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남양의 당성진(唐城鎭) 설치

吾心竹--오심죽-- 2010. 1. 30. 20:32

re: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에 대해 알려주세요 내공 100

fine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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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07:40

질문자 인사

주제는 맞지만 너무 내용이 적네요<<>>약간 주제와 안맞아 별3개

신라 말 호족세력의 형성

 

1) 호족세력의 성장


신라 말기에 대두한 지방세력을 한국 역사에서는 호족(豪族)이라 부르고 있다. 호족은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는 진성왕(眞聖王, 재위 887~897) 때부터 지방사회의 실질적 지배자로 등장해 사회변동을 주도했다. 신라에서 호족세력의 성장은 골품제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첫째, 당시 골품제 사회에서는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관직 배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신라 후기에 오면 왕의 근친도 관계 진출이 수월하지 않을 정도로 진골귀족이 포화상태였다. 이에 따라 왕실 및 진골귀족은 여러 가계로 분지화(分枝化)됐다. 왕위 계승전으로 나타나는 치열한 정권 쟁탈전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격화도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력배분 문제는 국가 지배층의 기득권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자칫하면 국가 존망과 연결될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다. 권력 쟁탈전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 일어난 여섯 번의 반란을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왕위쟁탈전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가문은 권력에서 소외돼 중앙정계에서는 몰락했다. 이런 귀족은 연고지가 있는 지방으로 이주, 지방의 세력가로 전환했다.

혜공왕 4년(768)에 일어난 (김)대공(大恭)의 난에서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웠다. 대공을 비롯한 96각간은 진골귀족이었던 만큼, 이때에도 전국 각지에 진골귀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30년대 후반의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거치면서 패배한 귀족의 지방 이주는 보편적 현상이 됐다. 진골귀족에 비해 지위가 훨씬 낮은 6두품 귀족의 낙향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골품제는 지방인의 중앙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골품제 사회는 수도에 거주하는 왕경인(王京人), 그것도 진골귀족의 특권만 보장해 주는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지방사회의 실력자가 중앙으로 진출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지방의 유력자들은 중앙 진출을 포기하고 지방사회에서 대를 물려 토착세력이 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골품제는 능력 발휘에 큰 장애가 되었고 이를 개탄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6두품의 불만이 컸다. ?삼국사기? 「설계두 열전」에 그 단면이 보인다.


설계두(薛罽頭) 역시 신라 사대부가의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하였다.

설계두가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가 있어 뛰어난 공을 세우더라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멀리 중화국(中華國)에 가서 불세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제 스스로 부귀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복(高官服)에 검패(劍佩)를 갖추고 天子 곁에 출입하였으면 만족하겠다.”라고 하였다.

무덕 4년인 신사년(621)에 비밀히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다. (후에) 마침 태종 문황제가 고구려를 친정하므로 자천하여 좌무위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으로 와서 고구려군과 주필산 아래에서 싸우는 중 깊숙이 들어가 분전하다가 죽으니 그 공이 일등이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 물으니 좌우에서 신라인 설계두라고 아뢰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나라 사람들도 오히려 죽기를 두려워하여 뒤를 돌아보며 나아가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나랏일에 죽으니 무엇으로 그 공을 갚을 것인가”하고는 시종들에게 물어서 그의 평생 소원을 듣고는 어의(御衣)를 벗어 덮어주고 대장군 관직을 제수하고 그 예로서 장사지냈다.   (@三國史記@, 卷 47 「列傳 7」, 薛罽頭) 

    

골품제가 사회발전에 큰 장애였으며 정치 혼란의 근본원인이었음에도 신라 지배층은 전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래 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 가문의 조기 몰락에서도 신라 지배층의 편협함을 잘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 제 37대 혜공왕 대력(大曆 ; 당 대종의 연호) 14년인 기미년(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탔는데 그 형상이 장군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릉(竹現陵 ; 미추왕의 능묘)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언가 진동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하고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은 이랬다.

“臣이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난 경술년(770, 혜공왕 6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임금이나 여러 신하들이 저의 공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왕(미추왕)이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와 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김유신의 혼백이) 청해도 세 번 다 (미추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훗날의 원성왕)을 보내어 김(유신) 공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유신) 공이 평양을 정토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미추왕의 혼백이 아니었던들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략)        (@三國遺事@, 「紀異 第一」, 未鄒王 竹葉軍)


 

김유신 사후 불과 한 세대 정도 지나서 그의 가문은 진골 귀족 세계에서 소외되었고 혜공왕 때에 김융의 반란에 연좌되어 몰락했다. 김유신의 자손은 신김씨라 불리며 차별대우를 받았다. 

호족은 지방으로 이주한 중앙귀족의 후예도 있었으나 본래부터 지방 세력이었던 부류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출신 여부를 떠나 지방 세력이 독립 지향적으로 된 것은 폐쇄적인 골품제 때문이었다. 골품제의 폐쇄성으로 상징되는 신라 지배층의 수준 낮은 통치력이 지방호족 형성의 주원인이요 후삼국 분열을 낳은 것이다.

지방 세력은 중앙 진출이 봉쇄된 상태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갔다. 이들은 지방관을 겸임하거나 서로 인척관계를 맺는 등 긴밀한 사이였다. 지방관은 현지의 군사권까지 장악했으므로, 호족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될 경우에는 독립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들이 독립하는 시기는 전국이 내란상태로 되는 880년대였다.

호족은 그 형성 배경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2) 지방이주 귀족 출신의 호족


본래 중앙귀족이었으나 지방에 거주하게 돼 토착세력이 된 귀족들이 있다. 이들 역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중앙정부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지방으로 이주한 부류다. 신라에서는 수도에 거주하는 중앙귀족이 여러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중앙귀족이 지방으로 이주한 경우는 일찍부터 있었다. 고대국가 성립기에 정복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면서 주요 지역에 소경(小京)이 설치되고, 그곳에 왕경인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지증왕(智證王) 15년(514) 아시촌(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하고 6부와 남지(南地)의 인호(人戶)를 이주시켰다. 진흥왕 18년(557) 지금의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고, 다음해 2월에는 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을 이주시켰다. 선덕왕(善德王) 8년(639)에는 지금의 강릉인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했다.

이러한 중앙귀족의 이주가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문무왕 이후였다. 이는 다음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무왕 14년에 육도(六徒)의 진골로 5경과 9주에 출거(出居)하게 함으로 해서 따로 관명(官名)을 일컫게 했으니, 그 관등은 중앙의 지위에 준하게 했다.

(@三國史記@, 志 9, 職官 下)

 

문무왕 14년(674)은 당군을 축출하기 위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이 기록에는 경주 6부의 진골귀족만 이주시킨 것으로 나오나, 그 이하 두품도 이주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새로 편입한 영토인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지역에 경주의 진골귀족과 6두품 귀족 등을 이주시켜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당군 축출 이후 새로 영토로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전 국토는 새로운 지방 통치조직으로 편제됐다. 문무왕 18년, 20년에 북원소경, 금관경(金官小京)이 각각 설치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과 남원소경(南原小京)이 설치돼 5소경이 성립됐다. 9주도 신문왕 5년에 설치됐다.

 

둘째는 진골귀족의 분화(分化)와 정권 쟁탈전 패배로 지방 이주한 귀족이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왕실 및 귀족집단은 여러 가계로 다시 갈라졌다. 이들 가계는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로 기능했다. 진골귀족의 증가에 따라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많은 수의 귀족이 도태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가계를 몰락시키는 것이 유일한 진골귀족 세계의 도태원리요 방법이었다는 데 신라 망국의 근본원인이 있었다.

어느 경우건 지방으로 이주한 귀족은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 혹은 목마장(牧馬場) 등을 기반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결국 신라 말에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됐을 때, 꾸준히 성장한 이들은 독립해 호족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의 사서 ?연조귀감?(掾曺龜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무력을 써서 주현을 제패하고는 고려 통합 초에 귀복하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진압하지 못할까 근심해 억지로 소재지의 호장(戶長)으로 삼아 억제했다.

 (@掾曺龜鑑@, 卷1)

 

 


?연조귀감?(掾曺龜鑑)

중인(中人)이던 이진흥(李震興)이 18세기 후반 편찬한 향리 가문의 내력을 집대성한 사회사. 증손자인 이명구(李明九)가 1848년(헌종 15년)경 간행했다. 중인이 양반계층과 연원이 같음을 증명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5소경과 9주의 치소는 유력 호족의 거점이 됐다. 이러한 사실은 소경이 설치됐던 지역인 청주, 충주의 호족이나 주의 치소였던 명주의 김주원계 호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군진세력의 출신의 호족


신라의 군진(軍鎭)은 처음에는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내륙 요지에 설치됐다. 무열왕 5년(658)에 삼척에 북진(北鎭)이 설치됐고, 선덕왕(宣德王) 3년(782)에는 평산(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됐다. 그후 해적 퇴치나 해상 방면의 방어를 위해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됐다. 흥덕왕 3년(828)에 완도의 청해진, 흥덕왕 4년(829)에 남양의 당성진(唐城鎭), 문성왕 6년(844)에 강화의 혈구진(穴口鎭)이 차례로 설치됐다. 이들 군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패강진과 청해진이다.

 

패강진은 이전에 북변 수비의 중심이었던 대곡성(大谷城)을 승격시키면서 민호를 이주시켜 군진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성덕왕 34년(735) 이후 예성강 이북에서 대동강 이남의 지역, 즉 패서지역의 개척이 시작됐다. 경덕왕 7년(748)에 예성강 일대에 4개 군현을 설치하고, 경덕왕 21년(762)에는 그 북쪽지방에 6개 군현을 증설했다.

이와 같이 패서지역의 개척이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패강진이 설치됐다.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북변 방어의 관문인 평산에 위치했다. 패강진은 신라 서북 변경지대의 방어를 담당하는 국경수비의 본영이었다.

패강진의 장관은 두상대감(頭上大監)으로 6두품 관직이었다. 이 두상대감은 9세기 이후의 금석문에는 도호(都護)로 개칭돼 나타난다. 그 다음의 관직은 대감(大監)으로 7인이었는데 그 관등은 태수(太守)와 동일했다. 그러므로 대감은 패강진 관할하에 있는 군의 태수였던 듯하다.

 

패강진이 설치되면서 옮겨진 민호는 농경에 종사하는 개척농민이면서, 외적 침입시에는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둔전병(屯田兵)이었다. 이처럼 변방지역의 개척과 수비를 수행하는 패강진은 5소경이나 9주처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적 지배와 지휘체계가 성립된 이 지역의 군관(軍官)들은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질 때에는 독립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흥덕왕 대 일련의 개혁이 실패하고, 왕위 계승전이 치열해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크게 약화됐다. 이에 따라 9세기 후반에는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활발하게 대두했다. 패강진에서도 군사조직을 통해 여러 호족이 출현했다.

패강진 출신 호족 중에서 그 구체적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는 사례는 평산 박씨다. 평산 박씨는 지방관으로서 명주, 죽주로 옮겨 다니다가 평주(平州: 평산)에 정착해 패강진 지역의 군사조직을 통해 성장했다. 박직윤(朴直胤)은 패강진 관내 평주의 군관직을 맡고 있었다. 박직윤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라 한다. 박직윤은 고구려의 장군직인 대모달(大毛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자처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평산 박씨는 박직윤의 아들인 박지윤(朴遲胤)의 대에 이르러 패서지역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이후 평산 박씨는 궁예에게 귀부하고, 이어 고려 태조가 된 왕건과 결합해 고려 초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박지윤과 박수문(朴守文), 박수경(朴守卿) 3부자는 각각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가 될 정도로 고려 왕실과 유대가 깊었다.

패강진지역의 호족은 이외에 황주 황보씨, 정주 유씨, 평산 유씨, 동주 김씨, 신천 강씨 등이 있다. 고려 태조의 6황후, 23비 가운데 3황후, 8비가 패강진 출신일 정도로 패강진지역의 호족은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과 긴밀히 결합했다. 고려 왕조의 모태는 임진강 이북으로부터 패강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호족들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4)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당군의 한반도 철수 후 신라의 해상무역은 활발해졌다. 각지의 물자유통이 원활해져 산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른 문화의 향상과 생활양태의 변화는 물자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그 결과 무역관계에서도 조공에 의한 공무역만으로는 수요증가를 따를 수 없어 사무역이 왕성해졌다. 해안지역의 지방세력은 사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이러한 해상교역은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신라 하대에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군소 해상세력을 통제해 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으나, 그의 암살 이후 서남해안 지대의 해상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쌓아 갔다. 이러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중 대표적인 존재는 송악지방의 왕건 가문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설화는 그의 가문이 고구려 계통이며 바다와 연계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예성강 하구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건 가문 외에도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 있었다. 먼저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안)의 유상희(劉相晞)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성강 하구지역에 위치한 4주(州) 3현(縣) 사람들을 동원,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을 위해 영안성(永安城)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다음으로 정주(貞州, 지금의 풍덕)의 유천궁(柳天弓)을 들 수 있다. 그는 왕건의 첫째 황후인 신혜황후 유씨의 아버지다. 당시 정주는 수군기지였는데, 왕건이 나주(羅州)를 정벌할 때 이곳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했다.

예성강 하구지역 외에도 나주, 영암, 압해, 혜성, 강주, 울산 등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근거지에는 해상세력이 부를 축적해 호족으로 등장했다. 나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나주 오씨는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나주의 다련군(多憐君)은 고려 태조의 둘째 황후인 장화황후(莊和王后) 오씨의 부친이다. 나주 오씨의 조상은 당의 상인으로 흥해 해외무역을 위해 신라로 건너와 정착했다고 한다.  영암은 나주와 함께 나말여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도선(道詵)과 그의 제자 경보(慶甫)가 이 지역 출신이다. 영암 최씨가 이 지역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 호족으로 성장했다.

압해(壓海, 현 신안군)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 요지다. 이곳에는 능창(能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수전에 능해 수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부근에 있는 여러 섬의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해 왕건의 수군에 대항했다.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혜성에는 신라시대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돼 있었고, 당의 사신과 상인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었다. 또한 신라의 조공물품을 실어 보내는 대진(大津)이라는 항구가 있었다.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을 들 수 있다. 박술희는 나중에 고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의 후원자로 왕건, 나주 오씨와 긴밀한 관계였다. 복지겸의 선조는 당에서 와서 혜성에 거주했는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했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했다. 왕봉규(王逢規)는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8년(924)에 천주절도사로서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 그후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 4년(927) 3월에 왕봉규는 후당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직위를 제수받았다. 왕봉규는 천주(泉州, 현 의령)에서 세력을 형성해 마침내 강주지역을 지배하게 된 호족이었다. 그가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 의미가 크나 조공을 통한 공무역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울산은 경주의 외항으로 무역의 중심지였고, 당․일본과 통하는 국제항이었다. 이곳에서는 박윤웅(朴允雄)이 신학성 장군(神鶴城將軍)을 자칭한 호족이었다. 그는 울산항의 무역을 장악해 성장했으므로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라 할 수 있다.


출처
yslee1789님의 지식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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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에 대해 알려주세요 내공 100

ljk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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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07:35

질문자 인사

주제는 맞지만 너무 내용이 적네요<<>>약간 주제와 안맞아 별3개

- 호족세력의 등장 배경

 

 

호족의 대두
   ① 배경 : 신라 하대 골품 제도의 모순 노출
     ㉠ 전제 왕권의 쇠퇴 : 진골 세력의 분열로 왕위 쟁탈전 격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상실
     ㉡ 농민 봉기 : 정치 부패와 지배 계급의 착취, 농민 부담의 가중  
   ② 호족 세력의 성장
     ㉠ 호족의 유형 : 토착적인 지방 세력 ( 촌주 출신 ), 지방으로 내려간 진골과 6두품의 호족화
     ㉡ 호족의 세력 강화 :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 독립적인 세력 형성 ( 성주, 장군 )
                          → 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지배력 행사 → 중세 사회로 진입

 

- 호족세력의 유형

 

호족:

호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유일한 기록인 도윤의 집안에 대한 문구에서 호족은 '대대로 토착해온 집안'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토호'(土豪)와 '가문'(家門)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호족'의 '호'(豪)는 향호(鄕豪)·호우(豪佑)·호문(豪門)·호가(豪家)·호호(豪戶) 등에, '족'(族)은 관족(冠族)·저족(著族)·무족(茂族)·군족(郡族) 등에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호'는 대체로 '부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족은 '일정지역에 기반을 둔(토착한) 가문'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결합하면 호족은 '대대로 토착성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무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의 명문가'가 된다. 호족은 위에서 말한 지방유력자의 유형 가운데 지방 토착적 경제력과 무장력으로 결합된 집단이라는 의미에 가장 가깝다. 근래에 넓은 의미의 지방세력을 총칭하는 의미로 '호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점차 지방토착출신 유력자, 즉 신라의 촌주층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짙다.

 

귀족:

혈통·문벌·재산·공적 등에 의해 일반 사람과 다른 정치적·법적 특권을 부여받은 상류 계급, 또는 그런 계층에 속한 사람.
 
권문세족:

고려 후기의 집권 세력으로 무신 정권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원 간섭기에 이들 세력을 배경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 시기는 대체로 충렬왕 중엽정도로 그 뒤 충선왕은 왕의 교서를 통해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을 정하였는데, 이들 가문이 곧 대표적인 권문세족들이다. 이들은 주로 음서를 통해 고관 요직에 진출하였으며, 합좌 기구인 도평의사사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농장 경영을 통해 권력의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고려 후기의 농장은 무신 집권 시대의 대토지 겸병에 의해 터전이 마련되고 대몽 항쟁기를 거쳐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권문세족들이 무신 집권자의 대토지를 접수하는 한편 토지 겸병, 약탈과 강점을 통해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들의 농장은 수백 결, 수천 결에 달하고 심한 경우에는 산천을 경계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농장의 확대는 농민의 몰락을 촉진하여 노비가 되거나 유민으로 전락케 하였으며, 농장에 집중된 토지와 인구는 사실상 면세, 면역(免役)이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수입이나 노동력 동원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하였다.

 

문벌귀족:

고려 성종이후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 중에서도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그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화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또 이들은 비슷한 부류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신흥사대부:

신흥사대부는 주로 '신진사대부' 라고 불리는 친명세력이었다.
조선초 개국공신의 주축인 급진개혁파와 고려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장했던 온건개혁파가 있었다.
급진개혁파에는 정도전, 조준 등이 있었고 온건개혁파에는 이색, 정몽주 등이 있었다.
온건개혁파들은 조선개국전에 이성계나 이방원 등에 의해서 거의 제거당했다.

- 호족과 6두품, 선종 승려와의 관계

 

선종 9산의 대부분은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봉림산파는 김해의 호족인 김율희(金律熙, 또는 蘇律熙)의 후원을 받았고, 사굴산파는 강릉의 호족인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파는 개성 호족인 왕건(王建)과 관계가 깊었다. 또 9산을 처음 연 승려들도 호족 출신이 많았다. 비록 그 선조가 중앙귀족인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이미 낙향하여 호족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9산은 모두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선종은 요컨대 호족의 종교로서 성장하였다.

 


 

 

 

답변

re: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에 대해 알려주세요 내공 100

dudqjawk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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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0:04

1) 호족세력의 성장


신라 말기에 대두한 지방세력을 한국 역사에서는 호족(豪族)이라 부르고 있다. 호족은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는 진성왕(眞聖王, 재위 887~897) 때부터 지방사회의 실질적 지배자로 등장해 사회변동을 주도했다. 신라에서 호족세력의 성장은 골품제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첫째, 당시 골품제 사회에서는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관직 배분에 큰 문제가 생겼다. 신라 후기에 오면 왕의 근친도 관계 진출이 수월하지 않을 정도로 진골귀족이 포화상태였다. 이에 따라 왕실 및 진골귀족은 여러 가계로 분지화(分枝化)됐다. 왕위 계승전으로 나타나는 치열한 정권 쟁탈전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격화도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력배분 문제는 국가 지배층의 기득권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자칫하면 국가 존망과 연결될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다. 권력 쟁탈전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 일어난 여섯 번의 반란을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왕위쟁탈전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가문은 권력에서 소외돼 중앙정계에서는 몰락했다. 이런 귀족은 연고지가 있는 지방으로 이주, 지방의 세력가로 전환했다.

혜공왕 4년(768)에 일어난 (김)대공(大恭)의 난에서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웠다. 대공을 비롯한 96각간은 진골귀족이었던 만큼, 이때에도 전국 각지에 진골귀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30년대 후반의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거치면서 패배한 귀족의 지방 이주는 보편적 현상이 됐다. 진골귀족에 비해 지위가 훨씬 낮은 6두품 귀족의 낙향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골품제는 지방인의 중앙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골품제 사회는 수도에 거주하는 왕경인(王京人), 그것도 진골귀족의 특권만 보장해 주는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지방사회의 실력자가 중앙으로 진출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지방의 유력자들은 중앙 진출을 포기하고 지방사회에서 대를 물려 토착세력이 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골품제는 능력 발휘에 큰 장애가 되었고 이를 개탄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6두품의 불만이 컸다. ?삼국사기? 「설계두 열전」에 그 단면이 보인다.


설계두(薛罽頭) 역시 신라 사대부가의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하였다.

설계두가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가 있어 뛰어난 공을 세우더라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멀리 중화국(中華國)에 가서 불세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제 스스로 부귀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복(高官服)에 검패(劍佩)를 갖추고 天子 곁에 출입하였으면 만족하겠다.”라고 하였다.

무덕 4년인 신사년(621)에 비밀히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다. (후에) 마침 태종 문황제가 고구려를 친정하므로 자천하여 좌무위과의(左武衛果毅)가 되었다. 요동으로 와서 고구려군과 주필산 아래에서 싸우는 중 깊숙이 들어가 분전하다가 죽으니 그 공이 일등이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 물으니 좌우에서 신라인 설계두라고 아뢰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나라 사람들도 오히려 죽기를 두려워하여 뒤를 돌아보며 나아가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나랏일에 죽으니 무엇으로 그 공을 갚을 것인가”하고는 시종들에게 물어서 그의 평생 소원을 듣고는 어의(御衣)를 벗어 덮어주고 대장군 관직을 제수하고 그 예로서 장사지냈다.   (@三國史記@, 卷 47 「列傳 7」, 薛罽頭) 

    

골품제가 사회발전에 큰 장애였으며 정치 혼란의 근본원인이었음에도 신라 지배층은 전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래 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 가문의 조기 몰락에서도 신라 지배층의 편협함을 잘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 제 37대 혜공왕 대력(大曆 ; 당 대종의 연호) 14년인 기미년(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탔는데 그 형상이 장군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릉(竹現陵 ; 미추왕의 능묘)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언가 진동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하고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은 이랬다.

“臣이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오나 지난 경술년(770, 혜공왕 6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임금이나 여러 신하들이 저의 공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왕(미추왕)이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와 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김유신의 혼백이) 청해도 세 번 다 (미추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훗날의 원성왕)을 보내어 김(유신) 공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유신) 공이 평양을 정토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미추왕의 혼백이 아니었던들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략)        (@三國遺事@, 「紀異 第一」, 未鄒王 竹葉軍)


 

김유신 사후 불과 한 세대 정도 지나서 그의 가문은 진골 귀족 세계에서 소외되었고 혜공왕 때에 김융의 반란에 연좌되어 몰락했다. 김유신의 자손은 신김씨라 불리며 차별대우를 받았다. 

호족은 지방으로 이주한 중앙귀족의 후예도 있었으나 본래부터 지방 세력이었던 부류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출신 여부를 떠나 지방 세력이 독립 지향적으로 된 것은 폐쇄적인 골품제 때문이었다. 골품제의 폐쇄성으로 상징되는 신라 지배층의 수준 낮은 통치력이 지방호족 형성의 주원인이요 후삼국 분열을 낳은 것이다.

지방 세력은 중앙 진출이 봉쇄된 상태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갔다. 이들은 지방관을 겸임하거나 서로 인척관계를 맺는 등 긴밀한 사이였다. 지방관은 현지의 군사권까지 장악했으므로, 호족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될 경우에는 독립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들이 독립하는 시기는 전국이 내란상태로 되는 880년대였다.

호족은 그 형성 배경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2) 지방이주 귀족 출신의 호족


본래 중앙귀족이었으나 지방에 거주하게 돼 토착세력이 된 귀족들이 있다. 이들 역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중앙정부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지방으로 이주한 부류다. 신라에서는 수도에 거주하는 중앙귀족이 여러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중앙귀족이 지방으로 이주한 경우는 일찍부터 있었다. 고대국가 성립기에 정복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면서 주요 지역에 소경(小京)이 설치되고, 그곳에 왕경인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지증왕(智證王) 15년(514) 아시촌(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하고 6부와 남지(南地)의 인호(人戶)를 이주시켰다. 진흥왕 18년(557) 지금의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고, 다음해 2월에는 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을 이주시켰다. 선덕왕(善德王) 8년(639)에는 지금의 강릉인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했다.

이러한 중앙귀족의 이주가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문무왕 이후였다. 이는 다음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무왕 14년에 육도(六徒)의 진골로 5경과 9주에 출거(出居)하게 함으로 해서 따로 관명(官名)을 일컫게 했으니, 그 관등은 중앙의 지위에 준하게 했다.

(@三國史記@, 志 9, 職官 下)

 

문무왕 14년(674)은 당군을 축출하기 위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이 기록에는 경주 6부의 진골귀족만 이주시킨 것으로 나오나, 그 이하 두품도 이주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새로 편입한 영토인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지역에 경주의 진골귀족과 6두품 귀족 등을 이주시켜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당군 축출 이후 새로 영토로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전 국토는 새로운 지방 통치조직으로 편제됐다. 문무왕 18년, 20년에 북원소경, 금관경(金官小京)이 각각 설치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과 남원소경(南原小京)이 설치돼 5소경이 성립됐다. 9주도 신문왕 5년에 설치됐다.

 

둘째는 진골귀족의 분화(分化)와 정권 쟁탈전 패배로 지방 이주한 귀족이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왕실 및 귀족집단은 여러 가계로 다시 갈라졌다. 이들 가계는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로 기능했다. 진골귀족의 증가에 따라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많은 수의 귀족이 도태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가계를 몰락시키는 것이 유일한 진골귀족 세계의 도태원리요 방법이었다는 데 신라 망국의 근본원인이 있었다.

어느 경우건 지방으로 이주한 귀족은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 혹은 목마장(牧馬場) 등을 기반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결국 신라 말에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됐을 때, 꾸준히 성장한 이들은 독립해 호족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의 사서 ?연조귀감?(掾曺龜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무력을 써서 주현을 제패하고는 고려 통합 초에 귀복하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진압하지 못할까 근심해 억지로 소재지의 호장(戶長)으로 삼아 억제했다.

 (@掾曺龜鑑@, 卷1)

 

 


?연조귀감?(掾曺龜鑑)

중인(中人)이던 이진흥(李震興)이 18세기 후반 편찬한 향리 가문의 내력을 집대성한 사회사. 증손자인 이명구(李明九)가 1848년(헌종 15년)경 간행했다. 중인이 양반계층과 연원이 같음을 증명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5소경과 9주의 치소는 유력 호족의 거점이 됐다. 이러한 사실은 소경이 설치됐던 지역인 청주, 충주의 호족이나 주의 치소였던 명주의 김주원계 호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군진세력의 출신의 호족


신라의 군진(軍鎭)은 처음에는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내륙 요지에 설치됐다. 무열왕 5년(658)에 삼척에 북진(北鎭)이 설치됐고, 선덕왕(宣德王) 3년(782)에는 평산(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됐다. 그후 해적 퇴치나 해상 방면의 방어를 위해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됐다. 흥덕왕 3년(828)에 완도의 청해진, 흥덕왕 4년(829)에 남양의 당성진(唐城鎭), 문성왕 6년(844)에 강화의 혈구진(穴口鎭)이 차례로 설치됐다. 이들 군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패강진과 청해진이다.

 

패강진은 이전에 북변 수비의 중심이었던 대곡성(大谷城)을 승격시키면서 민호를 이주시켜 군진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성덕왕 34년(735) 이후 예성강 이북에서 대동강 이남의 지역, 즉 패서지역의 개척이 시작됐다. 경덕왕 7년(748)에 예성강 일대에 4개 군현을 설치하고, 경덕왕 21년(762)에는 그 북쪽지방에 6개 군현을 증설했다.

이와 같이 패서지역의 개척이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패강진이 설치됐다.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북변 방어의 관문인 평산에 위치했다. 패강진은 신라 서북 변경지대의 방어를 담당하는 국경수비의 본영이었다.

패강진의 장관은 두상대감(頭上大監)으로 6두품 관직이었다. 이 두상대감은 9세기 이후의 금석문에는 도호(都護)로 개칭돼 나타난다. 그 다음의 관직은 대감(大監)으로 7인이었는데 그 관등은 태수(太守)와 동일했다. 그러므로 대감은 패강진 관할하에 있는 군의 태수였던 듯하다.

 

패강진이 설치되면서 옮겨진 민호는 농경에 종사하는 개척농민이면서, 외적 침입시에는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둔전병(屯田兵)이었다. 이처럼 변방지역의 개척과 수비를 수행하는 패강진은 5소경이나 9주처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적 지배와 지휘체계가 성립된 이 지역의 군관(軍官)들은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질 때에는 독립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흥덕왕 대 일련의 개혁이 실패하고, 왕위 계승전이 치열해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크게 약화됐다. 이에 따라 9세기 후반에는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활발하게 대두했다. 패강진에서도 군사조직을 통해 여러 호족이 출현했다.

패강진 출신 호족 중에서 그 구체적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는 사례는 평산 박씨다. 평산 박씨는 지방관으로서 명주, 죽주로 옮겨 다니다가 평주(平州: 평산)에 정착해 패강진 지역의 군사조직을 통해 성장했다. 박직윤(朴直胤)은 패강진 관내 평주의 군관직을 맡고 있었다. 박직윤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라 한다. 박직윤은 고구려의 장군직인 대모달(大毛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자처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평산 박씨는 박직윤의 아들인 박지윤(朴遲胤)의 대에 이르러 패서지역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이후 평산 박씨는 궁예에게 귀부하고, 이어 고려 태조가 된 왕건과 결합해 고려 초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박지윤과 박수문(朴守文), 박수경(朴守卿) 3부자는 각각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가 될 정도로 고려 왕실과 유대가 깊었다.

패강진지역의 호족은 이외에 황주 황보씨, 정주 유씨, 평산 유씨, 동주 김씨, 신천 강씨 등이 있다. 고려 태조의 6황후, 23비 가운데 3황후, 8비가 패강진 출신일 정도로 패강진지역의 호족은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과 긴밀히 결합했다. 고려 왕조의 모태는 임진강 이북으로부터 패강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호족들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4)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당군의 한반도 철수 후 신라의 해상무역은 활발해졌다. 각지의 물자유통이 원활해져 산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른 문화의 향상과 생활양태의 변화는 물자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그 결과 무역관계에서도 조공에 의한 공무역만으로는 수요증가를 따를 수 없어 사무역이 왕성해졌다. 해안지역의 지방세력은 사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이러한 해상교역은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신라 하대에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군소 해상세력을 통제해 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으나, 그의 암살 이후 서남해안 지대의 해상세력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쌓아 갔다. 이러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중 대표적인 존재는 송악지방의 왕건 가문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설화는 그의 가문이 고구려 계통이며 바다와 연계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예성강 하구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건 가문 외에도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 있었다. 먼저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안)의 유상희(劉相晞)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성강 하구지역에 위치한 4주(州) 3현(縣) 사람들을 동원,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을 위해 영안성(永安城)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다음으로 정주(貞州, 지금의 풍덕)의 유천궁(柳天弓)을 들 수 있다. 그는 왕건의 첫째 황후인 신혜황후 유씨의 아버지다. 당시 정주는 수군기지였는데, 왕건이 나주(羅州)를 정벌할 때 이곳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했다.

예성강 하구지역 외에도 나주, 영암, 압해, 혜성, 강주, 울산 등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근거지에는 해상세력이 부를 축적해 호족으로 등장했다. 나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나주 오씨는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나주의 다련군(多憐君)은 고려 태조의 둘째 황후인 장화황후(莊和王后) 오씨의 부친이다. 나주 오씨의 조상은 당의 상인으로 흥해 해외무역을 위해 신라로 건너와 정착했다고 한다.  영암은 나주와 함께 나말여초에 서남 해안지역의 대 중국 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도선(道詵)과 그의 제자 경보(慶甫)가 이 지역 출신이다. 영암 최씨가 이 지역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 호족으로 성장했다.

압해(壓海, 현 신안군)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 요지다. 이곳에는 능창(能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수전에 능해 수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부근에 있는 여러 섬의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해 왕건의 수군에 대항했다.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혜성에는 신라시대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돼 있었고, 당의 사신과 상인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었다. 또한 신라의 조공물품을 실어 보내는 대진(大津)이라는 항구가 있었다.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을 들 수 있다. 박술희는 나중에 고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의 후원자로 왕건, 나주 오씨와 긴밀한 관계였다. 복지겸의 선조는 당에서 와서 혜성에 거주했는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했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했다. 왕봉규(王逢規)는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8년(924)에 천주절도사로서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 그후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 4년(927) 3월에 왕봉규는 후당으로부터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직위를 제수받았다. 왕봉규는 천주(泉州, 현 의령)에서 세력을 형성해 마침내 강주지역을 지배하게 된 호족이었다. 그가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 의미가 크나 조공을 통한 공무역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울산은 경주의 외항으로 무역의 중심지였고, 당․일본과 통하는 국제항이었다. 이곳에서는 박윤웅(朴允雄)이 신학성 장군(神鶴城將軍)을 자칭한 호족이었다. 그는 울산항의 무역을 장악해 성장했으므로 해상세력 출신 호족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yslee1789님의 지식인 답변

dudqjawk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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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에 대해 알려주세요 내공 100

dnfl365d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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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07:49

등장배경:지방 세력(호족)의 성장 호족 세력은 중앙 통제를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가지고 일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한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서, 신 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세력이다. 신라 시대 신분제도인 골품(骨品) 제도 밖에 존재했던 계층. 그들은 지방 토호(土豪) 출신이나 중앙에서 낙향한 6두품 출신들로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크게 성장했다.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까지 장악했다.

유형:지방 세력(호족)의 성장 호족 세력은 중앙 통제를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가지고 일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한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서, 신 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세력이다. 신라 시대 신분제도인 골품(骨品) 제도 밖에 존재했던 계층. 그들은 지방 토호(土豪) 출신이나 중앙에서 낙향한 6두품 출신들로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크게 성장했다. 호족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까지 장악했다.                                          

호족과6두품관계:나라에 혼란을 틈타 힘을기른 지방호족 골품제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6두품 이2세력의 관계는 6두품이 뛰어난 학문 그리고 지방세력큰 힘을 바탕으로한 관계로 신라를 멸망하게 만들었다

호족과 선종의 관계:신라의 불교가 봉건지배계급(왕실)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져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사회는 골품제의 모순이 한계에 이르러 귀족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귀족세력이 몰락하는 한편 지방의 호족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그들의 지원아래 지방의 새로운 불교종파인 선종이 성장해 갔다.

선종은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온 귀족불교에 반대하여 ,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골품제의 해체와 지방세력의 정치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호족세력의 환영을 받았다.수많은 지방의 선문을 연 선종승려들은 자신부터가 대부분 지방호족 출신이었고, 가까운 지방의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하여 종파를 구분하는 교종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문자에 의지하거나 경전의 복잡한 교리에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닦는데 치중하였다.

선종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 그 자체가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곧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었습니다. 견성성불의 방법은 좌선(坐禪)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인데 좌선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 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말 지방에 호족세력이 힘을 가지게되면서 실천적인 면과 개인의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선종을 지지합니다.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 선종이 호족들에겐 더욱 맞았던 것이죠. 그래서 선종은 기성의 권위(진골귀족)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고려왕조)를 개창하는데 정신적인 면에서 큰 몫을 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호족의 사상적 파트너가 된 선종은 호족이 지방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일조를 하면서 호족과 함께 신라 멸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종승려와관계:성리학 수용의 직접적인 배경은 불교계의 타락이었다. 승려의 타락, 사원 경제의 폐단, 지나친 불사(佛事)로 인한 국가 경제력의 낭비 등으로 불교는 고려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신라에 미친영양:

반신라 경향을 띤 6두품과 지방호족세력이 손잡고

 

고려 개창의 중심기반이었죠.

 

좀 더 보충하자면...

 

신라시대는 골품제도가 있어서 6두품은 고위관직에

 

오를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리 똑똑해도 6두품이라는

 

지위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들어 최승로도 6두품 출신이었는데 신라사회에서는

 

신분적 한계가 있으므로 당에 가서 빈공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하고 돌아와 시무28조를 올렸는데 무시되었죠.

 

결국 반신라 경향을 띠게되고 지방호족세력과 힘을 합쳐

 

고려를 개창하는 중심이 된 것입니다.

도움 되시길...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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