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27 14:32 http://blog.naver.com/ilong4u/140002073061
출처 : chosun.com
실평수 25평형 고급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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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기를 비롯한 수많은 초기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단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왔다.
유적과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모았던 게 20평이 넘는 대규모 건물터와 기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주춧돌이었다.
총 19기의 건물터 중 상당수는 일반 민가로 보기 힘들었다. 규모가 가장 큰 건물터는 실평수가 25평에 달했고 기와와 전돌, 주춧돌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일반 민가가 아닌 관공서 같은 공공건물이 분명했다. 어떤 건물터는 기둥과 서까래, 보같은 목조건물이 고스란히 불타 내려앉은 상태로 발견됐다.
더구나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분석 결과는 물론 출토된 목탄 및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 대부분 축조 시기가 기원 전후로 나왔다. 한반도에서 기원 전후 시기에 목조 기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을 곧 왕성이 아닌 다른 건물로 생각하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음에도, 더구나 그것들이 곧 왕성임을 증명해줄지도 모르는 중요성을 지닌 것들이었음에도 이곳은 보존되지 못하고 곧 아파트가 들어서고 말았다.
일부 학술단체와 언론이 보존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으나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다만 풍납토성이 아주 중요한 백제 초기 성터라는 학술적 성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발굴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이 발굴이 있은 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99년 6∼9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성벽 발굴이었다. 풍납토성 보존정비 계획의 하나로 서울시가 의뢰한 성벽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맡았다.
발굴단은 원래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라 보았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성벽은 높이 5m가 될까 말까 했고, 너비는 맨 아래쪽이 기껏해야 20m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을 잘라가던 발굴단은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규모에 놀랐다. 형편없어 보이던 성벽이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성벽이 백제 당시보다 많이 깎였을 터이고 또한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이자 연못인 해자까지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백제 당시 성벽은 대단한 규모였음이 드러났다.
더구나 절개한 성벽 단면을 살펴보니 단순히 흙만 쏟아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뻘층을 깐 다음 10㎝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켠 한켠 쌓아올린 판축토성임이 밝혀졌다. 비록 두 군데 밖에 잘라보지 않았지만 풍납토성이 한강과 바로 맞닿은, 구릉 하나 없는 평야지대임을 감안할 때 둘레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을 같은 수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거대한 성벽을 치밀하게 쌓았다면 그것을 왕성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하남위례성 문구가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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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발굴성과에 대한 설명회는 그 해 9월13일에 있었다. 언론과 관련 학자들에게 돌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도자료에는 “이로써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보도자료를 손질하는 과정에 이 구절은 빠졌다. 하남위례성이라는 단어를 뺀 주인공은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굵직굵직한 국가 주도 발굴 작업은 거의 모두 지켜본 문화재연구소의 산증인과 같은 사람이다.
성벽발굴 의미를 모를 리 없던 그가 보도자료를 손질하던 마지막 순간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뺀 이유에 대해 스스로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하남위례성이라고 발표해버리면 자칫 이것이 국가의 공식 의견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성벽발굴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될 개연성이 가장 큰 곳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영향을 우려해 말을 극도로 아낄 뿐이었다.
어떻든 발굴단은 풍납토성의 성벽이 여기서 출토되는 경질무문토기 같은 유물들로 보아 이르면 기원 전후에 축조에 들어가 늦어도 기원후 200년 쯤에 끝났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보도자료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말이 빠졌지만 풍납토성 축조시기에 대한 이런 발표는 폭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건 아닌건 상관없이, 이 성을 쌓은 주인공인 백제는 늦춰 잡아도 200년쯤에는 이미 확실한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200년 경에 폭 40m, 높이가 적어도 9m 이상 되는 토성을 3.5㎞나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또 이런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발굴단의 이런 발표는 지금까지 한국고대사 연구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국고대사학자 대다수는 백제가 풍납토성 같은 거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고대국가가 된 것은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 이후라고 보고,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백제와는 구별되는 다른 사회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단 발표는 아울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가 기원전을 18년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부여족 갈래인 온조집단에 의해 건국됐고, 이미 기원을 전후한 즈음에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절대왕권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늦어도 서기 200년 쯤에 풍납토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이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9월13일 개최한 성벽발굴 현장설명회에서 조유전 문화재연구소장이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빼는 대신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봉론자로 꼽히는 이종욱 교수(서강대)를 초청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교수는 ‘삼국사기’를 초기 기록까지 대폭 연구 자료로 수용해, 백제는 고이왕대 훨씬 이전에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날 현장 설명회에는 몇몇 원로 사학자와 원로 고고학자도 참가했다. 기자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들 원로학자들은 고이왕 이전의 백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다 해도 한강 유역에서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차지한 동네 국가였다고 보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성벽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삼국사기’를 믿을 수밖에 없겠는데…”라고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물론 박순발 교수(충남대 고고학과)처럼 풍납토성이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 축조가 끝났을 것이라는 발표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축조시기는 일러야 3세기 초·중반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되살아나는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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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사실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국사교과서나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통해 배운 백제는 서기 270∼280년쯤 제8대 고이왕대에 들어서서야 국가다운 국가, 이병도식 표현을 빌리자면 고대국가에 들어섰다.
이렇게 고이왕 이전 백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고대사학이나 고고학의 분위기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고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왕권국가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짜라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사학은 서기 300~400년까지 한반도 중부 및 남부지방은 변변한 국가가 없는 원시미개사회로 설정했다. 왜가 4세기 이후 6세기 즈음까지 한반도 남부 어디엔가에 임나일본부라는 조선총독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어 놓고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것도 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고대 한반도에는 신라나 백제 같은 강력한 국가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고대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식민사학자들은 서기 300년 이전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득실대던 이른바 삼한 78개 국가 중 사로국(斯盧國)과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국 역사기록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을 신주단지 모시듯했다.
이렇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태도는 국내학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이다.
물론 풍납토성이 서기 2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연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풍납토성이 이 때쯤 축조 완료된 것이라면 ‘삼국사기’말고 이런 백제의 힘을 설명할 만한 자료가 달리 없다는 점이다.
기자는, 풍납토성을 취재하는 동안 우리 학자들이 보여준 행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단행본이건 논문이건 우리 학자들이 쓴 머리말에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동학(同學)들의 지도편달(혹은 질정)을 바란다”는 것이요, 둘째가 “이번 논고(論考)에서 다루지 못한 이 문제는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요, 셋째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른 학문 분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편달, 즉 채찍질을 바란다고 해놓고선 자신의 학설이나 주장을 비판하는 ‘동학’에게는 발끈하다 못해 사이가 틀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필자가 약속한 ‘별도의 논고’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출처] [펌] 한국판 폼페이-풍납토성-3|작성자 짜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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