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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트레일´의 진실을 밝힌다--혜초는 평택이 아니라 청해진에서 떠났다

吾心竹--오심죽-- 2009. 12. 12. 11:32
´원효 트레일´의 진실을 밝힌다
<칼럼>혜초는 평택이 아니라 청해진에서 떠났다
이길원 칼럼니스트 (2009.06.15 09: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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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길원, 한국문화관광해설사회장
1. 글머리에

지방화 시대가 되고 지역의 문화관광 인프라 개발이 지역 관광진흥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보니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간에 자기지역 문화 인프라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역사상 인물이나 문화유적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기 위하여 유적을 조작하고 거짓 홍보전으로 터무니없는 예산낭비와 국민을 속이는 몰염치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음을 볼 때 지역 이기주의가 지역의 양심마저 마비시키고 국민들의 역사지식 마저 왜곡시키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허준의 고향이 어디냐를 가지고 지자체간의 입씨름을 하기도 하였고 한때 대장경판의 제작지를 둘러싸고도 다른 주장들이 제기된 바도 있었다.

최근에 평택시가 혜초와 원효대사가 평택을 거쳐서 세계로 나갔다고 UN실크로드 메이어스 포럼을 개최하고 혜초의 기념비를 평택호에 세운다고 <경인일보> 5월 22일자에 보도된 것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역사왜곡을 개탄하면서 원효 트레일은 평택호를 거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더더욱 혜초는 평택근처에 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드리기 위해서 이글을 쓰고자 한다.

2. 당성은 어디인가?

당성, 당항성, 당성진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신라 통일전후의 대당 무역의 전진기지였던 무역항으로 그리고 군사기지로 전해지는 곳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일대이다.

이곳의 해발 165.7m 구봉산 정상과 계곡 그리고 능선에는 둘레 363m이고 높이는 4~5m인 테뫼식 산성과 1148m의 토축성벽이 여러 차례 보수된 채 남아있고 수차례의 발굴결과 6~7세기 때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경기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백제(위례)의 영역이었으며 장수왕이후 고구려 때에는 당성군이었으며 신라 진흥왕이후에는 당항성으로서 산동반도와 교통하던 출입구의 역할을 했고 신라하대에는 청해진의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당성진으로 강등되고 고려 건국 후에는 예성강 벽란도가 활성화되면서 당성진은 무역항으로서는 쇠잔하고 조선시기까지도 군사 요충으로서 성은 여러 차례 보수되고 조선시대에 북쪽 염불산 봉수와 당성 정상에 망해루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 당성의 망해루터 ⓒ 데일리안 최진연

3. 당성으로 유입된 중국 성씨들

산동반도에는 신라방이 형성되어 많은 신라인들이 중국에 살면서 교역에 종사했다. 당성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유입되어 당나라 무역을 하고 살았는바 남양(당성) 홍씨들은 당성사적비를 세워서 자기들의 조상이 당성진을 통해서 한반도에 왔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국계 성씨들인 천씨, 방씨, 지씨, 축씨, 마씨, 골씨, 피씨, 명씨, 태씨, 국씨 등도 당성마을인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조상의 연고를 갖고 있다.

상안리에 지촌말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예전에 지씨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마을에 전해지고 있으며 방씨 가문에서는 45세 종손이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살고 계시다고 한다.

45대라면 1350~1400년 전이라고 보이는데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전후로 당성이 가장 활발하게 산동무역을 하던 시기임이 분명한 것이다. 송산에 살고계신 행주 기씨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당성으로 왔음을 증언하고 있다.

200년 전에 직산에 원효의 득도지라고 비를 세운바있다고 전해지기도하고 평택에서 배를 타고 간게 아니냐하는 최근의 추측도 역사적 개연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성은 분명히 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일대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 당성사적비 ⓒ 데일리안 최진연
4. 당은포로(唐恩捕路)의 실체

백제(위례백제)시대에도 당성은 무역항이었다. 한강은 바다로 나가는 뱃길이 험하여 항로로 사용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며 따라서 위례백제는 당성을 통해서 중국무역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근거로서는 당성가는 길목에 있었던 수많은 백제토성을 들 수가 있는데 가령 용인남사의 처인성 세마대의 독산성이 애초에는 백제토성이었으며 현존하는 수원고읍성도 백제토성이며 수원고읍성에서 당성을 가던 길목에도 태행산토성, 남양토성, 백곡리토성 등이 백제 토성인바, 인근에 강력한 적국도 없는 상황에서 한강백제가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군사시설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무역로를 도적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보인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백제를 웅진(공주),부여로 밀어낸 후 고구려는 죽산에 죽주산성을 쌓았으며 충주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가 따라 내려간 길이 한남금북정맥임을 깨닫게 하여 준다.

그 후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북쪽까지 신라의 강역을 넓힌 후 신라는 당나라를 직접 갈 수 있는 천혜의 상안리 항구를 얻게 되는 것이고 이 항구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서 당항성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라 계림에서 당성을 오고가는 길이 열리는데 이 길이 바로 기록에 전하는 당은포로 인 것이다.

당은포로가 계림에서 상주를 거쳐서 보은 삼년산성을 거쳐서 당성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는바 삼년산성에서 당성까지 가는 길은 충주서 장호원을 거쳐 죽산의 죽주산성으로 가고 용인의 처인성까지 올라가면 수원고읍성으로 큰 강이 없는 평탄한 길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수원고읍성에서 당성으로 가던 길은 흔적이 남아있는바 분천에서 왕림노루고개를 넘어 자안리 방아다리로 해서 광산고개를 넘고 남양서 마도 가던 옛길로 해서 청원초교앞 등성이 길을 따라 백곡리로 가서 지촌말로 들어가는 길이 당은포로인 것이다.

결국 이 길도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올라온 길이며 도보로, 수레로 말을 타고 다니던 교통로로서 최상의 길이었다고 본다.

당시에는 평택들과 안성평야 오산천 황구지천 유역이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고 성환천 안성천 오산천 황구지천 등이 유입되던 평택지역은 자연 습지대가 어우러진 오지였고 도보로 수레로 접근하여 배를 탈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평택이라는 이름 자체가 거대한 갯벌이었다는 뜻이다.
안성의 원로 해설사님께 삼국시대에 안성지역에서 당나라를 가기 위해 평택으로 갔다는 전설이라도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충주에서 장호원으로 왔으면 죽산으로 해서 용인으로 간게 맞다고 말씀해 주셨다.

김유신의 아버지가 진천의 신라 관리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아도 진천이 신라의 최전선이었다면 백제로부터 당은포로를 지키는 역할이 있었다고 보아야하고 당시에 백제 영역이었던 직산에 원효가 갔다는 가설도 성립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당은포로는 계림에서 상주로 삼년산성에서 큰 강을 피해 충주로 안성의 죽주산성을 거쳐서 수원고읍성으로 연결되어 당성으로 가는 것이고 당성의 비밀을 찾아내려면 수원고읍성 백곡리 토성과 고분군 그리고 상안리 유적에서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는 바닷길로 중국을 가지 못하고 육로로 천리길을 와서 당성에서 배를 타고 산동으로 가야했던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신라하대에 와서 남해의 청해진이 무역의 중심이 된 것을 보면 삼국이 대립하던 시기에는 남해나 서해바다가 백제 해군에 의해서 지배 되었고 신라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원효 트레일은 당은포로(唐恩捕路)이다

신라통일 전후에 의상이 5~6회 중국을 왕래한 것이고 보면 처음에 원효가 의상과 함께 찾아간 뱃턱은 화성시 서신면 지촌말 상안리 었을 것이고 원효가 길을 잃고 헤맨 곳은 은장의 바닷가 산길이거나 청원리의 바닷가 등성이 길을 지나서 백곡리의 굽이굽이 산속 길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나당연합(羅唐聯合)을 하기위해 배를 타고 당나라를 갔던 김춘추의 길도 당은포로임이 분명하다.

◇ 대동여지도

6. 혜초는 청해진에서 떠났다

평택항에 혜초의 비를 세운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혜초는 평택은커녕 당성에도 오지 않았다.

혜초가 중국으로 떠나던 시기는 삼국통일후 삼백년이 지난 혜공왕 때이고 남해기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이동하던 시기이다. 혜초는 울산에서 배를 타고 청해진으로 가서 중국의 항주로 건너간 것이고, 항주에서 배편으로 통킹만에 간 것이고 육로로 인도를 거쳐 사마르칸드에 간 것이며 실크로드를 따라서 돈황을 거쳐 장안에 돌아온 것이다.

이 시기는 고구려 시절부터 도호부였던 수원고읍성이 수원군으로 강등되고 당성군이 당성진으로 바뀌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당항성이 쇠락하고 청해진이 번창을 시작하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7. 평택항의 UN실크로드포럼에 대해서

평택이 당성이라고 우긴다든지, 혜초가 평택에서 실크로드를 갔다고 억지를 쓰면서 실크로드포럼을 한다면 세계적 공감대는커녕 우리 국민적 공감대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세계로 뻗어나가던 민족 웅비의 무역항 당성이 경기만 이웃에 있음으로, 오늘날 경기만에서 대륙을 진출하는 항구로서 발돋움하는 평택항이 그 옛날 찬란했던 당성과 청해진 그리고 예성항 벽란도의 역사를 계승해서 이시대의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기위한 노력으로 평택항이 앞장서서 UN실크로드 메이어스 포럼을 하겠다고 나서야 명분도 공감대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글을 쓴다.[데일리안 경기= 이길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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