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풍납토성 시굴지 30여곳 모두 백제유물 출토

吾心竹--오심죽-- 2009. 3. 31. 15:51

풍납토성 시굴지 30여곳 모두 백제유물 출토
-거대한 유물밭, '한국판 폼페이' 재확인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쪽 30여 군데 소규모 주택 건축 예정지를 최근 시굴 조사한 결과단 한 곳도 예외 없이 모두 백제 유물층임이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지난해 4월 문화재위원회가 지하 유물층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풍납토성 안쪽의 소규모 건축행위를 허용한이후 잇따라 주택 건축 예정지를 시굴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2일밝혔다.

 이들 시굴지역은 성벽 둘레 3.5㎞, 넓이 22만여평인 풍납토성 안 전체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고 그 대부분이 100평 이하 소규모 면적이라는 점에서 풍납토성은 전역이 거대한 유물의 지뢰밭이자 '한국판 폼페이'임이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번 시굴조사 과정에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비롯한 한강 일대의 빈번한 범람으로 성벽은 물론이고 그 지하 유물층까지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던 한강변 토성 서쪽 일대에서도 지하 유물층은 물론 성벽 뿌리가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특히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바로 바깥을 따라 올림픽대로가 나 있는 토성 서쪽 성벽이 풍납2동 291의 17-19 및 298-14 일대 소규모 주택예정지에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성벽은 발굴 결과 입자가 고운 진흙을 한켠 한켠 다져올리는 이른바판축(版築)기법으로 쌓았으며 성벽 양쪽(안과 바깥)으로는 빗물에 성벽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시설 겸 방수시설인 석렬(石列)이 확인됐다.

 이는 지난 99년 여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절단 조사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성과와 일치하고 있다.

 서쪽 성벽은 물론이고 그 안쪽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과 유물은 거의 예외 없이 한성백제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지표면을 벗겨내고 유물층 존재 여부만을 확인한 시굴조사임에도 제법 많은 기와가 확인됨으로써 한성시대 풍납토성에는 각종 기와건물이 즐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현존 성벽만 사적 제1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던 풍납토성은 지난 97년 이후 잇따른 대규모 발굴 결과 한성백제 왕성 혹은 왕도(王都)인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해 짐에 따라 경당지구와 미래마을, 외환은행 연수원 터를 비롯해 성벽 안쪽 또한 연이어 사적으로 추가지정되는 한편 대규모 아파트 건축은 원천 봉쇄되고 있다.

 다만 지하 유물 매장층을 파괴하지 않는 소규모 건축행위만 허용되고 있으며, 이 경우에도 반드시 사전 발굴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연합)

발행일 : 2002/05/02

 

 

 

 

[풍납토성]풍납토성 시굴지 30여곳 모두 백제유물 출토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안쪽 30여 군데 소규모 주택 건축 예정지를 최근 시굴 조사한 결과 단 한 곳도예외 없이 모두 백제 유물층임이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지난해 4월 문화재위원회가 지하 유물층을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풍납토성 안쪽의 소규모 건축행위를 허용한 이후 잇따라주택건축 예정지를 시굴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이들 시굴지역은 성벽 둘레 3.5㎞, 넓이 22만여평인 풍납토성 안 전체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고 그 대부분이 100평 이하 소규모 면적이라는 점에서 풍납토성은 전역이 거대한 유물의 지뢰밭이자 '한국판 폼페이'임이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번 시굴조사 과정에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비롯한 한강 일대의 빈번한 범람으로 성벽은 물론이고 그 지하 유물층까지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알려졌던 한강변 토성 서쪽 일대에서도 지하 유물층은 물론 성벽 뿌리가 고스란히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특히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바로 바깥을 따라 올림픽대로가 나 있는 토성 서쪽 성벽이 풍납2동 291의 17-19 및 298-14 일대 소규모 주택예정지에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성벽은 발굴 결과 입자가 고운 진흙을 한켠 한켠 다져올리는 이른바판축기법으로 쌓았으며 성벽 양쪽(안과 바깥)으로는 빗물에 성벽 흙이 흘러내리는것을 막기 위한 배수시설 겸 방수시설인 석렬이 확인됐다. 이는 지난 99년 여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절단 조사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발굴성과와 일치하고 있다. 서쪽 성벽은 물론이고 그 안쪽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과 유물은거의 예외 없이 한성백제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지표면을 벗겨내고 유물층 존재 여부만을 확인한 시굴조사임에도 제법 많은 기와가 확인됨으로써 한성시대 풍납토성에는 각종기와건물이 즐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현존 성벽만 사적 제1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던 풍납토성은 지난 97년 이후 잇따른 대규모 발굴 결과 한성백제 왕성 혹은 왕도인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해짐에 따라 경당지구와 미래마을, 외환은행 연수원 터를 비롯해 성벽 안쪽또한 연이어 사적으로 추가지정되는 한편 대규모 아파트 건축은 원천 봉쇄되고있다. 다만 지하 유물 매장층을 파괴하지 않는 소규모 건축행위만 허용되고 있으며,이 경우에도 반드시 사전 발굴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풍납토성 시굴조사의 성과와 의미
풍납토성 안쪽 소규모 주택 예정지 30여 군데에서 실시된 시굴조사의성과는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이 어디인가를 두고 벌어진 기나긴 논쟁을 종국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이번 시굴 성과를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의 의견을 빌려 요약하자면"풍납토성은 재론이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백제 왕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사단은 "풍납토성이야말로 한국의 폼페이다"라고 덧붙인다.

왜 그럴까?

시굴조사란 말 그대로 시범발굴이다. 조사대상 지역 전부를 파헤쳐 유적과 유물을 확인하는 본발굴과 달리 이번 시굴은 조사대상 지역의 일부만,그것도 지표면만파서 유물.유적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풍납토성에 대한 이러한 발굴방식은 지난해 4월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따른 것이다. 당시 잇따른 발굴 결과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해짐에따라 풍납토성보존을 위해 문화재위원회는 대규모 아파트 건축을 불허하는대신, 단독주택 같은소규모 건축은 지하 유물층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밀려 있던 소규모 건축신청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경우에도조건이 있다. 사전조사를 실시해 지하 어디에서 유물층이 시작되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이 유물층을 훼손하지는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시굴 신청이 접수된 소규모 건축 건수가 최근까지 30여 군데를 헤아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본격발굴도 아닌 시굴조사임에도 이들 30여 군데모두에서백제 문화층이 확인된 것이다. 시굴지역은 성벽을 제외한 안쪽 넓이 19만여평에 달하는 풍납토성 전체에 골고루 걸쳐 있다.

이는 바로 풍납토성 어디에나 거대한 백제 문화층이 지하에 묻혀 있다는뜻이다.조사단이 풍납토성을 ’한국의 폼페이’라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번 시굴조사에서 더욱 주목되는 곳이 한강변과 인접한 서쪽 일대. 백제시대에는 전체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성벽은 현재 2㎞ 남짓만 남아 있다.

동쪽 성벽과 함께 원래는 1㎞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서쪽 성벽 및그 일대는 빈번한 한강의 범람으로 완전히 유적이 소실됐었을 것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이번 시굴조사 결과 서벽은 그 기초가 지하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성벽 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서도 비록 많은 홍수 피해를 보기는 했으나유적과유물이 남아 있음이 드러났다.

풍납토성이 거대한 유물 창고임은 비단 이번 조사 뿐만 아니라 지난 97년 이래이 일대에서 두세 차례 실시된 본격 발굴조사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바 있다.

특히 지난 97년 토성 서남쪽 현대아파트 지구와 1999-2001년 토성 한복판인 경당지구를 발굴한 결과 풍납토성은 경주의 신라 왕경 유적에 맞먹는 유물 밀집도를보이고 있음이 드러났다.

경당지구를 발굴한 한신대 권오영 교수는 이를 두고 "풍납토성은 유물의지뢰밭"이라고 표현했다.

일부 지역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한 풍납토성에 대한 이런 판단이 정곡을찔렀음이 이번 30여 곳에 달하는 시굴에서 고스란히 증명됐다. 다시 말해풍납토성은 대형아파트가 들어선 곳을 제외하면 아무데나 찔러도 백제 유물과 유적을 토해내고 있다.

풍납토성은 이제 재론이 필요없는 백제 왕성이라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자신감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연합〉

 

 

 

풍납토성 시굴지 30여곳 모두 백제유물 출토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서울 송파구풍납토성 안쪽 30여 군데 소규모 주택 건축 예정지를 최근 시굴 조사한 결과 단 한 곳도 예외 없이 모두 백제 유물층임이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지난해 4월 문화재위원회가 지하 유물층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풍납토성 안쪽의 소규모 건축행위를 허용한이후 잇따라 주택건축 예정지를 시굴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2일밝혔다.

이들 시굴지역은 성벽 둘레 3.5㎞, 넓이 22만여평인 풍납토성 안 전체에 걸쳐고루 분포하고 있고 그 대부분이 100평 이하 소규모 면적이라는 점에서 풍납토성은전역이 거대한 유물의 지뢰밭이자 ’한국판 폼페이’임이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번 시굴조사 과정에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비롯한 한강 일대의빈번한범람으로 성벽은 물론이고 그 지하 유물층까지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알려졌던 한강변 토성 서쪽 일대에서도 지하 유물층은 물론 성벽 뿌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특히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바로 바깥을 따라 올림픽대로가나 있는토성 서쪽 성벽이 풍납2동 291의 17-19 및 298-14 일대 소규모 주택 예정지에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성벽은 발굴 결과 입자가 고운 진흙을 한켠 한켠 다져올리는 이른바판축(版築)기법으로 쌓았으며 성벽 양쪽(안과 바깥)으로는 빗물에 성벽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시설 겸 방수시설인 석렬(石列)이 확인됐다.

이는 지난 99년 여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절단 조사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성과와 일치하고 있다.

서쪽 성벽은 물론이고 그 안쪽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과 유물은 거의예외 없이 한성백제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지표면을 벗겨내고 유물층 존재 여부만을 확인한 시굴조사임에도 제법 많은 기와가 확인됨으로써 한성시대 풍납토성에는 각종기와건물이 즐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현존 성벽만 사적 제1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던 풍납토성은 지난 97년 이후잇따른 대규모 발굴 결과 한성백제 왕성 혹은 왕도(王都)인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해짐에 따라 경당지구와 미래마을, 외환은행 연수원 터를 비롯해 성벽 안쪽 또한 연이어 사적으로 추가지정되는 한편 대규모 아파트 건축은 원천 봉쇄되고 있다.

다만 지하 유물 매장층을 파괴하지 않는 소규모 건축행위만 허용되고있으며,이 경우에도 반드시 사전 발굴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연합〉

발행일2002년 05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