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대륙 백제설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12:14

일제가 조작한 백제 왕도가 부여인가?
[충격]한순간에 사라진 해양대제국 백제의 패망지는 중국 산동성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일제가 조작한 백제의 왕도 부여
(2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왔을까?
(3부) 백제멸망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인기가수 주현미가‘쌍쌍파티’로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불러 히트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백마강>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위 노래는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수도 사비성에서 패망하는 백제를 그린 노래로 애절함이 서려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항상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것이 주현미라는 가수의 노래솜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 잃은 망국의 아픔이 절절이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연 백제가 패망한 사비성은 과연 충남 부여가 맞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노래 가사에는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  부여의 낙화암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원래 금강의 지류인데 부여 근처에 와서 역사적으로만 백마강으로 둔갑한다.

전 문화재청장과 일본인이 답사한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가?

아래는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의 베스트셀러였던 기행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329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인용)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아니, 부여가 아직까지 읍이었단 말예요?”

“아직도 관광호텔 하나 없다고요?”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 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Km도 안되는 소읍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도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 부여에 대한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인 것이다. (인용 끝)

일본인들은 백제가 일본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고도였다고 하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전부 실망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고도가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풍납토성,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로 조작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7년 일본인이 쓴 기행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용)“정작 부여에 도착하니 시가지라고 하는 것이 함석지붕과 나무판자집들이 두 블럭 정도 줄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안쪽으로는 울타리도 없는 초가지붕에 박이 널려있는 평범한 시골풍경뿐이어서 도저히 자신이 생각한 부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여를 다녀온 뒤 그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부여를 가본 적이 있느냐 물으니 모두들 아직 못 가봤다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부여는 이처럼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 자게는 실망을 주는 곳으로 어떤 답사객은 “꼭 네다바이 당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현재 부여에 가서 백제 유적으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또 있다면 반은 뭉개진 해발 100m의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가의 낙화암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 지도 모른다. 엉겹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 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인용 끝)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꼭 이 책이 들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전문가의 눈에도 “부여는 과연 백제의 왕도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는 부여의 유적지들. 저렇게 좁은 곳이 700년 사직의 수도라니 말이 되는가?
 
그렇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의 느낌대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아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노랫말로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있었다고 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생겨난 엉터리 사학이론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어 전라도 백제, 경상도 신라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지역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지역주의가 얼마나 허황되고 창피스럽고 무지한 것인지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증거

현 국사책에 나오는 백제의 줄거리는 백제는 B.C 18년 온조대왕이 하남 위례성(서울)에 개국했고,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병합하고 대륙에 진출해 요서/진평에 무역기지를 두었으며, 21대 개로왕 때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하고, 26대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교과서 내용은 사실(史實)과 많이 다르다. 백제의 본거지는 대륙의 산동성이고, 패망도 역시 산동성에서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잠시 대륙으로 진출한건지, 아니면 백제는 아예 대륙에 있었는지가 논쟁의 관건이다. 우선 아래는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1)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상하게 백제의 역사기록은 대륙이다.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한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대륙이고, 동성대왕의 궁전인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3)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를 멸하려면 중국 땅에서 대륙백제와 먼저 전쟁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황해를 건너왔다면 당나라와 해상강국 백제와의 해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5)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6) 만약 한반도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 크기의 땅을 수백 년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일대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9) 그 외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다. (향도,조공,제방,기상,특산물, ...) 


▲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 일본서기, 고려사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도표. 이 과학적 근거를 반박할 사학자들은 나와보라. 백제의 최적관측지는 분명 발해만 근처 북경지역이다. 북경지역은 백제의 개기일식을 가장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상대신라는 201년 이전, 하대신라는 787년 이후, 왜는 628~709년 이다. 
 
나중에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여 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내저성 비문.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다.

경기도 시흥시는 관내의 소래(蘇來)포구를 소정방이 왔기 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또 부여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엉터리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왔다는 것은 백제 패망지이므로 소정방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백제의 위치를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   이어지는 백제에 대한 기사를 보시려면 이 지도를 참조하시면 이해가 빠르다.

최후를 맞는 백제의 수도는 어디?

아래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기록에 의한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일 백제가 천하통일을 했다면 의자왕은 아마 명군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낸다. 사학계는 대야성을 합천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하튼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로 몰리고 자체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군사력이 없던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다.>

여기서 이상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겼다는 기록이다. 현 역사이론이라면 육지에 있는 당항성과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통로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통로가 끊겨졌을까? 즉 이 이야기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당나라와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은 것을 그린 지도. 백제 멸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라는 진덕왕 때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국가의 위기도 하나의 이유지만 개인적으로 딸의 복수를 위한 적개심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이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이성계의 조선이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때 신라왕이 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보통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방의 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세적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요동은 하북성에 있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백제를 정벌하는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산동성을 의미한다. 즉 당나라는 산동성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간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이동과 한반도의 지도와 지명이 없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아예 안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나라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갔다면 지명부터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  백제의 중심 지역.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한강변이 아니라 황화변이다. 숭산은 하남성 소림사가 있는 지역이다. 거기까지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이야기이다.  초록색 사각형 아래 항성(項城)이 바로 당항성이다. 백제의 패망지는 바로 이 지도의 산동성 안에 있다. 평원, 황산, 백마하,  사성과 비성(사비성), 부흥운동의 중심지 주류성, 석문(석가장)은 신라와 당나라가 싸우던 곳이다. 최치원전에 나오는 연, 노, 제가 이지역이다.  산동성 아래가 海지방이다.  백제의 수도로 들어가면서 이곳을 지나간 것을 두고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해 마치 황해바다를 건넌 것처럼 오인하기도 한다.

여름 5월 무열왕이 김유신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하였고, 당나라는 협주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무열왕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 덕물도를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옹진 앞바다 덕적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때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당도하여 군사와 회합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하오.”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왕이 지금 대군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이라 만약 대장군이 오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리라”하였다.

여기서 이 장면은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열왕이 5월에 수도를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라면 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백제 국경까지 가는데 한달씩이나 걸릴 정도로 그렇게 넓었는지? (5월말에 떠나 6월초에 도착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상황을 보라)

당나라가 출발하는 같은 달에 이미 무열왕이 군대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고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영접케 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분명 당나라는 물길을 타고 동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니 신라 태자가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물론 없다.

또 소정방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무열왕이 5월에 먼저 출발했으니 무열왕의 금성 출발은 소정방의 백제 도착 최단40일 ~ 최장70일 전이다. 한반도 경주에서 백제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40~70일이나 신라가 왕이 직접 나서서 군사행동을 먼저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건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교과서에 나와있는 백제 패망 지도. 이것을  아직까지 믿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사학계의 잘못이 너무도 크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도 없고, 백제는 22개 담로를 건설한 해양제국이었는데 당나라가 황해를 건너려면 백제와 해전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해양강국 백제의 앞 바다에 신라 배 100척이 나타나 소정방을 영접했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안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신라 태자가 배 100척을 거느리고 영접한 곳인 덕물도는 한반도의 덕적도가 아니라 바로 대륙 어딘가에 있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로 떠나기 전에 산동백제와 전투한 기록도 없다. 그럼 그 때 산동성엔 대륙백제가 없었을까? 160년 전인 동성대왕 시대에도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전부 차지한 백제였는데, 그 사이에 대륙백제는 명맥이 끊어졌을까?

백제는 대륙에 없었고 한반도 서부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다. 대륙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7월 김유신이 황산의 평야로 나가 백제의 계백장군과 전투를 벌여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한 신라는 백제군을 격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같은 날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다. 한반도 덕적도에 6월에 도착한 소정방이 왜 이리도 늦게 기벌포에 도착한 것일까? 기벌포까지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렸다.

위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5월 무열왕의 출발에서부터 6월 소정방과 신라태자가 만나고 7월 10일 경 소정방이 기벌포에 오기까지는 최단 40일 ~ 최장 70일 걸렸다. 소정방이 6월말에 덕적도에 도착했다면 기벌포까지는 최소 10일 이상 걸린 것이고, 그렇다면 5월말에 무열왕이 금성을 떠났으면 최단 30일간 ~  5월 초면 최장 60일간 신라의 무열왕은 어디에서 뭘 했단 말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5월말에 무열왕이 떠나고 소정방이 6월 초에 덕물도에 도착했으면, 이 건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이 기벌포에 나타나는 7월 10일까지 40일간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덕물도와 기벌포는 같은 한반도라면 한반도 내에서 소정방이 이동하는데 40일이 걸렸단 말인가? 한반도 백제가 그렇게 큰가?

여하튼 무열왕 출발에서부터 기벌포에 소정방이 나타나기까지 40일 ~ 70일 걸렸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지 좁은 한반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날자 계산이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륙이 아니면 잘 설명이 안 되는 싱황인 것이다. 이 날자 계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사학계에서는 당나라가 중국에서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뭐 하러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5월에 소정방을 맞으러 먼저 출발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3~4일이면 경주에서 백제 국경까지 가고도 남음이 있는데 40~70일 전에 움직인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기록과 같이 무열왕과 김유신이 소정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도착 후 모든 작전계획이 실행된 것을 보면, 무열왕과 김유신과 소정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가 엮이지 않는다. 다들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 백마하, 주류성, 해, 사수는 사성이 있는 곳, 황산은 계백장군이 패한 곳, 래는 동성대왕 시절 임류각이 있던 곳,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 서화는 기자가 살던 곳, 바로 이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다. 패망시 지명이 여기 다 들어있다.

현 국사책의 이론은 당나라는 서쪽 바다 건너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이고, 신라는 동남부이다. 기록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먼저 만난 후 백제로 간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배가 신라바다까지 가야 하는데 백제 앞바다를 거쳐야 하므로, 당연히 신라가 황해바다 어딘가에서 영접을 했을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옹진 앞바다)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고구려/백제는 수군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백제와 전투를 시작한다. 첫 전투가 황산전투라고 치고 다음의 상황을 보자. 김유신과 계백의 5번의 전투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몰라도 최소한 10일 이상이다. (하루 전투해 져서 다음날 재정비해서 그 다음날 또 도전했다 하더라도 최소 10일은 걸린다.)

덕적도와 기벌포가 같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면 이렇게 늦게 소정방이 도착할 리가 없다.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를 만난 후 출발한 소정방의 첫 전투지인 기벌포까지 그렇게 오래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린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이후 7월 13일 의자왕이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고, 18일 드디어 웅진성에서 나와 의자왕이 항복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31대 700년 사직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의자왕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9월 3일 소정방은 백성 12,000명과 함께 의자왕을 끌고 사비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국가가 썩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잘 나가다가 적의 기습을 예측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단 몇 번의 전투에 패해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항복해 급격히 패망한 것이다. 즉 국가 실력으로 볼 때 패망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 특공대의 기습 공격에 카운타 펀치를 급소에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건 흑치상지가 벌인 부흥운동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다음 연재를 기대해 주세요. 

▲  백제 부흥 운동의 주인공 흑치상지의 고향은 중국 대륙 남단. 여기까지 백제가 있었단 이야기이다. 고향이 이곳인 흑치상지가 한반도에가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했다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봐야 한다.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그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왔다는 걸 믿는 사람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 회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2부에는 “백제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후”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 백제를 멸했나?”가 연재됩니다.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가 지난 4월 22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의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현재 브레이크뉴스 관계자는 본지 성 훈 칼럼니스트와 송기옥 칼럼니스트와의 공개적인 토론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두 칼럼기사를 함께 실었음을 독자 제위께 알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 빠른 기간에 두 칼럼니스트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실을 예정에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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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
해양대제국 백제의 활동무대는 중국의 산동성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아래 글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의 2부입니다. "1부"와 연결해서 읽으셔야 이해가 됩니다.  [백제의 왕도 부여 1부 바로가기]

고대중국의 수도가 서부산악지대인 이유

아래 필자의 글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대략적인 중국 고대국가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의 수도는 주로 서안과 낙양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다. 낙양이 동부 평야지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왜 고대 중국은 동부의 넓고도 넓은 평야지대를 놔두고 서부 산악지대에 수도를 둔 것일까? 산악지대가 평야지대보다 살기 좋아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동부 평야지대에는 동이(東夷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감히 평야로 나오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고대중국인들은 산적(山賊)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동부평야지대로 나온 것은 신라와 대진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 정도로 우리 삼국은 막강했기에 중국은 감히 동부평야지대를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그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의 최강국은 북위였다. 그 북위의 수도도 역시 산악지대로 산서성 대동시와 하남성 낙양이었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5차례나 동부평야지대인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대왕에게 완패하여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불과 백제 패망 170년 전의 일이다.


▲  남북조시대 북조의 북위도 산적 신세였다. 동부의 넓은 평야지대로 나오려고 동성대왕과 5차례 전쟁을 했지만 모두  패해 결국 산 속에서 패망하고 만다.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한 동성대왕이 파견한 7태수들.
한반도 백제가 황해를 건너가 이렇게 큰 식민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것을 격퇴시키려면 거의 대등한 병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병력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갔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그 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분명 백제는 대륙에 있었고, 주 무대는 산동성이었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남제서>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강시단야(僵屍丹野) : 북위의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즉 북위의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는 남제서의 일부 내용(15줄 324자)이 지워져 있다. 거기에는 더 엄청난 기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는 중국학자만 알고 현재 아무도 모른다. 

▲   남제서의 일부 내용이 지워져 있다. 중국은 왜 이 기록을 고의로 삭제했을까? 강시단야라는 표현까지 쓴 남제서가 왜 무슨 기록이 여기에 있길래 이랬을까? 뭔가 엄청난 비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나라도 선비족으로 다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 고구려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다. 한 핏줄이다 보니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웅을 겨루자고 수.당이 단군의 적장자국(嫡長子國)인 고구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명분이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하남성 낙양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섬서성 장안이었다. 왜 그들은 평야지대로 못 나오고 산속에 갇혀 있었을까?

그건 바로 고구려만큼이나 강력했던 백제 때문이다. 중국은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으나 힘이 약해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산 위에서 본 선망의 대상인 넓은 지역을 다 바다(海)로 보았다. 海는 글자 그대로 바다일 수도 있으나, 큰 강, 큰 호수, 큰 평야를 바다(海)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X海란 지방이 중국에 여러 곳에 있고, 그냥 海라는 육지지명도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사서에 나와 있는 海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고대 중국에는 해전 기록과 유명한 수군장수가 없다. 그건 중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적벽대전은 허구의 소설이지 그런 역사 기록은 없다. 적벽은 양자강 중류에 있고, 거기가 위.오.촉 삼국의 격전지였다. 그 동쪽의 평야지대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로 본 백제의 최후

의자왕 16년(656년)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간한다. “(전략)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겁니다.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들어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을 들어서게 하지 말며, 그 요새(혐애)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據其險隘以禦之).”

성충은 분명 강의 상류로 나가 적과 싸우라 했는데, 현 국사이론대로라면 백마강의 상류로 가서 적과 싸우란 말이다. 소정방이 배를 타고 부여를 오려면 분명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 와야 하는데 왜 성충은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이길 수 있다 했을까?  이 한마디만 들어도 성충이 말한 강은 부여의 백마강이 아니고 부여는 백제의 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기벌포를 금강 하구 장항으로 비정한 식민사학계. 장항이 군사적 요새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적의 수군은 요새 즉 험애(險隘)인 기벌포의 언덕을 들어서게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요새인 기벌포의 언덕이라 함은 바다 포구가 아니고 강에 있는 포구로 봐야 한다. 바다 포구 옆에도 언덕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강 포구 옆에 언덕이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고 성충은 기벌포의 언덕이 험애(險隘) 즉 요새라고  말하고 있다.  

사학계는 기벌포를 장항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항이 천연적인 요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서해안 포구에 요새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요새란 반드시 험한 산이 있고 천연적인 지형지물인 협곡(峽谷)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경새재(조령) 정도는 되어야 요새란 소릴 듣는다. 높은 산도 없는 서해안 바닷가가 요새가 될 수는 없다. 장항을 기벌포로 비정한 식민사학계의 거짓말이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대로 백제 땅인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에 요새가 될만한 높은 산과 깊은 협곡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산동성은 그 유명한 태산(泰山)을 비롯해 험한 산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충신 성충의 이야기 한마디만 들어봐도 백제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다음은 현 삼국사기 번역문이다. 소정방은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신라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좌평이 아뢰길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와 병났고(唐病遠涉溟海)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곤해져 있으니(不習水者在船必困) 그들이 육지에 내리어 사기가 오르기 전에 급히 들이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당나라는 협주(莢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라는 <신라국본기>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분명 <신라국본기>에는 바다가 아니라 물길(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 왔다고 했다. 그러나 <백제국본기>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이 있어, 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두 기록이 다르다는 것은 어느 기록 하나는 위작이란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누가 위작을 했건 위작을 하려면 어느 기록을 고쳐야 했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만일 어느 하나가 위작이라면 <백제국본기>가 위작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위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는 소정방이 성산,제해(지명)에서 나라 서쪽 덕물도까지 군을 이끌었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성산과 제해 둘 다 지명으로 볼 수도 있고, 성이 있는 산인 제해지방에서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산제해는 <신라국본기>의 협주(莢州)보다 더 서쪽에 있거나 가까운 지방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섭명해(涉溟海)를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하지 않고, 큰 평야인 溟海라는 지역을 지났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걸어서 지난다는 섭(涉)자이다. 진짜 바다를 배로 건넜다면 굳이 걸어서 건넌다는 섭(涉)이란 한자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 않은가??? 고대 중국인들은 큰 평야도 바다로 표현했다.

그리고 불습수자(不習者)라는 문구는 강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이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로 해석하기는 지나친 면이 있다. 진짜 바다라면 불습해자(不習者)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장 그대로라면 당나라 군대는 처음부터 배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먼저 명해 지방을 멀리 걸어 와 병이 났고 다음에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하면 신라국본기와 해석이 거의 같아진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국본기>는 위작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무대는 분명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다른 근거도 많으니 여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  평원, 동평, 황산, 백마강, 사수 등이 패망시 지명. 부흥운동의 중심인 주류성도 보인다.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으로 도독부가 설치된 곳.
 
계속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은 (생략) 신라와 더불어 기각(掎角:기병)이 되었으니, 만약 평원(平原:지명) 광야에서 대진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긴한 길목입니다. (생략) 당병은 백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며 (후략)”라고 고한다.

그러자 대신들이 말하기를 “(전략)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물결따라 내려오는 것이어서 여러 배를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이며, 신라군을 탄현에 오르게 하더라도 지름길을 경유하는 것이어서 여러 말을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략)”이라고 반대의견을 내던 중, 이미 적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5천 병사와 함께 계백장군을 급히 황산으로 보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황산을 논산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흥수와 다른 대신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바로 “백강은 도성(都城)의 요긴한 길목이고, 백강에 들어서더라도 물결 따라 내려온다.”라는 대목인데 현 부여의 백마강은 흥수와 대신의 말과 많이 다르다. 우선 길목이라 함은 백강과 도성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말함인데 현재의 백마강은 부여의 바로 옆을 휘감아 돌아 흐른다. 이 백마강이 어떻게 요긴한 길목이란 말인가?

그리고 백마강은 백강에 들어와 물결 따라 내려오는 강이 아니다. 이 말은 백강은 다른 강과 연결된 강이란 말이며, 분리되어서는 내려오는 강물인 것이다. 그래서 성충이 “강 상류로 가서 대항하라”고 의자왕에게 충언한 것으로 본다. 성충이 말한 강이 백강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부여의 백마강은 그런 강이 아니다. 소정방은 분명 바다에서 백마강 하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했다. 이는 흥수와 대신이 의자왕에게 고하는 사서의 기록과 다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여가 사비성이라면, 소정방의 병력을 막으려면 하류에서 막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지 왜 상류를 막아야한다고 성충이 말했을까? 성충이 잘못 말한 건지 현 부여의 백마강이 틀린 건지 머리 좋은 독자는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부여 백마강이 가짜인 것이다. 산동성 백마하(白馬河)는 사하(泗河)에서 분리되어 내려오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강이다.  
 
▲  산동성 백마하는 사수에서 분리되어 흐르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을 황산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백강과 사비성 중간에 황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인 논산(황산)을 지나야 서쪽인 부여(사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비 서쪽에 백강(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흘러  현재의 지형은 사서 기록과 전혀 안 맞다.

현재 사학계에서 설정한 백마강과 논산과 부여의 위치가 역사기록과 엇박자가 난다. 즉 백강, 황산, 사비 순으로 지형이 놓여 있어야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백마강(백강), 부여(사비), 논산(황산) 순으로 놓여있다. 이건 삼국사기 기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부여는 원래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가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망갔다 나와서 항복하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쓰러졌다. 당시 백제는 막강했었으나 방심하다 상대의 기습공격에 수도가 졸지에 함락당하고 왕이 항복해서 순식간에 나라가 망한 것이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무하마드 알리가 빠른 발로 다가가 휘두른 강펀치에 턱을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 되는 조지 포먼과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고,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에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백제의 인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3부에서 다시 언급한다). 동명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으로 산동성에 있다. 나머지 도독부도 다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후 백제는 부여풍 복신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왜까지 동원된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겨루는 국제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이 당나라 40만 대군이 역시 배타고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병자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절대로 건너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 만 척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우기는 사람들을 위해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  식민사학계의 이론은 당나라가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얘긴데 글쎄요? 건널 수 있을까요?
 
소정방은 과연 황해바다를 건너 왔을까?

필자는 중국에 갈 때 배 타고 가길 좋아한다. 선박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웬만해선 배를 이용한다. 배 여행은 편하고 나름대로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배는 밤을 끼고 달린다. 배를 타면 저녁식사를 하고 독주를 마시고 잠을 청한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 이유는 파도에 울렁거리는 배 멀미를 안 느끼기 위해서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때도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토하기 예사이다.

정용석씨가 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 124쪽에 보면 황해바다 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중간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인천과 청도를 항해하는 1만 톤급 뉴 골든 브리지(New Golden Bridge)란 동력선이 있는데 청도까지 21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대형 선박도 대륙연안의 급 해류 지역에서 ‘걸프 스트림’을 만나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항로를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급 해류 해역에서의 항해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연안해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한국의 연안해류도 같은 방향) 평균 유속은 0.5~0.6m/초 정도이다...(이하 생략)” 
 
▲  황해의 해류도. 청색은 육지쪽의 연안해류이고, 적색은 바다 가운데 주 해류다. 연안해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주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산동반도 앞바다는 주해류와 연안해류가 만나는 곳으로 바닷물이 빙글빙글 도는 곳이다. 여기를 중국형 목선으로 돛과 노도 없이 도만 가지고 황해를 건넜다는 것은 정신병자들이 하는 소리다.

참고로 위의 해류 사진을 보면 바다 한 가운데 황해바다의 주 해류(빨간 선)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 흐르고, 그 해류가 발해만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와 중국과 한국의 연안해류(청색 선)로 이어져 내려온다. 주 해류의 유속은 중국연안 해류의 몇 배나 된다. 이러한 해류들은 만조나 간조 시간에 특히 심하게 움직인다.

가장 물살이 강한 곳이 대련과 연태사이의 바다이고, 다음이 위해 앞바다로 육지간의 거리가 좁아지다 보니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주 해류와 나오는 연안해류가 만나 뒤엉키는 곳이다. 해서 21세기인 지금도 대련과 연태를 오고가는 쾌속선은 사고가 잘 나고, 배타고 온 사람들은 항상 배 멀미를 심하게 해 초죽음이 되어 도착한다. 이러한 급해류 지역을 1,350년 전에 목선으로 횡단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류의 방향과 속도는 같다고 봐야 한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으로 1만 척의 배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 백제로 갔다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철 동력선이 아니고 목선인데, 그런 배로 중국대륙연안 해류와 황해바다 주 해류를 횡단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과연 중국 배가 황해를 횡단할 수 있었을까? 


▲  중국의 배들은 6 종류로 모두 도형강선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   해류가 급격한 황해를 횡단하여 건널 수는 없다.  이는 윤모교수의 뗏목탐험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고대 중국의 배 모양은 위 사진과 같이 대개 6 종류로 나뉜다. 이런 배의 형태는 B.C 500년 ~ A.D 1,621년까지 지속되는데, 한결같이 돛이 없고 보트형 도(櫂)를 장착하고 있다. 이런 배를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한다. 이는 중국은 강에서만 배를 운영했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필자가 맨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바다 항해가 필요 없었던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중국의 <무비지>에 따르면 중국 수군을 대표하는 누선의 경우에도 “만약 바람을 만나면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櫂)형을 가진 배는 아무리 커도 연안 항해만 가능하지 횡단항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중국의 전선은 주로 정크선이나 판옥선(누선)과 같은 배로 대부분 돛이 없고 보트식으로 양쪽에서 도를 젓는 식이다. 만일 소정방이 산동성에서 이런 배로 출발했다면 당나라 군대 13만은 아마 전부 연안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표류되었거나 수장되었다고 봐야한다.

백제가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 된 것은 보트식 도(櫂)가 아닌 우리식의 노(櫓)를 발명해 노형해선(櫓型海船)의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식 노에다 돛을 달면 장거리 횡단 항해도 가능하다. 돛과 키와 우리식 노를 사용하여 아라비아까지 간 조상(백제)의 슬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 배는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를 끼고 대륙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고, 중국은 고대부터 산악지대에서 바다 구경을 못한 민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그래서 사진처럼 돛이 없고 보트식 도인 것이다. 보트식 도는 강에서나 통하지 바다에 나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 배는 돛도 없는데 어떻게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돛도 없이 도를 저어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 있다고 보는지? 중국인들은 팔 힘이 무척 강했나보다!!!

이렇게 바다에 열악한 중국배로 황해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류를 3번 지나야 한다.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국연안해류요, 둘째는 황해바다 가운데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주 해류이다. 세 번째는 한반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해류이다. (참고로 중국의 연안해류는 한반도연안해류보다 강하다) 황해를 횡단하려면 해류가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해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바닷물이 빙글빙글 돈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황해를 횡단할 배가 당시에 중국에 있었다고 보시는지!!!

하물며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만일 황해 한 가운데에서 사나운 주 해류를 만나고 바람까지 불어 파도까지 높으면 전원 수장(水葬)이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처럼 기상 예측을 못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다.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다가 2번이나 실패한 것도 태풍(神風)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해탄의 울렁이는 해류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무섭고 겁나는 것이다. 부산과 일본 사이의 바다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바다가 훨씬 거리가 길고 해류가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

소정방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려면 배가 몇 척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보자. 원래 전투 병력이 100이라면 지원 병력은 200인 법이다.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올 수 있는지는 고대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일언지하에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 10만이 조선에 올 때 700척으로 6번에 나누어 왔다. 그것은 병력을 수송할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도 상륙작전은 몇 번에 나누어 실시한다. 수송선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때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은 261척에 한번에 병력 25,000명을 3번에 걸쳐 실어 상륙시켰다.

현실이 이러한데,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13만 대군과 지원부대를 배 만 척에 실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다는 사학계의 이론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했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떠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김성호씨의 설에 의하면
연안항해(바다에 인접한) 능력 및 강상항해(양자강, 황하)능력에 능했던 중국민족이 이정도의 규모로 한반도로 올 수 있었는가?  

(2) 윤O철씨의 의견도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육전이 아닌 수군의 동원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뗏목탐험으로 유명한 분. 필자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리비정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3) 고대전쟁사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도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의견을 말하고 있다. 즉 군사 40만이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보급품(군량미, 말, 각종무기)이 동시에 수송이 되어야 전쟁수행이 가능한데, 그 당시 정황으로 도저히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지리 비정을 엉터리로 해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은 한반도인가 중국대륙인가? 아래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 전함의 최대승선 가능인원(최대인원 추정)을 최대 약100명과 50명으로 추정 시

(소정방) : 당군 13만 / 100명 =  1,300척 ~ 2,600척 = 당군 13만 / 50명
(부흥군) : 당군 40만 / 100명 =  4,000척 ~ 8,000척 = 당군 40만 / 50명 

과연 이 규모의 배가 산둥반도에서 금강하구로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전투병력 말고 지원부대(말,무기,식량,수레)까지 합치면 2~3배의 배가 필요한데 그게 과연 가능했다고 보는지. 세계 어디 해전사에도 이런 병력이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만 척이 넘는 배로 40만 대군이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설사 그런 숫자의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대군을 전혀 가 보지도 않은 바닷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는 것을 허락할 왕이나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3만 ~ 40 만 전투 병력이면 국가 전투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전원 물귀신을 만들지도 모를 무모한 작전을 진행할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정방과 당 고종이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40만 대군더러 도형강선(櫂型江船)인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릴 리가 상식적으로 없는 것이다. 

웬만큼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해야지, 그런 병력이 황해 바다를 횡단하여 건너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횡단이 어려우면 연안으로 붙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릴 사학자도 있을 것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연안을 따라 오려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와야 하는데 고구려 수군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식민사학자들이 중국 가는 배를 한 번 타보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백제는 분명 산동성에 있었고, 소정방은 황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중국 배는 죽어도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가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으로 보인다. 22담로까지 해외에 건설한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해군과 소정방 군대와의 해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즉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고 중국 대륙 산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입증되었다.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는 북경 부근. 북경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넓어진다. 백제의 부분 일식은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신라의 일식은 2개나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에 잇었던 것이다. 
 
패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이외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다음 3부 연재에는 “흑치상지의 백제부흥 운동과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대한 글이 실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제휴/pluskorea]
기사입력: 2008/05/08 [17:37]  최종편집: ⓒ 뉴스터치

 

 

"백제사의 묻혀진 진실 햇빛 비추어야"
<창간 1주년 스페셜> "최후 결전장, 백강은 부안 지방"(하)
 
송기옥 칼럼니스트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는 연이어 침공한 당태종의 눈에 화살을 꽂아 물리쳐  요동 땅을 호령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던 나라다운 나라였다.

백제 또한 도작문화가 발달하여 한수 이남의 환 황해권이 좁아 왜는 물론 멀리는 인도까지 무역을 한 강력한 해상왕국이었다. 한반도의 3국 중 가장 나약한 신라는 백제 의자왕 한테 46성을 빼앗겨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니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백제를 패망시키는 골육 전을 벌여 당이 오매불망,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한 안타까운 지난 역사를 더듬게 한다. 어쩌면 외세에 의해 동족상잔으로 남북이 갈라진 한반도의 비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당에게 요동 땅을 내어주고  한수이북까지 넘보는 당에게 수난을 당하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상존하였더라면 드넓은 요동의 서토를 당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신라 역시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헌신짝처럼 내어주는 애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으리라 미루어본다.
 
1300여 년 전 동양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맞선 고구려,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원정을 온 왜국까지 어울려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최후의 결전장(주류성)을 지금까지 규명을 못한 것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빈곤인지 아니면 국가차원에서 무관심한 수치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백제부흥군이 3년간 항전한 주류성과 백강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백제 최후의 결전장, 백강은 부안 지방이다’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46성을 빼앗기고 나라가 존망에 처할 때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까지 패망케 하여 3한을 통일하였다지만 결국 당에게 드넓은 고구려의 요동 땅을 내어주고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을 두고 한수이북을 차지하려는 계략에 시달림을 당하는 등 오히려 나라를 좁혀먹는 오류를 범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가들의 평가다.

해상왕국 백제는 서해안의 기름진 땅과 풍부한 물산으로 왜의 상국으로 우뚝 서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교역을 하였는데 상생의 원리를 무시한 채 나약한 신라를 가볍게 본 자만에 빠진 나머지 당을 끌어들여 결국 패전국으로 그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신라의 깊은 원한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궁궐터까지 흔적을 없애 승자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백제 유민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3년간 줄기찬 부흥운동을 펼친다. 필자는 그 본거지인 주류성이라는 충남의 여러 지역을 직접 답사한 내용을 향토사적 의미로 기술해 볼까한다.

 
▲ 당의 1900척의 선단과 13만 대군이 분산 주둔 했을 것으로 보는 고군산 열도-부안의 계화도 동진강과 금강과 연결되는 서해안의 주요 군사요충지


 ♢ 한산의 건지산성 일명 주류성설

충남 서천군 한산면 뒷산은 표고 170m에 달하는 금강하류에 있는 성 둘레는 1,300m에 불과 한 작은 토성으로 면적은 4,011제곱미터 이며 성안에는 군창 터가 있고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성이다. 주류성은 척박하다 하였는데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논과 밭이 있다.

일제 때 이병도 박사가 주류성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충남지역의 역사지리학자들이 지표조사를 한 결과 왜군을 막기 위한 고려 때의 성으로 밝혀져, 주류성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어졌으며 지금은 주류성에 대한 연구조차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석성이 아니다. 산이 낮고 밋밋하다. 사비성과 너무 가깝다. 복신굴이 없다. 근방에 중방성인 고사비성이 없다.


▲ 건지산성-사비성과의 하룻밤 거리로 노출된 고려 토성으로 밝혀짐

 
♢ 충남 연기 당산성(唐山城) 주류성 설

1930년대 丹齋 신채호 선생의 주류성 설로 황이돈 선생이 동조하였으며 향토사학자 김재붕 선생이 운주산성과 고사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였으나 역시 주류성이라는 구비 조건이 너무도 빈약하다. 성의 둘레는 1,430m로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충남 연기군 남면 동쪽 끝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과 인접한 성으로 동쪽에는 황우산성, 서쪽에는 기룡리 산성, 남쪽에는 갈운리산성이 연접해 있어 충남,북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군사 요충지다. 그러나 주류성으로는 여러 가지 구비조건이 미흡하여 거리가 멀다. 산 정상에는 연기군수의 이름으로 백제군의 원혼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 충남 홍성군 학산(鶴山)산성 주류성 설


1861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홍주목본 백제주류성(洪州牧本周留城)‘으로 비정했다. 학산 산성은 홍성군 동남쪽에 위치한 백제성으로 확인된 바는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징표인 福信 굴이 없으며 채탄으로 인한 작은 인공 굴이 하나 있을 뿐 복신이 칭병우거 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중방성인 고사비성(고부)이 없다.

북쪽으로는 외곽 방어선을 이루는 행정리(杏亭里)의 소구니 석성과 접해 있으며, 15km 지점에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상여(相如)가 위세를 떨친 봉수산 484고지에 2,540m의 튼튼한 임존성(任存城)이 바라보일 뿐이다.
 
임존성은 부여가 함락당한 직후 복신, 도침, 흑치상지가 힘을 합하여 백제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부여를 재탈환을 시도하여 초기 부흥운동에 위세를 떨쳤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퇴당하여 부안주류성으로 남하하게 된다.

향토사학자 박성흥 선생이 학산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여 1989년 12월 세종문화회관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주류성고’를 발표 한바 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백강은 아산만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또한 별다른 개연성이 없어 충남 지방 사학자 측에서는 전북 부안 주류성에 위임 할 정도로 지금은 연구조차 않고 있다.

 
▲  임존성(흑치상지,상여,도침,복신이 규합 사비성 재탈환을 시도한 본거지)


♢ 부안 우금산성 주류성 설

(상)편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부안의 우금 산성은 거의가 바다로 둘러 싸여있고 지리적 여건이 너무도 맞아 떨어져 대대로 구전으로 내려온 천년고찰 개암사에 얽힌 얘기며 왕이 살았다는 묘암골의 이궁터를 4k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석성이 병풍처럼 펼쳐 있다.  

또한 승 도침이 승장(僧將)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문헌상 개암사 묘련왕사의 사자라는 배경으로 왕족 출신인 복신과 함께 쌍벽을 이룬 백제부흥군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변산 이라는 특수한 지형지세에 800여개의 수많은 사찰이 있어 불교가 민간신앙의 주를 이루니 도침은 이들의 우두머리로 지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누구나 우금산성을 답사하게 되면 과연 백제최후의 결전장이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주류성의 구비조건으로는 복신굴이 있고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달래기 위해 수도했다는 원효방이 있으며 산은 높고 험하며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등등의 조건이 갖춰진 성이다.

또한 피성으로 이웃에 인접한 김제 성산토성이 백제 것이며 벽골제로 인한 군량미를 원활하게 공급 받을 수 있는 평야와, 이웃 고부의 고사비성이 인접해 있어 구비조건에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다고 보겠다. 

 
▲ 주류성 함락 후 원효대사가 백제유민을 포용하기 위한 우금암 원효방 기도처

 
♢동양 초유의 국제전(나, 당, 왜, 백제)

초기의 백제 의자왕은 해동증자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효심과 지덕을 갖춘 왕으로써 신라의 주요 7성을 포함한 46개 성을 점령하니 정치와 군사전략에 어둡고 나약한 신라의 선덕여왕은 위기에 몰려 나라는 풍전등화 격이었다.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나라를 구하고저 무능한 여왕을 탄핵하니 모반죄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손에 죽게 된다.

우연일치인지는 몰라도 같은 해에 선덕여왕도 죽게 된다. 실권을 잡은 김춘추, 김유신은 여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뒤를 이어 진성여왕을 내세웠으나 이마저 오래지 않아 죽게 되니 김춘추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 재빨리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기 전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국에 건너가 백제의 침범을 막아달라는 외교정책을 써봤지만 허사였다. 김춘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당나라에 건너가 백제를 먼저 치게 되면 당이 원하는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회유에 당 고종는 흔쾌히 약조를 하고 드디어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로써 백제는 예상치 못한 비운을 맞게 된다. 
 
 
♢ 소정방의 13만 대군 사비성 함락

소정방은 당나라 내주를 출발 1,900척의 대 선단에 13만 대군을 이끌고 서기 660년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기착한다. 신라 金法敏(김춘추의 아들 문무왕)과 7월 10일 합류하기로 했으나 7월 9일 당군은 일방적으로 남하하여 금강하류를 거슬러 사비성을 포위하고, 뭍에서는 김유신이 거느리는 신라군 5만 병력은 탄현을 거처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5,000의 결사대와 싸워 승리한 후 사비성 즉 부여를 나,당 연합군이 공격하여 7월 18일 불과 1개월 만에 함락을 하고 만다.


▲ 내소사(來蘇寺)줄포만과 인접한 부안의 대표적인 절로  소정방이 왔다는 설이 있음  

 
♢ 백제부흥군 사비성 역공격

의자왕을 사로잡아 소정방과 김춘추 앞에 무릎을 꿇려 술을 따르게 하는 수모를 당함은 물론, 두 왕자와 귀족 등 12,000명이 넘는 백성들은 포로로 당에 끌려간다. 나당 연합군이 승전에 도취된 틈새를 이용하여 임존성의 흑치상지, 상여, 복신, 승 도침은 백제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당군이 포진하고 있는 사비성을 역공하여 군수물자공급을 차단하니 수세에 몰린 당군은 인육을 먹는 등 위기에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위기에 처한 唐將(당장) 유인원을 구하고저 또 다시 당은 유인궤(劉仁軌)를 파견하여 신라군과 연합하여 평정을 하게 된다. 강력한 임존성도 위태하게 되니 흩어진 백제 유민들은 금강을 건너 남하, 부안 변산의 주류성으로 몰려들어 3년간의 끈질긴 부흥운동을 벌이게 된다.
 
♢ 풍장왕이 상륙한 백촌강

서기 660년 10월 복신과 도침은 함락당한 사비성을 뒤로하고 백제국의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의자왕의 아우 귀지(貴智)를 왜에 보내어 왜에 있는 왕자 풍장(豊璋)을 다음해 9월에 귀국시킨다.

의자왕의 누이라고 하는 왜의 제명천황은 친정 나라 백제국이 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자 풍에게 5천의 응원군을 딸려 보낸다. 사비성과 금강은 나,당 연합군의 재탈환으로 삼엄한 경계가 있어 근접도 못하므로 그들의 눈을 피해 변산반도 지벌포(계화도)를 거처 백강(동진강)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백촌강(동진강 상류)에 도달하니 복신, 도침 등이 맞아들여 주류성(우금산성)에 입성, 3년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어간다.

 
▲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항거한 동학농민군이 포진한 백제의 백산토성과 만석보 동진강(백강) 일대  당시 바다였던 이곳을 통하여 풍왕을 주류성에 맞아 들임.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죽음

서기 661년 2월 유인원과 유진당군이 사비성에서 백제군에게 포위당하자 태종무열왕(김춘추)은 군사 5만을 김품일에게 주어 당장 유인궤와 함께 백제 잔당을 격퇴시키고 사비성의 숨통을 트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잔당들이 몰려있는 주류성을 함락 시킬 요량으로 김춘추는 36일 동안 밤낮을 모르고 주류성 공격을 시도 했으나 고사비성(고부), 두량윤성(사산토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늪지대를 건너 주류성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한 요새지로 함락은커녕 기습을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는 등 군량미 부족으로 퇴각하고 만다.

김춘추는 주류성 함락을 보지 못한 한을 품은 채 제위 7년 만인 서기661년 금성(경주)으로 퇴군하여 그 해에 병사한다.   

 
▲ 김춘추가 36주야로 주류성을 침공했으나  패퇴한 백촌강 (동진강) 중류 일대

 
♢ 도침을 죽인 복신

서기 662년 2월 왜로부터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급 받게 된 풍왕은 나,당 연합군의 재침에 대비한다. 그러나 백강구 전투에서 패하여 수세에 몰린 도침과 풍장왕은 백제유민과 부흥군을 살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며 위성분봉 왕으로 봉하여 통치권을 주겠다는 당군의 회유에 도침과 풍장왕과의 협상을 알아챈 복신은 도침을 단칼에 죽이고 복신은 더 이상 나약한 풍왕의 지시를 받지 않으려고 우금암 굴실에서 병을 핑계하여 별거 생활을 하게 된다.

복신은 풍왕이 문병을 오게 되면 풍왕을 죽이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복신 장군이 살았다는 우금암 굴실은 지금도 현존하고 있으며 우금암 굴실을 일명 복신굴이라고도 부른다.

 
▲ 개암사(開岩寺)- 절 뒤 오른쪽 큰 바위가 복신이 우거한 복신굴과 원효방이 있음

 
♢ 복신을 죽인 풍장왕

복신은 풍왕과의 암투로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 일명 복신굴을 무대로 휘하 장병과 함께 병을 핑계로 우거를 한다. 풍왕은 상징적인 왕으로 추대한 왕이었을 뿐 복신은 백제유민과 부흥군의 탁월한 장수로 총지휘권을 가진 왕족출신이었다.

복신은 더 이상 풍왕의 나약함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풍왕을 제거하려는 결심으로 병문안을 오는 풍왕을 죽일 계획이었으나 풍왕이 이를  먼저 알고 자객을 보내어 복신을 죽인다. 외적보다 자중지란의 내분이 얼마나 무섭다는 교훈을 준다. 두 장수를 잃은 풍장과 백제부흥군은 사기를 잃고 허둥대며 나당 연합군에 밀려 전의를 상실한 채 패망을 자초하게 된다.

 
▲ 우금암(遇金岩)-주류성 함락후 김유신,소정방이 만났다는 바위

 
♢ 주류성 함락

당나라 유인궤는 부여융(의지왕의 장자)을 선봉장으로 앞세워 170척의 선단과 김유신,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 5만의 육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공격, 지벌포(계화도)를 거처 백강(동진강 두포천)주변에 진을 친다.

풍왕과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는 400척의 대 선단을 대진(大陣)터(상서면 돼지터=왜지터) 고잔 목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서 접전을 하게 되는데 왜군은 당의 수군을 얏 잡아 선재공격을 하다가 조수 간만의 차를 몰라 물이 빠지니 왜선 400척은 오도 가도 못하고 못이 박힌 것처럼 갯벌에 정체되니 나, 당 연합군은 협공으로 불화살을 쏘아 몰살을 시킨다.

 
▲ 지벌포(계화도)- 왜선 400척과 유인궤의 170척이 지벌포를 거쳐야만 동진강, 주류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전의 계화도 포구의 모습

 
부흥군의 패색이 짙으니 풍장왕은 위도 왕등도를 거쳐 고구려로 망명을 한다. 이로써 백제부흥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은 663년 9월 7일 최후를 맞게 된다. 

흑지상지 부자는 항복을 하여 훗날 당나라 측천황후의 휘하 장수가 되기도 하고 패망한 백제 잔존 부흥군은 빈골량(태인)을 거쳐 전남 보성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망명 정착하여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이들이 일본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 일본 규슈 인과 백제 주류성

필자는 일본 규슈지방을 2회에 걸쳐 답사한바 있다. 북 규슈 태제부 성을 백제망명 유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테제부성은 부안의 우금산성의 축성법과 흡사하다.

故 강성채 애향운동본부장 주최로 1993년 5월 8일 일본 대곡 대학 鄭早苗 교수, 田中俊眀 (堺女子대학)교수 및 국내의 유수한 역사학자 원광대 전영래, 나종우 교수, 동국대 이기동, 공주대 윤용혁 교수 등을 초청하여 처음으로 국제세미나를 부안에서 벌인바 있다.

이들은 부안의 우금산성을 현지 답사한바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할 바 없다며 일본교수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백제응원군으로 와서 죽은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우금산성에 위령탑을 건립하기를 원한바있다.

일본 규슈와 현해탄을 건너 부여 금강,부소산과 변산반도 주류성을 잇는 사적지를 연계한 역사교류 패키지 관광 상품화를 한다면 한,일 간 우호는 물론 명물이 될 것으로 본다.

 
▲  왜선 400척과 당의 유인궤의 170척,신라 5만군이 싸웠던 상서 목포 앞바다 (보리논은 예전에 바다였음)배를 매었던 배매 돌, 멀리 보이는 산이 주류성

 
▲  구마모토성(熊本城)-임진왜란의 선봉장인‘가토 기요마사’가 7년에 걸친 대 역작 1607년 완공함. 부소산성은 강과 주류성은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을 이용한 반면 구마모토성은 해자를 판 유럽식성

 
♢ 왜(倭)의 문화를 발전시킨 백제인.

왜와 국교를 맺은 4세기 초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는 일본(왜)에 건너가 ‘오오진 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王仁)박사는 한자를 보급하고 가르쳐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꽃피웠다.

왜와 백제 두 나라는 끈끈한 상국 내지는 형제국으로 응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제가 패망하여 백제유민들은 당나라에 끌려가기도 하고 흑치상지 같은 장수는 항복하여 당의 장수가 되기도 했다.

또한 부류는 고구려로, 왜의 규슈지방에 대거 망명하여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고 백제의 앞선 문화를 왜에게 전수하는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본국에 남은 백제인은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어린아이까지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포악한 이들에게 어차피 죽을 몸 나라를 위해 싸워서 죽자고 부흥군의 수장인 福信을 따라 최후의 주류성전투를 벌인 것이다. 패망한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에 망명을 한 기록이 있다.

그 후 왜는 백제유민과 함께 신라를 괴롭혔으며 조선조에 들어서 1592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을 일으켰는데 천년 전 일본에 망명한 백제유민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이 참전하여 동족을 죽이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 부안 주류성의 밀접한 자료와 지명

첫 번째로 주류성 내에는 풍왕이 안주한 모련사 터 안에는 백제 와편과 임시 궁궐터와 수 만평의 넓은 둔병터가 있으며, 군사가 먹을 수 있는 규모의 우물도 발견되었다.

둘째: 충청권에서는 볼 수 없는 복신굴과 원효굴이 있다는 점.

세 번째: 묘련왕사와 도침과의 관계되는 천년고찰인 백제 때의 사찰인 개암사가 있다.

네 번째: 산이 험하고 성안이 척박하여 곡식을 재배 할 수 없다.

다섯 번째: 주류성 입구에 승전의 표시로 오래된 김유신 사당(흥무왕)이 건립되어 1482년 성종대왕13년 사패지 기록이 있다.(성종대왕전교 왈 흥무왕 김유신 자손호재부...중략)

여섯 번째: 1667년 개암사 주지 밀영대사(密英大師)가 기록한 별기(別記)에는(원효방 상량문 묘련지사 도침 흥무왕 종자 복신...중략)왜병400척이 원정을 와 패했다는 상세한 기록물이 나와 증거 해주고 있다. 또한 신라의 28장군이 백제 주류성 부흥군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상서면 장패평에는 지금도 그 무덤 터가 전해지고 있다.

일곱 번째: 피성인 김제 성산 토성과 벽골제, 오방성의 하나인 중방성으로 고사비성(정읍고부) 등이 부안 주류성과 가장 가깝게 연계하고 있다. 기타 주류성을 증거 할만한 백강(동진강), 지벌포(계화도), 돼지터(왜진터=대진터) 등 주류성에 나오는 지명 등 지형적인 자료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류성이 부안지방임을 입증 해주고 있다.

 
▲ 김춘추가 몰고 온 신라 28장군의 무덤이라는 상서 감교소재 장패평(將敗坪) 무덤

 
♢ 개암사 묘련사와 도침의 관계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35년(서기634년)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개암사로, 울금바위 건너 묘암골에는 묘련사 라는 양대 절을 증수하게 된다. 묘련왕사의 제자인 도침을 이곳에 불러들여 僧將으로 삼아 복신과 풍왕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치게 한 이궁터로 전해지고 있다.

흑치상지 장군의 임존성이 위태하게 되니 백제 유민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3년간 최후의 결전을 벌인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결전장 ‘주류성’이 이곳임을 증명해주는 사찰이라고 보겠다.

변산에는 800여 사찰이 있어 불교로 호국하는 승병으로 무장하여 민과 함께 거세게 항거 한 것으로 보겠다. 주류성 함락 후 신라의 명승 원효대사가 백제 유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와 수도하며 살았다는 원효굴이 있고 야단법석을 세워 설법을 전했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변한(卞韓)의 文王 도읍지였다고 하는데 백제 분서왕 때 백제 땅으로 합류시켜 왕의 별궁으로 평화시에는 경치 좋은 변산을 유람한 휴양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 부안 주류성 답사 기사

1980.3.22 방인철 기자 주류성설, 1980.4.15 明大신문 노도양 교수의 주류성은 부안 위금암으로 밝혀져, 1980.5.15 조선일보 주류성은 부안에 있었다-김덕형기자, 1980.5.25 일요신문 한산설 통념 뒤엎고 새주장-고광식기자, 1981.7.12 주간중앙 나당연합군과 격전벌인 울금바위-김인휴 여행가, 1979.6.23 전북신문 부안주류성-백남혁 기자, 1980.3.20 전북신문-신규호 방송평론가 부안주류성설을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KBS 역사스페셜 역시 수차례에 걸쳐 주류성이 부안 우금산성으로 비정한 방영을 한바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변산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 할뿐만 아니라 소 천엽 속 같이 골이 깊어 변산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3년간 항전의 본거지로 삼을 수 있는 충분한 지역이다. 

 
▲  개암사(백제 무왕35년 도침의 스승 묘련대사가 변한의 궁전을 사찰로 개축)

 
▲ 변산 8경중 제1경 직소폭포-예나 지금이나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주류성 학술 발표회

주류성 바로 찾기 비정에 대한 충청권의 향토사학가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1993년5월 8일 한,일 국제 학술 세미나(주최: 부안애향운동 본부장 강성채)를 열게 되었다.
그 뒤 한동안 침체되었는데 한식 前. 애향운동본부장, 이영택 바르게살기회장, 필자 등이 모여 2007.10.30 ‘주류성과 백강은 전북 부안지방이다’ 추진운동본부를 설립하여 학술 발표회(허경오-추진운동 본부장)를 열게 되었다.

현재 충청권의 향토사학가나 사학자들은 한산, 홍성, 연기 지방의 주류성설은 개연성 부족으로 부안 주류성 설에 위임할 단계에 이르고 있다. 부안주류성추진운동 본부에서는 주류성자료 홍보책자 배포와 현지답사 안내와 매년 학술 발표회를 열어 민, 관이 힘을 합하여 부안 주류성설을 굳혀가겠다는 계획이다.    

 
▲ 부안 서림공원 성황산- 소정방이 올라왔다는 일명 上蘇山 성황사 일주문과 필자

 
♢ 맺는 말

130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제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을 비정조차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는 부안 주류성과 인접한 내변산 입구에서 6대에 걸쳐 선대로부터 물려준 수 백 년 된 집터에서 줄 곳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개암사 묘암골에 왕이 살았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부안 지방은 유천도요지와 패총과 남방식 구암리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고 해상무역을 할 때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격포 채석강변의 ‘수성당’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부안지방이 상고시대로부터 면면히 독특한 문화를 이어온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수성당에는 백제 복신장군을 추모하는 그림 탱화 한점이 걸려 있어 복신장군이 부안변산반도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미루어 볼 수도 있다.  

 
▲  격포 수성당 -해상의 안녕을 비는 개양할미와 8女그림과 복신장군의 탱화가 모셔 있음

 
때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한 것은 이도학 박사가 주류성 등에 관한 백제역사를 연구한 ‘백제사’를 펴냈고 충청도가 고향인 김영관 박사가 ‘백제부흥운동 연구’ 저서에 부안지방의 주류성이 백제의 부흥운동의 결전장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책자를 펴내어 화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북지방 최진성,주 명준 교수 등 한,일간 많은 학자들이 백제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최근에 동학의 발원지인 고부의 금사동 산성을 사적지로 상정하였는데 이와 연계된 주성인 부안의 우금산성(지방기념물20호)은 당연히 사적지로 지정돼야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백제최후의 결전장인 주류성의 진실이 하루속히 밝혀져 후손들에게 호국충정의 혼을 면면히 이어갈 수 있는 정신도장이 되었으면 한다. 

▽ 송기옥 프로필 

수필가 ,전북 문인협회회원(현)
새만금추진협의회 공동대표(현)
주류성,백강 바로찾기 부회장(현)
K.B.S 군산방송 리포터 역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제휴/pluskorea ]
기사입력: 2008/05/08 [15:01]  최종편집: ⓒ 뉴스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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