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개 마한 제국(諸國)들 위치 잃어 버린 마한 2009.03.03 11:19
먼 발치 매운 눈
대방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마한 소국들
<후한서>에는 마한을 이루는 나라들이 54개인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삼국지>한전에는 55개국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막로국(莫盧國)이라는 같은 이름이 2번 기재되어 중복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천관우 선생이 1979년에 최초 발표한 <마한제국의 위치시론>과 1989년에 발표한 <고조선사·삼한사 연구>에 의하면 막로국(莫盧國)과 비리국(卑離國)을 하나로 묶어서 전체적으로 역시 54개국으로 보았다.
판본에 따라 국명이 다른 글자로 소개되기도 한다.
원양국[爰襄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의 하나로,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또는 파주시(坡州市)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의 결속관계 속에서 존속하다가, 다른 소국들과 함께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모수국[牟水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기도 수원 일대를 차지하였던 부족국가로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백제와 분쟁지역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수주(水州), 조선시대인 1895년(고종 32)에 수원군(水原郡)이 되었다.
수원시의 옛 이름인 ‘모수(牟水)’는 ‘벌물’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수원(水原)’의 뜻인 ‘물벌’과 글자 순서가 바뀌었을 뿐 그 뜻이 같으므로 수원이라는 이름은 모수국에서 유래하였다.
이밖에 모수국은 고구려 때 매성군(買省郡:昌化郡)이라고 불렀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으로 추정된다.
이 모수국은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백제를 정벌하여 차지한 성 가운데 모수성(牟水城)인 듯하며,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3세기 이후까지 성장하다가 백제에 통합되었다.
상외국[桑外國]
삼한시대 진한(辰韓) 12소국(小國)의 하나.
진한은 기원전후부터 AD 4세기 무렵까지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작은 나라들을 통괄하는 명칭이다. 한국의 상고사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진한에는 12개의 소국이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4,000~5,000호(戶), 작은 것은 600~700호 정도라고 하였다. 상외국은 작은 규모의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위치는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長安面) 및 우정면(雨汀面) 일대로 비정된다. 이 지역은 삼귀(三歸)·삼괴(三槐)로 불려왔고, 고려 때에는 쌍부현(雙阜縣)이라고 하였다.
소석삭국[小石索國]
마한 54소국(小國) 중의 하나.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에 열거된 삼한 78소국 중에서 마한의 네 번째 소국으로, 다섯 번째의 대석삭국(大石索國)과 짝을 이룬다. 오래 전에는 의역식(意譯式) 위치 비정(批正)이 이루어졌지만, 소국의 국명은 마한 각 지역 현지음의 한자 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서〉'백제전'에 수록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우리 서계(西界)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이 소석산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마한 한강 이남설에 영향을 받아 충청도 바닷가에 있다고 보는 견해, 경기도 서해의 어느 섬인 듯하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나, 이들 모두 구체적인 지명은 거론하지 않았다. 한편, 마한 54국의 기록 순서가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순서대로 나열된 점에 착안하여, 여덟 번째의 백제국(伯濟國)보다 먼저 나오는 소석삭국은 강화 교동(喬桐), 대석삭국은 강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석삭국 [大石索國]
마한(馬韓) 54국 중 하나.
경기도 남양군(현 양주시) 지역에 있던 나라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존속하면서도 토착세력의 기반을 유지하면서 성장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우휴모탁국 [優休牟?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일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하다가 3세기 이후에 백제에 점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분활국 [臣?活國]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한 나라.
위치 경기도 안성군 양성(陽城)
신분고국(臣?沽國) 혹은 신분첨국(臣?沾國)으로도 전해진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陽城)의 고구려시대 지명이 사복홀(沙伏忽) 혹은 사파을(沙巴乙)로서 신분활과 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이 지역에 비정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한편 3세기 전반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는 신지격한(臣智激韓)이 송본(宋本)에는 신책첨한으로 기재된 것에 주목하여 이를 인명이 아니라 국명으로 파악하고 신분활국의 이칭 신분첨국과 동일시하여 경기도 가평군에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 견해는 마한 54국 가운데 6번째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강원도 춘천에 비정되고 8번째인 백제국(伯濟國)이 서울특별시 강남에 비정되므로 7번째인 신분활국은 대체로 그 사이에 비정되리라는 상대적인 위치도 고려하였다. 현재로서 정확한 위치비정은 힘들지만 《삼국지(三國志)》 마한전의 국명이 대체로 임진강 방면에서 전라남도 해안 방향의 순서로 열거되었으므로 7번째인 신분활국이 경기도 일원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한 소국은 3세기 말까지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다가 4세기 이후 점차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백제국 [伯濟國]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54국 중의 하나.
부여계 고구려 이주민인 온조(溫祚) 집단이 건설한 속국으로, 한강 유역 일대에 위치하였다. 초기에는 목지국(目支國)을 맹주로 하는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이었으나 미추홀(彌鄒忽:인천) 지역을 차지하면서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발전, 4세기 이후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하는 백제왕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한강 유역의 비옥함에서 오는 경제적인 측면과 부여족의 김전술이라는 전술적인 측면 및 한강 유역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철기제작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였다.
속로불사국 [速盧不斯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속로불사는 고구려 때의 수이홀(首爾忽)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때는 술성(戌城), 고려 때는 수안(守安)이라고 불린 경기도 김포군으로 비정된다. 마한의 국가 중 규모가 큰 나라는 따로 언급된 부분이 있으나 속로불사국은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가옥이 수천 호에 이르는 작은 나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나라는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에 공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군사적인 보호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결속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는 예속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한도 안에서만 유지되던 느슨한 결속관계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토착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유지하다가 3세기 말경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일화국 [日華國]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종족이 이주하여 성립하였다고도 하고 본래의 토착민 세력이 점차 발전하여 이룩한 정치집단이라고도 한다. 여러 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읍락 간에는 물자를 주고받는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 위치는 지금의 경기도나 충청남도 지방이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경기도 양평 부근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 이들은 마한연맹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굳건히 동맹을 맺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AD 3세기 후반까지 성장하다가 백제에 통합되었다.
고탄자국 [古誕者國]
삼한시대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언급된 작은 나라로서 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의 군장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학자마다 비정하는 곳이 다르다. 정인보는 전라북도 김제로 추정하고 천관우는 경기도 양평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지국(目支國)을 맹주로 하는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에게 조공을 바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한 채 독자적인 발전을 유지하다가 3세기 이후 백제에 복속되었다.
고리국 [古離國]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경기도 양평 또는 여주로 위치를 비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는 등의 협력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3세기 무렵 백제에 복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마한 소국의 규모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리국은 수천 가의 규모를 가진 작은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람국[怒藍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국의 한 소국.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음죽현(陰竹縣)은 본래 고구려 때 노음죽현(奴音竹縣)이라고 하던 곳으로, 노람은 노음죽의 노음에 가까운 음으로 해석된다. 마한연맹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으로 성장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 삼한의 소국들 이름이 있고 그 기록 순서로 보아 지금의 경기도나 충청남도 지방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설이 있으나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목지국 [目支國]
충남 직산(稷山)에 있던 마한의 소국.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두머리를 진왕(辰王)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국(辰國)의 왕이라는 뜻이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삼한시대의 한강 이남 여러 부족국가를 진국으로 총칭하였다. 진국의 왕, 즉 진왕은 여러 부족국가 중 세력이 가장 큰 자로서 부족국가 연맹의 맹주(盟主)의 위치에 있었다.
자리모로국 [咨離牟盧國]
삼한시대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의 하나로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학자에 따라서 경기도 이천시(利川市), 충청북도 또는 충청남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존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소위건국 [素謂乾國]
마한 54소국(小國) 중의 하나.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에 열거된 삼한 78소국 중 마한의 16번째 소국이다. 소위건의 의역(意譯)에 착안하여 우견(牛見), 즉 지금의 당진 우강(牛江)에 비정하기도 하나, 소국의 국명은 마한 각 지역 현지음의 한자 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체적 기록 순서로 보아 충남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령(保寧)의 옛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신촌(新村)·신읍(新邑), 《고려사》에는 신촌(新村)·사촌(沙村)으로 되었기 때문에 신(新)·사(沙)는 '새'라는 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속현(屬縣)에 신촌(新村)·산곤(散昆)의 명칭이 보이는데 신(新)·사(沙)가 '새'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소위건과 거의 가까운 음이기 때문에 산곤현(散昆縣)인 충청남도 보령에 비정하는 것이다.
고원국 [古爰國]
삼한(三韓)시대 마한 54소국의 하나.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한전(韓傳)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로 미루어 경기도 또는 충청도 근처일 가능성이 많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막로국 [莫盧國]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한조(韓條)의 마한편에 두 번 중복되어 있는데, 잘못되어 중복된 것인지 서로 다른 두 나라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전라도지방, 또는 충남지방으로 비정되며, 3세기 이후 백제에 복속되었다.
비리국 [卑離國]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의 54소국 가운데 하나.
비리는 백제의 옛 지명 어미에 많이 표기되는 부리(夫里)와 같은 말로 대개 국읍명(國邑名)에 붙는다. 신라에서 지명 어미에 벌(伐), 불(弗), 불[火] 등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다. 그 위치는 충청남도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오늘날의 지명으로 따져본다면, 백제 부부리현(夫夫里縣)인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澮縣面)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이 소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결속관계에 있으면서도 토착세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한 채 3세기 이후까지 성장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점리비국 [占離卑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
《한원(翰苑)》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고비리국(古卑離國)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타당한지는 알 수 없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古阜面)이 중심이 되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고부군 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소국의 이름은 마한 각 지역 현지음의 한자 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흔국 [臣흔國]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한 나라.
신첩국(臣疊國)으로도 전해진다. 음운상의 유사함을 근거로 백제 진현현(鎭峴縣)에 비정하는 견해가 일찍 제기되었는데, 진현현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황산군(黃山郡) 속현 진령현(鎭嶺縣)으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일대이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마한전의 국명은 대체로 임진강 방면에서 전라남도 해안 방향의 순서로 열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법칙성을 근거로 21번째의 신흔국은 홍성(洪城)에 비정되는 20번째의 고리비국(古離卑國)과, 예산(禮山)에 비정되는 22번째의 지침국(支侵國)의 부근인 온양(溫陽)에 위치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마한 소국은 3세기 말까지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으로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다가 4세기 이후 점차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지침국 [支侵國]
구로국 [狗盧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한 소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삼한의 소국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한자 표기가 당시 우리말에 가깝게 표기된 듯하다. 그 위치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임성군의 영현으로 기록된 청정현(靑正縣)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본래 청정현은 고대에는 청양현(靑陽縣)이라 하였고 백제 때는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라고 하였다. 구로국의 위치는 고량부리현이 있었던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지역에 비정된다.
비미국 [卑彌國]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의 54소국 가운데 하나.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비인(庇仁)은 백제 때 비물현(比勿縣)으로 '비물'의 음이 '비미'에 가깝기 때문에 비인으로 보고 있는데, 비미는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에 해당한다. 김정호(金正浩)도 비물을 조선시대의 비인현(庇仁縣), 즉 비인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 소국은 마한의 여러 소국과 결속관계를 맺으면서도, 토착세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성장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감해비리국 [監奚卑離國]
삼한시대의 마한에 소속된 소국.
금마천(金馬川) 유역인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지역으로 비정된다. '감해'는 '감개'로도 발음하므로 홍성군 금마면(金馬面)의 옛 이름인 '대감개(大甘介)'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고포국 [古蒲國]
삼한시대 마한에 속한 54소국의 하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기록이 보이나 현재 그 위치를 확실하게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인보는 경상북도 경산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천관우는 충청남도 부여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대체로 충청남도 지역설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으로서 맹주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여러 형태의 결속관계를 가지면서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한 채 3세기까지 독자적으로 성장을 이루었으나 후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치리국국 [致利鞠國]
삼한시대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정치연맹체의 하나로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작은 규모의 나라이다. 인구는 수천 가(家)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의 한 집에는 평균 5명 정도 거주했으므로 대략 2, 3만의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맹주국에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는 느슨한 관계의 동맹을 유지했으며 지역 세력을 기반으로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하다가 3세기 무렵 백제에 복속되었다. 지금의 위치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韓山面) 등으로 비정되나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염로국 [?路國]
아림국 [兒林國]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한 나라.
《삼국지(三國志)》 마한전의 국명은 대체로 임진강 방면에서 전남 해안 방향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는데, 29번째인 아림국은 전후에 기재된 국명의 위치로 보아 충청남도 일원에 비정된다. 일찍이 음운상의 유사함을 근거로 백제 설림현(舌林縣), 곧 지금의 충남 서천(舒川)에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한편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림(爾林)으로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이림성, 곧 현재의 예산 대흥(大興)에 비정하기도 한다. 마한 소국은 3세기 말까지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다가 4세기 이후 점차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사로국 [駟盧國]
삼한(三韓)시대 충남 홍성군, 청양군 일부 지역에 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백제가 영유하여 사시량현(沙尸良懸:沙羅)으로 고치고, 통일신라 때 신량현(新良縣)으로 바꾸어 결성군(潔城郡:結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여양현(驪陽縣:黎陽)으로 고쳐서 감무(監務)를 두었고, 현종 때 홍주(洪州:洪城)에 병합시켰다.
내비리국 [內卑離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국의 한 소국.
청동기나 초기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된 마한의 54개 속국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충청남도 또는 전라북도 지역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해국 [感奚國]
삼한시대의 마한에 소속된 소국.
전라북도 익산시, 또는 익산시 함열(咸悅) 지역으로 비정된다. 익산시의 백제 때 이름인 금마저(金馬渚)와, 함열에 남아 있는 곰개[熊浦]라는 지명이 '감해'의 고대 발음인 '감계'와 관련이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만로국[萬盧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국의 하나.
마한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시대 마한의 만로국은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에 있었으며, 백제 때 사포현(寺浦縣)이라고 하였다.
백제의 사포현은 고려시대에 남포현(藍浦縣)으로 고쳤다. 마한의 만로국이 있던 보령시 남포 일대는 사포현으로 백제에 속하였다.
만로국은 남포면(藍浦面)에 자리잡고 토성을 이루었는데, 남포 읍성의 전신이다. 백제 때부터 급속히 인류가 정착하여 남포, 주포 일대는 마을이 많이 형성되었다.
마한의 각 소국은 신지(臣智)·읍차(邑借)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만로국은 백제 때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沃溝) 지방으로 추정한다.
벽비리국 [?卑離國]
마한의 소국(小國).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에는 모두 54국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벽비리국이다. ‘비리’는 마한의 소국 이름에 많이 붙여지고 있는 말로서, 비리국(卑離國) ·고비리국(古卑離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등이 있다. 이는 백제의 부리(夫里), 신라의 벌(伐) ·불(弗) ·불[火]과 같이 평야 ·읍락(邑落) ·나라 등의 뜻을 지니는 말이다. 벽비리는 664년 당나라가 백제고지에 구획한 주현(州縣) 가운데 고사주(古四州)의 속현(屬縣) 조항에 보이는 벽성현(?城縣)에 해당하거나, 또는 백제시대의 파부리현(波夫里縣)인 지금의 보성군으로도 추측되고 있다. 이 소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관계를 성립하면서도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그대로 유지한 채, 4세기 중엽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오단국 [臼斯烏旦國]
삼한 때 마한(馬韓)의 소국.
54소국의 하나로서, 전남 장성군 진원면(珍原面)이 그 중심이다.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면서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존속하다가, 3세기 중엽 백제에 병합되어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 되었다.
일리국 [一離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의 하나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3세기 후반까지 존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불미국 [不彌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54소국 가운데 하나.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파로미(巴老彌)라고 표기한 것을 근거로 할 때, 664년 당나라가 백제에 구획한 주·현(州縣) 가운데 대방주(帶方州)의 속현인 포현현(布賢縣)을 파로미라고 했다. 즉 파로미는 '발라(發羅)'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를 지칭한다. 백제 때는 발라군, 통일신라 때는 경덕왕이 금산(錦山)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 때는 나주목(羅州牧)이 되었다. 이 소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지반국 [支半國]
삼한시대 마한 54소국(小國)의 하나.
전라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또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태인면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견지하면서 토착세력의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3세기 이후로 다른 소국들이 복속될 때 백제에 정복되었다.
구소국 [狗素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한 소국.
삼한시대 마한의 54국 가운데 한 소국으로 진(晉)나라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전(韓傳)에 따르면, 구소국은 지금의 전라도 지방으로 추정하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정읍시(井邑市) 고부면(古阜面) 지방으로 비정(比定)하기도 한다.
첩로국 [捷盧國]
삼한시대의 마한 54소국(小國) 중 하나.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고대 삼한의 여러 국가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기록 순서로 보아 첩로국은 전라도 지역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라북도 정읍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정읍군은 삼한시대에 고리국(古離國)과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첩로국 등의 소국이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이 소국도 다른 마한의 소국들처럼 독자적인 지배세력을 기반으로 개별 성장을 유지해오다가 4세기 때 백제에 정복되었다.
모로비리국 [牟盧卑離國]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던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의 54국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었으며, 백제 때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라고 하였다. 보리고을을 상징하는 모량부리의 속명인 모양현(牟陽縣)이라고도 불렀다.
삼국통일 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모량부리현을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쳤다.
마한의 각 소국에는 신지(臣智)·읍차(邑借)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다.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은 각 읍락의 물자교역 중심지이고, 국읍의 주수(主帥)는 대내외 교역활동을 장악하여 각 읍락을 통솔하고 유사시에 군사 지휘권을 발휘하였다.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모로비리국은 전라도 지역의 다른 소국과 함께 4세기 무렵에 백제에 통합되었다
신소도국 [臣蘇塗國]
마한(馬韓)의 속국 54국 중의 하나.
위치 충남 서산시 태안 지방
백제시대의 성대혜현(省大兮縣), 통일신라시대의 소태현(蘇泰縣)에 해당하는데, 현재의 충청남도 서산시 태안(泰安) 지방에 있었다. 그 국명으로 볼 때 목지국(目支國)이 정치적으로 맹주(盟主)였던 것처럼 신소도국은 종교적 소도(蘇塗:제사지역)의 종주국으로 생각된다.
고랍국 [古臘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에 속한 54소국(小國)의 하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던 목지국(目支國)을 맹주(孟主)로 한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그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백제 때 고룡군(古龍郡)이 된 전라북도 남원(南原)에 비정(比定)하는 견해도 있다.
임소반국 [臨素半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 4세기 중엽까지 존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운신국 [臣雲新國]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馬韓) 54소국(小國)의 하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한국의 상고시대에 관해 비교적 상세한 언급이 있어 이 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마한 54국은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정치연맹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맹주국에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엄격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느슨한 동맹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에 규모가 큰 나라는 수만 호에 이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였으며, 큰 나라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했는데 신운신국은 이름만 있는 것으로 보아 수천 호 규모의 비교적 작은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시 일원으로 비정되지만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래비리국 [如來卑離國]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마한 연맹체를 구성했던 54개 소국의 하나로서 청동기 또는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며,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礪山面)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장의 영도 아래 맹주국과 결속하여 4세기 중엽까지 존속하다가, 다른 소국들과 함께 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산도비리국 [楚山塗卑離國]
삼한시대 마한 54소국(小國)의 하나.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에 이른다고 하였다. 삼한시대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당시 한 집에는 평균 5명이 살았다고 한다.
초산도비리국은 별다른 기록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작은 나라로서 《삼국지》의 기록에 따라 유추해보면 인구는 대략 수천 명에서 2, 3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목지국(目支國)을 연맹체의 중심으로 삼아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았으나 이는 느슨한 동맹관계였다.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을 하다가 BC 3세기 무렵 백제에 복속되었다. 현재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라북도 정읍에 비정하기도 하고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郡內面)에 비정하기도 하나 정확한 근거가 없다.
일난국 [一難國]
고해국 [古奚國]
삼한시대의 마한 54국 중의 하나.
마한은 지금의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일대에 있었는데, 통일된 국가가 아니고, 군소국가(群小國家)들의 집단이었다. 한 국가라 해도 지금의 면(面) 정도였는데, 이러한 군소국가가 지금의 충청남도 성환(成歡)·직산(稷山) 및 평택 일원에 있었던 목지국(目支國)을 맹주(盟主)로 하여 국가연맹 형태를 취하였다.
중국의 《위지(魏志)》에 마한을 형성한 여러 나라 이름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고해국은 들어 있지 않고 구해국(狗奚國)이 있는데, 이것이 고해국으로 짐작되며, '고해진(古奚津)', '구계소(舊溪所)' 등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전남 강진군(康津郡)으로 비정되고 있다.
불운국 [不雲國]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의 54소국 가운데 하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인 충청남도 공주시 서쪽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의 파부리군(波夫里郡)인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된 이 소국은 토착 지배세력과 지배기구를 바탕으로 성장을 지속하다가 4세기 중엽을 전후로 다른 소국들과 함께 백제에 복속되었다.
불사분사국 [不斯?邪國]
원지국 [爰池國]
건마국 [乾馬國]
삼한시대(三韓時代)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
마한은 충청남도·충청북도, 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에 산재한 크고 작은 54개의 부족국가를 통칭한 말인데, 건마국의 정확한 현재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익산시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의 분포 상태를 근거로 건마국의 세력범위는 금마면, 왕궁면, 팔봉동, 삼기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마국은 마한 소국 가운데 형성 시기가 상대적으로 이르고, 인구가 1∼2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며 지배집단의 성격도 토착성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 목지국(目支國)이 백제국(伯濟國)에 통합된 뒤 다른 마한 소국을 통솔하는 중심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초리국 [楚離國]
삼한시대의 마한 54소국(小國) 중 하나.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고대 삼한의 여러 국가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기록 순서로 보아 초리국은 전라도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백제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으로 비정된다. 청동기 후기와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초리국은 독자적인 지배세력을 기반으로 개별 성장을 유지해오다가 4세기를 전후로 백제에 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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