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3) 吉祥祠

吾心竹--오심죽-- 2009. 11. 2. 20:31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3) 吉祥祠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추증)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3편 '길상사 이야기'에서는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인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를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이 설명했다.
정리: 全敬雄   
 尙美會 -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3. 길상사]
 
 조갑제: 오늘 진천에서 볼 유적지와 역사를 소개해 주실 신운철 계장님이십니다.
 
 신운철 진천군 문화관광과 계장: 안녕하세요. 生居鎭川(생거진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보실 곳은 김유신 장군을 모신 吉祥祠(길상사)와 김유신 장군 생가터 등입니다.
 저희는 진천을 화랑 정신이 발현된 곳이라고도 합니다. 맨 처음 보실 길상사는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곳을 절(寺)로 착각하시기도 합니다. 지금도 종종 저희 문화체육과로 편지가 올 때 길상사 주지 앞 이렇게 적힌 편지가 옵니다.
 
길상사와 김유신 장군 탄생지 설명을 해준 진천군청 신운철 계장

 우리 대한민국에 김유신 장군을 모신 주요 사당이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천에 있는 영정을 표준 영정이라고 해서 김유신 장군 영정을 그릴 때 여기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영정은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는데 1976년도에 사적 정리사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3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들였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길상사의 전경. 도당산성 터와 겹쳐 있다고 한다

 여기 사당의 위치는 네 번째 옮기면서 자리한 곳입니다. 당초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상계리 뒷산인 길상산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리가 안돼 옮기고 옮기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은 1926년입니다. 한 50년 후인 1976년, 사적지 정리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담산성이라고 해서 삼국시대 당시의 산성입니다. 길상사가 이 산성 안에 있습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진천의 全景이 펼쳐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길상사에 가셔서는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기 때문에 祭禮(제례)를 지낼 때 절을 네 번 해야 합니다. 여기 길상사 올라가는 길은 봄에는 벚꽃이 화려하게 핍니다.
 그 다음에 진천에 있는 화랑도 유적이나 김유신 장군 유적 중에 길상사를 첫 번째 코스로 잡는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께서 오셨길래 ‘먼저 길상사에 들러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십시오’ 부탁을 드렸는데 그 분께서 바쁘시다고 길상사에는 안 들르고 다른 곳을 보고 가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저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진천에 오시면 먼저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 관광을 하시라는 의미에서 코스를 이렇게 잡은 겁니다.
 김유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사적으로 지적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곳에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왜 잘못 알려졌느냐 하면 지금 남아있는 고전 중에서 三國史記 列傳 제일 앞 부분에 써있는 글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유신 장군께서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는 사후 160년 후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왕은 神과 같은 존재로 백성하고 신은 분류됐기 때문에 추증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死後 160년 후에 追贈되신 겁니다.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길상사에 모셔져 있는 김유신 장군 영정.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 가보시면 위업비도 문무왕 위업비와 형태가 같고 경주에 가보시면 영정도 왕관을 쓰고 용포를 입으신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등 뒤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북두칠성은 으뜸별이 아니지 않습니까.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면서 하늘의 운행을 관리하는 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유신 장군은 자신이 신하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셔서 본인의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당시 김유신 장군은 모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다 자신 또한 가야의 후손이라는 당위성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부분 때문에 인간적으로 높이 존경받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사적비

 최근에는 이 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듯이 삼국통일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음험하게 이뤄졌다는 주장이나 음침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시대에 들어 왜곡된 평가들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로 이뤄져야 하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갑제: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에 대한 부분이 제일 깁니다. 왕에 대한 이야기들보다도 깁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삼국시대 제일 인물로 꼽은 것이 김유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편집자로써의 평가죠.
 
 신운철: 이 길상사 주변을 보시면 성 흔적이 보이구요, 외곽 부분은 흙에 묻혀 있습니다. 이 都堂山城(도당산성)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성곽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진천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유적이 混在(혼재)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의 진천 지역이 삼국 시대의 爭覇(쟁패) 지역이다 보니까 고구려 땅이었다가 백제 땅이었다가 신라 땅이었다가 했다는 겁니다. 삼국의 격전지역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신라가 진천을 쟁패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팻말이 있는 부분을 보시면 우물이 있습니다. 여기 도당산성에는 우물이 두 군데가 있는데 우물이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여기서 물을 길러 먹었다는 이야기고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말입니다. 즉, 生城(생성)이었다는 겁니다. 도당산성은 지금은 도읍 ‘都’에 집 ‘堂’을 쓰는데 그 부분이 잘못됐다, 이것은 누군가가 한문을 바꿨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무리 ‘徒(도)’자, 화랑도 할 때 이 ‘徒’를 씁니다. 그리고 깃발 ‘幢(당)’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徒幢(도당)은 곧 郎幢(낭당)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는 ‘郎幢(낭당)’이라는 무적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낭당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이 곳이고 그 낭당부대의 주력은 화랑도들이었다는 겁니다.
 
길상사 정면으로 보이는 17번 국도. 건설 당시 나온 유물들을 통해 도당산성에 주둔하던 화랑들의 무덤터로 추측되고 있다.

 저 앞에 17번 국도가 보이는데 이 국도 공사를 하면서 지표조사를 했습니다. 지표조사를 하면서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충북대 학술조사단에서 유물들을 조사했는데 당시 발견된 무덤들이 화랑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게 도당산성하고 연계가 됐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전투하다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당산성도 상당히 중요한 유적인데 이 부분도 아까 말씀드린 연구하고 병행해서 복원시켜야 할 겁니다.
 여기는 탄생지입니다. 만노군, 그러니까 지금의 진천군 태수였던 아버지 金舒玄(김서현) 공이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어머니인 萬明부인이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신기한 꿈을 꾼 후 임신 20개월 만에 낳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곳은 사적지 제414호로 말을 훈련시켰던 馳馬臺(치마대), 식수로 사용하던 蓮寶井(연보정)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사서들에는 김유신 장군의 유소년기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은 ‘진천에서 태어나셨다, 13세 때 경주로 가셨다, 그 다음에 15세 때 화랑이 됐고 17세 때 심신수련을 하고 18세 때는 화랑이다’ 이런 기록은 나오는데 진천에서의 성장 기록이 없습니다. 안타깝죠. 그래서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들께서 오셔서 그럼 진천에서 뭐하셨냐 이렇게 물어보시면 기록이 없으니까 설명을 해드리지 못해 난감한 겁니다.
 길상사에 있는 영정에 대한 기록을 다시 찾아보니까 이렇게 돼 있네요.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 왕의 12세손으로 시조 할머니인 허황후가 인도 사람인 관계로 남방계 혈통으로 표현하였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군의 얼굴표정을 참조하고 후손 삼십 인의 얼굴을 합성하여 표준얼굴을 최종확정하였다.’
 진천은 인구가 6만 2000명입니다. 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작은 편인데 우리나라 안에서도 충청북도가 가장 작습니다. 그 충청북도에서 가장 작은 郡(군)이 진천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진천을 한 번 돌아보고 가시면서 느끼시게 되는 것이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할 때 진천을 丹田(단전)이라고 말하십니다.
 오늘 견학에서는 진천의 어떤 정신, 문화의 어떠한 근원 같은 것을 느끼고 가시면 될 거 같구요, 그 대표적인 부분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진천의 많은 유적들이 되겠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신라가 진천을 끌어안으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천에 철제련시설, 지금으로 말하자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련시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 제련시설 유적을 발굴하다 그대로 땅에다 묻어두고 포항제철과 산학협력으로 발굴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설을 보면 아래에는 백제 유적이고 위에는 신라 유적입니다. 이 시설이 원래 백제 것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철을 다루는 나라가 강국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전에 철이 얼마나 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그 당시 철을 제련하는 시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유적들이 진천에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 장소로 가시죠.<계속>
 
 
 
[ 2006-02-18, 10:37 ] 조회수 : 990

 

 

우리 민족은 삼국통일에서 시작됐다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4): 삼국은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 민족이란 개념은 15세기 이후 서양에서 생긴 것이다.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4편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와 그의 탯줄을 보관하고 있다는 지역을 둘러보면서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정리: 全敬雄   
 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가시는 곳은 김유신 장군 탄생지입니다. 진천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4㎞ 떨어져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1999년 6월 11일자로 사적지로 지정됐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生後 1400년 후입니다. 그렇게 역사적 중요인물의 탄생지가 1400년이 지난 후에야 사적지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가 역사의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적지로 지정이 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베는 것도 모두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군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5년 동안 탄생지 정화사업을 그렇게 했어도 해놓은 게 없다. 화장실 두 개 지은 거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진천에서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복원하려고 합니다만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에서 승인을 안해주고 있습니다. 승인을 안해주는 이유가 첫째 지표조사를 해보라, 두 번째는 그 당시의 유적을 복원하는 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가다보시면 ‘왜 하고 많은 넓은 지역을 놔두고 김유신 장군 어머니인 만명부인께서-지금으로 말하자면 神的 능력이 있다는 분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터를 잡으실 때 만명부인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을 경우에-왜 거기다가 터를 잡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 진천군에서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냐면 ‘김유신 장군께서 계양마을 담안방에서 태어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담안방이라는 말의 의미는 큰 울타리 안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 쪽에 보이는 산이 태령산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台(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령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왕족들은 台(태)를 모셨고 평민들은 台(태)를 태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태실 유적들이 남아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태실만큼은 못건드렸다고 합니다. 중부 지방에 태실이 네다섯 개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김유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왕들의 태실이라고 합니다.
 지금 천안 연구소에 계신 곽춘근 선생님은 ‘太古史(태고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환인께서 환웅에게 神市(신시)를 건설하고 홍익인간을 실천하라고 하시면서 天符印(천부인) 세 개와 삼천 무리를 내려주시고 신시를 열 때 風伯(풍백), 雲師(운사), 雨師(우사)가 다스리던 세 개의 지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 풍백이 다스리던 신성한 고장의 중심지가 지상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지상마을에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신 겁니다. 이런 설명의 근거가 되는 부분은 초기에 신시를 세운 위례성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 먼저 정립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곽춘근 선생님께서는 천안 북면이 위례성이라는 근거로 쓰신 겁니다. 풍백, 우사, 운사가 다스리던 지역이 진천, 안성, 천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안, 진천, 안성 세 개 시군이 행정협의체를 구성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용역조사를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이 김유신 장군 생가터로 1999년 6월에 사적지로 지정된 부분입니다. 저기 보이는 부분 대략 7만 평이 사적지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生家(생가)는 없습니다. 생가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문화재청으로부터 승인을 못받은 상태구요. 그렇다면 생가는 어디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 200~300m 떨어진 곳에 蓮寶井(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연보정이 삼국시대 때 쌓은 유적입니다. 경주에 있는 財買井(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같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우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니까 먹는 우물에 적이 毒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물을 적들로부터 항상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물을 담 안에 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이 김유신 장군의 생가라고 추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탄생지로 지정된 게 1999년 6월 11일입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고 역사적 평가 같은 부분에서 우리 후손들이 너무 등한시해 죄를 지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길상사는 원래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길상산에 있었습니다. 원래는 길상산으로 불렀을텐데 그 후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으면서 지금은 태령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순신 생가는 역사상 성역화해 놨는데 김유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김유신과 이순신을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고 이순신은 비장한 생애죠. 장엄하다는 건 성공 스토리고 비장하다는 것은 비극이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았다면 틀림없이 모함에 걸려 제 명을 다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이순신은 국가, 임금인 선조가 지원을 잘 안해줘 독자적으로 외롭게 싸웠습니다. 게다가 나라에서는 열심히 싸우는 사람을 불러들여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순신도 나중에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김유신의 신라는 조선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줬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고 김유신 전기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김유신이 하자는대로 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하자는대로 하니까 통일을 하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군인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난 장군은 성공했고 조선조처럼 군인을 멸시하는 시대에 이순신이 나오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난중일기 같은 걸 읽어보시면 답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김유신은 오래 사셨고 하고 싶은 것 다했고 하는 그런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비극적으로 죽은 분을 추앙해야 균형이 맞는 면도 있죠. 성공한 사람은 나중에 천천히 해줘도 되구요. 이 정도 보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신운철: 이것이 흥무대왕 遺墟碑(유허비)입니다. 이것은 태종무열왕의 유허비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유허비의 글은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지으신 겁니다. 최남선 선생은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와 탄금대 신립 장군 유허비의 비문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비석에는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허비란 공적을 이렇게 기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巨頭(거두)라고 하면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 한 분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십니다.
 두 분은 김유신 장군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육당 최남선 선생은 김유신 탄생비를 쓰기 위해 진천에 거의 와서 살다시피 하셨다고 합니다. 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시대라는 상황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해 안좋은 쪽으로 많은 글을 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투사로 알려져 있고 육당 최남선 선생은 친일행적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재 역사학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주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큰 흐름 자체에서도 그런 부분이 약간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기 유허비에도 그런 부분들이 나옵니다. 어떤 부분들이 나오냐 하면 ‘論者(논자)가 或(혹) 新羅(신라)의 統三(통삼)에 唐(당)의 兵威(병위)를 假(가)한 것이 民族觀念上(민족관념상) 如何(여하)하랴를 難(난)하지마는 본디 民族觀念(민족관념)은 西洋第十五世紀(서양제십오세기) 以降(이강)의 社會的(사회적) 産物(산물)로서 東洋古代(동양고대)에는 그 語句(어구)조차 發見(발견)되지 않는 것이니 저 唐(당)의 創業平難(창업평난)에 여러번 突厥回紇(돌궐회흘)의 外兵(외병)을 借用(차용)하였음이 唐(당)의 帝業(제업)의 疵類(자류)가 되지 않고 西洋中世紀(서양중세기)의 國家發達(국가발달)에 예사로 各國傭兵(각국용병)을 援用(원용)하였다 해서 그것을 貶薄(폄박)할 수 없는 것처럼 後世(후세)의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標準(표준)으로써 古代(고대)의 自國至上的(자국지상적) 國民倫理(국민윤리)를 逆推(역추)함은 결코 平論(평론)이 아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 말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신채호는 신라가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고구려, 백제를 쳤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만 그 당시 신라가 당나라에 합병된 것이 아닙니다. 또 당나라가 신라까지 침략하려고 하니까 신라가 당나라를 쫓아낸 거 아닙니까.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국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런데도 한반도를 차지하려던 당나라를 내쫓은 그 부분은 이야기를 안하고 ‘당의 힘을 빌렸다’는 부분만 강조하는 겁니다. 두 번째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백제, 고구려, 신라는 같은 민족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최남선이 민족이라는 개념이 언제 생겼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서양에서도 15세기에야 비로소 생긴 개념이지 6세기, 7세기에는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싸운 것 아닙니까. 즉, 통일한 다음에 민족이 생긴 겁니다.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민주주의가 없었던 세종대왕 시절에 세종대왕보고 ‘왜 당신은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 라고 욕하는 것하고 똑같다는 말입니다.
 
 신운철: 여기를 마무리한 다음, 보탑사에 있는 통일대탑으로 갈 겁니다.
 이 글의 흐름을 보시면 제일 끝이 ‘統一一念(통일일념)이 千秋(천추)에 相照(상조)하나니 此碑此記(차비차기)가 한갖 一片述古(일편술고)의 文(문)에 그칠 것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하셨단 말이에요.
 이곳 진천이 한반도를 몸으로 봤을 때 단전이고 기가 모인 곳인데 통일대탑이 이곳에 섰습니다. 지금 통일의 기운이 움트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 보탑사로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아시겠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이 신라 통일의 뜻을 담은 것인데 9층 목탑을 세우고 20년 만에 신라가 통일이 된 겁니다. 진천에 통일대탑이 섰는데 30년 안에 통일이 될 겁니다.
 
 
 

[ 2006-02-19, 15:38 ] 조회수 : 1060

 

 

 

보탑사 통일대탑과 통일 기원(上)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5):"통일대탑은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탑으로 황룡사 9층목탑의 양식과 그 뜻을 계승"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5편에서는 보탑사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 만든 통일대탑에 대해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분량이 길어 상·하로 나누어 게재한다.
정리: 全敬雄   
 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보탑사, 통일대탑 上]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곳의 지명이 상계리입니다. 아까 제가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 계양마을 담안방이라고 그랬죠? 그 때 지명이 그대로 내려온 것입니다. 지금 여기 상계리에서 넘어가는 이 곳이 연곡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통일대탑인데 탑이 있는 곳이 연곡리 보련마을입니다. 통일대탑이 있는 부분은 원래 절터가 아니었나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통일대탑은 1996년에 本殿(본전)이 완공됐습니다. 그 당시 지역신문에서 정리보도한 내용 중에서 통일대탑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무리를 어떻게 했냐 하면 ‘중부 지역에 남은 마지막 명당터다’ 라고 돼 있습니다. 한 번 가서 보시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정말 명당터라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가보면 마을 이름이 보련 마을인데 연꽃 蓮자를 쓸 만큼 주변의 열두 개 산봉우리들이 통일대탑을 감싸고 있고 그 중심에 탑이 꽃술처럼 서있습니다.
 통일대탑은 우리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쌓은 탑입니다. 통일을 기원한 대표적인 탑으로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는데 통일대탑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축양식과 그 뜻을 계승한 탑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대략 80m, 9층이었습니다. 통일대탑은 3층이고 높이는 약 42.7m입니다. 옛날 건축양식대로 못 하나 안박고 그대로 쌓은 탑이에요. 신라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고 23년 만에 삼국통일의 뜻을 이룩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예측하시는 분들이 30년 안에 통일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데 저도 거기서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대탑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건축양식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걸 종교적인 시설로 보지 말고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통일대탑이 어느 정도의 시설이냐 하면 1층, 2층, 3층에 四方佛(사방불)-동서남북으로 부처님을 모셨습니다-이 있는데 동쪽 약사여래像 앞에 4월 초파일이면 수박을 쌓아놓습니다. 그런데 그 4월 초파일에 쌓아놓은 수박이 동짓날이 되도록 썩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원래 수박은 수분이 95% 이상 되는 과일이다 보니 냉장고에 넣어놔도 썩어요. 그런데 6,7개월 동안 밖에다 놔둬도 썩지를 않습니다. 이 수박을 동짓날에 잘라먹는데 수박을 먹고 병이 나았다고 소문이 나면서 동짓날이 되면 사람들이 이 수박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섭니다. 여러분들께서 가보시면 지금도 수박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가면 경주가 다 보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걸로 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사람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탑이었다는 거에요. 이 통일대탑도 사람이 내부에서 걸어 올라가 전망을 볼 수 있는 탑입니다. 일단 개요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이곳이 통일대탑이 있는 보탑사입니다. 이 절의 이름은 보탑사이고 본전을 통일대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는 본절이 서울에 있는 삼선포교원이라는 곳입니다. 절은 절입니다만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도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오십니다.
 이것은 진천 연곡리 비석입니다. 白碑(백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시다시피 비석에 글씨가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도선 국사가 우리나라의 吉地(길지)에 백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백비가 네 개 정도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 중 진천에서 발견된 백비가 가장 큽니다. 이 비석은 일제 시대에 발견돼 보물 404호로 지정됐습니다. 일부에서는 비석의 글씨가 마모된 게 아니냐 말씀하시는데 마모된 것과 글씨가 없는 것은 틀리죠.
 이 비에 대해서 추가로 두 가지 설명드릴 것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비석을 세울 때 그 바닥에 거북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비의 받침 거북은 다릅니다. 거북이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말이 뭐냐하면 이렇게 보시다시피 허물을 벗고 있어요. 허물을 벗는 부분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면 석공이 돌에 정을 잘못치면 돌이 얽먹는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돌이 허물벗듯 떨어져 나간답니다. 신기한 것은 돌이 벗겨진 부분은 밋밋해야 하는데 그 안쪽에도 같은 무늬가 남아있는 겁니다.
 이 거북이 언제부터 허물을 벗기 시작했냐 하면 통일대탑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일전에 어떤 손님께 그 부분을 설명드렸더니 ‘이 거북이는 살아있는 거북이다’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허물은 언제까지 벗습니까’ 물었더니 ‘20~30년 걸릴 거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물어보니까 ‘이 돌이 하얗게 변할 거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지금 나이가 사십쯤 되니까 저는 이 거북이가 허물을 다 벗고 비석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살아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분의 말씀이 맞는지 확인해볼 겁니다.
 그 다음에 여기 보시면 아까 흥무대왕 유허비에서도 보셨듯 비석 아래부분은 거북이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 아랫부분은 보통 거북이가 아닙니다.
 여기 보시면 얼굴 앞쪽이 깎였죠. 진천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훼손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까 거북이가 살아있다고 설명하신 그 분은 이걸 보고는 ‘머리 부분이 말인 것으로 봐서 이건 天龜(천귀)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천귀라고 하십니까’ 물어보니까 과거 중국에서 황하가 큰 홍수로 범람해서 둑에 물이 스몄다고 합니다. 거기서 여러 조형물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몸통은 거북인데 머리는 말인 거북이가 출토됐었다고 해요. 그 조형물은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의 동물, 하늘에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천귀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그런 부분에 근거해서 이 조각이 이뤄진 것이지 그냥 이뤄진 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백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비가 왜 비문을 새기지 않고 그냥 놔뒀을까. 이 부분은 후손들이 기록하라고 우리 조상들께서 남겨놓으신 거에요. 그렇다면 현재 살아가는 우리가 남길 게 뭐가 있겠어요. 통일이죠. 통일되면 그 기록을 여기에 남길 거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비석이 안씌어 있다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진천은 가장 작은 군이지만 이렇게 통일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 꿈이 꿈틀대는 곳입니다. 통일대탑이 그냥 지어진 게 아닙니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이 곳에 통일대탑이 들어섰겠습니까.
 이제 통일대탑으로 들어가 보시죠. 여기는 1층이구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사방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방불을 모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방불을 모시는 곳을 잘 못봤어요. 남쪽에 계신 분이 석가여래, 동쪽에 모신 분이 약사여래 부처님입니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인간의 病事(병사)를 주관하시는 부처님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수박은 다른 불상 앞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동쪽에서만 그렇습니다.
 여기 놓인 수박들이 사월 초파일에 올려놓아가지고 동짓날, 대략 7개월 정도 지난 다음에 자르게 됩니다. 여름과 똑같이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보존이 됩니다.
 지금 여기 보시면 중심추, 心柱(심주)라고 하는데 심주의 칸이 이렇게 쳐있고 탑이 서있죠. 심주의 칸은 서른 세 마디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허리가 서른 세 마디로 돼 있다고 해서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 심주 밑에는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이 부분들은 모두 못 하나 안박고 전통방식대로 짜올린 부분이구요 이렇게 사람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게 지어진 것입니다. 올라가시죠.
 이 탑을 오르면서 보시면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실제로는 각 층의 중간에 층이 있습니다. 이 부분들이 사람이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층으로 따지면 전체가 5층이에요. 외부에서는 3층이구요.
 여기는 2층이구요 法寶殿(법보전)이라고 해서 불경이 보관돼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여기 있는 것은 문상대인데 아까 보신 심주와 연결돼 있는 거에요. 이걸 돌리면서 소원을 빕니다. 그런데 이 문상대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리면 훼손될까봐 지금은 돌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팔만 대장경이 들어 있습니다.
 이 탑을 짓는 데 태백산에서 자라는 紅松(홍송)을 8톤 트럭으로 150대분을 가져와서 지었다고 합니다. 그 홍송을 주재료로 해서 백두산, 한라산 등 팔도의 주요 지역에서 나는 나무를 모두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갑제: 春陽木(춘양목)이라고 그럽니다. 강원도 태백에서 나오는 나무들은 경북 춘양이라는 곳에서 모아서 보내기 때문에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下에 계속>
 

 

보탑사 통일대탑과 통일기원(下)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서(6):"우리 지도자들께서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7000만 동포가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5편에서는 보탑사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 만든 통일대탑에 대해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분량이 길어 상·하로 나누어 게재한다.
정리: 全敬雄   
 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보탑사, 통일대탑 下]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이 곳은 마이크를 안써도 거리와 상관없이 들을 수 있게 만든 강의실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잘 들리실 겁니다. 여기 전시된 그림과 사진들은 전세계의 탑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 사진이 초기의 불탑 형태라고 합니다. 인간이 불탑을 만들게 된 이유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사람이 걸어 올라가게 만든 탑, 예를 들면 황룡사 9층 목탑같은 것이 어떻게 사람이 걸어올라가게 만들었을까, 내부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은 각 층의 중간 단계에 이런 어떤 暗幕(암막) 형태가 있기 때문인데 그 부분을 이 암각화에서 나름대로 비밀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아까 말씀드린 대로 1층과 2층 사이, 2층과 3층 사이에 암막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황룡사 9층 목탑이구요, 높이가 약 80m 정도 된다고 하니까 통일대탑의 두 배 정도입니다. 높이가 두 배면 밑의 면적은 훨씬 넓었겠죠.
 목조 건물이 얼마나 보존이 어려우냐 하면요, 이 부분이 공사한 부분인데 불에 그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에 타기 전에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 설계도에 따라 불에 타기 전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하거든요. 통일대탑은 이런 화재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건물 곳곳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법륜사 목탑입니다. 일본의 탑 형태와 우리나라 탑 형태를 비교해보시라고 붙여놓은 사진입니다. 틀리죠? 왜 틀리냐 하면 우리나라 목재와 일본의 목재는 그 강도가 틀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고 우리나라 전통의 탑 형태를 흉내낼 수 없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큰 시설을 보면 이것의 두세 배 되는 나무가 있어 입이 딱 벌어진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목재 중에서 우리나라 나무가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게 되면 나무에다 전부 종이라든가 천 같은 것으로 감싸놨다고 합니다. 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중국 나무는 갈라지면 처음부터 끝까지 쫙 갈라지기 때문에 건물의 안전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 나무는 갈라지다가도 가다가 멈추기 때문에 안전에는 큰 영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물을 목재로 지었을 경우 천년 이상 갈 수 있는 나무는 우리나라 나무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시설도 천년은 갈 수 있는 시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불에 잘 안타죠, 나무가 우리나라 나무기 때문에 천년 가죠. 또 뭐가 있을까요. 해충? 지진? 맞습니다. 지진. 이 탑은 어떻게 내진 설계를 했냐 하면 주춧돌에다가 1㎜ 정도의 모래를 깔았대요. 그 위에 기둥을 세웠기 때문에 만약에 지진이 나면 주춧돌은 주춧돌대로 움직이고 기둥에는 영향을 안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진설계도 돼 있죠. 화재 위험 없죠.
 통일대탑이 문을 여는 날, 1000~1500명이 왔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걱정을 했답니다. 1000명 이상 들어가는데 붕괴위험은 없겠냐. 그러니까 탑을 지은 분께서 ‘대개 사람들이 나무보다 콘크리트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지금 올라오신 인원의 두 배가 올라와도 끄떡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1층, 2층, 3층을 뚫는 부분입니다. 앞에 보이는 부처님은 미륵불이에요. 그런데 보통 어떤 절에 가든지 가장 높은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십니다. 이 통일대탑의 가장 높고 귀한 자리는 이 자리에요. 일전에 어떤 손님께서 오셔서 왜 이 자리에 석가모니를 안모시고 미륵불을 모셨는지 주지 스님께 여쭤보시더라구요. 주지 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미륵불께서 미래에 오시라고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그러시더라구요. 미륵불은 아시다시피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잖아요. 이 부분이 花郞(화랑)하고 어떤 관련이 있느냐. 옛날에 신라 사람들은 화랑도를 미륵불로 믿고 살았었습니다.
 이 통일대탑을 지을 때는 다른 절을 지을 때처럼 한두 사람이 많이 시주해서 지은 게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조금씩 시주를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시주를 하신 분이 혼자서 이 미륵불상을 시주하셨다고 해요.
 
 조갑제:이 탑을 짓는데 예산이 40억 원 정도 들었다고 들었는데요.
 
 신운철:대략 40억 원 정도에서 50억 원 정도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 보면 난간이 탑 주위를 빙 둘러 있습니다. 이 난간을 돌면서 소원성취를 비는 탑돌이를 하죠. 원래는 탑돌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안전 문제 때문에 못하게 합니다. 이 난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의 산들이 연꽃잎처럼 이 탑을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탑의 丹靑(단청)을 하신 분도 우리나라 최고의 단청 전문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단청이 상당히 단아하다는 평가를 많이 합니다. 이 단청은 바람과 구름과 연꽃만 이용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단청을 만들 때도 사연이 있습니다. 탑 공사를 감독하시는 분께서 그 분께 단청을 맡기려고 찾아갔더니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계시더랍니다. ‘야, 내일모레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가서 단청을 하냐’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도 그 분께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공사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입원해계시던 그 분이 ‘그러면 내가 죽더라도 거기서 죽을 테니까 한 번 해보자’ 해서 이 단청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단청을 하고 나서 건강해지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바깥에 가서 위를 보시면 탑 꼭대기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금빛이 안나요. 그 이유가 뭐냐하면 옻나무가 번개를 안맞는다고 해서 옻나무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조들께서 건물을 지으실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외부로부터 호랑이 등 침입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막기 쉬운데 제일 힘든 게 뱀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원주택 지을 때 그 옆에 산이 있으면 뱀이 들어온데요. 옛날 사람들은 뱀을 어떻게 막았느냐 하면 집을 조금 높게 짓고 그 아래에 돼지를 길렀대요. 뱀의 천적이 돼지래요. 돼지는 독사가 물어도 꿈쩍도 안하고 뱀을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지금 내려갈 때 보시면 여기 건물 자체가 우리나라 원시건물 樣態(양태)부터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을 조금씩 따르고 있어요. 그래서 건축양식을 연구하러 오시는 분도 여기 오셔서 우리나라의 시대별 건축양식을 보고 배울 정도입니다. 이 탑이 어느 정도의 건축수준이냐 하면 각국의 기술자, 전문가,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여기 온 일본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니네들 이 정도 목조건물을 지을 수 있냐’ 물어보면 전문가와 학계 사람들은 못짓는다고 말한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우리 인구가 10억 명이 넘는데 찾다보면 있지 않겠냐’ 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사람이 걸어서 올라올 수 있고 强度(강도)나 引張(인장)부분 등이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1500년 전에 이것의 두 배, 규모로 따지면 이것의 열 배 정도 되는 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냐면 이 건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1층에 가서 보시게 되면 현판을 걸어도 1층은 조금 기울어집니다. 2층에 가면 현판이 거의 45도 기울어집니다. 3층에 가면 현판이 거의 누워버립니다. 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걸 9층을 쌓았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1층을 쌓을 때 세 배의 노력을 해야 3층을 쌓는 게 아니라 1층 쌓을 때 30배의 노력을 해야 3층을 쌓는다고 해요. 그런데 신라 사람들은 9층을 쌓았어요. 그것도 사람이 걸어올라가게 말이죠. 지금 저희 군수님께서 오셨네요.
 
 김경회 진천군수: 안녕하십니까. 진천군수 김경회입니다. 상미회 회원 여러분들과 의미가 있는 인연을 맺게 된 이 만남이 소중한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조갑제 기자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여러분들께서 오신다고 했는데 제가 오늘 미처 시간을 못비웠습니다. 그래서 신운철 계장이 안내를 맡게 됐습니다.
 제가 진천 군수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1982년부터 김유신 장군께서 어떤 통일 정신을 가졌었느냐 하는 생각을 되새기고자 여기에다 통일기원탑을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회용 카메라를 가지고 김유신 장군 탄생지 주변의 연보정이라든가 연곡리 석비라든가 태실 등의 유적지 기록을 남기고 1980년대 중반에는 신영훈 선생이나 이런 분들을 제가 만나서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 절터는 원래 사유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탑을 짓는 게 어려웠습니다만 마침 4800여 평이 거래되는 것을 소유주와 협의해 매입하면서 이 건물이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1996년에 불탑이 완공됐습니다. 財源(재원)에 대해서는 신운철 계장에게 말씀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탑은 1500년대 이후에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지 못했던 기술을 21세기에 다시 살려내 집대성한, 한국의 고건축술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탑이 들어선 보련마을은 많은 학자들과 풍수연구가들이 와서 이 지역을 一乘地支(일승지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은 저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박이 썩지 않는다거나 백비의 돌거북이가 허물을 벗는 현상이 생긴다든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정립해나가야 할 그런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많이 어지러운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할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고명하신 우리 지도자님들께서 정말 이 사회가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사천만, 칠천만 동포가 그 시대정신을 갖고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때에만 장래에 대한민국이 어떤 새로운 꿈과 비전을 펼쳐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대정신은 삼국시대의 화랑정신, 고려시대의 抗蒙(항몽)정신에서 남은 유산은 딱 한 가지 있지 않습니까. 팔만 대장경, 조선시대의 忠義정신, 구한말의 獨立정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지도자들이 ‘이 민족이 어떻게 해야 미래에 발전할 것인가’ 하는 뭔가를 만들어놔야 나중에 후손들에게 ‘야, 이놈들아. 그래도 우리는 이것은 해놓지 않았느냐. 너희도 좀 잘해라’ 이렇게 지도할 수 있는 조상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대정신이 발현되기를 간절히 염원을 해봅니다.
 저희 진천에서는 가로수도 전부 무궁화 나무로 바꿨습니다. 무궁화 나무의 다른 이름이 天地花라고 합니다. 무궁화 나무는 開花기간이 지구상에서 꽃피는 나무 중에서 가장 길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지화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민족화로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미를 모릅니다. 이 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신라 화랑들은 가장 모범이 되는 화랑을 선발하면 무궁화를 머리에 꽂아줬답니다. 그 모범화랑에게 무궁화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주면서 천지화랑이라고 命名(명명)했습니다. 천지화랑에겐 신라의 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화랑들이 목숨바쳐 싸울 수 있는 거죠. 훈련이든 전투든 1등을 하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겠죠.
 그럼 그 화랑이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떻게 해줬느냐. 임금이 八關會(팔관회)를 열어줬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 거라고 봅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도 지금 우리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죠. 당시 신라는 아주 조그만 나라였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外戚(외척)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고 골품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권력을 가진 사돈이 있으면 지금도 군대 안가잖습니까. 우리 장인이 누군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누군데 하면서 안가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골품제도가 생긴 겁니다.
 지금 우리가 신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에게 배운 겁니다.
 저는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신라의 역사를 읽어보면‘야, 이렇게 신라사람들이 똘똘 뭉쳐있으니까 그 거대한 강성국가인 고구려를 섭렵하고 백제를 섭렵하고 삼국통일을 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싸움터에서 죽으면 임금이 나와서 내 아들 제사 지내주고 가족들 뒷바라지 다 해주는데 목숨 안바칠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이 신라 팔관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종교적인 행사로 평가절하해서 ‘그건 불교에서 하는 거야’라고 과소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국제결혼을 제일 먼저 했던 민족입니다. 2200년 전에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라에서 장보고가 태어난 거죠. 우리가 연속극은 보지만 장보고가 왜 태어났냐는 사실은 모르고 있거든요. 장보고가 왜 태어났습니까.
 장보고는 동남아시아를 섭렵하면서 중국에 가서 벼슬도 했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는 중국 땅이 곧 우리 땅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스스로 비하하는 역사만 배운 겁니다. 상식적으로 여기서 쫓겨난 사람이 중국에서 어떻게 벼슬을 합니까. 거기도 내 나라, 내 피가 흘렀고 내 힘이 미쳤으니까 가서 벼슬을 했지 않겠습니까.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쫓겨 나왔다는 것은 드라마 내용일 뿐입니다. 장보고 장군이 동남아시아 전체를 섭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야국이 서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동남아를 제패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인도의 알마타 왕이 딸을 주죠.
 이런 예에서 보듯이 신라는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나라인데도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강자에 의해서 쓰여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공을 안바친 지 100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중국 사람들이 왜곡시킨 역사를 배우면서 그게 제일인 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인 지금 우리가 먹고살 만큼 됐지 않습니까. 이제는 고대에 치우 천황이 중국의 始祖를 전쟁터에서 사로잡아 무릎을 꿇게 하고 항복시켰던, 그런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치우가 누구냐. 환웅 시대의 열네 번째 임금입니다. 열네 번째 임금이 만주벌판에 가서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을 무릎꿇게 하고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빨리 교과서에 반영하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상식으로 통용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그 커다란 가슴을 물려받을 수 있고 어디에 가서 경쟁할 때도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지 맨날 얻어맏는 것만 가르치고 중국은 대국이라고만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중국은 한반도를 天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 말씀은 왜 우리가 그런 역사를 가지고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느냐는 거죠.
 지금 중국에서는 동북 3성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단군을 완전히 신격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단군이 어디 神입니까, 사람이지. 중국의 미래학자들은 단군을 신격화시키면 중국이 동북 3성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우리나라가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봅다. 제 말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조갑제: 군수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신운철: 군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사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청동기 시대를 대략 3000년 전이라고 배우는데 일본이 자기네 청동기 역사를 4000년으로 맞춰놓고 우리나라 역사를 맞추다보니까 우리 한민족의 청동기 역사도 거기에 맞춰 줄어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은 그 부족장이 죽으면 만드는 무덤입니다. 지구상에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지구상 고인돌의 50%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는 거대한 부족이 이끄는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의 기원설이 북방 기원설, 남방 기원설만 있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자생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후손들이 고민해야 할 사항 중 하나인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치우천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 곳에 계시느냐 하면 여러분 우두머리라는 말은 아시죠. 소 牛자, 머리 頭자를 써서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우두머리라는 말은 어떤 무리의 최고지도자를 말하는 겁니다. 이 우두머리라는 말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치우천황의 투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치우천황은 전투 중에 청동투구를 썼는데 그 투구에 소뿔 두 개를 달았답니다. 그때부터 생긴 말이 우두머리라는 겁니다.
 우두머리의 모델인 치우천황은 실존인물입니다. 왜 실존인물이냐 하면 중국에 가면 치우천황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지금도 중국에 가서 치우천황에 대한 말을 꺼내면 사람들이 차렷 자세로 듣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전쟁의 神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중국 사람들은 신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70여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치우천황은 전쟁에서 焰硝(염초)와 硫黃(유황)을 썼다고 합니다. 염초는 안개를 일으키고 유황은 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황을 번개를 일으키고 안개를 일으키는 신으로 알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깃발 문양도 치우천황 문양이에요. 이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어요.
 치우천황을 우리 고대역사에서 환인, 환웅, 단군으로 따졌을 때 14대 환웅이라고 합니다. 이 14대 환웅이 실존인물인데 우리는 그 아랫대인 단군을 신화라고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도 교과서 자체도 다시 써야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를 아까 군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치우천황이 누구와 싸웠느냐 하면 중국의 黃帝(황제) 軒轅(헌원)입니다. 치우천황은 동이족, 조선족이고 중국 황제 헌원은 중화족입니다. 황제 헌원은 중국을 세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헌원하고 싸운 치우천황은 우리나라의 15대 환웅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 역사가 오래됐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더 오래됐다는 말이죠.
 중국의 기록에도 치우천황하고 황제 헌원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과 치우천황은 동이족이라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우리는 지금 역사를 그렇게 안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황제 헌원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부분이 뭐냐하면 우리는 황제를 임금 皇자로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라 누를 黃자를 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누를 黃자는 五行에서 색깔로 따지면 중앙을 의미한다고 해요. 중국 고대에 五帝, 즉 다섯 제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운데 있었던 제후인 황제 헌원이에요. 그 사람이 중국의 시조에요.
 이런 부분을 우리 후손들이 더 연구해서 우리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말씀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
 
 
 
[ 2006-02-21, 11:10 ] 조회수 : 624

 

 

 

 

龍華寺 석불입상과 농다리 이야기
'龍華는 김유신 장군을 말하는 겁니다. 예부터 이 불상은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頌德불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편집자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6편은 용화사 석불입상과 농다리에 대해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정리: 全敬雄   
 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가시는 곳은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이 있는 곳입니다. 이 절과 불상은 화랑이나 김유신 관련 유적으로써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이 불상은 頌德(송덕) 불상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구요, 저희는 김유신 장군이 神劍(신검)받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불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돌아가신 지 160년이 지난 후 김유신 장군께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증됐습니다. 추증할 당시 대규모의 어떤 기념집회가 있었겠죠. 그리고 추증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기념물을 세웠을 거라고 추측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런 기념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천에서 더 보셔야 할 것이 籠(농)다리입니다. 시내에서 한 4㎞ 거리에 있습니다. 차로 이동하면 한 10분 걸립니다. 지금 안내하시는 분들이 시간상 어렵겠다고 하셔서 가지는 않고 일단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농다리는 고려 초에 쌓은 다리입니다. 옛날 다리들은 징검다리였습니다만 지금 다리는 교각을 세워서 상판을 얹잖아요. 그 상판을 얹는 다리의 초기 형태로 보시면 될 거에요. 거기에 다리 교각으로 사용한 돌을 紫色(자색)돌이라고 하는데 색깔이 붉은색입니다. 자색돌로 교각을 쌓은 뒤 상판을 얹은 다리에요. 그게 고려 초부터 1000년 정도 이어온 다리입니다. 다리 규모가 상당히 커요. 약 100미터 정도 되는 다리인데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만 이 다리가 고려시대에 쌓은 거냐 삼국시대에 쌓은 거냐를 가지고 진천에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商山誌(상산지)」에 보면 고려 초에 임희 장군께서 쌓았다는 기록 때문에 고려 초에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다리는 세금천이라고 하는 하천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청주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곳이 교통 요충지이면서 전투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다리는 아니라도 그 이전에 원형의 다리는 있었고 고려 초에 만든 것은 그 다리를 보강발전한 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년에 한 번씩 농다리 축제를 합니다. 그 위에 상여가 지나가요. 농다리는 대나무 竹변에 龍을 씁니다.
 이 농다리를 지네다리라고도 하는데 모습이 마치 지네처럼 생겼어요. 이 다리와 관련해서 용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과 관련된 행사도 전해져 내려와요. 이 때문에 원래는 龍다리인데 누군가가 격하시키느라고 대나무 竹 변을 붙여서 籠(농)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이런 학설도 있습니다.
 태고사를 만든 분의 학설에는 이런 설명도 있습니다. 옛날에 철기가 없을 때는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래서 대죽자가 붙은 글자는 모두 무기를 말한대요. 그 다음에 龍자는 군사라는 의미랍니다. 그래서 대죽자 밑에 용龍자가 있으면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지키던 곳이다. 그래서 籠자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이것이 용화사 석불입상입니다. 이 불상은 만들어진 지 약 1000여 년 된 겁니다. 龍華(용화)라는 단어가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 불상 자체가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불상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대웅전은 처음부터 있던 건물이고 그 옆의 건물이 금년도에 새로 완공된 건물일 겁니다. 오늘 진천에서 보실 중요한 곳은 다 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2006-02-22, 11:10 ] 조회수 :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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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美會 -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
 
 [2. 김씨 이야기]
 
 우리는 보통 김유신을 경상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충북 진천 사람들은 김유신을 진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충북 진천 사람이 맞습니다. 진천에서 三代를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진천에서는 화랑도, 김유신, 태권도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시설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 여행을 해보면 지방의 작은 마을 같은 곳에 그 藩(번)을 발전시켰던 과거의 영주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만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드디어 그런 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鄕土史(향토사)라는 게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역사를 쓰면 당쟁 이야기, 권력투쟁 이야기같은 것들 위주로 서술되는데 향토사의 경우에는 어디서 누가 태어나고, 어릴 때 어떻게 자라고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실감나고 따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오늘 명단을 보니까 김씨 姓을 가지신 분들이 여섯 분이신데요, 여기서 김해 김씨가 몇 분이십니까? 제가 오늘 김씨 성에 대해서 말씀을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쉽게 듣기 어려운 겁니다. 이 이야기를 위해 외국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주도 세력이 바로 김씨입니다. 김씨는 정말 굉장한 브랜드입니다. 김씨는 가야 계통 김씨와 신라계통 김씨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약 800만 정도입니다. 이중 60% 정도가 김해 김씨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명한 다섯 김씨가 있지 않습니까? 金日成, 金正日, 金大中, 金泳三, 金鍾泌, 이렇게 다섯 명이죠. 金泳三씨는 김해의 옛 지명인 金陵(금릉) 김씨고 金大中, 金鍾泌씨가 김해 김씨입니다. 金日成 일가는 전주 김씨죠. 전주 김씨는 김해 김씨에서 나온 겁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姓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옛날 장기영씨가 천황가의 황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도 사실 짐씨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 말로는 김씨라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김씨냐 하면 가야 김씨라는 겁니다.
 일제 시대 총독부가 들어오면서 이상한 법령을 만듭니다. 김해 김씨는 족보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왜냐? 이건 추측입니다만 김해 김씨의 족보가 자세히 만들어지면 자기네 천황가와 연결된 것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라는 것입니다.
 천황가에서 모시는 神이 셋 있는데 이 세 사람의 神이 모두 가야 계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일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야 출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김씨의 역사를 보면 漢 武帝(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무제가 흉노를 토벌하는 데 흉노의 왕자가 투항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을 지어주는데 자네는 고향이 어디냐 하니까 ‘알타이에서 왔습니다’하는 겁니다. 알타이의 뜻이 뭐냐 물으니까 金(금)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한무제는 그렇다면 너의 성은 김으로 하라고 해서 만들어집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김일제입니다. 사마천의 漢書(한서)라는 데 보면 김일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한무제의 경호실장 역할을 맡아 가문이 아주 융성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중국 역사에 보면 한나라가 두 동강이 나죠. 중간에 王莽(왕망)이 쿠데타를 일으켜 ‘新(신)’이라는 나라를 만드는데 그 때 김일제가 거기에 가담했다고 해서 왕망이 무너지고 나중에 후한이 생겼을 때 이 사람들이 쫓겨나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가설이 생겼습니다.
 신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입니다. 알에서 나와서 김알지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알타이에서 왔다고 해서 알지라고 한 겁니다. 김알지를 한자로 하면 金金입니다. 그 다음에 김수로 왕은 나름대로의 김해 김씨입니다.
 그 다음에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만들 때는 後金(후금)이라고 했습니다. 왜 후금이라고 했냐하면 그 앞에 금나라가 하나 있어요. 요나라, 금나라 아시죠? 11세기 경에. 이 금나라를 누가 만들었냐 하면, 신라 유민 출신인 김한보라는 사람이 만주로 가서 시작한 부족이 나중에 금나라를 만들죠. 그래서 金史(금사)라는 역사서에 보면 ‘신라사람 김한보가 우리의 부족을 만들고’ 등등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래 옛날에는 나라를 세우면 자신의 성씨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맥을 이어서 같은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17세기에 중국을 점령하고 세운 나라가 청나라입니다. 그럼 청나라 왕족 성씨도 김씨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성씨를 愛新覺羅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愛, 신라 新, 생각할 覺, 신라 羅 이렇게 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말자’ 그런 뜻이 되는데 그건 그런 뜻도 있지만 金을 만주말로 안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자로 고친 겁니다. 그런데 손문이 혁명을 일으키고 모택동이 공산혁명을 일으키고 해서 청나라 왕족이 평민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모두 김씨로 돌아갔습니다. 여기도 김씨 세상이었죠?
 이처럼 일본도 한국도 모두 김씨 세상이었습니다.
 징기스칸은 무슨 성씨였을까요? 징기스칸도 김씨였습니다. 징기스칸을 황금 씨족이라고 합니다. 징기스칸이 자신의 가문을 말할 때 황금씨족이라고 그랬습니다. 몽고말로 보르테 오호락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황금씨족이라는 말입니다. 황금씨족이라면 김씨입니다.
 경주의 옛날 이름은 아시죠? 金城(금성)입니다. 이번에 경주에 가서 천마총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라가 세계에서 내놓을만한 게 주로 금으로 된 겁니다. 금관, 금귀걸이 등은 세계적입니다. 금 세공기술도 세계적입니다. 왜 이렇게 금이냐? 이렇게 되면 족보가 죽 나옵니다. 김씨는 동북아시아 흉노 계통 유목민족의 표상입니다. 브랜드입니다. 김씨 성을 가진 나라는 그 지배민족들이 다 유목민족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금이냐? 알타이에서 시작된 거죠. 유목민족의 고향이 알타이거든요. 알타이가 금입니다. 왜 금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 유목민족들은 항상 이동해야 합니다. 정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양떼를 몰고 항상 이동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값이 비싸고 가볍고 어디서나 통용되는 게 바로 금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기술은 좀 떨어져도 금과 관계되는 것은 잘 만들고, 특히 금 세공기술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북아시아에서는 대충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漢族(한족),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진짜 중국인들, 그 다음에 북방유목민족계통, 그런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일본, 한국, 금, 요, 원, 당-당나라도 유목민족 출신입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순수 중국인들이 세운 나라는 한나라, 진나라, 송나라, 명나라 정도밖에 없습니다. 순수 한족이 세운 나라는 좀 약합니다. 진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곳은 힘이 셉니다. 그러나 이제 한족 인구가 많으니까 모두 흡수됩니다. 그래서 이 한족 계통의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 계통이 아시아에서는 항상 남북으로 대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일본, 한국, 몽고가 남아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가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우리 계통이고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곳이 우리와 사촌쯤 되는 혈통입니다. 그러니까 김씨는 굉장한 씨족입니다. 김씨는 동북아시아의 제일 유명한 가문이고 그 사람들이 사실은 한국의 주류세력입니다. 그러니까 요새도 3김씨가 큰 소리를 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선거에서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씨가 10만 표 차이로 당선된 것 중에서 김해 김씨의 영향도 있습니다. 경상도에 김해 김씨가 많은데 그 지역에서 김대중씨를 밀어준 것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야담과 실화가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正史에 가깝습니다. 김해 김씨들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많이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