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대륙 백제설...온조 건국지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12:20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의 기원과 사서로 본 위례성의 위치
(2부)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의 왕성인가?

 
위대한 제국 백제를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가두어 놓은 식민사학계와 가지마 노보루를 고발한다.

우리는 백제라는 국호는 건국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에는 십제(十濟)라는 국호였다가 형인 비류가 죽고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귀의하자 국호를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약자로 백제로 고쳤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海, 산동성 동남쪽의 지명)>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본시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설명한다. 

▲   백가제해의 설명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 맞는지 민족사학계의 이론이 맞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한단고기>와 <사기>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여하튼 백제라는 단어가 처음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遼) 중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년.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虞)라 함은 3황 5제의 하나인 순임금을 말함이고, 요(遼)라 함은 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그 일대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백제와 관련된 낯익은 지명들인 한성.대방.백제 등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가 백가제해의 준말이 아니라 지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지명을 가져와 국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첨언을 하나 하자면,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에 있는 요수가 중국에 의해 점차 동으로 옮겨진다. 즉 동북공정은 수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초 요수(遼水)는 황하나 요라는 지방 근처를 흐르는 그 지류였으나, 그것이 하북성 난하로 옮겨가고, 요나라가 들어서서는 현 요하가 요수가 된다. 현 요하와 옛 요동.요서의 중심이 되는 산서성 요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요동하면 현 요하 동쪽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안시.요동성이 현 요하 주변이 되고 평양이 대동강 평양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대주의 매국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을 국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아직도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가!!! 

▲   요동 요서의 구분의 기준은 산서성 요라는 지명이다. 이 근처를 흐르는 요수가 -->난하-->현 요하 로 바뀌면서 역사가 왜곡된다. 요나라가 들어서면서 현 요하를 요수라 했으니 삼국시대의 요하는 산서성 요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황하나 그 지류를 말함이다.

조선은 44세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린다. 그 중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번조선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 한나라 땅 아니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   기자는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기자가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고 식민사학계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었다.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자조선의 기준은 위만조선에게 망해 대동강 평양에서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한반도에 삼한을 세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역사를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놓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하여 삼한을 세운다. 유와 연은 고구려, 제와 노는 백제, 오와 월은 신라와 가야와 왜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삼한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엄청난 역사왜곡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시조인 온조의 건국지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여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단고기>에는 백제국본기가 따로 되어있지 않고 백제에 대한 내용이 <고구려국본기>에 일부 나온다.

(인용)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 데 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南至帶水)까지 이르고,
동으로 빈.대해(東濱大海)까지 이르고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하고,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는 것이 다르다.) 

▲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딸로 고주몽의 부인이 되는 소서노는 어하라의 여왕이 된다.  한재규선생이 그린 소서노의 영정이다.
 
그런데 위 문장이 <한단고기> 번역본마다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남지대수(南至帶水)가 다른 본에는 북(北)지대수로 되어있고, 동빈대해(東濱大海)가 다른 본에는 서(西)빈대해로 되어있다. 경인(庚寅)년 3월은 다른 본에는 기묘(己卯)년으로 되어있다. 즉 동.서.남.북을 고의로 바꾸어 위치비정을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조작되어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지적했다. 

▲   일본에서 출판된 <한단고기>에는 북지대수/서빈대해로 되어 있다. 독자들은 새겨서 읽어야 한다.

위의 남지대수/동빈대해 내용은 이유립선생께서 소장한 진본 영인본 <정본 한단고기> 내용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유립선생이 쓰신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라는 책과 대조해보니 남지대수/동빈대해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서의 지리지에서 동.서와 남.북을 반대로 조작하면 그 나라의 강역이 전혀 달라진다. 그럼 남지대수/동빈대해를 북지대수/서빈대해로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한단고기>를 일본에서 최초 출판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로 보인다. 그럼 왜 일본은 백제 건국지의 방위를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고쳐야 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다음 연재인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에서 밝혀진다. 이번엔 지면상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   <정본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와 동빈대해로 나와 있다. 가지마 노모루는 출판시 이를 반대로 했다. 이는 백제를 한반도로 집어 넣기 위한 조작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 기록은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의 기록인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양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는 기록과 같다. 해서 위의 가지마노보루의 북지대수/서빈대해는 분명한 조작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참고로 而瀛濱海之陽의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 때는 햇빛이 먼저 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영과 빈(濱)은 분명 지명이다. 그런데 서빈대해를 서쪽변은 대해(황해)라고 엉터리 해석을 하고 있다. 동서를 바꾸면 대륙에 있던 백제를 한반도로 보낼 수 있다고 본 것일까? 그럼 다른 사서의 기록도 그렇게 조작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났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은 “이 하남(河南)의 땅은 北으로 한수를 띠고 東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였으며 南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西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보기 어려운 천험 (天險)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다. (참고로 대(帶)자는 ‘띠를 두르다’의 뜻인데, 왜 하필 이 글자를 썼는지? 한단고기의 대수(帶水)와 혼돈된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며 <한단고기>와 비슷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미추홀을 식민사학계는 인천으로 비정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며, 민족사학계는 천진 근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서는 패수를 북경 근처를 흐르는 현 조하(潮河)로 말하고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己亥38年 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 浿水今潮河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  조하는 북경과 천진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백하와 합쳐져 조백신하로 불리우는 강이다.
 
참고로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발간한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조하가 아니라 현 하북성 동부 난하로 적혀 있다. 가지마 노보루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일본인이라 그의 조상인 왜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역사의 스토리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가고 있다. 

▲  현 북경 지역에는 고구려 유리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근처 어딘가가 분명 초기 고구려의 수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서노 여왕이 건넜다는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대수는 그 한자로 보아 대방(帶方)의 땅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대방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하북성 석문(石門 현 석가장)과 접하고 있는 대방이 확실하다. 그 대방의 땅을 흐르는 강이 있으면 필시 대수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대방 지역을 흐르는 큰 강은 없다. 작은 강은 있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강을 대수라 했을까? (대수가 어떤 강인지는 다음 연재에 언급한다.)

여하튼 이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다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   2부에서는 황하 변천도를 보면서 초기백제의 도읍지를 추적하기로 한다.
[제휴/pluskorea ]
기사입력: 2008/05/27 [13:39]  최종편집: ⓒ 뉴스터치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들..
대륙의 동부를 호령한 해양대제국 백제를 밝히는 다른 기록들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의 마지막 4부입니다. 지금까지 1부 ~ 3부에서 백제의 패망전쟁과 부흥운동 기록을 통해 분석한 백제의 왕도는 어디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본 3부에서는 전쟁 기록 이외의 나머지 기록을 통하여 백제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백제가 대륙(산동성)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가 많으나,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여기서 황하와 태산이라 함은 산동성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하와 태산으로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땅이라고 <삼국사기>는 밝히고 있다. 이 기록 하나만 봐도 백제는 확실히 산동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백제가 중국 대륙의 산동성에 있었다는 다른 근거로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  백제의 옛 영토는 황하와 태산이라고 <삼국사기>에 엄연히 씌어있다.  황하와 태산이 한반도에 있는 강과 산인가?

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인구로 본 백제는 대륙인가? 한반도인가?

<삼국사기> 및 모든 중국의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6만호면 대충 4~5백만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런 인구가 과연 한반도에서 가능했을까? 2가지 방법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는 단순비교이다. 통계청이 1992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종(1519년) 때와 현종(1660년) 때 조선 전체의 인구가 약 76만호이다. 백제 멸망 900~1000년이 지난 조선 전체의 인구와 백제 멸망 시의 인구가 같았다면 백제는 조선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줄어들 수가 없다. 특히 인구=노동력이었던 옛날과 같은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말이다. 아래는 두 번째로 분석비교이다.

(1) 사서에 나오는 백제 인구의 변화

신  라 :  18만호 (수도만) (삼국유사)

백  제 :  76만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  려 :  210만명 (송사 : 백제멸망 600여년 후 약 35만호)

조  선 : (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 태조 6년 (1406년 : 백제패망   740년 후) :   153,404호 (370,365명 : 한성제외)
- 중종14년 (1519년 : 백제패망   860년 후) :   754,146호 (3,745,481명)
- 영조 8년 (1732년 : 백제패망 1,100년 후) : 1,713,849호 (7,273,446명)

* 백제 패망 730 여년 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
- 경기 + 충청 +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 48,993호

(2). 분석

- 백제(4~5백만) > 고려(210만) > 조선 초(37만-한양제외) : 백제가 조선의 약 10배

- 백제(76만호) > 경기 + 충청 + 전라도 (700여년 후 5.6만호) : 백제가 13.5배

- 신라 수도 > 경상도 (700여년 후) : 신라 수도가 경상도 전체의 약4배

(3). 결론

-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백제의 영역 > 고려의 영역, 고려는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과학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삼국의 위치를 찾아보니 백제는 발해만 일대가 일식의 최적관측지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식민사학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과학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상대 신라의 최적관측지는 양자강 중류이고, 백제는 발해만 일대로 북경이 최적관측지로 나와 있다.
 
일식분석도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최적관측지를 찾는 것과 둘째는 일식을 볼 수 없는 네가티브(Negative) 방식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가 있는데 묘한 결과가 나타난다. 최적관측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인데, 삼국사기에는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구분이 없어 부분일식까지 볼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어진다. 여하튼 고구려의 최적관측지는 바이칼호 동쪽 내몽고지역, 백제는 북경지역, 신라는 양쯔강 중류, 왜는 남지나해상으로 나타난다.

박창범교수의 네가티브 방식이란 단 한번이라도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지워나감으로서 그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인데, 여기서도 삼국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여기에 반박자료를 낼 학자는 전 세계에 아무도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과학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비정한 압록강변 집안과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일식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식민사학계가 집안을 고구려의 수도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집안으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비가 옮겨진 후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성이 중국/일제에 의해 집안으로 비정된다. 

▲  대동강 평양과 압록강변 집안은 고구려의 일식을 한번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백제의 부분 일식을 볼 수는 있으나, 신라의 2개의 일식은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는 초기 신라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한반도는 백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라는 후기 일식은 한반도가 최적관측지로 나타난다. 

기상으로 본 백제와 신라의 위치는?

다음은 기상청에서 21년간 근무했던 정용석씨가 쓴 책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에 보면 삼국시대 기이한 기상 기록이 나온다.

백제 동성왕 4년(A.D 482) “겨울 10월에 큰 눈이 한 길(丈)이 넘도록 내렸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같은 해 신라에는 큰 눈이 왔다는 기록이 없다. 이렇듯 한쪽은 홍수와 가뭄과 폭설이 있었는데, 다른 쪽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가능한 일인가?

백제 기루왕 32년(A.D 108) “봄.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해 신라의 기록에는 “여름 5월 큰 물이 져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자를 10도에 파송하여 구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극심한 가뭄인데, 신라는 홍수가 났다니 이게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황충(蝗蟲 메뚜기데) 기록이 유난히 많다. 이 황충은 우리나라 논에 있는 낭만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나오듯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떼가 지난 곳에는 풀잎 하나 남지 않고 오로지 적토(赤土)만이 남는다. 즉 엄청난 자연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메뚜기떼는 한반도에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메뚜기의 날개 특성상 황해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기록에 황충이 있다는 것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의 기록을 보면 이 황충이 나타난 기록이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삼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는?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발해만 연안에 백제가 있었다. 즉 하북성, 산동성 유역에 백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신당서 동이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지명들. 영과 빈은 발해만에 위치한 지명들이다.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편과 <주서(周書)>권49 열전 제41 이맥상편 백제조에서 "백제는 진(晉), 송(宋), 제(齊), 량(粱)때부터 강좌(江左, 산동성 강소성 등의 양자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사신을 보내 번(藩)이라 칭하며 봉직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송서(宋書)> 권97 열전57 이만(夷蠻)편 백제조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지역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남사(南史)> 권79 열전 제69 이맥 하편에서도 "진(晉)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을 경략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   진평은 고성과 진성의 2군을 말함이다. 요서의 기준인 요는 산서성 태행산맥 안에 있다. 그 서쪽이 백제의 영토이다.

<남제서(南齊書)> 에는 백제의 동성대왕이 북조의 최강자 북위의 수십만 대군을 5차례나 승리하고 동부 평야지대에 7명의 태수를 임명한 기록이 있다. 
 
▲   대륙 동부 평야지대는 전부 백제 동성대왕이 다스린 영토였다. 북위는 산 속에서 숨어 있다가 5번이나 백제를 공격하지만 전패했다. 강시단야 즉 북위병의 시체가 들에 널리고 핏물이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제가 수나라 요동정벌의 향도가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백제왕 창(위덕왕)이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왕(영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鄕導)가 되려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군대의 선도란 군대가 행군 시에 길 안내 및 첨병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맡는 중요한 역할이다. 향도가 본대를 계획한 행군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여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25사인 <수서>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개황(開皇) 18년(A.D.598년)에 창(위덕왕)이 그의 장사 왕변나를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수군(隋軍)의 선도(先導)가 될 것을 청하였다. 문제는 조서를 내려 “(내용 생략)”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보냈다. 고구려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開皇十八年,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屬興遼東之役,遣使奉表,請為軍導.帝下詔曰:往歲為高麗不供職貢,無人臣禮,故命將討之.高元君臣恐懼,畏服歸罪,朕已赦之,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高麗頗知其事,以兵侵掠其境.)

섬서성에 있는 수나라가 하북성과 요동에 있는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어떻게 수나라 군대의 향도를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겠는가? 수나라 군대보다 하북성과 요동지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바로 백제가 그 지역부근에 있으면서 고구려와 이곳에서 자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최치원(857 ~ ?)은 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즉 백제는 한반도의 충청도와 전라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중동부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 위치를 <사기>에서 찾아보면, 연은 산서성 북쪽이고, 제는 산동성 북쪽이고, 노는 산동성 남부이고, 한나라때 유주는 하북성 북쪽이다. 오는 강소성 남부이고, 월은 절강, 복건성 등지이다. (유.연.제.노.오.월의 위치는 지도 참조) 

▲   고구려와 백제가 강병 백만으로 차지한 유. 연. 노. 제. 오, 월의 위치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말갈(靺鞨)의 전쟁 기록이 많다. 그리고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기록도 있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말갈과 전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말갈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단 말인가? 교과서에는 백제와 신라 위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말갈은 허위 기록이란 말인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 유역으로 초기 백제의 도읍지였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때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을 평양에 운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양하도(兩河道)라는 지명이 황하 하류의 북과 남을 통칭하는 명칭인 것이다. 현 사학 이론대로라면 김유신이 한반도에서 황하하류에 와서 군량을 조달해 대동강 평양으로 군량을 싣고 갔다는 얘기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이는 백제의 땅이었던 양하도에서 김유신이 군량을 조달해서 운송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백제 패망시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받은 벼슬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다.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  중국 지도에도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고, 양하도는 황하 하류의 북부와 남부를 통칭하는 지명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 21대 개로왕편에 보면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식민사학계는 이 제방을 현 한강변 풍납토성이라 하며 숭산을 검단산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이 제방은 백제 개로왕이 황하변에 쌓은 것으로 숭산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권법으로 유명한 소림사(少林寺)가 있는 산이 바로 하남성 숭산인 것이다. 

▲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황하변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싸운 석문(석가장)과 대방(백제의 초기 건국지)이 보인다.
 
이 숭산(崇山)과 초기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름만 있고 위치가 미상인 곳으로 적어 놓은 곳이다. 게다가 침현(沈峴)과 평원(平原) 등 백제패망 시 언급된 지명도 위치미상이라 했다. 이 지명들이 만일 한반도 안에 있었으면 당대의 석학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 지명들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 몰랐던 것인데 어떻게 이런 지명이 한강 이남에 있단 말인가?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는 고구려의 관직명이다.
현 풍납토성은 백제의 성터가 아니라 고구려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관직인 것이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는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이를 백제의 유물이라고 발표하였다. 백제의 명문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풍납토성이 백제의 토성이라는 발표는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거기서 발견된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식 무덤 양식이다. 백제도 같은 방식의 무덤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공주의 무녕왕릉과 완전히 양식이 다른 피라밋을 어떻게 같은 백제왕의 무덤으로 발표할 수가 있을까? 한 나라에 2개의 무덤양식이라? 이건 국민을 속인 기만행위가 아닐까?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피라밋을 식민사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도 고구려 관직명이고 피라밋도 고구려 양식인데 백제의 유물이라니?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보니 한반도에서 그 유물이 안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식민사학계는 백제를 한반도로 밀어 넣기 위해 억지로 풍납토성을 백제 유물로 둔갑시킨 것으로 본다. 그리고는 의혹투성이인 백제사마왕릉을 무녕왕릉으로 비정한다. 그래야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가 있었다는 이병도의 반도사관을 정착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일제가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을 아직도 숭상하고 신봉하는 식민사학계의 작태가 한심스럽다.

비록 백제는 대륙에서 태어났다가 대륙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나라이지만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라 한반도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조금 보였다고 해서 백제의 본거지가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다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다. 이미 필자는 부여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근거지는 산동성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그럼 왜 일제는 부여를 백제의 왕도로 조작했을까?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하기 위해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조작한다. 역사도 없던 일개 섬나라 민족이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역사를 가진 민족을 힘으로 지배하려다보니 우리 조상의 역사를 축소 왜곡시킨 것이다. 20만권이 넘는 고대 사서를 불태우고 중요한 사서는 다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켰다.

그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 등이 해방 후에는 메이저급 주요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게 된다. 그 학맥이 이어져 지금 대한민국의 강단에는 이병도의 후학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은 게을리 하고 자기 자리지킴을 위하여 스승들의 식민사학을 더욱 고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큰 비극이며 문제인 것이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앞세워 삼국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하루빨리 역사의 진실을 밝혀 중국의 주장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밝혀야 할 것으로 본다. 역사의 진실 차원에서 중국을 본다면 그들은 섬서성 부근 산속에 있던 산적일 뿐이다. 한족이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뿐일 정도로 중국은 원래 역사가 없는 민족이다.

중국의 전체 역사에 300년 이상 된 통일국가가 없었다. 700~1,000년 사직의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계속 분열이 되어 있었고, 나라가 섰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곤 했다. 이런 초미니 국가들이 어떻게 우리 삼국과 대등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비록 잃어버린 땅이지만 중국대륙 동부는 엄연히 우리 조상들이 활동했던 무대였음을 밝혀야 한다. 조상들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찬란한 역사라도 제대로 되찾자는 것이다. 

[제휴/pluskorea]
기사입력: 2008/05/19 [14:00]  최종편집: ⓒ 뉴스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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