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하남시 이성산성

吾心竹--오심죽-- 2009. 1. 23. 12:20

이성산성-국가사적 제 422호


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삼국시대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서 성벽의 높이가 약 5m이고 둘레는 약 2km 정도이다.지금까지 남아있는 많은 산성 중에서도 이성산성은 입지(立地)나 성을 쌓는 방법의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의 주변지역을 한 눈에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좋고, 위치상으로 배후의 평야지역과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점에 있다. 또한 이성산성에서 서쪽으로 5km 지점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남쪽으로 5km 지점에는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이유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해 근래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성산성과 춘궁동을 이미 조선시대부터 백제의 도읍지로 비정하여 왔다.
그러나 1986년부터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10여차례에 걸친 조사결과 이성산성은 백제성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난 이후에 쌓은 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굽이 낮은 고배류와 항아리, 인화문토기 등 신라 토기와 경질의 기와가 대부분이다. 아직까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지만 현재까지의 출토 유물로 볼 때, 이 산성이 백제유적임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며, 오히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신주를 설치하는데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성벽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성돌로 쌓은 2차 성벽 안쪽에서 장방형의 성돌로 쌓은 1차 성벽이 확인되었다. 1차성벽이 무너지고난 이후 그 바깥쪽에 다시 성벽을 덧붙여 쌓은 것이다. 성벽조사 과정에서 다락문이라고도 하는 현문식(懸門式)의 성문과 치(雉)도 확인되었다. 성내에는 평면적이 80평이 넘는 대형 장방형 건물 4개소를 포함하여 8각, 9각, 12각 건물지 등 20여개에 달하는 대규모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이성산성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산성 중에서 성내에 가장 많은 건물이 있었던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9각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8각 건물은 토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성내에 거주하는 군사들의 식수해결을 위해 돌로 쌓아 만든 네모난 형태의 저수지가 확인되었고, 쇠나 흙으로 만든 말을 부러뜨려 묻어놓은 신앙유적도 조사되었다. 이성산성의 주된 사용시기는 6세기 중반에서 8세기까지이며 9세기 중엽에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미사리 선사유적지-국가사적 제 269호


미사리 선사유적지는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는 움집터, 화덕, 저장구덩이를 비롯하여 토기,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움집터에서는 집안팎에서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화덕이 발굴되었다. 미사리 유적에서는 도토리와 같은 나무 열매도 나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뾰족밑으로 빗금무늬, 생선등뼈무늬, 점줄무늬, 손톱무늬 등이다. 석기는 화살촉, 그물추 등이 출토되었으나 낚시바늘은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미사리 신석기 사람들은 낚시보다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의 미사리 유적에서는 37기에 달하는 움집터와 소형 저장공 34기, 불땐자리 등이 조사되었고 유물은 토기류 외에 토제품으로는 어망추와 방추차가 발견되었다. 석기류는 간돌검, 반달칼, 돌도끼, 석촉 등이 출토되었고 그 밖에 정교한 상아색의 석제 방추차와 장신구로 사용된 옥 파편 등도 발견되었다.
미사리 유적에서는 선사시대 뿐만 아니라 역사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와 백제시대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움집터와 고상식건물 저장공 등이 있다. 주거지 내부의 시설로는 화덕이 발견되었다. 화덕의 등장은 주거지의 구조와 난방 및 조리에 획기적인 발전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의 유구는 제일 윗층에서 확인되었는데, 사람이 살던 주거지와 저장공, 고상식 건물 등이다. 특히, 이 유적지에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밭이 조사되었다. 백제시대의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있는데 주로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덕풍동에서도 시가지 우회도로 공사를 하던 구간에서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 2기와 무문토기 조각, 석촉, 반달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미사리 선사유적 이외 다른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유적이 나타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는 백제시대의 토광묘, 신라시대의 석곽묘 등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특히 토광묘는 미사리 백제시대 밭 유적 출토 이후 하남시에서 발견되는 2번째 백제시대 유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토광묘에서는 원저단경호 1점, 심발형토기 1점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교산동 건물지 -향토유적 제 5호


교산동 건물지는 오래전부터 자연석의 대형 초석이 줄을 서서 지표면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관심을 끌어오던 중, 일부 향토사가들로부터 이 건물이 한성백제의 왕궁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하남시에서는 이 건물이 어느 때의 건물이며 건물의 용도는 무엇인지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완료하였다.
발굴결과 교산동 건물지는 시대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창건 또는 중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중심 연대는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시기는 9~12세기로 몽골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이며, 둘째 시기는 15~17세기로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광주읍치가 하남시 고골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겨가기 이전까지이다.
교산동 건물지의 발굴조사 면적은 약 3,000여 평이였는데 건물 모양은 ‘ㄷ’자 형태의 3~5회 중복 양상을 나타내었다. 건물지에서는 주름무늬병편 및 막새류를 비롯한 청자, 백자편이 출토됨으로써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건물이 존재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유물의 연대는 9~10세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8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유물은 없는 듯하다. 기와는 고려시대가 주류이고 토기는 도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출된 유구는 가옥이나 사찰 건물로 보기에는 규모 및 평면상 적합하지 않았으며, 또한 사찰과 관련된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건물은 입지의 성격과 규모, 배치, 출토유물 등을 감안해 볼 때 관에서 사용하던 관영 건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제기되었다. 그 이유는 교산동을 위시한 고골 일대가 고대로부터 광주지역의 중심 치소(治所)의 위치와 같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광주객사(廣州客舍)’라는 글씨가 쓰여진 기와가 출토된 것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 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와, 인근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는 증언이 있어 교산동 건물지가 광주객사인지는 아직 단정하지 않고 있다.

 

 

<검단산 등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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