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무령왕릉이 캐낸 땅 속의 백제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5:12

무령왕릉이 캐낸 땅 속의 백제

기사입력 2009-02-25 17:07 |최종수정 2009-02-25 17:12

무령왕릉(본사자료)//(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한국사시민강좌' 백제사 특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을 내걸었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이런 원초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백제사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까지 척박함을 면치 못했다.

무령왕릉(본사자료)//(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이뤄진 무령왕릉 발굴은 이기동 동국대 교수의 다음 말처럼 백제사 연구에 아연 활기를 불어 넣었다.

"마침내 1971년 7월 충남 공주 송산리의 웅진시대 백제왕릉 계곡에서 마치 기적처럼 무령왕릉이 전혀 도굴된 흔적이 없는 처녀분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실로 오랫동안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크나큰 자극 속에 비로소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고고학에서 시작된 백제사 연구의 '혁명'은 풍납토성으로 이어졌다.

백제문화의 진수 금.은.동 사리기 발견 (부여=연합뉴스) 김준호 기자 = 24일 충남 부여 문화재연구소에서 공개된 금.은.동 사리기. 부여 왕흥사지목탑지 심초석 사리공에서 발굴된 사리기는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사리함에서는 왕흥사 창건과 관련된 명문기록이 확인됐으며,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도 다량 발견됐다. kjunho@yna.co.kr

이 교수는 풍납토성 발굴에 대해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를 갖고 보더라도 이곳이 몽촌토성을 훨씬 능가하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이곳에서는 건물터와 더불어 수백 점이 넘는 다양한 와당을 비롯하여 5천여 점의 평기와류가 출토되고 있으므로 도성 유적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고 평가했다.

무령왕릉과 풍납토성 사이에도 의미 있는 백제사 발굴은 많았다. 부여 능산리 유적은 금동대향로와 백제 창왕명(昌王銘) 석조 사리감을 토해 냈다. 최근에는 부여 왕흥사지에서 역시 창왕이라는 이름을 적은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는가 하면,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무왕 시대에 이 사찰을 창건한 내력을 담은 같은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도서출판 일조각이 역사 대중화를 표방하며 내는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 올해 상반기 호(통권 44집)가 '최신 발굴자료로 본 백제사'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사리장엄 (서울=연합뉴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리장엄. 사리장엄은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2009.1.19 << 문화재청 >>

이 교수가 백제사 연구 흐름을 고고학 발굴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풍납토성(이남규 한신대 교수), 고고학 자료로 본 초기 백제의 성장(김기섭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웅진왕도와 사비도성(서정석 공주대 교수), 백제의 농경생활(이현혜 한림대 교수), 무령왕릉(권오영 한신대 교수), 백제금동대향로(이내옥 국립대구박물관장), 왕흥사지 사리장엄구(길기태 국가기록원 연구사)와 같은 개별 유적, 혹은 유물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

이 교수는 "백제사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ㆍ신라ㆍ가야 등 여러 동료국가들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열세를 면치 못한 채 가장 불우하고 연구가 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면서 "이번 특집은 이런 백제가 고고학 발굴을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과정들을 정리한 셈"이라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