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대륙 백제설

吾心竹--오심죽-- 2009. 1. 14. 12:26

진시황의 장성은 황하를 넘지 않았다!!
하북성 창려의 갈석산은 원래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에 존재했다
 
성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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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갈석산은 산서성과 하북성 경계에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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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이 있는 곳에서 한나라의 낙랑군을 찾아야 한다. 사서의 기록과는 다르게 일제의 조작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 낙랑과 갈석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 내용은 갈석산과 낙랑군을 절대 한반도로 가져올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것이다. 

(고대의 갈석산(碣石山)을 찾아서) (1)
민족사학자 오재성 선생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 내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의미는 경계지역에 있는 경계석, 즉 경계산을 갈석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갈석이 여러군데 있었다 한다. 이 갈석산의 위치는 한사군의 낙랑군의 위치와 연관이 있어 우리 고대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하겠다. 이일봉선생의 저서 실증 한단고기 내용을 참고하여 재구성 해보았다.

① 현재의 갈석산
하북성 난하 서쪽에 있는 국사청문회시 고 임승국 교수가 주장한 갈석산을 말한다.

② 고대의 갈석산 (1)
산서성 북평(北平 지금의 부평) 인근 항산(恒山)근처 즉 지금의 백석산으로 추정

③ 고대의 갈석산 (2)
또 하나의 갈석은 산동성 황하 하류에 있었다고 한다

이 "갈석산"을 찾으면 단군조선의 강역이 습수와 함께 찾아질 수 있다.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이론은 한반도의 황해도 수안이 낙랑군의 수성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황해도 수안은 절대 수성현이 될 수 없다. 즉 낙랑군을 한반도로 절대 가지고 올수가 없음은 사서가 증명해준다 하겠다.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서의 근거도 없으며, 또한 사서를 보지도 않고 스승인 이병도의 혓바닥 만을 따르는 자들로 매국적인 식민사학이라 하겠다.

② 고대의 갈석산 (1)
산서성 북평(北平 지금의 부평)인근인 "항산(恒山)"근처 즉 지금의 "백석산"으로 추정한다. (115도/39도) 중국의 정사인  "사기" 색은(索隱)에 의하면 갈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갈석산은 두곳이다.  갈석산을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당시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지리지에는 갈석산이 북평 여성현 서남에 있다고 말한다.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말한다". 먼저 현재 중국지형도 상에서 지도를 살펴보면,

(중국 지형도)
▲   고대의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의 갈석산이 아니라 산서성 태행산맥의 백석산으로 가야 한다.

(1번) 진시황의 장성 종료 부분 (정정될 부분 : 황하에서 끝난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종료 부분이고,  그 오른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 물론 윗부분의 장성은 명나라까지 후대에 구축한 부분이다.

(2) 고 "습수" = 현재 상간하(상건하)
고조선의 "습수"가 시작되는 강 어귀이다. 진장성이 종료되는 시점에서부터 발원하여 북경인근 영정하를 거쳐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고대의 조선의 "열수"이다

(3) 항산, 오대산
"항산"과 "태행산"의 이름을 따 태항산맥이 되었고, 후에 "태행산맥"이 된다. 이 항산이 바로 고대의 상산이다. 아래 고지도가 설명해 준다. 상산 구문현의 갈석산이 백석산 인지 태백산 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여기는 성을 쌓을수 없을 정도로 고산지대이다. 오대산이 해발 3,058m이고 항산은 2,015m 이다. 이 오대산에서 나오는 물이 "보수"이다. 보살 살 "살수",  살수는  이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4) 고 "북평(北平)" = 현재 부평(阜平)
고구려 모본왕이 평정한 북평, 태원, 어양, 상곡에 나오는 그 북평이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모본왕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맥을 따라 있는 국경지역을 한나라가 침범하니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응징해 태원까지 쳐들어 간 것이다. 이를 두고 매국식민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명확히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거기까지 갔을 리가 없다"고 한다. 사서의 기록도 부정하는가? 언제까지 이런 거짓말을 계속 하려는가?

고대 북평은 현재 북경이 아니다. 현재 북평은 나중에(명나라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5) 백석산 = 고대 "갈석산"으로 추정된다

(6) "수성현"의 그 "수성"으로 보인다

(7) 고대 "석문" = 현재 "석가장"
"석문" 접 "대방"으로 석문과 대방과 낙랑은 인근에 접하여 있었다

(8)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에 있는 "갈석산"
이 갈석산이 어떻게 한반도로 올수 있으며, 여기에 있던 낙랑이 어떻게 한반도로 올수 있는가?


▲  현 한국의 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는 사서의 가록보다 훨씬 동쪽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의 이론이다. 해방 63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이론이 안 바뀌고 있으니 아직도 사학계는 일제치하이다.

(중국 고지도 상 "북평")
현재 "북경 = 북평"이 된 것은 명나라 이후의 일로 고대의 북평은 현재의 "부평"으로 지명이 변경된 것이다

(우적도 상의 북평, 태원)



("송본지리지장도"상의 "북평", "태원")



(북경대 출판 중국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의 "진장성") - 역시 황하에서 끝난다.




북경대 교재에 표시되어있는  "진장성"이다.
자기들도 진장성이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였다고 표시하고 있고, 정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 구역수령도(九域守令圖)상의 수성)



(고대의 갈석산(碣石山)을 찾아서(2))
"사기"와 "진서"에 의하면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 상산(常山) = 항산 = 인근 "갈석산"

(고대의 갈석산 관련 고지도)
고지도에서 상산(常山)을 확인해 보자
고대의 갈석산은 상산(=항산) 인근 구문현에 존재하였다



- 지도상에 "상산"이 보인다




위로부터
(1) 태행산(太行山) : 산이름
(2) 상산(常山) : 산이름 우측에 "갈석산"이 있다
(3) 정(定) : 지명이다
(4) 대륙(大陸) : 지명이다
(5) 구하(九河) : 아래 지도를 보면 아홉줄기가 모여 "구하"가 되어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위 지도에서 보았다시피, "사기"와 "진서"에 의한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있는 갈석산이 어디에 있었겠는지?
상산, 수안, 북평이 있는 곳에 갈석산이 있었다. 그곳은 "태백산"과 "백석산"중 "백석산"일 가능성이 높다. 황해도 수안이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다.

대륙고려 김용무선생이 소개한 중국 "고금지명대사전" 상의 길석산을 소개한다.

▒ 중국지명사전 1110쪽에 나타난 갈석산 기록
(1) 갑 ; 지금의 직예성 창려현 동남
(2) 을 : (한서지리지) 우북평 여성현 - 지금의 직예성 낙정현
(3) 병 : 지금의 직예성 고성현
(4) 정 : 지금의 경조(京兆=북경) 대흥현 서남

(5) 무 : 사기 색은
- 태강지지. 낙랑 수성현유갈석. 장성소기 (太康地誌 樂浪 遂城縣有碣石.長城所起)
  (뜻) 태강지지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써 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
- 차재금조선경 (此在今朝鮮境)
  (뜻) 이곳은 지금의 조선 지경이다.

(김용무선생의 주)
이 대목의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해석해 보면, "낙랑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 =조선지경"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일본이 역사를 날조하니까 짝짜궁한 1920년대에 만들어진 중국 지명 사전 편찬자들, 날조를 하다 보니 제 발등을 찍은 소리가 들린다.

(a) 낙랑은 평안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에 있고,
(b)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은 조선의 땅이라는 말이 되니,

제 발등 찍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과연 진실을 말하였나 ? ! ---> 보충설명을 하자면,
만리장성은 하북성 산해관에서 끝나며 동북쪽으로 고구려 천리장성이 이어진다. 그러니 당연히 조선 땅이다.

(6) 기 : 지금의 열하 능원현
(7) 경 : 지금의 북평 노령현
(8) 신 : 지금의 산동성 무예현

(원문)



그런데도 민족반역자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고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그이유가 낙랑군 수성현과 황해도 수안의 첫 글자 즉 "수"자가 같으므로 "여기가 거기인가봐?"라는 이병도의  말 한마디에 황해도 수안에 갈석산이 표시 되었다 한다. (위 내용은 국회 청문회 속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민족반역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이 그린 한사군의 위치도이다. 이 그림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혼)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한반도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은 반도사관에 의해 그려진 지도이다. 이 지도를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은 진실로 알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매국식민사학의 폐해가 이토록 깊다고 할 것이다. 
 
▲ 민족반역자 이병도가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에 의거한 지도. 가장 중요한 낙랑군과 수성현은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로 가야 하며, 고구려를 비롯한 한사군과 삼한이 모두 대륙 동부로 이동해야 한다.

[전남조은신문제휴/pluskorea ]
기사입력: 2008/09/09 [12:58]  최종편집: ⓒ 뉴스터치

 

 

 

 

적벽대전, 역사적 사실인가 허구인가?
삼국지연의는 동이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황당무계한 역사소설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적벽대전, 역사적 사실인가 허구인가?
(2부) 삼국지연의는 역사서인가 소설책인가?
(3부) 불태워 없애버려야 할 동묘의 관우상


현재 시중에서 ‘적벽대전’이라는 중국영화가 상영중이다. 제작비가 무려 800억이나 든 대작이라 하는데, 큰 문제는 거기에 한국 측에서도 상당액이 투자 되었다는 것이다. 나관중의 황당무계한 과대망상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儀)는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명나라가 만든 소설이었다. 그런 역사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한국인들이 돈을 댔다?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닌가?

우리의 정신(혼, 역사)을 말살하기 위해 중국에서 정책적으로 만든 소설에 우리 한국인들은 환호를 보내며 열광하고 또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주고, 심지어는 이런 허황된 영화에까지 큰 돈을 투자하는 무지함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없고, 황금만능주의에 눈이 멀었다 해도 그래도 그렇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나관중의 원작명은 삼국연의이며, 국내에는 삼국지연의 또는 삼국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연의는 한족이 동이족이었던 몽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침체되어 있던 한족의 사기를 북돋우고 자부심을 살리기 위해 명왕조가 정책적으로 만들어낸 동이족 역사말살소설이다. 그것도 모르고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우리는 삼국지연의를 최고의 역사소설로 알고 있다. 모두들 당시 대륙의 동부에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흔히들 “삼국지를 10번 읽지 않은 사람하고는 대화를 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한다. 공공기관의 필독서로 지정된 것은 물론, 만화로 제작되어 초등학생들에게 조차도 이 과대망상 소설이 수백만 국민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60여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위.촉.오’ 삼국이 대류의 서쪽에서 죽어라고 싸움질만 한 보잘 것 없는 역사를 마치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대망상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를 통해 배운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금권만능의 출세지향을 위한 중상모략과 부모도 몰라보는 배은망덕,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의 추악함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철학적 정신이 있고 사상이 있겠는가? 과대망상소설 삼국지연의 숭상 현상은 이 땅에서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며, 과대망상소설을 추종하며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정신을 죽이고 있는 소중화도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   적벽대전이 역사 속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고? 엄청난 부풀리기로 과대포장되어 있는 역사소설일 뿐이다.

삼국지연의 속의 적벽대전

<삼국지연의> 속의 당시 상황은, 208년 겨울 위나라 조조의 100만 대군이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침입했으나 ‘유비(5만) + 손권(5만)’의 연합군에게 적벽대전에서 패전하는데, 방통이 연환계를 써 조조의 배를 묶어두고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게 하여 화공으로 조조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조조가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벽대전이 있고 얼마 후 위나라가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또 공격해 온다는 것이다. 정말 중국 땅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이지? 100만 대군을 일순간에 잃고도 얼마 후 끄떡없이 다시 대군을 일으키는 조조의 괴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괴력이 아니라 소설속의 허구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참고로 실제 100만 대군을 동원한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패하자 민란과 반역이 일어나 망하게 된다. 하물며 통일제국인 수나라도 이러하거늘, 삼국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매번 패전만 하는 조조가 적벽에서 백만명을 한번에 죽이고도 끄떡없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삼국지연의는 황당무계한 허구의 소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가 황당무계 소설인 이유 중
첫째는 조조군은 100만 대군이 아니다.
정사인 <삼국지>에 나오는 인구수는 다음과 같다.
* 위 : 66만호 (인구 440만), 병력 20만~50만
* 오 : 52만호 (인구 230만), 병력 15만~20만
* 촉 : 28만호 (인구 94만),  병력 8만~12만
즉 조조의 20만 병력과 유비/손권의 연합군 10만의 싸움이었다.

둘째는 동남풍은 애초에 없었다.
<삼국지 위지>의 기록 : “적벽에 이르러 유비의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하였으며, 이때 역병이 크게 돌아 관리와 선비들이 많이 죽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지 촉지>의 기록 : “조공(조조)과 더불어 적벽에서 싸워 조조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고 그 배를 불태웠으며 유비와 오나라 군사들이 수륙 양쪽으로 추격을 하여 남군에 다다랐을 때 역병이 돌아 군사가 많이 죽어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역병이 돌아 조조의 군사가 돌아간 것이지, 동남풍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위.오.촉 삼국은 후한이 망하고 진(晋)으로 통일되기 전에 잠시 존재한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60년도 존속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나라였으며, 60년 동안 중상모략과 전쟁만 일삼다 망해버린 하루살이(?) 집단인 것이다. 60년도 못 넘긴 나라를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는지? 

- 위(AD.220~265) : 45년
- 촉(AD.221~263) : 42년
- 오(AD.222~280) : 58년
   → 이게 무슨 나라인가?

위.오.촉 삼국을 우리 역사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 한  국 : 3,301년
- 배달국 : 1,565년
- 고조선 : 2,096년
- 고구려 :  705년 (북부여 합치면 900년)
- 백  제 :  678년
- 신  라 :  992년
- 고  려 :  475년
- 조  선 :  518년

나라 같지도 않은 3국이 60년 동안 죽어라 중상모략과 전쟁만 일삼은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겠다는 것인가? 더구나 삼국지연의는 명나라 나관중이 한족의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낸 허구의 소설책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일고 있는 황당무계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찬양하는 소리는 필자의 귀에는 광우병 걸린 소들의 울음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과연 그런지 근세조선 시대 학자인 기대승의 상소문을 보기로 하자. 

▲  강건너 붉은 암벽인 적벽이 보인다. 강폭이 이렇게 좁거늘, 여기서 백만대군이 싸웠다는 것은 허풍일 뿐이다.

삼국지연의에 대한 기대승의 상소문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중종 22∼선조 5)은 조선시대의 문인이며 서예가로,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峰)이고 본관은 행주이며 나주 출생이다. 퇴계 이황과 12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을 논했던 당대의 유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고봉집》15책,《논사록》,《주자문록》등이 있다.

조선조 선조 2년 당대의 석학 ‘기대승’이 임금께 올린 상소문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서토의 ‘삼국지연의’라는 황당한 소설책은
-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쓰여진 소설이고
-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고
-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나쁜 책이고
- 괴상하고 탄망(誕妄)하고, 괴벽(怪癖)한 것뿐이므로 임금이나 백성들이 가까이 하면 안되는 책이라 멀리할 것을 상소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년(1569년) 6월 20일>의 기록을 보면, 석강에서 <근사록>을 강하고 기대승과 윤근수 등이 역사를 공부하는 법을 논하다. 상이 문정전 석강에 나아갔다. 《근사록》 제2권을 진강하였다. 기대승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장필무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삼국지연의에 있다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천문·지리에 관한 책은 이전에는 숨겨졌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사기의 경우는 본래 실전되어서 뒤에 억측하기 어려운 것인데 부연하고 증익하여 매우 괴상하고 허탄하였습니다. 신이 뒤에 그 책을 보니 단연코 이는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칩니다.

위에서 우연히 한번 보셨으나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중의 내용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동승(董承)의 의대(衣帶) 속의 조서(詔書)라든가, 적벽(赤壁) 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각각 괴상하고 허탄한 일과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위에서 혹시 이 책의 근본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

이 책은 《초한연의(楚漢衍義)》 등과 같은 책일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종류가 하나뿐이 아닌데 모두가 의리를 심히 해치는 것들입니다. 시문·사화도 중하게 여기지 않는데, 더구나 《전등신화》나 《태평광기》와 같은 사람의 심지를 오도하는 책들이겠습니까. 위에서 무망함을 아시고 경계하시면 학문의 공부에 절실할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정사(正史)는 치란·존망에 관한 것이 모두 실려 있어서, 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갓 문자만을 보고 사적을 보지 않는다면 역시 해가 있습니다. 경서는 심오하여 이해가 어렵고, 사기는 사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경서는 싫어하고 사기를 좋아함은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유사(儒士)가 잡박하기는 쉽고 정미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전등신화》는 놀라우리만큼 저속하고 외설적인 책인데도 교서관이 재료를 사사로이 지급하여 각판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들은 모두 이를 마음 아파합니다. 그 판본을 제거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반 여염 사이에서는 다투어 서로 인쇄하여 보고 있으며 그 내용에는 남녀의 음행과 상도에 벗어나는 괴상하고 신기한 말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는 괴상하고 탄망함이 이와 같은데도 인출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자를 보면 모두가 평범한 이야기이고 괴벽한 것뿐입니다.

옛사람들은 ‘첫째는 도덕이라.’ 하였고, 또 ‘첫째는 대통이라.’ 하였습니다. 동자도 ‘육경의 과목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모두 폐기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자가 백성을 인도함에 있어 마땅히 바르지 않은 책은 금해야 합니다. 이는 그 해가 소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옛 임금 중에 가끔 사화를 좋아하고, 염려를 숭상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명한 군주가 천분이 매우 높으면 후세에 유전하는 시편이 있는데, 저 수 양제·진 후주 같은 이는 지나치게 유의하다가 마침내는 망국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인주(人主)가 사화에 전념한다는 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가 가운데에는 옛사람의 성정을 읊은 글이 있기는 하나, 역시 과장 잡란한 말이 있으니 위에서도 아셔야 할 일입니다. 우리 유자의 학문 가운데에는 정(程) 주(朱)의 논의가 매우 옳은데, 근래 중원으로부터 유포되는 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설문청의 《독서론》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이를 인출하고 있으나, 그의 의논도 역시 흠이 없지 않으니 배우는 자는 참고해 보는 자료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근래 배우는 자가 정주의 글은 심상히 여기고 새로 나온 책을 보기 좋아 하니 이 또한 해가 많습니다. 위에서는 아셔야 할 일입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기대승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소설 <삼국지연의>를 최고의 역사책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러와 조조의 백만대군을 불태운다는 것이 적벽대전의 하이라이트. 그러나 그건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 기대승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지연의의 엉터리 지리비정일 것이다. 대륙 서쪽에 있어야 할 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졌다든가 아니면 아예 삼국의 전쟁 지명이 정사와 다르게 표시된 것이었다. 이 말은 당시 대륙의 동쪽에 있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고의로 지워버렸단 말이다.

여하튼 석학인 기대승이 동이가 대륙서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분서갱유가 일어나 많은 역사왜곡이 있었단 말과 같은 것이다. 명나라의 속국인 근세조선의 고대사서에 대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세종, 세조, 성종을 거쳐 중종 때까지 지속된다. 이 사이에 우리의 찬란한 상고사가 적혀있던 고서적들은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감금당하고 불태워지게 되며 많은 역사왜곡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이라는 쿠데타로 시작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이씨왕조를 세웠지만 대의명분이 없었다. 고려의 수뇌부를 힘으로 제거할 수 있었으나 백성들과 관리/선비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게 되자 이성계는 강력한 외부의 힘을 끌어들인다. 그것이 바로 지극한 사대주의로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청한 것이었다. 마침 명나라는 오랜만에 한족이 대륙을 통치하게 되었다. 
 
한족이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漢)나라 이후 740년 만인 960년 송(宋)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송나라도 통일 168년 만인 1127년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두 황제(휘종과 흠종)가 동이족인 금나라에게 포로로 잡혀가 무릎을 꿇리는 수모를 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대륙이 둘로 갈라진다. 이후 역시 동이족인 몽고(원)의 지배를 받다가, 드디어 1368년에 명나라에 의해 한족에 의한 통일국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빨간 선은 송나라의 영토이고 남쪽 오렌지 부분은 남송의 영토이다. 북쪽은 금나라와 고려의 영토. 송나라 당시 금과 고려는 만주를 공유하고 있었다.  


한족은 24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200년 이상 눌려 살아온 한족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편으로 한족의 우수성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 도구로 이용한 것이 바로 삼국지연의, 수호전, 열국지 같은 민간 소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명나라는 그동안 선조들이 동이족들에게 지배받았던 분풀이를 마침 속국이 되겠다고 자청한 근세조선에게 되갚는다. 이성계에게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내린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그리고는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상고사의 온갖 역사왜곡을 자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분서갱유와 사문난적이 발생하는 것이다.

왜 하필 명나라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주었는지 우리는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기원전 상고시대에는 동이의 구리와 단군조선에게 하화족(夏華族)들이 기를 못 펴고 살았다. 그 분풀이를 하화족의 후손인 명나라가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국호를 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의 보복이였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상고사의 조상님들은 근세조선이라는 못난 후손을 두게 되어 보잘 것 없는 조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신 별 볼일 없었던 한족의 조상들은 명나라 덕분에 일약 The Greatest (가장 위대한) 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우리 조상의 모든 역사를 명나라 때 한족이 빼앗아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던 근세조선이 망하자 이번에는 일제라는 이민족이 36년간 이 땅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우리의 모든 조상님들은 허리가 잘리고 피투성이가 되고 만다. 그런데 광복 63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학이 그대로 판을 치고 있어 아직도 조상님들은 허리가 잘린 상태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신음하고 계시다. 그러나 이대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마 조상님께 올리는 제사까지 끊기게 될 지도 모른다.

(2부)에 계속됩니다.
[전남조은신문제휴사/
pluskorea]
기사입력: 2008/08/19 [11:23]  최종편집: ⓒ 뉴스터치

 

쿠데타로 본 대륙백제의 역사는?
<고구려사초.략>의 백제 기록과 <삼국사기>를 비교해 본 백제사는?
 
성훈 칼럼니스트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유난히 정변(쿠데타)이 자주 일어난 국가였다. 그 이유를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백제는 온조백제계와 비류백제계의 두 체제가 공존한 일국이체제의 나라로 온조계와 비류계가 항상 왕권을 놓고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조인 온조대왕이 형인 비류대왕을 죽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료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원래 왕통이란 아버지(부왕)로부터 아들(태자)로 넘어가면 정변이란 것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태자가 나타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뺏는 경우는 있으나 그런 패륜은 적장자인 경우에 있을 수 없고, 서자 출신이 적통을 제치고 왕이 되려고 할 때 간혹 이런 패륜이 있을 수는 있다.

백제는 시조 온조대왕의 건국 후 2대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초고왕--> 6대 구수왕까지는 왕통이 부자승계로 순조로이 이어져 즉 정치가 안정되어 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게 된다. 온조대왕 ~ 구수왕 사이에 정변이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사초.략>에는, “A.D 97년 백제에서는 용 둘이 한수에 나타났다고 한다. 사욱의 아들 계산이 사만을 죽이고 보위에 섰고 응묵은 막북으로 도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기루왕 21년(AD 97년) 용 두마리가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 이외에는 쿠데타가 일어나 보위가 바뀌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두 기록 중 어는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고이왕에 의한 쿠데타

초고왕의 맏아들인 6대 구수왕이 죽자 왕위가 구수왕의 아들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초고왕의 동생인 고이왕에게로 넘어간다. <고구려사초.략>에는 “A.D 234년 백제의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죽고 그의 아들 <사반>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더니, 초고왕의 동생 고이가 사반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보위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의 맏아들 사반이 위를 계승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해 나갈 수 없으므로 초고왕의 동모제인 고이가 즉위했다.”고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여 백제에서 왕위를 두고 뭔가 쿠데타(정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첫 쿠데타로 보인다. 구수왕의 아들인 7대 사반왕은 왕위에는 잠시 있었으나 일찍 축출 당하여 기록이 없다. 

비류왕의 등극은 어떻게?

이어 8대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으로 부자승계가 이어지다가 10대 분서왕 다음에는 구수왕의 2자인 비류왕이 즉위하게 된다. 분서왕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죽었고,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나중에 계왕)이 있었으나 모두 어리어 대를 잇게 할 수가 없어 비류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사초.략>에서는, A.D 304년 분서왕이 낙랑의 서도를 습격해 파하고 군으로 만들자, 낙랑왕의 신하인 자객이 여장을 하고 분서를 알현하니 분서왕이 그 미모에 빠져 수레 안으로 불러들이자 자객이 분서왕을 칼로 죽였고, 분서왕의 모후인 보과는 자신의 정부인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 다 비슷한 기록이나 11대 비류왕의 등극 과정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대왕은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A.D 344년 비류왕이 재위 4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이 왕으로 즉위한다. 당초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이 어리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가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계왕이 12대 왕으로 즉위하고, 계왕은 재위 3년 만에 죽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는데 <고구려사초.략>과 <삼국사기>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 철저한 식민사관으로 그려진 교과서의 근초고왕 때의 백제영토.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인 김성호선생은 온조계 근초고왕이 비류계 계왕을 죽이는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며, 이 계왕의 손자가 왜로 도망가 왜왕 응신이 된다는 이론을 편 적이 있다. 또한 백제는 온조계와 비류계가 서로 왕위를 두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정변이 삼국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은 계왕을 비류계로 보았으니 백제왕실의 혈통으로 보았을 때 10대 분서왕, 9대 책계왕, 8대 고이왕을 비류계로 본 것이다.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모제이니 고이왕과 초고왕의 부친이 서로 다르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기록상 초고왕의 고조부가 온조대왕이기 때문이다. 고이왕의 부친이 비류계이어야 이 이론이 성립하는데, 현재의 기록으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

여하튼 근초고대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연 영웅으로 대륙의 요서와 진평에 백제군을 설립하는 등 백제의 강역을 최대한 넓히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막강한 제왕이었다. 그런 근초고대왕의 위업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한반도에서 대륙에 진출하여 무역기지를 세웠다고 하며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위업을 축소시키고 있는 중이다. 

▲  위 지도는 최전성기인 백제 동성대왕 때의 영토로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의 영토도 거의 같을 것이다. 예로부터 요는 산서성 태행산맥 내의 있는 지명으로 서쪽 산악지대를 요서, 동부 평야지대를 요동이라 한다. 중국에서 요동이라 함은 현 하북성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진사왕은 조카 아신의 왕위를 빼앗았나?

13대 근초고대왕 이후 왕통은 아들인 14대 근구수왕과 아들인 15대 침류왕으로 이어진다.  A.D 385년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침류왕의 아우인 진사왕이 즉위하게 된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진사는 강하고 용맹하고 총기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도 있었다. 침류왕의 부인이 시동생인 진사를 매우 좋아 하여서 새 남편으로 삼더니 정사를 독차지하였고 자신의 아들 아신을 후사로 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죽으니 태자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사왕은 관미성이 광개토태왕에게 함락 당할 때 처인 가리와 함께 사냥하며 열흘 여를 지내면서 고구려가 물러나길 기다리다가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서 자빠지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가리가 침류의 아들인 아신을 보위에 오르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인 김성호선생은 왜에 있던 태자 아신(침류왕의 아들)이 비류계 계왕의 손자인 왜왕 응신과 결탁하여 숙부인 진사왕을 공격하고 진사왕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구원(S.O.S)을 청하고 자신은 사냥을 하던 중 죽었고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에게 빼앗긴 왕위를 다시 찾는다는 이론을 편 적이 있다.

또한 김성호선생은 해양대제국 백제와 왜의 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하면서, 그 백제의 대방을 황해도로 비정해 망국의 반도(식민)사관을 인정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만일 김성호선생의 이론적 무대가 역사적 사실처럼 대륙의 동부였다면 최고의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못하여 가설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  덕흥리 고분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 고국원왕~광개토태왕 시절의 각료였다. 그의 무덤에 그려진 13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벽화의 지명을 표시한 지도이다. 그 아래 산동반도가 백제의 영역이었다. 백제 아신왕과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무대는 대륙 동부 평야지대이다.  


아신왕의 막내아우에 의한 실패한 쿠데타

17대 아신왕이 죽자 이를 숨기고 발상하지 않은 채 아신왕의 둘째 아우가 정사를 대행하며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는데 아신왕의 막내아우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전지왕은 왜국에서 온 호위병과 함께 섬에서 기다린다. 나라사람들이 막내아우를 죽이고 전지왕을 맞아들인다고 두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아신왕의 막내아우인 설례의 실패한 쿠데타였다.

왜에 가있던 전지왕의 부인은 왜왕 인덕의 딸인 팔수부인으로 섬 중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분이 구이신왕이라고  <고구려사초.략>은 <삼국사기>에 없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19대 구이신왕이 죽고 20대 비유왕이 즉위한다.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자라고 못 박고 있다.

고구려 군에게 처형당하는 비운의 개로왕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비유왕 29년 봄 3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黑龍)이 한산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둡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맏아들 개로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장수대제 23년(455년) 기사에 장수제가 미천릉에 갔다가 거기서 가까운 <한산> 땅에서 사냥하고 있는 백제의 비유왕을 사로잡자는 신하의 제안에 장수제가 답하는 말 중의 일부분이다.

“비유는 전지가 제 며느리와 통해 낳은 자식이고, 개로는 비유가 해수의 처와 붙어서 난 자식이었는데, 비유의 처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서 개로를 데려다 길렀다. 비유가 여러 여자와 사통해 여러 아들을 두었다. 모두가 귀여움을 받더니만 서로 후사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에 비유의 처가 비유를 해치우고 개로를 세운 것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개로왕은 갑자기 죽은 비유왕의 장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개로왕의 양어머니가 친아버지(비유왕)를 죽이고 개로왕을 보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의 “흑룡(黑龍)이 한산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둡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는 기록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대로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21대 개로왕은 재위 중 바둑 고수로 위장한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전략) 성곽도 수축하지 않고, 궁실도 꾸미지 않고 ...(중략)... 백성의 집들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고 있으니...(후략)”라는 말에 현혹되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개로왕은 국민을 모두 동원시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굉장하고 화려하게 궁전을 짓는다.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嵩山)의 북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하수는 바로 황하를 의미하며, 숭산은 바로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이거나 산동성 숭산이지 서울 한강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백제 개로왕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숭산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이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으니 백제의 국고가 고갈된 것이고, 평야지대이다 보니 돌이 귀해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은 것이다.


최근 민족사학에 관심이 있는 일부 네티즌들이 숭산은 하남성 숭산이 아니라 산동성 숭산이라는 이론을 펼치고 있으나, 우선 산동성 숭산은 그 위치가 황하와 떨어진 곳이고 또한 작은 황하의 지류가 근처에 흐르고 있어 창고가 텅 빌 정도의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킬만한 이유가 없고 규모도 안되는 곳이다.

하남성 숭산은 정주(鄭州) 서쪽으로 낙양과 가깝게 있어 황하의 물줄기가 동부평야지대로 나오면서 자주 바뀌는 시발점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바다로 본 대야택으로 흘러 들어오는 황하의 물줄기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고 보아야 그 이치에 맞기 때문에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서쪽 끝은 하남성 숭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므로 산동성 숭산에 대해서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한성을 현 서울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울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지도 않으며, 또 성을 쌓더라도 돌을 쌓아 축성하지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을 지역이 아닌 것이다. 흙을 구워 벽돌로 축성을 하는 지역은 산이 없어 돌이 귀한 지역이며, 평야지대로 퇴적물이 많이 쌓이는 지역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돌이 귀한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헛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고구려의 장군 걸루는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는 왕의 면상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 꽁꽁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아차성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아차산(峨嵯山)이 아니라 산동성에 있었던 백제의 수도 근처에 있는 산으로 보아야 한다.

아차산성이 구리시에 있다 하면서 고구려의 도시를 표방하는 구리시청은 우선 제대로 된 고구려의 역사부터 배워야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이 처형당한 아차성(阿且城>을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아단성(阿旦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글자가 너무도 비슷해 분명 어느 하나는 오기일 것으로 본다. 

▲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걸쳐있는 아차산. 구리시는 아차산이 있다는 이유로 구리시가 고구려 도시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서에 나와 있는 고구려 아차산은 대륙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 역시 전 국민을 속이고 있는 식민사학계의 작품이다.
 

해구의 쿠데타로 죽은 문주왕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들 문주가 왕위를 계승하고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약간 다르게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475년 5월 고구려가 백제의 50여 성을 점령하니 문주가 자비에게로 도망을 쳤다. 10월 자비가 웅진의 땅을 문주에게 빌려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자 장수제가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만 오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라 말한다.

문주왕의 처 해씨는 혼인하기 이전부터 문주왕의 종형인 해구라는 자와 상통해왔고 정사를 함부로 주물렀다. 자신이 외톨이임을 알게 된 문주왕은 동생인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아들인 삼근(三斤)을 적윤으로 삼는다. 477년 7월 해씨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를 독살한다.

9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자 해구가 자신의 심복들을 시켜서 문주왕을 죽이나 자신이 보위에 오르지는 못하고 13살이던 삼근태자를 왕으로 세운다. 해구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직접 왕이 되는 대신에 자신의 딸을 삼근왕의 왕비로 보내고 모든 정사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478년 봄 좌평 해구가 연신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반역하였다. 삼근왕은 좌평 진남을 시켜 군사 2,000을 가느리고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다시 진로를 시켜 정병 500을 거느리고 해구를 격살케 하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였다. 그리고는 478년 11월 삼근왕이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나 약간 다르다. 진남이 위졸 2,500을 이끌고 쳤다.  진남의 조카인 진로가 날쌘 자 5인을 골라 수로(水路)로 성을 깨고 돌입하여 해구를 사로잡아 베어 죽였고, 연신의 처자를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였고 해구의 처는 내응해서 공을 세웠다하여 국대부인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삼근왕의 즉위와 동성대왕의 등극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근왕은 곤지의 처 진선을 첩으로 삼고, 곤지의 아들로 한살 아래인 모대(동성대왕)를 아들로 삼았다. 479년 11월 동성대왕은 즉위하고 나서 삼근왕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왕이 언제 죽었는지를 몰랐다. 동성왕은 삼근왕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맞아들인다고 기록함으로서 당시 뭔가 정변(쿠데타)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동성대왕과 무령대왕의 죽음

중국 남북조시대의 강자인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수차례 무참히 격파하고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모두 차지해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룬 동성대왕은 위사좌평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라고 명한다. 그러나 백가는 가기를 싫어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동성대왕이 허락지 않았다.

이로써 왕을 원망하더니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찌르게 하여 동성대왕이 죽고 무령대왕이 뒤를 이어 즉위한다. 대왕을 시해한 백가는 가림성을 점령하고 반역하므로 무령대왕이 토벌히니 백가가 항복하고 대왕은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백가가 동성대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무령대왕에게 제압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큰 영웅인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나이에 이렇듯 허망하게 부하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은 동성대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장수대제 다음 황제인 문자명제의 기록이 없어 이 <삼국사기>의 내용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  남북조시대의 최강국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동성대왕에게 무참히 패배한다. 남제서에 강시단야(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쌓여 들을 덮었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최강국 북위는 동부평야지대로 나오지 못하고 산악지대인 산서성 대동시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동성대왕이 임명한 7태수의 지명으로 보면 대륙동부평야지대는 백제의 강역이었다.


<일본서기>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이기는 하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많은 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연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히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삼근왕이 죽자 당시 왜에 있던 곤지의 5왕자 중 둘째 왕자인 말다(末多)가 젊고 총명함으로 백제의 왕(동성왕)이 되어 왜로부터 귀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을 인용해 무령왕의 출생을 기록하고 있는데, 간단히 말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25세 무열천황 4년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인(島人섬사람)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휘는 사마(斯麻)왕이고,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다.

여하튼 의혹이 많으나 공주의 무령왕릉의 지석에 나와 있는 무령왕의 나이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성대왕의 나이를 비교해 볼 때 무령대왕이 동성대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결정적인 사서의 증거가 하나 있다.

중국사서 중 남북조시대의 남조였던 송나라의 사서인 송서(宋書)의 기록으로, 478년 왜왕 무(武)가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내용으로 인해 무령대왕은 개로왕의 친자임이 밝혀진다. 상표문의 내용인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의 부형(父兄)은 475년 겨울 고구려 장수대제의 대군에게 7일간의 공격 끝에 한성이 함락당하고 붙잡혀 처형당한 백제의 개로왕과 왕자들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무령대왕은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후 백제의 중흥기를 이어간다. 그런 무령대왕의 릉이 한반도 공주에게 발견됨으로서, 식민사학계는 충청도 전라도 땅은 백제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을 기정사실화 해버리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철저히 이용한다. 그러나 무령대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고 독살당해 시신이 한반도 공주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안원대제 5년(523년) 기록에 따르면,
사마(무령대왕)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성왕)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위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부인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령왕은 독살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측근들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무령왕이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인 한반도로 옮겨져 남의 나라 사람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다보니 감히 대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령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내용대로라면 무령왕이 한반도에 묻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 대왕의 존호가 아닌 휘(이름)인 사마로 적혀 있고,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소유권을 확실히 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무령대왕은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에 묻힌 것이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령대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32년(554년) 신라와의 전투에서 해를 입어 죽었다고 하며, 후의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사유가 확실치 않다. 게다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도 23대 안원대제 15년(545년)까지의 기록 밖에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일본서기>와 (백제신찬>에 의해 백제 성왕이 왜왕이 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보이나 충분히 일리 있는 이론으로 본다. 백제는 전성기를 연 근초고대왕 이후로 대륙에 남부에 있었던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신왕, 전지왕, 그리고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왕자, 동성대왕, 무령대왕, 의자왕 등은 일본의 전신인 왜왕실과 아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  일본의 법륭사에 있는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 겸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남조은신문제휴/pluskorea ]
기사입력: 2008/11/12 [18:47]  최종편집: ⓒ 뉴스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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