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풍납토성은 BC 1세기에 건설된 계획도시

吾心竹--오심죽-- 2009. 3. 31. 16:01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은 백제 첫 도읍지 가능성"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유적에서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475년)으로 백제가 웅진으로도읍을 옮기기 전인 5세기말까지 한성도읍기백제 전기간에 걸친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발굴보고서 ‘풍납토성Ⅰ’을 최근 발간했다.

보고서는19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정리한 것으로 1,020쪽 분량에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은 관련 사진과출토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연구소 김선태 유적조사연구실장은 “이 보고서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나온 발굴성과를 종합한 것으로 풍납토성이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이 분명한 지 여부, 백제의 국가 성립시기 등 백제사 관련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특히 출토 유물과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풍납토성 축조시기가 몽촌토성 초기(3세기 중반~4세기중반)보다 2단계(기원전 1세기~3세기중반)나 빠르다는 점에서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추정했다.

문화재연구소는 99년 동쪽 성벽에 대해 실시한 발굴성과를 담은 보고서도‘풍납토성Ⅱ’라는 제목으로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토성 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이 보고서로 미뤘다.

이광일 기자

 

 

 

 

[문화재]'풍납토성=하남위례성' 주장 힘받는다
`서울을 제패하는 자가 한반도를 제패한다'는 것은 고대부터 어김없는철칙이었다. 한강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탈전이치열했고, 초기 한성백제의 유력한 도읍지 후보로 떠오른 서울 풍납토성은 그핵심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 여부를 둘러싸고 백제고고학의패권이 얽힌 학문적 논쟁의 진원지다. 올들어 1997~2000년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한보고서와 연구논문들이 나오면서 풍납토성에 대한 학문적 검증작업이 본격화하고있다. 지난 5월 대전 한밭대 학술대회를 통해 한신대 권오영교수 등의약식논문들이 나온 데 이어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97년 토성 내 재건축부지에 대한 1020쪽짜리 대형 발굴보고서인 <풍납토성 Ⅰ·Ⅱ>가 나왔다.연구소쪽은 올해 중으로 99년 성벽발굴보고서를 잇달아 내며, 97년 대동아파트건축 예정지에 대한 구제발굴을 벌였던 한신대쪽도 내년 상반기중으로약식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990002%%지금껏 나온 보고서와 논문들을 보면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란것은 거의 정설로 굳어진 듯하다. 이들 보고서들은 그동안 유력한 도읍지로꼽혀왔던 인근 몽촌토성을 능가하는 대형주거지와 공공건물터, 백제토기,중국도기류 등을 다수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소의 보고서는 초기백제시대의대형 주거지 17곳 등이 평균면적 23평 이상의 초대형 시설을 포함하고특수바닥시설을 갖춘데다 전부 수막새류 등의 기와류가 출토돼 특별한 위상을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한성백제 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고 주거지규모와 출토유물 등의 위상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성이 인정돼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이다. 지난해 경당부지발굴을 진행했던 한신대발굴단의 권오영교수도 한밭대 학술대회 발표논문을 통해“성의 규모,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의 양, 유물의 양과 질적 수준 등에서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능가함이 확인됐다. 잠정적으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짝을 이뤄 백제 도성체제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충남대 박순발교수 등의 일부학자들이 여전히 몽촌토성 왕성설을 견지하고 있지만 풍납토성출토유물이 유례없이 다양하고 질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에서 풍납토성=위례성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넓혀가고 있는 추세이다. 반면 성벽축조시기와 토기편년에서는 더욱 첨예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2세기전반 3세기 중반이전을 풍납토성 2기로 보고 이 시기에 성벽을 쌓을 수 있는조직과 인력동원이 가능했다는 국립문화재 연구소 등의 견해에 맞서 기존강단학계가 성벽축조는 3세기 중반을 넘어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때문이다. 연구소쪽 보고서는 2기의 주거유적들이 20평이 넘는 초대형에 막새류등의 기와까지 출토된 것을 근거로 삼고있다. 또 토기편년에서도 기존 3세기중반대의 몽촌토성 중심으로 백제토기를 편년하는 관행을 깨고 2기에서도 원주민의무늬없는 토기 외에 백제토기인 세발그릇이나 굽다리 접시 등을 만들 수 있는기술유형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오영, 박순발 교수 등을 비롯한강단학자들은 3기부터 백제토기와 중국수입품인 유약도기가 나타나므로 백제인들이성을 쌓으며 역사적 실체로 등장하는 것은 명백히 3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해 연구소쪽과 거의 비슷한 유형의 유물들을 발굴하다 중단된한신대의 경당부지 후속발굴과 보고서 발간이 논란을 풀어갈 열쇠라고 보고있다.노형석 기자nuge@hani.co.kr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왕성일 가능성
발 행 일 : 2001/07/28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성백제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시기가 빠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주거지의 규모와 출토유물의위상 등에서 주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성이 인정된다. 특히 최근에 이뤄진 한신대의 발굴성과를 보더라도 현재로서는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되며, 인근의 몽촌토성·석천동 고분군 등과 더불어 백제전기 도성(都城)의 핵심지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최근 펴낸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내부 백제시대 주거지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 ‘풍납토성 Ⅰ’(전2권)을 통해 풍납토성을 기원전 1세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5세기 후반까지 한성백제시대 전기간 운영된 백제초기의 왕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이번 보고서는 아파트 재건축 공사중에 토기편이 발견, 신고됨에 따라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97년 실시한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부지와 ‘풍납 제1지구 재건축조합’부지의 발굴조사 결과를 정리한 것.

수혈주거지 19기 등 각종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문토기 등 1200여점에 달하는 초기 백제시대의 유물에 대한 설명과 실측도면 1300여장이 본문편에, 발굴당시의 광경과 유물의 출토상황 및복원 상태 등을 담은 사진 1600여장과 주거지 출토 탄화목탄의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등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를 담은 부록이사진편에 각각 실려 있다. 도면과 사진을 연구자들에게 도움이되도록 최고의 해상도로 스캐닝한 것을 비롯해 유물의 질감을 살려 모두 낱개로 근접촬영하는 등 자료집으로서 충실을 기한 것이 국배판 2권 총 1020여쪽에 달하는 이번 발굴보고서의 특징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慰禮城) 내지 사성(蛇城) 등으로 비정되면서 역사학 및 고고학계의 논쟁의 대상이 됐던 풍납토성의 성격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공식견해다. 풍납토성의 성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올가을에 발간될 ‘풍납토성 동벽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보다 구체화되겠지만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풍납토성 출토 토기를 ▲경도·색조·태토같은 기술속성과 ▲무늬·정면 기법·세부적인 형태상 특성 같은 양식속성 ▲토기의 기종을 구분해주는 형태속성 등 3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해 백제토기의 분류기준과 명칭을 새롭게 제시한 것이 돋보인다.층위별 출토유물의 차별성이 뚜렷한 풍납토성의 백제시대 문화층을 4개의 층위로 구분하고 그동안 한성백제 Ⅰ기로 대표되던 ‘몽촌 Ⅰ기’가 풍납토성에선 Ⅲ기에 해당해 풍납토성이 시기적으로 몽촌토성보다 2단계나 앞선다는 주장은 앞으로 고대국가로서백제국의 성립 및 발전과 관련,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삼중환호와 말각방형계 주거지 및 풍납동식 무문토기로 대표되는 ‘풍납토성 Ⅰ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와 서북한 지방에서 발달된 토기문화가 유입돼 질적·사회적 발전을 수반하면서 본격적인 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풍납토성의 축조가 완료됐을 것으로 보이는 ‘풍납토성 Ⅱ기’(2세기 전반∼3세기 중반)의 주민구성의 동이(同異)문제 등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도 적지않다. /최영창 기자

 

 

 

하남 위례성(2)
서울 강동구 풍납동 토성 안에 백제 전기 500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었다. 백제의 왕도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을 지척에 두고도 우리는 1500년이 넘도록 그곳이 어딘지 몰라 역사의 수수께끼로 삼아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발간한 풍납토성 발굴보고서를 통해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결론을 내리고, 이 곳이 인근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과 더불어 백제 전기 도성의 핵심지를 구축하고있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론은 1997년 10월부터 실시된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 발굴조사와, 99년 인근 연립주택지에 대한 한신대 발굴조사의 결실이다.

유물에 대한 탄소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4~5세기 것임이확인되었다. 대부(大夫)라는 관직 이름이 새겨진 토기편은 이곳이정부 고위관료의 주거지였음을 말해준다.

일반 주택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기와편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 곳에 관청종교시설 등 특수건물이 있었다는증거다.

■무엇보다 불탄 주거지 유물들이 역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3호 주거지에서는 건물 전체가 불에 탄 상태가 완전하게 드러났다.

기둥과 보와 서까래 목탄이 겹겹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고구려군 내습으로 황망히 피난간 듯 집안에 인골은 없었고, 가구와 토기류 등이 어지러이널려 있다.

불탄 흔적으로 남았다. 개로왕 21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병사에의해 도성이 초토화한 비극의 순간을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이로써 잃어버렸던 백제 500년 역사가 우리 앞에 현실로 등장하였다.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건국기록에 관한 의심도 풀리게 되었다.

온조가 기원전18년 한반도 중부를 장악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한 일제 식민사관은 백제의 출발을 한강유역의 조그만부족국가로 보았다.

그 축소사관의 영향으로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지금도 백제가 3세기 중엽에야 겨우 중앙집권적 국가 기틀을 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역사왜곡 수정도 급한 문제가 되었다.

문창재수석논설위원 cjmoon@hk.co.kr

 

 

풍납토성은 BC 1세기에 건설된 계획도시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일시에 많은사람이 밀려들면서 건설된 일종의 계획도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만주지방 부여(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온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무렵 마한의 서북쪽인 한강유역 땅 100리 가량을 얻어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이런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지난 97년 풍납토성 안쪽동남쪽 일대 대규모 재건축아파트 터를 발굴한 성과를 담아 최근에 펴낸 「풍납토성Ⅰ」 보고서를 통해 확연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경우 거의 똑같은 입지조건을 지닌 인근 경기 하남 미사리 및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과는 달리 신.구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단 1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풍납토성 일대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들어서면서 적갈색무늬없는토기를 사용하는 집단이 갑자기 등장해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한다.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에서도 지하 가장 밑바닥에서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이 남긴 것으로 주목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는 유적 곳곳에서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이런 사정은 1999년 이래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발굴이 있은 풍납토성 안쪽 한복판 경당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당지구 또한 청동기시대이전 선사 유적과 유물은 거의 없고 적갈색무늬없는토기로 시작되는 유물층이 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 시기가 가장 빠른 적갈색무늬없는토기 출현 빈도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양이 적다면야 풍납토성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보기에는 풍납토성에서 확인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의 양이 너무 많다.

 따라서 연구소측은 풍납토성에 이 토기가 다량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정착촌 혹은 신도시 건설 같은 대변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으며 같은 충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미사리와 암사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4천년 무렵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을 비롯해 곳에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풍납토성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한성이 고구려군에 무너지는 서기 475년을 고비로 그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적과 유물 또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이 번성한 기간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한성 도읍기(기원전 1세기 이래 475년까지)와 겹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있다. 연구소가 풍납토성을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 터로 지목하는 이유도이런 증거들때문이다.(연합)

발행일 : 2001/07/24

 

 

 

[대한포럼] 풍납토성은 국사교과서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kdaily.com]

서울 송파구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에 관한 제1차 발굴보고서가 지난주 나왔다.1997년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식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보고서에서 문화재연구소는 ▲서기전 1세기부터 풍납토성 안에 대규모 주민집단이 정착했고 ▲‘특별한위상’을 지닌 초대형 주거지들이 확인됐으며 ▲기존에 알려진 한성백제(BC 18∼AD 475)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이곳에서 거의 다 출토됐다고 밝혔다.보고서는 “한성백제 유적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고,주거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위상으로 보아 주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성이인정된다”면서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결론지었다.학술적으로 신중하게 표현된 결론을 쉽게 풀어 쓰자면,풍납토성에는 서기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그 주거지 규모와 생활용품 수준에비춰볼 때 백제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이틀림없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 온조가 서기전 18년 하남 위례성에 도읍했다는 기록이나온다.하남 위례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침해 백제개로왕을 참살하고 성내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이미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고,그 뒤 지금까지 학계는 서울·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과 멀리는 충남 직산까지를 후보지로 검토했다.그런점에서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확정짓게 된 것은 역사·고고학의 큰 성과다.

더 나아가 풍납토성이 갖는 실체적 진실은 ‘한 왕조의 수도 확인’이라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 고대사체계를다시 세우도록 요구할 만큼 넓고 깊다.불행히도 지금의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일본 관학자들이 세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일본 관학자들의 체계란 ▲단군의 실체는 신화일 뿐 역사가 아니므로 고조선도 사실상 믿기 어렵다(또는 무시해도 된다)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에 망해 한반도 중부 이북에 한사군이 들어선 것이 사실상 한국사의 시작이다 ▲특히 낙랑·대방은 4세기 초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중부에 군림했고,백제·신라는 소국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3세기에 힘의 공백지대인 한반도 남부에 진출,식민지경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한국 침략은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는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이를주장하고자 일제 관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인한다.삼국사기는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은 뒤 주변소국을 차례로 정벌해 재위 13년에 벌써 영토를 동서로 서해에서 춘천까지,남북으로 안성천에서 예성강까지 넓혔다고기록했다. 그런데도 일제 관학자들은 백제가 3세기나 되어서야 제대로 국가 형태를 갖추므로 그 이전의 활동 기록은믿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같은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을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가지금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 그늘은 여전히 짙게 덮여 있다.예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역사교과서들은 “왜(倭)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6세기에야 상실했다”고 왜곡하고 있다.우리 고교 국사교과서도 “백제는 한강 유역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3세기 중엽 고이왕때에 이르러…중앙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다”(45∼46쪽)고 서술할 정도다.

풍납토성의 전체 규모는 성벽 밑면의 폭이 40m,높이 9∼15m,총길이 3.5㎞로 추정되며 공사에 동원된 노동력은 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계산된다.건국 초기에 이같은 성을 쌓은백제는 그만큼 강력한 국가였고 이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옳았음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서기전 1세기에서 3세기까지 민족사의 실체를 되찾은 것이다.또 풍납토성이 존재하게끔 그전에 축적된 우리 역사의 두터움도 입증한다.풍납토성은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다.이 시대 우리가풍납토성을 되살린 것은 기적이자 민족사의 축복이다.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2000-9595)

발행일 : 2001년 07월 25일

 

 

 

“풍납토성은 BC 1세기에 건설된 계획도시”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일시에 많은 사람이 밀려들면서 건설된 일종의 계획도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만주지방 부여(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온조집단이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무렵 마한의 서북쪽인 한강유역 땅 100리 가량을 얻어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이런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지난 97년 풍납토성 안쪽동남쪽일대 대규모 재건축아파트 터를 발굴한 성과를 담아 최근에 펴낸 「풍납토성Ⅰ」 보고서를 통해 확연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경우 거의 똑같은 입지조건을 지닌 인근 경기 하남미사리 및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과는 달리 신.구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단 1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풍납토성 일대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들어서면서 적갈색무늬없는토기를 사용하는 집단이 갑자기 등장해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한다.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에서도 지하 가장 밑바닥에서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이 남긴 것으로 주목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는 유적 곳곳에서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이런 사정은 1999년 이래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발굴이 있은풍납토성 안쪽 한복판 경당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당지구 또한 청동기시대이전 선사 유적과 유물은 거의 없고 적갈색무늬없는토기로 시작되는 유물층이 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 시기가 가장 빠른 적갈색무늬없는토기 출현 빈도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양이 적다면야 풍납토성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보기에는 풍납토성에서 확인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의 양이 너무 많다.

따라서 연구소측은 풍납토성에 이 토기가 다량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무렵 정착촌 혹은 신도시 건설 같은 대변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으며 같은 충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미사리와 암사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4천년 무렵신석기시대 유적과유물을 비롯해 곳에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풍납토성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한성이 고구려군에 무너지는 서기 475년을 고비로 그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적과 유물 또한 거의 없다는점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이 번성한 기간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한성도읍기(기원전 1세기 이래 475년까지)와 겹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연구소가풍납토성을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 터로 지목하는 이유도 이런 증거들때문이다.

〈연합〉

발행일2001년 07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