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발굴재개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6:56

<"8년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중입니다">

기사입력 2008-03-30 06:37 |최종수정 2008-03-30 09:51

발굴재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재개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8일 낮 한강을 사이에 두고 아차산을 마주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현장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발굴현장 주변을 빙 둘러친 높이 3m 가량 되는 회색 펜스에 난 유일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그 맞은편엔 거대한 흙더미가 쌓여 있고, 주요한 발굴 지점마다 흙을 실어내는 컨베이어 몇 대가 작동 중이었다.

이제야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될 모양인지, 8년 전에 도로 묻은 흙들을 한창 퍼내는 중이었으며 일부 구역에서는 발굴 작업도 병행되고 있었다.

마침 현장방문에서 만난 백제사 전공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컨베이어를 가리키면서 "우리가 발굴할 땐 저런 기계를 갖는 게 꿈이었는데…"라고 부러움을 표시했다.

2000년 경당지구 발굴현장과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는 기자가 "그 땐 저만큼 흙이 많지 않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왜 저렇게 흙이 많으냐"고 물었더니, 한신대박물관 책임조사원인 권오영 교수는 "당시 현장을 복토(흙으로 다시 묻는 일)하고 난 뒤에 외부에서 많은 흙을 가져다 묻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면서 "하긴 저렇게 많은 흙 때문에 조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당지구 발굴은 땅이 녹기 시작한 2월말에 시작했다. 그러니 이날로 꼭 한달째를 맞은 것이다. 작업 진척도를 물으니 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8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중입니다."

이제 겨우 8년 전 조사하다가 중단한 단계로 다시 돌아가 본격적인 발굴채비를 하는 중이라는 의미였다.

8년 전, 그러니까 2000년에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이곳은 한국사회 태풍의 눈이었다. 그 해 5월13일 오전 서울 송파구 풍납1동 136 일대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예정지 초기백제 유적 발굴현장을 재건축아파트 일부 조합원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무단으로 파괴한 것이다. 이 사건 이전에도 거의 매일 경당지구 일대에서는 재건축 아파트의 꿈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주민들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한국고고학 사상 초유의 발굴현장 파괴 사건은 아파트 공사에 앞서 실시한 한신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한성도읍기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이 막대하게 쏟아짐에 따라 아파트 건설의 꿈이 점점 멀어지게 된 사람들이 택한 극단적인 행동이었다.

결국 이 경당지구를 포함한 풍납토성 문제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우여곡절 끝에 '보존이 원칙'으로 결정난다.

이후 경당지구 발굴 현장은 이내 복토가 이뤄지고 한동안 공용주차장으로 이용되다 잔디를 깔아 임시 공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국고와 지방비를 들여 매입한 경당지구 2천300평의 공식 주인이 된 서울시가 이곳을 다시 발굴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해. 경당지구는 한창 발굴조사를 하던 중에 유적 파괴 사건이 일어나 완전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재발굴을 어느 기관이 해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 잠시 있긴 했지만, 원래 조사기관인 한신대박물관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으로 결정났다.

서울시가 경당지구 재발굴 비용으로 책정한 예산은 약 3억7천만원. 이에 한신대박물관은 서울시 의뢰로 지난 2월말에 경당지구에 대한 공식 재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8년전으로 돌아가는 중"

감회가 새로운 지 권 교수는 "벌써 8년이 흘렀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내뱉었다. 나아가 격세지감도 있는 듯했다.

"당시만 해도 하루하루가 발굴장이 전쟁터와 같았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도 풍납동 분위기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조금 있으면 풍납동 주민들의 금요일 정기 집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와는 달리 풍납동 문화재대책위 관계자 분들이 현장을 방문해 주시고 관심도 많이 보여 주십니다. 문화재 때문에 고통받는 이곳 주민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경당지구를 유명하게 만든 백제 종묘 추정 44호 건물터는 여전히 흙더미 속에 잠들어 있었다. 평면 凸자형인 이 건물터는 2000년 조사 당시까지만 해도 그 규모가 13 X 14m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당시까지 노출된 현상일 뿐이었고, 건물터는 조사대상지역 외곽으로 계속 뻗어가는 중이었다.

이 건물터가 지하에 잠자고 있는 현장을 가리키면서 권 교수는 "조만간 흙을 걷어내고 노출시킬 텐데, 올해는 그 전체 규모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건물터 현장 일부에서는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토층에는 백제토기가 곳곳에 박혀 있다. 저런 토층을 걷어내고 나면 그 밑 지하 2m까지 또 다른 백제시대 문화층이 나타난다.

지난 한달간 조사는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지만 경당지구는 벌써 적지 않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백제시대 연화문와당이 처음으로 수습되었는가 하면, 중국에서 수입했음이 명백한 각종 도자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 중국제 도자기 파편 1점을 가리키면서 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풍납토성 발굴 이전까지만 해도, 저런 중국 도자기는 파편 1점만 나와도 한국 고고학계가 떠들썩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곳 경당지구에서는 저런 중국 도자기는 흔합니다. 왜 이런 현상을 보일까요? 중국에서 들어온 수입품 창고가 이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양한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지요."

풍납토성 발굴에 뛰어들기 이전만 해도, 풍납토성이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인 하남위례성이라는 학계 일각의 주장에 일말의 의심을 품었던 권 교수는 더 이상 이곳이 백제왕성터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와당을 포함한 많은 기와, 풍부한 중국제 도자기 수입품, 종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건물터 등등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한신대박물관은 4월말쯤에 1차 발굴설명회를 개최한 다음, 그에서 도출되는 방향으로 조사를 진행해 나갈 방침이다.

다만 권 교수는 "풍납토성에 갖는 불만 중 하나가 현장을 방문해도 볼 것이 없다는 것인데, 44호 건물터 같은 곳은 계속 현장을 공개해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을 관계 당국에서 적극 검토해 주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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