)로 일컬었다. 창부(倉部)의 시랑(侍郞)은 다시 경(卿)으로 일컬었는데 위계(位階)는 병부(兵部)의 대감(大監)과 같았으며, 낭중(郞中)은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병부(兵部)의 대사(大舍)와 같았고, 사창(司倉)은 다시 조사지(租舍知)로 일컬었다. 사어부(司馭府)는 다시 승부(乘府)로 일컬었고, 숙정대(肅正臺)는 다시 사정부(司正府)로 일컬었는데 영(永)은 1인이며, 위계는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각간(角干)까지가 이를 맡았다. 수례부(修例府)는 다시 예작부(例作府)로 일컬었고, 이제부(利濟府)는 다시 선부(船府)로 일컬었는데 영(令)은 1인이며 위계는 대아찬(大阿飡)으로부터 각간(角干)까지가 이를 맡았고,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대사(大舍)와 같았으며, 사주(司舟)는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사지(舍知)와 같다. 사빈부(司賓府)는 다시 영객부(領客府)로 일컬었으며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대사(大舍)와 같았으며, 사의(司儀)는 다시 사지(舍知)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조부(調府)의 사지(舍知)와 같았고, 사(史)는 8인이다. 사위부(司位府)는 다시 위화부(位和府)로 일컬었으며, 좌이방부(左理方府)의 평사(評事)는 다시 좌(佐)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정부(司正府)의 좌(佐)와 같았고, 대사(大舍) 2인은 위계가 병부(兵部)의 대사(大舍)와 같았다. 사훈감(司勳監)은 다시 상사서(賞賜署)로 일컬었으며 주서(主書)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전경부(典京府)는 다시 전읍서(典邑署)로 일컬었는데 경(卿)은 2인이니  -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원래 감(監) 6인을 두어 6부(部)를 나누어 영솔(領率)하였는데 원성왕(元聖王) 6년에 2인을 경(卿)으로 승진시켰다고 하였다.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사찬(沙飡)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감(監)은 4인이니 위계는 내마(奈麻)로부터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대사읍(大司邑)은 6인인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중사읍(中司邑)은 6인인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고, 소사읍(小司邑)은 9인인데 위계는 노사지(弩舍知)와 같았으며, 사(史)는 16인이요, 목척(木尺)은 70인이다. 영창궁(永昌宮)의 경(卿)을 다시 상당(上堂)으로 일컬었고,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으며, 사(史)는 4인이다. 대학감(大學監)은 다시 국학(國學)으로 일컬었으며, 사업(司業)은 다시 경(卿)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다른 경(卿)과 같았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는 인원 수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주부(主簿)는 다시 대사(大舍)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사지(舍知)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대악감(大樂監)은 다시 음성서(音聲署)로 일컬었으며, 사악(司樂)은 다시 경(敬)으로 일컬었는데 위계는 다른 경(卿)과 같았다. 비로소 봉은사성전(奉恩寺成典)을 설치하여 금하신(衿荷臣) 1인을 두었고, 부사(副使) 1인은 곧 상당(上堂)으로 고쳤다.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행행(行幸)하여 바다에 제사하였다.

○2월 왕이 국학(國學)에 행행(行幸)하여 청강(聽講)하였다.

○3월 창부(倉部)에 사(史) 8인을 더 두었다.

○가을 7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다시 명주(溟州)를 하슬라주(何瑟羅州)로 삼았고, 상주(尙州)를 사벌주(沙伐州)로 삼았으며, 진주(晉州)를 청주(菁州)로 삼았다.

○왕이 비로소 5묘(五廟)9)를 세웠다. 미추왕(味鄒王)?태종왕(太宗王)?문무왕(文武王) 및 조(祖) <성덕왕(聖德王)>?고(考 -  죽은 아비) <경덕왕(景德王)>으로서 오묘(五廟)를 삼았고, 1년에 모두 여섯 차례 제사를 지냈으니, 곧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上旬), 8월 1일과 15일에 행사(行祀)하였다. 대체로 미추왕은 김씨(金氏)의 시조(始祖)이고 태종왕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平定)하여 큰 공덕(功德)이 있었으므로 불천(不遷)10)의 주(主)로 하였다.

 

 

 

정사년(丁巳年; 777)

신라 혜공왕 13년

당(唐)나라 대력 12년

 


봄 3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4월 또 지진(地震)이 있으니, 상대등(上大等) 양상(良相)이 소장(疎章)을 올려 시정(時政)을 극론(極論)하였다.

○겨울 10월 이찬(伊飡) 주원(周元)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청주(菁州) 사람 성각(聖覺)이 모친(母親)을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奉養)하였는데, 모친이 늙어 병들자 허벅지의 살을 도려내어 먹였으며, 죽음에 미쳐서는 지성으로 장례(葬禮)를 모셨다. 주원(周元)이 이 사실을 위에 계문(啓聞)하니, 왕이 벼 3백 석(石)을 내려주었다.

 

 

 

기미년(己未年; 779)

신라 혜공왕 15년

당(唐)나라 대력 14년

 


봄 3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민가(民家)가 허물어지고 죽은 자가 1백여 인(人)이나 되었다.

○태백성(太白星  - 금성(金星))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百座法會)를 베풀었다.

○김암(金巖)을 일본(日本)에 보내어 교빙(交聘)하였으니, 김암은 본래 김윤중(金允中)의 서손(庶孫)이었는데 성품이 영민(英敏)하고 방술(方術)을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伊飡)이 되었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면서 겨를을 타서 스승에게 나아가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들으면 세 가지를 알았다. 스스로 둔갑법(遁甲法)을 저술하여 책자(冊子)로 이루어 스승에게 보이니, 스승이 놀랍게 여기고 말하기를,

"명달(明達)함이 이에 이를 줄은 뜻하지 못하였다."

하고 이로부터 감히 제자(弟子)로 대하지 못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옴에 미쳐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를 삼았으며,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등 3주(三州)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고, 다시 집사 시랑(執事侍郞)이 되어 패강(浿江)을 진수(鎭守)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무마(撫摩)하였으며 매양 농사의 겨를을 타서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쳤으니 사람들이 모두 순편(順便)하게 여겼다. 일찍이 황충(蝗蟲)이 경계(境界) 안에 들어와 온 들판을 덮으므로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김암이 산 마루터기에 올라가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니 홀연히 비 바람이 크게 일어 황충이 모두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일본국(日本國)에 교빙(交聘)하였는데, 왜왕(倭王)이 그의 현명(賢明)함을 알고 억류(抑留)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당(唐)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서로 만나보고 심히 기뻐하거늘 김암은 대국(大國)에서도 아는 바라고 하여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여름 4월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金庾信)의 무덤에서부터 일어나 시조릉(始祖陵)에 이르렀는데 티끌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변하지 못하였다. 능(陵)을 수호하는 사람이 그 가운데에서 곡읍(哭泣)하고 슬퍼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하니 왕이 두려워하여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으로 하여금 김유신의 무덤에 나아가 치제(致祭)하고 사과(謝過)하게 하였다.

 

 

 

경신년(庚申年; 780)

신라 혜공왕 16년

당(唐)나라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

 


봄 정월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四方)에 끼었다.

○2월 흙비가 내렸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으므로 모후(母后)가 청정(聽政)하였는데 장성하자 성색(聲色)에 빠져 늘 부녀자(婦女子)들과 희롱을 하였으며 금낭(錦낭) 차기를 좋아하였고 도류(道流)들과 희학(戱謔)하며 사방에 순유(巡遊)하기에 절도가 없었다. 이에 기강(紀綱)이 문란하고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니, 인심(人心)이 이산(離散)되었다. 여름 4월에 이찬(伊飡) 지정(志貞)이 무리를 모아 반란(叛亂)을 일으키고 왕궁(王宮)을 포위(包圍)하므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이 이찬(伊飡) 김경신(金敬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지정(志貞) 등을 주멸(誅滅)하였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병(亂兵)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이에 김양상이 자립(自立)하여 왕이 되었고, 전왕(前王)의 시호(諡號)를 혜공(惠恭)이라 하였으며,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그의 부친(父親) 해찬(解飡) 효방(孝芳)을 추봉(追封)하여 개성대왕(開聖大王)을 삼았고, 모친 김씨(金氏)를 추봉하여 정의태후(貞懿太后)를 삼았으며, 김경신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을 삼았으니 양상은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十世孫)이요, 경신은 내물왕의 12세손(十二世孫)이었다.

○어룡성(御龍省)의 봉어(奉御)를 경(卿)으로 고쳤다가 또 경(卿)을 감(監)으로 고쳤으며, 치성(稚省) 14인을 두었다.

 

 

 

신유년(辛酉年; 781)

신라 선덕왕(宣德王) 2년

당(唐)나라 건중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였다.

○가을 7월 사자(使者)를 보내어 패강(浿江) 남쪽의 주군(州郡)을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임술년(壬戌年; 782)

신라 선덕왕 3년

당(唐)나라 건중 3년

 


봄 윤정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한산주(漢山州)에 순행(巡幸)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浿江鎭)으로 이주(移住)시켰다.

○가을 7월 시림(始林)의 벌판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패강진전(浿江鎭典)에 두상대감(頭上大監) 1인을 두었고, 대곡성(大谷城)에 두상(頭上)을 두었는데, 위계(位階)는 급찬(級飡)으로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가 이를 맡았고, 대감(大監) 7인은 위계가 태수(太守)와 같았다. 두상제감(頭上弟監) 1인은 위계가 사지(舍知)로부터 대내마(大奈麻)까지가 이를 맡았고, 제감(弟監) 1인은 위계가 당(幢)으로부터 내마(奈麻)까지가 이를 맡았다. 보감(步監) 1인은 위계가 현령(縣令)과 같았고, 소감(少監) 6인은 위계가 선저지(先沮地)로부터 대사(大舍)까지가 이를 맡았다.

 

 

 

계해년(癸亥年; 783)

신라 선덕왕 4년

당(唐)나라 건중 4년

 


봄 정월 아찬(阿飡)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삼았다.

○2월 서울에 눈이 3자[尺]나 내렸다.

○사직단(社稷壇)을 설치(設置)하고 또 사전(祀典)을 닦았다.12월 인일(寅日)에 신성(新城)의 북문(北門)에서 팔사(八?)11)를 제사하되 풍년에는 대뢰(大牢)를 쓰고 흉년에는 소뢰(小牢)를 썼다. 입춘(立春) 후 해일(亥日)에는 명활성(明活城)의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先農)을 제사하였고, 입하(立夏) 후 해일(亥日)에는 신성(新城)의 북문(北門)에서 중농(中農)을 제사하였으며, 입추(立秋) 후 해일(亥日)에는 산원(蒜園)에서 후농(後農)을 제사하였다. 입춘(立春) 후 축일(丑日)에는 견수곡문(犬首谷門)에서 풍백(風伯)을 제사하였고, 입하(立夏) 후 신일(申日)에는 탁저(卓渚)에서 우사(雨師)에 제사지냈으며, 입추(立秋) 후 진일(辰日)에는 본피부(本彼部) 유촌(遊村)에서 영성(靈星)을 제사하였다.  - 여러 예전(禮典)을 상고해 보건대 다만 선농(先農)을 제사하였을 뿐 중농(中農)?후농(後農)을 제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산(三山)?오악(五岳) 이하 명산 대천(名山大川)은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어 제사하였다. 대사(大祀)하는 삼산(三山)은 1은 내력(奈歷)  - 습비부(習比部) 2는 골화(骨火)  - 절야화군(切也火郡)이며, 3은 혈례(穴禮)  - 대성군(大城郡)이다. 중사(中祀)하는 오악(五岳)은, 동악(東岳)이 토함산(吐含山)  - 대성군(大城郡)이요, 남악(南岳)은 지리산(地理山)  - 청주(菁州)이며, 서악(西岳)은 계룡산(鷄龍山)  - 웅천주(熊川州)이요, 북악(北岳)은 태백산(太白山)  - 내이군(奈已郡)이며, 중악(中岳)은 부악(父岳)  - 1본에는 공산(公山)이라고 하였으며, 압독군(押督郡)에 있다. 이다. 사진(四鎭)은, 동쪽이 온근(溫懃)( - 《삼국사기》에는 온말근(溫沫懃)이라고 하였음) 아곡정(牙谷停)이요, 남쪽은 치야리(恥也里)( - 《삼국사기》에는 해치야리(海恥也里)라고 하였음) 1본에는 실제(悉帝)라고 하였으며, 추대군(推大郡)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추대군을 추화군(推火郡)이라 하였음)이며, 서쪽은 가야갑악(加耶岬岳)  - 마시산군(馬尸山郡)이요, 북쪽은 웅곡악(熊谷岳)  - 비열홀군(比烈忽郡)이다. 사해(四海)는, 동쪽은 아등변(阿等邊)  - 1본에는 근오형변(近烏兄邊)이라하였으며, 퇴화군(退火郡)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근오형변을 근오형변(斤烏兄邊)이라고 하였음)이요, 남쪽은 형변(兄邊)  - 거칠산군(居漆山郡)이며, 서쪽은 미릉변(未陵邊)  - 시산군(屎山郡)이요, 북쪽은 비례산(非禮山)  - 실직군(悉直郡)이다. 사독(四瀆)은, 동쪽이 토지하(吐只河)  - 1본에는 참포(?浦)라고 하였는데 퇴화군(退火郡)에 있다.요, 남쪽은 황산하(黃山河)  - 삽량주(?良州)이며, 서쪽은 웅천하(熊川河)  - 웅천주(熊川州)요, 북쪽은 한산하(漢山河)  - 한산주(漢山州)이다. <기타(其他)는> 속리악(俗離岳),  - 삼년산군(三年山郡)에 있다. 추심(推心),  - 대가야군(大加耶郡)에 있다.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 서림군(西臨郡)에 있다. 오서악(烏西岳),  - 결기군(結己郡)에 있다. 북형산성(北兄山城),  - 대성군(大城郡)에 있다. 청해진(淸海鎭)  - 조음도(助音島)에 있다.이다. 소사(小祀)는, 상악(霜岳),  - 고성군(高城郡)에 있다. 설악(雪岳),  - 변성군(邊城郡)에 있다.(《삼국사기》에는 수성군(?城郡)이라 하였음) 화악(花岳),  - 근평군(斤平郡)에 있다. 감악(鉗岳),  - 칠중성(七重城)에 있다. 부아악(負兒岳),  -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있다. 월내악(月奈岳),  - 월내군(月奈郡)에 있다. 무진악(武珍岳),  - 무진주(武珍州)에 있다. 서다산(西多山),  - 백해군(伯海郡) 난지가현(難知可縣)에 있다. 월형산(月兄山),  - 내토군(奈吐郡) 사열이도(沙熱伊島)에 있다. 도서성(道西城),  - 만노군(萬弩郡)에 있다. 동로악(冬老岳),  - 진례군(進禮郡) 단천현(丹川縣)에 있다. 죽지(竹旨),  - 급벌산군(及伐山郡)에 있다. 웅지(熊只),  - 굴자군(屈自郡) 웅지현(熊只縣)에 있다. 악발(岳髮),  - 발악(髮岳)이라고도 하는데 우진야군(于珍也郡)에 있다. 우화(于火),  - 생서량군(生西良郡) 우화현(于火縣)에 있다. 삼기(三岐),  - 대성군(大城郡)에 있다.훼황(卉黃),  - 모량(牟梁)에 있다. 고허(高墟),  - 사량(沙梁)에 있다. 가아악(嘉阿岳),  - 삼년산군(三年山郡)에 있다.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  - 아지현(阿支縣)에 있다. 비약악(非藥岳),  - 퇴화군(退火郡)에 있다. 가림성(加林城),  - 가림현(加林縣)에 있는데, 1본에는 영안산(靈암山)?우풍산(虞風山)은 있으나 가림성(加林城)은 없다. 가량악(加良岳),  - 청주(菁州)에 있다. 서술(西述)  - 모량(牟梁)에 있다.이다. 사성문제(四城門祭) 1은 대정문(大井門)에서, 2는 토산량문(吐山良門)에서, 3은 습비문(習比門)에서, 4는 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냈다. 부정제(部庭祭)는 양부(梁部)에서 지냈다. 사천상제(四川上祭)는 1은 견수(犬首)에서, 2는 문열림(文熱林)에서, 3은 청연(靑淵)에서, 4는 박수(樸樹)에서 지냈다. 일월제(日月祭)는 문열림(文熱林)에서 행하고, 오성제(五星祭)는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행하였으며, 기우제(祈雨祭)는 혜수(惠樹)에서 행하였다. 사대도제(四大道祭)는 동쪽은 고리(古里)에서, 남쪽은 첨병수(첨幷樹)에서, 서쪽은 저수(渚樹)에서, 북쪽은 활이기(活伊岐  - 《삼국사기》에서는 활병기(活倂岐)라고 하였음)에서 행하였으며, 압구제(壓丘祭)와 벽기제(?氣祭)도 있었다. 위에 열거(列擧)한 여러 제사는, 혹은 별제(別祭)로 인하여, 혹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행한 것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志)에 이르기를, "신라의 사전(祀典)은 모두 경내(境內)의 산천(山川)에만 지내고 천지(天地)에는 미치지 않았거니와, 대개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7묘(七廟)요, 제후(諸侯)는 5묘(五廟)인데, 이소(二昭)?이목(二穆)에 태조(太祖)와 더불어 5묘(五廟)가 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와 천하(天下)의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諸侯)는 사직(社稷)과 경내(境內)에 있는 명산 대천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으므로 감히 예법(禮法)을 넘어 행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 단?당(壇堂)의 고하(高下)와, 유문(?門)의 안팎과, 위차(位次)의 존비(尊卑)와, 진설(陳設)?승강(陞降)의 절차(節次)와, 준작(尊爵)?변두(?豆)?생뢰(牲牢)?책축(冊祝) 등의 예절(禮節)은 상고할 데가 없으니 다만 그 대략만을 간단히 기록하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784)

신라 선덕왕 5년

당(唐)나라 흥원(興元) 원년

 


여름 4월 왕이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는데 군신(群臣)이 세 차례 글을 올려 간(諫)하니 이에 그쳤다.

 

 

 

을축년(乙丑年; 785)

신라 선덕왕 6년

당(唐)나라 정원(貞元) 원년

 


봄 정월 당 덕종(唐德宗)이 호부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왕을 책봉(冊封)하여 검교태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檢校太尉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을 삼았다.

○왕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증세가 위독해지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과인(寡人)은 본래 덕(德)이 없어 왕위(王位)를 바라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의 추대(推戴)를 물리치지 못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卽位)한 이래로 연사(年事)가 잘 되지 못하고 백성이 곤궁(困窮)해졌으니 이는 모두 나의 재덕(才德)이 백성들의 바램에 걸맞지 못하며 정사(政事)가 천심(天心)에 부합(符合)하지 못한 때문이다. 항상 왕위를 선양(禪讓)하고 외방(外方)에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매양 지성껏 만류(挽留)하므로 머뭇거리다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질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생(死生)은 정해진 명(命)이 있으니 돌아보건대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죽은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하여 화장(火葬)하고 뼈는 동해(東海)에 뿌려라."

하였다. 그 후 13일 만에 훙(薨)하니 시호(諡號)를 선덕(宣德)이라 하였고, 나라 사람들이 상대등(上大等) 경신(敬信)을 옹립(擁立)하여 왕으로 삼았다. 당초 혜공왕(惠恭王) 말년(末年)에 역신(逆臣)이 발호(跋扈)하므로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上大等)으로서 반적(叛賊)을 토벌하였는데 드디어 혜공왕을 시해(弑害)하고 자립(自立)하여 왕이 되었으니 경신(敬信)도 이에 가담하였었다. 선덕왕이 승하하고 아들이 없으매 여러 신하들이 의론하여 왕족(王族)의 아들 주원(周元)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려 하였으나 주원의 집이 서울 북쪽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때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크게 불어 건너다니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의 보위(寶位)는 천명(天命)에 관련되어 본디 사람의 모략(謀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폭우(暴雨)는 하늘이 혹여 주원(周元)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함이 아니겠는가? 지금 상대등(上大等) 경신(敬信)은 평소에 덕망이 높아 임금의 풍도(風度)가 있다."

하였다. 이에 여러 의논이 일치되어 경신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윽고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萬歲)를 불렀다. 이에 주원은 명주(溟州)에 물러가 거주하였다.

○2월 왕이 그의 고조(高祖) 대아찬(大阿飡) 법선(法宣)을 추봉(追封)하여 현성대왕(玄聖大王)을 삼고, 증조(曾祖) 이찬(伊飡) 의관(義寬)을 추봉하여 신영대왕(神英大王)을 삼았으며, 조(祖) 이찬(伊飡) 위문(魏文)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을 삼고, 고(考) 일길찬(一吉飡) 효양(孝讓)을 추봉하여 명덕대왕(明德大王)을 삼았으며, 모(母) 박씨(朴氏)를 추봉하여 소문태후(昭文太后)를 삼고, 아들 인겸(仁謙)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를 삼았다. 그리고 성덕대왕(聖德大王)?기성대왕(開聖大王  - 선덕왕(宣德王)의 생부(生父))의 두 묘주(廟主)를 옮기고[遷] 할아버지와 아버지로서 부묘(?廟  - 합사(合祀)함)하였으며, 문무 백관(文武百官)에게 작(爵) 1급(級)씩을 더하였다.

○이찬(伊飡) 병부령(兵部令) 충렴(忠廉)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는데, 제공이 곧 사퇴(辭退)하니 이찬 세강(世强)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3월 선덕왕비(宣德王妃) 김씨(金氏)를 외궁(外宮)으로 내보내고 벼[租] 3만 4천 석(石)을 내려주었다.

○패강진(浿江鎭)에서 붉은 까마귀[赤烏]를 진상(進上)하였다.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쳤으니 위계(位階)는 급찬(級飡)으로부터 이찬(伊飡)까지가 이를 맡았다.

○당초에 정관(政官)은 대사(大舍) 1인과 사(史) 1인으로서 유사(有司)를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려(僧侶) 가운데 재주와 조행(操行)이 있는 자를 가려 이에 충당하였다.

 

 

 

병인년(丙寅年; 786)

신라 원성왕(元聖王) 2년

당(唐)나라 정원 2년

 


여름 4월 나라의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잎과 모맥(牟麥)이 모두 해를 입었다.

○김원전(金元全)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덕종(唐德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김원전이 이르러 그 표문(表文)과 진봉(進奉)한 물품을 살펴 갖추 알았다. 경(卿)은, 성품이 신의(信義)에 힘쓰고 진순(眞純)한 뜻을 지켜 일찍부터 중국을 받들어 성교(聲敎)를 준행(遵行)하였다. 번방(藩邦)을 안무(安撫)하여 모두 유풍(儒風)을 본받았고 예법(禮法)이 흥행(興行)하여 역내(域內)가 편안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대국을 섬겼고 술직(述職)12)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자주 사신을 보내어 공헌(貢獻)을 잘 닦았다. 비록 바다는 넓고 도로는 먼데도 사절(使節)의 왕래는 옛 규례를 따라 충성이 더욱 드러났으니 깊이 가상히 여겨 감탄하는 바이다. 짐(朕)은 만방(萬方)에 군림(君臨)하여 인민(人民)의 부모(父母) 노릇을 하였거니와, 중화(中華)와 외방(外方)이 문물 제도(文物制度)를 같이 함으로서 대화(大和)의 기상(氣象)을 이루어 모두 인수(仁壽)의 역(域)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경(卿)은 마땅히 나라 안을 안보(安保)하여 백성의 구휼에 힘쓰고, 길이 번신(藩臣)이 되어 해동(海東)을 편안하게 하라. 이제 그대에게 나금(羅錦)?능채(綾綵) 등 20필(疋)과 의복 한 벌과 은합(銀?) 1구(口)를 하사(下賜)하니, 물건이 이르거든 영수(領受)할 것이며, 왕비에게는 금채(錦綵)?능라(綾羅) 등 20필(疋)과 압금선 수라군의(押金線繡羅裙衣  - 금식을 박아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대접[銀梡] 1개를 내린다. 대재상(大宰相) 1인에게는 의복 한 벌과 은대접 1개를 내리고, 차재상(次宰相) 2인에게는 의복 각 한 벌 은대접 각 1개를 내리니, 그대는 마땅히 영수(領受)하라."

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王都]의 백성들이 굶주리니 벼[粟] 3만 3천 2백 40석(石)을 내어 진급(賑給)하였고, 겨울 10월에 또 벼 3만 3천 석을 내어 나누어 주었다.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兵法》 15권(卷)과 화령도(花鈴圖) 1권을 올리니, 굴갑현령(屈岬縣令)을 제수(除授)하였다.

 

 

 

정묘년(丁卯年; 787)

신라 원성왕 3년

당(唐)나라 정원 3년

 


봄 2월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왕이 직접 신궁(神宮)에 제사하고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여름 5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辛巳)에 일식(日飾)이 있었다.

○국통(國統  - 전국의 승려를 통솔하는 승려)의 소년서성(少年序省) 2인과 주통(州統  - 주(州)의 승려를 통솔하는 승려) 9인과 군통(郡統  - 군(郡)의 승려를 통솔하는 승려) 18인을 두었는데, 모두 승려(僧侶)로써 제수(除授)하였다.

 

 

 

무진년(戊辰年; 788)

신라 원성왕 4년

당(唐)나라 정원 4년

 


봄 비로소 독서 출신과(讀書出身科)를 정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예기(禮記》나 《문선(文選》을 읽어 그 문의(文義)에 통(通)하고 겸하여 《논어(論語》?《효경(孝經》에 밝은 자를 상등(上等)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中等)으로 하며, 《곡례》《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下等)으로 하고, 만약 5경(五經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과 3사(三史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서적(書籍)에 널리 통하는 자는 초탁(超擢)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이전에는 다만 궁술(弓術)로써 인재를 선택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개혁(改革)하였다. 《삼국사(三國史》 지(志)에 의하면 "교수(敎授)의 법(法)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춘추좌씨전》?《문선(文選》나누어 업(業  - 전공과목)을 삼게 하였다. 박사(博士)나 조교(助敎)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효경》으로서, 혹은 《춘추좌씨전》?《모시》?《논어》?《효경》으로서, 혹은 《상서》가르쳤다. 여러 학생(學生)들이 글을 읽는데 있어서는 세 가지 품위(品位)로서 출신(出身)하였으니, 《춘추좌씨전》이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을 통하고 겸하여 《논어》?《효경》에 밝은 자는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는 중품(中品)으로 하며, [곡례]?[효경]을 읽은 자는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만약 5경(五經)?3사(三史)와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서적(書籍)에 아울러 통하는 자는 초탁(超擢)하여 등용(登用)하고, 혹은 산학 박사(算學博士)나 조교(助敎) 1인을 차출하여 《철경(綴經  - 철술(綴術)》?《삼개(三開》?《구장(九章  - 구장산술(九章算術)》?《육장(六章》을 가르치게 하였다. 무릇 학생들은 위계(位階)가 대사(大舍) 이하로부터 무위(無位)에 이르고, 나이는 15세로부터 30세에 이르는 자로서 모두 충당하였다. 9년을 한정하여 만약 노둔(魯鈍)하여 성과(成果)가 없는 자는 내쫓고, 만약 재기(才氣)는 있으나 숙달(熟達)하지 못한 자는 비록 9년이 넘더라도 재학(在學)하게 하였으며, 위계가 대내마(大奈麻)나 내마(奈麻)에 이른 연후에 출학(出學)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가을 나라의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번졌으며 도적이 많았으니,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안무(安撫)시켰다.

 

 

 

기사년(己巳年; 789)

신라 원성왕 5년

당(唐)나라 정원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甲辰)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한산주(漢山州)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곡식을 내어 진휼(賑恤)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子玉)으로서 양근현 소수(楊根縣小守)를 삼으니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반박하기를,

"자옥은 문적 출신(文籍出身)이 아니니 외관(外官)에 보직(補職)시킬 수 없습니다."

하니, 시중(侍中)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문적 출신은 아니지만 일찍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학생(學生)이 되었으니 또한 등용할만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자로(子路)가 자고(子羔  - 성명은 고시(高柴)이니, 공자(孔子)의 고제(高弟)임.)로 하여금 비읍(費邑)의 재신(宰臣)을 삼으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남의 아들을 해치게 한다."라고 하였거니와, 이는 대개 자고가 학문이 미숙한데도 갑자기 백성을 다스리게 하면 해를 끼치기에 알맞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옛 사람은 반드시 학문(學問)이 숙달한 연후에 벼슬을 하였는데, 만약 배우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면, 혹은 백성의 재물을 수탈(收奪)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혹은 까다롭게 살피는 것으로 잘난체하여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모초(毛肖)는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를 안다고 이를만 하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790)

신라 원성왕 6년

당(唐)나라 정원 6년

 


봄 정월 종기(宗基)를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전주(全州) 등 일곱 고을의 백성을 징발하여 벽골제(碧骨堤)를 증축(增築)하였다.

○웅천주(熊川州)에서 붉은 까마귀[赤烏]를 진상(進上)하였다.

○3월 일길찬(一吉飡) 백어(伯魚)를 북국(北國 - 발해(渤海)를 말함.)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태백성(太白星  - 금성(金星))과 진성(辰星  - 방성(房星))이 동정성(東井星) 자리에 모였다.

○5월 한산주(漢山州)와 웅천주(熊川州)의 백성이 굶주리므로 곡식을 내어 진휼(賑恤)하였다.

 

 

 

신미년(辛未年; 791)

신라 원성왕 7년

당(唐)나라 정원 7년

 


봄 정월 왕태자(王太子) 인겸(仁謙)이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이찬(伊飡) 제공(悌恭)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웅천주(熊川州)의 대사(大舍) 향성(向省)의 아내가 한 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3자[尺]나 내렸고 얼어 죽은 자도 있었다.

○시중(侍中) 종기(宗基)가 사퇴(辭退)하니 대아찬(大阿飡) 준옹(俊邕)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12월 서울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내성시랑(內省侍郞) 김언(金言)을 삼중아찬(三重阿飡)으로 삼았다.

 

 

 

임신년(壬申年; 792)

신라 원성왕 8년

당(唐)나라 정원 8년

 


가을 7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미녀(美女)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8월 왕자(王子) 의영(義英)을 책봉(冊封)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다.

○상대등(上大等) 충렴(忠廉)이 졸(卒)하니 이찬(伊飡) 세강(世强)으로서 상대등을 삼았고, 시중(侍中) 준옹(俊邕)이 병으로 사퇴하니 이찬 숭빈(崇斌)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룻날 임자(壬子)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계유년(癸酉年; 793)

신라 원성왕 9년

당(唐)나라 정원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奈麻) 김뇌(金惱)가 흰 꿩[白雉]을 바쳤다.

 

 

 

갑술년(甲戌年; 794)

신라 원성왕 10년

당(唐)나라 정원 10년

 


봄 2월 지진(地震)이 있었다.

○태자(太子) 의영(義英)이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侍中) 숭빈(崇斌)이 사퇴(辭退)하니 잡찬(?飡) 언승(彦昇)으로서 시중을 삼았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白烏]를 바쳤다.

○궁성(宮城)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을해년(乙亥年; 795)

신라 원성왕 11년

당(唐)나라 정원 11년

 


봄 정월 고(故) 태자(太子) 인겸(仁謙)의 아들 준옹(俊邕)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준옹은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唐)나라에 들어갔다가 본국(本國)에 벼슬하여 대아찬(大我飡)?파진찬(波珍飡)?재상(宰相)?시중(侍中)?병부령(兵部令) 등의 관직을 거쳤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罪囚)를 다시 너그럽게 심사(審査)하여 억울한 자를 놓아주었는데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병자년(丙子年; 796)

신라 원성왕 12년

당(唐)나라 정원 12년

 


봄 서울에 기근(饑饉)이 들고 역질(疫疾)이 유행하니 왕이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해 주었다.

○여름 4월 시중(侍中) 언승(彦昇)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이찬(伊飡)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삼았다.

 

 

 

정축년(丁丑年; 797)

신라 원성왕 13년

당(唐)나라 정원 13년

 


가을 9월 나라 동쪽 지방에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쳤고, 큰 물[大水]가 들어 산사태가 났다.

○시중(侍中) 지원(智原)이 사퇴(辭退)하니 아찬(阿飡) 김삼조(金三朝)로서 시중을 삼았다.

○좌이방부(左理方府)의 사(史) 5인을 감원(減員)하였다.

 

 

 

무인년(戊寅年; 798)

신라 원성왕 14년

당(唐)나라 정원 14년

 


봄 3월 궁성(宮城) 남루(南樓)에 화재(火災)가 났다.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塔)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屈自郡)의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한 번에 3남(男) 1녀(女)를 낳았다.

○겨울 12월 왕이 훙(薨)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였고, 태자(太子) 준옹(俊邕)이 즉위(卽位)하였으며, 유명(遺命)으로서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영구(靈柩)를 불살랐다.

○이때에 김생(金生)이란 자가 있어 글씨에 능(能)하였는데 다른 예술(藝術)에는 관심(關心)이 없었고, 또 불교(佛敎)를 좋아하여 은거(隱居)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으며 예서(隷書)?행서(行書)?초서(草書)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境地)에 들어갔으니, 학자(學者)들이 전하며 보물로 여긴다.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 연간(崇寧年間; 1102~1106)에 고려(高麗)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나라에 들어가 변경(?京)에서 사관(舍館)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때에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이혁(李革)이 휘종(徽宗)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사관에 와서> 그림 족자(簇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홍관이 김생의 행서(行書)와 초서(草書) 1권(卷)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늘 왕 우군(王右軍  - 진(晉)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진적(眞蹟)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므로, 홍관이 말하기를,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라고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天下)에 왕 우군을 제켜놓고 어찌 이같은 묘필(妙筆)이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홍관이 누차 변명하였으나 마침내 믿지 않았다. 또 요극일(姚克一)이란 자가 있어 벼슬이 시중 겸 시서학사(侍中兼侍書學士)에 이르렀는데 필력(筆力)이 굳건하여 구양순(歐陽詢)의 솔경법(率更法)의 경지를 터득했으니 비록 김생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희귀(稀貴)한 솜씨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