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설성산성이 쏘아올린 한성백제>
김태식 기자 = 강원도 영동 쪽으로 영동고속도로를 따라가다이천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면 충주 방면으로 달리는 3번 국도를 만난다.
이 국도를 타고 이천 시내를 지나 15㎞ 남짓 달리다 보면 장호원읍이 나타나고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편으로 상승대라는 육군교도소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다시 1㎞ 가량 충주 방향으로 더 전진하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주유소와 마주한 오른쪽 도로편에 선읍2리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국도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선읍리 마을을 지나 다시 경운기 두 대가 겨우 지나칠까 말까 한 시멘트 논길을 달려 야트막한 산중턱으로 올라간다.
이곳이 설성산이다. 오솔길은 이 산을 타고내리는 가장 큰 계곡 중턱까지 차의접근을 허용한다. 이곳에 신흥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그 윤곽을 쉽게 알아볼 수 없으나 설성산성 성벽은 이 사찰을 안으로 싸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계곡을 감싸안고 돈다.
이곳에 성곽이 있음은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를통해 보고됐다. 하지만 설성산성은 이후 까마득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다가 1981년, 현재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인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간단한 현지조사를 벌여 신라시대에 축성된 산성이라고보고하면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 정 교수를 따라 함께 현장조사를 했던 학생 중에는 현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있는 박경식이 있었다.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박 교수는 그 때 설성산성을 회상하기를 "언젠가 내가 이 산성을 발굴하고 말리라 다짐했었다"고 한다.
우연일까? 고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한국 고대 불교조각사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그에게 정말로 설성산성을 발굴할 기회가 왔다. 이천시가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설성산성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이에 박 교수는 '신라육상 교통로 연구'로 단국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상임연구원 서영일 등과 함께 1999년 10-12월 산성에 대한 지표 및 시굴조사를 벌였다.
산성 현황에 대한 실측은 이때서야 이뤄졌다. 측정 결과 산성은 전체 둘레가 1천95m로 밝혀졌다. 이와 함께 조사단은 성 안에서 건물지 12개소, 넓은 대지 1개소,우물 1개소 및 문(門)터 2개소를 확인했다.
한데 당시 조사여건이 최악이었다. 때가 엄동설한이었다. 서영일은 "수북하게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작업을 했다"고 회상한다.
당시 연구소는 수습 유물과 성벽 출토 방식 및 역사지리적 배경으로 보아 설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돼 고려시대까지 성곽으로 기능을 유지했으며 특히 신라가집중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냈다.
이러한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마침내 2001년 8월 22일부터 그해 11월 14일까지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이를 통해 성벽은 6세기 후반 처음 축조된 이래 두 차례개축됐으며 서문(西門)터가 확인되고 성 안쪽에서는 출입시설이, 성밖에서는 등성시설이 확인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 토기가 간간이 섞여 있었으나, 백제가 초축한 성곽이라고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던 설성산성이 올 여름 시작된 2차 조사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과를 안겨주었다. 성 안쪽에서도 가장 넓은 대지 800평을 발굴한 결과 구덩이 10곳과건물터 6곳을 확인한 것.
다른 무엇보다도 발굴단을 경악케 한 것은 구덩이 두 군데서 한성백제 토기 40여점이 떼로 나온 것이었다. 구덩이는 온통 토기로 수북했다.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들 토기 상당수는 가마에서 갓구워낸 것처럼 그릇 형태가 완벽했다.
기종 또한 다양했다. 항아리며 대형 독이며 시루며 하는 것들이 줄을 이어 나타났다. 7호 구덩이에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지의 한성도읍기 왕도에서만 몇 점이 불완전하게 출토된 이른바 완벽한 원통모양 기대가 각종 대형 토기들 사이에 삐죽히 하늘을 바라보며 우뚝 솟아났다.
뿐만 아니었다. 구덩이가 집중 출토된 주변 대지에서는 건물터가 연이어 출현했다. 믿기지 않는 것은 이들 건물터에서 무수한 기와가 확인된다는 사실이었다.
한 건물터에서는 한쪽으로 쏠려 기와가 줄을 이어 내려앉아 있었다. 화재 등 모종의 원인으로 어느 순간 기와건물이 일정 방향으로 붕괴됐다는 증거다.
기와들과 건물은 인근 구덩이 유적 및 그 출토유물로 볼 때 한성백제가 구축한군사용 막사였음이 확실해졌다. 백제가 한성도읍기에 왕도도 아닌, 그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런 지방 산성에도 기와건물을 썼다는 말인가?이러한 발굴성과는 조사단에게는 한여름 폭염과 간헐적으로 몰아친 폭우조차 잊게 할 만큼 흥분의 연속이었다.
1997년 이후 연이은 풍납토성 발굴에서 그 만만찮은 위용을 드러낸 한성백제가마침내 경기도 이천 어느 야산에서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이천 설성산성서 한성백제 토기저장 구덩이 출토
한성백제 기와건물도, 한성도읍기 축성 밝혀져
(이천=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옛 백제 영역 산성을 중심으로 무수하게 확인된구덩이가 실은 토기를 대량 저장하던 용도였음을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설성산성에서 확인됐다.
아울러 군대 막사용으로 추정되는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기와건물도 다수확인됐다.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장 박경식)는 지난해에 이어 6월 10일 이후 설성산정상을 중심으로 계곡을 따라 성곽을 쌓은 포곡식(抱谷式) 석축성(石築城)인 설성산성에 대한 제2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 안쪽 평탄한 대지 약 800평에서 기와건물터 6개소와 기형(그릇 모양)이 거의 완벽한 것을 포함한 토기 40여점을 비롯,다량의 한성도읍기 백제 유적과 유물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유적 출토지 중에서도 구덩이 10곳 중 한성백제 토기를 무더기 출토한 두 곳은이번 발굴내용 가운데서는 물론이고 백제고고학 사상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풍화암반층을 굴착해 만든 '1호 토광'으로 명명된 구덩이에서는 각종 항아리와시루, 굽다리잔을 비롯해 크고 작은 토기가 떼로 확인됐으며, 7호 토광에서는 각종항아리와 대형 독 및 그릇받침 등이 역시 구덩이 한가득 나왔다.
발굴단은 이들 토기는 상당수가 완형인데다 깨진 유물들도 복원이 가능하며,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풍납토성 발굴 이후 한성백제 토기 연구에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와 함께 성곽이나 주거지를 중심으로 그동안 백제 유적에서 다수 확인됐으나그 용도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던 구덩이는 이번 발굴성과로 볼 때 토기 저장을 위한용도로 쓰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게 됐다.
이들 한성백제 토기 중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및 경기 포천군 자작리 유적에서만 몇 점이 확인된 바 있는 원통모양 그릇받침대가 완벽한 형태로 출토돼 비상한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발굴에서는 또 같은 한성도읍기 백제가 쌓았음이 확실한 기와건물이 확인된 것도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풍납토성 발굴 이전까지만 해도 백제가 한성도읍기에 기와건물을 축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빈약했으나, 이번 발굴성과는 당시의 왕성으로 지목되고 있는풍납토성 일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방 거점성인 설성산성에서도 기와건물이 확인됨으로써 이 분야 기존 견해 또한 전면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들 기와건물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풍납토성을 필두로 한 한강유역 초기백제여(呂)자형 대형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것과 아주 흡사한 아궁이 시설이 확인됐다.
이로써 설성산성은 5세기 중반 진흥왕 때 신라가 진출한 이후 신라가 처음으로쌓은 산성이라는 기존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아울러 한국고고학 및 고대사학계에서 오래 통용되던 '백제는 한성도읍기에는산성을 쌓지 않았다"는 기존 통설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설성산성의 첫 축조시기에 대해 발굴단은 "출토 토기로 보아 설성산성은 풍납토성 제4기, 몽촌토성 2기 및 같은 한성백제 산성으로 굳어지고 있는 이천 설봉산성 2기에 각각 해당되는 4세기 후반 무렵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사진 있음>taeshik@yna.co.kr (끝)
<설성산성 발굴토기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김태식 기자 =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장 박경식)가 최근발굴한 경기 이천시 설성산성은 4-5세기 한성도읍기 백제토기를 무더기로 쏟아냈다.
발굴 현장 설명회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은 저장구덩이 두 곳에서 나온 백제토기의 수량과 종류가 풍부하고 완벽한 형태의 유물이 많은 데 놀랐다. 그만큼 설성산성은 후기 한성백제 토기 진열장이라고 할만 했다.
여기에다 발굴단과 현장방문 고고학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토기가 한 점 더있었다. 한성도읍기나 삼국시대 토기를 통틀어 이와 비슷한 출토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명회에서 원통형 그릇받침대에 가려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문제의토기는 발굴단이 올해 조사한 8개 구덩이 가운데 한 곳에서 원통형 그릇받침대 등다른 백제 토기들과 함께 출토됐다.
어찌보면 잔 같기도 한 이 토기는 낮고 두꺼운 원형 굽받침이 있고, 밖으로 퍼져 올라가다가 어깨부분에서 각을 주어 꺾인 뒤 원형 주둥이는 굽어 들어가는 모양새다.
안쪽은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뾰족한 형태를 이룬다. 전체 높이 19㎝로 손아귀에 잡히는 이 토기의 주둥이 지름은 10.5㎝. 토기를 굽는 데 쓴 흙은 모래 알맹이가 섞인 점토이며 회청색 빛깔이 돌고, 손톱으로 긁어도 표면이 벗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발굴단은 크기나 모양새로 보아 음료수 잔 또는 붓통이었을 것이라며 용도를 여러 갈래로 추측했으나 정확한 기능에 대해 아직 결론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붙여진 이름이 받침대가 있는 그릇이라는 뜻의 대부용기(臺附容器)다.
백제가 태동한 기원전 1-2세기부터 한성백제가 멸망한 5세기 후반대 무렵까지의 다종다양한 한성도읍기 백제토기를 풍납토성에서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신희권 학예사도 이런 토기는 풍납토성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점이 더 수상쩍다. 대부용기만 빼면 설성산성 토기가 풍납토성에서모두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수량과 종류가 많다고 해도 설성산성출토 백제토기는 풍납토성 출토품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용기 만큼은 풍납토성에서는 구할 수 없고 설성산성에서만 모습을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발굴단의 궁금증은 커진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에 쓰인 물건이었느냐는 것이다. <사진있음>taeshik@yna.co.kr (끝)
이번 조사에서는 산성 안쪽 평탄한 대지 약 800평에서 기와 건물터 6개소와 기형(그릇 모양)이 거의 완벽한 것을 포함한 토기 40여점을 비롯, 한성도읍기 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대량 발굴된 것. 특히 구덩이 10곳 중 한성백제 토기를 무더기 출토한 두 곳은 이번 발굴내용은 물론 백제고고학 사상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풍화암반층을 굴착해 만든 '1호 토광'으로 명명된 구덩이에서는 각종 항아리와 시루, 굽다리잔을 비롯해 크고 작은 토기가 떼로 확인됐으며, 7호 토광에서는 각종 항아리와 대형 독 및 그릇받침 등이 역시 구덩이 한가득 나왔다.
▲ 저수시설(바닥 출토 후) | |
ⓒ2002 시청 문화공보실 |
이와 함께 성곽이나 주거지를 중심으로 그동안 백제 유적에서 다수 확인됐으나 그 용도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던 구덩이는 이번 발굴성과로 볼 때 토기 저장을 위한 용도로 쓰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게 됐다. 이들 한성백제 토기 중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및 경기 포천군 자작리 유적에서만 몇 점이 확인된 바 있는 원통모양 그릇받침대가 완벽한 형태로 출토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이번 발굴에서는 백제가 쌓았음이 확실한 기와건물이 확인된 것도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풍납토성 발굴 이전까지만 해도 백제가 한성도읍기에 기와건물을 축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빈약했으나, 이번 발굴성과는 당시의 왕성으로 지목되고 있는 풍납토성 일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방 거점성인 설성산성에서도 기와건물이 확인됨으로써 이 분야 기존 견해 또한 전면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로써 설성산성은 5세기 중반 진흥왕 때 신라가 진출한 이후 신라가 처음으로 쌓은 산성이라는 기존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아울러 한국고고학 및 고대사학계에서 오래 통용되던 ‘백제는 한성도읍기에는 산성을 쌓지 않았다’는 기존 통설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설성산성의 첫 축조시기에 대해 발굴단은 "출토 토기로 보아 설성산성은 풍납토성 제4기, 몽촌토성 2기 및 같은 한성백제 산성으로 굳어지고 있는 이천 설봉산성 2기에 각각 해당되는 4세기 후반 무렵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설성산성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돼 있지만 지표조사와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결과 백제 한성 도읍기의 역사고고학과 고대사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적으로 판명되었고, 축성시기는 4세기 후반을 상한으로 설정한다. 연구소 측에서는 국가사적으로 지정,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김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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