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어떻게 말살.. | |||||||||||||||
7천만 대한민족이 신라 천년의 왕도로 굳게 믿었던 경북 경주(慶州)는 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엉터리로 지정한 가짜 도읍지(都邑地)로 명확히 입증(立證)되었습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마침내 9주를 두었다. 본국 국경 내에 3주를 두었는데, 왕성(王城:금성) 동북쪽의 당은포(唐恩浦) 항성(項城)으로 향하는 길목에 상주(尙州)를 설치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34 잡지3 지리1] 옛 백제국의 영토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성 북쪽의 웅진(熊津)을 웅주(熊州:충남 공주)라 하고 서남쪽을 전주(全州:전남 전주)라 하고 다음에 남쪽을 무주(武州:전남 광주)를 설치했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가 한주(漢州:경기도 광주)이고 그 다음 동쪽이 삭주(朔州:강원도 춘천)이고 또 그 다음 동쪽이 명주(溟州:강능)이다. 신라는 9州(주)에 郡縣(군현)을 설치하여 관리한 곳이 무려 450현이었다. (지방의 향리와 部曲(부곡)등은 복잡하여 그 목록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의 지리는 광활하게 뻗어 실로 극찬 할만 하였으나 마침내 국력은 쇠약하자 정치는 황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그렇게 강활 했던 국토도 날로 쪼그라들어 마지막 신라왕인 金傅(김부)를 우리 고려 太祖(태조:왕건)께서 귀부시키고 慶州(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9주(九州)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의 5소경제(五小京制)는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國原小京 ;충주)이 설치되고,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北小京 ; 지금의 강릉)이 설치되었다. 신라 삼국통일시대는 아시촌 소경의 북소경은 폐지하고, 문무왕 20년 북원소경(北原小京:원주)과 금관소경(金官小京:김해)을 각각 설치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남원)을 설치하고 국원소경을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개칭함으로써 비로소 5소경제가 완비되었다. <이병도가 지정한 9주 5소경의 현재지명>
신라 9주의 완전은 이미 신문왕 5년의 일이지만 경덕왕(742-764년)때에는 단지 그 명칭을 漢式化(한식화)한데 불과하며 또 그 九數(9수)란 것도 중국의 九州(9주)를 모방한 것이다. 9주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는 신라 및 伽倻(가야)의 地(지)에 漢,朔,溟(한,삭,명)의 3주는 옛 고구려의 남부에 熊,全,武(웅,전,무)의 3주는 백제 故地(고지)에 설치한 것이다. 라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왕에 충성한 이병도는 우리민족을 철저히 비하(卑下)했습니다. 1.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의 신라 [신라의 건국과정(중학교 국사)]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있던 사로국에서 시작되었다(기원전 57). 신라는 박, 석, 김 3성의 시조 설화에서 보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적 통합이 늦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등 60쪽] :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당은]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하구의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당이 설치한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함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후략) ◈ 이병도의 엉터리 신라 3주(三州) ▶ 상주에만 10군이 속했으나 경상북도에 10군이 있습니다. (1). 상주(尙州) → 경상북도 상주(尙州)
(2). 良州(양주) → 경상남도 김해(金海) ▶양주의 경상남도에 대구시, 경산, 영천군이 속해 있습니다. (뒤죽 박죽 양주) 양주는 文武王(문무왕) 5년 上州(상주)와 下州(하주)의 지역을 할당하여 歃良州(삽양주)를 설치하고 神文王(신문왕) 7년 성을 쌓았는데 주위의 둘레가 1,260보 였으며 景德王(경덕왕)이 개명하여 良州(양주:梁州(양주:경남 양산군일대)이며 지금의 [경남] 金海(김해)이다. 양주는 義安郡(의안군), 密城郡(밀성군), 火王郡(화왕군), 壽昌郡(수창군:大邱), 獐山郡(장산군), 臨皐郡(임고군), 東萊郡(동래군), 東安郡(동안군), 臨關郡(임관군), 義昌郡(의창군)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이 있고,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다.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慶州)가 경상남도에 있습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 경주(慶州)는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에 있습니다. <大城郡>, 本仇刀城>境內, 率伊山城․茄山縣>[一云驚山城.]․烏刀山城等三城, 今合屬 <淸道郡>. 約章縣, 本惡支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東畿停, 本毛只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34卷-志3-地理1-26 大城郡(대성군)은 본래 仇刀城(구도성)이며 境內(경내)에 率伊山城(솔이산성)과 茄山縣(가산현:일명 驚山山城(경산산성)과 烏刀山城(오도산성)의 三城(3성)을 합한 군인데 지금은 淸道郡(청도군)에 속한다. 約章縣(약장현)은 본래 惡支縣(악지현)이였으나 景德王(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合屬(합속)시켰다.東畿停(동기정)은 본래 毛只停(모지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商城郡>, 本西兄山郡,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南畿停, 本道品兮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中畿停, 本根乃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西畿停, 本豆良彌知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北畿停, 本雨谷停,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莫耶停, 本官阿良支停[一云北阿良], 景德王改名, 今合屬<慶州> 商城郡(상성군)은 본래 西兄山郡(서형산군)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南畿停(남기정)은 본래 道品兮停(도품혜정)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中畿停(중기정)은 본래 根乃停(근내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의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西畿停(서기정)은 본래 豆良彌知停(두량미지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北畿停(북기정)은 본래 雨谷停(우곡정) 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莫耶停(막야정)은 본래 官阿良支停(관아양지정:일명 북아량)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慶州(경주)에 합속시켰다. 상기 본문에서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에 신라 천년의 慶州(경주)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월성군의 慶州(경주)가 어찌하여 경상남도의 良州(양주)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경남 金海(김해)]에 12군 중에 壽昌郡(수창군:지금의 大邱(대구)이 속해 있습니다. 7천만 대한민족이 오늘날 까지 신라의 천년 王京(왕경)으로 굳게 믿었던 慶州(경주)는 조국을 배신하고 죽을 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충견(忠犬:똥개) 이병도가 엉터리로 지정한 가짜 王都(왕도)로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서가 필요하겠습니까? (3). 康州(강주) → 경남 진주(晋州) 신라는 경상남도에 晋州(진주), 良州(양주) 2주와 金海(김해) 소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경남 강주에 경상북도의 고령군(대가야국),칠곡군, 성주군이 속해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