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경당지구 전경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의 '경당지구' 중 101호 유구(遺構) 출토 중국제 동전인 오수전(五銖錢)은 동전 크기라든가 '오수'(五銖)라는 글자로 보아, 후한(後漢. AD 25-220))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출됐다.
이는 축조시기를 두고 논란이 뜨거운 풍납토성이 과연 언제쯤 만들어졌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경당지구 발굴조사단인 한신대박물관은 그 발굴성과 중 일부를 정리한 발굴보고서 '풍납토성Ⅵ'를 최근 발간했다. 풍납토성 관련 발굴보고서로는 6번째인 이번 보고서는 경당지구로는 '9호 구덩이' 유적에 이은 두번째 보고서로서, 101호 유구라고 명명한 유적 발굴성과를 정리했다.
전체 2천300평 가량 되는 경당지구 중 서북쪽에 위치한 101호 유구는 지하 문화층 중에서는 중간층의 아래층 정도에서 확인됐으며, 하늘에서 내려다 본 평면형태는 마름모와 오각형의 중간 정도인 부정형이다. 크기는 길이 9.6m, 최대폭 7.1m, 최대깊이 1.25m 가량이다.
풍납토성 출토 오수전 |
특히 '銖'라는 글자의 '朱'(주)자는 약간 각이 져 있으며, '五'(오)라는 글자는 약간 뻗은 채 X자형을 이루고 있다. 직경은 2.45-2.55㎝, 내측 방형은 1.0㎝, 두께는 0.7-1.0㎝였다.
오수전은 한(漢)나라 때 처음 주조되기 시작해 중국에서는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주조되어 사용됐으며, 더욱이 시기별로 형태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번 경당지구 101호 출토품의 경우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銖의 朱자가 위는 모나게 꺾이고 아래는 둥글게 꺾이는 이른바 '상절하곡주'(上折下曲朱)여서 동한대(東漢代=후한시대) 자형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유송대(劉宋代) 이후 주조된 오수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자형을 보이는 예가 있지만 (그것들은) 직경이 대개 1.8-2.1㎝, 심지어는 1.6-1.7㎝ 정도의 소형인데 비해 이것은 2.45-2.55㎝로 대형이므로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따라서 "(서진과 동진의) 양진대(兩晉代)에 오수전 주조가 뜸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 이 유물은 동한의 오수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후한시대 동전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그 유적 연대 또한 이 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데는 반대했다. 권 교수는 "다만 이는 이 유물의 시간적 상한이 될 뿐이고 백제에 유입되어 101호에 묻히기까지의 과정과 기간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라면서, 101호 유적 연대를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했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백제 대옹 |
하지만 11세기 중반에 고려에서 상감청자가 제작되었다고 해서 이를 고비로 왕조가 바뀐 것이 아니듯이, 나아가 같은 논리로 상감청자가 없던 그 이전 시대가 고려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왕조였다고 할 수 없듯이, 학계의 이른바 '원삼국토기'와 '한성백제토기'라는 도식이 학계의 자의적인 구별일 뿐인 데다, 원삼국토기→한성백제 토기의 이행시기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풍납토성의 각종 유적과 유물 연대는 여전히 논쟁의 소지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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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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