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도성...부아악

吾心竹--오심죽-- 2009. 1. 12. 23:02

백제 도성 - 부아악負兒嶽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에서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뒤의 상황이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가서 살려 했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帶], 동으로 큰 산[高岳]을 의지하고[據],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며[望] 서로는 대해大海가 막았으니[阻] 이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치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살았다.

백제의 첫 도읍지가 어디인지는 미스테리다. 최근에 직산은 백제의 첫 도읍지를 자기네 고장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오랫동안 직산은 백제의 첫 도읍지로 여겨졌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주석을 통해 "위례는 지금의 직산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 시초이다.

훗날 서거정이 직산의 제원루濟源樓에 올라서 "제원"을 "백제의 근원"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서거정 자신도 직산이 일국의 수도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부아악이 여기서 200리나 떨어져 있는데 어찌 살만한 곳으로 골랐으며, 또 이른바 강이란 무슨 강을 가리키는가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갈 길이 바빠 한 번도 들어가 볼 겨를이 없었고, 그 지세를 바라보니 편협하여 가득히 차 있는 부여의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이 아니므로 마음 속 깊이 스스로 의심했다.

그러나 서거정은 책자들을 참조해서 백제가 처음 직산에 도읍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처럼 말한다.

온조 이후에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광주廣州다. 그 후 다시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요, 뒤에 금강으로 옮긴 곳은 지금의 공주며, 또 사자하泗泚河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서 "제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지역에도 있으며, 부아악은 북한산이니 직산에서 너무 멀고, 도읍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옮긴 것이며, 직산은 문주왕이 달아나며 공주에 도읍하기 전 잠시 머무른 임시 거처였을 거라는 추정을 한 바 있다.

정약용은 부아악에 올랐다는 온조 원년의 기록이 온조 13년의 기록이 잘못 쓰인 것이라 생각했다. 온조 13년의 기록은 이렇다.

봄2월에 서울의 한 늙은 노파가 남자로 변했다. 범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적다. 더우기 요즘은 요망한 조짐이 여러번 일어나고 국모가 세상을 떠나시고 형세가 편안치 않으니 서울을 옮겨야 하겠다. 전일 순행해서 한수 남쪽을 바라보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

온조 원년의 구절과 이 구절은 매우 모순되어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의 기록은 잘못 되었을 수밖에 없다.

1. 두 기사는 모두 하남, 즉 강 아래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때 강은 한수로 지금의 한강이다.
2. 한강 이남에서 한강 이남으로 옮기는 경우 북쪽을 방어한다는 의미가 없다.

이때 직산에서 하남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애초에 기사(13년)가 의미하는 바와 충돌한다. 따라서 온조 원년에 도읍한 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위 기사들은 모두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1. 우선 13년조 기사를 보면 한수 남쪽을 이야기하고 나서, 정작 위례성 민호는 한산 아래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한산 아래가 한강 이남일 수는 없다.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이 기사가 천도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아직 천도할 성을 못 세웠기 때문이다. 이해 9월조 기사와 그 다음해 기사를 보자.

9월, 성곽을 세웠다.
14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이무렵 위례성은 뭔가 큰 일이 벌어졌던 것이 틀림없다. 천도는 물론 급히 민호를 옮겨야할 만큼. 그리고 이 일이 5월에 결정된 뒤 9월까지 성곽을 쌓고, 그 후 궁궐을 만들어 정월에 천도를 한 것이다. 심지어 궁실은 15년 정월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리고 17년에는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을 불태워버렸다. 위례성은 그만큼 취약했던 것이다. 그후 하남에 있는 도읍도 위례성이라 불렀던 것이 아닐까? 즉 하남과 하북의 성을 모두 위례성이라 부른 듯 하다.

2. 역시 13년조 기사에서 동에 낙랑이 있고, 북에 말갈이 있다는 말은 낙랑을 평안도 일대에 비정하는 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신채호는 이 때문에 [삼국사기] 기사에는 동과 서를 혼동한 것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로도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함흥으로부터 강원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 낙랑의 영동7현이었던 점을 주목한다. 이 때문에 후일 이 지역에 최리의 낙랑국(호동왕자가 멸망시킨)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으며, 온조가 언급한 부분도 이것이라 생각한다. 서기 30년에 낙랑 남부도위가 폐지된 후 3세기 초에 대방군이 설치될 때까지 낙랑의 남쪽 지방은 권력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이곳에 말갈족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들이 북쪽의 말갈이었을 것이다.

3. 따라서 온조 13년조 기사를 놓고 보면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있다가 낙랑-말갈 등의 침입에 의해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한강 남쪽을 지목하고 있는 원년 기사와 충돌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원년 기사가 13년 기사가 잘못 기재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정약용은 왕모가 죽은 후 형제가 갈라섰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라 본 것 같다.

4. 그런데 문제는 원년 조 기사에 나오는 저 산이름이다. 부아악. 이것은 지금의 북한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한산 위에서는 지금 백제 궁성으로 지목하고 있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 김포 평야가 보일 뿐이다. (한도사님 감사)

부아악이 북한산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신라의 화엄십찰 중 하나인 청담사靑潭寺가 북한산 바로 아래인 은평구 진관내동에서 발견되었다. 최치원이 신라 효공왕孝恭王 8년(904)에 쓴 [당대 천복사 고 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 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고승으로 의상과 친분이 돈독했다)에 보면 청담사가 부아산에 있다고 나온다.

漢州負兒山靑潭寺也


진관내동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청담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장

온조 원년의 기록과 13년조의 기록이 후대에 혼동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온조가 처음 올랐던 산이 북한산이라면, 첫 백제의 도읍은 북한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 아니었을까?

하남으로 옮겨갔던 백제의 도성은 근초고왕 때 다시 강북으로 옮겨진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근초고왕 26년(371)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을 북성, 하남에 있던 성을 남성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삼국사기] 개로왕 21년(475)조를 보면

고구려의 대로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북성을 공격해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옮아치니 성내가 공포에 질렸다.

개로왕은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서쪽문을 통해 달아나다가 재증걸루 등에게 붙잡혀 처형 당하고 만다. 위 기사로 볼 때 백제의 도성이 북성과 남성 두 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약용은 이 북성, 남성이 모두 한강 이북에 있는 성으로 생각했다. 한강 이남에 있다면 서쪽으로 달아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정약용이 현재의 하남 지방으로 위례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면 서쪽으로 달아나는데 문제가 없다. 이때 또 한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개로왕이 아차성 밑에서 처형되었다는 기사다.

아차성이란 지금의 아차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달아나던 개로왕을 아차산 쯤에서 잡아서 처형했다면 남성도 강북에 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들은 개로왕을 결박하여 압송했다[縛送]. 굳이 압송한 것을 보면 한강을 건너와서 처형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록이 소략하니 후인은 구구억측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저 바라는 것은 이번 청담사지 발굴처럼 옛 흔적을 이 땅 스스로 내보여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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