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을축년 대홍수 직후 풍납토성 탐방기 발굴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9:53
연합뉴스

을축년 대홍수 직후 풍납토성 탐방기 발굴

 

 

 

김태식 기자 = 1925년 여름 한강 일대를 휩쓴 '을축년 대홍수'직후 일본인 학자가 이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본 경기 광주군 구천면(지금의 서울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일대를 탐방한 기행문이 발굴됐다.

이 기행문은 최근 일련의 발굴 결과 한성 도읍기(BC 18-AD 475) 백제 왕성으로확실시되는 풍납토성에 대한 근.현대 기록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데다 풍납토성과관련한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화재 관련 사료 발굴.연구가인 이순우(40)씨는 1926년 7월에 발간된 격월간잡지 「민족」 제1권 제5호에 실린 일본인 형질인류학자 아오노 켄지(淸野謙次)의기행문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의 백제유적'(朝鮮京畿道九川面風納里の百濟遺跡.

160-161쪽)을 발굴, 최근 연합뉴스에 제공했다.

이 글은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 일대를 휩쓸고 간 직후인 1925년 9월 25일 아오노가 조선총독부 의과대학장 시가(志賀) 박사 및 고등학교 교장 오다 쇼고(小田省吾.

뒷날 경성제국대 교수)와 함께 홍수 피해를 당한 풍납토성 일대를 다녀온 기행문이다.

이 글에 따르면 경주와 평양 등 조선 고도(古都) 탐방에 오른 아오노는 경성(서울) 어느 호텔에서 만난 고건축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박사에게서 며칠 전 발견한 백제 유적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로서 식민통치 초기 조선 고적 발굴을 도맡다시피했던 세키노는 아오노에게 이번 대홍수로 풍납리 마을 강안의 토사가 씻겨내려가면서 형성된 단면토층에서 무수한 백제 토기가 나오고 있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세키노가 아오노에게 전한 말 중에서 특히 두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얼마 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어떤 자가 오래된 동기(銅器) 2점을 팔러왔는데 그 출토지를 물어 조사해 보니, 홍수가 휩쓸고 간 풍납리 강안 단면에 노출된 항아리(壺)의 속이었다는 언급이다.

박물관으로 팔러 왔다는 이 고동기(古銅器) 2점은 각종 기록을 참조할 때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초두 2점(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확실해 보인다.

청동초두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측은 하나만 풍납토성 출토품이며 다른 하나는가야지역 출토품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연구자들은 둘 다 풍납토성 출토품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된 아오노의 기행문으로 미뤄볼 때, 이들 두 청동초두 중 하나, 혹은 두 유물 모두 고고학자의 직접 발굴품이 아니라 구입품이라는 점에서 풍납토성 출토품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게 됐다.

둘째, 세키노가 풍납토성이 공주로 옮겨가기 전 한성시대 백제 도성인 것 같다는 견해를 아오노에게 피력했다는 점 역시 매우 주목된다.

세키노는 당시 식민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고건축.고고학.고미술 분야에서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학계 거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그가 풍납토성이 백제 도성이라는 견해를 지녔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을축년 대홍수 직후 한성 도읍기 백제왕성이라는 일본 학계의 견해가 연이어 제출됐으며 여기에 힘입었음인지 1936년 2월 29일에는 '고적'(지금의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번 풍납토성 기행문 발굴은 '풍납토성=백제도성'이라는 견해가 세키노에게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하지만 "풍납토성이 이렇게 중요한 유적인 줄 알았으면서 조선총독부는 왜 이곳을 조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진 있음>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