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강동구 삼국시대

吾心竹--오심죽-- 2009. 1. 23. 12:40

한강유역은 현재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의 중서부 일대로서 한강하류의 강북·강남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시기에 따라 그 중심부나 포괄지역이 바뀌고 있지만, 대개 백제수도로서의 위례성 부근인 서울-광주권을 지칭하는 것이 통례였다. 선사시대에는 한강하류 일대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지였고, 백제시대(한성시대)는 현재의 서울 강동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 동남부 일대와 광부 부근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북으로는 양주일대와 남으로는 남양만의 당항진까지를 포함하는 한반도의 중서부를 지칭하였다.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한강유역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그 포괄지역이 예성강 일대까지 이르렀으나, 당시의 정치적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 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강유역은 서울 일원의 수도권으로서 정치적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백제 한성시대(漢城時代)의 강동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그 남북에 위치한 지금의 서울 지역은 옛날부터 선인들의 생활의 터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가 도읍을 설치하고 나라를 세웠던 곳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살펴보면 북부여를 떠난 주몽이 졸본부여에 정착한 후,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나, 이들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함께 남하했다. 그 후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 인천)에, 온조는 신하 10명의 보익(輔翼)을 받으며 위례(慰禮)지역(서울 강남)에 정착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강유역의 지리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북·동·남의 산악으로 보호받는 분지속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산재하고 있어 생활무대로나 취락형성에 적합한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곧이어 비류가 죽으면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온조에게 귀의하였고, 이때부터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도읍을 정하기 위해 온조왕이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 겠다’하여 천도한 곳은 한성(漢城)이었다. 그런데 시조 온조왕조에서 도읍으로 정한 곳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 건국설화 속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란 한성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즉 하남위례성에서의 하남(河南)에 있던 한성은 하남위례성이란 표현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의례한 욱리하(郁里河)·아리수(阿利水) 등과 같이 한강의 동명이기보다는 책(柵)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의 의미 또는 왕성(王城)·대성(大城)을 위미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성으로의 천도는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즉 성을 쌓고 대궐을 갖춘 도성체제를 이룬 것이다. 또한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 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함으로써 왕도의 인구를 분산시킴과 동시에 왕도를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성들을 축조해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런데 근초고왕대에 다시 한번 이도(移都) 기록이 보이고 있다. 바로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다. 앞서 한성(漢城)과는 달리 천도란 표현을 쓰지 않고 이도(移都)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영구적인 천도가 아니라 일시적인 이도(移都)였다고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도성은 모두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을 도성 주위에 두고 있어 도성과 산성이 하나의 처제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에서도 평지성인 한성과 산성인 한산성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왕도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은 위례성(慰禮城)→한성(漢城:하남위례성)→한성(漢城)+한산성(漢山城)으로 변화하였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의 한성시대 후기는 백제의 역사상 일대 격동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계속하고, 백제의 개로왕(455~475)의 패전과 뒤를 이은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남북으로 국력을 확충하던 고구려는 이곳에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이를 남평양으로도 호칭하였다. 평양을 수도로 하던 고구려는 서울지방을 남쪽의 한 도읍지 또는 백제·신라를 제압하는 거점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잇따른 왕위계승 분쟁과 이에 따른 진씨(眞氏)·해씨(解氏)·목씨(木氏) 등의 유력한 정치세력의 발호로 인하여 왕권은 극도로 약해지게 되었다.

백제가 대외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하공세에 밀려 한강유역에서 패전을 거듭한 시기는 진사왕대부터이다. 진사왕 8년(392) 고구려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상실하였고, 아신왕 5년(396)에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듯이 한강유역에 있는 58성 700촌을 고구려군에게 공취당하였다.
이에 아신왕은 쌍현성을 축조하는 등 고구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으나 기대하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재위 14년만에 죽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책을 강구하였다. 신라와는 비유왕 7년 (433) 에 맺은 나제동맹체제를 기본축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였고, 개로왕 원년(455) 에는 신라의 원병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동왕 7년에는 왕제 곤지를 일본 하내의 긴비조에 파견하여 유사시에 청병을 대비하여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으며, 물길과도 연합하여 고구려 측변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고구려 봉쇄망을 형성하려는 백제의 전략은 도리어 고구려를 자극시켜 그 침입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개로왕 24년(475)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쳐 왕도인 한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백제는 영토의 손실과 함께 막대한 인적ㆍ물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개로왕 자신뿐 아니라 태후ㆍ왕자들이 고구려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8천여 명의 인민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 일대를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

고구려 세력의 강동지역 진입

고구려세력의 한강유역 진입으로 한강유역이 삼국의 각축전에서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고구려는 475년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당하기까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진출을 위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반까지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까.

4세기 초 요동지방에 대한 진의 행정력이 약화되어 모용씨가 요동지방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중원으로의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4세기 전반 고구려도 요동으로의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으며, 후조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 사이에 있는 모용씨에 대한 협공을 논의 하였다. 따라서 모용씨의 전연은 중원으로의 진출을 위해 고구려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국원왕 9년 (339) 과 12년 (342) 에 전연왕 모용황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국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선왕 (미천왕) 의 묘가 파헤쳐졌으며 왕모와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요동 진출 노력은 좌절되었고, 이후 40여 년간 고구려는 요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고구려는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비옥한 농경지를 끼고 있거니와 인구조밀지역이기도 한 한반도 중부지역에 대한 장악을 시도하였다. 반면 백제는 4세기 중엽부터 국력이 크게 팽창하는 단계에 올라서게 되었으므로, 그 힘은 남쪽의 영산강유역과 동쪽의 낙동강유역에 각각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판세에서 백제의 힘은 자연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와의 대결로 집중되는 양상을 띠었다.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유역 진출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척 번째는 고국원왕 39년 (369) 에 고구려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근초고왕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수곡성 북방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41년에 재차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패배하고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고구려 한강유역 진출의 두 번째 단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로 약 1세기 동안의 기간에 양국은 예성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신라간의 관계가 백제 독산성주의 신라 도망사건을 계기로 하여 갈등을 빚게 되었고, 새로이 고구려-신라간의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면서부터 백제공격에 나섰다. 광개토왕은 즉위 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를 건너 백제왕성을 공격하니 백제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 고 맹세하였다.

고구려에 의해 국도가 공격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백제는 왜ㆍ가야등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백제는 아신왕 6년 (397) 왜에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왜와의 연합을 구체화시켰다.
이어 백제는 몇 차례 고구려 침공을 기도하였고 왜ㆍ가야 연합군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케 하였으나, 광개토왕의 반격으로 오히려 고구려군이 신라ㆍ가야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후에도 백제는 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인 대방군 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은 중국방면에서의 정치적 안정으로 인하여 西進에 한계를 느끼고, 동왕 15년 (427) 평양천도를 통하여 남진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우호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5세기 후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우호적인 관계가 구체화됨에 따라 양국을 번갈아 가며 공격하는 등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5세기 말까지의 전투양상을 『삼국사기』에서 추출해 보면 대백제전이 4회, 대신라전이 8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라의 이탈을 경계한 고구려가 신라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삼았음을 짐작케 한다.
장수왕 43년 (455)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이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하면서 시작된 양국의 군사동맹은 이후 자비왕 18년 (475) 장수왕의 백제 공격시에 신라가 1만명의 구원병을 파견해 주었고, 또한 장수왕 69년 고구려의 신라 침입시에도 백제가 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파견하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백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하여 고구려에 대한 봉쇄전략도 추진하였다.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에 따른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 일으켰다. 격분한 장수왕은 63년 9월에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인 연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장수왕은 그 63년에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69년에는 신라를 침범하여 미질부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백제ㆍ신라에 군사적 압박을 계속해 나갔다.

한강유역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 나ㆍ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백제가 되찾은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가 점유하였다. 임진강유역에서 한강유역에 이른 지역에서 최근 많은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임진강유역에는 강북으로 여러 곳의 산성과 토성이 마주보고 있으며, 이중 강 북안에서는 호로고루와 당포성, 무등리성, 은대리성 등의 고구려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한강 북안의 고구려 유적은 아차산 일원에서 확인되는데, 초기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하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로 축조되었으며, 나중에는 북상하는 백제와 신라를 맞아 대항하던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지표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은 15개소에 달하는데, 조사전에 파괴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많은 수의 유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 고구려 보루는 한강 북안에 여해 있는 구의동보루에서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고 있으며, 멀리 망우리 일대를 통하여 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능선상의 작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석축 성벽을 쌓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군사용 막사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축조되어 있다. 이들 보루들은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2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구의동보루 발굴 당시 유적 아래쪽 능선에 목책 구덩이로 보이는 시설이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각 보루는 목책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의동유적은한강 북안에 위치한 고구려의 군사요새 중의 하나로 주변에 선사시대 유적은 물론이고 아차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가락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등의 삼국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은 원형의 성벽과 그 내부의 건물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의 남쪽 두 곳에는 네모나게 밖으로 돌출된 곳이 있다. 이들 돌출부는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이 돌출부 시설은 한강이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가리키고 있으며, 고구려 성광에서 흔히 보이는 방어시설인 치와 같은 기능을 하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는 7기가 확인되었다. 모두 장방형 편면으로 벽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았고, 그 위에 맛배식 지붕이 덮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1호 건물지는 유적이 가장 남쪽에 있으며, 다른 건물지와는 달리 장축이 동서 방향이며, 다른 건물들보다 1.5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온돌 주변에서 1점의 명문토기를 포함하여 30여 점의 토기와 많은 양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3호 건물지는 이 유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지이다. 건물지의 네 벽은 모두 할석과 점토를 섞어서 쌓았으며, 동벽 가운데에 문을 달았던 문비석이 1점 놓여 있어서 이곳에 주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은 백제 한성시대 (기원전 18년 ~ 서기 475년)의 중요 거성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성곽이나 성내부 시설물들은 대부분 백제에 의해 축조되고 사용된 것이지만, 토성의 서남지구 고지대에서 고구려의 온돌 건물이 조사되었으며, 고구려토기도 다수 출토되었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나팔입항아리는 전형적인 고구려 중기의 양식으로 5세기 중ㆍ후반 경으로 편년된다. 반면에 구의동보루나 아차산 4보루에서는 모두 실용기가 출토되는데, 이러한 점은 몽촌토성에 거주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점은 몽촌토성에 거주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하다. 즉, 몽촌토성에는 구의동이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 유적보다는 비우 있는 인물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군사적인 성격 이외의 행정관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474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은 백제의 개로왕을 아차성 밑에서 살해한 후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계속 남한강유역으로 남하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에 리는 고구려의 남진은 임진강유역과 한강유역에 걸친 방어선을 뚫고 이루어진 것으로 5세기 후반에는 한강을 건너 한강 남쪽의 한성백제 중심지를 차지하게 된다.

신라의 강동지역 진입

신라는 지증왕ㆍ법흥왕대에 이르러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진흥왕대 (540~576) 에는 정복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신라의 진흥왕대는 고구려의 안원왕ㆍ양원왕ㆍ평원왕대에 해당하는 시기로 왕위계승 문제 국력이 쇠약해져 있던 시기이다.

백제는 성왕과 위덕왕대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영토회복을 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강 상ㆍ하류의 고구려의 영토를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지역마저 차지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나아가 백제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타 가야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광범위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 고구려는 와위계승 문제로 왕실의 내분이 일어나 국내정세가 불안한 시기였다. 한편 이 무렵 백제는 성왕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밖으로 양에서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으며, 왜와도 친선을 두터이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는 가야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았다. 이는 모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가 되는 곳으로 이 지역의 확보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를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된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현을 탈취 하였고, 백제는 평양을 격파하였다. 이번 군사행동에서도 역시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을 먼저 공파하자, 신라는 그 승세를 타고 죽령 이북의 10군을 공략한 것이다.
6세기 전반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극복한 시라 세력의 팽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551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파악되는 단양신라적성비이다.
이 비는 신라가 6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엔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안양 지역을 공취하고 적성산성을 경영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백제가 공취한 지역에 대해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조에 한성ㆍ평양 등의 6개 군을 취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지역일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옛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나제 동맹군이 한강유역에 진출함으로써 고구려의 대 나 ㆍ제 전선은 중원 고구려비의 건립 이후 최대로 북상되었다. 더욱이 양원왕 8년(552) 부터 벌어진 서부 및 북부 국경선 방면에서의 거란ㆍ돌궐과의 압력과 분쟁으로 고구려는 더욱 여력이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수 유역을 분할 점령하였으며, 2년 뒤인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백제는 대가야군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554년 백제는 대가야군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554년 나ㆍ제간의 관산성 회전은 나제동맹 와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며, 이후 신라의 한강유역 영유는 부동의 기정사실화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확보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진흥왕 16년(555) 에는 왕이 친히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지었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진흥왕의 북한산비는 이 때에 세운 것이다.

동왕 18년에는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동왕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16년(594) 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이렇게 자주 주를 폐하고 설치한 것은 주의 주치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데,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을 실질적인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며,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신라의 북변을 참입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유는 경제적ㆍ군사적 팽창의 계기가 되어 대가야정벌로 결실 되었다. 더구나 한강 유역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 있어서 최후로 당군을 축출시킨 곳으로 통일신라는 한강유역에 큰 정치적 비중을 두었다.
신라는 통일후 정치적 안정에 따라 한강 유역에 대한 관심이 지역적 범위를 넓혀 갔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의 또 다른 정치ㆍ군사적 의미는 바다를 통한 대중 통로의 확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나 백제는 이 지역을 상실한 후 당항성을 통한 신라의 대중 통로를 번번이 차단하였던 것이다. 활동을 통해 국가를 수호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항상 서해안 일대를 봉쇄하여 신라인의 대중교섭을 저지하려 했다.
따라서 한강유역의 정치ㆍ군사적 의미를 궁가 흥망의 관건이라고 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한강유역이 지닌 정치ㆍ군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서울특별시 강동구 지역은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을 한강 남쪽에 쌓아 수도를 삼으면서 정치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위례성은 강동구와 인접한 몽촌토성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강동구와 인접한 하남시 이성산성·춘군동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설 등이 있어 왔다. 근래에는 몽촌토성 근처의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진척되면서 풍납토성 일대에 백제 초기의 도읍이 자리잡았으리라는 주장이 각광을 받고 있다. 백제 초기의 수도가 어디에 위치했었던지 강동구는 백제 초기의 수도 내지 수도권에 속하였던 것이다.

온조왕은 즉위한 지 14년이 되는 해에 수도를 ‘한산(漢山)’으로 옮겼는데 이를 『고려사』지리지에서는 남한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도 16년에 ‘한산’으로 천도하였는데 『고려사』지리지에서는 이를 남평양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가 남한산성으로 천도한 시기는 명확치 않지만 그러한 사실은 인정해도 될 듯 싶다. 남한산성 천도는 이후 남한산성과 그 북쪽 지역(하남시 춘궁동)이 이 일대의 중심지로 떠오르도록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백제의 왕도(王都)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고 대신 고구려가 한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강동구 지역은 고구려 남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변화하였다. 그후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 북진의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인 문무왕 때 한강 일대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으며, 중간에 남한산주로 고쳤다가 경덕왕 15년에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한주의 영역은 한강 이남은 물론 이북도 아우르는 광범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이 한주의 중심 지역은 ‘광주(廣州)’로 불려졌으며 읍치는 강동구의 남쪽에 맞닿는 하남시의 춘궁동 일대 혹은 남한산성으로 여겨진다. 강동구 지역은 넓게는 한주, 좁게는 광주의 중심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마을과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별말 : 벌판에 있는 마을

골말 : 벌말 동쪽 골짜기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

분토골 : 갈분처럼 흰 흙이 많이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

성안말 : 성내동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자연마을과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곡교리(곡교, 곱은다리, 가운뎃말) : 마을 앞에 굽은 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굽은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곡교라고 하였으며, 여러마을 중에 한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가운데 마을이라고도 함

당 말 : 마을 뒤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당말 또는 한자명으로 당촌이라고 한다.

벽동말 : 벽오동 나무가 있었으므로 벽동말이라 하였다.

 

 

 

 

 

 

자연마을과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갯물(갯모루) : 개(한강)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갯모루 또는 갯물이라 한다.

넘말(새능말) : 산너머 있는 마을. 인조때 수찬 임숙영(任叔英)의 묘를 크게 썼기 때문이라 한다.

볕우물 : 백제 온조왕 36년(18)에 토성을 쌓고, 볕우물토성이라 하였으므로 볕우물 또는 양정이라 한다.

복지말 : 1957년에 월남 피난민을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고 복을 받은 마을. 1957년에 이석겸(李錫謙), 김재홍(金在弘) 두 사람이 월남 피난민들을 위하여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고 복을 받는 마을이란 뜻으로 복지말이라 한다.

섬 말 : 예전에 마을 앞에 못을 파고 섬을 만들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한자명으로 도촌(島村)이라 한다.

점 말 : 도자기를 만드는 점(店)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때부터 궁궐에 쓰일 그릇을 구워 냈던 곳으로 광주분원과 함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하다.

어묫골(우묵골, 우목골) : 성종 때 직제학 정성근(鄭誠謹)이 부모 묘소에다 여막을 짓고 6년을 시묘하다가, 성종이 죽자 3년을 더 있었으므로 여묫골이 함. 여묫골이 변하여 우 묵골 또는 우목골이라고도 한다.

참 앞 : 하진참(下津站)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참앞 또는 참전이라 함. 참(站)이란 길을 가다 쉬는 곳으로, 하진참은 광나루에 있었던 뱃참이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물화의 운반이 한강을 통하여 다녔으므로, 이곳에 참을 대게 되었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자연마을과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재울(가재골) :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마을로 가재울 또는 가재골이라 한다.

고더기 : 거덕리가 변하여 붙여진 마을

미역골 : 고덕동에 있는 마을

방죽말(방축종) : 방죽이 있는 마을

비석말 : 세조 때 이조판서 여효첨(魚孝瞻)의 신도비가 있었으므로, 비석말 또는 비석촌 이라 한다.

한우물 : 마을 가운데 있던 큰 우물이 있는 마을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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