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위례성' 지목 1930년 자료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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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 2001년 08월 23일
일제 식민강점기 일본 사학계가 한성도읍기(BC18-AD 475년) 백제 왕성(혹은 왕도)인 하남위례성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11호)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 2건이 23일 공개됐다. 이들 자료는 1910년 조선 강제병탄 이래 1945년 패망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월간 잡지인 「조선」(朝鮮) 1930년 1월호(통권 176호)와 같은 해 10월호(통권 185호)에 실려 있으며 필자는 두 글 모두 중추원 촉탁으로 있던 일본인 사학자 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로 돼 있다. 오하라는 먼저 1930년 1월호 「조선」에 기고한 '기준(箕準) 및 그 후예인 마한국'(馬韓國)이라는 글에서 기원전 190년 무렵 위만에게 쫓겨난 기자조선 마지막 왕기준이 마한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마한이 백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추적하면서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장소를 현재의 풍납토성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록, 즉 "북쪽으로는 한수(漢水.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는 말을 충족시키는곳으로는 풍납토성밖에 없다고 보았다. 오하라는 이런 문헌기록과 함께 1925년 7월 서울 전역을 물바다로 만든 이른바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물이 풍납토성을 덮친 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초두 등 각종출토 유물이 풍납토성이 곧 하남위례성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같은 해 「조선」 10월호에 기고한 '고려 이전의 경성(京城)'이라는 글에서도 고려시대 이전 서울의 역사적 변천을 고찰하면서 현재의 풍납토성을 '위례성지'(慰禮城址)라고 표시한 '경성부근 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오하라의 이 글들은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이라고 가장 먼저 지목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사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防之進)의 '백제고도안내기'(「조선」 1934년 11월호<통권 234호>)보다 4년이나 앞서고 있다.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풍납리에 속했기 때문에 풍납리토성이라고 부르던 현재의 풍납토성은 1936년 2월 29일 조선총독부령고시 제69호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 제1조에 따라 고적 제27호로 지정됐다. 이들 자료가 새로 발견됨에 따라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으며 아울러 조선총독부가 왜 이곳을 고적으로지정하게 됐는지가 더욱 분명해졌다. 오하라의 글은 불상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고 있는 서울의 금융회사 직원 이순우씨가 발견했다.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