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5)청주 신봉동 유적 上
-
ㆍ도굴로 짓밟힌 무덤서 만난 ‘철강강국 백제’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성백제의 최전성기 때 조성된 청주 신봉동 유적 발굴현장. 도굴의 참화 속에서도 백제 철기군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철제 무기류가 대거 출토됐다. | 충북대박물관 제공
‘숙취 덕분에’ 발견해낸 백제의 역사
그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축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에 오르기로 약속했었죠. 그런데 속이 울렁거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도저히 산에 오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상당산성 답사를 포기하고 (청주) 신봉동·봉명동·운천동의 낮은 야산을 산책 겸해서 둘러보기로 했어요.”(차용걸 교수)
숙취 때문이라지만 이 일대 역시 뭔가 유적이 확인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점심을 얼큰한 칼국수 한그릇 씩으로 때운 뒤인 오후 1시, 세사람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신봉동 야산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난 오후 3시쯤.
“신봉동과 봉명동의 경계에 해당하는 야산을 내려오는데 수상한 기미가 감지됐어요. 무너져 내리는 흙 사이에 뭔가 구멍이 나있는데, 꼭 도굴갱 같은 흔적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토광묘였고, 또 곁에는 파괴된 석실분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도굴갱 곁에서 토기편과 철겸(鐵鎌·쇠낫)편이 흩어져 있었다. 셋은 그것이 삼국시대 고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큰 일이다 싶어 그날 저녁 재빨리 김인제씨(당시 충북 문화재연구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어요. 다음 날 충북 문화재 관계자들이 현장을 즉시 둘러보았고, 저는 이것이 삼국시대 고분이며, 그것도 백제계라는 의견을 냈고요.”
신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김기웅 전문위원을 급파했고, 곧 긴급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사실 이 야산은 뭔가 고분군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지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으로는 우암산성(牛岩山城)이 있는 청주의 진산이 있고, 멀리 상당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북동으로는 평지토성인 정북리 토성이 있고…. 서로는 부모산성(父母山城)이 보이는 등 사방에 걸쳐 삼국시대 성들이 3~4㎞ 이내에 자리잡고 있으니 주변에 고분이 있을 가능성은 높았던 거죠.”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고 이곳이 그 합류지점의 낮은 구릉지역에 있는 곳이니 유적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았던 게지.”(조 관장)
어쨌든 5월15일부터 긴급발굴이 시작되었다. 고분은 토광묘, 수혈식석실묘(석곽묘), 횡혈식석실분 등 고분 3종 세트가 뒤섞여 있었다.
도굴로 갈갈이 찢긴 무덤떼
하지만 이미 수많은 도굴로 인해 갈갈이 찢긴 채 노출되었다.
“대부분의 석실분은 산정상 가까이나 능선을 이루는 비탈면에 있었고 토광묘는 야산 전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곳곳이 도굴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그러나 푸념은 그때뿐. 도굴로 난도질당했음에도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우선 4~5세기 백제 양식을 빼닮은 석실분과 토광묘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토기의 양상이 서울 석촌동·원주 법천리·천원 화성리 등 한성백제 토기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발굴 토기 가운데 가장 특이한 형태는 손잡이(把手)가 달린 잔(그릇)이다.
하지만 말갖춤새(마구류)가 확인되는 토광묘에서 출토된 이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杯)’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82년 발굴조사단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신기하네!” 하고 고개만 갸웃거릴 뿐. 이 신봉동 유적이 중요한 것은 비단 무덤양식이나 토기의 양상 때문만은 아니다. 백제가 강력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말갖춤새와 무기류가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백제 마구류와 무기류가 출토된 예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아주 한정된 무덤을 조사했는데도 말재갈 12점을 비롯, 등자(등子·발걸이)가 확인됐어요. 또 철도끼, 쇠낫, 철창, 철끌 등과 쇠화살촉도…. 이런 마구류와 무기류는 가야 및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차 교수)
물론 철제유물들은 농사를 짓는 데도 사용될 수도 있었겠지만, 말갖춤새가 동반되고, 고대사회에서 찌르는 무기로 사용된 철창과 철끌, 치는 무기인 쇠도끼가 확인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 신봉동 고분은 당대 최전성기를 구가한 백제 철기군 집단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사집단은 군영을 세우기도 하고, 그 경계를 만드는 목책도 세울 수 있고…. 이런 철도끼와 쇠낫, 철끌 등은 무기는 물론 공구로도 사용할 수 있었겠지요.”(조 관장)
1차 발굴은 아쉽지만 도굴로 파괴된 석실분 1기와 토광묘 14기를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다. 유적의 중요성 덕분에 사적(319호)으로도 지정되었다. 하지만 사적으로 지정되면 뭐하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데….
망루까지 갖춘 1200개의 도굴갱
“야산 전체가 무덤으로 뒤덮여 있어 무덤이 도대체 몇 기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관리 감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유적의 범위가 워낙 넓어서 수풀이 우거지면 바로 옆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며, 시가지를 오가는 차량 소음 때문에….”(차 교수)
유적의 상황은 무관심-방치 속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빗물에 무덤이 씻겨 내려가 무덤이 노출되고…. 도굴범이 활개를 치고…. 도굴갱이 무려 1200여개가 생겼어요. 88년 10월에는 도굴범이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하고, 소문에는 금동관을 도굴해 팔아먹었고, 그 금동관이 시중에 나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고….”
오죽했으면 도굴범들이 나무 위에 망루까지 설치해놓고, 마음껏 무덤을 파헤쳤을 정도였을까.
도굴로 만신창이가 된 채 발견된 신봉동 고분 모습(왼쪽). 백제 도량형의 기준이 된 ‘손잡이 달린 잔’.
“할 말이 없어. 정말 한심한 일이야. 지금도 유적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예전엔 더했지.”(조 관장)
1990년 유적이 빈사상태에 이르고서야 겨우 다시 응급발굴에 들어갔다. 보기에도 흉측한 도굴무덤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도굴범들이 싹쓸이하다시피한 고분에서도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졌다.
“A·B지구(각기 충북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구역을 나누어 조사)로 나눠 이뤄진 발굴조사 결과 A지구에서는 토광묘 74기, 독무덤 1기, 토기류 141점, 철기류 176점, 기타 9점 등 총 326점이 확인됐어요. B지구에서는 널무덤 17기와 토기 40점, 무기 및 마구류 106점, 그리고 금동·청동제와 자기류 14점이 쏟아졌어요.”
2400㎖들이 맥주잔?
특별하게 눈에 띈 유물은 역시 82년에도 발견됐지만 용도를 몰라 해석할 수 없었던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杯)’이었다.
“야! 이거 꼭 맥주잔 같지 않아?”
“그래요. 꼭 2000㎖, 3000㎖ 맥주잔 같아요.”
다른 곳에서는 출토 예가 없는 이 커다란 ‘손잡이 달린 잔’이 7점이나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형 ‘맥주잔’을 ‘신봉동식 파배’로 이름 지었고, 이것은 학계에서도 통용됩니다.”
그런데 이 잔은 6차례의 발굴 결과 모두 49점이 확인됐다. 한결같이 5세기쯤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5m가량의 중형급 무덤 이상에서 확인됐다. 이 잔이 확인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른 것들보다 3배나 많았다. 이것은 ‘파배’ 출토 무덤의 신분이 꽤나 높았음을 방증한다. 과연 용도는 무엇일까. 조사단은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혹시 이 잔이 양기(量器), 즉 부피를 재는 백제의 표준그릇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확인된 49점의 파배 가운데 28점이 2400㎖이거나, 2400㎖에 근접했어요. 또한 신봉동 고분과 인근 가경 4지구, 주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리(鉢) 127점의 용적을 계산해보니 500~700㎖들이가 46점으로 가장 많고, 그 가운데서도 600㎖들이가 27점이나 됐어요.”
발굴단에 참여했던 윤대식(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사)은 논문에서 “백제는 600㎖(소형 바리)를 1되로 해서 4되, 즉 2400㎖(파배)를 1말로 계산하는 백제 특유의 용적체계를 주로 쓰지 않았을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2차 발굴에서 또하나 눈에 도드라진 유물은 B지구 1호 무덤에서 나온 갑옷이다.
“도굴범이 얼마나 급했는지…. 갑옷은 교란됐고 완형도 아니지만 견갑과 경갑 조각까지 수습됐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갑옷은 세모꼴과 긴 메모꼴 철판을 주로 해서 대가리가 둥근 못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이걸 삼각판정결판갑(三角板釘結板甲)이라 하는데….”
사실 한성백제기의 갑옷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뼈로 만든 소찰(小札)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금석문이나 문헌에서는 백제 갑옷의 존재는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자.
“광개토대왕이 보기병 5만을 파견, 1만여령의 갑옷을 획득하고….(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所獲鎧鉀一萬餘領~.)”
이미 광개토대왕 17년(407년)때 백제가 이미 다량의 갑옷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명광개(明光鎧)·금갑(金甲), 철갑(鐵甲) 등 화려한 백제의 갑옷을 지칭하는 기사가 속출한다.
백제 철기군 집단의 위용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하도 오래 사용해서 닳아버린 말재갈이나 등자, 철도끼가 확인된다는 것. 부러진 도끼를 삼베로 묶어 재사용한 것도 있었다. 이것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덤의 주인공이 쓰던 무기와 공구를 그대로 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야산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은 10%도 안된다. 수백기 아니 수천기의 고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2차 발굴 때에는 금동제 귀면장식조각편과 금동 가는고리 귀고리, 청동 귀고리 등이 토광묘에서 확인됐다. 싹쓸이하다시피한 도굴의 와중에 남아있었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혹 금동관이라든가, 금동신발은 없었을까.
그동안 무자비한 도굴에 속수무책으로 속살을 열어버린 신봉동 고분군. 얼마나 많은 중요한 유물들이 도굴됐는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유물이 땅 속에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한 도굴이 자행됐음에도 남아있는 유물의 양상만으로도 초기 한성백제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신봉동 고분의 주인공들이 묻혔던 시대, 바로 그 4~5세기 때의 한성백제는 철강강국이었다는 것. 그 철강기술로 최첨단 무기를 제작, 최전성기를 이뤄 고구려를 끊임없이 압박했다는 것. 이제 청주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과연 한성백제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한번 백제 최전성기인 근초고왕대로 돌아가보자.
<청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6) 청주 신봉동 유적 下
-
ㆍ철강제국 백제를 낳은 鐵기술의 산실
“속이 확 트이네.”
조유전 관장(오른쪽)과 차용걸 교수가 정북동 토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기가 바로 정북동 토성입니다.”
이런 곳에 토성이라니. 금강 최대의 지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이른바 까치내의 상류 너른 평야지대에 조금은 생뚱맞은 자세, 즉 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평지토성이다. 강(미호천)과 접해 있고, 조성된 해자(垓子)와 입지조건….
청주에 있는 풍납토성
성을 둘러보던 기자는 왠지 소름이 돋는다.
“이거 풍납토성, 육계토성과 비슷한 입지가 아닌가요?”
한강변에 붙어있는 풍납토성은 물론, 임진강변 파주 적성 주월리에 남아있는 육계토성과 상당히 흡사한 토성이 아닌가.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라는 것이 이제 정설로 굳어졌지만, 육계토성의 경우도 초기 백제 때 초축한 성이라는 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한강·임진강변에 조성된 한성백제기 토성과 흡사한 성이 금강 지류인 미호천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토성 뒤편 멀리 우암산성과 상당산성이 있는데, 이것은 풍납토성을 품에 안고 있는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을 연상케 합니다.”
정북동 토성과 관련해서는 후백제 견훤이 상당산성을 빼앗아 성문 바깥 까치내 곁에 토성을 쌓은 뒤 창고를 지어 세금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상당산성 고금사적기’·1744년)
그런데 충북대박물관이 1997년부터 토성을 정식 발굴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진다.
금강 지류인 미호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정북동 토성. 한성백제는 AD 2~3세기 이곳에 성을 쌓아 근거를 마련하고, 철강강국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작은 사진은 조사전 모습. <중원문화재연구원 제공>
“성벽의 잔존 높이는 5.5m(외부), 3.5~4m(내부)였고, 성벽의 총 둘레는 675m 정도됐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었어요. 정북동 토성의 축조기법을 살펴보니 백제 풍납토성과 흡사하지 않겠어요?”
즉, 나무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판자를 댄 뒤 그 속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축조해나가는 판축(版築)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백제토기편이 출토되는데,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백제시대 때 축조한 해자를 완전히 메우고 건물지를 조성한 흔적이 나오는 겁니다. 한성백제 때 축조된 토성이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성의 기능을 잃고 다른 목적으로 활용됐다는 증거죠.”(차용걸 교수)
그랬다가 전설에서처럼 후삼국 시대 견훤이 토성을 다시 쌓고 창고로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토성의 축조연대는 AD 2~3세기 무렵이다. 왜 신봉동 유적을 말하면서 정북동 토성을 갖다 붙이는가. 신봉동에 묻힌 백제 철기군의 위용이 신봉동 고분의 축조시기인 4~5세기 때 홀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함이다.
동북아 철기교역의 주역
이미 청주와 충주 일대에는 정북동 토성을 비롯, 수많은 백제 유적이 속출했다. 백제 철기군의 공동묘지인 신봉동 유적은 한성백제 최절정기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 철기제작의 전통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역시 지근거리인 송절동 유적과 봉명동 유적에서도 이 지역의 철기제작 기술을 증거하는 각종 마구류(말재갈)와 철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송절동은 AD 2~3세기, 봉명동은 3~4세기, 신봉동은 4~5세기로 편년됩니다. 그런데 송절동에서도 화살촉·창·칼·끌 등 철기류가 나왔고, 봉명동에서는 중국 동북방과 고구려의 4세기대 것과 비슷한 형태의 마구류가 보입니다. 이것은 특히 가야초기의 마구류와도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봉명동 유적에서 확인된 마형대구.
즉, 재갈이 움직이지 않게 양 옆에 대는 장치인 표비(표비·재갈고삐)의 이음쇠(引手)는 지금의 중국 차오양(朝陽) 위안타이쯔(袁台子)묘와 번시(本溪)의 진묘(晋墓), 안양(安陽) 샤오민툰(孝民屯) 154호 등에서 보이는 선비 및 고구려 계통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차 교수가 또 강조하는 것은 봉명동에서 나온 마형대구(馬形帶鉤·말모양의 띠고리). 이 마형대구는 봉명동에서 20점 출토됐다. 그런데 마형대구는 경기도 안성과 천안 청당동, 충남 연기, 청주 송대리, 경주 조양동, 김해 구지로 등에서도 보인다. 이것은 당대 백제가 낙동강 유역을 통해 가야와도 교역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3~4세기부터 백제가 북으로는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 및 고구려와, 남으로는 가야, 멀게는 일본과 교역해왔음을 방증해주는 것입니다. 당시가 백제의 전성기임을 이 중원권 유적들이 웅변해주고 있어요.”
한반도 중원의 패자
그렇다면 삼국사기 등 사서를 통해 당대의 이곳 상황을 고고학 성과와 맞춰보자. 누차 강조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으면 우리 고대사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일본서기 등 외국의 사서만 인용할 경우 왜곡 소지가 많았음을 수없이 목도해왔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청주(淸州)는 통일신라시대 때 서원소경(西原小京)→서원경(西原京)을 개칭한 것이며, 서원은 혹은 비성(臂城) 혹은 자곡(子谷)이라 한다”고 했다. 즉, ‘서원경=청주=비성=자곡’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보면 이 ‘비성’과 ‘자곡’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AD 63년 다루왕이 땅을 개척해서 낭자곡성까지 이르렀다. 이때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백제본기 다루왕 36년)
충주에서 확인된 철정(철괴).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정을 연상시킨다.
백제와 신라는 AD 76년까지 와산성을 두고 빼앗고 뺏기는 혈전을 벌인다. 이 일련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백제는 이미 1세기 중엽 이후 청주를 함락시킨 뒤 지금의 보은지역인 와산성을 끊임없이 공격한 것이다. 보은은 청주에서 약 50~60㎞ 정도 남쪽에 있다. 76년 이후 백제-신라 양국의 다툼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66년 다시 등장한다.
“166년 신라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갔다. (아달라)왕이 그를 신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백제가 거절했다. 왕이 군사를 냈지만 백제는 성을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신라본기 아달라왕 12년조)
다시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0년, 백제가 신라 서쪽 국경인 원산향(圓山鄕·경북 예천)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군위)을 에워싸니 신라장군 구도(仇道)가 막았다. 우리(백제) 군사가 짐짓 물러나니 구도가 와산(蛙山·보은)까지 쫓아왔지만 우리(백제) 군사가 크게 이겼다.”(백제본기 초고왕 25년)
이 기록으로 추론하면 190년 무렵에는 이미 보은 지역까지 백제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는 286년, 그러니까 고이왕 53년(신라 유례왕 3년) 화친을 맺을 때까지 괴곡(槐谷·괴산)과 봉산성(烽山城·경북 영주로 비정)을 중심으로 자주 다퉜다. 하지만 공격하는 쪽은 백제였고, 괴롭힘을 당한 쪽은 신라였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왜가 신라를 침략했을 때(295년) 신라 유례왕이 “백제에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했지만 한 신하가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 늘 신라를 집어삼킬 것이니 생각도 하지마라”고 경고했을까.
어떻든 백제-신라간 싸움은 여기서 일단락되고 554년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독차지할 때까지 260년가량 평화를 유지한다. 이 청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은 그동안 대체로 백제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 사이 백제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영광(전성기 구가·3~4세기)과 치욕의 역사(한성백제 멸망·475년)가 교차한다.
근초고왕과 철정
야금야금 남으로 밀고 내려온 백제는 정북토성을 쌓고 이후 절정의 철기 제작술을 발휘, 강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2세기대 이미 보은 지역까지 내려온 백제는 고이왕(재위 234∼286년) 때 최강국의 기초를 닦는다.
봉명동 유적에서 출토된 마구류. 고구려와 선비, 가야 등과의 교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즉,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낙랑을 치는(246년) 등 위세를 떨친다. 무엇보다 6좌평제와 16직제를 마련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킨다. 마형대구와 마구류 등이 쏟아진 청주 봉명동 유적이 바로 이 고이왕대부터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백제의 위세를 잘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그러나 역시 백제의 최절정기는 바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때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를 동북아 최강자로 키웠잖아요. 이견이 만만치 않지만 중국 사서인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등 중국사서에 백제가 랴오시(遼西)지방을 공격하고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고….”(조유전 관장)
봉명동 출토 마구류와 마형대구에서 보이는 교역의 흔적은 고이왕~근초고왕대에 이르는 강대국 백제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무엇보다 근초고왕은 동북아 강국의 표상이던 고구려를 빈사상태로 내몬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雉壤·황해 배천)에 쳐들어왔다. (근초고)왕이 태자(근구수왕)를 시켜 지름길로 달려가 급히 쳐부수고 5000명의 목을 얻었다. 371년 정예병 3만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쳤을 때 고국원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백제본기 근초고왕 24·26년조)
이쯤해서 재미있는 자료 하나 추가. 지난 2006년 충주 탄금대 토성을 발굴한 차용걸 교수는 깜짝 놀랐다.
바로 5개씩 8묶음, 즉 40개의 철정(鐵鋌)이 확인된 것이었다. 철정은 금괴와 마찬가지로 철제품의 재료가 되는 철괴. 차 교수의 뇌리를 스친 사료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서기 신공기 46년조(366년)였다.
“사료를 보면 근초고왕은 왜의 사신에게 오색채견(五色綵絹) 각 한 필과 각궁전(角弓箭), 그리고 철정 40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5개씩 8묶음이 40개잖아요. 우연치고는 재미있지 않나요.”(차용걸 교수)
철정, 즉 철괴의 하사는 선진국 백제=철강강국임을 마음껏 과시한 것이 아닐까. 차 교수는 바로 이 무렵, 근초고왕이 철정 40개와 함께 그 유명한 칠지도(七枝刀)를 왜왕에게 하사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3~5세기 철강강국 백제를 만든 철의 생산지는 어디일까.
“지난 2006년 철정이 나온 충주 탄금대 입구에서 4~5세기대의 제철 유적이 발견됐어요. 충주와 진천, 청주, 보은 등은 예로부터 철광으로 유명합니다.”
조유전 관장이 운을 뗀다.
“자, 고고학 자료로 한번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봉명동·신봉동에서 출토된 철제무기와 마구류를 보면 오래도록 사용해서 닳았거나 재활용한 흔적들이 보이잖아요. 시대도 고이왕~근초고왕 시기를 아우르고….”
상상은 기자의 몫. 신봉동·봉명동 유적은 청춘을 전장에서 보내고 고이왕~근초고왕 때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역전의 노병들이 묻힌 바로 그곳이 아닐까. 고구려군을 쫓아 지름길로 달려갔고, 평양성을 치던 백제 철기병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청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考古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0) | 2009.03.28 |
---|---|
한성백제시대 '도깨비' 와당 출토 (0) | 2009.03.28 |
3세기 영종도는 국제무역기지? (0) | 2009.03.28 |
무령왕릉이 캐낸 땅 속의 백제 (0) | 2009.03.28 |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을 가다 (0) | 2009.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