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하남위례성과 풍납토성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20:38

풍납토성 한국 고대사

2004/11/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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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風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鄕土서울 第62號
*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申 熙 權*
1. 머리말
2. 河南慰禮城 관련 諸說 검토
(1) 河北慰禮城說
(2) 漢城說
(3) 河南慰禮城 위치 비정 諸說
3. 河南慰禮城과 風納土城
(1) 河南慰禮城의 입지와 風納土城
(2) 風納土城의 연구 현황
4. 風納土城을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1) 風納土城內 주요 시설물
(2) 風納土城의 구조와 축조기법
5. 맺음말
1. 머리말
百濟時代는 일반적으로 遷都 과정에 근거하여 漢城百濟時代, 熊津百濟時代, 泗 百濟時代의 3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 글의 고찰 대상이 되는 漢城百濟時代라는 의미는 곧, 漢城을 都城으로 한 百濟時代로 볼 수 있겠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백제의 도성이 漢城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백제의 첫 도읍지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條의 첫 도읍지로 기록되어 있는 '河南慰禮城'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백제사를 시대구분할 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慰禮城時代'가 아닌 '漢城時代'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慰禮城=漢城'이라는 등식에 당연히 동조하고 있던지, 그렇지 않으면 이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던지 둘 중의 하나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 역시 온조왕조의 作都 기록에 등장하는 '하남위례성'과 「百濟本紀」 곳곳에 간헐적으로 사용된 '한성'은 비록 명칭은 다르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동일한 백제시대의 첫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백제의 첫 도성인 하남위례성의 실체를 접근하고자 함에 우선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필연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한성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 하남위례성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설정된 '(河北)慰禮城'의 문제 또한 간략히 짚고 넘어갈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백제사의 시기 구분을 포함한 제반 사실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三國史記』 또는 그와 유사한 범주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三國志』 등 中國의 문헌 기록에 대한 나름대로의 수용과 비판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原典의 글자 하나하나에 착목하여 나름대로 객관적인 해석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였으며, 때로는 그것을 관련 기록들과 연관지어 다소 비약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가 하면, 종국에는 개별 연구자의 입장에서 당시 史家의 입장을 편의적으로 재단하여 저마다의 역사관과 시대관을 강요하기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수 천년 전의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는 데는 당연히 위와 같은 원전 분석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역사 복원 작업은 거의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성백제시대와 관련하여서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학자들의 개인적 성향 또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설들이 주장되어 왔으며, 이미 문헌 기록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성과가 다량 축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필자는 기존의 문헌사적 접근에서 비롯된 한계를 벗어나 최근에 진행된 일련의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그야말로 백제사 연구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하남위례성의 위치 비정에 대한 문제부터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근래에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입장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며, 그러한 연구 성과 또한 기존의 백제사를 새롭게 인식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예를 들어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실시된 夢村土城의 발굴조사 결과는 그동안 문헌 기록에 치중해 왔던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사례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1986년부터 최근까지도 계속적으로 발굴조사되고 있는 하남시 二聖山城 또한 이 분야 연구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한편 비록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이후의 것으로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하남시 校山洞土城의 발굴조사 역시 고고학적인 고증을 통해 백제 초기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대적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발굴조사의 결과가 오히려 기존의 역사학적 입장을 공고히 하는 데 역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정적인 요소 또한 없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고고학적 자료의 제약이라는 한계에서 노정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되며, 최근에는 그것을 극복하기에 충분할 만한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기에 앞으로 더 활발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선 서울특별시 송파구 風納土城의 발굴조사는 이제까지 생각할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최근 풍납토성을 통해 드러난 고고학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다시피 한 백제시대의 첫 王城 또는 都城인 '河南慰禮城'의 실체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우선 이 글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남위례성의 위치 비정 문제를 둘러싼 문헌사학적 또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는 가운데 필자가 생각하는 각각의 문제점을 짚어보려 한다. 그 후 현재로서 하남위례성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되는 풍납토성의 현상과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최근의 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밝혀진 한성백제시대 첫 왕성으로서의 제 조건들을 검증하고자 한다.
2. 河南慰禮城 관련 諸說 검토
(1) 河北慰禮城說
『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는 온조왕 즉위년조에 등장하는 '하남위례성'이라 볼 수 있다.
)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 기록에는 작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百濟始祖溫祚王 …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 溫祚都河南慰禮城 …"
그러나 初都地로서의 하남위례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河南'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慰禮城' 또는 '河北慰禮城'을 별도로 상정하고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조선말의 실학자 茶山 丁若鏞을 들 수 있으며, 이후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茶山 丁若鏞이 『與猶堂全書』6 「疆域考」'慰禮考'에서 이와 같이 주장한 이래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河北慰禮城'의 실체를 의심없이 받아들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왕 13년과 14년조에는 원년조에 등장하는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 사실을 묘사하는 상세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 十三年 春二月 …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 必將遷國 …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都久安之計 … 秋七月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 定彊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 九月 立城闕 … 十四年 春正月 遷都.
원년조의 기록을 13년과 14년조의 사실을 소급 기록한 것으로 보는 위와 같은 견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가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굳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도성 혹은 왕성의 존재를 '하북위례성'이란 다분히 추론적인 개념으로 상정하고 그 실체를 고증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온조왕 14년조의 천도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천도 이후에 사용된 '위례성'은 곧 '하남위례성'이 되어야만 하고, 상식적으로 '하남위례성'에 대응하는 '하북위례성'의 존재 역시 천도 이전의 것만 인정 가능하다. 그러나 천도 이전의 기록에서 '하북위례성'의 단서를 찾고자 할 때는 안타깝게도 온조왕 8년조 말갈의 침입 기사만 나타나고 있어
) 八年 春二月 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실제로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료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현재의 상태에서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논하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이다.
물론 온조왕 13년조 이후의 '위례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닌 '하북위례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온조왕 17년 봄 "낙랑이 침입해와 위례성을 불살랐다"
) 溫祚王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는 기록과 41년 2월 "위례성을 수리하는 데 漢水 동북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였다"
) 四十一年 …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는 기록이 그러한데,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기록이 바로 '위례성'이 '河南'보다는 '河北'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즉, 온조왕 14년조 하남 천도의 주된 배경으로 낙랑과 말갈의 위협을 들 수 있는데, 불과 4년이 지난 온조왕 17년에 낙랑이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위례성을 강을 건너서까지 불사르고 돌아갔을까 하는 점과 강 이남의 도성을 수리하는 데 굳이 강 동북 모든 부락의 장정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라는 점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기사에서는 그나마 위례성의 '하북'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또한 다분히 심정적인 추론일 뿐 결정적으로 '하북위례성'의 존재를 입증시키는 증거로는 보기 곤란하다.
한편 이상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河北'과 '河南'의 '河'의 위치 또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물론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온조왕 원년조와 13년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남과 북의 경계가 되는 '河'를 '漢水'로 인정해 왔으며, 또한 '한수'는 곧 오늘날의 '漢江'임을 당연한 전제로 삼고 있다. 이렇듯 한강을 경계로 한 '하남'과 '하북' 위례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하북위례성'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자는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한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여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북위례성'의 후보지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곳은 크게 두 곳으로 압축할 수 있다. 앞서 茶山이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가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三角山 東麓에 있다"고 함으로써 대부분의 문헌 연구자들이 삼각산 동록설을 따르게 되었으나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위례성의 흔적으로 볼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된 바가 없다.
이후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주장된 '하북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서울 동대문구·중랑구·성동구 일대의 中浪川 유역을 들 수 있다. 이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土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전하며,
) 朝鮮總督府, 『大正五年度 朝鮮古蹟調査報告』, 134쪽.
중곡동 일대에서 백제시대 石室墳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한국 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1권, 886쪽 '서울중곡동고분'(崔夢龍).
이에 차용걸, 성주탁, 최몽룡·권오영 등의 고고학자들이 이 일대를 '하북위례성'의 강력한 후보지로 주장하였고,
漢城期 百濟의 城郭
鄕土서울 第62號
漢城期 百濟의 城郭
鄕土서울 第62號
車勇杰, 「慰禮城과 漢城에 대하여(1)」 『鄕土서울』39, 1981, 50∼51쪽. ; 成周鐸, 「漢江流域 百濟初期城址硏究」 『百濟硏究』 14, 1984, 128쪽. ; 崔夢龍·權五榮,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1985, 89∼90쪽.
이후 김기섭·이도학·김윤우 등
) 金起燮, 「百濟前期 都城에 관한 一考察」 『淸溪史學』 7, 1990, 59쪽. ; 李道學,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 『韓國上古史學報』 9, 1992, 33∼34쪽. ; 金侖禹,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考」 『史學志』 26, 1993, 77쪽.
소장 문헌사학자들이 대거 중랑천 유역설을 뒷받침하였다.
이 밖에 소수의 의견이나마 洗劍亭 계곡 일대,
) 李丙燾, 「慰禮考」 『韓國古代史硏究』, 1976.
北漢山城
) 金廷學, 「서울近郊의 百濟遺蹟」 『鄕土서울』 39호, 1981.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 한편 최근에는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의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백제 왕실의 계보와 연관된 것으로 양자가 시간적 천도 과정에 의한 동일한 왕계의 도성이 아니라 '하북위례성'을 古爾系의 王城으로, '하남위례성'을 溫祚-肖古系, 곧 伯濟의 건국지이자 왕도로 보아 온조왕 13년조의 위례성 民戶의 하남 이주 기사를 고이계가 초고계에 흡수되는 과정을 왜곡 기재한 것이라는 색다른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북위례성은 일반적으로 한강에서 멀지 않은 이북지역이 아닌 고이계의 왕성으로서 한강유역과는 상당히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 金起燮,「百濟 前期의 漢城에 대한 再檢討」『鄕土서울』55, 15∼16쪽, 1995. 필자는 이 글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 구체적인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비정을 미루고 있다.
이상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둘러싼 몇 가지 핵심 사항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하남위례성'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하북)위례성'은 상식적으로 그 존재를 상정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실체를 입증한 만한 뚜렷한 기록도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도 '하북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로서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설혹 '하남위례성'이 '하북위례성'에서 천도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온조왕 즉위 후 단 13년간만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는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
만약 최초 건국지로서의 定都 과정이 제대로 된 것이었다면 '하북위례성'이 그렇게 짧은 기간만 사용되다 버려질 수 있었을까?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백제의 시조인 溫祚가 扶餘系로서 고구려를 거쳐 남하한 지배계층이라고 본다면 정도 당시 북방에 도사리고 있는 낙랑과 말갈 등의 위협을 염두에 두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온조왕 13년조의 순행길에 관찰한 漢水 이남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였다는 것은 '하북위례성' 자체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도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상으로만 도읍을 옮긴 것일 뿐 실제로는 그곳에 최초로 도읍을 정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후대의 『三國史記』 찬자로서도 비록 온조왕 즉위년조의 作都 기사와 13·14년조의 천도 기사와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남위례성'을 온조왕대의 초기 도읍지로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 온조왕 즉위년조에 "都河南慰禮城"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더불어 '(하북)위례성'의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서도 여러 가지 입장에서의 주장들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실체 논쟁과 마찬가지로 뚜렷이 그 위치를 입증할만한 자료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더욱이 고고학적으로는 '하북위례성'에 비정할 만한 유적 또는 유구가 발견되지 못한 게 사실인데다, 안타깝게도 '하북위례성'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서울 주변이 이미 난개발에 시달려 더 이상 새로운 유적의 발견을 기대할만한 상황이 못되기 때문에 '하북위례성'의 실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접근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로서는 차라리 이 글의 주제가 되는 '하남위례성' 관련 유적들의 지속적인 발굴 성과와 삼국시대 초기 기록을 면밀히 비교 검토하는 것이 설정 자체부터 모호함을 가지고 있는 '하북위례성'에 대해 보다 효율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2) 漢城說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하남위례성'의 실체를 논함에 있어 '하북위례성' 문제 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漢城'의 문제가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한성'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기록 전반을 통해 볼 때 '위례성'과 더불어 백제시대 초기의 도성 내지는 왕성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명칭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한성'이 모두에 지적한대로 '위례성'과 이름만 다를 뿐 실제로는 동일한 백제의 첫 왕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위례성'과는 별개의 실체를 지닌 도성 또는 왕성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三國史記』 「百濟本紀」기록의 '위례성'과 '한성' 관련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위례성'과 관련하여서는 온조왕 원년조에 '하남위례성'이란 명칭이 단 한 번 등장한 이래 이후의 온조왕 8년·13년·17년·41년조에 '위례성'이란 이름만 계속 사용된다. 이후 '위례성'에 대한 직접적인 거명이 전혀 없다가 250여 년이 지난 責稽王 원년(286년)에 이르러서 짧게나마 '위례성' 수리 기사가 다시 등장할 뿐이다.
) 王徵發丁夫 葺慰禮城(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는 왕도나 도성·왕성 등의 도읍지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간혹 등장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제시되어 있지 않아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한편 책계왕 이후에는 그나마도 '위례성'이란 명칭 자체를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역시 '위례성'과 유사한 도성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이 등장하고 있다. 다만, '한성'이란 명칭 또한 온조왕 14년과 25년 기사에 처음 등장한 이래
) 十四年 …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14년 가을 칠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 … (25년 봄 이월에 왕궁의 우물이 사납게 넘쳤다. 이때 한성사람의 집 말이 소를 낳았는데 … ).
오히려 '위례성'보다 더 오랜 공백인 3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比流王 24년(327년)에 '北漢城'이란 명칭이 출현하고,
) 比流王 二十四年 … 九月 內臣佐平優福據北漢城叛 … (비류왕 24년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 거하여 모반하므로 … ). 위 기사의 '北漢城'이란 명칭 역시 '南漢城'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漢城'이 바로 漢水 以南의 '南漢城'을 가리키나 대개 '南'자를 생략하고 '漢城'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北漢城'의 존재는 '(南)漢城'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류왕대부터는 '漢城'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한성'이란 명칭은 阿莘王 즉위년(392년)에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어
) 阿莘王 … 初生於漢城別宮(아신왕 … 처음 한성 별궁에서 태어났다).
새삼 그 존재가 주목된다. 이후에는 支王代와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蓋鹵王代까지 '한성'이 계속 사용되고 있어 한성백제시대 멸망 당시의 왕도가 곧 '한성'이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 支王 … 漢城人解忠來告曰 … 二年 … 秋九月 以解忠爲達率 賜漢城租一千石(전지왕 … 한성사람 해충이 와서 말하기를 … 2년 … 가을 9월 해충으로 달솔을 삼고 한성의 조 1천석을 주었다).
蓋鹵王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개로왕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을 에워싸므로).
이상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백제의 첫 왕도가 바로 '하남위례성'이며, 멸망 당시의 왕도는 '한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온조왕대에서 책계왕대까지는 왕도로서 '하남위례성'이 주로 사용된 반면, 비류왕대 이후로는 왕도가 완전히 '한성'으로만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별개의 왕성으로 보고 책계왕에서 비류왕대 사이에 '하남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위 기록상으로는 특별히 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어떠한 기록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양자를 별개의 왕성으로 보기에는 곤란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하남위례성'과 '한성'이 동일한 왕성을 지칭하는 것이되, '한성'이란 명칭이 온조왕대에도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위례성'에 대한 별칭으로서 후대의 史家에 의해 소급 적용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즉, 온조왕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할 당시에는 실제로 '하남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이란 명칭과 더불어 사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후대에 왕성으로 고착된 '한성'이 실질적으로는 최초의 '하남위례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 역사의 시작인 온조왕대의 기록에 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온조왕대 중에서도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온조왕 14년조부터 '한성'이란 명칭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곧 '河南慰禮城=漢城'이란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하남위례성'과 '한성'이 반드시 동일한 왕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의 왕성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고 판단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남위례성'과 '한성'의 기록은 특정 시점을 경계로 사용 빈도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근간에는 그 시점에서 비록 천도 차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남위례성'이 '한성'으로 변화하면서 왕성의 규모 또는 성격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반드시 지적하고 싶다. 즉 책계왕대에서 비류왕대 사이의 어느 시점을 계기로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제도 자체가 일대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이와 관련하여 이병도는 실제로 慰禮城(河北)에서 漢山下 漢城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고, 河南 遷都의 연대를 책계왕 원년(286) 이후 비류왕 24년(327) 이전에서 구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 근거로 비류왕 24년 9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 거하며 모반을 꾀하자 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는 기사의 '北漢城'이 곧 慰禮城의 後名으로서 漢城으로 천도한 이후의 對稱일 것이므로 '북한성'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비류왕 24년 이전을 주장한 것이다(李丙燾·金載元, 『韓國史 古代篇』, 1965, 354∼356쪽).
비록 이러한 주장은 온조왕조의 기록 자체가 후대의 사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13·14년의 '하남위례성' 천도 기록을 비류왕대의 사실로 보는 것이어서 필자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라 할 수 있으나 비류왕대의 정치적 변동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된다. 즉 북방 낙랑인에 의해 흉변을 당한 責稽王과 汾西王에 이어 즉위한 比流王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북방의 위협 세력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차원에서 외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천도 내지는 대대적인 도성의 정비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로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하남위례성'과 '한성'의 차별성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같은 백제 한성기의 도성 변천에 대해서는 이미 졸고에서 최초 풍납토성에 도읍을 정한 후 3세기 중·후반경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도모한 백제가 고구려와 낙랑·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새로운 방어성인 몽촌토성을 축조하는 등 도성제의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주장한 바 있다.
) 申熙權,「百濟 漢城期 都城制에 대한 考古學的 考察」『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3회문화재연구학술대회 논문집, 2002.
또한 그에 앞서 개로왕대 멸망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한성의 구조 자체가 왕성인 남성과 북성인 거민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좁게는 한성이 북성을 지칭하되 넓게는 남쪽의 왕성을 포함하여 주변 취락·농지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 金起燮, 「百濟 前期의 漢城에 대한 再檢討」 『鄕土서울』 55, 1995.
결론적으로 현재까지 밝혀진 제반 증거들로부터 추정컨대 '한성'은 백제의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을 기반으로 상시적인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확대 정비한 도성으로서 '하남위례성'과 별개의 왕성이 아닌 하남위례성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온조왕 이래 '(하남)위례성'으로 불려지던 왕성이 책계왕 이후∼비류왕 이전에 '한성'이란 이름의 새로운 도성으로 확대 재편되고, 그것이 멸망 당시까지 '한성'이란 명칭으로 지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남위례성'과 '한성'이 동일한 백제시대의 도성임을 입증할만한 문헌 기록이 있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日本書紀』 卷 14 雄略天皇 20年條 각주에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라 하여 개로왕대 (고구려)의 대군에 의해 백제 왕성이 함락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명칭이 바로 '위례'인데, '위례'가 곧 당시의 王城으로서 이를 빼앗김에 따라 왕과 태후·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음이 명확하다. 한편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三國史記』 蓋鹵王 21년조 9월 기사
)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 帥兵來攻北城 七日以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에는 고구려군 3만명이 王都인 漢城을 에워싸고 7일동안 北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南城으로 이동하자 왕이 달아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의 두 기사 모두 백제의 왕성이 고구려군에 의해 7일간의 공격을 받은 끝에 함락된 것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三國史記』에 北城과 南城으로 이루어진 王都 '漢城'이 『日本書紀』에는 大城+ 王城, 혹은 大城=王城인 '慰禮'로 명기되어 있어
) 『日本書紀』의 기록만을 놓고 보면 굳이 『三國史記』 기록에 그대로 대응시켜 大城과 王城을 분리하여 받아들일 필요 없이 大城이 곧 王城이요, 그것의 이름이 바로 慰禮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漢城=慰禮'임이 명확히 밝혀진 셈이다.
이상 살펴본 한성과 관련하여서는 近肖古王 26년조에 또 다른 도읍으로 기록된 '漢山'
) 侵高句麗 攻平壤城 … 王引軍退 移都漢山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과의 연관성 등도 해명되어야 하나, 단지 위 기사를 제외하고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등장하는 '漢山'이 대부분 왕의 수렵지로 묘사되거나 일반적인 지명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특별히 도성으로서 의미를 두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한산'의 문제는 이 밖에 '漢山城' 등 관련지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어 하남위례성과는 별도의 논고로 다루는 편이 합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기로 한다.
(3) 河南慰禮城 위치 비정 諸說
1) 稷山說
'慰禮城' 稷山說은 '위례성'이 직산(현재의 천안 위례산성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설이다. 이 설은 고려시대 승려 一然이 『三國遺事』 王曆條에 "第一溫祚王 … 都慰禮城, 一云弛川 今稷山"이라 하여 온조왕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을 직산에 비정한 이래 『高麗史』지리지, 『世宗實錄』지리지, 『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서 "本慰禮城 百濟王溫祚王 自卒本扶餘南奔 開國建都于此 … "라 하여 충청도의 직산현을 온조왕이 처음 도읍으로 정한 위례성이라 명시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조의 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는 위례성 직산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생각되나, 여기서의 위례성이 '하북위례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하남위례성'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뚜렷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던 중 조선조 말 다산 정약용에 의해 백제의 初都地가 '하북위례성'이며, 그 위치가 삼각산 동록 일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위례성 직산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듯하다. 특히 현재로선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는 설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위례성 직산설은 거의 재고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된다.
한편 이와 같은 문헌 기록을 토대로 구 직산현의 동쪽에 위치한 天安의 慰禮山城을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위례성'으로 보고자 하는 일부 연구자들로 인해 학술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서울대학교에서 이 곳을 1989년과 1995년의 시굴조사에 이어 1996년에 정밀 발굴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 토석혼축성벽의 기저부에서 4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토기편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나 성벽 토루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들이 출토됨에 따라 현존하는 위례산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부 구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보축 또는 수축된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천안시 위례산성은 백제의 첫 도읍인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인근의 성거산성 등과 함께 직산지방에 딸린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방어용 산성임이 분명해진 셈이다.
) 서울大學校人文學硏究所·天安市,『天安 慰禮山城』, 1997.
2) 廣州古邑·春宮里 일대설
다산 정약용은 저서인 『여유당전서』에서 위례성의 하남 천도를 기정 사실화하며 위례성 직산설을 비판하고, '하남위례성'을 廣州 古邑의 宮村 일대에 비정하였다.
) 溫祚王十三年 徙都漢水之南 卽今之廣州古邑也 當時謂之河南慰禮城 … 溫祚舊宮本在廣州之古邑 謂之宮村 居民業種甘瓜 此則河南之慰禮也(『與猶堂全書』 疆域考 卷3 慰禮考).
다산 정약용의 이러한 주장을 계기로 '하남위례성'에 관한 위치 논쟁이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광주고읍설은 이후 일본인학자 今西龍
) 今西龍,「百濟國都漢山考」『百濟史硏究』, 1934.
등에 의해 주장되는가 하면, 方東仁
) 方東仁, 「三國時代의 서울」『서울六百年史』제1권, 1977.
등에 의해서도 주장된 바 있다.
이 설은 사실 다산에 앞서 『三國遺事』 王曆條 및 권2 南扶餘 前百濟條 등에서 "온조왕이 癸卯年(혹은 癸酉年)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14년 丙辰年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는데, 곧 지금의 광주라"라고 전해오던 것으로, 이를 다산이 소위 '고골'로 불려지던 춘궁리 일대로 구체화함으로써 다시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춘궁리 일대설이 힘을 받게 된 것은 李丙燾
) 李丙燾,「慰禮考」『韓國古代史硏究』, 1976.
의 주장 이후부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하남위례성의 정식 명칭이 한성이며, 한성을 춘궁리 일대로 보고 있다. 광주군 서부면의 춘궁리 일대는 그 지명과 더불어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인데다, 주변에서 古瓦와 柱礎石·佛像 등이 채집된 바 있어 대부분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하남위례성의 제일 후보지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특히 金龍國
) 金龍國,「河南慰禮城考」『鄕土서울』 41, 1983.
은 하남위례성을 한산인 남한산 아래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古史記錄이나 지리관계, 유적·유물 등으로 보아 하남위례성을 춘궁리를 중심으로 한 광주 '고골' 일대로 확신하고 있다. 한편 尹武炳
) 尹武炳,「漢江流域에 있어서 百濟文化硏究」『百濟硏究』 15, 1984.
은 구체적으로 二聖山城을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지목한 바 있다.
이같이 하남위례성의 광주 고읍 춘궁리 일대설은 대다수의 연구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었으나 결정적으로 백제시대 초기의 유적 또는 유물임을 입증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수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득력을 갖기가 힘들다고 판단된다. 즉 광주 고읍 일대의 유적 가운데 왕성으로 추정할 만한 백제 초기의 유적이 발견된 바 없으며, 그에 걸맞는 유물 또한 출토된 바 없다.
1986년부터 2001년까지 9차례에 걸쳐 한양대학교와 하남시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춘궁리 맞은편의 二聖山城에서는 비록 최근에 고구려 尺과 백제시대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는 초축 성벽이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내부에서는 신라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 漢陽大學校 博物館·河南市, 『二聖山城(第8次 發掘調査 報告書)』, 2000. ; 漢陽大學校 博物館·河南市, 「二聖山城 第9次 發掘調査 現場說明會資料」, 2001.
2001년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실시한 天王寺址 시굴조사에서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막새가 출토되었으나,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2001.
연대의 검증이 필요한 형편이고, 비록 이것이 백제시대 기와라 하더라도 당시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한 이상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찰 관련 유물은 오히려 이 곳이 枕流王 2년의 "創佛寺於漢山" 기록의 漢山 일대에 속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춘궁리 일대에는 천왕사지 외에도 桐寺址
) 桐寺址는 이성산 남쪽 고골 저수지 옆의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1988년 구리∼판교간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상과 막새, '광주동사' 명문와 등이 출토된 바 있다. 금당지 동편으로는 5층석탑과 3층석탑이 서 있다.(문명대 외, 「광주춘궁동동사지발굴조사보고서」 『판교∼구리·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충북대학교박물관, 1988, 113∼123쪽).
가 있는데 비록 백제시대의 사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일대가 옛부터 사찰이 분포할 만한 좋은 입지를 갖추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 결정적으로 춘궁리 일대는 온조왕 作都 기록의 하남위례성의 입지와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온조왕 원년조에 열 신하가 말하기를 이곳 하남의 땅은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라 기록하고 있는데, 춘궁리 일대는 과연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중 남쪽으로는 남한산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지고 있어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는 기록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입지 조건과 앞서 살펴본 고고학적 증거 등을 종합적으록 고려해 보건대 광주 고읍의 춘궁리 일대는 '하남위례성'으로 보기보다는 『三國史記』 초기 기록의 '漢山' 일대로 비정하는 편이 훨씬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3) 夢村土城說
이상의 하남위례성 직산설과 광주고읍·춘궁리일대설이 다분히 문헌사적 또는 역사지리적 관점에서 제기된 주장이라면 몽촌토성설은 실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제기된 새로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공원 조성을 계기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3세기 중·후반 경으로 볼 수 있는 판축성벽이 확인되었고, 내부에서 적심건물지·수혈주거지·池塘址와 토기를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성주탁·최몽룡·김기섭·이도학 등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였는데,
) 成周鐸,「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百濟硏究』14, 1984 ; 崔夢龍,「夢村土城과 河南慰禮城」『百濟硏究』19, 1988 ; 金起燮,「百濟前期 都城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7, 1990 ; 李道學,「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檢討」『韓國上古史學報』9, 1992.
당시로서는 기존의 문헌사 연구 성과에 최신의 고고학적 자료를 접목시켜 내놓은 신선한 주장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나 최근의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계기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 申熙權,「百濟 漢城期 都城制에 대한 考古學的 考察」『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술대회 논문집, 2002.
4) 風納土城
한강변에 연한 풍납토성은 을축년(1925) 대홍수 때 東晋製 청동초두를 비롯하여 과대금구·유리구슬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이러한 연유로 鮎貝房之進 등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기도 하였으나,
) 鮎貝房之進, 「百濟古都案內記」 『朝鮮』 234號, 1934.
후속해서 별다른 주장이 뒷받침되지는 못하였으며, 국내 학자 가운데는 金廷學
) 金廷學, 「서울近郊의 百濟遺蹟」 『鄕土서울』 39, 1981.
이 이러한 입장을 피력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개중에는 姜仁求
) 姜仁求, 「百濟 初期 都城 問題 新考」 『韓國史硏究』 81, 1993.
처럼 애초에 위례성은 하남위례성이며, 그것이 곧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을 강력히 편 경우도 있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1997년 실측조사 결과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새로이 제기되었으며,
) 李亨求, 『서울 風納土城 [百濟 王城] 實測調査硏究』,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7.
실제로 그 해에 이루어진 풍납토성 내부의 발굴조사 결과는 풍납토성이 온조왕대 이래 한성백제 멸망시까지의 왕성일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 국립문화재연구소, 『風納土城 Ⅰ­현대연합주택 및 1지구 재건축 부지』, 2001.
1999년의 성벽 발굴조사 결과는 풍납토성이 곧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風納土城 Ⅱ­동벽 발굴조사 보고서­』, 2002.
이상 풍납토성에 대한 연구 현황과 발굴조사 성과를 통한 하남위례성의 비정 문제는 곧 이 글의 직접적인 주제에 해당되므로 다음 장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5) 校山洞土城說
하남위례성의 위치 비정 제설과 관련하여서는 소수나마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의 토성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으로 金侖禹는 백제 초기 기록의 '한산'을 하남시 하산곡동과 배알미동 사이에 위치한 검단산으로 보고, 검단산 아래의 교산동토성지를 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 金侖禹,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考」 『史學志』 26, 1993.
이러한 설의 근간에는 교산동토성이 길이 1.5km, 폭 1km, 내부 면적 45만평이 넘는 대규모에, 거대한 초석으로 이루어진 口字形 궁궐지를 갖추고 있으며, 주변에 御用泉 등이 있다는 향토사학자 韓宗燮
) 韓宗燮, 「百濟 建國地 河南慰禮城址의 究明에 대한 硏究」(필자가 개별적으로 배부한 논문), 1992, 23∼28쪽.
의 견해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1999∼2000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산동 건물지의 연대는 크게 9∼12세기, 즉 몽고 침입 이전의 천왕사지와 관련된 지방호족 왕규를 중심으로 한 시기와 15∼17세기 조선초 광주 분원의 성립과 발전, 강무장으로 활용된 광주와 관련된 2개의 시기로 비정되고 있다. 특히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유물이 9세기대의 주름무늬병편으로서 이를 근거로 건물지의 상한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보고 있다.
) 畿甸文化財硏究院·河南市, 『河南 校山洞 建物址 發掘調査 中間 報告書('99)』, 2000. 100∼103쪽.
이상의 시굴조사 결과로 보건대 아직까지 이 일대에서 백제시대로 올라가는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음에 따라 교산동 건물지는 백제시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하남위례성의 교산동토성설은 현재로서는 그 근거를 상실한 셈이다.
3. 河南慰禮城과 風納土城
(1) 河南慰禮城의 입지와 風納土城
문헌 자료를 통해 하남위례성의 입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가장 직접적으로는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 배경을 설명한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條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온조왕 원년조에는 하남위례성의 정도 과정을 기록하며 그 입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百濟始祖溫祚王 …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 溫祚都河南慰禮城
이를 풀어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가히 거할만한 곳을 바라보았는데,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띠였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습니다" 하여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하남위례성 천도 배경은 온조왕 13년조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또한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都久安之計"라 하여 漢水 이남의 땅이 비옥함을 천도의 중요한 이유로 들고 있다. 따라서 이상의 기록으로부터 하남위례성의 입지 조건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는데, 잘라 말하면 바로 북으로 한강을 끼고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높은 산과 큰 바다로 막혀 있으며, 남쪽으로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하남위례성의 이러한 입지 조건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지역으로는 현재 서울의 강남∼송파∼강동에 이르는 넓은 평야지대를 들 수 있다. 이 밖에 한강 이남의 지역 가운데 광주 고읍의 춘궁리 일대를 포함한 현재의 하남시 일원 또한 위 입지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곳으로서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지목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판단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제로 하남시 일원은 북쪽과 동쪽으로는 한강을 끼고 검단산을 의지하고 있어 온조왕조 기록의 하남위례성의 조건에 근접하나, 서쪽 또한 이성산과 금암산 등에 막혀 있으며, 남쪽으로도 비옥한 평야가 펼쳐 있기보다는 남한산 자락 등으로 둘러싸인 자연적인 요새의 형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헌 기록에 입각한 하남위례성의 입지 조건을 볼 때도 역시 제일 후보지로는 강남∼강동 사이의 송파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원에는 이같은 조건을 뒷받침할 만한 토성유적 2개가 존재하는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그것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결국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인 漢城의 중심지로 볼 수 있지만, 온조왕 천도 당시의 하남위례성은 두 곳 가운데 한 곳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곧 풍납토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風納土城은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의 平地土城이다. 1925년(乙丑年) 대홍수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북벽·동벽·남벽 등 약 2.1km 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대략 둘레 3.5km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 약 3만 6천평을 포함한 토성의 면적은 총 26만평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며, 토성의 외곽에는 성벽을 방어할 목적의 垓子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적으로 풍납토성은 서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고, 동쪽의 평야와 얕은 구릉 끝으로 이성산과 검단산 등의 높은 산이 첩첩이 가로막혀 있다. 서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가운데 서해로 이르며, 남쪽으로는 몽촌토성 등 남한산의 잔구를 제외하면 방이동·가락동을 거쳐 성남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도성의 입지 조건으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서북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도성으로서의 조건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 崔夢龍,「夢村土城과 河南慰禮城」『百濟硏究』19, 1988.
즉, 한강변의 충적대지상에 위치한 관계로 강물의 잦은 범람에 따른 홍수의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큰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고대의 도성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중요한 도성 입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도성의 입지에 있어 큰 강은 재해 요소로서의 단점보다는 장점으로서의 조건이 훨씬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 분명한데, 이를 풍납토성과 한강의 관계에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 전략적으로 한강은 북방으로부터의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자연적인 방어시설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서해에서 동쪽으로 춘천지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배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그만큼 방어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굳이 풍납토성의 서쪽편에 해자를 파서 인공적인 방어시설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한강 자체가 해자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둘째, 경제적으로는 대외 문물 교류의 핵심 루트이며,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수운을 이용한 서해로의 대외 진출과 외래 문물의 수입, 전국 각지로부터의 편리한 물자 운송은 한강이라는 큰 강의 존재에서 비롯된 특혜로 볼 수 있다. 비록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기는 하나 풍납토성의 바로 남쪽에 송파진과 강 건너 북쪽에 광진 등 조선시대의 중요 나루터가 있었던 것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 유사시에는 한강이 주요 도피로 역할도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와 둘째 이유를 복합해 보면 세 번째 가정 역시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 만약 선박 제조술 등이 뒷받침되어 원활한 수운이 확보될 경우 오히려 육로로의 탈출보다 훨씬 수월하게 도피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한강과 인접하여 토성을 축조함으로써 파생되는 장점이 보다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앞서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의 지적과 같이 한강의 범람에 대비한 튼튼한 제방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백제 첫 도읍지로서 풍납토성에 대한 입지상의 문제점은 별다른 무리없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한 차원에서 후술할 풍납토성의 견고하고 다양한 축조 기법은 풍납토성의 하남위례성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결정적인 요소로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비록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당시 한강변을 따라 제방적 성격으로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岩寺洞土城과 三成洞土城·龜山土城 등도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피해를 방지하는 한편, 한강을 타고 침략해 오는 적군으로부터 왕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실례로 풍납토성과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의 왕성 또는 도성의 입지를 비교하더라도 한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도성으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지적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集安의 國內城이나 樂浪의 樂浪土城, 慶州의 月城 등이 모두 강안에 위치하고 있어, 강가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당시 동아시아 고대 도성의 큰 특징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성백제 멸망 이후의 웅진도성과 사비도성이 각기 금강과 백마강을 끼고 입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백제 한성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도성의 입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왕성과 인접한 곳에의 왕릉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 역시 이러한 도성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초기 도성인 國內城 주변에는 丸都山城과 山城下古墳群이 세트를 이루고 있으며, 신라의 月城 주변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高塚 고분이 산재해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石村洞 古墳群을 비롯하여 芳荑洞 古墳群, 可樂洞 古墳群 등 대형 분묘가 밀집 분포하고 있는 풍납토성 일대가 당시 도성의 중심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風納土城의 연구 현황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 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 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 을축년 홍수로 출토된 유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鮮總督府, 『博物館陳列品圖鑑』 제4집 ; 鮎貝房之進, 「百濟古都案內記」 『朝鮮』 234號, 1934, 115쪽 ; 京城電氣株式會社, 『京電ハイキングコス』, 1937, 19쪽 ; 龜田修一, 「考古學から見た百濟前期都城」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4, 朝鮮史硏究會, 1987 ; 京畿道誌編纂委員會, 『京畿道誌 下卷』, 1957, 806쪽.
성 내부에서 이렇듯 중요한 유물이 출토됨으로 해서 당시의 일본인 학자들은 일찍부터 풍납토성을 백제 한성시대의 왕성으로 주목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특히 鮎貝房之進은 풍납토성을 그 입지상 『三國史記』 「百濟本記」 온조왕조의 作都 기록에 견주어 '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 鮎貝房之進, 위의 논문, 115쪽.
그러나 이후 李丙燾가 풍납토성의 지명을 근거로 하남위례성이 아닌 『三國史記』 「百濟本紀」책계왕 원년조의 '蛇城'으로 비정함에 따라
) 李丙燾,「廣州風納里土城과 百濟時代의 蛇城」『震檀學報』10號, 1939, 145∼153쪽.
우리 학계에서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성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우세하게 되었다.
鄕土서울 第62號
그러던 중 1964년 서울대학교 金元龍에 의해 풍납토성 내부 포함층에 대한 첫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시대의 주거면 2개층과 풍납리무문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 등이 발굴되었다. 그 결과로부터 풍납토성은 서기 1세기경 위례성과 거의 동시에 축성되어 475년까지 존속된 반민반군적 읍성으로서, 개로왕 21년(475)에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7일 동안 공격한 북성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 金元龍, 『風納里包含層調査報告』, 서울大學校考古人類學叢刊 第3冊, 1967.
이후 풍납토성의 역사지리적 검토를 통해『東國文獻備考』와『大東地志』등에 나오는 坪古城이라고 주장하는 견해 등이 간헐적으로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 方東仁, 「風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 16, 1974, 70∼71쪽.
풍납토성은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서울특별시의 대규모 성장과 함께 급속한 개발의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1997년 선문대학교 李亨求가 풍납토성 실측조사 도중 토성 내부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토기 등 유물을 발견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풍납토성에서는 백제 한성시대의 역사를 새로 장식할 만한 중요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게 되었다.
이하에서는 1997년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실시한 풍납토성 내부 주거지와 건물지, 제사용 수혈 등의 중요 유구, 그리고 성벽 자체의 발굴조사 성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풍납토성이 곧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을 짚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남위례성의 실체를 고증하고자 한다.
4. 風納土城을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1) 風納土城內 주요 시설물
1) 육각형 수혈주거지
풍납토성 내부 발굴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유구로서 평면형태 6각형의 대형 수혈주거지를 들 수 있다. 6각형 주거지는 철기시대 이래 한강유역과 동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독특하게 발달한 '呂字形' 또는 '凸字形' 주거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 한강유역 전역과 임진·한탄강유역에서 계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기존의 방형계 내지는 타원형계 주거지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6각형계 주거지가 대규모로 정연하게 발굴됨으로 해서 단숨에 학계의 주목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6각형 주거지는 대체로 전면부에 방형의 독립된 출입구를 가지며, 양 단벽과 장벽이 둔각으로 연결되고, 특히 후면부 단벽 중앙부가 돌출되어 마치 6각형의 평면형태를 띠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같은 형태적 특징 외에도 주거지 후면부 동북벽 쪽에 터널형으로 축조된 부뚜막이 설치되고 있으며, 정교하게 다듬어진 판자와 기둥으로 이용한 벽체를 특징으로 한다.
) 申熙權,「한강유역 1-3세기 주거지 연구 -'풍납동식 주거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1997년 발굴조사에 밝혀진 풍납토성 내 6각형 주거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그 중 가-2호와 가-3호 주거지는 탄화된 상태로 거의 완전하게 발굴되어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상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주거지는 길이 10m, 폭 7m가 넘는 대규모에 평면형태가 세장한 6각형을 띠고 있으며, 남쪽 단벽에는 방형의 돌출된 출입구가 부속되어 있다. 주거지는 화재로 소실되어 탄화된 벽체 구조물과 架構 부재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이를 통해 우선 벽체 가장자리에 溝를 파고 15cm 남짓되는 촘촘한 간격으로 벽기둥을 세운 후 수혈 내부에 해당되는 아랫부분에 2단 이상의 가로대를 걸어 벽체를 지탱한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후면부에서 북동쪽 단벽으로는 점토와 판석을 일부 섞어 만든 길이 2m 남짓의 터널형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주변에서 일체의 생활용기들, 즉 시루· 碗·鉢·短頸壺·大甕·뚜껑 등이 출토되었고, 그 밖에도 U자형 삽날·刀子 등 철기류와 방추차·어망추 등 土製品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가-5호 주거지는 출입구를 제외한 장축 길이 10.7m, 단축 폭 7.3m의 대형 수혈주거지로 마치 철성분이 깔린 듯 단단하게 바닥을 다졌는데, 내부에서 암키와편 2점, 상부에서 수막새 2점이 출토되었고, 일부 기둥구멍은 바닥에 받침돌이 깔려 있는 원시적인 초석의 형태를 띠고 있어 부분적으로나마 기와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주거지에서 출토된 수막새는 이 주거지보다 오히려 규모가 더 클 것으로 추정되는 나-7호 주거지에서도 동일한 문양의 것이 출토되어 더욱 주목된다.
기존에 한성백제시대 것으로 알려진 수막새로는 석촌동 4호분에서 출토된 4구획 원문수막새편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편 정도가 고작인데 반해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막새류는 기하문 또는 草花文, 樹枝文, 素文, 4구획 원문 등 다양한 문양을 보이고 있다. 막새류를 포함한 풍납토성 출토 기와의 양식과 제작기법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기대되나 대체로 이들이 웅진천도 이후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중국 전국시대와 한나라·낙랑·고구려계의 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 崔孟植,「風納土城 出土遺物의 性格 -기와를 중심으로-」『風納土城의 發掘과 그 成果』, 한밭大學校 開校 第74週年記念 學術發表大會 論文集, 2001.
여하튼 풍납토성 출토 기와류는 기존의 백제시대 기와 가운데 가장 이른 형식과 제작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풍납토성이 시간적으로 상당히 앞서는 유적일 뿐만 아니라 그 위상면에서도 월등하였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6각형 주거지 외에도 토기 散布遺構와 폐기유구, 기타 수혈유구 등에서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와류 외에도 전돌·토제 초석·토관 등 일반적인 주거지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중요한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고, 특별히 토기 폐기유구에서는 청자편과 흑갈유병편 등 중국계 도자기류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주거지의 벽체를 가공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달된 鑄造鐵斧 등의 철기류 역시 당시의 발달된 문화상을 보여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풍납토성 내에는 그동안 조사된 백제시대 수혈주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월등한 위상을 가진 주거지들이 밀집분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6각형 주거지는 한강유역의 주거지 구조와 출토유물로 보건대 2∼3세기대를 중심연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등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로부터도 충분히 입증된다. 한편 오히려 층위상으로 6각형 주거지보다 이른 데다 기원 전후의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3중의 환호유구도 발견되었는데, 환호는 후술할 성벽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필수적인 유구로서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를 추론함에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또한 중국계 도자기류 등을 포함하고 있는 토기 산포유구와 폐기유구 등은 대체로 4세기에서 5세기대 정도로 편년 가능하기 때문에 풍납토성의 존속 연대는 문헌상의 한성백제의 존속 연대와 상당히 근사함을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2001.
2) 대형 건물지와 특수 遺構
1999년부터 2000년 5월까지 한신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풍납토성 내부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소위 '경당연립' 재건축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주거지·저장공·구상유구·폐기장 등 220기에 달했는데,
) 權五榮,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 성과」 『風納土城의 發掘과 그 成果』, 한밭大學校 開校 第74週年記念 學術發表大會 論文集, 2001.
그 가운데 조사지역 북측 경계지점에서 발견된 대형의 石造 건물지와 그 남쪽에 인접해 있는 대형의 제사용 수혈, 시유도기가 다량 안치되어 있는 수혈 등이 단연 주목된다.
대형 건물지는 현재 동-서 16m, 남-북 14m 이상의 방형 평면에 남측으로 한 변 3m 정도의 입구부가 연결된 呂자형의 평면형태를 띠고 있다. 북쪽 건물의 외곽은 口형의 溝가 감싸고 있는데 폭 1.5∼1.8m, 깊이 1.2m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 2∼3중의 대형 판석이 깔려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 유구가 치밀한 설계와 공력이 투입된 대형 구조물이란 점에서 특수 공공시설로 보고 있으며, 출입을 극도로 통제한 점,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溝로 차단한 점, 溝의 바닥에 판석과 정선된 숯을 깐 점,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전무한 점 등을 들어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이 건물지는 조사지역의 북쪽으로 계속 연장되기 때문에 본래의 규모는 남-북으로 훨씬 긴 형태를 띠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대형 건물지와 인접한 남쪽에서는 대형의 수혈유구가 발견되었다. 길이 1,350cm, 폭 520cm, 깊이 300cm 이상의 장타원형인 이 수혈은 수 차례의 퇴적이 이루어지면서 내부에서 실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인위적인 폐기 흔적이 보이는 수십 개체 이상의 고배·삼족기·뚜껑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발·완·뚝배기·직구단경호·기대 등의 다양한 토기편이 출토되었는데, "大夫"와 "井"자가 새겨진 직구단경호 편이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토기편 외에 12마리 분의 말 하악골과 다량의 유리구슬 등도 주목할 만하다. 조사단은 이 유구가 일반 폐기장보다 규모가 월등히 크고, 인위적으로 파손한 소형 기종의 토기들이 대부분 완형으로 접합된다는 점, 명문토기가 2점 존재하는 점, 다량의 말뼈가 나온 점 등을 고려하여 특수한 성격의 제사 유구로 추정하고 있다.
이상 대형 건물지와 제사 유구는 둘 다 국가적인 중대 祭儀 또는 제사와 관련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史記』 온조왕조에는 다음과 같이 집중적으로 제사 관련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묘를 세웠다)
十七年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 여름 사월에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 머니에게 제사를 지냈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20년 봄 이월에 왕이 큰 제단을 설치 하고 친히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三十八年 冬十月 王築大壇 祠天地 (38년 겨울 시월에 왕이 큰 제단을 쌓 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다)
이상의 기사에서는 사당을 세우거나 또는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사당 내지는 제단의 모습이나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고, 제사를 지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건국 시조인 온조왕대부터 先王에 대한 제사를 극진히 받들었음을 보건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지와 제사 유구가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중국 西晉製 施釉陶器가 집중적으로 출토된 수혈 유구도 보고되었다. 시행자와의 마찰로 인한 급작스런 발굴조사의 중단으로 비록 끝까지 조사를 진행하여 유물을 수거하지는 못했지만 현재로서도 최소한 6개체 이상은 수습된 상태이다. 수혈의 성격은 확실치 않으나 440cm 이상×280cm의 장방형에 화재로 인해 소토와 벽체가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으며 상부구조로 보이는 건축부재도 확인되었다. 시유도기와 함께 백제토기 大甕이 定置된 상태로 주저앉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시유도기와 대옹을 격납한 시설로 보고 있다. 보고자는 이러한 시유도기를 西晉代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용도를 중국과의 교섭과정에서 사여받은 위세품들을 담았던 용기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으로 미루어 보건대 역시 풍납토성이 중국과의 대외 교섭의 중심지였으며, 출토된 시유도기의 양으로 볼 때도 기존의 夢村土城과 洪城 神今城에 비해 위상이 월등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향후 또 다른 중요 시설물들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조사된 면적이 토성 내부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다, 토성의 중심부쪽으로는 거의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토성의 중앙부쪽에서는 왕궁과 관청 건물지 등 왕성과 관련된 중요한 유구들이 계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는 토성 전체를 놓고 볼 때 토성의 외곽에 지배층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대형의 6각형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는 반면, 중심부에 가까운 경당연립부지에서는 대형의 석조 건물지와 제사 유구 등 특수한 유구가 발견된 데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또한 풍납토성 내부에서 계획적인 공간 분할이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등장하는 '穿池造山'
) 辰斯王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以養奇禽異卉(진사왕 7년 정월에 궁실을 중수하였으며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기이한 새를 기르며 색다른 화초를 가꾸었다).
, '宮南池'
) 毗有王 二十一年 夏五月 宮南池中有火(비유왕 21년 여름 5월 궁궐 남쪽 연못에 화재가 있었다).
등의 기록과 연관지어 보면 최근 토성 내부 서남쪽에 위치한 외환은행 직장주택조합 재건축부지의 시굴조사에서 일정 범위에 걸쳐 발견된 두터운 뻘층이 왕성 내부에 조성된 인공 연못지의 흔적일 가능성도 상정해 볼 만하다.
) 申熙權, 「百濟 漢城期 都城制에 대한 考古學的 考察」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3회문화재연구학술대회 논문집, 2002, 26쪽.
이상과 같이 최근 풍납토성에서는 기존의 백제시대 유적과는 차원이 다른 월등한 위상의 주거지·건물지·제사 유구 등이 발견되었고,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대한 양의 토기류, 특수한 문양의 막새를 포함한 기와류, 전돌과 초석, 토관 등의 토제품과 시유도기를 포함한 중국 도자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제반 증거들을 볼 때 역시 풍납토성이 곧 백제의 첫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2) 風納土城의 구조와 축조기법
1997년 풍납토성 내부에서 중요한 유구들이 발견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풍납토성에 대한 학술 및 복원·정비의 기초자료를 획득, 활용코자 1999년 6월부터 10월까지 풍납토성의 동벽 2개 지점에 대한 절개조사를 실시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내었다.
성벽은 우선 생토층을 整地한 후 약 50cm 두께의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하부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중심부를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저부의 정지작업과 중심토루의 축조가 완료된 후에는 안쪽으로 사질토(Ⅱ토루)와 모래(Ⅲ토루), 점토다짐흙(Ⅳ토루)과 뻘흙(Ⅴ토루)을 위주로 한 판축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내벽을 축조하였다. 내벽 마지막 토루(Ⅵ) 상면에는 川石을 한 겹씩 깔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쪽으로는 割石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石列 및 石築은 토사의 흘러내림과 밀림을 방지하는 한편 배수의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3단의 川石列 사이에 의도적으로 돌을 깔지 않고 배수홈을 낸 것에서도 입증된다.
구조적으로 성벽은 크게 중심토루와 내벽, 외벽의 3개 구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내벽은 다시 Ⅳ토루 하단 川石列의 존재로부터 Ⅲ토루까지를 경계로 1차 성벽과 2차 성벽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각각에서 출토된 토기편의 기술유형을 분석한 결과 중심토루인 Ⅰ토루에서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비중이 다른 토루에 비해 월등히 높아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토성 내부 유구와 비교하면 유물상으로 3중 환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3중 환호가 사용될 당시에 토성의 중심부가 축조되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토성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면서는 환호가 폐기되고 토성이 그 기능을 대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환호의 폐기시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Ⅲ토루까지는 중심토루와 함께 기원후 2세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추정된다. 한편 증축된 내벽의 나머지 토루와 외벽 역시 출토유물상에서 연질 타날문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기존의 3세기 중반 이후의 출현 토기들이 거의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보다는 이른 시기인 3세기 전후에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대는 성벽 내에서 출토된 목재와 토기편 등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내벽 Ⅴ토루의 목재 구조물에서 수습한 목재와 Ⅵ토루 석축 하단에서 수습한 보강용 목재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보정 연대가 검출되었고, 내벽 Ⅲ토루의 목탄과 토기편의 방사성탄소연대와 열발광연대 역시 각각 중심연대가 3세기 초와 2세기 초로 나와 토기편의 상대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 申熙權,「風納土城 築造年代 試論」『韓國上古史學報』37, 2002.
특이하게도 내벽 일부 구간에서는 식물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여 겹 이상 확인되는데, 뻘흙을 10cm 정도 두께로 가져다 부은 후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등을 1cm 정도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토루를 축조한 것이다. 이렇게 성벽의 축조에 식물유기체를 이용한 방법은 지금까지 확인된 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서 백제 고지인 金堤 碧骨堤와 扶餘 羅城 등에서 확인될 뿐 아니라 日本 九州의 水城, 大阪의 狹山池 등 제방 관련 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 申熙權,「風納土城의 築造技法과 性格에 대하여」『風納土城의 發掘과 그 成果』, 한밭大學校 開校 第74週年記念 學術發表大會 論文集 , 2001, 68∼70쪽.
또한 식물유기체 4∼5겹에 한 번씩 3단에 걸쳐 성벽의 횡방향으로 각재목을 놓고 수직목을 結構시켜 지탱한 구조물도 출토되었는데, 종간격 110cm 정도로 8렬이 확인되었다.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이러한 목재는 보강재로서의 木心 역할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편Ⅴ토루 하단부 4단째의 석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성벽의 종방향을 따라 85cm 간격의 수직목이 확인되기도 하여 성벽 축조의 구획선 역할을 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심토루 외벽으로는 경사지게 떨어지는 자연층 위에 정지작업을 거쳐 판축법으로 토루를 쌓고, 내벽과 마찬가지로 상부에 割石 또는 川石을 깔아 마무리하였다. 내벽과 외벽의 석렬은 중심토루로부터 거의 동일한 거리에 축조되어 있어 계획된 축성 의도를 볼 수 있다. 이상 확인된 규모만 보더라도 성벽의 폭이 43m, 높이 11m가 넘는 대규모이고, 조사 구간이 협소하여 내외부로 확장 조사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하부로 내려가면서 그 규모가 더 증대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풍납토성이 현존 국내 최대 규모의 판축 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약 3.5k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전구간을 축조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실로 대단한 공권력을 갖춘 國王 외에는 감당할 수 없는 大役事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성벽의 구조와 축조 방법의 차이에 따라 정확한 작업량 산출이 곤란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투입된 인력을 파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하더라도 풍납토성의 축조에는 어림잡아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 唐代까지의 각종 제도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 『通典』의 拒守法에 근거한 공역기준으로 풍납토성을 총길이 약 3,500m, 기부 폭 약 30m, 높이 8m, 상부 폭 15m로 가정한 상태에서 산출된 작업량이 약 1,050,000명의 공역임을 추산한 글이 발표된 바 있다.(朴淳發, 「百濟 國家의 形成 硏究」, 서울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8).
따라서 『三國志』 東夷傳 韓傳의 기록을 근거로 馬韓과 弁辰의 인구 규모가 一國당 평균 2,000戶 내외에 약 1만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 金貞培,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學校 出版部, 1986.
풍납토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이러한 대역사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百濟'라는 거대한 국가권력이고 그 중심에 서 있는 풍납토성이야말로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5. 맺음말
이상 백제 한성시대의 실질적인 첫 도읍지라 할 수 있는 하남위례성과 관련된 제반 연구성과들을 검토한 후, 최근 발굴조사로부터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떠오른 풍납토성의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하남위례성의 실체를 살펴보았다.
우선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왕 원년조에 묘사된 하남위례성의 입지와 그간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직산, 광주고읍·춘궁리 일대, 몽촌토성, 교산동토성 등 제 지역의 입지적 특성을 검토한 결과 북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고 남으로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토성 주변이 하남위례성의 제일 후보지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風納土城은 1997년 이래의 발굴조사 결과 내부에서 16m 이상의 대형 石造 建物址와 祭祀 遺構, 그리고 대형의 6각형 주거지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특수 유구들은 기존의 백제시대 유적에서 유례가 없던 것으로서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 판단된다. 특히 풍납토성에서 특징적으로 출토된 수막새와 전돌·초석·토관 등은 당시 일반 민가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중요한 유물들로서 풍납토성의 특별한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중국제 시유도기편과 도자기류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기도 하여 당시 풍납토성에서 행해졌던 활발한 대외 교류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후 1999년 실시된 풍납토성 동벽에 대한 절개조사 결과 풍납토성이 폭 43m, 높이 11m 에 달하는 3.5km 이상의 국내 최대 판축토성으로 밝혀짐에 따라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이와 같은 풍납토성의 축조는 성벽을 쌓는데만도 연인원 100만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의 인구 규모와 사회 구조 등을 고려할 때 고대국가로서의 '百濟' 왕권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역사로 볼 수 있다.
한편, 이상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풍납토성은 기원 전후부터 한성백제 멸망기인 5세기 후반대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등 과학적 절대연대로도 입증된다. 특히 성벽은 중심구간을 1차로 쌓기 시작하여 나머지 구간을 덧붙여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初築年代는 기원전 1세기∼2세기대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고고학적 증거로부터 풍납토성은 백제 한성시대의 첫 왕성인 '河南慰禮城'임에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한성백제 도성으로의 조건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한강의 범람 방지 및 왕성 방어를 위해 제방적 성격으로 축조한 삼성동∼암사동에 이르는 토성의 흔적을 들 수 있다. 또한 풍납토성 서남쪽에 조성된 석촌동·방이동·가락동 등의 왕릉급 고분군도 풍납토성의 왕성 가능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이 밖에 삼국시대 도성의 특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평지에 축조된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의 존재인데, 아직까지 확실치는 않지만 풍납토성 동쪽과 남쪽의 배후로도 전략적 요새로서의 二聖山城과 南漢山城 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인지된다.
한편 풍납토성으로 비정되는 하남위례성의 축조 이후 꾸준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도모한 백제는 고구려와 낙랑·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3세기 중·후반경 전략적 요충지로서 夢村土城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확대 정비된 도성이 곧 責稽王∼比流王代에 등장하는 '漢城'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구조가 한성백제의 멸망시인 蓋鹵王代까지 이어져 '北城'과 '南城'의 구조로 묘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 풍납토성의 최신 발굴조사 성과를 통해 하남위례성의 실체를 고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강동·송파 일원과 하남·광주 등에서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가 계속적으로 제시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남위례성과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이유로는 역시 『三國史記』 등 삼국시대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 논란이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 한성시대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향후의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 기록에 대한 비교 연구는 물론이고, 한성시대 이후의 웅진시대·사비시대, 인접국가인 고구려·신라의 도성제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 삼국시대 도성제의 모태가 된 중국의 도성제와도 종합적인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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