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언어생활은? 잃어 버린 마한 2007.10.07 11:42
먼 발치 매운 눈
마한의 언어는 어땠을까
고대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확증적인 자료나 기술된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중국의 진나라 학자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글에서 당시의 언어생활을 엿 볼 수 있을 뿐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보면 '고구려는 동이족의 옛 말에 의하면 부여의 별종이다. 언어와 풍속은 부여와 비슷하나 성품이나 의복은 차이가 있다'는 구절과 동옥저조에는 '동옥조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으나 조금 다른 점도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동예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며 언어와 생활 풍속이 같다'고 나온다.
위의 내용을 보면 한반도 북쪽에 인접해 위치한 고구려와 동옥조, 동예는 같은 부여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방언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교류가 빈번하지 못했던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 사투리의 차이는 지금보다 더 심해서 소통의 어려움은 더 컸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면 남쪽의 한반도에 자리한 마한을 포함한 변한, 진한의 삼한의 언어는 어떠했을까. 역시 삼국지를 통해 엿 볼 수 있는 길 밖에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노인들이 대대로 말하기를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진나라 부역을 피해 한국에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변방 땅을 떼어 주어 주었다"고 한다. 성책이 있으며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고 나오며 변진(변한)조에는 '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성곽과 의복, 살고 있는 집이 진한과 같다. 언어와 규범 풍속도 비슷하다' 고 되어있다.
마한의 언어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삼국지의 기술대로 보면 마한어는 부여계통의 언어와는 큰 차이가 있고 진한, 변한과는 다소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고 보여진다.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언어는 한반도 북쪽의 부여계통의 언어와 한반도 남쪽의 삼한이 사용하던 언어로 크게 달랐다. 특히 삼한의 하나인 마한의 언어는 독자적인 언어생활을 했다고도 볼 수있다.
마한과 350년간 인접해 있던 백제는 마한과 별도의 언어를 사용했다. 백제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이 후로는 백제는 부여계 언어와 마한계 언어가 혼용되었으며 지배계층은 부여계통의 말을 피지배층은 마한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옛 말이 남아 내려오는 것은 지명이다. 마한어의 특징인 지명에 나오는 '비리'를 들 수 있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에서 어미'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8군데인데 '점비리' '내비리' 등이다. '비리'라는 이름은 후에 백제어에 계승되어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소부리'는 부여이고 '반나부리'는 나주의 반남이며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으로 부리를 쓰는 지명이 알려진 게 열 곳이다.
백제에게 흡수된 이후 마한어의 흔적이 현대 우리 말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호남 지방의 방언이 마한어에서 유래가 됐을 것으로 단지 추정해 볼 뿐이다. 마한의 언어를 되 살리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우리말 중에는 분명 마한어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마한의 종족
삼국지
한(韓)
삼국지(三國志)에는 원래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는 무리들이 한(韓)으로 적혀 있다.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은 만주에서 이동한 기자조선 유민들에게 일시 공파(攻破)당하였으나, 곧 기자조선 유민들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아버리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
사서에는 이 나라 이름이 나라(樂浪)로 적혀 있다. 이 무렵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은 만주에서 이주한 동옥저(東沃沮) 무리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하하였고,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도 만주에서 이주한 동예(東濊) 무리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하하였다.
그리고 한수(漢水) 이남에 살던 한(韓) 무리들도 한수(漢水) 이남으로 남하한 기자조선 유민들 또는 만주 눈수(嫩水), 송화강(松花江) 유역 등지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해(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B.C 194년 이후에는 한반도의 지배층이 토착민인 한(韓)이 아니고 만주에서 이주한 무리들이었다.
위 한(韓)은 만주에 살던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해님과 달님을 숭배하였다. 한(韓)의 신앙을 보면 해, 달, 별 등 천신(天神) 외에 삼신(三神), 토지신(土地神), 산신(山神) 등을 섬겼고, 묘자리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반드시 날자를 골라 제(齊)를 올리는 등 잡신(雜神)도 숭배하였다.
왜(倭)
삼국지(三國志)나 후한서(後漢書)에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토착민들이 왜(倭)로 적혀 있다.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後漢書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後漢書 「마한의 서해에 있는 중간 또는 큰 섬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작다..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를 키우고, 상의는 입으나 하의는 입지 않고 거의 벗고 다니며, 배로 왕래를 하였다. 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皆0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三國志 서.남해 섬에 살던 토착민인 왜는 가축사육, 어업, 약탈 등을 생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생업상 무력(武力)을 사용할 기회가 많아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왜는 왕검조선 때는 마한(馬汗)에게 복속하였고, 왕검조선이 멸망 후에는 홍성 금마 마한(馬韓), 익산 금마 마한(馬韓), 구태백제(九台百濟) 순서로 복속하였다. 마한이나 구태백제는 신라 공격 시 무력이 강한 왜(倭)를 군사(軍士)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를 군사로 사용한 마한(馬韓) 또는 구태백제(九台百濟) 군대가 왜(倭)로 적혀 있다.
예(濊)
삼국지 예전에 적혀 있는 예(濊)는 넓은 의미로는 만주에 거주한 모든 부여 무리 또는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부여 무리를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부여 무리 중 농어업족을 가리킨다. 만주에 거주한 부여 무리 중 일부는 B.C 194년경부터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한(韓), 왜(倭)를 정복하거나 밀어내고 소국(小國)을 세웠다. 5. 마한의 전술 삼국지 한전에 적혀 있는 마한(馬韓)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馬韓..散在山何間..有..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0布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0其尾皆長五尺餘」 「無城郭..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 「無0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0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 「其人性强勇魁頭露0如炅兵衣布袍足履革00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建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通日0呼作力不以爲痛旣以勤作且以爲健」 「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隋蹈地低昻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 「其男子時時有文身」 앞에 나온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0布出大栗大如梨" 문구와 "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은 소규모 국가가 모인 농업 중심 사회이다.
또 "不知乘牛馬", "乘船往來" 문구를 보면, 마한인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므로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은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농민군 또는 선박으로 적지에 상륙하여 적을 기습 공격하는 왜(倭)에 의존하였다.
뒤에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한 십제(十濟)나 구태백제에 패배한 것은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아 기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마한 지역이 수천 명 또는 수백 명으로 구성된 수십 개의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국에서는 상비군이 없거나 있어도 농민군이라서 전투용에 사용할 기마의 보유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마한 지역은 주로 농업지역이라서 사냥족이나 유목족과 달리 말을 타는 것이 생업과 관계가 없어 기마의 보유가 어려웠다. 그러나 홍성 금마 마한의 후국(侯國)으로 있던 십제국(十濟國)은 만주에서 익힌 기마전술을 사용하였다. -"無城郭"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에는 성곽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官家使築城郭"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에도 성곽은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십제국이 마한을 공격하였을 때 원산(圓山), 금현(錦峴) 2성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을 비롯하여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의거하여 배반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마한 지역에도 대규모 성곽이 있었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마한인들의 용감한 성격상 성 밖에서 적들을 맞아 싸우지만 때로는 성에서 농성전(籠城戰)도 병행하였다. -마한은 농민군 외에 왜(倭)도 군사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를 군사로 사용한 마한의 군대가 왜로 적혀 있다. 이 왜는 바다나 강에서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강한 전투력을 가지게 된 것은 약탈과 무역 등을 하기 위하여 생업상 강한 전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 왜(倭)도 육상에서는 기동력이 부족한 것이 결점이었다.
http://user.chollian.net/~hsg3104/삼한1.htm 발췌
경주, 공주, 부여의 공통점은?
▲ ‘영산강 유역의 고대 사회’에 대하여 특강을 하고 있는 이정호 교수(동신대학교) |
ⓒ 최장문 |
"공주, 부여, 경주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은?"
"큰 무덤이 있다."
"큰 무덤이 있는 도시의 정치적 특징은?"
"삼국시대 수도였다."
"그럼 나주 영산강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대형무덤이 분포한 지역도 고도(古都)로 봐야 할 것인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야(김해)를 넣어 4국, 여기에 다시 마한(나주)을 넣어 5국 시대로 볼 것인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문헌자료는 없고 유물은 국가와 관련된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나오고... 곤혹스럽다.
좀 비약이긴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편의 재미난 소설을 써도 좋을 듯싶다. 마치 주몽이나 대조영에 대한 역사적 문헌자료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몽>이나 <대조영>이라는 대하드라마를 만들 듯이…"
영산강 유역의 고대 사회에 대하여 특강을 해주신 이정호(동신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영산강 유역에는 나주를 중심으로 광주, 영암, 함평, 무안 등에 다수의 대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그 규모나 숫자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 가야 등 고대 삼국의 왕도에 분포하는 고분의 규모나 숫자를 능가한다. 현재 영산강 유역에 분포하는 고분은 수백여 개이며 규모는 한변이 30m~78m에 이른다.
그래서 삼국이냐고, 오국이냐고?
▲ 영산강 유역의 대형 무덤 위에서 선생님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 최장문 |
▲ 발굴중인 무덤군. 이 대형 무덤 중에는 불과 십여년 전까지 안동 권씨의 선산으로 사용 된 무덤도 있다. 무덤이 아닌 산으로 여겨질 만큼 규모가 크다. 무덤위에 묘를 쓴 셈이다. 그래서 ‘아파트 고분군’이라는 현대식 명칭이 생겨났다. |
ⓒ 최장문 |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어디에다 붙이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것 같다. '어! 금동신발 이거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인데… 백제 왕족이 묻혔나보다. 백제 중앙 왕실과 맞먹는 사람이 묻혔나보다'.
'전방후원군 무덤, 이거 일본에서 유행하던 양식인데… 일본인들이 건너와 이 지역에 살았나보다… 지배했었나 보다' 등등.
처음 전방후원군(앞쪽은 네모 뒤쪽은 원 모양의 형태로 일본에서 많이 나타나는 무덤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일본 NHK방송국에서 헬기를 타고 와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고고학자만도 200여 명 찾아왔다고 한다.
그럼 왜 일본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군 무덤 양식을 두고 초긴장을 하는 것일까?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 왕족이 바다를 건너와서 일본을 세웠다는 현재의 학설도 성이 안 차는데, 지방의 영산강 주변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고고학적 증거자료가 될까봐 긴장을 하였던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일본보다 시대가 떨어졌다. 이후에 일본은 '고대에 일본이 영산강 주변을 지배했었다'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큐모의 전방후원군 무덤은 78미터, 일본은 오사카에 있는 400미터이다.
그러나 전방후원군 양식은 일본과 같은 면도 있으나 부장품이 백제 것, 토착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일본 무덤이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역문화가 다국적, 개방적 문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조선사람 무덤이냐고, 일본사람 무덤이냐고?', '삼국이냐고, 오국이냐고?'
혹자가 다시 따져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모른다' 이다. 한 평생을 이 분야에서 연구해온 전문가들도 생각이 다른데 이틀간 보고 들은 내가 어찌 답을 말라햐! 새롭게 보고 들은 것을 혼자만 알자니 아쉽고, 발문을 하고나니 문제해결 능력이 안되고…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4세기에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세력을 정복하고 5세기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라는 국사 교과서 서술에 대해 무덤의 규모와 양을 놓고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김해에 답사를 갔을 때 '삼국시대에 가야를 넣어 4국시대 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늘 나주에 와서 마한의 유물·유적을 보니 5국 시대라는 학설도 있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에서의 '다양한 해석'과 '객관성'의 확보! 다양성에 관심을 갖자니 역사가 혼란스러워지고, 객관성을 강조하자니 역사가 너무 획일화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옆에 있던 선배교사가 웃으며 말한다.
"교과서에 있는 대로 가르쳐~어."
(최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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