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당은포에서 곧바로 등주로 가는 황해 중부 직항로였다

吾心竹--오심죽-- 2009. 12. 23. 12:30

<1069회>천개석의 비밀(23) - 글 김하기 그림 이상열
2009년 11월 22일 (일) 21:19:57 전상헌 기자 honey@ksilbo.co.kr
   
 
   
 
42. 천개석의 비밀(23)



김문권 일행을 실은 신라 무역선은 개운포를 떠나 대마도 나니와로 순항하고 있었다.

그동안 신라와 일본과 당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나당의 뱃길은 육로처럼 눈에 익숙하고 간편해졌다.

지금까지 신라는 두 개의 해로를 이용해 왔다. 하나는 당은포에서 덕적도로 나가 황해도 연안을 따라 북상하는 황해 북부 연안항로와 또 하나는 당은포에서 곧바로 등주로 가는 황해 중부 직항로였다. 그러나 김문권이 숙위로 당을 떠날 때는 영산강 회진 나루에서 중국 양자강의 양주지역으로 들어가는 남방 항로가 개척되더니 지금은 개운포에서 대마도 나니와 완도 흑산도를 통해 양주로 갈 수 있는 동남부 항로가 새롭게 개설되었다. 신라와 일본과 중국과의 물물 교역량이 크게 늘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동해와 남해의 거친 파도를 힘차게 헤치고 가는 신라 무역선도 옛날보다 한결 튼튼해졌다.

김문권이 선주(선장)에게 말했다.

“우리 신라배는 당선과 왜선과는 달리 구조적으로 튼튼하지 않소?”

“당연하죠. 얼마 전에 당선이 양주 앞바다에서 파선했고 왜의 견당선이 신라 앞바다에서 침몰했지요. 그러나 우리 신라선은 보다시피 파선 한 번 한 적 없소, 그래서 모두들 한선(韓船), 한선하지 않소.”

선주의 말대로 한선은 예로부터 그 공법이 매우 과학적이면서 정교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내륙에 하천이 많은 신라는 일찍부터 수로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배가 많이 건조되면서 조선술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패를 다투는 삼국시대는 수군의 역할과 비중이 커져 군선이 크게 발달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배들이 건조되고 내륙의 물길과 연안항로들이 개척되었다.

신라 군선의 발달은 조운과 무역을 발달시켜 세곡선과 무역선도 크고 정교하게 바뀌었다.

김문권이 타고 가는 쌍돛대 범선인 신라 무역선은 둥근 사각형 구조로 얼핏 보기에도 그 매우 안정되고 튼튼하게 보였다.

배 밑판은 당선과 왜선과는 달리 두껍고 폭이 좁은 판재를 여래 개 결합시켜 만들었다. 이 판재는 한라산에 야생하는 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물에 썩지 않는 내부성(耐腐性)이 강한데다 결착력이 강해 배를 만드는 목재로선 최고급이었다. 게다가 판재를 불에 그을리어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과 판재 연결부에 대나무 속을 긁은 가루로 메우고 콩기름으로 바르는 물막이 공법은 신라 만이 개발한 독창적인 건조법이었다.

배 밑바닥인 저판과 측면인 외판을 배 밑 좌우로부터 둥글게 짜올라가는 공법도 중국식 정크(戎克)선이나 왜의 화선(和船)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중국 배는 고물인 선미가 좁고 예리하게 짜여진 공법이고 왜선은 판목이 엷고 넓은 판재를 이용한 평장형 공법이었다. 그러나 신라배는 두꺼운 저판을 평탄하게 깔고 외판과 이물과 고물을 예리하지 않게 둥글게 잇는 가룡목 이음법을 한 평저형선이었다.

이렇게 만든 신라배는 웬만한 파도가 배를 덮쳐도 전복되지 않는 안정된 구조를 가질 뿐만 아니라 물건도 많이 실을 수 있어 무역선으로는 최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신라배의 원형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삼단 이음식 목선과 오단 이음식 완도배에서 잘 드러나는데 얼마 뒤 청해진(완도)의 장보고가 선단을 이끌고 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과학적 조선공법으로 건조된 뛰어난 성능의 신라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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