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일종의 참요로,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 선화공주를 차지하기 위해 서동이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을 내용으로 했던 동요적인 민요가 후대에 전승되며 변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거나 선화 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는 것은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증거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신분제 사회의 엄격한 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연대 : 신라 26대 진평왕(6세기) 잠깐 얼다 : '정을 통하다, 혼인하다'의 뜻으로 이것으로 인해 참요적 성격을 지님
이 노래는 일종의 참요(讖謠)로, 서동이라는 사랑에 빠진 한 소년이 자신이 갈망하는 내용을 선화 공주라는 상대편에 전가시켜 노래한 것이다. 주객을 전도시킨 수사적 특징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이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신분을 초월하고자 하는 당시 민중들의 소망을 엿볼 수도 있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의 형태를 띠고 있어 간결하고 소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발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 이 노래에서 결혼의 의미 엄격한 계급 분화가 이루어진 시대에 상하층의 관계를 갈라 놓는 사회적 장벽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예전에는 이런 자유로운 상하의 교통이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설정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거나 선화 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는 것은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증거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2. 백제 무왕(武王, ?~641) 백제 제 30대 왕. 재위 600-641년. 이름은 장(璋).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략했고,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와 그 다음의 당에 조공(朝貢)하였으며 만년에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유흥지로 삼는 등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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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 작자 : 백제 제 30대 무왕, 서동(薯童)/ 양주동 해독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백제의 서동(薯童 :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로,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정교한 10구체 향가와는 달리, 4구체의 민요 형식에 의한 직설적인 표현으로 초보적인 표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노래는 선화 공주의 비행을 발설하여 왕궁에서 쫓겨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기의 아내로 맞을 수 있게 한 일종의 참요(讖謠 :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 왕후와 장 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이다.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잠재적 갈망(渴望)과 욕구를 상대방의 것으로 전도(거꾸로 되거나 거꾸로 함)시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어서 '남몰래 얼어 두고'란 표현도 진부하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표기 체계는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향찰(鄕札) 표기이므로 정확한 해독은 어렵다. 우리는 이 노래가 안고 있는 동요적(童謠的)인 단순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설화 그대로 어떤 재기 발랄하고 야심 많은 한 젊은이가 몽환적(夢幻的)인 사랑을 재치와 기지로서 현실로 실현시키는, 한 영웅의 일대기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 ·백제 두 나라의 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 타당한 설은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연기(緣起) 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석을 하면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 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 데 수사적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는 국경을 뛰어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 꿈이 극단적인 장애없이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으나, 이 노래에서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발견해도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의식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서동이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서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서 성공의 실마리가 풀린다. 심화 자료 서동요(薯童謠)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향가. 4구체. 향찰 ( 鄕札 )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노래는 ≪ 삼국유사 ≫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이 노래는 백제 무왕이 소년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동설화를 여러모로 분석 · 검토한 결과 그 설화의 역사적 주인공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동성왕이라는 주장이 나왔는가 하면, 또한 동성왕도 아니고 신라의 원효 ( 元曉 )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최근에는 이 서동설화를 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취급하면서 그 역사적 주인공은 백제의 무령왕이지만, 그 설화상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사실, 이 설화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정담을 핵심으로 하는 민담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허구적 주인공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나 무령왕, 혹은 신라 원효 등이 지닌 소년시절의 모습이나 이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역사적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노래의 작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서동 ’ 은 서예(薯 岳 , 마)를 비롯한 산약과 산나물을 캐어 생활을 이어가던 소년의 무리를 지칭하던 보통명사로서 초동(樵童) · 목동(牧童) 등과 같은 종류의 집합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 서동요 〉 는 서동들에 얽힌 이야기,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노래로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즉, 〈 서동요 〉 는 서동들의 노래로서 구체적인 작자를 찾을 수 없는 공동으로 제작되어 전승된 민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노래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그동안 이 노래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이제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이 노래는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지만, 그 표현수법에 있어서 특유한 비법을 활용하였다. 〈 서동요 〉 는 무엇인가 감추는 표현으로 일관되어, 이른바 감추는 묘법, ‘ 감춤의 미학 ’ 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 은 눈부신 존재로 절대적 주인공의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한 공주가 ‘ 남몰래 얼러(他密只 嫁良) ’ 바로 몰래 간통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여기서 그녀는 절대적인 요정으로부터 사랑의 화신으로 변모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조용히 감출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공주는 그 상대를 감추어 ‘ 두고(置古) ’ 내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오롯하게 확보하고 있는 안정감을 드러낸다. 그런 가운데에 ‘ 서동방(薯童房 : 서동의 방) ’ 이 갑자기 등장하여, 그 공주의 상대가 겨우 서동이요 그들의 야합처가 바로 그의 방인 것을 확인시킨다. 공주는 금지옥엽의 몸으로 미천한 서동과 결합하여 파격적인 충격을 주면서, 그가 숨어 있는 밀실로 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만남의 현장을 감추기 위하여. ‘ 밤에(夜矣) ’ 비로소 행동을 개시한다. 이 밤에 공주는 ‘ 무엇을(卯乙) ’ 가지고 갔는가. 이것은 이 노래의 큰 관심거리로서 그 ‘ 무엇 ’ 의 실상을 끝까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함축미와 신비성이 그 ‘ 무엇 ’ 에 매여 있다. 이 공주는 그 ‘ 무엇 ’ 을 ‘ 안고(抱遣) ’ 가는 것이다. 이 ‘ 안고 ’ 는 그 대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직접 교감하면서 가슴 속 깊이 감추고 있음을 명시한다. 드디어 공주의 ‘ 가다(去如) ’ 로 이 노래는 끝난다. 그것은 공주가 ‘ 간다 ’ 는 긍정적 종결이 아니고, ‘ 가는가 ’ 라는 의문형 종결이다. 이 노래에 일관되는 감춤의 문맥으로 보아서 감탄성 의문형이라야 맞는다. 마지막 어미를 이런 의문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노래는 긴 여운을 남기며 끝까지 감춤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 사랑의 주사 ’ 로 승화된 것이다. 이 노래는 서동설화의 내용을 절묘하게 집약하였으며, 산문전승의 존재와 전개를 좌우하는 ‘ 사랑의 정화 ’ 로서 문학성과 주술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그것 자체만을 분리시켜 별도로 고찰하기보다는 그 산문전승의 문맥 위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鄕歌麗謠新釋(池憲英, 正音社, 1946), 增訂古歌硏究(梁柱東, 一潮閣, 1965), 鄕歌의 文學的硏究(金烈圭, 西江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72), 薯童說話에 對한 新考察(李丙燾, 歷史學報 1, 1953), 쑈뚱노래(金善祺, 現代文學 151, 1967), 薯童謠考(金炳旭, 百濟硏究 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6), 薯童謠硏究(金鍾雨, 三國遺事와 文藝的價値解明, 새문사, 1982), 薯童謠硏究(黃浿江, 新羅文化 3 · 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7), 薯童謠의 文學的 實相(史在東, 韓國文學流通史의 硏究 Ⅰ , 中央人文社, 199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경 설화 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극간(極諫)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시위(侍衛)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맞는 것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나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 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중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서동 (薯童) ?∼641(무왕 42). 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헌병(獻丙)·일기사덕(一耆篩德).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서동요’에 이한 이설 이 노래의 사연으로 보아 이는 무왕의 시대의 것은 아니고 薯童(맛동)-동성왕시대의 것이라는 설(이병도)과 백제가 망할 무렵에 신라 군졸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퍼뜨린 연기설화라는 설(황수영) |
출처 :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hyang-ga/seo-do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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