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관선
통일신라 시대의 무역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보고(張保皐)의 무역선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를 ‘교과선’이라고 불렀다. 당시 해상왕 장보고가 탔던 교관선은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을 전개했던 통일신라 시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두목(杜牧)은 <번천문집> 제 6권 장보고/정년전(張保皐/鄭年傳)에서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 신라로부터 서주(徐州)로 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후에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가서 신라의 왕을 찾아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전역에 걸쳐서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청해의 진을 얻는다면 적들이 사람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겠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바닷길의 요충이다. 신라왕은 장보고에게 많은 사람을 주어서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고 신당서(新唐書)에 쓰고 있다. 장보고가 서주와 산동 해안 지방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체로 816년에서 826년 사이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여 왕명을 받들어 청해진의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남해를 지키면서 신라, 당, 일본 간의 해양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양 무역 대상 지역은 신라의 청해진(완도)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의 문등, 회강 지구의 연수/양주, 강남 지구의 명주(지금의 영파), 대마도를 지나서 일본 규슈(九州)의 하까다(博多) 등이었다. ◎교관선의 특징과 추정 근거 교관선은 갑판 위에 선실이 여러 개 있는 평저구조선(平底構造船) 형식으로 돛대를 여러 개(3개) 세운 선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장보고의 무역선이 갑판 위에 선실을 구비한 누선형(樓船形)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원양 항해선이었던 만큼 비바람 등을 막고, 함께 내왕했던 하주나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선실을 구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본래 누선은 중국에서 군선으로 발달한 배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적마다 누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신라인들도 당연히 누선형의 배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누선은 군용뿐 아니라 사신선이나 교역선 같은 배에도 점차 쓰이게 되었다. 둘째, 장보고가 활동하던 9세기는 당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당시 중국의 누선은 전형적인 반저선(半底船)으로서 현재 정크선의 모체가 된 사선(沙船)을 초기 시대에 개발하여 국내에서는 조운선(漕運船)으로, 대외적으로는 원양무역선 또는 사신선 등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선은 특히 양쯔강 이북의 북양에 적합한 선형인데, 선저가 평탄하므로 황해 연안 등 수심이 얕은 지리적 조건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보고 해상 무역 항로 또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볼 때, 장보고가 중국배를 그대로 사용하였든 절충식 선박을 만들어 사용하였든 간에 그 구조가 평저구조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당시 문서를 보면 장보고는 탁월한 항해술을 체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항해술은 천문 기상 지식과 선박 조종술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조종술은 돛의 구사 능력에 달려 있었고, 그것은 곧 역풍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선은 일찍이 돛을 여러 개씩 달아 역풍을 잘 이용하였는데,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 곳의 문물에 밝았던 장보고가 당연히 돛을 두 개 이상 장착한 다외선을 사용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원(原)삼국시대나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때 사용하였던 선박의 유물이나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나 그 외의 고서적에서도 선박의 규모, 치수, 구조 같은 것을 밝혀 놓은 것은 없다. 다만 통일신라 시대의 통나무 쪽배 유물이 안압지에서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고려 시대인 11세기로 추정되는 연안 무역선이 완도에서 발굴되고, 이어서 달리도(達理島)에서 13세기~14세기로 추정되는 연안 무역선이 발굴된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 무역선의 특징 통일신라의 무역선은 당, 신라, 일본 등 삼국의 해양과 해안을 항해할 수 있는 평저형 연안선에서 발달한 원양 해양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역선의 선형, 즉 배의 모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배의 밑은 뗏목과 같은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 평평하다. 둘째, 배의 뱃전인 삼판은 두꺼운 나무판자로 일곱 장 이상을 겹쳐서 이어 올렸다. 셋째, 배의 겻집 위에는 승객이 기거할 수 있는 선실이 마련되어 있다. 넷째, 배의 이물은 높은 파도를 타고 나가기 위하여 뱃전을 높게 하였다. 다섯째, 큰 돛대는 한판(중앙)의 이물(앞)에 세우고 이물 머리에 조풍(潮風) 돛대를 세웠다. 엔닌(圓仁, 794~864년)은 그의 순례기에서 “신라의 배(交關船)는 규모는 작지만 빠르고 험한 파도에도 강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왜인 400명이 9척의 교관선에 나누어 타고 적산에서 출항한 지 3주일 만에 귀국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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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본의 백제식 견당선 그림 |
출처/소장 | 백제식 견당선/[길비대신입당회사]-일본 |
설명 | 12세기경에 그려진 [길비대신입당회사]의 견당선은 역사 문헌 기록에 보이는 견당선의 설명과 일치하는 배를 묘사를 하였다. 이 견당선과 통일신라시대의 교관선의 시차는 불과 100년~200년 정도로 백제식 선박과 같은 선형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의 길이 : 70..6자(21.2m) 배의 너비 : 22.6자( 6.8m) 배의 깊이 : 11.3자( 3.4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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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교관선 복원 그래픽 - Camera view |
개발자 | 코리아비주얼스 |
설명 | 교관선은 평저형 구조선으로서 포판 위에 선실이 있는 뱃집을 세웠고 돛대를 3대 이상을 세운 원양 범선이다. 또, 교관선은 규모는 작지 빠르고 험한 파도에도 강한 구조를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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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 코리아비주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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