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신라 漢州 唐恩郡 車城縣(평택시 안중면)의 고려시대 지명

吾心竹--오심죽-- 2010. 2. 2. 19:39

동래한 이원(李瑗)이 송악산(松嶽山) 아래 살았다?

1999년에 간행된 죽산안씨 대동보에는 우리나라 대다수 안씨들이 같은 사람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글을 싣고 있다. [원문의 출전은 순흥안씨 족보라고 함.]
    죽산안씨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원(李瑗:一諱 瓊)공은 중국(中國)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唐憲宗) 원화 2년(元和 二年,서기 807) 신라 애장왕 8년 정해(新羅哀莊王八年丁亥)에 동생 이황(李璜)공과 같이 우리나라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정착하셨다.
    이때 광주인(廣州人) 이 그 성주(城主)를 죽이는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할 때 형제(兄弟:瑗,璜)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평정(平定)하였다. 이에 국왕(國王)이 두 형제분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시며 나라를 평안이 하였다고 안국지신(安國之臣) 이라 말씀하시고 형인 원(瑗)공에게 안씨 성(安氏 姓)을 내리시고 동생 황(璜)공 에게는 본성(本姓)을 지키라고 하시며 이씨 성(李氏 姓)을 그대로 하고 고성군(固城君)에 봉(封)하시었다. 원(瑗)공 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공이 계시니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4년(서기864) 갑신년(甲申年)에 왜란(倭亂,外亂)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出征)하여 이를 평난(平亂) 하시었다. 이에 국왕(國王)이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고 기뻐하시며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칭찬 하시고 이름을 바꾸어(更名) 주시며 아울러 봉군 하시니 맏이 지춘(枝春)공을 방준(邦俊)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封)하시고, 둘째 엽춘(葉春)공을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하시고, 셋째 화춘(花春)공을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封)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安氏가 시작 되었다.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瑗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八O七) 新羅哀莊王七年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瑗)兄弟 挺身安國 兄弟安國 故賜姓安 以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曰 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國安氏 自此始焉
위의 짧은 글은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해 보면 신라말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수두룩하여 이것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조선말에 조작해낸 설이 분명하다는 것은 이미 여러 글에서 밝혔다. 여기서는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교역로로 보아도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밝혀보겠다.

이원이 동래했다는 807년 무렵 신라와 당의 교역은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육로로는 중간에 발해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경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이원이 당에서 신라로 왔다면 해로를 통해서 왔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주된 대당 교역항은 당항성(黨項城)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의 정확한 위치는 명문화된 기록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으로 보는데에 큰 이의가 없다. 장보고(張保臯, ?∼846)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한 것은 그 보다 상당히 후대인 828년 당에서 귀국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원이 807년에 신라로 와서 개성의 송악산 아래에 정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개성은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한주(漢州)의 송악군(松岳郡)이었는데, 이 지역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의 중요성이 없었던 곳이다. 삼국 간의 주요 쟁패 지역도 아니고, 신라 통일 후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한미한 곳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원이 당항성을 통해 신라로 입국했다면 당항성이나 수도 경주와 멀리 떨어진 벽촌인 송악산 아래까지 가서 정착할 이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피해 일부러 가장 궁벽한 곳으로 가서 거주했다고 할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일부러 벽지로 찾아 들어간 사람이 후에 광주 지역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시 광주는 개성과는 비할 수 없는 주요 지역으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도 중국서 와서 신라 말도 잘 모르는 한미한 벽지에 숨어살던 사람이 진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송악산 아래 숨어 살던 이원의 세 아들이 왜구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왜구가 굳이 멀리 돌아서 벽촌인 개성 쪽으로 침입했을 리는 만무하고, 침입한다면 그보다는 거리도 훨씬 가깝고 물자도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침입했을 것이다. 그런데 개성에 살던 사람들이 무슨 수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한단 말인가? 그들이 신라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신라는 골품제 사회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서 온 산골에 숨어 사는 사람의 아들들이 무슨 수로 중앙관직에 진출했단 말인가?

개성 지역이 역사에 부각되는 것은 궁예가 898년에 후고구려의 도읍지로 정한 후 부터이다. 이후 905년에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지만, 고려 개국 후인 919년에 왕건이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겨 이후 고려의 국도가 된 것이다. 개성 근처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가 중국과의 교역항이 된 것은 고려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뒤의 일이다.

따라서 이원이 807년에 동래하여 송악산 아래 살면서 광주의 반란을 평정하고, 그 아들들이 864년 왜구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것은 당시 사정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말로,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으며, 조선 말에 지어낸 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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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잡지 - 신라 지리
한주한주(漢州) / 당은군(唐恩郡)
[번역문]

"당은군(唐恩郡)[주석1065]은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주석1066]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영현이 둘이었다. 차성현(車城縣)[주석1067]은 본래 고구려 상홀현(上忽縣)[주석1068]<[상(上)은] 차(車)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용성현(龍城縣)[주석1069]이다. 진위현(振威縣)[주석1070]은 본래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주석1071]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원문]

唐恩郡 本高句麗唐城郡 景德王改名 今復故 領縣二 車城縣 本高句麗上一作車忽縣 景德王改名 今龍城縣 振威縣 本高句麗釜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주석

  • 1065) 당은군(唐恩郡)
    신라 漢州(하남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京畿道 華城郡 南陽面. 이 지역은 신라의 주요한 對唐交易路로서, 본서 권5∼11 신라본기에서 선덕·문무왕조에는 黨項城이라고 나오며, 헌덕왕 15년조에 의하면, 水城郡(화성군 봉담면)을 唐恩縣에 병합시켰다. 흥덕왕 4년조에 唐恩郡을 唐城鎭으로 고쳤다는 기사 이후, 헌안왕 2년조 및 권50 弓裔傳에는 각각 唐城郡 또는 唐城이라고 나온다.
  • 1066) 당성군(唐城郡)
    신라 漢州 唐恩郡(화성군 남양면)의 고구려 및 고려시대 지명. 唐恩郡을 고려 초에 다시 唐城郡으로 복구하였고, 현종이 水州(화성군 봉담면)의 屬郡으로 삼았다가 뒤에 仁州(인천광역시)로 이속시켰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때에 知益州事로 승격하였고, 뒤에 다시 높여서 江寧都護府로 삼았다가, 또 높여서 益州牧으로 삼았다. 충선왕이 낮추어 南陽府로 삼았다. 조선 태종이 都護府로 고쳤다. 인조가 縣으로 낮추었고, 효종이 복구하였다. 현종이 다시 낮추었다가, 도로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 1067) 차성현(車城縣)
    신라 漢州 唐恩郡(화성군 남양면)의 領縣으로서, 현재의 京畿道 平澤市 安仲面 龍城里 일대.
  • 1068) 상홀현(上忽縣)
    신라 漢州 唐恩郡 車城縣(평택시 안중면)의 고구려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車忽縣이라고도 나온다.
  • 1069) 용성현(龍城縣)
    신라 漢州 唐恩郡 車城縣(평택시 안중면)의 고려시대 지명. 車城縣을 고려 초에 龍城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水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현재의 京畿道 平澤市 安仲面 龍城里 일대에 해당한다.
  • 1070) 진위현(振威縣)
    신라 漢州 唐恩郡(화성군 남양면)의 領縣으로서, 현재의 京畿道 平澤市 振威面. 다만 본서에서 振威縣을 唐恩郡의 領縣이라고 한 것과 달리, 《高麗史》 地理志나 《東國輿地勝覽》에서는 水城郡의 領縣이라고 하였다. 고려가 水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후에 높여서 縣令官으로 삼았다. 조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 1071) 부산현(釜山縣)
    신라 漢州 唐恩郡 振威縣(평택시 진위면)의 고구려 때 지명. 淵達部曲, 金山縣, 松村活達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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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잡지 - 신라 지리
한주(漢州) / 송악군(松岳郡)
[번역문]

"송악군(松岳郡)[주석1163]은 본래 고구려 부소갑(扶蘇岬)[주석1164]이었다. 효소왕 3년(694)에 성을 쌓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그대로 썼다. 우리[고려] 태조가 개국하여 왕기(王畿)로 삼았다. 영현이 둘이었다. 여비현(如羆縣)[주석1165]은 본래 고구려 약두치현(若豆恥縣)[주석1166]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송림현(松林縣)[주석1167]인데, 제4대 광종이 그 땅에 불일사(佛日寺)[주석1168]를 창건하여, 그 현(縣)을 동북쪽으로 옮겼다. 강음현(江陰縣)[주석1169]은 본래 고구려 굴압현(屈押縣)[주석1170]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원문]

松岳郡 本高句麗扶蘇岬 孝昭[주석136]王三年築城 景德王因之 我太祖開國爲王畿 領縣二 如羆縣 本高句麗若豆恥縣 景德王改名 今松林縣 第四葉光宗創置佛日[주석137]寺於其地 移其縣於東北 江陰縣 本高句麗屈押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주석

  • 1163) 송악군(松岳郡)
    신라 漢州(하남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京畿道 開城市(북한 開城直轄市 開城市). 신라 효공왕 2년(898)에 궁예가 후고려의 國都를 松岳郡에 정하였다가, 同 9년(905)에 도읍을 鐵圓郡(철원읍)으로 옮겼다. 고려 태조가 개국하여 同 2년(919)에 松岳之陽을 王畿로 삼아 開州라 하고, 宮闕을 개창하고 五部·坊里를 정하였다. 광종이 開京을 고쳐서 皇都라고 하였다. 성종이 五部·坊里를 다시 정하고 開城府로 삼아 赤縣 6, 畿縣 7을 관할케 하였다. 현종이 府를 폐지하고 開城縣令을 두어 長湍縣令과 더불어 京畿 10縣을 관할케 하였으며, 또 五部·坊里를 다시 정하고, 京都 羅城을 완성하였다. 문종이 다시 開城府를 두고 11縣을 모두 관장케 하였으며, 西海道 平州 任內의 牛峯郡을 떼어 그에 예속시켰다. 충렬왕이 府尹을 두어 도성 안을 관장시키고, 도성 밖의 京畿 지역은 開城縣(개풍군 서면 개성리)에 이속시켰다. 조선 태조가 漢陽으로 천도하면서, 松都開城留後司로 삼았다. 세종이 開城府留守로 고쳤다. 세조가 京畿에 예속시키고 留守를 폐지하였으며, 예종이 다시 留守를 두었다.
  • 1164) 부소갑(扶蘇岬)
    신라 漢州 松岳郡(개성시)의 고구려 때 지명. 《高麗史》 권1 高麗世系에 新羅 監干 八元이 風水術을 잘 하여, 원래는 郡이 扶蘇山(송악산) 북쪽에 있는 것을 보고, 五冠山(극락봉) 摩訶岬에 거주하던 王建 4代祖 康忠에게 “扶蘇郡을 山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서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三韓을 통합할 자가 태어나리라.”라고 말하였다. 康忠이 郡民들과 함께 그대로 하여 郡 이름을 松岳郡으로 고치고 郡上沙粲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松岳郡 설치 이전의 扶蘇郡은 송악산 동북쪽의 開豊郡 嶺南面 龍興里(북한 開城直轄市 開城市 龍興里) 일대였다고 보인다.
  • 1165) 여비현(如羆縣)
    신라 漢州 松岳郡(개성시)의 領縣으로서, 현재의 京畿道 長湍郡 津西面 佛日里 일대(북한 開城直轄市 長豊郡 仙跡里 부근).
  • 1166) 약두치현(若豆恥縣)
    신라 漢州 松岳郡 如羆縣(장단군 진서면)의 고구려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若只豆恥縣 또는 之蟾 또는 朔頭 또는 衣頭라고도 나오며, 《三國史節要》 권10 고구려 보장왕 27년 11월조에 인용된 고구려지리지에서는 衣頭 대신 夜頭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 1167) 송림현(松林縣)
    신라 漢州 松岳郡 如羆縣(장단군 진서면)의 고려시대 지명. 如羆縣을 고려 초에 松林縣으로 고쳤다. 광종이 그 땅에 佛日寺를 창건하여, 縣을 동북쪽으로 옮겼다. 현종이 長湍縣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문종이 開城府에 직접 예속시켰다. 후에 監務을 두었다. 조선 태종이 臨江(장단군 강상면)에 속하게 하였다.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長湍都護府(장단군 장도면)의 서쪽 5리에 있었다고 하니, 里數를 따져 볼 때 고려·조선시대 松林縣의 위치는 현재의 長湍郡 長道面 西岩里 일대에 해당하며, 고려 초의 松林縣은 그 서쪽의 同 津西面 佛日里 일대에 해당한다.
  • 1168) 불일사(佛日寺)
    고려 광종이 松林縣 治所를 옮기고 그 자리에 세운 절. 그 장소는 開城市 동북쪽으로 인접한 長湍郡 津西面 佛日里 일대에 해당한다.
  • 1169) 강음현(江陰縣)
    신라 漢州 松岳郡(개성시)의 領縣으로서, 현재의 黃海道 金川郡 西北面 江陰里 일대(북한 黃海北道 平川郡 燕鴻里 부근). 고려 현종이 開城縣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문종이 開城府에 예속시켰다. 인종이 처음으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효종이 牛峯(금천군 우봉면)을 병합시켜 郡으로 삼고 金郊 북쪽, 吾道川 남쪽에 邑을 세워 金川郡(금천군 금천면)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이 治所를 吾道川 북쪽, 渚灘 남쪽(평산군 금암면 저탄리)으로 옮겼는데, 영조가 옛 자리로 돌려 보냈다. 조선 중기에 金川郡으로 바뀌기 전의 江陰縣治는 金川郡 西北面 江陰里에 있었던 듯하다.
  • 1170) 굴압현(屈押縣)
    신라 漢州 松岳郡 江陰縣(금천군 서북면)의 고구려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屈於押 또는 江西라고도 나온다. 中宗壬申刊本의 『紅西』는 《高麗史》 및 《東國輿地勝覽》 권43 江陰縣條에 따라 『江西』로 고쳤다.
  • 136)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照」. 舜 「照」. 各卷 以下 同.
  • 137)
    原本 「曰」. 鑄字本·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jabkiDetail?url=jabkidetail&sn=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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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 / 구도 개성 유후사 (舊都開城留後司)

◎ 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2년 기묘【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5년.】정월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개주(開州)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개성부(開城府)로 고쳤고,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글안(契丹) 성종 황제(聖宗皇帝)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開京)에 들어와서 궁궐과 시민의 집을 불태워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현종〉 9년 무오에 개성부를 파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의 3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현종〉 20년 기사에【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7년.】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서울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임금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 등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인과 공장(工匠) 8천 4백 50인을 모아 나성(羅城)을 쌓으니, 둘레가 1만 6천 60보(步), 높이가 27척이며, 대문(大門)이 4이니, 동문(東門)을 숭인(崇仁), 남문(南門)을 회빈(會賓), 서문(西門)을 선의(宣義), 동남문(東南門)을 보정(保定)이라 한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승격하고,【김지(金沚)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임인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덕수(德水)·강음현(江陰縣)·정주(貞州)·장단(長湍)·임강(臨江)·토산(兎山)·임진(臨津)·송림(松林)·마전(麻田)·적성(積城)·파평현(坡平縣)을 관할하였다.”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이하를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따로 개성 현령(開城縣令)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에【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6년.】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 42보이다.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漢陽)에 옮기고, 4년 을해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하고 유후(留後)·부유후(副留後)·단사관(斷事官)·경력(經歷)·도사(都事)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 현령(開城縣令)을 파하였다.【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이라 한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진산(鎭山)은 송악(松岳)이다.【일명(一名) 숭악(崧岳)이다. 송나라 서긍(徐兢)의 《봉사도경(奉使圖經)》에 이르되, “경성(京城)의 진산은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꼭대기에 사당 셋이 있으니,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첫째는 성황당(城隍堂)이요, 둘째는 대왕당(大王堂)이요, 세째는 국사당(國師堂)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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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 碧瀾渡
고려시대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이자 요충지.

고려왕조의 선대는 강충(康忠)이나 작제건(作帝建)의 혼인설화가 모두 바다와 관련되어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신라 말에 일어났던 해상세력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고려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통교를 통해 교역하였다. 934년(태조 17) 7월에는 고려 상선이 후당(後唐) 등주(登州)에 가서 교역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의 배가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하였으며, 958년(광종 9)에는 후주(後周)에서 비단 수천필로 구리를 무역해 온 기록도 있다. 이러한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벽란도였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碧瀾亭)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宋)을 비롯하여 요(遼)·금(金)·일본(日本) 등 주변 나라와 행해지고 있었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 각국의 해상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옴으로써,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특히 송과의 무역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때 항로는 남북항로가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산동 등주(登州) 방면에서 동북 직선로에 의해 대동강 어구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고, 남선 항로는 명주(明州)에서 동북으로 흑산도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는데, 문종대 까지는 주로 북선항로가, 이후에는 주로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상행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이 올때에도 우벽란정에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 사신을 대접하였으며,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는 등 외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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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tw | 2009/05/19 12:58 | 안씨동원보 허구 입증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