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교관선--장보고의 무역선

吾心竹--오심죽-- 2009. 12. 10. 14:33

                                    ***교관선

 

 

시대 통일신라시대    
정의
[ 선사시대 ] [ 가야시대 ] [ 신라시대 ] [ 통일신라시대 ]
     
[ 고려시대 ]      

먼 옛날 사람들은 원시적인 뗏목이나 통나무배를 만들어 어로활동과 이동에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청동기시대 유적인 경남 울주군 반구대암각화에는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배의 모양과 어로활동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활발한 해상교류는 물론 수군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고, 9세기 중엽에 장보고는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북아 해상무역의 주역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선박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경주 안압지 출토 통나무배와 가야와 신라에서 만들어진 배 모양토기 등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송(宋)과의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특히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시도할 무렵에는 고려에 수천척의 배를 짓도록 강요했는데, 고려의 배가 원의 배보다 견고하기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당시 선박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1983년 완도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연안무역선이 발견되어 당시 배의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고려동경에 그려진 원양 무역선 등 일부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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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의 무역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보고(張保皐)의 무역선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를 ‘교과선’이라고 불렀다. 당시 해상왕 장보고가 탔던 교관선은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을 전개했던 통일신라 시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두목(杜牧)은 <번천문집> 제 6권 장보고/정년전(張保皐/鄭年傳)에서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 신라로부터 서주(徐州)로 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후에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가서 신라의 왕을 찾아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전역에 걸쳐서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청해의 진을 얻는다면 적들이 사람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겠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바닷길의 요충이다. 신라왕은 장보고에게 많은 사람을 주어서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고 신당서(新唐書)에 쓰고 있다.

장보고가 서주와 산동 해안 지방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체로 816년에서 826년 사이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여 왕명을 받들어 청해진의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남해를 지키면서 신라, 당, 일본 간의 해양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양 무역 대상 지역은 신라의 청해진(완도)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의 문등, 회강 지구의 연수/양주, 강남 지구의 명주(지금의 영파), 대마도를 지나서 일본 규슈(九州)의 하까다(博多) 등이었다.

◎교관선의 특징과 추정 근거
교관선은 갑판 위에 선실이 여러 개 있는 평저구조선(平底構造船) 형식으로 돛대를 여러 개(3개) 세운 선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장보고의 무역선이 갑판 위에 선실을 구비한 누선형(樓船形)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원양 항해선이었던 만큼 비바람 등을 막고, 함께 내왕했던 하주나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선실을 구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본래 누선은 중국에서 군선으로 발달한 배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적마다 누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신라인들도 당연히 누선형의 배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누선은 군용뿐 아니라 사신선이나 교역선 같은 배에도 점차 쓰이게 되었다.

둘째, 장보고가 활동하던 9세기는 당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당시 중국의 누선은 전형적인 반저선(半底船)으로서 현재 정크선의 모체가 된 사선(沙船)을 초기 시대에 개발하여 국내에서는 조운선(漕運船)으로, 대외적으로는 원양무역선 또는 사신선 등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선은 특히 양쯔강 이북의 북양에 적합한 선형인데, 선저가 평탄하므로 황해 연안 등 수심이 얕은 지리적 조건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보고 해상 무역 항로 또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볼 때, 장보고가 중국배를 그대로 사용하였든 절충식 선박을 만들어 사용하였든 간에 그 구조가 평저구조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당시 문서를 보면 장보고는 탁월한 항해술을 체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항해술은 천문 기상 지식과 선박 조종술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조종술은 돛의 구사 능력에 달려 있었고, 그것은 곧 역풍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선은 일찍이 돛을 여러 개씩 달아 역풍을 잘 이용하였는데,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 곳의 문물에 밝았던 장보고가 당연히 돛을 두 개 이상 장착한 다외선을 사용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원(原)삼국시대나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때 사용하였던 선박의 유물이나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나 그 외의 고서적에서도 선박의 규모, 치수, 구조 같은 것을 밝혀 놓은 것은 없다. 다만 통일신라 시대의 통나무 쪽배 유물이 안압지에서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고려 시대인 11세기로 추정되는 연안 무역선이 완도에서 발굴되고, 이어서 달리도(達理島)에서 13세기~14세기로 추정되는 연안 무역선이 발굴된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 무역선의 특징
통일신라의 무역선은 당, 신라, 일본 등 삼국의 해양과 해안을 항해할 수 있는 평저형 연안선에서 발달한 원양 해양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역선의 선형, 즉 배의 모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배의 밑은 뗏목과 같은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 평평하다. 둘째, 배의 뱃전인 삼판은 두꺼운 나무판자로 일곱 장 이상을 겹쳐서 이어 올렸다. 셋째, 배의 겻집 위에는 승객이 기거할 수 있는 선실이 마련되어 있다. 넷째, 배의 이물은 높은 파도를 타고 나가기 위하여 뱃전을 높게 하였다. 다섯째, 큰 돛대는 한판(중앙)의 이물(앞)에 세우고 이물 머리에 조풍(潮風) 돛대를 세웠다.

엔닌(圓仁, 794~864년)은 그의 순례기에서 “신라의 배(交關船)는 규모는 작지만 빠르고 험한 파도에도 강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왜인 400명이 9척의 교관선에 나누어 타고 적산에서 출항한 지 3주일 만에 귀국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백제식 견당선 그림
완도 근해에서 인양한 고려 연안선
교관선 복원 모형(축척 : 1/20)
 


제목 일본의 백제식 견당선 그림
출처/소장 백제식 견당선/[길비대신입당회사]-일본
설명 12세기경에 그려진 [길비대신입당회사]의 견당선은 역사 문헌 기록에 보이는 견당선의 설명과 일치하는 배를 묘사를 하였다. 이 견당선과 통일신라시대의 교관선의 시차는 불과 100년~200년 정도로 백제식 선박과 같은 선형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의 길이 : 70..6자(21.2m)
배의 너비 : 22.6자( 6.8m)
배의 깊이 : 11.3자( 3.4m)

 


교관선 추정 복원 도면(축척 : 1/20)
교관선 복원 3D Data
   


제목 교관선 추정 복원 도면(축척 : 1/20)
제공자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및 명예겸임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설명 통일신라시대 교관선을 복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추정 복원 설계 도면

배의 길이 : 113.3자(34.0m)
배의 너비 : 36.6자(11.0m)
배의 깊이 : 15.0자(4.5m)

복원과정 통일신라시대 교관선의 복원 도면은 <고려사>, <고려도경>,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의 배>, <완도해저유물-고려선>, <달리도-고려선>, <대한수산지>, <고려전선도> 등과 주로 <완도해저유물-해저 인양 선체보고서>, 원대무역선을 참고로 하고 전통한선의 설계 기법으로 기본 도면과 공작 도면을 작성하였다.(참고문헌 참조)

▷고증 복원 설계 :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교관선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Front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Back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Right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Left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Top view
교관선 복원 그래픽 - Bottom view
교관선 복원 QTV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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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관선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교관선은 평저형 구조선으로서 포판 위에 선실이 있는 뱃집을 세웠고 돛대를 3대 이상을 세운 원양 범선이다. 또, 교관선은 규모는 작지 빠르고 험한 파도에도 강한 구조를 가졌다.

 

 

 

 

 

시대 통일신라시대(820년~850년)    
정의 장보고 무역 선단이 신라와 당, 신라와 일본을 오간 항로.

◎장보고 무역 선단(船團)의 활동 범위
일본의 입당구법승(入唐求法僧)인 엔닌(圓仁)의 일기(최하단 註 참조)에 의하면, 장보고는 당(堂)의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문등현 적산포(文登縣 赤山浦)를 근거지로 하여 단산포(旦山浦), 양주(揚州), 연수(漣水), 유산포(乳山浦), 회남(淮南) 등과 그 외의 여러 곳을 활동 무대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이 무역 대상지(對象地)와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러 곳을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선박을 자유자재로 운항할 수 있는 항해술과 조종술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그 지역 일대의 해류와 조류, 조수 간만의 차와 만조(滿潮) 및 간조(干潮) 시각 등에 익숙하여 천문 항해와 지문 항해를 능히 할 수 있었으며, 해양 기상과 계절풍도 이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역선은 산동반도 동해안의 바다에서 회하(淮河)와 양자강(揚子江) 상류, 그리고 운하(運河)를 두루 항해할 수 있는 '전수로 선박의 선형(全水路 船舶의 船型)'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 나라의 경우, 서해안이나 강화도의 바닷배인 해선은 양화진(楊花鎭), 서강(西江), 마포진(麻浦津) 및 노량진(鷺梁津)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장보고 선단의 무역 항로
장고보 무역 선단이 이용하였던 항로는 통일 신라와 당을 오가는 항로와 통일신라와 일본을 오가는 항로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당과 오간 항로부터 살펴보자.

제1 항로:산동반도(山東半島)의 문등현 적산포(文登縣 赤山浦)에서 정동(正東)으로 서해를 횡단하여 하룻밤과 하루낮을 지나면, 통일 신라 서해안의 경기만 근해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뱃머리를 동남 방향으로 잡고 서해의 연안을 따라서 섬과 섬 사이 또는 섬 밖으로 항해를 하여 다시 하룻밤 하루낮을 남하하면 광주 서해안에 이르게 된다. 다시 바람을 받아 계속 남하하여 목포 근해에 이르면 방향을 동으로 잡아 진도(珍島)의 물길로 들어선다. 진도의 울돌목을 지나면 완도(莞島) 물길로 들어서게 된다. 완도에 다다르면 탐진(耽津), 강진(康津)으로 들어가는 강줄기를 타고 장보고 무역 기지인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간다.

제2 항로:회하(淮河) 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초주(楚州), 연수(漣水)에서 동쪽 하구(河口)로 빠져 나오면, 당의 동해(서해) 하구의 포구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서해를 동북 방향으로 횡단하여 항해하면, 신라 서남 해안의 군산군도(群山群島), 또는 흑산군도(黑山群島) 근해, 아니면 제주 근해에 이르게 된다. 제주 근해에서는 북향으로 곧바로 올라가면 완도 근해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연안을 따라 남하하면 목포 근해에 이르게 되는데 방향을 동으로 잡아 진도 물길로 들어선다. 진도의 울돌목을 지나면 완도 물길로 들어서게 된다. 완도에 다다르면 탐진, 강진으로 들어가는 강줄기를 타고 장보고 무역 기지인 청해진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3 항로:명주(지금의 영파(寧波))에서 주산군도(舟山群島)를 북동으로 벗어나 같은 방향으로 서해를 횡단하면 신라의 제주 근해에 이르게 된다. 제주 근해에서는 북향으로 곧장 올라가면 완도 근해에 이르게 된다. 완도에 다다르면 탐진, 강진으로 들어가는 강줄기를 타고 장보고 무역 기지인 청해진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일본과 오간 항로를 살펴보면,
청해진에서 남하하여 남해로 나온 후, 제주도의 북 근해와 남해 사이의 섬들 사이로 정동향으로 항해를 한다. 그렇게 하여 일본 대마도 남단으로 해서 규슈(九州)의 서해안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연안을 따라 하까다(博多) 만(灣)으로 들어간다.

◎註)
가. 개성 4년(839년) 6월 7일 - (산동의 신라선(新羅船)에서) 돛을 올리고 항해하여 적산포(赤山浦) 동쪽에 정박하였다.
나. 개성 4년(839년) 6월 27일 - 장대사의 교관선(交關船) 2척이 단산포(旦山浦)에 왔다고 한다.
다. 개성 5년(840년) 5월 2일 - 최압아(崔押衙)의 배가 양주(揚州)에서 와서 유산포(乳山浦)에 머문다고 한다.
라. 개성 5년(840년) 5월 27일 - 최압아(崔押衙)가 엔닌(圓仁)을 연수현에서 회남(淮南)으로 보내주겠다고 승낙했다.

 

 

 

 

적산포 ↔ 청해진
초주 ↔ 청해진
영파(명주) ↔ 청해진
 


제목 적산포 ↔ 청해진
출처/소장 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장보고연구> 1.2.3.4.
설명 산동 반도의 적산포 ↔ 황해 횡단 ↔ 신라 서해안 ↔ 연안 항해 남하 ↔ 청해진

 

 

 

장보고 무역항로 참고자료
     


제목 장보고 무역항로 참고자료
제공자 한국해양대학교 장보고연구소 ‘장보고연구’ 1.2.3.4./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명 청해진 ↔ 거제도 남동 ↔ 신라 남 해안 ↔ 대마도 ↔ 하까다
복원과정 장보고 무역항로의 복원(도면)은 <장보고와 황해 해상 무역>,<장보고연구> 1.2.3.4, <한국의 배>, <조선통신사>, <고대한중외교사>, <일본견당사선>, <일본의 선>, <화선사화>, <입당구법순례행기>, <중국조선사화>, <중국항해사>, <중국해외교통사연구> 등을 참고로 하여 복원하였다.(참고문헌 참조)

▷고증 복원 : 허 일/한국해양대학교 선박운항시스템공학과 교수, 선장
이원식/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명예겸임교수,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장보고 무역항로 복원 플래쉬무비
     


제목 장보고 무역항로 복원 플래쉬무비
개발자 코리아비주얼스
설명 플래쉬무비로 응용 개발한 장보고 무역항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대 신라시대    
정의 경주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를 근거로 유추해본 신라시대 통나무 배.

경주 금령총(慶州 金鈴塚)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는 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흙으로 만든 통나무배는 뱃전 밖에 널판자를 덧붙이는, 제2 발달단계에 속하는 통나무배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배의 앞(이물)과 배의 뒤(고물)가 높이 솟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나무배의 뱃전 위에 널판자를 1, 2장 더 이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대 중국 해상 교류
고구려는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그리고 백제는 해상교통을 통하여 중국 대륙과 교류를 한 반면, 동쪽에 위치한 신라의 해상교통로 개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는 백제가 진(晉)과 교류한 지 5년 후인 내물왕(內勿王) 22년(377년)에야 고구려를 통하여 진에 조공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있는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4년 후인 내물왕 26년에는 백제의 사신을 따라 백제의 선박을 이용하여 진에 조공하였다.

진흥왕(眞興王) 14년(553년) 신라는 백제와 일전을 벌여 북한산 일대와 한강을 차지하게 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후 신라는 한강의 수로를 활용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고, 남양만(南陽灣)에서 서해를 건너 해상교통로를 통하여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와 조공무역을 하게 되었다.

신라는 경주를 출발, 남해안을 거친 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 덕물도를 거쳐 산동반도(山凍半島)를 가로지르는 북로와 흑산도를 거쳐 닝보(寧波)에 이르는 남로도 개척하여 중국 대륙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하였다.

◎신라의 대 일본 해상 교류
한편 왜국(일본)과는 삼국 중 신라가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일찍부터 교류가 있었다. 동해안의 정동진(正東津), 울진(蔚珍), 영일(迎日) 등지에서 배를 바다에 띄워 놓으면 해류를 타고 표류하다 일본 서해안의 이스모(山雲) 지방에 도착하게 된다. 이러한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이 해 돋는 나라 일본(扶桑國 ; 부상국, 신목인 扶桑 나무가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건너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에 따르면, 응신천황(應神天皇) 31년(300년)에 신라의 사견선이 무고(武庫=지금의 兵庫;병고) 항구에서 불이 나서 일본의 선박 다수가 함께 불타 버렸는데, 신라왕은 이 말을 듣고 놀라 선장(船匠)을 보내 선박을 건조(建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여 이나베씨(猪名部氏)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김해, 거제에서 일본의 쓰시마(對馬島)로, 동남해안에서는 일본의 서해안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황해나 현해탄을 건너는 데 이용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었다. 신라는 반도의 동해 중남부와 남해안을 차지하고 청정 남해안의 질 좋은 어류를 확보하였다.

◎왜구의 침입과 격퇴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한편으로 끝없는 왜구의 침입을 불렀다. 이로 인해 신라 해안은 물론 도성까지도 약탈을 당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혁거세왕(赫居世王) 8년(B.C. 50년)에 처음으로 왜의 침입이 있은 후, 남해왕(南解王) 11년(14년)에는 왜구가 병선 100여 척을 이끌고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으며, 그 후 약 490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침입하여 왔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격퇴하기 위하여 유례왕(儒禮王) 6년(289년)에 이주즙(理舟楫)을, 자비왕(慈悲王) 10년(467년)에 유사수리전함(有司修理戰艦)을 제정하여 실행하였으나, 이후로도 왜구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증왕(智證王) 6년(505년)에 주함(舟艦=배)의 건조/관리/운용 등의 법률인 제주즙지리(制舟楫之利)를 제정/실행한 결과 수군의 전함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왜구의 침입이 단절되었다. 지증왕 13년(512년)에는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동해의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하고 신라에 예속시켰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법률을 비롯하여 신라의 함선이나 민간 선박에 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유물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시대 통일신라시대    
정의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소나무로 만든 배.

1975년 경주 안압지(雁鴨池-신라 시대 때 궁성 안에 인공으로 만든 못)에서 배 한 척이 출토되었다. 안압지를 정화하던 중에 동쪽 연못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엎어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산성이기 때문에 목제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는데, 다행히 안압지에서 발견된 배는 뻘(진흙)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목선은 국내에서 원형 그대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우리 배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유물이다.

◎안압지 출토배의 개요
① 발굴시기 : 1975년~1976년
② 발굴장소 : 경상북도 경주군 반월성 인근 안압지
③ 제작시기 : 8~9세기(통일신라 시대)
④ 유 물 : 고대 선박 통나무 세쪽배 1척
⑤ 잔존선체크기 : 길이-6.2m, 깊이-약 0.4m, 두께-약 15cm~18cm
⑥ 재 료 : 소나무
⑦ 복원규모 : 길이-7.5m, 너비-1.5m, 깊이-0.45m(추정치)

강변이나 해변이 아닌 내륙의 인공 연못에서 배를 발굴 인양한 예는 드물뿐 아니라 외쪽 통나무 쪽배가 아니고 세쪽을 옆으로 연결한 통나무 세쪽배라는 점에서 이 배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쪽배의 구조와 결구도 매우 특이하다.

안압지는 신라 천년의 궁성인 반월성(半月城)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는 월지(月池)라고 했다고 한다.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 2월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고 예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고, 이 연못 근처에 동궁(東宮)의 전각이 있었으며 동궁이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뱃놀이를 하였다고 전하는데, 공식 기록에는 없다. 연못에서 용왕전(龍王殿)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용왕신심(龍王辛審)' 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제사 용기 등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통나무 쪽배 안에서 '용왕제(龍王祭)' 의식을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의 발굴 조사 때 통나무 쪽배 1척과 옆으로 젓는 노 5점 그리고 2척 분량의 선체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 안압지 통나무 쪽배는 연못 동쪽 반도처럼 돌출한 석축 바로 앞에 뒤집혀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안압지 출토배의 특징
안압지(雁鴨池) 통나무 세쪽배는 통나무 쪽배 발달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유형이다. 즉 통나무 세 토막을 각각 속을 파내고 배 모양으로 공작 가공한 후 연결하였는데, 가운데 토막의 바닥 위에다 나무 고리를 만들고 이 고리에 참나무로 만든 나무창을 꿰어 세 쪽을 옆으로 이어서 조립하였다. 이는 후대 한선의 조립 방식과 동일한 형식이다. 이 나무창은 가쇠를 겸한 바닥 장쇠의 역할을 한다. 온전한 배 한 척과 함께 노 다섯 개를 발굴하였다. 노는 길이 1.7~2.4m에 이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이 배는 또한 뱃전 위쪽 옆으로 활아지를 대어 붙여 뱃전의 손상을 방지한다. 뱃전 위에는 노의 몽고지(노 걸개)를 꽂는다. 이 노의 몽고지(노 걸개)에 노끈으로 노를 매어 달았다.

바닥의 제작방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두 토막의 통나무 속을 ‘ㄴ’자와 ‘」’자 모양으로 각각 파내어 양쪽으로 마주보게 벌려 놓고 그 가운데에 같은 두께의 통나무로 속을 파낸 쪽을 붙여 너비를 넓히는 방식이다.

양쪽 뱃전에는 구멍을 뚫고 가운데 판의 한가운데에 고리 구멍을 만든 후, 여기에 가로다지 나무창을 꽂아 배밑을 연결하여 세 쪽이 서로 벌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배의 가쇠와 장쇠,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한다. 이러한 배의 모양새는 통나무배의 가장 발달된 단계로서 구조선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유선(遊船 ; 놀잇배)의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대 가야시대    
정의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를 근거로 유추해본 가야시대의 통나무배.

선사시대부터 사용해온 온 뗏목배가 차츰 발달해가는 동시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음 돌도끼로 속을 파낸 통나무배도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통나무배는 호수나 강을 건너거나 고기를 잡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통나무배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로는 옛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와 신라 경주 지방에서 출토된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 그리고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세 쪽으로 된 통나무배가 있다.

◎가야 통나무배의 특징
이중 가야시대의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는 투박한 통나무배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뱃전(배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 위에는 여러 개의 멍에가 걸쳐져 있는데, 이 멍에는 양쪽이 서로 오므라들거나 벌어지려는 것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한판의 멍에에는 돛대를 세울 수도 있었다.

뱃전 위에는 모두 8개의 ‘놋좆’이 있는데, 여기에다 노끈으로 ‘박'이라고 불리는 노를 매달아 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 통나무배의 외판(外板)에 철판 조각 같은 것을 붙인 흔적이 있다.

◎삼한과 가야시대의 해상교류
일본 미야자끼현(宮崎縣)의 사이도바루(西都原) 고분에서도 이와 같은 통나무배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같은 배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매장된 사람이 같은 종족, 또는 같은 문화집단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보아 삼한 및 그 후의 가야와 왜국 간에 해상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을 그 강역으로 했던 삼한과 그 이후 가야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낙동강 하류, 즉 김해강 하구로, 다시 김해강 하구에서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북규슈(北九州)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헌을 보면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인 허씨 부인은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배를 타고 김해 해안에 도착했는데, 김수로왕이 이를 미리 알고 가야의 배와 신하들을 보내 허씨를 영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씨 부인이 타고 온 배나 가야의 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시대 청동기시대    
정의 청동기시대 유적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청동기 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그림(巖刻畵 ; 암각화)이 1971년도 경남 울주군 언양면 태화강(慶南 蔚州郡 彦陽面 太和江) 상류인 대곡천(大谷川)변에서 발견되었다. 암각화가 발견된 언양면 대곡천변에 반구대(盤龜臺)라는 정자가 있어서 ‘반구대 암각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그림에는 모두 네 척의 배가 보이는데 이를 통해 선사시대 우리나라 배의원형을 엿볼 수 있다.(선사시대란 역사 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기원전 약 10,000년 전부터 300년까지를 가리킨다.)

◎암각화 조각 시기와 내용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반구대 암각화는 빙하기(氷河期)의 후빙기(後氷期) 때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던 시기에 이곳에 정착하였던 고래잡이하는 사람들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고래의 표본과 자신들의 어로 활동, 육지 동물의 표본과 생태를 바위에 조각한 것이다. 조각에 쓰인 연장은 암벽보다는 더 단단한 광석이나 청동기시대의 금속도구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각에 쓰인 연장으로 볼 때, 조각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000년에서 300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암각화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매우 사실적인 그림들이 조각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과 사냥을 하여 잡은 고래에 부표(浮漂)를 달아 놓고 운반선 역할을 하는 기다란 배의 고물(배의 뒷부분)에 매달고 귀항하는 그림도 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고래 표본 그림인데, 여러 종류 고래의 생김새와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다양한 고래를 좇아 바다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으며,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통나무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배 모양은 가야와 신라 시대의 배 모양 토기와 비슷하다. 또한 배의 앞과 뒤가 높이 솟아오른 초승달 모양인데,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페르시아, 인도 등지에서 발달한 고대 선박과도 유사한 모양이다.

◎선사시대 통나무 배의 발달 과정
선사시대 사람들이 만든 배를 살펴보면, 통나무의 속을 파내는 것뿐 아니라 판자를 만드는 기술이나 판자를 덧붙이는 기술 등의 공작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선사시대 통나무배의 발달 과정은 다음의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① 1토막의 통나무 속을 파낸 것
② ①번 배의 뱃전 밖으로 옆에 널판을 덧붙인 것
③ 2토막의 통나무배를 짝지은 것
④ 2토막의 통나무를 배밑에서 이어 붙인 것
⑤ 3토막의 통나무를 배밑에서 이어 붙인 것

이 같은 5단계 발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고 문명이 개화되어 감에 따라, 좀 더 발달된 형태의 배가 등장했다. 이 배는 통나무배의 몸통을 배 밑으로 삼아 뱃전 위에 널판을 이어 붙이고 배 앞(이물)과 배 뒤(고물)에 가로로 널판을 대어 막아서 파도가 넘쳐 들어오지 못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리고 널판에 구멍을 뚫어서 칡넝쿨 줄기나 끈으로 배를 꿰매서 조립을 하였다. 이것을 준구조선(準構造船)이라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통나무배들은 바로 이 준구조선에 가까운 배라고 추정할 수 있다. 큰 배는 승선 인원이 18명 정도되는데, 이 정도라면 배 길이가 10m 가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통나무배가 아니라 통나무배 위에 판자를 덧대고 조립하여 만든 준 구조선이 된다. 이는 향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는 우리나라 배의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 선사시대 ] [ 가야시대 ] [ 신라시대 ] [ 통일신라시대 ]
     
[ 고려시대 ]      

먼 옛날 사람들은 원시적인 뗏목이나 통나무배를 만들어 어로활동과 이동에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청동기시대 유적인 경남 울주군 반구대암각화에는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배의 모양과 어로활동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활발한 해상교류는 물론 수군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고, 9세기 중엽에 장보고는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북아 해상무역의 주역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선박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경주 안압지 출토 통나무배와 가야와 신라에서 만들어진 배 모양토기 등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송(宋)과의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특히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시도할 무렵에는 고려에 수천척의 배를 짓도록 강요했는데, 고려의 배가 원의 배보다 견고하기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당시 선박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1983년 완도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연안무역선이 발견되어 당시 배의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고려동경에 그려진 원양 무역선 등 일부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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