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吾心竹--오심죽-- 2009. 3. 31. 16:05

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보고서 발간, 초기백제사 연구 획기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 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등 총 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 발굴당시 광경과 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 수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 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 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25평을 비롯해 평면 6각형 모양 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하며,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 475년 무렵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토기가 다종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풍납토성 제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이른바 '몽촌1기'에 해당되며, 따라서 풍납토성은 몽촌토성보다 (축조)시기로 볼 때 2단계나 빠르다는 사실은 출토 유물뿐만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뚜렷이 확인되고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터가 대체로 길이 10m, 폭 7m 안팎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로는 가장 큰 규모와 정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고급화된 기종의 토기류와 기와,전돌 및 중국계 도자기가 다량 포함돼 있는 점으로 보아 풍납토성의 위상이 지금까지 확인된 다른 유적보다 월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한성도읍기 백제왕성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이번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는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으며 특히몽촌토성 발굴 성과를 기초로 3세기 중.후반을 출발로 삼았던 백제 토기편년 또한 붕괴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보고서로는 1967년 당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토성 북쪽에 판 구덩이 8개에 대한 시굴 보고서가 있고 지난 97년 선문대 이형구교수의 토성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 보고서가 있을뿐, 정식발굴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성과를 담은 발굴보고서를  「풍납토성Ⅱ」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풍납토성 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이 두번째 보고서로 미뤘다.(연합)

발행일 : 2001/07/20

 

 

[풍납토성]'풍납토성은 BC 1세기에 건설된 계획도시'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선사시대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일시에 많은 사람이밀려들면서 건설된 일종의 계획도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만주지방 부여(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온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무렵 마한의 서북쪽인 한강유역 땅 100리 가량을얻어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평가된다. 이런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지난 97년 풍납토성 안쪽동남쪽 일대 대규모 재건축아파트 터를 발굴한 성과를 담아 최근에 펴낸「풍납토성Ⅰ」 보고서를 통해 확연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경우 거의 똑같은 입지조건을 지닌 인근 경기하남 미사리 및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과는 달리 신.구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단 1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풍납토성 일대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들어서면서 적갈색무늬없는토기를 사용하는집단이 갑자기 등장해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한다.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에서도 지하 가장 밑바닥에서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이 남긴 것으로 주목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는 유적곳곳에서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이런 사정은 1999년 이래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발굴이 있은 풍납토성 안쪽 한복판 경당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당지구 또한 청동기시대 이전선사 유적과 유물은 거의 없고 적갈색무늬없는토기로 시작되는 유물층이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 시기가 가장 빠른 적갈색무늬없는토기출현 빈도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양이 적다면야 풍납토성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풍납토성에서확인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의 양이 너무 많다. 따라서 연구소측은 풍납토성에 이 토기가 다량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정착촌 혹은 신도시 건설 같은 대변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으며 같은 충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미사리와 암사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4천년 무렵 신석기시대유적과 유물을 비롯해 곳에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뚜렷한 대비를보인다. 풍납토성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한성이 고구려군에 무너지는 서기 475년을 고비로 그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적과 유물 또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이 번성한 기간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한성 도읍기(기원전 1세기 이래 475년까지)와 겹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연구소가 풍납토성을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 터로 지목하는 이유도 이런증거들때문이다.

 

 

풍납토성은 백제 하남위례성
제 목 : 풍납토성은 백제 하남위례성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 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 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 등 총 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 발굴당시 광경과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 수록하고 있다.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고 밝혔다.

 

 

문화재硏 발굴 보고서(대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인근 몽촌토성보다3세기정도 앞서,기원전 1세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백제왕성임이 출토 유물뿐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확인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풍납토성에 대한 정식 발굴보고서는 이번이처음이다.

이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 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의 전면 재검토가불가피해졌다.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한고대 삼국 중의 하나라고 기록돼 있으나 역사학계는 이를인정하지 않은 채 백제의 고대국가 형성 시기를 3세기쯤으로 늦춰 잡아왔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발굴 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보고서에 따르면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약500년간의 백제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평면 6각형 모양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한다.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

이 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중 가장 빠르다는 ‘몽촌1기’에 해당한다.475년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 토기가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김주혁기자 jhkm@kdaily.com

 

"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날 짜 : 2001년 07월 20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 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 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 등 총 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 발굴당시 광경과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 수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 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25평을 비롯해 평면 6각형 모양 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하며,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璲?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475년 무렵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 토기가 다종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풍납토성 제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문화층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이른바 '몽촌1기'에 해당되며, 따라서 풍납토성은몽촌토성보다 (축조)시기로 볼 때 2단계나 빠르다는 사실은 출토 유물뿐만 아니라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

도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터가 대체로 길이 10m, 폭 7m 안팎으로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로는 가장 큰 규모와 정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고급화된 기종의 토기류와 기와, 전돌 및 중국계 도자기가다량 포함돼 있는 점으

로 보아 풍납토성의 위상이 지금까지 확인된 다른 유적보다월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한성도읍기 백제왕성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이번 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 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는 전면 재검

토가 불가피해졌으며 특히 몽촌토성 발굴 성과를 기초로 3세기 중.후반을 출발로 삼았던 백제 토기편년 또한 붕괴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보고서로는 1967년 당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토성 북쪽에 판구덩이 8개에 대한 시굴 보고서가 있고 지난 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토성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 보고서가 있을뿐, 정식발굴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성과를 담은 발굴보고서를 「풍납토성Ⅱ」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풍납토성 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이 두번째 보고서로 미뤘다. <연합>

 

 

“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 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 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등 총 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발굴당시 광경과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수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확인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있다.

즉, 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 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25평을 비롯해 평면 6각형 모양 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하며,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475년 무렵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토기가 다종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풍납토성 제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이른바 ’몽촌1기’에 해당되며,따라서 풍납토성은몽촌토성보다 (축조)시기로 볼 때 2단계나 빠르다는 사실은 출토 유물뿐만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뚜렷이 확인되고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터가 대체로 길이 10m, 폭 7m안팎으로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로는 가장 큰 규모와 정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고급화된 기종의 토기류와 기와,전돌 및 중국계 도자기가다량 포함돼 있는 점으로 보아 풍납토성의 위상이지금까지 확인된 다른 유적보다 월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한성도읍기백제왕성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이번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는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으며 특히몽촌토성 발굴 성과를 기초로 3세기 중.후반을 출발로 삼았던 백제 토기편년 또한 붕괴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보고서로는 1967년 당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토성 북쪽에 판구덩이 8개에 대한 시굴 보고서가 있고 지난 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토성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 보고서가 있을뿐, 정식발굴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성과를 담은 발굴보고서를 「풍납토성Ⅱ」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풍납토성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이 두번째 보고서로 미뤘다. <사진있음>

〈연합〉

 

 

[풍납토성]“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 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 등 총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 발굴당시 광경과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 수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고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 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25평을 비롯해 평면6각형 모양 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하며,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는것이다. 475년 무렵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 토기가 다종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풍납토성 제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이른바 '몽촌1기'에 해당되며, 따라서 풍납토성은몽촌토성보다 (축조)시기로 볼 때 2단계나 빠르다는 사실은 출토유물뿐만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덧붙였다. 보고서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터가 대체로 길이 10m, 폭 7m안팎으로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로는 가장 큰 규모와 정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고급화된 기종의 토기류와 기와, 전돌 및중국계 도자기가다량 포함돼 있는 점으로 보아 풍납토성의 위상이 지금까지확인된 다른 유적보다 월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한성도읍기 백제왕성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이번 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는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으며 특히 몽촌토성발굴 성과를 기초로 3세기 중.후반을 출발로 삼았던 백제 토기편년 또한붕괴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보고서로는 1967년 당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토성 북쪽에판구덩이 8개에 대한 시굴 보고서가 있고 지난 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토성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 보고서가 있을뿐, 정식발굴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성과를 담은 발굴보고서를 「풍납토성Ⅱ」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풍납토성 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이 두번째 보고서로 미뤘다. <사진있음>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