藏風得水(風水論)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吾心竹--오심죽-- 2009. 3. 26. 21:04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16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도선(道詵)은 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혹은 최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 해안지방은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던 곳으로 당의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도 다른 지방보다 빨리 이 지방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도선이 자라면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선은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불경을 공부하여 4년 만인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다.
이때부터 수도 행각에 나서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哲)을 찾아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의 선승(禪僧)들은 가르침을 베푼 스님의 인가를 받으면 그 스님을 떠나서 혼자서 전국 각지의 명산대첩을 떠돌아다니며 고행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산하에 대해서 많은걸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지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사들이 대부분 스님이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한반도 산천의 순역(順逆)을 삼국도(三國圖)로 그려 작성하였다. 이것은 산수의 형세에 따라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작성한 삼한(三韓)의 지도다.
신라말기 혼란기에 지방호족들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명당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세력 확장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주 중심의 전통적인 신라의 국토관(國土觀)이 와해되고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갔기 때문에 도선은 신라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 국토에 비보사찰을 건립하고 허약한 땅에는 탑을 세웠다.
그는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와 다른 한국의 자생 풍수다.
현존하는 풍수지리 이론서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발간된 것들인데 땅을 고쳐 쓸 수 있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도선은 이 비보풍수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결함이 있는 땅은 사찰을 세우거나 탑을 세워 보완 해 주었다.
이러한 비보풍수는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제(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 하자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말하기를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뻗어내려 와서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로 만들고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도선의 말처럼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장차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도선은 왕건과 밀접한 관계로 도선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왕건은 서기 918년에 태어나 943년에 죽었기 때문에 도선(827년-898년)하고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이는 도선이 명당을 점지해주어 그 발복으로 고려가 삼한 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을 내세워 고려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도선 국사가 풍수설을 누구한테서 배웠는가 하는 설은 여러 학설이 있다. 도선이 죽은지 252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최유청이라는 사람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도선이 출가하여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이상한 이인(異人)에게서 배웠는데 그 이인은 도선에게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을 보여 주면서 풍수를 전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인 장일행(張一行)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일행(一行)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 당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의 이조판서에 해당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라는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으로 벼슬을 버리고 입산 수도하여 천문지리에 정통한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 현종의 칙명으로 승 홍사(泓師)와 함께 진나라 사람 곽박(郭璞)이 저술한 금낭경(장서)을 해석했는데 산수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실제 사례를 드는 실증법(實證法)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국토를 남쪽부터 북쪽까지 위도를 측량하여 <구당서(舊唐書)>, <율역지(律歷志)>, <천문지(天文志)>를 저술하였으며,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양자강 유역은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황하의 중상류 지역은 용문지지(用文之地, 학자가 많이 나오는 땅), 사천과 산서 지방은 용무지지(用武之地, 무장이 많이 나오는 땅)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는 등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선은 신라 덕흥왕 2년(서기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서기898년)까지 살았고, 일행은 당 현종 때 인물(서기 712년-756년)로 도선과는 약 100년 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또 도선 전기(傳記)에도 당나라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선이 당나라에서 일행한테서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서적>
이몽일 저 `한국풍수사상사` 명보문화사
신광주 저 `정통 풍수지리 원전 1권` 명당출판사
최창조 저 `한국의 자생풍수 1권` 민음사
한동환, 성동환, 최원석 공저 `자연을 읽는 지혜(우리 땅 풍수기행)` 푸른나무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 민음사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국역진호설(國域鎭護說)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국역진호설이란 국가 영토의 기운이 과한 것은 진압하고 결여된 것은 보호해준다는 뜻으로 도선국사의 독특한 학설이다. 아래 내용은 도선국사실록에 소개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중간(重刊)된 것이며 저자 미상이다.
문장은 한문이며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저자명을 밝히지 않고 조선조를 아조(牙彫)라 표현한 점으로 보아 조선조에 들어와서 작성된 것이며, 문장에 능통하지 않은 자가 민간에 전하고 있던 도선 설화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이 책은 영조 19년에 중간된 인본(印本)으로서 당시 민간 신앙계에 이 국역풍수 신앙이 중추를 이루고, 많은 신봉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도선이 가난한 조선을 구제하고 바람기를 빼고 방기(邦基, 나라의 기초)를 굳게 하여 백성을 안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행주(行舟, 항해하는 배)같은 것이고, 태백산 금강산이 그 머리이고, 월출산, 영주산이 배 꼬리이며, 부안의 변산이 그 타( :배의 방향을 잡는 키)이다. 영남의 지리산은 배의 노이며, 능주의 운주산이 선복(船腹, 배의 중앙부분)이다.
그런데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건이 있어 배의 머리와 꼬리 등과 배를 눌러 주어야 하고, 타즙( 楫, 키와 배 젖는 기구)으로 진로를 잡아야 선체가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서 위험한 곳을 진압해야 한다. 특히 운주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아래 완연규기(  糾起, 지세가 꿈틀거리듯 일어나는 곳)하는 곳에는 별도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설치하여 그 등과 배를 실하게 하였다. 또 금강산과 월출산에는 탑을 건조하여 정성을 다했다. 이 두 산이 행주(배)의 수미(首尾, 배 머리와 꼬리)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압(鎭壓)을 끝낸 도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 여정에 올라 팔도강산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선은 국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을 둘만한 곳은 절을 세웠고, 절을 둘 만한 곳이 아니면 부도(부처)를 세우고, 탑을 세울 곳이 아니면 불상을 세우고,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고, 비뚤어진 곳은 바로 세웠다. 또 월출산 천왕봉 아래에 보제단(普濟壇)을 설치해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 복을 기도하고 재앙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 후 조선의 지리에는 변화가 나타나 산의 흐름은 계곡이 아름답게 되고 지맥이 꿈틀거리는 곳이 변하여 부(富)를 모으게 되고 나라에 분쟁의 우환도 없이 사람들이 한탄할 일도 없었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도, 조선조가 북방을 개척해서 육진(六鎭)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운이 발전한 것도 이 도선의 진호(鎭護)의 힘에 연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