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초기 적석총 (百濟史)

吾心竹--오심죽-- 2009. 11. 3. 14:01

초기 적석총 (百濟史)

2009.10.05 

ㆍ횡산리 적석총, 한국전 이후 훼손 확인
ㆍ구조파악 벽에… 축조시기도 편차 커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 즉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임진강 변의 평탄한 충적대지에 구릉이 하나 우뚝 솟아있다.

이것이 바로 남한지역에서 확인되는 적석총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횡산리 적석총(사진)이다. 기저부의 크기가 58m×28m이고, 정상부의 면적이 농구 코트(420㎡·28m×15m)보다 훨씬 큰 576㎡(48m×12m)에 이른다.

이 적석총은 1990년대 초 이우형 국방문화재연구원 조사팀장이 발견한 이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 엄청난 규모뿐 아니라 민통선 이북이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분이 확실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북한 황강댐에 대한 대응댐인 군남댐 조성을 앞두고 이 적석총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자 더욱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지난 7월 이후 적석총을 발굴한 국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은 처녀분인 줄 알았던 적석총의 정상이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 시설물 공사로 심하게 파괴됐음을 알고 다소 실망했다. 적석총 윗면에 몇 개의 석곽을 배치한 다곽식 무덤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고구려계 백제 적석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정상부 훼손으로 더 이상 무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빗살무늬 토기편과 타날문 토기편, 그리고 한대(漢代) 유물로 여겨지는 철제유물들이 수습됐다.

그러나 어떻든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 이 적석총은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 이후 유리왕(기원전 19년~기원후 18년)의 핍박을 피해 내려와 임진강변에 정착한 초기 백제 세력의 무덤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최몽룡 서울대 교수, 하문식 세종대 교수, 이동희 순천대 박물관 학예실장 등은 “횡산리 적석총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장(혼강·渾江)유역과 압록강 지류인 동로강변에서 보이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즉, 모래언덕의 사면을 깎아 돌을 붙여 쌓은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권순진 조사팀장은 “원래의 구조가 그랬는지, 아니면 군 부대의 삭평 때문인지 돌이 쌓인 형태가 조밀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았다는 한 주민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 적석총의 정상부는 지금보다 허리높이 이상 더 남아 있었고, 적석총의 라인을 따라 기다란 모래언덕이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이는 이 적석총이 많이 깎였고, 또한 자연사구를 이용해 축조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적석총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편차가 크다. 최몽룡 교수는 “횡산리 적석총 역시 고구려 초기 적석총인 무기단식 적석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축조 시기는 기원전 2~1세기 무렵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무중 중부고고학 연구소장, 김성태 경기문화재단 학예실장 등은 “출토된 철제유물을 보면 기원후 2~3세기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떻든 이 횡산리 적석총을 비롯한 8기의 임진강변 적석총들은 남하한 온조세력의 최초 정착지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파주 적성의 육계토성과 관련, 여전히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발굴단(국방문화재연구원)은 이 최대의 적석총 발굴을 두고 관련 전문가들을 총동원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상황. 이재 원장은 “앞으로 발굴을 더해 적석총의 구조를 완전하게 파악해보고 유물이 더 있는지 확인하는 등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천 횡산리 |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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