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탐라인의 해상활동(16)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출현

吾心竹--오심죽-- 2009. 3. 31. 15:54

[특별기고/탐라인의 해상활동(16)]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출현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북방에서 고구려가 한(漢)나라와 처절한 항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남쪽 지역에서도 진번인들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 한나라의 세력(진번군)을 몰아내고 후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AD 18) 이미 폐지된 한나라의 진번군 대방현(帶方故地)에서 진번인(番汗人)들에 의하여 비류의 백제가 건국된다.

 중국측 사료인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의하면 “동명(東明, 鄒牟王)의 후예 구이(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인신(仁信)이 돈독하여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웠다.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점차 나라가 창성(昌盛)하여 마침내 동이의 강국(東夷强國)이 되었는데, 그 나라는 처음부터 백성 모두가 바다를 항해하였으므로 백제(百濟)라는 국호가 붙여진 것이다. (百家濟海, 因號百濟) 그 나라의 성을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번한 해민들은 대동강, 재령강 유역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이동 분포되었음을 추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가 해양국가였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김성호(金聖昊)는 그의 저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본문 및 이설(異說)에 수록된 백제 건국의 과정과 삼국유사, 북사, 수서, 양서(梁書), 광개토대왕의 능비, 구당서, 일본서기 등 문헌적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백제 본기의 허구성을 밝혀내고 온조왕을 시조로 하는 백제외에 또 하나의 백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백제본기의 비류(沸流)와 북사, 수서의 구이(仇台)를 동일한 인물로 보고 미추홀(彌鄒忽)은 지금의 인천(仁川)이 아닌 아산만에 있는 인주면 밀두리(仁州面 密頭里)로 비정(比定)한다. 비류는 BC 18 대방고지(황해도)에서 백제를 세운 후 해빈 미추홀(海濱 彌鄒忽)로 남하하였으나 동생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현 충남 山)에 별도의 나라를 세우고 AD 5에 한산으로 북천하고 있다. 비류의 백제는 AD9 웅진(熊津)에 있던 마한(馬韓)을 수멸(遂滅)하고 그 곳(古沙夫里城, 居拔城, 久麻那利城, 熊津城)에 도읍한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 하고, 읍(邑)을 담로(擔魯)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비슷한 제도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으며 모두 자제종족(子第宗族)이 분거(分居)한다”(梁書) 담로제도는 중국의 군현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봉건제에 가까운 제도였다. 각 담로국가의 군장을 엄치(臣智)라고 하였으며, 이들 엄치를 통솔하는 비류백제의 왕을 성엄(聖臣)이라고 하였다.(金聖昊)

 한반도의 서해안에 또 하나의 거대한 해양국가가 출현하므로 인하여 지금까지 두무악의 독점무대였던 북로(요서, 요동 및 낙랑지역), 남로(주산해역) 및 동로(왜의 해역)의 해역에 긴장감이 감돌게 되어 장차 두 해양국가간에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예상되고 있었던 것이다.<고용희·제주시 노형동><<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