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마한 (馬韓)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2:38

    마한 (馬韓)

마한은 두형태로 크게 나눌수있다. 왕금조선때의 제후국의 마한은 한반도 전체가 마한이였으나 진조선이 무너지고 해모수에의해 북부여가 들어선이후의 마한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기자조선의 유민이 경상도 지방에 이주 해오면서 진한과 변한이 마한왕을 대국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간다. 소국 연맹체로서 유지한 마한 54국은 백제마한에 의해 통합 되면서 백제로 통합 되어간다.


삼한의 하나. BC 1세기∼AD 3세기경 한강(漢 江)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5개 소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곳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곳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마한의 형성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마한지역에서는 경상도지역에 비하여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금강(錦江) 유역에서 보이는 고고학적 자료를 볼 때 마한지역 소국의 대부분은 BC 3∼BC 2세기 이래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를 배경으로 대두된 다수의 정치집단들이 발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의 결속기반은 마한 전역을 포괄하는 단일한 연맹체의 형태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며, 다만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정범위 내의 정치집단이 결속하여 마한소국연맹체의 토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양(高陽)·용인(龍仁)·부여(扶餘)·영암(靈巖)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위씨조선 유민의 남하와 한군현(漢郡縣) 설치로 철기문화가 도입되면서 마한 중심의 문화체제가 붕괴되고, 경상도지역이 새로운 교역중심지가 되자 마한의 영향력이 위축되어 백제국 대두와 더불어 그 세력에 흡수되다가, 2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통합되었다.



1.마 한(馬 韓) 고대에는 한반도를 한(韓)이라 부르거나, 마한(馬汗)이 다스린 한(韓) 지역이라는 뜻으로 마한(馬韓)이라고도 불렀다. 또 왕검조선 때 한반도를 다스린 마한(馬汗)을 달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월지(月支) 또는 달지(達支)라 불렀기 때문에 마한(馬汗)이 다스린 한반도 지역을 월지(月支)라고도 불렀다. 그 때문에 고대에는 한반도를 한(韓), 마한(馬韓) 또는 월지(月支)라 불렀다.

B.C 238년에 왕검조선이 멸망하자 한(韓) 지역은 독립세력이 되었고,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고구려(高九黎)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인 기준(箕準)이 무리를 거느리고 만주남부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여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거주한 한(韓) 무리들을 공파(攻破)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이때 기준이 세운 마한은 누구에게도 복속하지 않는 독립국이었다. 그런데도 나라 이름을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진국(辰國)이라 부르지 않고 달님의 아들을 뜻하는 마한(馬韓)이라 부른 것은 북쪽에서 해님의 아들을 칭한 강대국 고구려(高九黎)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 마한은 이도(移都)한 그 해 토착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기준은 죽고 남은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의 인솔하에 홍성(洪城) 금마(金馬)로 남하하였다.

같은 해 토착 한(韓) 무리들이 기자조선 유민들을 한수 이남으로 쫓아버리고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세운 나라의 이름은 종전과 달리 마한(馬韓)이 아니고 대국(大國)이나 종주국(宗主國)을 뜻하는 나라(樂浪) 또는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진한(辰韓)이었다.

이 시기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는 강대국 고구려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가 감히 나라(樂浪) 또는 진한(辰韓)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나라(樂浪)의 북쪽에 위치한 위만조선과 고구려(高九黎)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를 고구려의 동맹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가 나라(樂浪) 또는 진한(辰韓)이라는 칭호를 사용해도 나라(樂浪)를 공격하지 않고 이를 묵인해 주었다. 같은 해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겨 내려간 기자조선 유민들은 홍성(洪城) 금마(金馬)에 도읍을 두고 나라 이름을 전처럼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이는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마한(馬韓)은 A.D 9년에 온조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A.D 9년에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멸망하자 금강(錦江) 이남 지역의 소국(小國)들은 익산(益山) 금마(金馬)를 수도로 한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든 후, 홍성 금마 마한의 후예(後裔)를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이 나라 이름 역시 마한(馬韓)이었다. 이 익산 금마 마한도 누구에게 복속하지 않는 독립국이었다.

그런데도 나라 이름을 진국(辰國)이라 부르지 않고 전처럼 마한(馬韓)이라 부른 것은, 홍성 금마 마한의 정통성을 승계하였다는 뜻으로 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마한은 A.D 205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마한(馬韓)이라 부른 지역은 B.C 194년 이전은 한반도 전지역이었으나, 홍성 금마 마한 때는 한수(漢水) 이남 지역이었고, 익산 금마 마한 때는 금강(錦江) 이남 지역이었다.
 

2. 마한의 역사
  가). B.C 238년부터 194년까지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부터 B.C 194년까지 마한(馬韓) 지역에는 수십 개의 소국(小國)이 분립(分立)되어 존재하였다. 그 중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거주한 한(韓) 무리들은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들에게 공파(攻破)당하였다가 그 해 기자조선 유민들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後漢書韓傳  


3. B.C 194년 이후   가. 기자조선 유민들이 평안도 지방에 세운 마한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한 기자조선 유민들은 평안도 지방의 토착 한(韓) 무리들을 공파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으나, 그 해 토착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기준은 죽고 남은 무리들은 홍성 금마로 쫓겨 내려갔다.

武康王(一云 哀王)諱準 丁未移都馬韓其年薨   馬韓世系 나. 홍성 금마 마한   B.C 194년에 평안도 지방 토착 한(韓) 무리들에게 쫓겨 한수(漢水) 이남으로 남하한 기자조선 유민들은 홍성 금마에 수도를 두고 진.변한을 제후로 거느리며 한수 이남 지역을 다스렸다.정미(丁未) 원년에 번조선왕은 떠돌이 도적 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하였다.  
홍성 금마 마한의 세계(世系)를 살펴본다.

마한(馬韓)의 어원?,(古記)에는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왕검조선의 동쪽 지역인 한반도, 대마도, 구주 등지를 다스린 마한(馬汗:辰王의 裨王)이 달님의 아들이라는 뜻인 월지(月支) 또는 달지(達支)로 적혀 있고, 마한(馬汗)이 다스린 지역 역시 월지(月支) 또는 달지(達支)로 적혀 있다. 월지(月支) 또는 달지(達支)라는 칭호는 B.C 238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에도 한반도에서 사용되었다.

고기에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 한반도가 한(韓), 마한(馬韓), 월지(月支), 달지(達支) 등으로 적혀 있다. (註 고기에는 "汗"자가 "韓"자로도 적혀 있는데, "韓"은 "汗"을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 한반도는 독립세력이 되었고,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고구려(高九黎)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살고 있던 한(韓) 무리들을 공파(攻破)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사서에는 이 나라 이름이 마한(馬韓)으로 적혀 있다. 이때 기준(箕準)이 세운 마한(馬韓)은 누구에게도 복속하지 않은 독립국(獨立國)이었는데도 나라 이름이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인 진국(辰國:辰은 龍을 뜻하고 고대 우리 민족의 신앙에 용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으로 적혀 있지 않고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인 마한(馬韓) 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적혀 있다.

이는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 마한(馬韓) 또는 월지국(月支國)이라는 칭호의 의미가 한반도의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마한(馬韓)은 이도(移都)한 그 해 토착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기준(箕準)은 죽고 남은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의 인솔하에 홍성(洪城) 금마(金馬)로 쫓겨 내려갔다.

같은해 토착 한(韓) 무리들이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들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아버리고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세운 나라의 이름은 대국(大國), 종주국(宗主國)을 뜻하는 나라(樂浪) 또는 한반도에서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인 진한(辰韓)이었고, 그 나라의 왕은 진왕(辰王)이었다. 고대에는 강대국의 왕만이 해님의 아들((辰汗, 辰王)을 칭할 수 있었고, 약소국이나 복속국의 왕은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지 못하고 달님의 아들(月支)이라 칭하였다. 만약 약소국의 왕이 함부로 해님의 아들을 칭하였다가는 주위에 있던 강대국의 왕으로부터 응징을 받았다.

이 시기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는 북쪽에 있던 강대국 고구려(高九黎)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가 대국(大國), 종주국(宗主國)을 뜻하는 나라(樂浪) 또는 한반도에서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인 진한(辰韓)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도 고구려는 나라(樂浪)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나라(樂浪) 북쪽에 있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고구려(高九黎)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위만조선과의 전쟁 때문에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가 나라(樂浪) 또는 진한(辰韓)이라는 칭호를 사용해도 나라(樂浪)를 정벌할 여유가 없었고, 또 B.C 169년에 평안도 지방의 나라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海城)에 바치는 등 고구려를 사실상 대국(大國)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註 고대에 강대국의 왕은 자신을 해님의 아들 즉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칭하고 그 나라를 천하의 중심지로 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강대국 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 왕이 해님의 아들을 칭하였을 때는 전쟁이 일어났다.같은해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겨 내려간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들은 홍성(洪城) 금마(金馬)에 도읍을 두고 나라 이름을 전처럼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이는 기준(箕準)이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세운 마한(馬韓)이 홍성(洪城) 금마(金馬)로 남하하였기 때문이다. 즉 같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 마한(馬韓)은 A.D 9년에 온조백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A.D 9년에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멸망하자 금강(錦江) 이남 지방에 있던 소국(小國)들이 익산(益山) 금마(金馬)에 수도를 둔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든 후, 홍성 금마 마한(馬韓)의 후예(後裔)를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이 나라 이름 역시 마한(馬韓)이었다.

이는 익산 금마 마한이 홍성 금마 마한의 정통성을 승계하였다는 뜻으로 전에 사용하던 마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마한(馬韓)은 A.D 205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한반도에서 마한(馬韓)이라 불리운 지역은 B.C 194년 이전은 한반도 전지역이었으나, 홍성 금마 마한(馬韓) 때는 한수(漢水) 이남이었고, 익산 금마 마한(馬韓) 때는 금강(錦江) 이남이었다.



마한세계(馬韓世系)왕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甲子(B.C 57年)新羅王朴赫居世立國慶州遂界辰韓二十二年 甲申(B.C 37年)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병二府 元稽之末有後孫三人一曰乎稱鮮于氏入黃龍國一曰諒稱韓氏曰乎稱奇氏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己丑(B.C 32年)立 鴻嘉四年甲辰(B.C 17年)爲百濟溫祚所奪在位十六年人只保圓山錦峴城 新莽己巳(A.D 9年)以二城降于百濟馬韓不祀 自康王戊申至稽王己巳爲二百二年



마한세계(馬韓世系)원문(元文)
마한세계(馬韓世系)에는 기준(箕準)이 1세 왕으로 적혀 있다. 이는 기준(箕準)이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마한(馬韓)을 세웠기 때문이다. 또 홍성 금마 마한(馬韓)의 존속기간이 2세 강왕(康王) 무신년부터 202년간으로 적혀 있다.

이는 강왕(탁) 때 홍성 금마로 남하하였기 때문이다. 위 마한세가(馬韓世家) 내용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다른 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마한(馬韓)이 A.D 8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으나, 마한세가(馬韓世家)에는 B.C 17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마한왕(馬韓王)이 B.C 19년에 죽은 것으로 적혀 있으나, 마한세가(馬韓世家)에는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위 마한세가(馬韓世家)에는 원왕(元王)에서 계왕(稽王) 말 사이에 마한왕(馬韓王)의 후손 3인 중
1인은 선우씨(鮮于氏)를, 1인은 한씨(韓氏)를, 1인은 기씨(奇氏)를 각 칭하였다고 적혀 있다. 현재 선우씨, 기씨, 한씨의 세가보에는 윗대 선조에 위 마한세가에 적혀 있는 마한왕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윗대 선조에는 에 적혀 있는 기자조선왕의 이름이기자조선세계(箕子朝鮮世系) 적혀 있다.

마한왕(馬韓王)의 선조 중 기후(箕후)부터 기준(箕準)까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왕이었고, 그 보다 더 선조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살던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들이었다.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를 원래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는데,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를 선우여(單于黎)라 불렀다고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기자조선왕 기준(箕準)이 한(韓)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왕(韓王)을 칭하였다고 성을 한씨(韓氏)로,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에서 기(箕) 작위를 받은 기자족(箕子族)이 원래는 수유족(須臾族)의 1무리였다고 성을 기씨(奇氏:箕와 奇는 같이 쓰인다)로 각 칭하였다.

[註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명칭은 원래 선우여(單于黎)였으나, 뒤에 발음이 차츰 변하여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 순서로 변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 나오는 홍성 금마 마한 관련 내용을 살펴본다.

「혁거세(赫居世) 8년(B.C 50년) 왜인(倭人:註 홍성 금마 마한인)이 군사를 몰고 와 변방을 침범코자 하다가 시조가 성덕(聖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八年倭人行兵欲犯邊聞始祖有神德乃還」[註 신라는 홍성 금마 마한을 마한 또는 왜라 불렀다. 본 홈 왜(倭) 장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 항 참조]

「혁거세(赫居世) 38년(B.C 20년)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어 마한(馬韓:註 홍성 금마 마한)을 예방하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진.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屬國)인데, 근년에 들어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事大)의 예(禮)가 이러할 수 있소. 하였다.

호공은 우리 나라는 이성(二聖:註 박혁거세와 왕비)이 발흥함으로부터 인사(人事)가 닦여지고 천시(天時)도 화평하며..중략..진한(辰韓)의 유민으로부터 변한(卞韓), 나라(樂浪:강원도 지방 나라), 왜(倭)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 후략. 三十八年春二月遣瓠公聘於馬韓馬韓王讓瓠公曰辰卞二韓爲我屬國比年不輸職貢事大之禮其若是乎對曰 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天時和倉庾充實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온조왕(溫祚王) 10년(B.C 9년)

가을 9월 왕은 사냥을 나가 사슴을 잡아 마한(馬韓:註 홍성 금마 마한)에게 보내었다. 十年秋九月王出獵獲神鹿以送馬韓」

「온조왕(溫祚王) 13년 8월 사신(使臣)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천도(遷都)한 것을 알리고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註 예성강), 남으로 웅천(熊川:註 안성천?),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註 지금의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 방면의 산줄기?)을 한계로 하였다. 八月遣使馬韓告遷都遂定疆北至浿河南限熊川西窮大海東極走壤」

「온조왕(溫祚王) 24년(A.D 6년) 왕이 웅천(熊川)에 책을 만드니 마한(馬韓)이 사자를 보내 책망하되, "왕이 당초 강을 건너 왔을 적에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백 리 땅을 갈라 주어 안정케 하였으니, 왕에 대한 대접이 후하지 아니함이 아니니 마땅히 보답할 바를 생각해야 할 터인데, 지금 나라가 완전하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와 더불어 당적(當敵)할 이 없다고 여겨 성지를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그러고도 의리가 있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은 부끄럽게 여겨 그 책(柵)을 헐어 버렸다. 二十四年秋七月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其待王不爲不厚宜思有以報之今以國完民聚謂莫與我敵大設城池侵犯我封疆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

「온조왕(溫祚王) 25년(A.D 7년) 봄 2월 대궐 안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서울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해석자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는 것은 대왕이 발흥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까닭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합병할 응보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 마한을 합병할 마음이 있었다. 王宮井水暴溢漢城人家馬生牛一首二身日者曰井水暴溢者大王勃興之兆也牛一首二身者大王幷國之應也王聞之喜遂有幷呑辰.馬之心.」

「온조왕(溫祚王) 26년(A.D 8년) 가을 7월 왕은 말하기를 "마한이 차차 약해 가고 상하가 마음이 이탈되니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하겠다. 혹시 다른 자에게 병합된다면 마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한들 뭐하겠느냐 남을 앞서 빼앗아 뒤 곤란을 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二十六年秋七月王曰"馬韓漸弱上下離心其勢不能久爲他所幷則唇亡齒寒悔不可及不如先人而取之以免後艱".」

「온조왕(溫祚王) 26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표면으로는 사냥한다고 핑계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금산) 두 성(城)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遂幷其國邑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溫祚王) 27년(A.D 9년) 4월에 원산, 금현 2성이 항복하므로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二十七年夏四月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온조왕(溫祚王) 34년(A.D 16년) 마한의 구장(舊將)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의거하여 배반하자 왕이 몸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周勤)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아울러 그 처자까지 죽였다. 三十四年冬十月馬韓舊將周勤據牛谷城叛王躬帥兵五千討之周勤自經腰斬其尸幷誅其妻子.」다.

익산 금마 마한   온조백제의 공격으로 A.D 9년에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하자 금강 이남에 있던 지금의 전라도 지방 소국(小國)들이 다시 뭉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어 홍성 금마 마한왕의 후예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익산 금마 마한이 왜(倭)로 적혀 있다.

이는 홍성 금마 마한 마한(馬韓)이 마한.진한.변한을 다스린 삼한의 통치자이자 박혁거세 등 신라왕들이 익산 금마 마한을 부름에 있어 삼한의 통치자를 뜻하는 마한(馬韓)이라 부르지 않고, 익산 금마 마한이 왜(倭)를 군사로 사용하는 것을 빗대어 익산 금마 마한을 비하(卑下)하여 왜(倭)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익산 금마 마한은 A.D 205년에 위구태 무리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3. 마한의 관경  

1). B.C 194년 기준이 평안도 지방에 세운 마한의 관경   B.C 194년에 기자조선 유민인 기준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지금의 평안도 지방 토착 한(韓)무리들을 공파하고 세운 마한의 관경은 대략 지금의 평안도 지방이었다.  

2). 홍성 금마 마한의 관경  홍성 금마 마한의 관경은 대략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이었고, 경상도 지방의 진.변한을 제후로 거느렸다. 그 후 B.C 57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 지역에 신라를 세우고 진한 지역을 장악한 후부터 진한 지역은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다.

3). 익산 금마 마한의 관경   익산 금마 마한의 관경은 대략 금강 이남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었다. 그러나 삼국지 한전에는 아야국(安邪國), 구야국(拘邪國) 등 변한 지역 12국도 마한왕(馬韓王)에게 조공(朝貢)하였다고 적혀 있다.   「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0支憤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弁辰韓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  

4. 마한의 종족  

가). 한(韓)   삼국지(三國志)에는 원래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는 무리들이 한(韓)으로 적혀 있다.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은 만주에서 이동한 기자조선 유민들에게 일시 공파(攻破)당하였으나, 곧 기자조선 유민들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아버리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

사서에는 이 나라 이름이 나라(樂浪)로 적혀 있다. 이 무렵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은 만주에서 이주한 동옥저(東沃沮) 무리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하하였고,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살던 한(韓) 무리들도 만주에서 이주한 동예(東濊) 무리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하하였다.

그리고 한수(漢水) 이남에 살던 한(韓) 무리들도 한수(漢水) 이남으로 남하한 기자조선 유민들 또는 만주 눈수(嫩水), 송화강(松花江) 유역 등지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에게 복속하거나 밀려서 남해(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B.C 194년 이후에는 한반도의 지배층이 토착민인 한(韓)이 아니고 만주에서 이주한 무리들이었다.

위 한(韓)은 만주에 살던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해님과 달님을 숭배하였다. 한(韓)의 신앙을 보면 해, 달, 별 등 천신(天神) 외에 삼신(三神), 토지신(土地神), 산신(山神) 등을 섬겼고, 묘자리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반드시 날자를 골라 제(齊)를 올리는 등 잡신(雜神)도 숭배하였다.  

나). 왜(倭)   삼국지(三國志)나 후한서(後漢書)에는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토착민들이 왜(倭)로 적혀 있다.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後漢書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後漢書 「마한의 서해에 있는 중간 또는 큰 섬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작다..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를 키우고, 상의는 입으나 하의는 입지 않고 거의 벗고 다니며, 배로 왕래를 하였다. 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皆0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三國志 서.남해 섬에 살던 토착민인 왜는 가축사육, 어업, 약탈 등을 생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생업상 무력(武力)을 사용할 기회가 많아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왜는 왕검조선 때는 마한(馬汗)에게 복속하였고, 왕검조선이 멸망 후에는 홍성 금마 마한(馬韓), 익산 금마 마한(馬韓), 구태백제(九台百濟) 순서로 복속하였다. 마한이나 구태백제는 신라 공격 시 무력이 강한 왜(倭)를 군사(軍士)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를 군사로 사용한 마한(馬韓) 또는 구태백제(九台百濟) 군대가 왜(倭)로 적혀 있다.  

다). 예(濊)   삼국지 예전에 적혀 있는 예(濊)는 넓은 의미로는 만주에 거주한 모든 부여 무리 또는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부여 무리를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부여 무리 중 농어업족을 가리킨다. 만주에 거주한 부여 무리 중 일부는 B.C 194년경부터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한(韓), 왜(倭)를 정복하거나 밀어내고 소국(小國)을 세웠다.   5. 마한의 전술   삼국지 한전에 적혀 있는 마한(馬韓)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馬韓..散在山何間..有..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0布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0其尾皆長五尺餘」 「無城郭..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 「無0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0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 「其人性强勇魁頭露0如炅兵衣布袍足履革00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建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通日0呼作力不以爲痛旣以勤作且以爲健」 「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隋蹈地低昻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 「其男子時時有文身」 앞에 나온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0布出大栗大如梨" 문구와 "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은 소규모 국가가 모인 농업 중심 사회이다.

또 "不知乘牛馬", "乘船往來" 문구를 보면, 마한인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므로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은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농민군 또는 선박으로 적지에 상륙하여 적을 기습 공격하는 왜(倭)에 의존하였다.

뒤에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한 십제(十濟)나 구태백제에 패배한 것은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아 기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한이 기마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마한 지역이 수천 명 또는 수백 명으로 구성된 수십 개의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국에서는 상비군이 없거나 있어도 농민군이라서 전투용에 사용할 기마의 보유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마한 지역은 주로 농업지역이라서 사냥족이나 유목족과 달리 말을 타는 것이 생업과 관계가 없어 기마의 보유가 어려웠다. 그러나 홍성 금마 마한의 후국(侯國)으로 있던 십제국(十濟國)은 만주에서 익힌 기마전술을 사용하였다. -"無城郭"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에는 성곽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官家使築城郭" 문구를 보면 마한 지역에도 성곽은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십제국이 마한을 공격하였을 때 원산(圓山), 금현(錦峴) 2성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을 비롯하여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의거하여 배반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마한 지역에도 대규모 성곽이 있었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마한인들의 용감한 성격상 성 밖에서 적들을 맞아 싸우지만 때로는 성에서 농성전(籠城戰)도 병행하였다. -마한은 농민군 외에 왜(倭)도 군사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를 군사로 사용한 마한의 군대가 왜로 적혀 있다. 이 왜는 바다나 강에서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강한 전투력을 가지게 된 것은 약탈과 무역 등을 하기 위하여 생업상 강한 전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 왜(倭)도 육상에서는 기동력이 부족한 것이 결점이었다.  


5. 마한과 왜 관계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 서.남해 섬에 살던 왜(倭)는 마한왕(馬韓王)에게 복속하였고, 마한왕은 신라를 공격할 때 왜(倭)를 군사로 사용하였다. A.D 205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후부터 왜(倭)는 구태백제에 복속하였고, 구태백제도 마한처럼 왜를 군사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광개토왕비문에는 왜를 군사로 사용한 구태백제가 왜(倭)로 적혀 있다.

 
6. 위구태 무리의 마한 정복   삼국사기에는 마한(馬韓)이 A.D 9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홍성 금마 마한이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 온조백제에 점령되지 않은 금강 이남 지역의 소국들은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든 후 수도를 익산 금마에 두고 홍성 금마 마한왕의 후예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 후 A.D 205년에 부여왕 위구태(尉九台)가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를 이끌고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구태가 마한을 정복한 내용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太白犯月」三國史記 百濟本紀   삼국사기에는 일식(日蝕)이 있을 때 일식이 있었다고 직설적으로 적혀 있으므로, 앞에 나온 문구는 일식이 있었다는 것을 적은 것이 아니다.

이는 태백으로 지칭된 위구태 무리가 달(月)로 지칭된 마한(馬韓) 지역을 정복한 사실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그 후 진서(晋書),송서(宋書)등에 나오는 마한(馬韓)또는모한(慕韓)은 마한연맹을 정복한구태백제 또는 옛 마한연맹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http://user.chollian.net/~hsg3104/삼한1.htm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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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武康王
(무강왕)

一云哀王諱準丁未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  馬韓王爲八世
 해설: 별칭 애왕, 휘는 준 도읍을 금마로 옮긴후 승하, 태조 문성대왕이 평양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후 41세손이라.

2世

康王
(강왕)

諱卓惠帝二年戊申立在位四年
 해설: 휘는 탁, 중국 혜황제2년무신에즉위,4년간재위 

3世

安王
(안왕)

諱龕惠帝六年壬子立在位三十二年
 해설: 휘는 감, 중국 혜황제6년임자에즉위,32년간재위 

4世

惠王
(혜왕)

諱寔文帝後元七年甲申立在位十三年
 해설: 휘는 식, 문황제7년갑신에즉위,13년간재위 

5世

明王
(명왕)

諱武景帝十三年丁酉立在位三十一年
 해설: 휘는 무, 중국경제13년정유에즉위,31년간재위 

6世

孝王
(효왕)

諱亨武帝二十八年戊辰立在位四十年
 해설: 휘는 형, 중국무제28년무진에즉위,40년간재위  

7世

襄王
(양왕)

諱燮宣帝本始元年戊申立在位十五年
 
해설: 휘는 섭, 중국선제원년무신에즉위,15년간재위 

8世

元王
(원왕)

諱勳宣帝神爵四年癸亥立在位二十六年甲子新羅王朴赫居世立國慶州遂幷辰韓二十二年甲申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倂二府元稽之末有後孫三人一曰平稱鮮于氏入黃龍國一曰諒稱韓氏一曰平稱奇氏

해설: 휘는 훈, 중국 선제 4년 계해에 즉위, 26년 갑자에 신라 박혁거세와 고구려 동명왕 고주몽에게 합병당하여 계왕을 내세웠으니 이미 나라가 기울어 짐, 후손에 3형제가 있었으니 첫째는 우평으로 황룡국(고구려)에 들어가 선우씨가 되고, 둘째는 한씨라 칭하며, 셋째는 기씨라 칭하니라.
 

9世

稽王
(계왕)

諱貞成帝建始元年己丑立鴻嘉四年甲辰爲百濟溫祚所奪在位十六年人只保圓山錦峴城新莽元年己巳以二城降于百濟馬韓不祀自康王戊申至稽王己巳爲二百二年
 
해설: 휘는 정, 중국 성제 원년 기축에 즉위, 백제 온조왕에게 나라를 잃음, 재위 16년, 금마에 마한을 세운 뒤 202년 만에 망하니라.

馬韓凡九世歷二百二年自箕子朝鮮四十一世馬韓九世前後共五十世箕子元年至韓亡之世合1131年馬韓之末元王勳有子三人
一曰友平入黃龍國爲北原(或云太原)鮮于氏
一曰友諒仕于新羅脫解王朝爲上黨韓氏以淸州爲本
一曰友誠降百濟仕于溫祚王朝爲德陽奇氏以辛州爲本

按魏誌曰箕子子姓其後有曰友平友諒友成友平因襲鮮于氏歸北原友諒襲馬韓仍爲上黨韓氏友誠歸德陽爲奇氏   見石灘公所刊萬曆丁巳譜
해설: 마한 9세, 202년 만에 나라가 망하니 기자의 후조선 건국으로부터 41세에 마한을 세우고 다시 마한 9세에 멸망하니 도합 50세에 년수로 1131년 만의 일이라.8세 원왕 훈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우평은 황룡국(고구려)에 들어가 북원 선우씨가되고,우량 신라 탈해왕조에 들어가 청주 한씨라 일컫게 되고, 우성은 백제 온조왕조에 들어가 덕양 기씨칭하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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