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吾心竹--오심죽-- 2009. 12. 12. 14:57

혜초[ 慧超 ]
 

704(성덕왕 3)∼787(원성왕 3). 신라시대의 승려.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719년(성덕왕 18)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여행도 해로였는지 육로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이 때 금강지는 이 경전의 한역(漢譯)을 시작하였는데, 혜초는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죽었으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시 인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인 6월에 죽었기 때문에 이 연대에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 불교학계에서는 혜초와 불공의 경전번역을 1년 앞당겨서 단정하고 있다. 이 때 그는 불공의 6대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다. 또, 그에 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다. 불공이 죽은 직후 동문·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스승의 장례에 대하여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下賜)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이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번째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은 없다. 이미 신라에는 명랑(明朗)을 중심으로 하는 신인종(神印宗)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초가 공부한 것은 그와는 별도의 밀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불공과의 관련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통밀교를 표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중국 유학승들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N0x8044landa)라는 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도 없다.

따라서, 단순히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밀교와 신라의 밀교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며,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술에서 언제나 ‘신라인’임이 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고국과 관련을 맺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혜초(高柄翊, 삼국의 고승, 신구문화사, 1976)
≪참고문헌≫ 慧超傳考(高楠順次郎, 大日本佛敎全書遊方傳叢書 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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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

 

관련자료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지은 인도 여행기. 1권. 필사본. 완질이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현존본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0x806cgara)에 대한 견문으로,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이며,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R0x806c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간다.

 

이곳에 이른바 사대영탑(四大靈塔)이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을 방문하였고, 또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등은 방문한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고 한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하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풍속·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라는 점이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Fuchs,W.)에 의하여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널리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慧超(高柄翊, 三國의 高僧 8人, 新丘文化社, 1976)
≪참고문헌≫ 慧超傳考(高楠順次郎, 遊方傳叢書 第一,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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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姜 中 九 (http://blog.chosun.com/sanhasa

2009/11/1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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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오천축국전

 

1권. 필사본. 총 6,000여 자로 두루마리 형태인데,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오천축국으로 여행갔던 기록'이라는 말로, 천축국은 인도이며 오천축은 인도가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지방으로 구분해 한꺼번에 부른 이름이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 둔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 석굴에서 발견한 문서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앞뒤 부분이 떨어져나가 책이름과 저자를 알 수 없었으나, 펠리오가 당(唐)의 혜림(惠琳)이 지은 〈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라는 불경주석서로 이를 알아냈다. 원래 이 책의 원본은 3권이었다고 하나, 현존본은 사본(寫本)으로 전체내용인지 요약본인지를 알 수 없다. 내용은 중부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국(Magadha : 지금의 비하르) 기행에서 시작한다. 이 나라는 16대국(大國) 중 하나로 불교가 가장 성행해 유적도 많은 곳이나, 혜초 방문 당시에는 힌두교가 보다 성행했다. 그는 여기서 서북쪽으로 쿠시나가라(Kusināgara : 지금의 카시아)로 갔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했다. 1개월 동안 다시 남쪽을 여행해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녹야원(鹿野苑)이 있으며, 약 1세기 전에는 당나라의 현장(玄奘)도 찾아왔던 곳이다. 다시 동쪽으로 가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의 설법지 영취산(靈鷲山)을 방문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가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ahagaya)를 거쳐, 서북쪽으로 향해 중천축국의 수도 카나우지로 갔다. 이곳에 대한 기록에는 큰 나라로 왕은 코끼리 900마리를 지니고 그 아래의 대수령들은 200~300마리를 가졌다고 썼다. 여기서 인도 전역의 기후와 풍속을 총괄적으로 서술했는데, 예를 들어 음식은 멥쌀로 빚은 떡과 미숫가루·우유·소금 등이 있으며, 장(醬)은 없다고 했고, 가축을 기르지 않지만 소만은 즐겨 기른다고 했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현재의 데칸 고원이다. 여기에는 과거에 불교가 성해 산중에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신력(神力)으로 세웠다는 큰 사원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폐허였다. 이후 그는 다시 서북쪽으로 향해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했다. 즉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들렀다. 이어 북쪽의 현재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한 후,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 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길기트·페샤와르 등지를 거쳐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을 답사했다. 이곳은 모두 투르크족이 지배하고 있지만, 불교가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서부 투르키스탄(Turkistan) 지역에 가면서 그의 오천축국 순력은 끝난다. 그 지역에 있던 투카라(吐火羅 :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면서 그지방의 인물이나 풍속 등을 기록했다. 특히 이 지역이 동서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인근 여러 곳에 관한 지식을 얻어 페르시아나 사라센, 동로마 제국까지 언급했다. 이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Kucha)에 도달하는 727년 11월에 이 여행기는 끝난다. 이 책은 그보다 1세기 앞서 여행했던 현장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나 법현(法顯)의 〈불국기 佛國記〉 등에 비해 서술은 간략하나 사료적 가치는 뒤지지 않는다. 전술한 여행기는 6~7세기의 인도정세에 관한 자료이지만,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관한 것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이 책은 1909년 중국 학자였던 뤄전위[羅振玉]가 〈둔황석실유서 敦煌石室遺書〉 1집에 수록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郞]는 혜초가 신라의 승려라는 것을 밝혀냈다.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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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스님이 지금부터 1300년 전, 저 멀리 인도와 서역 지방을 두루 여행하다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깊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오늘날에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감동이 전해온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로 세계 어디를 누빌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편안하게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데 비해 혜초스님이 경험했던 당시의 여행은 한 마디로 고행(苦行)이었다.

7, 8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동안 꼬박 두 발로 걸으며 목숨을 걸고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과 싸우며 나아가야했던 고난의 길이었기에 고향 땅과 고향 사람들을 그리는 정은 더욱 마음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혜초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승으로 8세기가 시작될 때 신라 불교는 원효와 의상과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큰 발전을 이뤄 성덕왕대의 빛나는 불교문화를 이룩하고 있었을 때다. 그러나 혜초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당나라에 유학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던 밀교(密敎)에 심취했는데 7세기 후반기부터 전파된 것으로, 주술적인 의례 등을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종교세계를 펼치는 것이었다.

이후 혜초스님은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 구법(求法) 여행을 다녀왔고, 733년에 인도 밀교의 대가 금강지 삼장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도 참가했다. 780년에는 밀교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경전을 해설했다고 한다.

이 기록들로 미뤄보면 혜초스님은 700년경에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720년부터 728년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여행한 후 밀교의 고승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780년 이후에 당나라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5천축국’ 곧 인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인데 당시 인도는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앙천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혜초스님은 720년경에 당나라 서울 장안을 떠나 동남쪽 해안의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당시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은 험난한 사막을 지나야 하는 육로보다 해로를 선호했던 것이다.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로 광주에서 한달만에 수마트라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며 더운 기후와 언어를 익힌 후 동인도로 상륙한 것이다.

혜초스님은 먼저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갠지스강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했는데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바이샬리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이어 석가모니가 세상을 뜬 곳인 쿠쉬나가라를 순례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바라나시에 갔다가 두 달이 걸려 중인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불교 유적이 많은 중인도에 대한 서술이 적은데 이로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왕오천축국전은 앞쪽이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중인도에서 남인도까지 3개월이 걸렸고, 남인도에서 다시 2개월이 걸려 서인도에 이르렀다. 서인도에서 3개월이 걸려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지방에 이르렀고, 여기서 1개월이 걸려 지금의 파키스탄 영토에 들어가 탁실라를 지나 카슈미르 지방에 들어갔던 것이다.

카슈미르에서 큰산을 넘어 한달만에 불교미술이 크게 발달했던 간다라에 이르렀는데 인도에 상륙한 지 5년째 되는 때였다.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우디야나 등을 지나고 서쪽으로 남파에 이르니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것이다. 그곳에서 계빈 등을 거쳐 바미얀에 이르고 다시 토하라에 들어갔으며 그리고 와칸을 거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를 지나면 중국 땅이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북로를 따라 카슈가르와 쿠차를 지나고 계속해서 고창을 지나 서역과 당나라의 문화가 만나 천불동의 화려한 예술을 꽃피운 돈황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728년경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함으로써 혜초스님의 8년 동안의 긴 여정은 마무리됐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이러한 여정과, 여행한 지방을 보고 느낀 점이나 전해들은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각 지역의 불교계 현황과 지역간의 거리를 비롯한 지리 환경, 그리고 풍습과 산물이나 언어 또는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중인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길에는 도적이 많은데 물건을 빼앗고 곧 놓아주며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토지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없다. 먹는 것으로는 쌀과 떡과 보릿가루와 우유 등이 있고, 간장은 없으며 소금을 쓴다. 흙으로 만든 냄비에 밥을 지어 먹고 쇠솥은 없다.’ 등의 기록들이다.

이 책은 풍부한 시정(詩情)이 담긴 기행문학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로 하여금 당시 상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사실적이고 종합적인 역사서인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900년에 중국 문물과 서양 문물이 만나는 비단길의 길목이었던 돈황에서 프랑스인 펠리오(Pelliot)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227행이 남아 있는 높이 28.5센티미터 길이 358.6센티미터의 두루말이 사본(寫本) 형태였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것이 아쉽긴 하지만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으로서 커다란 가치를 지니며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혜초스님이 활동했을 당시 중국에 유학한 신라의 구도승은 180명에 이르렀으며 이중에 다시 인도에 갔던 이는 15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여행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명이며 중국이나 신라에 돌아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혜초스님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이 모든 역경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리고 낯선 땅과 낯선 사람에 대한 다양한 풍경과 순례자로서의 감회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이자 가장 오래된 책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정밀한 주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 펴냄)이 나왔는데, 역주자는 1996년까지 ‘무하마드 깐수’로 불렸던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다. 최근 몇 년간 왕성한 연구욕으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 ‘씰크로드학’ ‘이슬람문명’ 등을 내놓았던 그가 이 책으로 다시 한번 학계를 놀라게 했다.

바로, ‘왕오천축국전’은 어린 나이인 16살에 당나라 밀교승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는데, 당시 이 여행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인 것이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원본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한 것으로, 8세기 후반 황마지에 쓰인 필사본이다. 이는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으로 당시 그 지역의 정치 문화 풍습 종교 등을 알려주고 있으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그러나 이 책은 외국인이 먼저 발견했듯 연구도 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이 ‘돈황석실유서’에 수록한 뒤 일본 독일 등지의 학자들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구와야마 쇼신 등 19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연구반이 5년 동안 연구해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를 펴냈다.

국내에서도 최남선, 고병익, 김규성, 정병삼 등이 우리말 번역본을 내놓았지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처럼 정밀 주해서가 나온 것은 처음이라 한다.

‘왕오천축국전’을 세계 4대 여행기(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리크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중 하나로 꼽는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연구하거나 기리는 일에 너무나 불초스러웠던 것이다. 남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으니 말이다.

정수일 교수는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세 권으로 돼 있었다는 당나라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를 비교해볼 때 현존 두루마리가 세 권의 원본을 축약한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동안 이 책이 언어표현이나 문법구조상 평가절하됐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지냈던 정수일 교수는 혜초에게서 자신의 바람을 길어올린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즉, 혜초스님은 경주 금성을 출발하여 중국의 평주와 광주를 거쳐 베트남 → 싱가포르 → 인도네시아 자바섬(불서국) → 말레이시아 → 미얀마 → 방글라데시의 앞바다를 경유하여 동천축으로 진입하였다. 이어 그는 인도의 불교 성지인 왕사성 → 구시나가라 → 바라나시 → 마하보디 → 바라나시에 들른 뒤, 다시 카냐쿱자-나시크를 거쳐 알로르(아프가니스탄) → 잘란다라 → 탁샤르 → 신드구르자라 → 탁샤르 → 잘란다라 → 카슈미르(파키스탄) → 간다라 → 우디아나 → 치트랄 → 우디아나 → 간다라 → 람파카 → 카피시 → 자불리스탄 → 바미얀(아프가니스탄) → 토카리스탄 → 파사(이란) → 니샤푸르 → 토카리스탄 → 와칸 → 파미르 → 카슈카르 → 쿠차 → 언기 → 돈황 → 난주 → 장안에 이르렀던 것이다.

크기변환_인도,네팔여행.08.10.14-30.

 

크기변환_인도,네팔여행.08.10.14-30.

 

 

 

밀교[ 密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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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

〔개 설〕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 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 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사상인 순밀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잡밀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신 라〕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신라 신인비법은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에 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식은 고려시대에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혜통이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함으로써 성립된 일맥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을 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을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 밖에도 의림은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을 위주로 하였다.

(2)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 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 및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중앙은 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3)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 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 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을 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구층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금강반야경≫·≪금광명경≫·≪진언집 眞言集≫·≪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 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됨은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 려〕

(1) 왕실의 밀교신앙과 보호정책 고려는 나라를 세울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밀교를 포함한 불교사상을 고려에서는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밀교적 수행의식을 진호국가(鎭護國家)의 한 법용(法用:정례화된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철저한 호불왕(護佛王)으로서, 특히 밀교신앙과 밀교계통의 승려들로부터 정신적·현실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밀교신앙의 전개와 보호에도 대단한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유일하게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촉함으로서 원래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다.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실제로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다.

따라서, 태조가 훈요 중에서 도선을 내세우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의 밀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개경에다 10개의 사찰을 세우면서 그 수사찰(首寺刹)인 법왕사(法王寺)의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또 태조가 개인적으로 신앙이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밀교적 감화력을 크게 입은 고승으로서는 광학과 대연이 있다.

광학과 대연은 신라 명랑의 법을 이어받은 밀교의 대덕들로서, 문두루법으로 태조의 건국을 도왔다. 태조는 광학·대연과의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하여 936년(태조 19)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밀교는 위정자들의 돈독한 신앙심과 보호정책에 힘입어 초기부터 굳건한 전통의 기반이 확립되어 뒷날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발전적인 밀교신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목종이 이 경을 개판한 것은 “만약 이 경을 개판하여 탑 속에 봉안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소멸하게 된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모든 국력을 기울여 이루어진 초조(初彫)와 재조 고려대장경에도 밀교의 경전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현종 때 착수하여 문종 때 완성된 첫번째 대장경은 몽고병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초조장경의 것으로 확인된 몇 권의 남은 책 속에는 ≪무량문파마다라니경 無量門破魔陀羅尼經≫·≪성지세다라니경 聖持世陀羅尼經≫ 등 24권의 밀교경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조장경에도 밀교에 관한 전적들이 많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수기(守其)가 찬술한 고려 재조대장경의 ≪대장목록 大藏目錄≫에 의하면, ≪대비로자나경≫ 7권, ≪금강정경≫ 3권 등 순밀교에만 해당되는 경전이 191종 356권이 들어 있고, ≪금강정유가호마의 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 1권 등을 비롯한 밀교의식의 작법(作法)에 관한 것도 20종 21권이나 들어 있다.

그리고 충렬왕은 1275년(충렬왕 1)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30권을 은자(銀字)로 각판하여 현재 그 제13권이 가장 오래된 은자경(銀字經)으로 남아 있다. 1328년(충숙왕 15) 5월 충숙왕은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130권을 금서(金書)로 간행하여 세상에 펴내기도 하였다.

충숙왕은 호불왕으로서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철저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이루어진 밀교대장경 90권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40권을 다시 구하여 130권이나 되는 밀교대장경을 금서로 펴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실이 국력을 기울여 밀교신앙의 기초가 되는 전적들을 수집, 정리, 간행한 것은 모두가 밀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돈독한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역대왕실과 위정자들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모습은 여러 종류의 도량과 의식을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는 80여 종류의 법회(法會)·설재(設齋)·도량 등의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들 중 문두루도량·인왕도량·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소재도량(消災道場)·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관정도량(灌頂道場)·만다라도량(曼茶羅道場)·제석천도량(帝釋天道場)·진언법석(眞言法席) 등과 같이 순수한 밀교의식이 매우 많았다.

또한 전적 자체는 밀교의 것이 아니지만 장경도량(藏經道場)·능엄도량(楞嚴道場) 등과 같이 밀교성이 매우 강한 의식들도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와 의식들이 역대왕실을 중심으로 매년 매월 거행되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더욱 극진하였던 후대의 왕들 중 그 즉위식까지도 밀교의식의 전통적 방법에 따라 거행한 경우도 있었다. 강종·원종·충렬왕·충선왕은 모두가 관정의식(灌頂儀式)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왕들이다.

이 관정의식은 밀교의 독특한 것으로서, 원래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보병(寶甁)에 네 바닷물을 넣어 그것을 왕의 정수리에다 뿌리는 의식에서 채용, 표방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왕들이 관정법에 따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들은 세속적인 왕의 지위를 넘어 출세간적인 진리의 왕이 되고자 하였던 강렬한 신앙과 염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총지종(摠持宗)과 신인종(神印宗) 우리 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과,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이 그것인데 이들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 나라에 총지법이 최초로 전래, 수용된 것은 신라 혜통이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지종의 성립을 신라시대로 보고, 그 개종조를 혜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총지종이 성립되었다는 결정적 기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백두항룡(白豆降龍)이나 병고치는 법(愈疾法)이 순밀의 총지법보다는 잡밀적 성격이 매우 짙다. 따라서 혜통은 우리 나라에 총지법의 최초 전래자로 총지종의 원조(遠祖)는 될지언정, 그 개종조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주금사라는 말은 경전에서 주력승(呪力僧)을 대력주사(大力呪師)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러한 대력주사가 의업(醫業)에 종사하면 이를 고려에서는 주금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1136년(인종 14) 고시의 방법도 의업식과 주금식으로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금업에 종사한 총지주사는 물론, 밀교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교단 안팎에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류에 짝하여 13세기경 조유(祖猷)·혜영(慧永)과 같은 대아사리가 배출되었으며, 이때부터 강종을 시작으로 하여 모든 왕의 즉위식 때는 반드시 관정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혈구산(穴口山)이 대일왕(大日王)의 상주처라는 백승현(白勝賢)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혈구사를 지었으며, 꿈에 늙은 비구로부터 ≪대일경≫을 권념(勸念)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총지법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였던 왕이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여건으로 총지종은 고려 의종에서 고종 21년(1234) 사이에 개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인종의 신인이란 ‘문두루’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그러므로 총지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신인종이 성립되었고 그 개종조 역시 명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아직 어떠한 종파도 성립된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당시 해적이 침략해오자 신인조사(神印祖師) 명랑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대덕을 청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 19년(936)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의 근저가 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인종은 936년 그 중심사찰인 현성사가 창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개종되었다고 하겠다.

이 종파는 국난타개라는 신라적 전통을 유지, 계승하면서 그 신앙은 고려일대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1047년(문종 1) 7월 동경(東京 : 경주)의 사천왕사에서 적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27일 동안 개설한 문두루도량을 위시하여, 숙종 6년(1101) 4월과 예종 3년(1108) 7월 진정사(鎭靜寺)에서, 예종 4년 4월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慶寺)·금강사(金剛寺)에서, 고종 4년(1217) 4월과 12월 현성사에서 각각 문두루도량을 개설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신인종과 그에 대한 신앙이 계속 유지, 발전되어왔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역대의 많은 왕들이 신인종의 근본도량인 현성사를 많이 찾았음도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렬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다.

(3) 밀교의식과 행사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도량은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왕도량은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백좌도량 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왕경≫에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구역본과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 있는데, 고려에서 주로 사용한 것은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다.

이 ≪인왕경≫을 고려에서는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다.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고려사≫ 세가편(世家篇)만 보아도 1012년(현종 3) 5월 내전에서 ≪인왕경≫을 강설한 것을 비롯하여 1373년(공민왕 22) 4월까지 무려 122회나 인왕경의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인왕도량이었다.

특히 1020년(현종 11) 5월의 기사에서 “내정(內庭)에 100개의 사자좌를 마련하고 3일 동안 인왕경을 강설하였으며, 그것을 매년 상례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 인왕경 의식의 시행횟수는 122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인왕경≫ 의식이 국가적 행사로 개설되었던 것은 인왕경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며, 나라를 지키는 최고의 법(求世之良藥 護國之勝門)”으로 믿고, 그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왕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국가 사회의 여러가지 환란을 극복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시골의 농민들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우환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 경을 독송하여 모든 재난이 물러가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와 같은 행독이나 경행의식은 모두 인왕도량과 그 사상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승려와 속인은 물론, 왕실과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인왕경≫에 대한 신앙이 가장 열렬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이 불공의 번역본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밀교적 의식법에 따라 전개되었던 점에서 인왕도량을 통하여 고려 밀교의 발전적 모습의 일단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이다. 금광명도량이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라고 한다면, 인왕도량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으로, 고려에서는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금광경도량(金光經道場)·금경도량(金經道場) 등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1041년(정종 7) 5월부터 1389년(공양왕 즉위년) 9월까지 금광경의 도량의식이 모두 37회나 개설되었다. ≪금광명경≫의 사상에서 유래된 밀교의식으로는 금광명도량 외에도 공덕천도량과 사천왕도량(四天王道場)이 있다.

공덕천도량은 ≪금광명경≫ 권6 공덕천품(功德天品) 제13에 사상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간사회에 복과 재물을 키워준다는 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이러한 도량들이 많이 개설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 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 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 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 후대 왕들은 정책적 이념으로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이 되게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1401년 궁중의 송주승(誦呪僧)을 파하였고, 1417년 ≪진언밀주경 眞言密呪經≫이나 ≪다라니집 陀羅尼集≫ 등 밀교관계 서적을 불살라버리게 하고 청우(請雨)나 시식수법(施食修法)에 관한 것들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을 가하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왕의 대사를 당하여 마음에 시비를 계교할 겨를이 없다.”는 정책적 명분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태종이 밀교의 각종 서적을 불살랐던 것은 유교적 풍토에 따른 정책적인 조처에 불과하였으며, 그 내면의 신앙에는 밀교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태조는 1393년 2월 숙위사졸(宿衛士卒)들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신중경 神衆經≫ 소재주(消災呪)를 염송하게 하였으며, 그 재위연간 동안 밀교의 소재도량을 14회나 개설하였으며, 1395년 4월 총지사와 현성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1400년(정종 2) 3월 정종은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세종은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일대를 통하여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개간된 밀교의 전적으로는 제일 먼저 ≪진언집≫을 들 수 있다.

≪오대진언 五大眞言≫은 42수진언(四十二手眞言)·신묘장구대다라니·수구즉득다라니·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불정존승다라니 등을 한데 모은 것인데, 이것은 1458년(세조 4)과 1531년(중종 26), 1535년, 1634년(인조 12)에, 또 ≪천수경 千手經≫은 1476년(성종 7)과 1496년(연산군 2) 등 모두 8차에 걸쳐서 개판되었다.

≪제진언집 諸眞言集≫은 1569년(선조 2) 전라남도 안심사(安心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658년(효종 9) 강원도 신흥사(神興寺)에서, 1688년(숙종 14) 묘향산 불영대에서 개판되었으며, 1777년(정조 1)과 1800년에도 각각 개간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진언집이나 밀교관계의 전적들이 종단폐합의 이전보다 그 이후에 더욱 많이 개판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조선시대에 있어서 밀교는 종단폐합이나 숭유배불이라는 정책과는 관계없이 왕실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 성]

우리 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면에서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또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채용된 수행법이 신인비법이나 삼밀수행(三密修行)에서도 특히 진언지송(眞言持誦)만을 존중하여 신인종과 총지종이라는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도 그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밀교의 더욱 두드러진 점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러한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 번을 하여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와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밀교의 진언과 정토의 염불이 외형적으로는 무리없는 접근으로 파악되지만, 그것이 개인적 깨달음의 내용에서는 접근이 아닌 원융성(圓融性)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가 진언염송과 미타염불을 통하여 수행일과를 하였다는 것은 밀교와 정토의 조화로운 융섭적 신앙(融攝的信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나 조선에서는 밀교가 진언을 매체로 하여 정토신앙과의 상호교섭관계를 밀접하게 맺게 되었다. ≪현행서방경≫은 1448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531년 하동 쌍계사(雙磎寺), 1556년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1710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각각 개판되었다.

그리고 선사였던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그리고 1668년(현종 9) 보현사(普賢寺)에서 개판된 ≪진언집≫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염불작법 念佛作法≫·≪일용작관법 日用作觀法≫·≪비밀교≫ 등에는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를 비롯하여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등 많은 정토관계의 진언이 있어 실제 의식상에 응용되고 있었다.

164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점점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가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신앙이 밀교화된 ≪현행서방경≫ 등이 저술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되었으며, 많은 밀교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밀교계의 현상은 한국의 밀교와 정토가 신앙·교학·사상·역사의 측면에서 원융한 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밀교와 선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 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 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所依:한 종파의 근본을 이룸.)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 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 說禪儀≫를 저술하여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는 신라 말기부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관계가 교학적이나 의식면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되어 어느 일면에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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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李朝實錄佛敎抄存(權相老, 寶蓮閣, 1979)
≪참고문헌≫ 密敎(鄭泰爀, 東國大學校譯經院,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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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麗의 密敎와 淨土信仰(徐閏吉, 東國思想 14, 1981)
≪참고문헌≫ 高麗密敎信仰의 展開와 그 特性(徐閏吉, 佛敎學報 19,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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