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가야(伽倻)·가라(加羅)·가락(駕洛)은 '나라'라는 뜻이다."

吾心竹--오심죽-- 2010. 1. 31. 17:20

역사 게시판

   (2002-06-29 20:32:28, Hit : 1255
 '가야'는 어떤 뜻인가?
'가야'는 어떤 뜻인가?  

"가야(伽倻)·가라(加羅)·가락(駕洛)은 '나라'라는 뜻이다."

고구려·백제·신라와 더불어 한 시대를 장식한 나라 가야.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아니다. '가야 연맹(聯盟)'이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가야는 (최소한) 5, 6 개의 '가야(伽倻)'가 있었고, 그 '가야'들이 한 나라를 중심축으로 삼아 연합한 일종의 '연방국가'였다.

『삼국유사』「기이(紀異)」편에 있는 〈5 가야〉라는 글에서, 아라(阿羅)가야 , 고령가야, 대가야(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소가야(小伽倻)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삼국유사』에 적힌「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이라 하거나 또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 가야국 중의 하나다.“라고 적고 있다.

또 뒤이어서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으로 돌아가서 임금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가야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대여섯개의 '가야국'으로 이루어진 동맹 내지는 연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라 이름마다 뒤에는 '가야'나 '가라'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아라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김수로왕이 세웠다는 나라 이름도 '대가락'이다. 이 사실은 가야나 가락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으리라는 추측을 제공한다.

즉 한자 뜻과는 상관없이 소리로 읽었을 때, 가야나 가라, 가락은 다 같은 소리로 읽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 ‘가라, 가락’은 무슨 뜻일까? 고구려 말로 성(城)을 ‘구루’라 한다고 기록에 나와 있고 우리말에도 마을보다 규모가 큰 거주지를 ‘고을’이라고 했으니 ‘가라, 가락’은 ‘구루니(만주어로「나라(:국.國)」라는 뜻)’와 같이 ‘나라’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는 고구려 말처럼 ‘성(城)’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가야는 단군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으리라고 본다. 예를 들면 금관‘가야’ = 금관‘가라’ = 금관‘나라’ 아라‘가야’ = 아라 ‘가라’ = 아라 ‘나라’ 대‘가야’ = 대‘가라’= 대(大)‘나라’= 큰 ‘나라’ 성산‘가야’ = 성산‘가라’=성산‘나라’ 라는 식으로 읽을 수 있다.(『삼국유사』「기이편」〈5가야〉에서, “라羅 는 야耶라고도 쓴다.”고 일연이 주석을 달아놓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가‘야’는 가‘라’이며 원래는 가라라고 쓰다가 가야라고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5가야(또는 6가야)는 5개의 ‘나라’ 가 오늘날의 미합중국처럼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을 것이며, 마치 미국이나 스위스가 여러개의 주州가 따로 있고 그 안에서는 대통령과 같은 권한을 가진 주지사가 다스리지만 그 주지사들은 워싱턴에 있는 연방정부의 대통령에게 복종해야 하는 ‘지방분권적’인 권력구조이듯이 각각 나라를 맡은 ‘왕’들이 있었어도 연맹을 대표하고 가장 권력이 강한 나라의 왕에게 모든 다른 왕들이 복종하는, 그러면서도 권력이 나뉘어져 있어 각 가야 안에서의 문제는 각 가야를 맡은 왕들이 처리하고 전쟁이나 외교 때에만 모든 가야국들을 대표하는 최고 왕이 나서는 방식으로 나라를 꾸려나갔을 것이다.

단군조선 때나 고구려 초기와 같은 정치운영 방식이다. 고구려나 백제·신라에서 이런 방식이 사라졌어도, 가야만은 끝까지 이런 지방분권적인 연방 왕국을 꾸려나가다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왜일까?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데로 ‘가야가 미개(?)하고 「부족 연맹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나중에 일어난 신라에게 무너져 버린 것일까?

하지만 김수로왕 때에 신라(사로국) 주변의 영토분쟁을 중재해 주었고 석탈해가 김수로왕에게 쫓겨나서 경북으로 달아나야 했을 정도로 강했던 나라가 ‘미개(?)한 부족 연맹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고고학적인 성과는 가야의 일반인들에게까지 철기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고(일반인급 무덤에서 철제 무기와 갑옷, 쇠로 만든 말 갑옷이 나왔다) 기록도 초기에는 가야가 신라보다 우세하고 강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가야를 ‘부족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가야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오랫동안 지방분권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은, 어디까지나 정치 체제를 그대로 이어나가려고 하는 가야 지배층(을 비롯한 가야인 전체)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봐야지 이웃나라에서 정치 체제가 바뀌는 것을 몰랐거나 가야 자체가 ‘미개한’ 나라여서 그랬다고 볼 수는 없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는 1세기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고(5세기). 그러고나서도 다시 1세기가 흐른 뒤에야(6세기) 일반인이 불교 승려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 신라는 다른 나라들이 왕이라는 칭호를 쓸 때에도 이사금이나 마립간이라는 명칭을 고집하다가 진흥왕때 가서야 ‘왕王’ 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이는 신라가 외국 문물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민 정서 자체가 보수적이고 토착적이었기 때문에 외국 문물을 알고 있어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신라뿐 아니라 한반도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가야도 이런 보수성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 특히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 맨 처음에는 ‘나라’라는 뜻으로 ‘가라’라고 하고 그 앞에 나라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던 것이 후대에 와서 좋은 한자만 고른 ‘가락(駕洛 : 여기에서 ’가‘駕 는 천자의 수레라는 뜻이다)’으로 바뀌어서 내려져 온 것이다. 그리고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자리바꿈 한 것이고. 단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가야는 스스로를 천손국으로 여기고 천자국(天子國)으로 여겼으리라는 사실이다.

가야의 후손인 사람이 적은 가야의 역사책(『삼국유사』에 적힌「가락국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책)의 이름이 『개황록(開皇錄)』이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시대 이전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나 스스로의 조상에게 ‘황(皇)’이라는 말을 붙였다는 것은 후손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야도 삼국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여겼던 것이다.(단, 왕들의 칭호는 '왕' 이나 '태왕', '대왕' 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