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韓論의 實體와 問題點
최 성 락 (목포대학교 박물관장)
1. 머리말
2. 마한에 대한 문헌사의 연구성과
3. 마한연구와 고고학
4. 마한연구의 문제점과 전망
5.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삼한, 특히 마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삼한은 고고학적으로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필자의 연구대상인 영산강유역의 철기문화는 마한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문헌사와 더불어 고고학이 함께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그 동안 문헌사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어느 정도 정돈된 학설로 나타나고 있다. 즉 마한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자리잡았고,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흡수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고고학자들의 마한에 대한 연구는 다소 혼란스럽다고 판단된다. 종래 원삼국시대로 지칭되던 시기를 일부에서는 삼한시대로 부르고 있고, 삼한의 상한을 기원전 300년까지 소급시키는가 하면 마한이 기원후 5세기말 내지는 6세기 중반까지 약 800년간에 존속하였던 정치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 동안 마한에 대한 관심사는 개별적인 연구를 통해 주로 이루어졌으며, 마한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로는 1989년에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89)에서 열린 '마한문화연구의 제문제'와 1997년에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1997)에서 열린 '마한사의 새로운 인식'(충남대 출판부 1998) 등 두 차례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마한에 대한 문헌사와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살펴보고, 이들의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지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마한에 대한 종래의 인식
우선 마한을 비롯한 삼한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주로 중국 기록에 나타난다. 즉 <<三國志>> 魏書 東夷傳, <<後漢書>> 東夷傳, <<晋書>> 東夷傳 등에 나타나고, 우리 나라 문헌인 <<三國史記>> 百濟本紀를 비롯하여 新羅本紀와 高句麗本紀에도 마한 관련 기사가 일부 나타나지만 일본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먼저 삼한의 위치에 대한 역사 인식은 좀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崔致遠, 조선의 權近, 韓百謙 등 여러 사람들이 견해를 밝혔는데 그 중에선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방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지방에 위치한다는 한백겸의 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김정배 1967, 노태돈 1982). 다만 이병도는 이러한 설과 달리 辰韓을 경기와 강원지방에, 馬韓을 충청·전라지방에, 弁韓을 경상지방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김정배는 이 주장을 일축하고 종래의 학설(한백겸이 설)에 따라 삼한의 위치를 비정하였다(김정배 1967). 한편 三韓移動說(신채호 1929)에 뒤이어 천관우는 삼한을 箕子族의 구성요소로 파악하고, 각기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에 자리잡았다가 이동해 왔으며, 辰韓의 경우, 한강유역을 거쳐서 낙동강유역에 자리잡았다고 보았고(천관우 1975), 한강유역에서 밀려난 것은 伯濟國의 등장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천관우 1976a).
이와 같이 삼한의 형성과정과 위치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마한은 三韓 중의 하나로 辰國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자리잡았으며, 삼한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방, 辰韓은 낙동강의 동쪽, 弁韓은 낙동강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馬韓은 얼마동안 삼한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이기백 1982).
한편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건국한 백제는 溫祚王 26년(기원후 8년)에 馬韓의 國邑을 습격하여 병합하였고, 온조왕 27년(기원후 9)에 드디어 馬韓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新羅本紀에는 赫居世居西干 39년(기원전 18)에 馬韓王이 죽었다는 기사와 脫解尼師今 5년(기원후 61)에 馬韓 장수 孟召가 覆巖城을 들어 항복하였다는 기사 등이 있다. 高句麗本紀 太祖王 69년(기원후 121)에 馬韓·濊貊과 더불어 玄砵郡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를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마한과 관련된 기록들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마한이 멸망했다는 것은 중부지역의 目支國이 해체되어 남쪽으로 이동되어 갔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으로 보고 있다(노중국 1987).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중국의 기록인 <<三國志>> 東夷傳 韓條에 馬韓의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기 때문이고, 또한 <<晋書>> 東夷傳 馬韓條에 咸寧 3년(277년)으로부터 太熙 元年(290년)까지 마한이 晋國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세력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晋書>>卷36 張華傳에도 마한이 나타난다.
東夷馬韓 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었으며 幽州와 4천여 리였는데, 역대로 來附하지 않던 20여 국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왔다(<<晋書>>卷36 張華傳).
여기에 나오는 新彌國은 <<三國志>>에 나오는 마한의 54국에는 없는 이름으로 이병도는 서해안지역에 분포한 馬韓 諸國邑의 하나로 보았다(이병도 1959). 대체로 이를 중부지방에서 서남부지역으로 이동된 마한의 잔존세력으로 보고 있으나 강봉룡은 新彌諸國이란 '新彌의 여러 나라'라는 의미로 <<三國志>>의 마한과는 별개이며 '東夷 馬韓지역의 新彌國'으로 보아 영산강유역에 성립한 '옹관고분사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강봉룡 1999a).
한편 백제의 국력이 신장되자 마한의 영토를 계속 잠식해 갔는데 近肖古王 24년(369)에 전남지역이 완전히 장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이 마한을 경략하였다는 기록은 <<三國史記>>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日本書紀>>에 반설화적으로 남아있다.
이에 병사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古奚津에 이르렀다. 南蠻 枕彌多禮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이때 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역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맞으니 比利抗中布彌支半古四邑이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백제왕 부자와 黃田別 木羅斤資 등이 모두 意流村(州流須祗)에서 서로 즐겁게 만났다(<<日本書紀>> 神功紀 49년).
이병도는 위의 내용을 통해 일본의 응원군이 와서 더불어 경략하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近肖古王의 父子가 369년 전남지역에 원정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한 것은 사실로 보았다(이병도 1959). 이 학설은 그 후 정설로 받아들여져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나아가서 노중국(1987)은 '枕(睏)彌多禮'를 <<晋書>>에 나오는 '新彌國'으로 연결지어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 比利·抗中·布彌支·半古 등 四邑으로 보았던 것을 천관우(1979)는 比利·抗中·布彌·支半·古四邑 등 5읍으로 보고, 그 위치를 전북지역으로 비정한 이후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들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을 제기한 바가 있다. 한편 이도학(1995)과 강봉룡(1999b)은 枕彌多禮를 해남 현산면 일대로 비정하면서 4세기 후반에 백제가 해상루트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지역으로 진출하였음을 반영한 것이고, 마한의 잔존세력 혹은 마한과는 별개의 세력이 영산강유역에 건재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4세기 후반에는 백제로 편입되었고 간접 지배방식으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권오영 1986)에 동의하고 있다. 다만 백제의 장군 木羅斤資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369년의 일이 아니라 1주기를 더 내려서 429년의 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田中俊明 1996)이 있으나 국내학계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마한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중부 및 서남부지역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강유역의 백제가 세력을 강화함에 따라 점차 마한의 세력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급기야 전남지역의 마한의 잔존세력도 4세기 후반에는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마한에 대한 통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 마한과 백제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즉 <<晋書>> 東夷傳 馬韓條에 咸寧 3년(277년)으로부터 太熙 元年(290년)까지 마한이 晋國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기사가 실제로는 백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더구나 하나의 사건이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비슷하게 기술된 것이 있다.
① 魏의 幽州刺史 囖丘儉이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左將 眞忠을 보내어 낙랑을 쳐서 邊民을 빼앗았다. 劉茂가 듣고 노하매 왕이 侵討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民口를 돌려주었다(<<三國史記>> 卷24 古爾王 13年條).
② 2월에 幽州刺史 母丘儉이 고구려를 쳤다. 5월에 濊貊을 쳐서 깨뜨리니 韓那濊 등 수십 國이 각각 種落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三國志>> 卷4 齊王芳紀 正始 7年條)
③ 部從事 吳林은 낙랑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한 부분이 있어, 臣智가 韓을 격분시켜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대방)태수 弓遵과 낙랑태수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쳤는데, 弓遵은 전사하였지만 2郡이 결국 韓을 멸하였다(<<三國志>> 卷30 魏書東夷傳 韓條)
이상의 기사는 韓 혹은 百濟가 246년에 대방군을 공격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이 사건의 주체를 ①의 사료에 의거해 백제의 古爾王으로 보는 설과 ②와 ③의 사료에 의거해 마한의 辰王으로 보는 설이 있고, 그밖에 마한의 臣掺沽國으로 보는 설이 있다.
우선 마한의 辰王설이다. 이것은 중국의 기록을 신뢰하여 마한의 진왕이 중심이 되어 대방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대체로 중국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3세기말까지 마한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三上次男 1966, 유원재 1994).
이와 더불어 대방군 공격의 주도권은 마한의 진왕이나 백제도 가담하였다는 해석도 있다(노중국 1990, 강봉룡 1997). 이 경우 중부지역의 주도권이 3세기 중엽 마한에서 백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한이 자리잡았다고 보는 충청지역에서는 천안 청담동 유적 등 1∼3세기의 문화양상이 최근 밝혀지고 있어 그 실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마한의 臣掺沽國설로 사료 ②에서 '臣智激韓忿'은 通行本 魏志에 나오는 것으로 百納本(南宋 紹興本)에는 '臣瓔沾韓忿'이라고 표기되어 차이를 보이는 데 通志(南宋 紹興 31년)에는 '臣掺沽韓忿'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마한의 臣掺沽國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설은 대방군을 공격한 것이 伯濟國이 아니라 경기도 북부지역에 자리잡은 臣掺沽國으로 보고 있다(윤용구 1999). 이 설은 중국 문헌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는 점은 평가되나 역시 중국 문헌에 치중한 해석이고 아직까지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1∼3세기경에 하나의 세력을 나타낼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古爾王설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천관우 1976a, 이기동 1987, 권오영 1995, 이현혜 1997, 김영심 1997). 즉 <<삼국지>>의 마한 기사가 실제로는 백제일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천관우는 辰王을 곧 古爾王으로 보고 있다. 최근 한강유역의 백제국이 일찍 고대국가로 발전되었음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즉 최근 조사되고 있는 풍납동 토성(윤근일 2000a, 2000b)이 바로 1∼3세기에 백제국의 도성으로 확인된다면 <<삼국지>> 마한의 54개국 중 伯濟國은 바로 <<삼국사기>>에서의 百濟國인 것이다. 백제국은 일찍 한강유역에 자리잡았고, 그 세력을 넓혀갔으며 3세기 중엽에는 대방군을 공격하는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방국을 공격하는 주체를 중국 사료에서는 마한의 臣智(辰王)로, 한국 사료에는 백제의 古爾王으로 다르게 표기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이 사건에 대한 중국 사료와 한국 사료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차이로 생각한다. 중국 사료에서는 1∼3세기를 백제가 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인 삼한 단계로 인식하는 것이고, 한국 사료에서는 이미 백제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삼국지>>의 편찬자와 <<삼국사기>>의 편찬자 사이에 존재한 인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사를 사실대로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1∼3세기는 '마한'이 대표한다고 볼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백제'가 대표하는 시기로 보아야 하고, 일찍 김원용(1967)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고, 최근 재차 재기되고 있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문제(이종욱 2000, 최몽룡 2000)도 세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최성락 2000). 설사 1∼3세기에 마한과 백제가 공존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백제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 마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마한을 종족 혹은 문화계통적 의미로 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 사회적 의미로서 통합체로 보는 입장이다. 마한을 종족 또는 문화계통적으로 보는 입장은 신채호, 이병도, 천관우 등인데 이들은 주로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반면 지역적, 사회적 통합체로 보는 입장은 김정배, 이현혜, 노중국 등인데 이들은 대체로 삼한사회를 小國 또는 君長社會로 지칭하는 사회로 보고 있다. 그밖에 마한사회를 하나의 정치체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지역의 개념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즉 중부지역에 자리잡은 目支國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은 정치연맹체이나 <<晋書>>의 新彌國은 마한지역에 자리잡은 연맹체로 보는 것이다(강봉룡 1999a). 사실 마한에서는 辰王 혹은 馬韓王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국가의 단계로 볼 수 있는 문헌기록이나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마한이라는 개념이 종족, 지역적 혹은 사회적 통합체, 정치체, 지역의 개념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어 세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셋째,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慕韓說의 문제이다. <<宋書>>에 倭 5 王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438년 倭王 珍은 '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는 작호를 자칭하게 된다. 즉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등 6국에 대한 통솔권을 자임한 것을 의미한다. 그후 계속 대송외교를 집요하게 하여 倭王 濟는 451년에 百濟가 빠지고 加羅가 첨가된 6국의 安東大將軍으로 가호를 받게 된다.
또한 478년 倭王 武는 '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開府儀同三司倭國王'이라 자칭하였으나 '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이라고 책봉을 받았다. 즉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漢城이 함락되자 倭王이 백제를 임의로 포함시켰으나 中國이 이를 제외하고 책봉한 것이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여기에서 나타나는 慕韓을 근거로 영산강유역의 독자적인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倭와 관련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東潮 1995, 1996). 그러나 당시 宋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新羅·任那·加羅와 같은 실존의 국가나 秦韓·慕韓과 같은 가공의 국가 이름을 나열한 작호의 사용을 허용한 것이고, 백제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세력관계를 분명히 따져서 단호하게 제외시켰던 것으로 모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강봉룡 1998)가 일반적이다.
넷째, 백제로 편입되기 전의 전남지역은 마한이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병도는 <<일본서기>> 神功紀 49년(369)의 기사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영산강유역에 남아 있는 마한의 세력이 최종적으로 없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점차 발전하여 전남지역이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은 마한이라는 등식이 생겼다. 즉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장악하는 시기가 5세기 말이나 6세기 중엽이면 그 이전은 마한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에는 南蠻 睏彌多禮라고 표시되어 있을 뿐 마한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다. 역사학계에서는 南蠻을 馬韓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것이 타당한지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300년 이후에는 한국 문헌이나 일본 문헌에 馬韓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국 기록에도 <<宋書>>의 倭 5 王 관련기사에 나오는 慕韓을 제외한다면 마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어느 나라 기록에도 300년 이후에는 마한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과연 369년까지 마한이 잔존하였다는 것이 가능한지 검토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기존의 마한에 대한 연구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마한에 대한 인식이 아직까지 중국 문헌에 의존하고 있고, 마한에 대한 사료가 매우 한정적이고 불확실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3. 마한연구와 고고학
마한과 관련된 고고학 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한과 고고학 자료를 연결하는 설명이 대부분이다. 즉 마한 54국의 위치를 支石墓의 밀집정도로 추정하는 시도(최몽룡 1978; 이영문 1989)가 있었고, 옹관묘를 마한의 잔존세력으로 보는 견해(성낙준 1983)와 지석묘와 옹관묘를 통해 마한을 설명하려는 견해(김학휘 1988, 1989), 靑銅器를 통해 馬韓의 形成過程을 설명하려는 견해(이현혜 1984; 전영래 1987) 등이 있다.
마한을 본격적으로 다룬 김원용은 마한의 영역을 한강유역을 제외한 안산만 이남에서 영산강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면서 마한을 전기(기원전 200∼기원후 200경)과 후기(기원후 200∼369)으로 나누어 보았다(김원용 1990). 그리고 馬韓의 目支國을 나주 반남면 일대로 비정하려는 주장(최몽룡 1986, 1988)이 있는데 이는 중부지역의 마한이 백제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유역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으로 최근까지도 꾸준히 주장되고 있다(최몽룡 1997).
필자는 삼한을 청동기문화와 연결지어 설명할 것이 아니라 準王의 南遷을 기준으로 기원전 2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이는 철기문화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전남지역의 옹관고분이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 지속되므로 369년에 백제로 편입되었다는 설은 재고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최성락 1990).
최근의 마한에 대한 고고학 연구는 한층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는 몇 가지 견해가 발표되어 주목되고 있다. 먼저 전남지역에 마한이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후 6세기 중반까지 자리잡았다는 견해이다. 옹관고분 축조시기인 5세기 후반까지 전남지역에는 독자적인 정치체(마한)가 존속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임영진 1995). 나아가서 초기 석실분의 단계인 6세기 전반까지도 마한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임영진 1997a, 1997b, 1997c). 이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마한의 소멸시기 문제로 전남지역에 백제계 석실분이 나타나고, 백제의 한 지방으로 편입된 6세기 중엽 이전까지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前期 馬韓을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250년까지 설정한 견해이다. 즉 박순발은 馬韓에 대한 고대사학자들의 인식을 정리하고, 이를 그 시기의 고고학적 배경으로 검토하면서 전기 마한의 시·공간적 위치를 밝히려고 한다. 특히 그는 전기 마한의 시간적인 범위를 기원전 200년∼기원후 200년으로 본 김원용(1989)의 견해를 기초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이 등장하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백제가 국가로 성립되는 기원후 250년까지로, 공간적인 범위를 처음 한강유역 및 중서부지방에서 점차 중서부지역과 금강이남지역으로 한정되었다고 보았다(박순발 1997). 여기에서 전기 마한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300년경으로 올려보는 점과 전기 마한에 대응하는 후기 마한의 시기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전기 마한과는 문화적으로 어떠한 관계인지 등이 의문점이다. 또한 이 주장은 마한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300년으로 보고 있어 삼한시대를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00년으로 보는 견해(신경철 1995)와 일치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6세기의 주거지를 마한의 주거지로 보는 견해(김승옥 2000)와 호남지역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주구묘(주구토광묘)가 마한의 것으로 보는 견해(최완규 2000a, 2000b)도 제기되고 있다. 그 결과 영산강유역에 자리잡았던 고대사회가 곧 마한이라는 인식이 일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확산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4. 마한연구의 문제점과 전망
과거 마한과 관련된 고고학 연구에는 지석묘 혹은 청동기와 관련된다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최근 전남지역에서는 기원전 3∼2세기경에서 기원후 5∼6세기까지를 마한으로 보는 새로운 마한론이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마한론은 강봉룡에 의해 일차적으로 비판된 바가 있다. 그는 800여 년의 마한사는 실로 과감한 가설로서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을 관통하는 정치·문화적 정체성과 계승성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는 보았고, 고고학계의 노력이 고대사학계의 불안한 통설을 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하므로 고고학자에게 고대사의 통설에 억매이지 말고 물질문화의 형성에 대한 정확하게 해석하도록 주문하였다. 또한 그는 마한을 두 가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 목지국 중심의 실제적인 정치 단위체를 지칭하는 것과 경기에서 전라지역에 이르는 지역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강봉룡 2000). 한편 일부 영남지역에서 주장되는 삼한시대도 그 명칭과 개념이 타당하지 못함이 필자(최성락 1999a)에 의해 비판된 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한론이나 삼한시대론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 자료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둘째, 마한 혹은 삼한의 등장시기나 존속시기를 고고학자들이 임의로 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마한과 고고학 자료의 연결이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즉 특정한 무덤이나 주거지를 마한의 무덤 혹은 마한의 주거지로 지칭하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넷째, 이러한 馬韓論은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慕韓論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문제점을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의 문제로는 문헌에 대한 검토 부족과 더불어 문헌사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고고학과의 교과과정에는 문헌을 다루는 과목이 매우 적게 편성되어 있다. 따라서 고고학 전공자들은 문헌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헌 사료를 분석하거나 문헌사에 연구성과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고고학자가 지나치게 문헌사학의 영역에 가담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고고학자의 연구영역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과거 문화를 충실하게 복원하는 것으로 문헌사학자의 연구영역과는 다르다(최성락 1999b).
두 번째의 문제로 삼한의 연대를 지나치게 올려보거나 내려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삼한에 대한 고고학계의 인식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헌사의 연대관과 고고학의 연대관은 다를 수 있음에도 고고학에서 문화적인 획기와 연결지어 그 연대를 올려보거나 지나치게 내려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부 고고학자에 의한 주장인 삼한시대의 상한을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의 등장과 일치시켜 기원전 300년으로 설정하는 견해(신경철 1995, 박순발 1998)와 마한 소멸시기를 6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임영진 1997) 등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마한을 고고학 자료에 잘못 연결짓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헌적으로 보면 마한의 시작이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 마한의 등장을 準王의 南遷과 관련해서 보더라도 기원전 194년 이전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삼국지>>의 대한 기록은 기원후 3세기 대의 중국 기록이고, 마한의 명칭은 백제 혹은 신라와 같이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불려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상한을 고고학 자료로써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마한의 시작연대는 문헌적 연구의 결과로 제시할 수 있으나 이를 고고학 자료에 대입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고조선의 시작연대를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와 연결시켜 기원전 2400년까지 올려보려는 주장(윤내현 1986)과 유사한 것으로 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한의 소멸시기 문제로 마한이 한국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기원후 1세기경까지이고, 일본 기록에는 마한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처음부터 백제가 등장하고 있다. 다만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기원후 300년까지이다.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마한은 일부가 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면 마한의 소멸시기를 고고학 자료에 대입하여 5세기 말 내지는 6세기 중엽까지로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세 번째의 문제로 문헌의 마한과 고고학 자료를 관련시키는 문제이다. 문헌적으로 아직 논란이 많은 마한을 일정한 시기에 존재하였던 實體(정치체)로 가정하여 그 시기의 주거지와 분묘를 마한의 주거지이나 마한의 분묘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고고학에서 특정의 고고학 자료가 고대사의 實體와 연결된다는 견해는 일견 눈에 띄는 주장이기도 하나 자칫 잘못된 주장일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고고학 자료는 역사적인 사건과 다르게 일정한 시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넓은 시기와 공간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특징적인 유구와 유물들이 일본지역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지역이 백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의 문제로 전남지역이 5세기말 내지는 6세기 중반까지 백제와 다른 정치체가 자리잡았다는 마한론은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慕韓論과 공통점이 있다. 모한론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은 전남지역이 백제와는 다른 세력임을 강조하고 이를 왜(일본)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남지역인 백제의 문화적인 영향이 6세기 대까지 전혀 없었을까? 석실분의 등장이 백제와 관련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즉 일본지역과의 교류를 반영하는 전방후원형 고분보다도 다소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는 나주 송제리고분(최성락 외 2000)과 영광 학정리 대천고분(최성락·김건수 1999) 등은 백제 석실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고학자들이 마한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마한에 대한 문헌적인 검토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서투른 문헌 인용이나 문헌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은 잘못된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헌사의 통설도 모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한다. 고고학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 특히 문헌적인 자료가 부족한 시기인 고대사의 앞부분은 고고학의 비중이 한층 높아지게 된다. 고고학이 고대사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해석해 나가는 것이지 그 문화를 역사적인 사실과 연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상 마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해 보았지만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마한의 실체가 무엇이며, 언제 백제에 의해 병탄되었을까 하는 점, 둘째, 마한을 대표하는 고고학 자료가 과연 존재할 것인가 하는 점, 셋째, 마한의 등장 시기와 소멸 시기를 보여주는 것이 고고학 자료로 반영되었을까 하는 점, 넷째, 전남지역이 백제에 통합되기 이전의 토착세력은 과연 어떠한 존재이고, 그 명칭은 무엇인가 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사학자와 고고학자간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사학자가 고대 문헌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해 주어야 하고, 고고학자들은 당시의 문화적 성격을 고고학 자료에 의해 정확히 밝히는 일을 담당하여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두 분야의 학자가 학제 연구를 통해 마한을 비롯한 고대사의 문제를 차분히 풀어가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마한의 연구사와 고고학에서 본 마한의 시각을 살펴보았다. 마한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중부 및 서남부지역에 자리잡았으며, 백제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남쪽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에 대한 문헌사의 연구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고고학의 연구는 다소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고고학자들이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가지는 문헌 자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된다.
또한 필자는 고대사연구에 있어서 고고학의 역할과 문헌사의 역할이 다르다고 보는 입장이다. 마한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마한이 어떠하다는 것보다는 당시의 문화상을 밝히는 데 주력하여야 한다. 마한의 위치가 어디이고, 언제 마한이 존재하였다는 등은 고고학자의 권한 밖의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고학자이란 고고학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연구자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고고학자가 언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자도 문헌 자료를 충분히 연구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고고학자는 고고학 자료에 비하여 문헌 자료를 다루는 기술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잘못 해석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마한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점은 마한을 고고학에서 임의로 규정하거나 고고학 자료의 변화(즉 문화상의 변화)에 견주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마한이라는 주장은 곤란하다. 마한에 대한 고고학 연구는 부족한 문헌 자료를 보완해 줄 것이고, 나아가 고대사의 통설도 재검토하게 한다. 또한 마한을 포함한 고대사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는 문헌사와 고고학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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