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인천의 주산(主山)인 문학산(文鶴山)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9:55
동아일보

[인천/경기]백제魂 숨쉬는 2천년 역사현장

 

 

인천의 주산(主山)인 문학산(文鶴山·해발 213m)은 인천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총면적이 430여만㎡(130만평)로 산자락에 안고 있는 문화 유산만해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문학산은 한마디로 인천의 역사 보고(寶庫)다.

문학산 자락을 둘러싼 산과 마을엔 옛부터 두루미가 자주 찾아들었다고해 ‘학(鶴)’자가 든 명칭이 많다. 청학(靑鶴), 승학(昇鶴), 선학(仙鶴), 학익(鶴翼) 등의 산과 동네 이름이 그것이다.

문학산 꼭대기에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동명성왕)의 아들 비류(沸流)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42년 건국한 비류 백제의 도읍지터가 남아 있다. 이 도읍지 이름이 바로 미추홀(彌鄒忽).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일컬을 때 ‘미추홀’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건국 설화엔 ‘문학산 정상은 미추왕국의 고도(古都)’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실록에는 ‘인천에 성이 있어 이곳을 미추홀성, 혹은 남산고성이라고 불렀다. 성내엔 작은샘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1930∼40년대 이산을 오르던 사람들은 이 우물터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주민 김윤진씨(64)는 “문학산에는 과거 지석묘를 비롯한 각종 문화유산이 널려 있었지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지금은 거의 모두 사라진 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이 산에는 문학산성(인천시 기념물 1호)이 220m 정도 남아 있다.

학계에서는 이 성터가 백제가 건국할 무렵 비류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은 내·외성으로 축조돼 있고 성안에는 무덤 봉분처럼 생긴 봉화대가있었다. 이 봉화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햇불로 안산과 부평을 잇는 역할을 했다.

이 산성은 해방 후 한때 산 정상에 미군기지가 자리잡는 바람에 예전의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59년부터는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시민들의 출입이 금지돼 아쉬움을 주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남구청과 시민단체가 ‘문학산 살리기운동’을 활발하게 펴고 있다. 이들은 △역사·문화분야 △고고학·문화재 분야 △동·식·미생물 분야 △도시생태·환경 분야로 나눠 문학산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인하대 서영대 교수(인하대 박물관장)는 “문학산의 자연생태뿐만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유물과 유적의 훼손을 막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성구 인천시 교육위원회 의장은 “월드컵대회라는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만큼 인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학산의 중요성을 인식해 입구에 상징물이라도 우선 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