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을 가다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5:10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을 가다

기사입력 2009-03-01 10:00 |최종수정 2009-03-01 14:48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난징시(南京市)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발굴 현장. 전형적인 전축분인 이 고분은 조사단인 난징시박물관에 의하면 3세기 후반기 축조로 생각된다. 후실(왼쪽)에 시신을 매장했으며, 그 앞에 전실(前室.오른쪽)을 따로 마련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중국서 찾은 풍납토성과 무령왕릉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육조(六朝) 고도 난징(南京) 중심부를 떠나 서남쪽 외곽 드넓은 평야지대 한복판을 시원스럽게 달리던 왕복 4차선 신설 고속도로가 갑자기 얕은 황토 둔덕 앞에서 막힌다. 그 둔덕 위로는 슬레이트 가건물이 버티고 섰다.

둔덕 너머 왼쪽과 오른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두 산이 놓여 있다.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난징시(南京市)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발굴 현장. 전형적인 전축분인 이 고분은 조사단인 난징시박물관에 의하면 3세기 후반기 축조로 생각된다. 후실(왼쪽)에 시신을 매장했으며, 그 앞에 전실(前室.오른쪽)을 따로 마련했다. 묘문에서 바라본 모습. << 문화부 기사참조 >> photo@yna.co.kr

지난 달 말 고고학 전문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의 육조문화 탐방단을 이곳으로 안내한 난징시박물관 마타오(馬濤) 연구원은 왼쪽이 황룡산(黃龍山), 오른쪽이 청룡산(靑龍山)이라고 설명한 뒤 가건물을 가리키면서 육조 중 손권(孫權)이 건국한 동오(東吳)시대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 발굴 현장이라고 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끝난 지점에서 150m 가량을 걸어 발굴현장에 도착하니 마 연구원은 안전헬멧을 쓰라고 했다.

가건물 내부는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그리 넓지 않을 듯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500-600평은 됨 직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전축분이 길게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섰던 아치형 건물 2채가 막 지하로 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아치형 지붕 2곳은 모두 뻥 뚫려 있었다. 고속도로 건설 중에 파괴된 흔적이라고 했다.

육조시대 전형적인 전축분 양식, 즉 무덤방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만들고 지붕은 궁륭형(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점에서 이 고분 또한 예외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다른 면모가 엿보였다.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난징시(南京市)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발굴 현장. 전형적인 전축분인 이 고분은 조사단인 난징시박물관에 의하면 3세기 후반기 축조로 생각된다. 후실에 시신을 매장했으며, 그 앞에 전실을 따로 마련했다. 후실에서 묘문 밖을 바라본 모습. << 문화부 기사참조 >> photo@yna.co.kr

무덤 주인공을 안치하는 공간인 현실(玄室)을 북쪽에 둔 점은 여느 전축분과 마찬가지지만, 이와 거의 똑같은 규모인 전실(前室)을 그 전면에 별도로 만든 점이 특이했다. 나아가 현실인 후실(後室)과 전실을 합친 규모가 길이 20.16m에 폭 10.71m에 달했다.

같은 육조시대 전축분인 공주 무령왕릉 현실이 길이 4m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무려 5배에 이르는 규모다. 뿐만 아니라 이 전축분은 전실과 후실 양쪽 벽 중앙에다가 각각 이실(耳室)이라고 하는 움푹 들어간 아치형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이를 감실(龕室)이라 하며, 각종 부장품을 넣는 기능을 했다고 마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런 규모는 현재까지 발굴된 육조시대 전축분 중에서는 최대다.

남쪽 중앙에 마련한 묘문(墓門)을 통해 전실로 가기 위해서는 묘도(墓道)라는 아치형 굴을 지나야 했다. 묘도는 요컨대 무덤의 복도나 마루인 셈이다. 묘문 앞쪽으로는 묘실(墓室)에 스며드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도 확인됐다.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난징시(南京市)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발굴 현장. 전형적인 전축분인 이 고분은 조사단인 난징시박물관에 의하면 3세기 후반기 축조로 생각된다. 후실에 시신을 매장했으며, 그 앞에 전실을 따로 마련했다. 전실 안에서 묘문 밖을 바라본 모습. << 문화부 기사참조 >> photo@yna.co.kr

전실과 후실 네 귀퉁이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소머리'가 벽면에 박혀 있었다. 그러니 이 고분에서 이런 '소머리 장식'이 모두 8개가 된다.

검은 빛이 완연한 청색 계열인 벽돌 벽면에 비해 이들 소머리 장식은 황색이 특히 두드러졌다. 무엇 때문에 각 벽면 모서리마다 이런 장식을 했을까?

마 연구원은 "등불을 놓던 시설물"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등잔대인 셈인데, 그런 기능은 일부 '소머리 장식' 상면에서 그을음이 발견됨으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등잔대 시설은 무령왕릉뿐만 아니라, 같은 중국식 전축분인 송산리 6호분에서도 발견됐지만, 이 백제 고분들에서 등잔을 놓던 곳은 각 벽면을 파서 만든 감실 구조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육조 전축분 발굴현장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난징시(南京市)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발굴 현장. 전형적인 전축분인 이 고분은 조사단인 난징시박물관에 의하면 3세기 후반기 축조로 생각된다. 후실에 시신을 매장했으며, 그 앞에 전실을 따로 마련했다. 후실과 전실 각 모서리에는 소머리형 등잔대를 하나씩 설치했다. 난징시박물관 마타오(馬濤) 연구원이 발굴성과를 설명하고 있다.2009.3.1 << 문화부 기사참조 >> photo@yna.co.kr

이미 발굴은 완료를 한 상태인 까닭에 현장에는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후실에는 여전히 튼튼함을 자랑하는 각종 목관 부재와 그것을 올려놓기 위해 바닥에 깐 석조물이 그대로 있었다.

마 연구원에 따르면 목관은 모두 3기가 발견됐다. 중앙에 놓인 관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그 양쪽에서 작은 관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중앙에 안치된 사람은 신분이 아주 높은 남자일 것이며, 그 양쪽에 묻힌 사람은 그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관을 얹어 놓았던 석조물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긴 돌을 이용했다. 한데 그 양쪽 끝에는 용이나 호랑이로 생각되는 짐승 머리를 조각했다.

마 연구원은 이런 관대(棺臺) 시설과 소머리형 등잔대는 모두 중국에서는 처음 확인된 사례라고 설명했다.

동오시대 전문도기(錢文陶器)(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장쑤성 난징시 강녕상방(江寧上坊) 유적에서 2006년에 출토됐으며 현재 난징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유물 안내판에는 '청자전문대개관'(靑瓷錢文帶盖罐)이라고 했다. 청자로서 동전무늬를 마치 띠처럼 두른 뚜껑 있는 항아리라는 뜻이다. 동전무늬를 넣는 전통은 종래에는 서진시대 강남지역에서만 유행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그 중심 제작연대가 동오시대로 급격히 올라간다. 이런 전문도기는 한반도에서는 특히 백제유적에서 자주 출토되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는 완형만 6점이 보고되기도 했다. <<문화부 기사참조>>/2007-01-17 11:17:42/ <저작권자 ⓒ 1980-200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이곳에서는 어떤 유물이 출토됐을까?

마 연구원에 의하면 유감스럽게도 이미 두 차례 큰 도굴을 만나 무덤 규모나 격식에 비해 출토유물은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각종 도자류와 도기(陶器), 도용(陶俑), 금속제품 등의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물들 중에서 이번 탐방단의 관심을 특히 끈 것은 이른바 전문도기(錢文陶器)라고 해서 동전 무늬를 잔뜩 넣은 도기류와 허리띠 장식품 중 하나인 은제(銀製) 장식이었다. 전문도기는 서울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필두로 백제 유적에서 활발히 출토되기 시작했으며, 은제 허리띠 장식 또한 풍납ㆍ몽촌 두 토성에서도 중국 남조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유물이 확인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난징 상방(上坊)유적 손오묘(孫吳墓)' 출토 청자류 중 일부 역시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꽤 많은 숫자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이번 탐방단을 이끈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최몽룡 교수는 "풍납토성이 보여주는 백제의 문화는 간단히 말하면 국제화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 국제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육조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서 "그런 생생한 증거들을 우리는 이 손오묘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이 손오묘를 비롯한 중국 남조의 전축분 문화가 백제에서는 마침내 무령왕릉 축조로 출현하게 된다"면서 "우리가 보는 것은 중국 남조문화이면서 동시에 백제 문화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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